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09:01:05

서상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서상교
徐尙敎/徐相敎
파일:서상교.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字) 문보(文甫)
호(號) 목민(木民)
본관 달성 서씨[1]
출생 1923년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
사망 2018년 3월 13일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208호
부모 아버지 서정조(徐正祖), 어머니 밀양 변씨
자녀 2남 3녀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인적 사항2. 주요 활동3. 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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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적 사항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가 서상교(徐尙敎/徐相敎)는 부친 서정조(徐正祖)와 모친 밀양 변씨 사이의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자(字)는 문보(文甫), 호는 목민(木民)이며 『임재집』 등을 저술한 학자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의 후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서찬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독립유공자 서건수는 그의 종조부가 된다.

서상교는 경북대학교 IT대학 전기공학과 명예교수 서보혁(徐輔焃)관련 기사과 독립기념관 비상임이사 서보현(徐輔賢)관련 기사 등을 자녀로 두었다.

2. 주요 활동

대구 남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한 서상교는 1942년 4월에 일제가 강행한 창씨개명(創氏改名)신사참배(神社參拜), 그리고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게 하는 행각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친구 김상길(金相吉)·이상호(李相虎)와 일본의 민족 차별, 독립의 필연성, 전쟁의 전황 및 아시아 각 나라의 동향에 관해 논의한 서상교는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투쟁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태극기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단체를 '태극단'이라 명명했으며, 약칭으로는 'T·K·D'가 사용되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의지를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던 태극단은 김정진(金正鎭), 이준윤(李浚允), 이원현(李元鉉), 윤삼용(尹三龍), 이태원(李兌遠), 최두환(崔斗煥) 등을 비롯한 20여 명의 단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1943년 5월 9일, 그들은 대구의 앞산(비파산)에 모여 태극단의 결단식을 정식으로 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서상교 및 태극단의 단원들은 향후 이어질 투쟁의 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과 특수조직으로 나뉘었으며 일반조직의 경우 세부적으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 체육국(體育局), 과학국(科學局) 등 3국, 그 아래 군사부(軍事部), 항공부(航空部) 등의 10여부(部)를 두어 체계화되었다. 건아대(健兒隊)라 칭해졌던 특수조직은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보통학교)의 상급반 학생들 중 민족의식과 실천력, 그리고 책임감이 뛰어난 학생들을 육성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 유도 유단자였던 서상교는 등산부장과 무도부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하순경, 내부자의 밀고로 인해 단장 이상호가 대구경찰서의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는 과정에서 이상호의 거처에 숨겨두었던 태극단 관련 문서가 발각되었다. 결과적으로 태극단의 실체가 일본의 경찰에게 탄로나자 서상교는 학교에서 수업 도중 동료들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겪던 서상교는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을 구실로 징역 단기 5년과 장기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오랜 옥고를 치른 끝에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이하여 다음날인 16일에 출옥하게 되었다.

서상교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3. 주 참고 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구역사문화대전
공훈전자사료관



[1] 현감공 제(濟)파. 달성 서씨 25세 교(敎)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