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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일병 | 2대 김충남 | 3대 함명수 | 4대 이맹기 | 5대 현시학 | |
6대 함명수 | 7대 장지수 | 8대 김준태 | 9대 장지수 | 10대 김동배 | |
11대 김상길 | 12대 김광옥 | 13대 차수갑 | 14대 오윤경 | 15대 유병봉 | |
16대 김종곤 | 17대 정원민 | 18대 고중덕 | 19대 김대용 | 20대 정현경 | |
21대 정용근 | 22대 김종호 | 23대 김형진 | 24대 백석기 | 25대 김철우 | |
26대 김만청 | 27대 임태섭 | 28대 남정명 | 29대 윤광웅 | 30대 김무웅 | |
31대 장정길 | 32대 오승열 | 33대 최기출 | 34대 전관옥 | 35대 권영준 | |
36대 서양원 | 37대 김성찬 | 38대 최윤희 | 39대 황기철 | 40대 손정목 | |
41대 엄현성 | 42대 정호섭 | 43대 이범림 | 44대 정진섭 | 45대 김판규 | |
46대 권혁민 | 47대 김정수 | 48대 김현일 | 49대 김명수 | 50대 강동훈 | |
51대 강동길 | |||||
※ 초대~8대, 10대, 11대, 13대: 소장 · 9대, 12대, 14대~현임: 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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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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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6년 12월 29일 |
경상북도 대구부 | |
사망 | 2018년 4월 22일 (향년 91세) |
성남시 강동구 서울대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본관 | 춘양 김씨 |
가족 | 배우자 이영선 슬하 3남 |
주요 경력 | 한국함대 제1전단 전단장 해군사관학교 순항기동단대 사령관 제16대 해군사관학교 교장 제11대 해군참모차장 한국함대사령관 제9대 광복회 회장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화랑무공훈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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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해군참모차장을 역임한 해군 제독. 제8대 광복회장 역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2015년 화랑무공훈장 수여.2. 생애
1926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났다.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인 1942년 5월 동기생 이상호, 서상교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학생결사단체인 태극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일본군 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살포하고, 1943년 4월에 김정진, 이준윤, 이원현, 윤삼용 등의 동지들을 포섭해 조직을 확대하였다.1943년 5월 비파산 약수터에서 결단식을 가져 투쟁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은 일반조직, 특수조직을 두고 의결기관으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는데 일반조직은 육성부 아래에 관방국, 체육국, 과학국을 두고 그 밑에 군사부, 항공부 등 10여 개의 부서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국민학교 고학년 및 중학교 1,2학년 생을 두어 향후 단원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향후 전국 학교로 조직을 확대해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을 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으로 망명해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그는 태극단 관방국장으로 태극단의 일반사무 및 활동을 관장하였다. 태극단은 이후 용두산, 비파산 등지에서 학술연구회, 체육회 등을 개최해 동지간 유대의식을 강화하고, 교양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으며, 군사관계서적 번역 및 폭발물 제조 연구 등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했다.
그러나 동지의 밀고로 태극단 활동이 발각되고 수업 도중 동지들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1월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5년 장기 7년 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교도소에서 복역 중 8.15 광복을 맞이해 석방되었다.
해방 후 해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해 해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1949년 8월 10일 미국 군사고문단 단장인 윌리엄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북한에 나포되자 8월 17일, 함명수의 지휘 하에 공정식 등과 보트 구출을 위한 몽금포 작전에 소해정인 JMS 302 함의 함장으로 참여하였고, 보트는 남포에 있어 구출에 실패했지만 북한 함정 4척 격침, 1척 나포, 포로 5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6.25 전쟁에도 참전하였고, 1955년 해군종합학교 교장을 역임하던 중, 7월 1일 해군대학 1기생으로 입교해 국방장관상을 받고 졸업했다. 1963년 1월 준장으로 진급했고, 3월 1일 이상호, 서상교 등 태극단 동지들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6월 25일 한국함대 제1전단 전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해군사관학교 순항기동단대 사령관으로 사관생도의 순항훈련을 지휘하였다. 8월 해군 통제부[1]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68년 1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69년 4월 10일 해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고, 1970년 4월 10일 해군참모차장이 되었으나, 1971년 1월 김광옥 소장의 진급 및 해군참모차장 임명으로 한국함대사령관으로 전보하였다. 한국함대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동, 서해안에 전진기지를 세우는 등 무장간첩의 침투 및 전면전에 대비한 기동능력을 확보하는데 힘썼으며 1972년 예편하였다.
예편 후 진양종합건설, 코스모스 산업 등의 기업체 대표를 역임하였고, 1980년 9월 김홍일의 후임으로 제9대 광복회장에 선출되었다. 1982년 안춘생과 독립기념관 추진위원회를 발족해 독립기념관 건립에 기여하였고, 1984년 9월 후임 광복회장인 유석현에게 넘기고 광복회 고문으로 물러났다. 이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에 매진하였다. 2015년 몽금포작전이 재조명 됨에 따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2018년 4월 22일 성남시 분당구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