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41:07

안지호(독립운동가)

성명 안지호(安智鎬)
이명 안지호(安知鎬)
자 / 호 운익(雲翼) / 우봉(藕峯)
본관 순흥 안씨
생몰 1857년 12월 23일 ~ 1922년 10월 20일[1]
출생지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 풍화리
(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
사망지 부산형무소 마산분원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지호는 1857년 12월 23일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2]로 이주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이에 분노해 통감부와 일본 정부에 논책문(論責文)을 보냈다가 몇차례 구금되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만국공관(萬國公館)에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3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1919년 3월 각지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당시 함안군에서 한문교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조한휘(趙漢輝)·한종순·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3]·강기수(姜琪秀)·한관렬 등 함안군내 청년유지들의 배후 고문을 맡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연락했다. 이에 따라 3월 19일 정오부터 3천 명의 군중이 장터를 출발하여 경찰주재소·군청·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고, 도처에서 일본 군경과 충돌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후 안지호는 함안읍 독립만세시위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 마산분원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그는 죽기 전 '자위가(自慰歌)'를 지었다.
하늘이 덥고 땅이 시름이여! 이에 사람이 있도다.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심이여 나의 몸이 있도다.
인군이 있고 나라가 있음이여! 이에 이상(彛常)을 온전히 하리로다.
인군과 부모가 일체임이여! 만고에 큰 강령이라.
나 혼자 이 때 아닌 때 남이여! 몸도 용렬하고 재주도 어질지 못하다.
하늘이 나라를 돌아보지 않음이여! 차마 금수와 견양을 보겠는가?
난신역자가 다 후백(侯伯)이 됨이여! 슬프다 저 적과 같이 날뛴다.
인군의 원수를 갚지 못하니 신민의 큰 수치로다. 맹세코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지 않으리라.
죽으면 영화되고 살면 욕됨이여! 칠십 늙은이가 무엇을 경영할꼬?
다만 원컨대 일찍 지하에 돌아가 우리 인군을 보이고 자세히 아뢰리라.
이것으로 나의 마음을 결정하고 나의 정을 위로하여 큰 노래를 부르니 천지가 망망하도다.
자위가(自慰歌)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안지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2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019년 10월 17일, 안지호의 후손 안희주 씨가 안지호의 건국공로훈장을 함안박물관에 기증했다.#


[1] 1857년 9월 21일 태어나 1921년 12월 23일 별세했다는 기록도 있다.#[2]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3]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건병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