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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51426><colcolor=#fff> 출생 | 1921년 8월 3일 | ||
아이치현 나고야시 | |||
사망 | 2011년 11월 26일 (향년 90세) |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87번 | ||
본관 | 강릉 유씨[1] | ||
호 | 국헌(菊軒)·자헌(自軒) | ||
재임기간 | 제3대 연합본부참모총장[2] | ||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6일 | |||
제19대 국방부장관 | |||
1971년 8월 26일 ~ 1973년 12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51426><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유승렬, 어머니 경주정씨 | |
배우자 | 윤의상 | ||
자녀 | 장남 유태종, 차남 유형종 장녀 유인숙, 차녀 유영희, 삼녀 유미혜 등 2남3녀 | ||
학력 | 경원심상소학교 (전학)[3] 나남심상소학교 (전학)[4] 경성삼판심상소학교 (졸업) 용산공립중학교 (전학)[5] 신의주중학교 (졸업)[6]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 제55기)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 ||
경력 | 초대 주(駐)타이 대한민국 대사 주 스웨덴 대한민국 대사 주 이탈리아 대사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 제19대 국방부장관 대한석유공사 사장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 성우회 부회장 성우회 회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 군사영어학교 (1기) |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
1941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60년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연합본부참모총장 | ||
주요 보직 | 제1야전군사령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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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fffff {{{-1 1950년 6월 17일 38선 부근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왼쪽부터 유재흥, 존 덜레스,[7] 신성모)[8]북침을 모의하는 미 국무부 덜레스 놈과 남조선 괴뢰국방군의 모습이라고 선전한다.]}}} }}} |
6.25 전쟁 개전 직전인 1950년 6월 중순에 2사단장에서 7사단장으로 전보되어 적 주공이었던 동두천, 포천-의정부 축선을 담당했고, 이후 한강 방어 전투에서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제1군단의 부군단장을 거쳐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영천 전투를 이끌었다. 그러나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2군단이 괴멸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고, 현리 전투 당시에 패주한[9] 제3군단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최종계급은 대위로, 연합군의 본토 상륙을 대비해 창설되어 구마모토에 배치된 제206사단 중박격포연대 제2대대장으로 종전을 맞았다), 이 때문에 일본육사 제26기 졸업생으로 일본육군 대좌를 지낸 부친 유승렬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군 장성시절과 국방부 장관시절 한국어가 서투르고 일본어에 유창해서 한국어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는 다수의 증언이 있으며(김일평 교수 회고 참조), 퇴역 후 외국대사로 있을 때에도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유창했다고 미대사관 기밀문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생도 출신으로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위탁 교육을 보내져 육사 26기로 임관한 부친 유승렬이 나고야에서 근무하던 시절 출생하여[10]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조선군(일본제국)의 최전방인 함경북도 경원군과 나남 평안북도 신의주시는 물론 후방 경성부와 평양시에서도 주로 일본군 부대 주둔지 근처에 장교들이 집거지에서 거주한 관계로 주로 일본인들이 취학하던 심상소학교 및 구제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제주 4.3사건 당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이 되어 제주도에 부임하여 유화책을 펴서 중산간 주민들의 귀순을 유도, 제주를 수습하고 도민의 목숨을 구한 공적으로 긍정적 평가가 있다. 당시 그의 유화책에 대한 평가는 미군사고문단에서도 좋게 나왔고, 당시 제주도 도지사가 "유재흥 대령이 사람이 좋은데, 사람 좋은 유재흥 대령이 떠날 경우 포악한 함병선 대령이 다시 제주도 사령관이 되면 큰일난다"고 한 증언도 엄연히 남아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21년 8월 3일에 부친의 복무부대인 일본육군 제6연대가 위치한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부친 유승렬과 모친 경주정씨 사이의 3남1녀[11]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다섯 살 때까지 나고야에서 거주했다고 하며, 유재흥이 노년에 쓴 회고록(격동의 세월)에는 나고야성을 둘러싼 해자 부근을 뛰놀던 일이 그때까지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서술했다.1926년 조선군 제19사단 보병76연대(나남)로 전속된 부친 유승렬 대위를 따라 조선 함경북도 나남(현재 청진시 나남구역)으로 건너왔으며, 뒷산에 있는 사찰에 부속된 유치원에 다녔다. 이 때 유치원에서 원장 스님의 전쟁놀이가 훗날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인은 회고한다.
1년 후 경원군으로 이사해 두만강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집에서 살게 되었고, 1929년 경원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인구 1,000명 수준의 최전방 도시인 경원에는 정일권 또한 살고 있었고 같은 학년의 경원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나 내지에서 태어나 줄곧 일본식 교육을 받은 유재흥은 주로 일본인들이 취학한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 정일권과 알게 될 때까지 그와 같은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3학년 때 다시 나남심상소학교로 전학했는데, 1932년 4학년을 마칠 무렵 부친 유승렬이 제20사단 보병79연대(용산)로 이임하면서 경성부 용산 후암동으로 이사해 경성삼판심상소학교(서울삼광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유재흥의 삼판소학교 동급생 200여 명 중 조선인은 국방장관을 지내게 되는 최영희(군인) 장군 단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2.2. 청소년기
용산중학교 1학년 시절 유재흥 |
조선으로 건너온 후 유재흥은 유승렬이 용산(보병79연대)에 근무할 때 4년 정도 경성에 거주한 것을 제외하면, 최전방 야전부대에서 복무한 부친을 따라 함경북도와 평안북도를 전전하며 살았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5.15 사건(1930)과 2.26 사건(1932)에 가담했던 황도파 장교들을 귀양보내는 차원에서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벽지에 위치한 조선군 국경경비대로 대거 배치하였고, 유재흥은 이들이 유승렬을 찾아와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것을 가끔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 내지에서 군국주의에 반대한 교사들이 산간 벽지인 평북, 함북에 쫓겨와있었는데 그래서 당시 조선 최고의 명문고를 다투던 용산중학교를 다니다가 신의주중학교로 전학갔음에도 유재흥은 회고록에서 신의주 시절 교사들을 높게 평가하였다.
1919년 고등학교령 개정 이후 구제중학교 4년 수료자에게도 상급학교 입시 자격이 부여되었으나, 실제 합격자는 10% 미만으로 소수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중학교 5년 졸업 후에도 재수/삼수를 하는 것도 흔한 상황이라 당시에는 중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응시해 합격한 자를 四修라 하여 수재로 취급했다. 유재흥 역시 신의주중학교 4학년을 수료한 후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입시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하였다.
사실 육사 입학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하는데, 입시 수험 중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고 한다. 1937년 신의주중학교 재학생이던 유재흥은 사흘간의 1차 시험을 보병77연대 본부가 있던 평양에서 쳐야했고, 이를 위해 신의주에 있던 자택을 떠나 부친의 1년 후배이자 채병덕의 장인이 되는 백홍석 소좌(당시)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 때, 백홍석은 유재흥을 보고 "너무 말랐다"며 밥을 억지로 네 공기씩이나 먹였고, 그 덕분에 유재흥은 신체검사에서 기준 몸무게인 45kg를 간신히 넘겨 통과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도쿄에서 치러진 2차 시험 때는 신체검사 X레이에서 과거 늑막염을 앓았던 자국이 발견되어 탈락할 뻔 했지만, 유재흥의 보증인이[12] 부친 유승렬이 나고야의 보병6연대에서 초임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직속상관(중대장)으로 모셨던 이시카와(石川房三) 소장(여단장 역임 후 예편)이었던 덕분에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유재흥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최종 합격하여 입교했다.
2.3.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생도 시절 유재흥(左), 전원상(中), 김창규(右) 등 조선인 동기생 |
입학시험에 합격한 유재흥은 구제중학교를 4학년 수료 후 1년 조기 졸업하고 1938년 육사 예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육사 예과의 교육 과정은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와 마찬가지로 5년 과정 졸업자를 기준으로 짜여져있었기 때문에 유재흥은 초반에 교육과정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졸업 성적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당시 일본육사 예과 생도들은 중일전쟁의 여파로 수학 연한이 단축되어 1년 과정을 마친 후 병종, 병과, 부대가 결정되었는데 유재흥은 당초 기병 병과를 희망했으나 신검에서 떨어져 보병으로 분류되었고, 이에 크게 낙심했지만 이시카와 소장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고 남은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고 한다. 육사 시험 보증인이자 후견인으로서 이시카와 소장 내외는 유재흥의 육사 생활 내내 그를 살뜰히 돌보아주었다.
예과 입교시 육사 예과의 교수부장으로 있었고 대부 근무를 나갈 당시에는 근위2여단의 여단장으로 재임 중이었던 영친왕 이은의 배려로 유재흥은 영친왕의 근위보병2여단 예하의 근위보병3연대(도쿄)로 배속되었다. 그는 4개월간의 대부 근무를 마치고 예과를 수료,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로 진학하였다.
육사 본과에서는 예과 때와 달리 방황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고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와중에 단비와 같은 일요일 외출을 기다리며, 일요일마다 영친왕이 마련해준 일요하숙에서 이용문, 박범집, 강석우, 노태순 등의 선배들과 후배 정래혁, 신상철 등 계림회 선후배들과 시간을 보내며 친목이 두터웠다고 한다. 특히 예과 조선인 동기인 김창규와 전원상은 병과가 달라 본과 진학 후 만날 기회가 드물었는데, 일요일마다 계림회에서 모여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또 영친왕이 매년 계림회 구성원들을 중국집에 데려가 포식하게 해주었으며, 본인이 참석하지 못할 때엔 시종 무관을 대신 보내어서라도 회식을 시켜줬다고 한다. 계림회원들은 매년 명절에 아카사카에 거주하던 영친왕 그리고 시부야에 살던 이건 공, 이우 공에 세배를 드렸다고 한다.
본과로 진학하자 정일권을 비롯한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30여 명이 편입해왔으나 만주국 생도대로 따로 편성되었고 과목마다 이들은 수업에서 제외되기도 하는 등 별도 취급되어 조선인(계림회)이나 기타 일본육사 생도들과는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교정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재흥은 육사 본과에서 황족인 가야 구니나가(賀陽邦寿)[14]와 깊이 교류하며, 높은 신분에도 조선인인 자신을 차별하지 않고 친밀하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구대장과 중대장 역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자신을 아껴주어 후일 동기생들로부터 질시 어린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또 그는 본과 생활을 하면서 생도들 사이에도 파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5.15사건과 2.26사건 등 쿠데타의 여진이었는지는 몰라도 "천황께 충성"을 강조하며 정통파를 자처하는 파벌이 하나 있었고, 자신도 그에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으면서 엄격한 군율과 상명하복 체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이 인다는 데 많은 생각을 했고, 자신은 그러한 가입 권유를 거절한 후, 오로지 조선인 생도들의 일요하숙인 계림회와 예과 시절 결정된 자대인 근위보병3연대 모임에만 참석했다고 한다.
예과 때 휴가에는 질병으로 귀가하지 못했지만, 본과 휴가 때는 평양에 있던 자택으로 가서 보병77연대 평양유수대장으로 있었던 부친 유승렬 대좌의 친구에게서 일본도를 받아 군도로 패용하기 시작했다.
1941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상위권으로 졸업(제55기)[15]하고 견습사관으로 동기생 3명과 함께 근위보병제3연대 유수대(東京 제6부대) 보병포중대에 배치되었다.
2.4. 일본 육군 복무 시절
근위보병3연대 유수대 보병포중대에 배치된 직후 유재흥은 치바 소재 보병학교에 초군반에 입교하여 3개월간 보병포 교육을 이수했다. 부대 복귀 이후 연대장 橫井忠道를 임석상관으로 후지산 연습장에서 있었던 포사격 검열에서 유재흥은 1.2km 거리의 사람 모양 표적을 초탄으로 명중시키는 행운을 얻어 연대장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연대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소대장으로서 유재흥은 조전(교범)에 따라 원리 원칙대로 사심없이 엄격히 교육훈련을 지도하면서, 병사들의 신상 파악 때는 숫총각이면서 성관계 여부에 대해 쑥맥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진주만 공습과 함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견습사관을 마치고 마침내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중위로 진급하고서부터는 육군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전술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조선인 중에서는 조선 왕족을 제외하면 부친의 동기생인 홍사익이 유일한 육대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오기가 생겨 이에 전념했다고 하는데, 연대장을 비롯한 상관들에게 예쁨을 받던 유재흥이었기에 근무 시간에도 공부할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소속 연대의 육대 졸업생과 재학생이 와서 개인지도도 해주었다고 한다. 특히 재학생들은 당시 육대에서 중점을 두고 가르치는 전술과 최근 출제 추이 등에 관해 자신의 휴식 시간을 희생하가며 밤을 새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육대 준비 끝에 1945년 5월 육군대학교 입시에 응시했으나 동년 8월 일제의 항복으로 합격 여부를 통지받지 못하고 입학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근위보병3연대 유수연대의 보병포중대장(대위)으로 근무 중이던 1945년 3월 본토 결전을 대비해 신편 사단들이 편성되면서 유재흥은 제206사단 중박격포연대 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포병학교에 입교해 1개월의 중박격포 교육을 받은 후 부대 편성과 훈련을 마치고 규슈 구마모토의 아리아케(有明) 해안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으로 일제가 항복하면서 유재흥은 무장해제 후 무기를 넘기고 교토에 위치해있던 206사단 사령부에서 복원 절차를 밟고 도쿄에서 살았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부친 유승렬 대좌는 제20사단 위생대장으로 남방 전선에 나가있었고, 모친이 1945년 8월 6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유재흥은 하루 빨리 조선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 도쿄 대본영에서 수송참모로 있던 구메 고로(久米五郎) 중령이 유재흥의 대부 근무 시절 근위보병3연대의 훈육중대장이었던 인연으로 교통편을 주선해준 덕분에 유재흥은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로, 그리고 후쿠오카에서 배편으로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9월 28일 서울에 돌아갈 수 있었다.
2.5. 6.25 전쟁 이전
1945년 12월 부친의 동기생인 이응준 장군의 추전을 받아서 미군정의 군사교육기관인 군사영어학교에 1기로 입교, 다음해 1월 8일에 졸업하면서 일본육군의 대위 계급을 인정받아 남조선 국방경비대 정위로 임관했다(이형근, 채병덕에 이은 군번 3번을 받았다). 최초 보직은 조선경비대총사령부 보급관(현재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으로 초임부터 요직에 배치되었다.1946년 3월에는 함경남도 정평 출신으로 만주 용정에서 광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월남해 숙명여대를 졸업한 윤의상(尹義相)과 결혼하였다.
창군기 초반에 임관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유재흥의 진급은 매우 빨라, 여단 참모장을 거쳐 1948년에 대령으로서 여단장과 사단장(제6보병사단 창설 당시 초대 사단장)을 역임할만큼 능력과 장래성을 인정받있다고 한다. 또한 1949년 부친 유승렬의 국군 대령 특별 임관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어 동년 제주도전투지구 사령관으로 부임, 4.3 사건 후반기의 한국군을 총지휘했다.
이 시점에서의 의혹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으나, 일단 4.3사건 후반기의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지휘책임은 있다. 물론 유재흥이 맡았을때는 4.3사건은 끝물인 상태여서 학살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건 이응준이 비난을 받아야 할 일. 당대에도 유재흥은 4.3사건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평가받으며 불과 28세의 나이에 장군(준장)으로 진급했다.
2.5.1. 4.3 사건 사령관 시절
유재흥은 4.3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미군 비밀문서 『4·3 종합보고서』[16]에서도 다음처럼 나온다.
반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요구했다.
4.3 보고서만 해도, 유재흥은 토벌대의 학살속에서 제주도민들을 구해낸 인물로 평가된다.[17]
이날 2연대가 작전을 벌인 후 이웃마을 봉개리에 주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살아 남은 주민들은 더 이상 마을 부근에 은신할 수 없었다. 이후 주민들은 더욱 깊은 산속으로 은신해 들어갔다.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온 것은 1949년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사이였다.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내려왔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하산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이젠 막 죽이진 않는다더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유재흥 대령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이른바 ‘선무공작’을 펼 때이다. 앞서 하산한 사람이 산으로 올라와 이런 사실을 알려주자 비로소 내려온 것이다. 이는 앞서 벌어졌던 집단총살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가를 말해준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작전을 함병선 2연대장이 주도한 제1기(3월 2일~3월 마지막 주)와 유재흥 사령관이 비로소 제주에 도착해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한 제2기(3월 마지막 주~5월 15일)로 나눌 수 있다. 실제 상황에 들어가면 1기와 2기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유재흥이 오기 전만해도 4.3 사건 상황은 이랬다고 묘사된다.사살‧포로자 숫자에 비해 노획한 무기가 너무 적다는 점은 함병선 연대장이 주도한 3월 한 달 동안의 이른바 ‘섬멸전’의 성격을 말해 준다. 사살‧포로자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숨어 지내던 비무장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작전은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한 미군 보고서(7)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는 1949년 3월 말까지의 제주 상황에 대해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유재흥 장군이 온 뒤부터는 이렇게 된다.3월 마지막 주에야 비로소 제주에 도착한 유재흥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은 선무공작을 실시하는 한편 지금까지 해안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산악지역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유재흥 사령관은 남아있는 무장대 체포와 특히 ‘2만 명 가량의 피난민’을 하산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지휘권을 잡은 즉시 유(재흥) 대령은 전임자 함병선의 가혹한 작전(이 작전은 신분이나 무기의 소지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것을 포함한다)을 바꾸어 즉각적으로 사면계획을 시작하였다. 가능한 한 포로들을 붙잡아서 유 대령 자신이 직접 심문하였다. 포로들은 양심의 가책을 나타냈으며 만일 그들이 게릴라 전투요원으로 가담한 자가 아니면 음식과 담배 등을 주어서 석방하였다. 현재까지 이러한 방법의 결과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석방된 포로들은 유 대령의 부대를 무기 은닉처로 안내할 것이며 그들의 동료들에게 항복하면 모두 사살 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유 대령은 자신의 사면계획 하에서 석방된 포로들마다 최소한 6명씩을 데리고 왔다고 추산하고 있다. (“Visit to the Island of Cheju,” May 18, 1949, RG 319: Records of the Army Staff, Entry 85: Army-Intelligence Document File, Box 3736.)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이같은 ‘귀순자’ 증가에 관해 4월 7일부터 13일까지 제주를 시찰하고 온 이윤영 사회부장관은 “요즘 귀순자가 늘어가고 있는데 내가 갔다온 1주일간만 하더라도 898명이나 귀순자가 있었고 4월 13일 현재 합계 3,500명이 돌아왔었다. 제주도 5개 수용소에 있는 자가 3,174명이 있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49년 4월 15일자, 2면 #이윤영 사회부 장관 제주 시찰담). 귀순자는 점점 늘어 5월 11일 현재 6,000여 명에 달했다(조선일보 1949년 5월 20일자, 2면 #귀순 육천여명 제주전투부대성과).
유재흥이 재평가받는 경우 대부분은 4.3 사건에서 보여준 처신에 근거를 둔다.별개로 유재흥은 다른 성우회 회원과 함께 4ㆍ3사건법이 반란세력과 진압군경을 동일한 위치에 둠으로써 헌법 제39조 제2항[18]에 반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반란세력은 민간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2.6. 6.25 전쟁에서
2.6.1. 의정부 방어전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한 뒤 부친 유승렬이 사단장을 역임한 바 있는 대전의 제2보병사단에서 사단장으로 있었 유재흥 준장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전의 돌연한 인사이동 과정에서 적의 남침시 주공 방향으로 예상된 의정부 북부의 제7보병사단(구 수도사단) 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49년 10월 명태사건으로 김석원과 함께 예편된 채병덕이 총참모장에 복귀한 후,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이응준, 유승렬 등 군 원로들을 전방 사단장에서 후방으로 배치하고, 그 자리를 고향 후배인 백선엽(1사단장)과 일본육사 후배인 유재흥(7사단장) 그리고 일본육사 동기인 이종찬(수도경비사령부)[19] 등으로 교체하며 직할 체제를 구축했고, 유재흥은 7사단장으로서 개전 직후 동두천, 포천 전투와 의정부 방어전에 참가했다. 문제는 해당 인사이동이 이형근이 주장하는 한국군 10대 의혹이라고 불리는 6.25 전쟁 당시의 열 가지 의문사항 중 하나로, 6.25 전쟁 개전 직전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갑자기 서로 자리를 바꿈으로서 현지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개전을 맞이했기 때문이라서 유재흥도 그 피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의정부 방어전의 패배 원인에서 당시 7사단장이었던 유재흥에게 지휘관으로서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가 몇 차례 겪음으로서 후에 위키나 일부 언론 보도에서 매우 혹독한 평판을[20] 듣게 된 계기인 유재흥이 전선 우익을 맡은 경우 전 전선이 유재흥 담당 방면을 시작으로 붕괴하는 현상은 이때 처음 발생했다.
다만 고려할 점은 있는데, 당시 한국군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3개 보병연대 편성이었으나 당시 7사단은 개전 직전 내려진 명령에 따라 예비대였던 3연대가 수경사(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로 배치돼 떠났고, 대신 오기로 했던 25연대는 여전히 경상도 빨치산을 소탕하였기에 결국 개전 당시 2개 연대 편성으로 포천과 동두천에 각1개 연대씩, 그것도 농번기 외출로 영내 병력이 사단 전체에 4,500명 가량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사 T-34 전차 100여 대로 증강된 3개 사단 규모의 북한군 주공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6월 26일에 있었던 당시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의 무리한 반격명령을 받아 이를 수행해서 자신이 담당한 전선에서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채병덕이 투입한 포천 방면의 부대는 숫자가 적어서[21] 의정부 근처의 축석령을 지키다가 일거에 돌파당하는 바람에 7사단의 퇴로가 차단돼서 사실상 붕괴한 것까지 감안한다면, 최소한 개전초기 그가 지휘한 7사단의 붕괴로 인한 전선붕괴는 그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당시 북한군은 4개 축선으로 공격했는데 수색 방면에서는 백선엽의 1사단이 비록 임진강 철교 폭파에 실패하긴 했지만 6월 27일까지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최후방어선인 봉일천선에서 원 주저항선인 임진강선을 탈환하기 위해 역습을 계획할 정도였다. [22][23][24][25]
한편 당시 춘천 방면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작살내고 있었던 김종오 장군의 6사단, 그리고 동해안에서 일시적으로 강릉을 빼앗겼지만 곧 재탈환하고 적의 진군을 막고 있던 8사단(이성가)역시 적의 공세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적의 주공을 쳐맞은 7사단은 개전 첫날 무너져서, 의정부 지구와 창동 지구 전투를 치르고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사단장 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섣부르다. 북한군의 전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론이기 때문이다. 1사단의 개성-문산 축선, 6사단의 춘천-홍천 축선, 8사단의 동해안 축선과 달리 7사단이 담당한 의정부 축선은 그야말로 북한군의 주공 중의 주공으로, 북한군 3, 4사단과 제105땅크여단이 공격해와 전력차가 가장 극심한 축선이었다. 북한군 작전 기도상 의정부 축선으로 돌파한 주공이 한강 북방 서울에서 1차적으로 한국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이 의도였기 때문에 1사단, 8사단 담당구역은 상대적으로 압력이 덜했으며, 6사단의 춘천 축선도 한강 이남에서의 이중포위망 완성을 위해 중요한 공격축선이기는 했지만 의정부 축선만큼의 병력집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객관적 전력차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전차화기가 태부족한 2개 연대로 6개 연대와 1개 땅크여단을 집중, 돌파를 시도하는 적 주공에 맞섰을 때는 막는 것이 대단한 것이고 막아낸 사람이 명장인 것이다. 패했으니 명장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졸장인 증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26]
그리고 유재흥이 처한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면,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15일 전에야 7사단장에 취임했다. 그 직후 그가 전방의 북한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육본에 방어기재 확충을 요청하였으나 지속된 38선상 국지적 충돌에 익숙해진 미 군사고문단이 이를 웃어 넘기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못했다. 또한 공간사에서는 유재흥이 사령부에서만 지휘하였음을 지적하나, 개전 직후 7사단의 참모기능이 발휘되기 어려운 상태였다. 참모장 김종갑 대령은 25연대 문제로 온양에 가있었고, 정보참모 이세호 소령은 고군반 교육을 받느라 자리를 비웠고, 군수참모 윤영모 소령은 통신두절로 소집되지 못했다. 그 업무들을 처리해야 되는 사람은? 당연히 유재흥이었다.
2.6.2. 영천 전투
1950년 8월 다부동 전선에서 유재흥 2군단장
지연작전기간(1950.7~8월. 한강방어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철수 과정)에서 제1군단(군단장 김홍일 소장)의 부군단장으로서 수 차례의 지연전투를 지휘하며 낙동강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한 유재흥 준장은 1950년 7월 한국군의 두 번째 군단인 제2군단 군단장이 되었고 9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북한군의 9월 공세에서 8사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방어선이 안정돼 있던 2군단 예하 1, 6사단에서 증원병력을 쉽게 차출하기 위해 2군단으로 소속이 변경됐는데, 이에 따라 영천 전투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즉, 유재흥 군단장은 백선엽 1사단장, 김종오 6사단장의 직속상관으로서 예하 병럭과 8사단 등의 배속 병력을 모두 맡아 영전대회전을 총지휘한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 제29연대 CP를 방문한 유재흥 2군단장
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영천 시내를 피탈당한 8사단장 이성가 대령에게 사단 병력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하여 15사단의 남진을 저지토록 한 후,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를 차출하여 이전에 증원된 7사단 5연대, 8연대와 함께 영천 시내로 역습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습 위협과 지형상의 문제로 2제대가 후속하지 않았던 북한군 15사단의 공세탄력은 완전히 꺾이고 만다. 그리고 9월 9일 2군단장 명령에 의거, 영천 일대에 낚싯바늘 형태로 포진한 한국군 6개 연대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완전히 둘러싸인 북한군 15사단은 4,000명 이상의 손실을 입으며 와해됐고, 한국군은 영천 시내는 물론 북방의 고지군까지 장악하면서 13일 경에는 원 방어진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영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를 드라마틱한 승리로 바꿨다는 점에서 '대회전'으로 평가된다.
유재흥 준장은 영천 전투에서 8사단을 2군단 예하로 예속 변경한 육본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예하부대에서 절약한 병력을 차출하여 역습, 영천 탈환이란 부여된 목표를 달성함은 물론 북한군 15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영천 방면에서 국군의 선전으로 사실상 적화통일의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정일권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재흥 준장은 군단 좌인접 미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Hobart Gay) 소장에게 영천의 상황이 급박하니 전차 1개 소대만 빌려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는데, 왜관 정면도 전황이 좋지 않아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정일권에게 군단장이 돼서 고작 전차 다섯 대를 빌리러 갔다 퇴짜를 맞는 가난한 지휘관임을 한탄했다고 한다.[27] 다행히 월튼 워커 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게이 소장에게 증원을 지시한 덕분에 2군단은 영천 방면 역습에서 미군 전차소대를 요긴한 직사화력 플랫폼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28] 북한군 전차에 당하기만 하다 드디어 아군 전차가 나타나자 보기만 해도 사기가 올라가는 국군 장병들은 덤.
2.6.3. 북진과 후퇴
1950년 연말 청천강 전투를 지휘하며 7사단을 방문한 유재흥 2군단장
북진기에는 2군단장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7사단을 1사단에 앞서 평양시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유엔사 맥아더 사령관이 그은 군단간 전투지경선을 침범한 것으로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평양 수복 후에도 그가 이끈 2군단은 중부전선에서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6사단이 최초로 압록강변(초산)에 도달할 수 있게 했다. 그 와중에 10월 24일 육군본부 인사명령으로 유재흥은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해가게 된다,
이후 1950년~1951년 동계전역(중공군 1, 2차 공세)에서 2군단장 그리고 1951년 춘계 공세 때 3군단장이었던 유재흥은 군단장으로서 적 주공을 우익에서 받고, 먼저 붕괴해 버림으로서 전 전선이 붕괴되는 상황의 주역으로서 등장했다. 두 번 모두 그 자리에 장기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본 참모부장/참모차장 등으로 발령을 받아 잠시 일선을 비웠거나 다른 부대의 지휘권을 맡았다가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원대복귀한 상황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적절한 수준으로 전장 상황을 파악할 충분한 여지가 없었던 점이 있다.
유재흥은 육본에서 돌출돼 있던 6사단이 대타격을 입는 상황을 보고 받고 개작살나는 2군단을 구하겠다고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자청하여 2군단장에 재부임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10월 26일 다시 2군단장에 돌아와 10월 27일 지휘권을 인수하여 중공군에게 박살난 2군단을 수습했다. 이는 유재흥과 정일권의 회고록으로 교차검증되는 부분이다. 이 때 사실상 전멸해버린 6사단으로 인해 육본 예비로 재편성 중이었던 7사단을 배속받고도 예비대가 부재했던 2군단은 11월 제2차 청천강전투에서는 적 주공을 맞아 아주 개박살이 나버렸다.
어쨌든 1950년 청천강의 도미노 현상에서는 워낙 중국군에게 의표를 찔린데다 최고지휘부인 맥아더 GHQ의 실책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심각했기 때문에 유재흥의 지휘책임이 딱히 거론되지는 않았다. 이 역시 당시 미국에서 반전 여론이 매우 강하였으며 맥아더는 미국 대통령과의 심각한 불화가 있었고, 차후 공개 문서에서 미국이 이미 전역을 결정하고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 등 실패를 맥아더에게 떠넘기기 위한 묻어가기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백선엽 대장은 1950년 청천강 패전 직전 그와의 만남에서 "전 지휘관은 원복하라"는 대한민국 육군본부 명령을 "어, 다 토라카라 크래"라고 전했다고 기억했다.
1951년 1월 5일 북한군 제 2, 5군단이 원주를 뚫고 안동, 풍기 인근까지 침투하자 1950년 말 패배로 지리멸렬되었다 상태였던 국군 제 3군단을 재규합해 3주도 안 되는 시간에 원주에서 동해안까지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제 2군단을 포위섬멸하는데 성공한다.
2.6.4. 현리 전투
하지만 1950년 10월16일 평양으로 북진 중 창설된 3군단의 지휘봉을 잡은 유 장군은 이듬해 5월 16~22일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에 벌어진 현리전투로 병력과 장비 60%를 상실하고 3군단 창설 8개월만에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2.6.4.1. 현리 전투 당시 실태
중공군 5월 공세 당시 3군단의 유일한 주보급로이자 퇴로인 오마치 고개 일대는 아이러니하게도 3군단이 아닌 좌인접 미 10군단의 작전구역 내에 있었다. 전술적 요충지인 오마치 고개에 방어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한 3군단이 지원병력을 보냈지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29] 전투지경선 엄수만을 주장하며 오히려 화를 내며 3군단 지원병력을 쫓아내었다. 허나 3군단이 우려한대로 중공군은 결국 미 10군단 작전구역을 통해 밀고 들어와 무방비 상태의 오마치 고개를 차단했다.중공군 5월 공세는 5월 16일 저녁에 시작되었지만, 3군단 정면에는 적정이 없었고 미 10군단에서도 자신들의 방어선이 돌파당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전파하지 않은 탓에 3군단은 오마치 고개 차단 사실을 17일 새벽에서야 알아차렸다. 군단장 유재흥이 주재하는 작전회의는 이날 오후 열려 간단히 끝났다. 9사단이 오마치 방면으로 돌파를 시도하면 3사단이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지연전을 벌이며 후퇴한다는 계획이었다.
유재흥은 오마치 탈환 및 철수 작전 실시를 일선 사단장들에게 맡기고 경비행기를 타고 군단본부가 있는 하진부리로 복귀했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이 자신의 저서에서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는 내용을 놓고 유재흥이 "도망쳤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있지만원문 보기, 작전회의 불참은 21일이고, 현리서 2개 사단에게 돌파 지시를 내리고 돌아간 것은 17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현리 전투 항목으로.
당시 유재흥이 이끌던 부대는 본래 자신이 이끌던 병력 + 기타 패주[30] 병력으로 급편된 부대였는데, 이 패주병 출신들이 군단본부로 복귀하는 유재흥을 적전도주한다고 "오인"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3군단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9사단장 최석은[31] 오마치 탈환을 포기했다. 모든 중화기와 운송장비 등을 파괴하고 방태산 너머로 퇴각했다. 부득이 3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당시 9사단 군수참모였던 김재춘은 ‘군단의 패주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최석은 아예 제복도 벗어버리고 앞장서 튀었다.[32] 주변에서 총소리만 나면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떼거나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쳤고 사병들은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 무전기까지 버렸다. 서울신문 기사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33]
<출처: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 p339-340>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33]
<출처: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 p339-340>
원본은 다음과 같다.
밴플리트: General Yu, where is your corps?
유재흥: I don't know.
밴플리트: Where are your two divisions? Have you lost all your artillery, your transportation?
유재흥: I think so.
밴플리트: General Yu, your corp is disbanded...report to General Chung for reassignment.
1973년 3월 3일 밴 플리트 장군이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브루스 윌리엄스(Bruce Williams) 중령과의 인터뷰 중 한국전쟁 당시 현리 전투를 회고하면서 발언한 내용이다.
유재흥: I don't know.
밴플리트: Where are your two divisions? Have you lost all your artillery, your transportation?
유재흥: I think so.
밴플리트: General Yu, your corp is disbanded...report to General Chung for reassignment.
1973년 3월 3일 밴 플리트 장군이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브루스 윌리엄스(Bruce Williams) 중령과의 인터뷰 중 한국전쟁 당시 현리 전투를 회고하면서 발언한 내용이다.
이와는 별개로, 밴 플리트의 고압적인 어조와 유재흥의 자세가 현리에서 우리 국군이 겪은 참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점이 이승만 대통령이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하는 시기라, 미군측에서 어느 정도 기싸움으로 분위기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봐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결과론이지만, 미국인들을 자주 상대한 이승만이나 미 군사고문단에도 할 말 제대로 했던 김홍일, 김석원 같은 숙장들이 있었다면, 알몬드 장군의 실책을 부각시키면서 배짱있게 맞붙어, 어떻게든 우리 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이다.[34]
2.6.4.2. 상세 상황
현리 전투 패전은 우리 국군이 여건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규모 확대에 몰두했지만 정예화가 요원한 상태였으며[35] 그 외 창군 초기의 서투른 시행착오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이었던 유재흥 개인 또는 미군 둘 중 하나에게 모든 책임을 최대한 뒤집어 씌우려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현리전투 당시 군단 사령부는 관할 지역 최후방(전투 지역에서 30~40km 후방)에 위치하여 있었다. 거기다 산으로 막혀 길도 나쁜 데다, 그마저 육로는 미군 10군단 관할의 오마치 고개로 연결 되어 있는 병맛진 환경이었다. 그렇다 보니 전투 지역과 사령부를 오가려면 소형 정찰기를 타고 가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와중에 전방에서 작전 회의한 후 후방의 사령부에 보고하러 돌아간 상황에서,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면서 퇴로가 막혔다. 당시 중공군은 일점집중, 즉 일제히 한곳으로 어택땅 하는 전법을 사용했는데, 그렇게 7사단 전면으로 중공군 6개 사단이 밀고 들어왔다. 결국 머릿수에서 7사단은 밀렸고, 오마치 고개까지 밀리게 된 것.
1. 그 상황에 군단장이 후방 사령부로 간 게 비행기 타고 도주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패주병 출신 장병들로부터 퍼지며, 전투 시작하기도 전에 장병들은 사기가 급전직하 했으며, 결국 제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일선 사단장 이하 장병 대부분이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후방 사령부에 돌아온 상황에서 급습을 받고 군단이 와해 되고 통신이 두절되어 버렸는데, 40km 밖에 있던 군단장이 군단이 어디 있는지, 예하 사단이나 포와 수송장비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알 턱이 있나.
2. 거기다 7사단이 돌파 되고 중공군이 밀고 들어온 루트나 오마치 고개와 대암산 방면은 미군 10군단의 관할 구역이었다. 여기에 유재흥은 사전에 중공군의 의도를 읽고 오마치 고개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9사단을 근방에 예비 병력으로 주둔시켰는데, 당시 미군 10군단을 맡고 있던 "알몬드 장군"이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 그것도 한국군이 있는 걸 참을 수 없다(...)며 8군단 사령부에 항의하여 9사단을 철수 시켰다. 이렇게 본다면, 현리 전투의 참패는 한국군만이 아니라 미군측의 책임 역시 막중하며, 유재흥 장군에게 일방적으로 오명을 씌워 매도하는 건 부당하다.
3. 다만, 당시 중공군 측은 오마치 고개 일대를 차단해 포위-섬멸하려는 복안을 세워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미군 알몬드 장군이 유재흥 장군의 예비병력 지원을 "허락했으면, 중공군의 포위망이 완성된 상황에서 악전고투" 끝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잇달은 패주로 심리적 공황에 빠진 일부 패주병 출신 병력들이 전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적들의 철저한 포초(포위-섬멸) 작전을 계획한 중공군의 작전이 어긋나는 새옹지마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
물론 위의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개인의 책임이 면피가 안된다. 어쨌든 유재흥은 모든 책임을 1차적으로 져야할 3군단장이었으니까. 이 전투에서 유재흥은 충분히 능동적이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지휘를 하였다. 사실 현리 전투에서는 적전도주를 하지 않은 고급장교가 없고 초급 및 중견장교들이 계급장을 떼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산속으로 이리저리 튀어버린 사태였으므로 모든 걸 유재흥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겠으나, 이 혼란상에 유재흥이 아무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군단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소멸했는데 군단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누구에게 물으란 말인가? 백선엽 장군은 이에 대해 "어떠한 지휘관이라도 당시 중공군의 집중적 공세를 국군의 부족한 화력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평했다.(월간조선 2010.06)
2.7. 현리 전투 이후
현리 전투 패전 이후 유재흥은 육군참모부장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군단장으로 한 차례 전선에 다시 나와, 중부전선의 고지쟁탈전 기간에 활동, 이후 육군본부로 돌아가서 휴전을 맞았다.
2.8. 전쟁 이후
1957년에 현재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하는 연합참모총장이 되었고, 1959년 제1군사령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을 전후 한국군 고위장교단의 무더기 예편 때 중장으로 퇴역했다.
이후 비슷한 시기 퇴역한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거의 10년 동안 외국 대사직을 전전하다가 1970년 대통령 특별안보보좌관직을 시작으로 정부 중앙에 복귀, 1971년 국방장관이 되었다. 이후 공직에서는 은퇴하고 대한석유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91년 성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3. 그에 대한 평가
능력에 비해 인품은 괜찮았던 인물이다. 불운에 불운이 겹치는 것이 한나라 이광을 연상케한다. 빨갱이를 잡겠답시고 무고한 민간인을 천단위, 만단위로 죽이던 시대에, 독보적인 민사작전 능력으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대게릴라전을 수행하였으며 군사행정 능력도 괜찮았다. 문제는 싸울때마다 졌다는 것과 그런 상황을 조성해 놓은 한국군의 한계였다.개전 초 의정부 전선의 경우 7사단 구역은 적의 주공 방향으로 전력이 집중(북한군이 가용한 120여 대의 전차 중 93대, 포병 화력의 1/3, 최정예 2개 보병사단이 이쪽으로 투입)되었는데 7사단은 개전 당시 2개 연대 체제인데다가 개전 직전 내려진 비상경계령 해제로 인해 다수의 장병이 외박과 외출을 나가 다수의 사고자로 인해 불과 4,500명의 병력밖에 없었다.[36]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점령당한 영천을 탈환하기 위해 2군단장으로서 휘하의 8사단에 마찬가지로 2군단 예하부대인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연대씩 차출하여 편입시켜 공격하여 영천을 탈환했다. 당시 영천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영천이 함락되면 대구든 경주든 곧장 함락 위기에 처하고, 동서전선이 양단될 수 있었으며, 보급로가 차단될 수 있는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었기에 그의 판단은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민사적전에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4.3 사태때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 행위를 멈추고, 작전 목표를 달성" 하는 수완을 보였다. 빨치산을 포위해서 말려 죽인답시고 산속에 들어가 싸우는 대신 민간인 부락에 죽치고 앉아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던 다수의 국군 지휘관들과 달리 유재흥은 하위 제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민간인을 위무하며, 중화기 화력을 앞세워 빨치산을 직접적으로 치고 올라가는 방식을 써 훨씬 짧은 기간에, 최소한의 손실로 민간인 학살 없이 작전을 완수해냈다.
현리 전투는 한국군의 부실함과 미군과 한국군의 지휘권 문제가 엮여 꼬인 케이스로, 당시 유 장군이 끌던 부대가 본래 자신이 이끌던 병력 + 패주한 7사단 등의 병력으로 급편된 부대였는데, 이 패주병 출신들이 군단본부로 복귀하는 유재흥을 적전도주한다고 오인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이 심리적 공황에 빠진 병력들이 전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철저한 포초전(포위-섬멸전)을 계획한 중공군의 작전이 어긋나는 새옹지마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후일담도 있다.
제민일보는 유재흥 장군을 양심적이라 평가했다. 부연대장 출신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증언에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으나 김정무 군수참모와 유재흥 장군은 솔직한 증언을 했다고 한다. 더욱이 제민일보가 강조한 것은 표현인데, 유재흥 장군은 산으로 피난간 사람들을 '피난민'이라 칭했다. 군 지휘관 출신의 입에선 듣기 힘든 표현이다. 그만큼 4.3 사건의 초토화작전이 미쳐돌아갔다는 뜻이며, 유재흥 장군은 당시 제주도의 군 지휘관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양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현리 전투 이후 밴 플리트 사령관에게 면박을 당한 일화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종전 후 미국측의 평가를 보면 그보다 더 무능한 지휘관들도 많아서 그런지 그에게 상당히 점수를 후하게 주는 걸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육군 중장 10명과 비교했을 때 유재흥의 능력은 그들과 동등하거나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지적이고 근면하다. 그의 효과적인 부대 지휘는 그의 부하들이 상신한 우호적인 보고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지휘와 임무수행능력은 그가 지닌 수많은 군사 경험과 이해를 나타난다. 그는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의 모든 임무 수행 결과는 최고급 전문장교의 높은 기준을 충족한다. 항상 많은 것을 연구하고 냉철하고 단정하며 신뢰감을 준다.66) (1956.7.23.)"
출처: 6・25전쟁과 유재흥 -주요 전투에서의 작전 수행을 중심으로-
출처: 6・25전쟁과 유재흥 -주요 전투에서의 작전 수행을 중심으로-
백선엽은 자신의 평안도 파벌과 경쟁하는 일본육사파벌의 중추적 인물인 유재흥을 한국전쟁 당시 국군 10대 영웅으로 꼽으면서 전투에만 전념한 참군인이라고 평가하며, "7사단장, 1군단 부군단장, 2군단장(2차례), 참모차장(3차례), 3군단장으로" 재임한 한국군 장성 가운데 가장 화려한 군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전쟁 초기부터 낙동강 방어작전과 북진, 그리고 청천강 전투, 1·4후퇴·유엔군 재북진·고지쟁탈전·휴전까지 한 번도 전장을 떠나본 적이 없는,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전투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다(출처).
1953년 5월 제2군단사령부가 있는 38도선 이북의 화천군 소도고미에 주둔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제2대 군단장으로 부임해 온 유재흥 장군은 일본육사(4년제)를 졸업한 지성이 있는 장군이라 우리는 인텔리 장군(智將)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 연락장교의 중요한 역할과, 필요성을 높이 평가한 장군 중의 장군이었다. 그는 우리 연락장교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으며 또 서로 간에 말도 잘 통했다. 유재흥 장군은 일본에서 일본군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서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일본군의 육군 소위로 임관돼 진급의 진급을 거듭했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군 국방경비대에 편입돼 육군의 장성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우리 연락장교들은 그를 '장군 위의 장군' 이라고 부르며 매우 존경했다.
김일평 교수의 회고
그는 우리 연락장교의 중요한 역할과, 필요성을 높이 평가한 장군 중의 장군이었다. 그는 우리 연락장교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으며 또 서로 간에 말도 잘 통했다. 유재흥 장군은 일본에서 일본군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서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일본군의 육군 소위로 임관돼 진급의 진급을 거듭했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군 국방경비대에 편입돼 육군의 장성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우리 연락장교들은 그를 '장군 위의 장군' 이라고 부르며 매우 존경했다.
김일평 교수의 회고
국내 온라인 상에서는 오랫동안 유재흥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다. 거의 한국판 무다구치 렌야 수준으로 욕먹은 적도 많다. 친일 행적이 있고, 현리 전투라는 국군 최대의 흑역사의 장본인인 데다가, 특히 말년에 참여정부의 전작권 환수에 대해 반대하는 군 원로들의 '대표로 나섰던 일'로 인해, 과거 부정적인 행적이 표면으로 드러난 일이 주요 원인이었다. 죽기 전까지도, 이 현리전투 패전의 '누명'(적전도주 누명)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2010년대 이후 점점 유재흥이 활약한 제주 4.3 사건의 행적이 조명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인물이다.
4. 회고록
激動(격동)의 歲月(세월) - 劉載興(유재흥) 回顧錄(회고록), 을유문화사 1994년 6월 1일창군 원로 유재흥 장군의 회고록
참고로 제목부터 시작하여 인명, 지명이 모두 주석 없이 한자로만 쓰여있어 옥편(...)과 함께 읽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유명한 다른 창군 원로의 책만 본 사람이라면,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본 것이 정말 새로울 것이다. 상당수의 창군 원로들이 자신의 자사전에서 관동군/일본군 시절을 아예 없는 셈 쳤지만, 유재흥 장군은 일본군 시절을 상당 분량을 할애해서 집필했다는 게 특징이다. 특히 한일합방 당시 일본 육사로 유학 간 아버지 유승렬 부터 다루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 관한 부분은 몇십 년이 지난 현재 어떤 책 보다 자세하다. 또한 해방 직후 일본군 육사 출신들이 모여 어떤 식으로 상의하였고 창군 과정에 참가 했는지 잘 나와 있다. 이 때문에 창군 당시 전사를 다룬 책을 보면 이 책이 자주 언급된다.
말 많은 의정부 전투에서 7사단장으로 참전했을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있고, 2군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를 이끈 과정, 북진 당시 38선을 어떻게 통과했고 평양 입성은 여러 부대가 전공 다툼으로 동시에 들어갔다는 것도 잘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6.25 당시 최대의 패전이었던 청천강 전투와 현리 전투에 대해서도 그 어느 책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현리전투에 대해서는 군단의 목줄인 오마치 고개가 미10군단의 전투지경선 안에 있었는데 군단장인 알몬드 장군이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창군 당시 군번 1번이었던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 외길인생>, 군번 2번인 채병덕 장군의 <6.25전쟁과 채병덕 장군>, 군번 3번인 유재흥 장군의 이 책, 군번 5번 정일권 장군의 <정일권 회고록> 이렇게 4권 정도 읽어 보면 창군 당시와 6.25, 그리고 5.16 직전까지의 군의 모습을 최고지휘관들의 시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다.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이들만 대위로 시작하여(군번 4번 장석륜 포함) 창군과 동시에 지휘자로서 다른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을 지휘 하였다. 6.25 전후로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군단장을 돌아가면서 하였다.
5. 대중매체에서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한현배가 연기했다.
- 1989년작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선 성우 겸 배우 이종구가 연기했다.
6. 기타
2009년 5월 22일 사진. 창군동우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윗줄: 황헌친(육군준장 예편 전 1군사령부 참모장), 김병휘(육군소장 예편 전 논산훈련소장), 정진완(육군소장 예편), 박춘택 재향군인회 부회장, 노창현 재향군인회장.
아랫줄: 김계원(육군대장 예편 전 대통령비서실장)[37], 백선엽(육군대장 예편), 유재흥(육군중장 예편 전 국방부 장관), 강영훈(육군중장 예편 전 국무총리), 김종면(예 육군중장 예편 전 특무부대장)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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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0대 載O 항렬이다.[2] 연합참모본부총장 직무대리 수행 (1960년 5월 31일 ~ 1960년 8월 29일).[3] 3학년 때 나남소학교로 전학[4] 4학년을 마치고 용산으로 전보된 부친을 따라 경성삼판소학교로 전학[5] 3학년 재학 중 평양연대(제77보병연대)로 전보된 부친을 따라 신의주중학교로 전학[6]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 후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5학년을 다니지 않고 조기졸업[7] 미 국무부 고문 자격으로 방한했으며, 국무장관이 되는 건 1953년이다.[8] 금성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책에도 나오는 사진으로,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표지로도 쓰였다. 북한에서는 이 사진을[9] 유언비어로 인한 사기 붕괴 및 대규모 전열 이탈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했다.[10] 회고록에는 어린 시절 나고야성 해자 근처에서 뛰놀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11] 형 재경(載慶), 동생 재국(載國), 누이 양숙(良淑) 등.[12] 지금도 상원의원의 추천을 받아야하는 미국 웨스트포인트처럼 당시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는 귀족적 전통이 남아있어서 원서를 내기 위해서는 보증인이 있어야 했다.[13] 태평양전쟁 중 월남 전선에서 전사.[14] 1922~1986. 가야노미야(賀陽宮)의 3대 당주[15] 동기 중 후일 육상자위대 막료장 長野茂門, 항공자위대 막료장 竹田五郎 등이 배출되었다.[16] 여기.[17] 제주도 4.3사건 진상보고서. 출처: 여기[18]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19]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 역할로 당시에도 상당한 요직이었으나, 당시의 수경사는 6.25 전쟁 과정에서 서울을 피탈당한 후 일반 보병사단으로 재편되어 오늘날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 이른다. 6.25 전쟁 이전 (구)수도사단은 7여단을 거쳐 제7보병사단이 된 별개의 부대이다.[20] 데스크 검열이 없는 인터넷(예, 나무위키)에서는 원균이나 하후무에 비견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21] 방어계획상으로는 편제되어 있지만, 실제 위치는 달랐던 부대(예, 광주의 5사단)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22] 박정인 장군은 사단 방어 최전방도 아니고 지연전을 벌이며 후퇴한 후에 작전계획에 따라 폭파하게 되어있었던 임진강 철교 하나 못 끊었다고 백선엽을 맹비난한다.박경석 장군 역시 백선엽의 근무태만으로 초창기 문산 파주 축선 방어가 계획대로 이뤄지지 못했는데, 장수한 백선엽이 전사편찬을 자임하고 회고록을 쓰며 언플한 결과로 과대평가되었다고 비난한다. 참고로 백선엽의 1사단은 1949년 김석원 장군 예편 후 1950년 4월까지 유재흥의 부친인 유승렬이 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작전계획을 짜놓은 부대였다.[23] 그러나 박정인, 박경석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관계가 잘못됐음은 물론 고의적으로든 아니든 당시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국군 1사단의 경우, 연백 청단에서 임진강 고랑포까지 약 94km의 방어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경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사단의 책임구역은 지나치게 넓었다. 특히 1사단 12연대가 배치된 연백평야와 개성반도의 방어정면은 80여 km였으며, 한강하구와 임진강으로 인해 본토와의 연결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때문에 1사단이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실시한 CPX에서 12연대는 괴멸적인 피해가 예상되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니 1사단은 방어밀도를 높이는 차원에서 유사시 연백, 개성을 포기하는 방어작전을 새로 수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강 철교 폭파 실패로 북한군이 김포반도에 상륙했다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 방호산이 이끄는 북한군 6사단은 임진강을 도하하지 않았고, 남침 당일 개성 남쪽으로 진격해 김포반도 도하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임진강 철교의 폭파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물론 1사단이 연백, 개성을 내준 게 북한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 셈이 되었으나 상술하였듯 1사단의 방어정면은 경찰의 경계 지원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개 사단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으며 전체 방어계획을 총괄 지도하여야 할 육군본부가 김포반도가 무방비 상태에 놓인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김포반도 전투시까지 방치한 것 역시 감안하여야 한다.[24] 물론 임진강 철교 폭파 실패는 대형사고이나 전쟁 초기 한국군의 주요 교량 폭파 실패는 한두번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임진강교 폭파 실패 외에도 포천 전투의 신북대교 폭파 실패, 미아리 방어선의 목교/길음교 폭파 실패, 중랑천 방어선에서의 경춘선 철교 폭파 실패,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경인철교 상행선 폭파 실패/한강철교 폭파 부분실패 등의 사례를 보면 당시 한국군 공병 역량 자체가 매우 미흡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25] 또한 박경석이 주장하는 백선엽의 근무태만 행위는 당시 백선엽과 접촉해 같이 이동한 1사단 선임고문관 로크웰 중령의 증언으로 손쉽게 반박된다. 백선엽은 로크웰과 접촉한 시간을 오전 7시라고 증언하는데 오히려 로크웰 중령은 백선엽과 접촉한 시간이 오전 5시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당시 1사단은 최경록 대령을 사단장 대리로 선임한 상태였다. 그리고 유재흥의 아버지 유승렬이 1사단의 작전계획을 짜놓았다고 하는데 그는 4월 12일 1사단의 부대 배치가 38선에 사단의 3개 연대가 모두 배치되어 있던 것을 11연대로 하여금 사단 예비로 삼고 후방인 수색으로 배치하게 한 조치를 하였던 것은 맞으나, 문산을 축으로 한 방어계획은 육본 작전명령 38호에 의한 것이었고, 연백, 개성을 포기하고 3선 방어 개념을 정한 것은 유승렬의 후임으로 부임한 백선엽이 한 게 맞다.[26] 냉전기에 편찬된 전사를 살펴보면 북한군의 전력은 38도선상에서 주-조공부대들이 거의 대등하게 편성되어 있었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공산측, 특히 소련측 사료를 참고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 냉전기에는 리델 하트도 북한군이 전차를 집중운용하지 않고 전 축선에서 균등하게 운용했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러시아에서 구소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이러한 시각은 차츰 논거가 허물어져 갔으며, 2000년대 초 라주바예프 보고서가 발굴되면서 완전히 설득력을 상실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작전계획에서는 7사단 방면을 주공으로 땅크여단을 집중투입, 서울에서 국군을 1차 포위섬멸한다는 의도가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개전 당일 출동시킨 T-34 전차 120대 중 80대를 포천에 집중시켰고, 동두천 정면에도 13대가 투입됐다. 7사단 정면에만 93대의 전차가 공격해온 것이다. 90년대 후반까지 무시되던 7사단 9연대 3대대 왕규익 중위의 증언 "6월 25일 오전 직접 목격한 적 전차는 모두 69대였다"는 것이 주목받은 것도 이때부터다.[27] 얼마나 다급했었으면, 거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노획한 T-34를 수리하여 기갑연대 잔여 병력과 일본군 소년전차병 출신 장병들을 모아 써먹으려는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28] 여담이지만 영천전투에서 전차 빌린 건 정일권의 회고록엔 자기가 워커 장군한테가서 따졌다는데 관련 논문에선 유재흥 본인이 워커 장군한테 간 걸로 나온다.[29] 원래는 2차대전 때 전공을 세운 유색인종 사단을 지휘하던 사람이었으나, 인종차별 발언 및 폭언을 일삼아 부대지휘에 실패하고 해임된 걸, 마셜 참모총장 및 맥아더 장군과의 친분 덕분에 일선 지휘관으로 복귀한 것이라고 한다.[30] 싸움에서 지고 후퇴 또는 도주한다는 말. 사실 여기에 포함된 7사단도 전쟁 초기 의정부 방어전에서 유재흥이 지휘해 싸움을 치른 부대였다.[31] 비전투병과 출신이었으며 아직 전투경험이 부족한 젊은 지휘관이었다고 한다[32] 즉, 적전도주한 진범은 이 사람이었다는 의미다.[33] http://panzerbear.blogspot.kr/2013/05/blog-post_12.html 참조[34] 참고로 월남전 파병 때는 당시 미군 파병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우리측 파병사령관 채명신 장군과의 기싸움에서(의견 개진, 한국군의 미군 배속문제, 자리 배치 등) 눌려, 우리 군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방안을(예, 지휘체계, 중대기지전술) 많이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35] 군단장인 유재흥이 당시 31살이었다.[36] 개전 초에는 2개 연대였지만 최우선 지역이라 그 후의 거의 모든 예비병력이 의정부 방면으로 지원되면서 최종적으로 1개 군단 규모의 병력이 유재흥의 지휘하에 배속되었다. 축차섬멸을 당해서 그렇지.[37] 10.26 사건 당시의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와 함께 동석한 그 사람 맞다. 그 당시의 대통령 비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