성명 | 박사화(朴士化) |
이명 | 박사과(朴士過), 박사홍(朴士弘) |
생몰 | 1880년 ~ 1912년 7월 5일 |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군 지양면 기촌리 |
사망지 | 광주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사화는 1880년생이며 전라남도 나주군 지양면 기촌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 2월 전남 함평군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남일 의병장의 중군장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3월 강진에서 심남일의 지휘하에 일본군 수백명과 접전을 벌여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이후 그는 의병대와 함께 남평, 능주, 영암, 나주, 장흥, 해남 등지에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했으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친일 밀정과 관료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1909년 가을까지 나주, 영산, 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했다.그러나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감행하자, 박사화는 군세가 악화되어 의병 활동을 더이상 진행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1909년 7월 영산포 분대장 오하라 대위에게 편지를 보내 회견을 요청한 후, 부하들의 구명을 위해 자수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날 탈출해 전라남도 영암 부근에서 부하 50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9년 10월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0년 4월 13일 광주지청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상고했지만 5월 19일 공소취하로 형이 확정되었으며, 1912년 7월 5일 광주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박사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