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2:18:24

무명용사

파일:external/image.newsis.com/NISI20131018_0008836661_web.jpg 파일:external/firstandmonday.com/ht_facebook_uknown_tomb_soldier_rain_tomb_thg_121029_wblog.jpg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비 알링턴 국립묘지 무명용사 위령비[1]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106_370_1.jpg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있는 무명용사의 묘[2][3]

1. 개요2. 각국의 무명용사 추도시설
2.1. 아시아
2.1.1. 대한민국
2.1.1.1.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2.1.1.2.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2.1.1.3. 호국영령 무명용사비
2.1.2. 중국
2.2. 유럽
2.2.1. 영국2.2.2. 프랑스2.2.3. 이탈리아2.2.4. 그리스2.2.5. 폴란드2.2.6. 러시아
2.3. 오세아니아
2.3.1. 호주2.3.2. 뉴질랜드
2.4. 아프리카
2.4.1. 이집트
2.5. 아메리카
2.5.1. 미국
3. 불명예스러운 범죄자의 경우4. 매체에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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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royal-wedding-bouquet.jpg
위의 무명용사의 묘에 바쳐진 캐서린의 부케[4]

(Unknown Soldier)

전쟁에서 전사 후 시체는 수습되었으나 개인정보를 파악할 수 없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군인. 전쟁에선 전투 중에 일일이 주검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고 수습해도 총상이나 열상 등으로 시체의 훼손이 심하여 누구인지 파악하는 게 어려울 때가 많다. 그 때문에 이들을 무명용사로 통칭하여 부른다. 행정적 차원에서 편하기도 하고 이름을 알 수 없다고 참전자에서 빼놓으면 추도의 형평성 차원에서 문제가 생길 테니까. 그 때문에 대체로 전몰자를 추도하는 시설엔 무명용사를 위한 시설이 따로 있다.

행정 시스템이 낙후된 지역에선 전쟁에 참전했고 무사히 돌아왔는데도 군적이 꼬이는 바람에 무명용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무명용사비에 실종자 이름을 새겨넣거나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가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중에 이런 경우가 간혹 있다. 또 전시 상황에서 시신을 찾을 수 없는데 사망이 확실시되는 실종자도 무명용사로 처리한다. 그나마 대구경 화기를 얻어맞고 일부만 날아갔으면 어떻게든 신원확인을 할 수는 있겠지만 중포격 혹은 항공폭탄급 IED 공격에 휩쓸려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되거나 하면 결국 사망을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게 된다. 다만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전사로 분류되어 있기에 국립묘지에 시신은 없고 전사자 명단으로만 남은 경우가 많다.

6.25 전쟁 당시 전사하여 그 이름이 새겨진 사람인데 묘지가 없다면 거의 대부분 포격 등에 휩쓸려 산산조각났거나, 가매장된 뒤 시신을 찾지 못했거나, 소수이지만 북한포로로 끌려간 뒤 거기서 비참하게 죽었거나 셋 중 하나다. 북한군 포로가 되었다면 포로교환 때 돌아오지 못한 이상 적대계층이 되므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된다.[5] 골때리지만 참전해서 살아 돌아왔는데 기록이 없어서 군대 한번 더가는[6](...) 경우도 있긴 하다.

2. 각국의 무명용사 추도시설

2.1. 아시아

2.1.1. 대한민국

2.1.1.1.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파일: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jpg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

일제강점기에 순국한 독립군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2002년 건립된 위령탑.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위치해 있다.
2.1.1.2.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파일: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jpg
학도의용군의 묘
파일:학도의용군 반구형 석묘.jpg
무명용사들이 안치된 반구형 석묘
이곳에 겨레의 영광인 한국의 무명용사가 잠드시다
단기 四二八八년[7] 七월 一五일
대한민국
무명용사비 뒷면에 새겨진 문구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학도의용군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탑. 포항여중 전투[8]에서 전사한 신원 미상의 학도의용군 48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원래 무명용사비 라는 이름으로 1954년 지금의 현충탑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56년 대표 무명용사 1위를 안장하며[9] 무명용사탑으로 개칭했다. 이후 1967년 현충탑이 건립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고,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48명의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위치해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할 것.
2.1.1.3. 호국영령 무명용사비
파일:호국영령 무명용사비.jpg
호국영령 무명용사碑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며 추모하기 위해 碑를 세우다
무명용사비 뒷면에 새겨진 문구

현충탑 내부의 위패봉안관 중앙에 있는 영현승천상 앞에 설치된 무명용사 추도비. 이전까지는 무명용사 안내판만 있고 추모비는 따로 없었으나 2021년 5월 새로 설치되었다. 추도비 옆에는 영현승천상 지하에 조성된 무명용사 봉안실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다. 봉안실에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 중 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유해 5,870위가 안장되어 있다.

2.1.2. 중국

파일:Screenshot_20230609-074139_Chrome.jpg
베이징에 자리한 인민영웅기념비
三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們永垂不朽
三十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們永垂不朽
由此上溯到一千八百四十年从那時起为了反对内外敌人争取民族独立和人民自由幸福在厯
次鬥争中牺牲的人民英雄們永垂不朽

3년간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10]중에 희생된 인민영웅들은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
30년간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11]중에 희생된 인민영웅들은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
1840년부터[12] 내외의 적에 대항하고 민족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희생된 인민영웅들은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

천안문 광장인민영웅기념비

2.2. 유럽

2.2.1. 영국

파일:영국 무명용사의 묘.jpg
The Unknown Warrior
BENEATH THIS STONE RESTS THE BODY
OF A BRITISH WARRIOR
UNKNOWN BY NAME OR RANK
BROUGHT FROM FRANCE TO LIE AMONG
THE MOST ILLUSTRIOUS OF THE LAND
AND BURIED HERE ON ARMISTICE DAY
11 NOV: 1920, IN THE PRESENCE OF
HIS MAJESTY KING GEORGE V
HIS MINISTERS OF STATE
THE CHIEFS OF HIS FORCES
AND A VAST CONCOURSE OF THE NATION
이 비석 아래에
이름도, 계급도 알 수 없는
한 영국 용사의 몸이 누워 있다.
국토에서 가장 빛나는 곳에 뉘이기 위해
프랑스에서 수습하여
조지 5세 국왕 폐하,
국무대신,
군대 상관,
수많은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1920년 11월 11일 휴전일에
이곳에 묻혔다

THUS ARE COMMEMORATED THE MANY
MULTITUDES WHO DURING THE GREAT
WAR OF 1914 – 1918 GAVE THE MOST THAT
MAN CAN GIVE LIFE ITSELF
FOR GOD
FOR KING AND COUNTRY
FOR LOVED ONES HOME AND EMPIRE
FOR THE SACRED CAUSE OF JUSTICE AND
THE FREEDOM OF THE WORLD
1914-1918년의 대전쟁에서
하느님을 위해
국왕과 국가를 위해
사랑하는 이들, 고향과 대영제국을 위해
정의라는 신성한 대의를 위해
세계의 자유를 위해
사람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수많은 자들을 기린다

THEY BURIED HIM AMONG THE KINGS BECAUSE HE
HAD DONE GOOD TOWARD GOD AND TOWARD
HIS HOUSE
그는 하느님과 가문을 위해
선을 행하였으므로
이곳에 왕들과 함께 묻노라

영국 런던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부에 설치된 무명용사의 묘.
파일:영국 무명용사의 관 안치 전.jpg
매장되기 전 잠시 수도원에 모셔진 무명용사의 관

1920년 데이비드 레일턴[13]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수습된 영국군 무명용사들 중 한 명이 대표로 안장되어 있다.

해당 무명용사는 프랑스에서 수습되어 벨기에로 수송된 4개의 관 중 하나를 2명의 장교가 무작위로 선택하여 선발되었다. 당시 눈을 감은 영국 육군 장교가 눈을 가린 채 몇 바퀴 돈 후 관들 사이로 지나가다 그중 하나에 손을 대는 방식으로 뽑았다.

이후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운구된 관은 국왕 조지 5세와 왕실 가족,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을 비롯한 정부 각료, 그리고 전장에서 남편을 잃은 100여 명의 여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무덤 덮개는 벨기에 산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덮개 위에 새겨진 글귀는 황동 탄피를 녹여 제작되었다.
파일:영국 무명용사 안장식.jpg
안치되는 무명용사의 관

유럽 문화의 특성상 성당 바닥에 안치된 다른 무덤은 밟아도 별 상관없지만,[14] 이 무덤만큼은 밟는 것이 금지된다. 때문에 평소에는 관광객들이 실수로 밟지 않도록 경계선으로 접근을 막고 있고, 장례식을 진행할 때에도 관을 운구하는 사람들이 이곳만은 피해서 걸어가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왕실 역시 예외가 아니다.[15]

여담으로 영국에서는 로열 웨딩이 열릴 때마다 무명용사의 묘 위에 신부의 부케를 올려놓는 관례가 있는데, 이는 1923년 조지 6세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결혼식에서 엘리자베스가 입장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사한 오빠 퍼거스를 추도하며 무명 용사의 무덤 위에 부케를 올려놓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2.2.2. 프랑스

파일:프랑스 무명용사의 묘.jpg
개선문 아래에 자리한 무명용사의 묘
ICI REPOSE UN SOLDAT FRANÇAIS MORT POUR LA PATRIE
1914-1918
여기 조국을 위해 순국한 프랑스 군인이 잠들다
1914-1918
덮개돌에 각인된 문구

프랑스 에투알 개선문 아래에 자리한 무명용사의 묘. 1920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프랑스군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해당 전쟁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 또한 기리고 있다.

본래 프랑스 정부는 무명용사의 묘를 팡테옹에 설치하려 했지만, 시민들이 공개 편지 쓰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강력한 반발을 일으키자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상단의 덮개 위에는 프랑스어로 무명용사들이 안장되어 있음을 알리는 문구가 각인되어 있다.

이 무명용사의 묘로 인해 지금도 에투알 개선문은 아치 밑을 지나다닐 수 없다. 이유는 무명용사의 묘를 밟으면 안되기 때문. 때문에 열병식이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기념 퍼레이드 같은 거대한 행사가 열릴 때면 아치 밑을 통과하는 대신 개선문 주변의 환상도로를 크게 한바퀴 도는 형식으로 진행한다.[16]

2.2.3. 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무명용사의 묘.jpg
로마 여신상 밑에 자리한 무명용사의 묘
Gli italiani all'estero alla Madre Patria
어머니 조국으로 돌아온 이탈리아인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에 자리한 무명용사의 묘.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래 발생한 모든 전쟁에서 전사한 이탈리아군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본래 이 무덤은 기념관 건립 계획에 없던 구조물이었다. 그러나 기념관이 워낙 컸던 탓에 여러차례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고, 이때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었던 줄리오 두헤가 무명용사의 무덤을 추가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 아이디어를 받은 주세페 사르코니는 설계를 변경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청동 기마상 바로 앞쪽에 로마를 상징하는 여신상을 세운 후, 그 아래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화를 점화하고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묘를 만들었다.

묘에 묻힐 무명용사는 전선에서 수습된 11구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전사자들 중 한 명을 고르도록 하였다.[17] 이 시신은 1921년 11월 4일 국가장으로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조각상 앞에 안치되었다.

무명용사의 묘는 두 명의 위병들이 지키고 서 있으며, 이탈리아의 주요 국경일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이 월계관을 바치며 참배한다.
파일:이탈리아 무명용사의 관.jpg
지하에 안장된 무명용사의 관

2.2.4. 그리스

파일:그리스 무명용사의 묘.jpg
그리스 국회의사당 앞에 자리한 무명용사의 묘
ΜΙΑ ΚΛΙΝΗ ΚΕΝΗ ΦΕΡΕΤΑΙ ΕΣΤΡΩΜΕΝΗ ΤΩΝ ΑΦΑΝΩΝ
잠들어 있는 무명의 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여기 있나니

ΑΝΔΡΩΝ ΕΠΙΦΑΝΩΝ ΠΑΣΑ ΓΗ ΤΑΦΟΣ
이 지구 전체가 곧 그들의 안식처이니라

2.2.5. 폴란드

파일:Screenshot_20230609-073014_Chrome.jpg
바르샤바 무명용사의 묘
Tu leży żołnierz Polski poległy za Ojczyznę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폴란드의 군인, 여기 잠들다

바르샤바의 사스키(작센) 궁전의 두 건물사이를 이었던 회랑에 있다.

원래 1차대전 이후의 사스키 궁전이 폴란드 육군부 청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사스키(작센) 궁전은 바르샤바 봉기에 분노한 나치 독일에 의해 계획적으로 파괴되었지만 무명용사의 묘는 무명용사를 존중했던 어떤 독일군이 발파 구멍에 다이너마이트를 넣지 않아서 무사할 수 있었다. 사스키(작센) 궁전은 2030년에 복원될 예정이다.

2.2.6. 러시아

파일:크렘린 무명용사의 묘.jpg
크렘린에 자리한 소련군 무명용사의 묘
Имя твоё неизвестно, подвиг твой бессмертен
그대의 이름은 무명이지만 그대의 행동은 불멸이다.
영원의 불꽃 조형물에 새겨진 문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소전쟁에서 전사한 소련군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무덤. 1967년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설치되었다.

군악가 레프 구로브(Лев Гуров)가 편곡한 러시아의 민요 침묵(Тишина)이 이 묘소의 상징곡이다.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주요 인사가 이 묘소를 참배할 때 상징곡이 연주된다.#

2.3. 오세아니아

2.3.1. 호주

파일:호주 무명용사의 묘.jpg
캔버라 호주전쟁기념관에 자리한 무명용사의 묘
He is all of them and he is one of us
그는 그들 모두이며 그는 우리 중의 하나이다

2.3.2. 뉴질랜드

파일:뉴질랜드 무명용사의 묘.jpg
웰링턴 국립전쟁기념관에 자리한 무명용사의 묘
An Unknown New Zealand Warrior
He Toa Matangaro No Aotearoa

뉴질랜드의 무명 용사[18]

2.4. 아프리카

2.4.1. 이집트

파일:이집트 무명용사의 묘.jpg
카이로에 자리한 무명용사 기념물
파일:알렉산드리아 해군 무명용사 기념.jpg
알렉산드리아에 자리한 해군 무명용사 기념물
ب لله لن ل
ل بن لذن قل ف بل لله أ بل ء عند به زقن
صدق لله لعظ
,,,قب لجندى لبى لجهل'''
가장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길을 위해 죽은 자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말고, 하나님의 큰 진리를 깨달아 그분과 함께 살아있음을 기억할지어다

2.5. 아메리카

2.5.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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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는 알링턴 묘지의 영현병(Old Guard)들
Here Rests in Honored Glory an American Soldier Known but to God.
이곳에 신만이 아시는 미국 군인이 명예롭게 잠들어있다.

미국은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워싱턴 D.C를 내려다보는 언덕한 곳에 무명용사들의 안식처가 있으며 대부분 베트남 전쟁까지 전사한 무명용사들이 잠들어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제 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총 네 번의 전쟁터에서 수습된 무명용사들 중 대표로 각 1명씩 안장되어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신원이 파악된 사례가 있는데 베트남 전쟁 대표로 안장된 무명용사가 DNA를 대조한 결과 1972년 전투기 추락으로 전사한 미합중국 공군 소속 마이클 J. 블라시(Michael J. Blassie) 중위로 밝혀져 1998년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권한으로 그의 유골을 무덤에서 발굴한 뒤 그의 고향 미주리에 위치한 제퍼슨 국립묘지로 이장하였으며 현재까지 베트남 대표 무명용사는 안장되고 있지 않다.

걸프전 이후엔 DNA를 대조하고 확인 가능한 기술이 매우 발달되었기에 걸프전 이후 무명용사의 묘는 없다.

앞서 표지사진과 마찬가지로 무명용사를 굳건히 지키는 올드가드들이 있다. 이들은 365일 24시간 항상 무명용사를 지키며 2~3시간씩 교대한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심지어 허리케인이 닥치든 말이다.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는 만큼 조건도 엄격한데, 일단 무조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남자 기준 키가 178cm 이상이어야 하고 복잡한 제식동작까지 모두 외워야 한다.

올드 가드 중에서도 무명 용사 묘역을 지키는 인원들을 위한 총기 컬렉션이 따로 있다. SIG M17 MHS 권총으로 컬렉션의 정식 명칭은 'M17 Tomb Of The Unknown Pistols'. 단 4정만 제작했으며 LS02JUL37A21(침묵), LS02JUL37B21(존경), LS02JUL37C21(존엄), LS02JUL37D21(인내)라는 고유의 총번과 이름을 가졌다.

3. 불명예스러운 범죄자의 경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lot_%22E%22%2C_Oise-Aisne_American_Cemetery.jp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포로 학살, 민간인 임의처형 등 고의적 살인이나 전지강간 살인, 약탈치사 등으로 처형된 미군 94명이 묻힌 E 묘역. 전원 육군 사병 신분이다.

위의 무명용사들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뒤 사형에 처해져 이름이 지워진 군인들도 있다. 프랑스의 페르앙타르드누아(fere en tardenois)에 위치한 우아즈엔 미군 묘지(Oise-Aisne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에는 외따로 떨어진 E 묘역(Plot E)이 있는데 전쟁 중에 살인, 강간, 학살 등의 죄를 지은 뒤 군법에 따라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된 미합중국 육군 사형수가 묻힌 곳이다.

처형된 미군들은 원래 처형지 근처에 묻혔으나 나중에 분위기가 좀 가라앉자 미군도 그건 너무하다 싶었는지 1949년에 이들의 유골을 수거하여 이곳으로 옮겨 정식 장례 절차를 밟아 매장했다. 다만 이들의 군적이 소멸됐기 때문에 무명으로 처리한 것이지 신원은 2009년에 공개되었다. 이곳의 유골들은 유족이 요구해도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전쟁범죄자들의 영원한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이들의 혐의는 위키백과의 우아즈에슨묘지 E 묘역 항목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대부분이 강간살인이다. 대부분 피해자가 1명이지만 증거 은폐를 위해 다른 가족이나 친구까지 살해한 경우도 있었고 희생자의 대부분은 영국프랑스에서 나왔다. 일부 사례를 인용하자면 이렇다.
  • 어니스트 리 클락 육군 상병, 어거스틴 M 구에라 육군 일병: 15살 소녀를 집단강간하고 살해
  • 윌리엄 해리슨 육군 일병: 7세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
  • 로버트 L 피어슨 육군 상병: 75세 노인을 강간하고 살해
  • 블레이크 W 마리아노 육군 일병: 20대와 50대의 두 여성을 강간. 이외 최소 1명을 총으로 살해.[19]
  • 로버트 L 스키너: 19세 여성 마리를 강간하고 살해. 마리의 남자친구도 살해.
유럽에서의 전쟁 기간이 고작 1년도 안 되었음을 감안하면 미군의 규모를 생각해도 상당히 많은 사형이 이뤄진 셈인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초기와는 다르게 자원입대자가 아닌 강제징집병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질이 좋지 못한 인간들도 대거 징병되어 전장에 배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흉악범은 아니지만 탈영죄로 처형된 에디 슬로빅(Eddie Slovik) 미 육군 보병 이병도 입대 전부터 잦은 절도로 인한 전과자라 군복무에 부적절한 인원이었는데 워낙 전쟁이 길어지고 병력이 부족하니까 징병 기준을 완화해 데려온 경우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군에도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럽 지역의 민심이 전쟁 이후에도 중요한 데다 어설프게 처리하면 나치 독일이나 소련이 그걸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에 미군으로서는 이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총 96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 65번 묘의 슬로빅 이병이 1987년에 그가 살인이나 강간 없이 단순 탈영죄로 처형된 점을 감안한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 의해 유족들이 유골을 미국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여 빠지게 되었다. 슬로빅 이병은 일개 육군 병사 신분의 탈영병인데도 위키백과개인 항목이 있는데 2차대전 당시 탈영한 미군은 2만 1천명에 이르고 총살형을 선고받은 것도 49명이 있었지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오직 탈영죄만 적용하여 사형 집행까지 당한 건 이 사람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즉, 슬로빅 이병을 제외한 탈영 외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들 중 사형을 당한 경우는 없다. 그 외에도 1990년에 27번 묘의 알렉스 F. 미란다(Alex F. Miranda) 육군 이병이 미국 본토로 이장돼 현재 총 94명이 안장돼 있다. 미란다 이병은 1944년 상관살해 혐의로 사형당했으나 이후 유가족들이 청구한 재심 판결에서 만취 상태에서의 과실치사로 인정받았다. 이에 부당한 사형 선고로 인정받아 캘리포니아의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

4. 매체에서

4.1. 게임

4.1.1. 도미네이션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도미네이션즈/추가 정보/기타(이벤트) 문서
71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도미네이션즈/추가 정보/기타(할인 이벤트) 문서
4.2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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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 용사 관련으로 이벤트 에피소드와 할인 이벤트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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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헝가리의 잡지 물트코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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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시 1세 무명용사 어틸러 요제프 라코치 페렌츠 2세 센트죄르지 얼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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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Greeks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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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멜리나 메르쿠리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니코스 카잔차키스
16위17위18위19위20위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호메로스 마노스 하지타키스 레오니다스 1세 히포크라테스
21위22위23위24위25위
피타고라스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마리아 칼라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26위27위28위29위30위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엘 그레코 콘스탄티노스 11세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리가스 페레오스
31위32위33위34위35위
아리스 벨루키티오스 요안니스 메탁사스 니코스 갈리스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코스 데모크리토스
36위37위38위39위40위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 야니스 마크리야니스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 야니스 리트오스
41위42위43위44위45위
테미스토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투키디데스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파블로스 멜라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아테네의 크리스토둘로스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디미트리 나노풀로스 무명용사
51위52위53위54위55위
페이디아스 아리스토파네스 코스티스 팔라마스 에톨리아의 코스마스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소포클레스 니코스 벨로야니스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에피쿠로스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오톤
66위67위68위69위70위
반젤리스 솔론 클레이스테네스 아이스퀼로스 바실리오스 2세
71위72위73위74위75위
콘스탄티누스 1세 이온 드라구미스 코스타스 시미티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테오 앙겔로풀로스 니코스 실루리스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에우리피데스
81위82위83위84위85위
카롤로스 코운 유스티니아누스 1세 라키스 라조폴로스 헤로도토스 다나시스 벤고스
86위87위88위89위90위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카티나 팍시누 알리키 부지욱라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91위92위93위94위95위
바실리스 치차니스 피로스 디마스 마노스 로조스 마노리스 글레조스 엘레나 무잘라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필리포스 2세 디미트리스 혼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탈레스 프락시텔레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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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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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극무공훈장 부장.png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1951
김용식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김용배
육군준장
1951
박노규
육군준장
1951
김백일
육군중장
1951
김홍일
육군중장
1951
함준호
육군중장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1951
최용남
해병소장
1951
김성은
해병중장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1952
이형근
육군대장
1951
권동찬
육군준장
1952
김종오
육군중장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1953
장덕창
공군중장
1953
최용덕
공군중장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1953
김교수
육군대위
1953
김한준
육군대위
1953
김용배
육군대장
1953
민기식
육군대장
1953
임충식
육군대장
1953
한신
육군대장
1953
김점곤
육군소장
1953
이성가
육군소장
1953
이용문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1953
김동빈
육군중장
1953
김종갑
육군중장
1953
백인엽
육군중장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1953
유재흥
육군중장
1953
최영희
육군중장
1953
함병선
육군중장
1953
최치환
총경
1954
김만술
육군대위
1954
허봉익
육군대위
1954
김경진
육군소령
1954
김웅수
육군소장
1954
송석하
육군소장
1954
엄홍섭
육군소장
1954
임선하
육군소장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1954
김옥상
육군일병
1954
조재미
육군준장
1954
안낙규
육군중사
1954
박병권
육군중장
1954
이응준
육군중장
1954
이준식
육군중장
1954
장도영
육군중장
1954
최석
육군중장
1954
최창언
육군중장
1954
박옥규
해군중장
1954
김석범
해병중장
1955
김창룡
육군소장
1955
정긍모
해군중장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1960
미군무명용사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1961
국군무명용사
-
1964
박정희
대통령
1966
이종세
육군상사
1966
강재구
육군소령
1966
이인호
해병소령
1967
송서규
육군대령
1967
채명신
육군중장
1967
지덕칠
해군중사
1967
정경진
해병대위
1967
신원배
해병소위
1968
최규식
경무관
1968
이익수
육군준장
1968
최범섭
육군중령
1970
이세호
육군중장
1972
이무표
육군대위
1972
임동춘
육군대위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1980
전두환(취소)
육군대장
2002
장철부
육군중령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2011
조달진
육군소위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


[1] 올드 가드라고 불리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사진 속 군인 3명이 올드 가드.[2] 2011년 웨일스 공 윌리엄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식에서의 모습.[3] 본래 서양에서 교회나 성당 바닥에 조성된 묘는 고인이 성당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기에 밟고 다녀도 되지만 무명용사의 묘는 예외라고 한다.[4] 1923년 조지 6세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결혼식 때부터 시작된 [age(1923-01-01)]년이나 된 오랜 전통이다.[5] 아주 희귀한 경우지만 6.25 전쟁 당시 전사 처리되었으나 사실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살던 노인이 탈북하여 돌아온 도 있다.[6] 특히 학도병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는데 낙동강 방어 당시 수많은 학도병들이 끌려갔으나 마구잡이로 끌고가서 분명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나 군적이 남지 않았으니 성인이 돼서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7] 1955년[8] 영화 포화속으로의 모티프가 된 그 전투이다. 교과서에 실린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의 주인공 이우근 학도병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9] 해당 유해는 현충탑이 건립된 이후 현충탑 위패봉안관 지하의 무명용사 봉안실로 이장되었다.[10] 1946년부터 1949년 신중국 수립 이전까지 있었던 제2차 국공 내전(国共内战)을 의미한다.[11] 대한민국의 3.1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1919년 5월 4일에 있었던 반제국주의 운동인 5.4 운동부터 1949년 신중국 수립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12] 1840년 영국이 일으킨 제1차 아편전쟁시기부터 1949년 신중국 수립까지 외세에 침탈당했던 기간인 백년국치를 한다.[13]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이자 군종목사.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로 1916년 서부전선에서 장교와 두 병사를 구한 공로로 십자무공훈장(Military Cross)을 수여받았다.[14] 이는 하느님의 성전인 성당을 천국과 동일시하며 천국 바로 곁에서 묻히고 싶은 염원으로 인해 성당 바닥에 안치되고 싶어하는 문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 무명용사의 묘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당 바닥에 만들어진 무덤들은 밟고 다녀도 괜찮다. 이는 안치된 고인이 성당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15] 본 문서 맨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그 예.[16] 1940년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한 이후 파리 시내에서 거대한 규모의 개선행진을 벌였는데, 이때도 무명용사의 묘 만큼은 피해서 행진했다.[17] 이 시신을 고른 사람은 마리아 베르가마스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일한 자식을 잃은 피해자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바람직한 어머니상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기념관에 묻힐 시신을 골랐다.[18] 영어와 마오리어로 적혀 있다.[19] 위키백과의 해당 항목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2명에 대한 강간은 확인됐지만 살인이 문제인데 41세의 누가 살해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살해하는 걸 목격한 것인지, 강간 피해 여성을 살해한 것인지가 확실치 않다. 다만 살인까지 저지른 게 아니면 집단항명 등의 중죄가 아닌 한 사형 집행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았다는 점에서 미군 당국이 군법재판에서 그를 살인죄로 다룬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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