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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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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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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령 ||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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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대 국방부 장관
손원일
孫元一 | Sohn Won-yil[1]
파일:attachment/c0033475_4afa62210bdd8.jpg
<colbgcolor=#ec1e31><colcolor=#FFFFFF> 출생 1909년 6월 22일 (음력 5월 5일)
평안남도 증산군 국보면 오흥리
(現 평안남도 증산군 낙생리)[2]
사망 1980년 2월 15일 (향년 70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본관 밀양 손씨[3]
수향(水鄕), 고산(古山)
재임기간 초대 해군참모총장
1948년 9월 5일 ~ 1953년 6월 30일
제5대 국방부 장관
1953년 6월 30일 ~ 1956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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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1e31><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손정도, 어머니 박신일
형제자매 누나 손인실, 손진실, 손채실
남동생 손원태(孫元泰)
배우자 홍은혜(洪恩惠)[4]
자녀 장남 손명원(孫明源), 차남 손동원(孫東源)
셋째 아들 손창원(孫昌源), 넷째 아들 손경원(孫京源)
학력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종교 개신교 (감리회)
경력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 장관
주서독 한국 대사
국민의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한국 재향군인회 자문위원장
제12차 아시아반공연맹 한국대표
경남대학교 석좌교수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겸 고문
제9차 세계반공연맹 총회 한국 수석대표
군사 경력
임관 상선사관
복무 대한민국 해군
1945년 8월 21일 ~ 1952년 8월 28일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해군)
최종 보직 해군총참모장[5]
주요 보직 해방병단 단장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
참전 6.25 전쟁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hn_Won_Yil_1948.png
해군 소장 시절
1. 개요2. 생애
2.1. 상선사관 시절2.2. 독립운동 및 개인사업2.3.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2.4. 6.25 전쟁기 활약상
2.4.1. 개전 당시2.4.2. 인천상륙작전
2.5. 전쟁 이후
3. 수상4. 가족 관계5. 포항시 보도연맹 학살 사건 관여 의혹6. 손원일급 잠수함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할 무렵#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외교관, 사업가로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2. 생애

1909년 6월 22일 평안남도 증산군 국보면 오흥리(현 증산군 낙생리)에서 감리회 목사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손정도와 어머니 박신일(朴信一)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1. 상선사관 시절

중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열강들의 조계가 여럿 설치되어 있던 상하이에서 이들 조계를 보호하고 친선 방문 등의 목적으로 들어와 있던 각국 해군들을 보고 감명받아, 중화민국 해군에 입대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화민국 해군은 특정 지역 군벌이 장악하고 있어 타지인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꿈을 접은 뒤, 대신 상선사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훗날 국방부장관을 지내는 신성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해군 군관이 되었다가, 크게 출세하지 못하고 중위로 전역 후 마찬가지로 항해사로 전향한 바 있다.

1924년 남경 중앙대학 항해과 졸업 후 항해사로 임관했다. 이후 1927년 중국 해군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 3년간 유학하며, 1930년대에는 독일 함부르크 소재의 아메리카 라인사에서 상선 항해사로 근무했는데, 이때 하벤슈타인호에 6개월간 2등 항해사로 근무하면서 함부르크에서 수에즈 운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장거리 항해를 처음 경험하였으며,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의 1만 5천 톤급 대형 원양 여객선 람세스 호에서 근무하는 등으로 해운 업계에서 명성을 쌓았다.[6]

공식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때의 이력이 해군 창설기에 사람들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을 줬을 것이라 추정된다.

2.2. 독립운동 및 개인사업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장(국회의장격)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일제가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면서 고문하던 도중에 손원일의 이름이 나왔고, 그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인 것을 안 일제가 당시 휴가를 내 잠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손원일을 체포 및 고문했다.[7] 이 부분은 홍은혜 여사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렇다고 손원일이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원일은 1930년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로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

석방 후 고문 후유증[8]을 치유하던 와중인 1934년, 매형이었던 남계(南桂) 윤지창[9]의 제안으로 '남계양행'이라는 식료품 수입 및 판매상을 공동 창업해 사업을 시작했다.[10] 이 사업을 위해선 수시로 만주국과 조선을 오가야 했는데, 석방 후 요시찰 대상자가 되어 해외 출국이 금지된 탓에 이를 할 수 없었으나, 그 지인이 일본 경찰에 손을 써서 요시찰 대상에서 제외됐고, 곧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손원일의 수완과 전시로 인해 급상승하던 식료품 가격 등에 힘입어 크게 성공했고, 동업자인 남계의 묵인아래 상당수의 사업 수익은 독립 운동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때 모아둔 재산이 훗날 조선해안경비대 창설 자금으로도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2.3.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1945년 8월 21일, 해방병단 모집을 위해 서울에 붙인 벽보#
중국유학, 독일 상선사관으로 생활하면서 수많은 강대국해군력을 두눈으로 실감한 손원일은,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1월 11일[11]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이후 해방병단(海防兵團)과 미군정청 산하의 남조선해안경비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선해안경비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해방병단과 조선해안경비대 시절에 손원일 제독은 보유한 선박이라곤 구 일본군이 쓰다가 버린 소형 목선 몇 척이 전부였을 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상황에서 조함창(造艦廠)을 세워 폐선을 수리하고 미 해군에게서 소해정을 인수하는 등 해군을 키워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창군 당시 손원일 제독의 군함 도입 일화.

그후 1948년 9월 5일에 조선해안경비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자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손원일 대령은 그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12]이 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송호성·손원일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김홍일이 준장으로 임관했으며 2개월 후인 1949년 2월 4일 손원일 준장은 이응준·채병덕·김홍일과 함께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에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기도 했다. 여순 제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당시 해군 장교였던 신현준 소령이 해군본부에 "우리도 해군 육전대 같은 상륙부대가 있었으면 바다를 통해 진압병력을 빠르게 기동시켜서 일이 커지기 전인 초기에 진압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를 설득력 있다고 판단한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게 된 것이다. 해병대 창설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고 건의한 인물인 신현준 장군은 해군본부의 창설 허가가 나자 해병대 창설을 직접 맡아서 주도했고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되어 중장으로 예편했다.

위에 소개된 링크 글에도 나오듯이, 손 제독은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도입할 당시에도 직접 나서서 성사시킨 바 있다. 그리고 백두산함은 6.25 발발 당시의 대한해협 해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국군 최고 사령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라는 포고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 제독으로 미국으로부터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 일색이었던 해병대나 육군의 지휘관들과는 달리, 해군의 참모총장들은 일본군 출신이 없다. 손원일 제독이 일본군 출신을 배제하려 해서는 아니고,[13]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해군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출신들을 받아들인 육군과 다르게[14] 불신과 자부심등으로 조선인들을 끝까지 징병하지 않았고 당연히 해군병학교 및 승선 직별 대상자에서도 제외됐으며 자진 지원자들에 한해서 조차도 육상 근무만 겨우 시켰기에[15] 일본 해군 출신 병과[16]사관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다. 해군본부에서 발간한 《6.25 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는 창설 멤버 중 해군병학교 출신 병과 중좌가 한 명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이 경우도 일본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 내지인 신분을 획득해 입학한 특이 케이스다. 대신 이들은 만주군 육군 출신들과 함께 신규 창설한 해병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그래서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2대 사령관 김석범, 3대 사령관 김대식이 모두 만주군 육군 출신이었다. 그리고 해병대 내무생활 문화에 일본군 잔재가 짙게 남게 되고 해군을 이끄는 항해장교단은 한동안 상선사관 출신 제독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일부에서 '일본군 출신이 없는 해군만이 정통성이 있고, 나머지 군종은 친일 후예'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는 손원일 제독 본인을 포함한 창설 당시 해군 수뇌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충원할 수 있었던 인력의 구성을 반영한 결과론일 뿐이다.[17] 게다가 손원일은 건군 및 6.25 전쟁 초기에 육군과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김정렬(둘다 일본군 출신)과 '육해공 삼형제'라고 부르며 평생 의형제 관계를 유지했다.[18] 이런 점을 보면 '해군 빼고는 친일파 후예'라는 작금의 주장은 손 제독의 뜻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손 제독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점이 해군에게 있어 상당한 메리트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2.4. 6.25 전쟁기 활약상

2.4.1. 개전 당시

개전 당시에는 해군 함정 인수를 위해 미국에 가 있었다. 개전 소식이 들리자 귀국을 서둘렀으나,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인수 중인 함정을 이끌고 오도록 지시해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2.4.2. 인천상륙작전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한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c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인천 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영흥도와 덕적도의 탈환을 해군의 이희정 중령함명수 소령[19]에게 지시, 이를 성공시켜 인천 상륙작전의 밑거름이 되게 했다.[20] 상륙작전 당시에는 함대 지휘권은 없었지만, 직접 소총을 들고 한국 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원래 손 제독은 미군 지휘부와 함께 기함 함교에서 작전을 참관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손 제독이 직접 돌격하고 있다는 보고에 미군 장성들이 기겁했다고 한다. 이렇게 장성이 전장에서 직접 돌격한 사례는 같은 6.25 전쟁 당시의 육군 백선엽 장군의 사례 정도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애시당초 미군 위주의 연합군이 주도하던 인천 상륙작전의 개시 직전에 한국 해군과 해병대도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손 제독이 이 역사적인 작전에 한국군도 꼭 참여시켜야 한다고 연합군측에 적극적으로 주장한 공이 컸다.

2.5. 전쟁 이후

1952년에 중장 계급으로 예편 후 이듬해 국방부장관이 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다. 이후 1958년 초대 주서독 대사를 지냈다. 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전투함이 한 척도 없는 해군에서 대장이 나온다면 그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 해군에 전투함이 갖춰지거든 그 이후에 대장 계급을 받겠다고 본인이 고사했다.[21] 대한민국 해군에서 최초의 대장은 1966년에 취임한 8대 김영관 참모총장이다.[22]

대한민국 해군에서 이순신, 장보고와 함께 추앙받는 3대 제독 중 하나.[23] 화려한 전과는 없지만 겨우 일본 해군에서 목선 몇 척 인계받은 아무것도 없는 한국 해군을 일으켜 세웠고 장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24]

1980년, 신장병으로 투병 중에 끝내 사망하였는데, 이때 아내와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한다. 그들은 모두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썼고, 오늘날의 해군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25]

투병 시기에 국방부에서 군의관 1명을 주치의로 전담시켰는데, 처음엔 육군 군의관이 왔으나 얼마 뒤 손 제독의 희망에 따라 해군 군의관으로 교체되었다. 개인적으론 처음부터 해군 군의관의 진료를 받고 싶었으나 배정된 육군 군의관이 자신을 못 믿냐며 섭섭해 할까 우려해 한동안 얘길 못 했는데, 자신은 해군 출신이니 해군 군의관의 진료를 받고 싶다는 뜻을 그 육군 군의관에게 전하자 군의관이 바로 이해해줬다고 한다.

3. 수상

4. 가족 관계

부친은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목사.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북한의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손 목사가 중국 길림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할 때 김일성은 그의 교회에 다녔고 손 목사의 도움으로 손원일이 다니던 중국 길림의 육문중학교에 입학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나, 김일성 집안은 원래 대대로 개신교 집안이었다. 김일성의 어머니의 이름은 강반석인데, 이 반석은 12사도 중 1명인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이 기반, 반석이기 때문.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손정도의 숭실학교 2년 선배였다.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이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해 줄 정도로 그를 상당히 아꼈고, 김일성도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에 대해 친아버지와 동급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손 목사의 차남이자 손원일의 동생인 손원태 박사와는 육문중학교 동급생으로 의형제처럼 지냈다.[26]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1994년 8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조문 차 방북한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평양에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손원일 제독이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으로 6.25 전쟁 당시 김일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심지어 손원일 제독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손원태 박사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있다.#

부인인 홍은혜는 음악교사 출신으로 독실한 개신교(감리회) 신자였다.[27] 해군 창설 초기에 남편인 손원일을 도와 자금을 모았으며, 전공을 살려서 해군 최초의 군가인 <해방행진곡>과 바다로 가자 등을 작곡하였다. 2017년 4월 19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해방행진곡, 바다로 가자는 손원일 작사, 홍은혜 작곡 이다.

장남 손명원은 기업인으로 살았고[28], 차남 손동원(건축사), 3남 손창원(사업가)이 있다. 누나 손진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이자 윤치영의 사촌동생인 윤치창과 결혼했다.

장남 손명원의 차녀인 손정희는 전 국회의원 홍정욱과 결혼했다. 즉, 홍정욱은 손원일의 손녀사위가 된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옹은 그의 7촌 조카로, 손원일의 조부 손몽룡(孫夢龍)[29]과 손기정의 증조부 손종일(孫鍾一)은 친형제였다.

5. 포항시 보도연맹 학살 사건 관여 의혹

우선 반헌법행위자열전, 반헌법행위자열전 수록 집중검토대상자 405명 사건별 명단의 학살자 명단에도 손원일이란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3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원일 중장이 포항에서의 학살에 개입되어 있다는 정황은 매우 유력한 상태다.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의 내용에 따르면 포항 일대에서도 1950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벌어졌으며 손원일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 사건 관련해서다. 전쟁 이전 포항 지역에도 보도연맹이 설치되었으나, 좌익이 아닌 포항 지역 양민들까지 할당량 채우기나 생업에 가해지는 제약 때문에 보도연맹 명단에 올랐다.[31] 심지어는 가입을 독려하던 일부 대한청년단 단원까지도[32]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입되어 있는 일이 속출했다. 막상 포항 지역의 남로당 간부 등 진짜 간첩들은 보도연맹 가입을 피해 사전에 도피한 상태였다.[33]

그러던 중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자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29일, 30일과 7월 11일에 4회에 걸쳐 각 지방 경찰국에 불순분자들에 대한 예비검속 명령을 하달하였다. 여러 증언자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면 포항에서도 6월 29일부터 8월 26일까지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소집되어 곳곳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7월부터 9월 사이에 총 4개 지역에서 총살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해군 포항경비사령부, 포항경찰, 육군 제3보병사단, 그리고 대한청년단이 관여되어 있다. 3사단과 한청, 포항경찰은 포항의료원 및 고디굴, 오늘날 과메기 덕장이 있는 구룡포에서 직접 희생자들을 총살하였다.
50년 7월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포항경비사령부에 좌익분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하달됐다. 이 명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 등에게 각각 내린 것이다.

경찰의 명령은 조병옥 내무장관이 김병원 치안국장을 통해 각 도경국장에 하달됐으며 경북의 경우, 명령을 받은 조제천 도경국장이 전언통신문으로 각 경찰서에 다시 명령했다. 포항경비사령부는 명령을 수령한 후 포항·경주·영덕 경찰서의 협조로 용공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각 경찰서 관할지역 주민 400-500명을 체포했다.

이들에 대한 신원분류는 이종환 포항경찰서장, 이강학 경주경찰서장(3·15부정선거 당시 치안국장), 박주현 영덕경찰서장, 포항경비부 정보참모 차병엽 중위, 헌병대장 고윤석 중위, 정보장교 박재옥 중위 등이 함께 했다. 물론 재판 같은 것은 없었으며 이들중 200여명을 처형대상자로 분류하고 나머지는 귀가시켰다.

처형대상자들을 군함 3척에 태우고 포항을 출발, 영일만 장기등대 동쪽 3-5㎞ 지점 바다로 나갔다. 함상에서 이들을 총살하고 모두 수장시켰다. 피살자들은 대부분 중장년 남자들이었지만 여자들도 있었다. 피살자들이 다시 떠오르지 못하도록 몸에 돌을 매달아 바다로 던졌다. 처형은 해군 장병들과 경찰이 집행했으며 군경의 수는 약 반반이었다. 당시 포항경비부 참모장이었던 박병태 소령(해사 1기)도 사건 전모를 소상히 알고 있다.

직접 배를 타고 나가지는 않았으나 처형은 사령관으로서 내가 명령한 일이다. 이 일로 평생을 자책감 속에 살았으며 깊이 후회한다. (...) 반세기가 지난 일이지만 한국 정부는 후손을 위해서라도 올바르게 사실을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청문회라도 연다면 참회하는 심정으로 사실대로 증언하겠다.
- 예비역 해군 준장 남상휘, 2000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출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이 중 해군 포항경비사령부에 학살을 지시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의 명령은 국방부장관 신성모의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시 상부에서 명령을 하달받아 실제 학살을 집행한 당사자인 포항경비사령부 사령관 남상휘 예비역 해군 준장[34][35] 이 2000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해군은 경찰의 협조를 얻어 대략 400~500명의 주민들을 체포하였으며 이 중 200명을 처형 대상자로 분류해 포항 앞바다에 끌고 나가 총살한 후 시신에 돌을 매달아 수장했다. 진화위에서는 이 학살 발생 일자가 7월 20일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희생자들의 정확한 숫자는 남상휘 준장의 증언대로 대략 200명 정도일 것로 파악한다.

손원일 중장의 학살 가담에 대해서는 남상휘 준장의 증언 외에는 별다른 증언이 없다. 그러나 남상휘 준장의 증언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학살 가해자의 증언이자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 그리고 해군의 학살에 대한 그의 증언이 여러 유가족들이 당시 어리불 해안에 수많은 시신들이 떠밀려왔다고 증언한 내용과 맞아떨어져 실제로 벌어졌음이 진화위에 의해 확인되었으므로 손원일에 대한 의혹 역시 사실일 것으로 강력히 의심되는 상태다.

6. 손원일급 잠수함

대한민국 해군장보고급 잠수함의 후계함으로 도입한 독일214급 잠수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손원일급 잠수함으로 명명되었다. 경상남도 창원시에 위치한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영내에 손원일 제독의 동상이 있다. 진해 군항제 기간에 이루어지는 부대 개방 시 일반인도 직접 볼 수 있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제3공화국에서 배우 민욱이 손원일 역을 맡았다. 다만 여기서는 5.16 군사정변 이후에 허정의 신정당 산하의 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군인으로써의 등장이라기보단 정치인으로써의 등장에 가깝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의 소련군 4번째 미션 동영상에 한국군 사령관이 등장하는데 손원일 제독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배우는 일본계 미국인 배우 리처드 나리타. 물론 고증 따윈 씹어버리는 전통(?)을 자랑하는 시리즈답게 입고 있는 동정복 상태가 심히 엉망[36]이다.

대체역사물에서는 해군이라는 접점때문인지 대한제국 해군 장교였던 신순성과 함께 자주 나온다.[37]


[1] '손원일' 이라는 이름을 로마자로 올바로 표기하면 'Sohn Won-yil' 또는 'Sohn Wonyil' 로 본인이 생전에 그렇게 썼으며,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유품 등으로 확인할 수 있고 해군 내에서도 그렇게 써 왔다. 하지만 손원일함의 영문 표기는 표준 로마자 표기법을 적용하여 'ROKS Son Wonil' 이라 썼는데, 정작 국립국어원에서는 '인명, 회사명, 단체명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쓸 수 있다' 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2] 이북5도 기준으로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3] 진주사공(휘 상겸)파 45세.[4] 남양 홍씨 홍두수(洪斗洙)의 딸이다.[5] 창설 당시엔 총참모장이었다.[6] 25만 톤에 달하는 현대 유조선들을 생각한다면 작은 배처럼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호화여객선으로 건조되었다가 개조되어 항공모함이 된 히요, 준요가 배수량 2만 4천 톤급에 전장은 200m를 넘었다. 이 둘은 미군에서도 경항모가 아니라 정규항모급(함대형항모지만)으로 분류되었을 정도로 큰 배이다.[7] 당시 부친인 손정도는 이미 1910년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2년 일본 총리 가츠라 타로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1919년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 압록강을 건너 다시 상해로 망명했기에, 손원일 가족은 일본경찰의 주요 시찰 대상이었다.[8] 고문으로 인해 공황장애에 평생 시달렸다.[9] 남계 윤지창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으로 미국 시카고 루이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10] 남계양행은 2층 붉은 벽돌 건물을 지어 창업했는데 이 건물은 현재도 상업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36'(조계사 방면 인사동 입구). 이 건물에는 서울시미래유산에 선정되었던 '동헌필방'이 1966년부터 폐업한 2020년까지 영업하고 있었고 현재는 복고풍 컨셉의 커피점이 들어서 있다.[11] "해군은 신사(士)다."라는 뜻에서 11(十一)월 11일 11시에 해방병단 결단식 거행[12] 당시에는 해군총참모장.[13] 손제독은 해병대 창설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해병대도 해군과 다름없이 자식처럼 여겼다.[14] 조선인 같은 경우 1939년 후반까지 가서야 일본육군에 처음 지원이 가능해졌다.(그에 반해 모든 일본인 남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역의 의무를 부여받았다.)[15] 따라서 '일제강점기때 해군으로 끌려가 배타고 싸웠다'는 주장을 하면, 그 신뢰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16] 일본 해군에서 병과란 항해, 포술, 수뢰, 항공 등을 맡는 전투병과의 일종으로, 일본 해군에는 전투병과란 병과 단 하나뿐이었다. 항공과가 따로 있었으나, 이는 사병 출신 사관인 특무사관들 중 항공 계열인 이들에게만 붙었다. 해군에서 기관과, 군의과, 법무과, 기술과, 주계과 등 병과가 아닌 사관들은 비병과사관이라는 용어를 썼다.[17] 공군의 경우만 봐도 초대 참모총장 김정렬은 일본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2대 참모총장이자 앞서 초대 국방차관이었던 최용덕은 광복군 출신이었고, 김신(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아들)을 비롯한 다른 광복군 출신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며 미 공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미 공군 색깔이 강하다. 게다가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시정부의 국방장관격인 노백린이 공군력 건설에 착수한 바 있다.[18] 출처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가 편찬한 손원일 제독 평전.[19] 북한 간첩에 의해 미군 배가 북한으로 건너갈 당시 해군특공대를 임시로 조직해 옹진만을 급습한 주역이다. 이후 제 7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군 예편 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20] 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작전에 직접 참가하여 교전을 벌인 해군 특공대 병력은 북한군과의 총격전 끝에 모두 전사했다.[21] 현실적으로도 당시 한국 해군을 지휘하던 미 극동해군사령관의 계급이 중장이었는데 손 제독이 대장직을 수락하게 되면 미군과 지휘체계 문제도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이지만 작전권이 없고, 작전권은 중장 계급인 대한민국의 해군작전사령관이 행사하므로 미7함대와 연계 시 큰 문제는 없다. 미7함대 사령관도 중장이지만, 미군에도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계급이 같은 부대는 널렸고, 당장 한미연합군사령부사령관은 미군 대장이, 부사령관은 한국군 대장이 역임한다.[22] 해사 1기 동기생들인 이맹기(6대), 함명수(7대) 모두 중장으로 참모총장직을 수행했고 역시 해사 1기 동기생인 9대 참모총장 장지수도 대장이었다. 해사 1기 동기생인 공정식해병대로 전군하여 해병대사령관이 됐다. 1963년 충무함을 도입해 구축함을 가지게 되면서 해군에서 대장 계급이 나올 수 있는 명분이 갖춰진 점도 있다.[23] 그래서 이순신, 장보고, 손원일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붙은 함급이 존재한다.[24] 장보고는 청해진을 통해 한국사에서 해양력의 가치를 처음 실증해냈고,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지상에서의 거듭되는 패배 속에서 바다에서의 승리를 통해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결국 멸망 직전에 봉착했던 나라를 구했다. 그리고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자 항일 독립투쟁에 동참한 인물로서 신생 해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한 공로가 크다. 아울러 이 세 인물들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스스로 함대를 키우고 병력을 양성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순신은 초창기에 빠르게 승진한 것 외에는 선조에게 지원을 못 받아서 둔전과 어업으로 자금을 모아 함대를 꾸렸고,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게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해 무역으로 스스로 자금을 충당했으며, 손원일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 의지는 확실했지만 막 정부 수립이 이루어져 더욱 지원받을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해군을 건설했다. 또한 백두산함을 인수하기 위해 모금행사까지 벌였고 이 백두산함이 전쟁 초기때 대한해협전투를 통해 부산항을 사수하여 유엔군의 한국 배치에 기여했다는걸 감안하면 이순신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나라를 구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25] 이 구절은 2018년 서해수호의 날 영상 "헌신"의 주제로 쓰이기도 했다.[26] 참고로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반공주의를 지지하는 목사였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당했는데, 김일성은 자기 은인의 뒷통수를 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의 편에 선 것이다.[27] 개신교 관련 증언이나 서적에 자주 나오며, 회고록도 절반 정도가 교회 이야기다.[28] 1941년생. 서울고등학교(11회)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대학을 마쳤으며 1980년 현대그룹에 입사하여 현대중공업 전무와 부사장, 현대미포조선 사장, 쌍용자동차 사장을 지냈다.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차녀 김영숙과 결혼하였으며 아랫동서가 정몽준이다.[29] 족보명 손형준(孫亨俊).[30] 사실 반헌법행위자열전을 공인기관이 펴낸 것도 아닌 좌익계열 정치적 단체가 펴내 근거의 공신력이나 편향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31] 가령 지행면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이영택은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읍내에 나가거나 거래를 할 때 제한이 있어서 가입했다. 그 외 대보면 강사리의 어선 기관장 김학출은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자신의 어선 열쇠를 돌려주겠다는 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32] 구룡포 석병리의 대한청년단 단장 정학로의 사례.[33] 가령 전쟁 전 대진리에서 적산관리투쟁 등을 지도했던 진짜 좌익인사 오XX는 대한청년단원들이 보도연맹 가입을 독려하려 대진리에 들어왔을 때 마을에 없었다.[34] 1925년 6월 서울 출생으로 1946년 해안경비대에 입대, 포항경비부사령관(중령)으로 한국전쟁을 맞았으며 1952년 해병대로 옮겨 해병 제1전투단 부단장으로 김일성고지전투·백마고지전투 등을 치렀고 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 미국 동성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1959-60년 해병 제1전투여단(준장)을 지내고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관(준장)으로 있을 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육군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 등과 함께 반혁명분자로 체포돼 서대문교도소 수감중 예편돼 1961년 8월 미국으로 건너와 이후 정치망명, 인터뷰 당시인 2000년까지 미국 뉴욕에 살고 있었다. 남씨가 미국에 망명을 요청하던 1983년 당시 미국 체류중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1983년 12월 7일자로 "오랜 친구인 남씨의 망명을 허락해달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후 2003년 사망했으며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출처: 한국일보 기사)[35] 이외에도 제주 4.3 사건 당시 토벌대원으로써 중요한 증언을 여럿 남겼다. 한편 군사사적으로는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05mm 포탄 약협에 네이팜백린, TNT를 섞어넣은 급조 폭발물을 개발하여 중공군의 2차 공세를 저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폭탄은 외신기자들에게 남 준장의 이름에서 딴 남 폭탄(Nam Bomb)이라 불렸다.[36] 미 육군 방공병과 장교 병과장을 달고 있다.[37] 그러나 실존인물 신순성은 1944년에 죽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은 물론 그 전신인 해방병단과도 접점이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