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심수택(沈守澤) |
이명 | 심수택(沈秀澤) |
자 / 호 | 덕홍(德弘) / 남일(南一)[1] |
본관 | 청송 심씨[2] |
출생 | 1871년 2월 10일 |
전라도 함평현 대야면 신기리 (현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마을) | |
사망 | 1910년 10월 4일[3] (향년 39세) |
경상북도 대구부 대구감옥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8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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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 전라도 함평현 대야면 신기리(현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마을)에서 아버지 심의봉(沈宜奉, 1843 ~ 1911. 11. 29)과 어머니 진주 강씨(1840 ~ 1916. 1. 29) 강시현(姜始賢)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한문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대야면장, 함평향교 장의(掌議)·도의사(道議事) 등을 역임하고 또 서당의 훈장으로도 일하는 등 향반 노릇을 했다.그러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일이 벌어지자 의병만이 나라를 구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남일은 최익현처럼 명성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돈이 많지도 않았기에 1907년에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는 것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이 집단은 5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있어 호남 지역에서 가장 큰 의병세력이었다.
물론 일제는 의병부대들을 탄압하기 위해 각종 군사적 조치나 회유 등을 시도했고, 1908년에는 결국 여러 의병장들이 체포거나 전사해 호남창의회맹소도 해체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심남일은 다시 의병들을 모아 다른 의병부대를 창설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의병들에게 보여준 격고문은 다음과 같았다.
전국의 동포들은 다 같이 풍파를 만난 배를 탄 신세입니다. 그런즉 앉아서 고래 떼처럼 악독한 왜놈들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거로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쳐부순다면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은 오늘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건데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저더러 그러한 자격이 못 된다고 하지 말고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일을 치처 나간다면 천하만국이 또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
격고문을 보고 많은 군소 의병단체들이 심남일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는 일진회를 동원해 의병들을 수색하고, 대규모 부대를 투입해 의병부대를 진압한다. 결국 체포된 심남일은 광주감옥에서 심문을 받는다. 심문 중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 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다.
심남일은 체포된 지 1년만에 순국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사후 그의 유해는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70~27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