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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4년 8월 9일 |
함경남도 원산부 교하동 (현 강원도 원산시 용하동) | |
사망 | 2021년 5월 26일 (향년 96세)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1] | |
병역 | 예비역 육군 소장 전역 |
임관 | 육군사관학교 특7기 |
최종보직 | 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화랑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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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김국주는 1924년 8월 9일 함경남도 원산부 교하동(현 강원도 원산시 용하동)에서 태어났다.그는 1943년 19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던 장조민을 만났다. 이후 장조민의 소개로 그해 8월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의 전신인 광복군 초모위원회 제6분처에 참여한 그는 전이호 등과 함께 기간요원으로 활동하며 광복군 모집 및 후방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1944년 장쑤성 쉬저우 지역에 파견되어 초모공작을 전개했으며, 쉬저우에서 철수한 후에는 국민혁명군 제10전구 산하 간부훈련학교 특설 한국 광복군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초 안휘성 하류(河溜)[2]지구 연락 책임자로 임명되어 동지들의 안내와 지하공작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이후에는 상하이 지구에 파견되어 공작 활동을 지속했으며, 아울러 국내 진입을 준비했지만 8.15 광복으로 무산되었다.
광복 후 광복군을 대한민국 국군의 토대로 삼고자 모집 활동을 전개했지만 미군정의 불허로 무산되었고, 1946년 6월 미합중국 해군 대형수송선을 타고 상하이를 거쳐 인천으로 귀국했으나 광복군은 해체되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으로 입학하여 그해 10월 12일 특별 제7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950년 대위로 진급하여 제5보병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제6중대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의정부 방면에 투입되어 다부동, 낙동강, 평양, 운산 전투 등에 참여했다. 다부동 전투 당시 15연대 6중대장으로 적의 대대장급으로 추정되는 군관을 사살하고 작전 지도를 노획해 적의 작전을 파악하는데 기여했으며, 특히 평양을 점령할 때 가장 먼저 평양에 진입한 국군 부대는 바로 그가 이끌던 부대였다고 한다. 1953년 휴전 조약이 수립될 무렵 제12보병사단 제52연대 제1대대장을 맡았다.
이후 미국 보병학교를 수료하고 이준식의 요청으로 황의선과 함께 제주 제1훈련소 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63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1월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으로 복무할 때 준장으로 진급 하였다. 1966년에 국방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69년 제36보병사단장을 맡았고, 1975년 제1야전군 제1군수지원사령관, 1977년 제1야전군 부사령관을 잇달아 역임했다. 1979년 소장 예편 후 광복군 동지회 회장을 맡았고, 1981년 광복회 부회장, 1986년 독립기념관 이사, 2001년 독립유공자협회 회장, 2005년 6월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14대 광복회 회장에 취임한 그는 "젊은 세대에게 역사의식을 전수하고 독립유공자 유족과 후손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에 발 벗고 나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광복회 회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목동[3]에 거주하다가 이후 경기도 안양시로 이주하여 동안구 호계동, 갈산동 등지에 거주했다.# 그 사이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2021년 5월 26일 오후 2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
3. 서훈
- 1950년 금성 충무무공훈장
- 1953년 금성 화랑무공훈장
- 1977년 대통령표창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