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3년[1] 11월 7일 |
경상북도 대구부 시장정 357번지[2] (現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3] | |
사망 | 2018년 3월 13일 (향년 94세)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 |
본관 | 달성 서씨[4][5] |
창씨명 | 오오다치 쇼쿄(大達尙敎)[6] |
자(字) | 문보(文甫) |
호(號) | 목민(木民) |
학력 | 대구남산정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공립상업학교 (명예졸업) |
부모 | 아버지 서정조, 어머니 밀양 변씨 |
자녀 | 슬하 2남 3녀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208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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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字)는 문보(文甫), 호는 목민(木民)이다.2. 생애
1923년 11월 7일 경상북도 대구부 시장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357번지에서 아버지 술헌(述軒) 서정조(徐正朝, 1903 ~ 1950.12.14)[7]와 모친 밀양 변씨(密陽 卞氏)[8]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서상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 1568 ~ 1645)[9]의 13대손으로, 고조부는 구한말 영남지방의 이름난 유학자였던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1.17 ~ 1905.1.22)[10]이다. 첫째 종증조부 금산(琴山) 서진목(徐鎭穆, 1860 ~ 1888.8)[11]은 1888년(고종 25) 식년 생원시에 1등 1위, 즉 장원으로 입격한 유림이었고, 조부 하정(荷亭) 서갑수(徐甲洙, 1874 ~ 1910.5.3)[12] 또한 1894년(고종 31) 식년 생원시에 3등 145위로 입격한 유림이었다. 종조부 서건수는 독립유공자로서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137명 중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서정조는 임재 서찬규의 장증손자이자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부 지역의 부호로서, 교남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1924년 출생지에서 400m 가량 떨어진 대구부 남산정[13] 407번지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고, 대구남산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이 시절에는 대구부 덕산정[14] 182번지에 거주하였다.
2.1. 독립운동
대구공립상업학교 5학년이던 서상교는 평소 창씨개명,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강요 등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1942년 5월,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이상호(李相虎), 대구공립상업학교 5학년 김상길(金相吉)과 함께 일본 제국의 조선 민족 차별, 조선 독립의 필연성, 태평양 전쟁의 전황, 아시아 각 나라의 동향에 관하여 논의한 뒤 항일 학생단체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단체의 이름은 태극기를 본따 지어졌고, 단체의 약칭으로 'T.K.D'를 사용했다. 이들은 1942년부터 '우리 청소년들의 일본군 입대 기피 및 침략전쟁에 대한 비협력으로 독립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나라를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호소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대구부 외곽 지역에 배포하였고, 이후에는 이를 더 발전시켜 단원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1943년 4월에 대구공립상업학교 5학년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이원현(李元鉉), 대구공립공업학교 2학년 윤삼룡(尹三龍) 등 4명을 단원으로 포섭할 수 있었고, 뒤이어 대구공립상업학교 3학년 이태원(李兌遠),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정광해(鄭光海)·정환진(鄭晥鎭), 경북중학교 2학년 최두환(崔斗煥)을 비롯하여 대구공립상업학교 5학년생 1명, 4학년생 4명, 3학년생 4명, 2학년생 1명, 1학년생 5명을 준단원 및 건아대원으로 포섭할 수 있었다.1943년 5월 9일, 단원 모두를 인솔하여 대구부 대명동[15] 앞산 안일암(安逸庵) 약수터에 모여 정식으로 태극단의 결단식(結團式)을 가진 뒤 태극단의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해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을 크게 일반조직 및 특수조직으로 나누었고, 최고 의결기관인 간부회의를 구성했다. 일반조직은 세부적으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 체육국(體育局), 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 아래 군사부(軍事部), 항공부(航空部) 등의 10여 부(部)를 두어 체계화하였다. 또한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 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들을 대원으로 가입시킨 뒤 민족의식과 실천력, 책임감이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 이들을 장차 태극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을 뒀다. 이때 유도 유단자였던 서상교는 체육국장 겸 무도부장·등산부장·씨름부장을 담당하여 단원의 체력단련을 지도·감독하였다. 결단식을 통해 결정된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
연번 | 성명(한자) | 소속 | 직책 | 상훈 |
창립 멤버 | ||||
1 | 이상호(李相虎) |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 단장 | 건국훈장 독립장 |
2 | 서상교(徐尙敎) | 대구공립상업학교 5학년 | 체육국장·무도부장 등산부장·씨름부장 | |
3 | 김상길(金相吉) | 관방국장 군사부장 | ||
간부 | ||||
4 | 김정진(金正鎭) | 대구공립상업학교 5학년 | 비서장 회계관 | 건국훈장 애족장 |
5 | 이준윤(李浚允) | 과학국장 | 건국훈장 애국장 | |
6 | 이원현(李元鉉) |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 비서관 | |
7 | 윤삼룡(尹三龍) | 대구공립공업학교 2학년 | 체육위원 | 건국훈장 애족장 |
8 | 이태원(李兌遠) | 대구공립상업학교 3학년 | 부관 경기부장 | |
9 | 최두환(崔斗煥) | 경북중학교 2학년 | 항공부장 | 미서훈 |
평단원 | ||||
10 | 정광해(鄭光海) |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 정단원(正團員) | 건국훈장 애족장 |
11 | 정환진(鄭晥鎭) | |||
12 | 김광연(金廣淵) | 대구공립상업학교 5학년 | 준단원(準團員) | 미서훈 |
13 | 황칠암(黃七岩) |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 ||
14 | 안광준(安光濬) | |||
15 | 정병준(鄭炳準) | |||
16 | 김정하(金井夏) | |||
17 | 이상학(李相鶴) | 대구공립상업학교 3학년 | ||
18 | 하두영(河斗永) | |||
19 | 이응락(李應洛) | |||
20 | 김종우(金鍾宇) | |||
21 | 노정열(盧定烈) | 대구공립상업학교 2학년 | 건아대원(健兒隊員) | |
22 | 박상포(朴商包) | 대구공립상업학교 1학년 | ||
23 | 강기인(康基仁) | |||
24 | 안창용(安昌鏞) | |||
25 | 손문호(孫文鎬) | |||
26 | 박규인(朴圭寅) |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앞산 등지에서 학술연구토론회, 체육회 등을 개최해 단원간의 유대의식 및 독립의식을 함양하고 체력을 증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군사학 함양에도 힘을 기울여 군사 관계 서적을 번역하고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 또한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23일, 한 배신자의 밀고로 태극단장 이상호가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상호의 집에 숨겨두었던 태극단 관련 문서가 발각되면서 태극단의 활동이 일본 제국 경찰에 탄로났다. 결국 서상교 또한 5월 25일,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도중 김상길·김정진·이준윤·이원현·윤삼룡·정광해·이태원·정환진 등 8명의 단원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었고, 5월 27일까지 단원 26명이 모두 체포되었다.[16] 이후 대구지방 주재소로 끌려가 친일경찰 김봉생(金鳳生)[17]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43년 10월 11일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었고, 1944년 1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44년 2월에 징역 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44년 4월 중순에 김상길·이원현·윤삼룡과 함께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영양실조, 피부병, 심장병, 늑막염 등을 앓는 등 갖은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1945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다음날인 8월 16일 출옥했다.
1945년 8월 16일 출옥 직후의 모습. |
서상교는 비록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추간판 탈출증·심장판막증·폐결핵 등의 병을 얻어 한동안 경상북도 대구시 대명동[18] 영선못 인근에 살면서 마늘·쑥·콩 등을 먹으며 요양생활을 해야 했다.
1946년 5월 31일 한국독립당 전임위원을 지내다가 1948년 2월 29일에 탈당했으며, 이후로는 자신의 독립운동 관련 수필집, 회고록을 저술하고 중화민국의 경제학자 마인추(馬寅初)의 저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뒤 발표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경기도 인천시(현 인천광역시)에 있던 모 제철소에 취직하여 근무했으나 이후 공장이 문을 닫아 실직하였고,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현 안양시)에서 거주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고, 이에 보훈대상자가 되어 한 은행에 촉탁(囑託)으로 채용되어 이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근무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한편, 1969년 1월 20일 제41회 대구상업고등학교 졸업식 당시 이상호·이준윤·이원현·김정진·김상길과 함께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2018년 3월 13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2018년 3월 16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4. 주 참고 문헌
[1] 달성서씨세보 권6 145쪽에는 192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현재 이 자리에 동산맨션이 들어서 있다.[3] 이후 1924년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407번지로 이주하였다.#[4] 현감공파(縣監公派)-남계공계(南溪公系) 25세 교(敎) 항렬.[5] 고조부 서찬규의 사마방목, 첫째 종증조부 서진목의 사마방목, 조부 서갑수의 사마방목에 모두 본관이 대구(大丘)로 오기되어 있다.[6] 大達(대달)은 大邱(대구), 達'城(달성)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보인다.[7] 자는 욱여(旭汝).[8] 변시영(卞始榮)의 딸이다.[9] 자는 진보(進甫).[10] 자는 경양(景襄). 1846년(헌종 12) 식년 생원시에 3등 61위로 입격하였다. 이후 통사랑(通仕郞) 행(行)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다.[11] 자는 성집(聖緝, 聖輯).[12] 자는 자원(子元).[13] 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14] 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15] 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16] 이 문단에서 언급된 10명을 제외한 16명의 단원은 한 달 만인 1943년 6월 20일 석방되었다.[17] 고등계 형사로서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사건과 대구사범학교 독서회 사건 등을 취급하여 독립운동가 23명을 고문하여 중형을 받거나 옥사케 하였다. 이 공로로 일제 말 영천경찰서 사법주임에 오르기도 했다. 해방 후 1949년 8월 자신의 앞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도주하였다.# 9월에는 반민특위의 공소시효가 종료되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이후 왜관경찰서장, 1952년 연일군달전면장 등을 지냈다.[18] 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19] 중재(中齋) 이호대(李好大)의 딸, 영천시의 마지막 성리학자로 불린 낭산(朗山) 이후(李垕)의 손녀이다.#[20] #[21] 달성서씨세보 권6 582쪽에는 徐輔焃으로 등재되어 있다.[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