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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 1916년 5월 2일 | ||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 |||
사망 | 1977년 4월 11일 (향년 60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3가 자택 | |||
본관 | 인동 장씨 상장군계[3] | ||
호 | 백상(百想) | ||
재임기간 | 제8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 ||
1964년 5월 11일 ~ 1967년 10월 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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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이문자 | ||
자녀 | 슬하 5남 1녀 | ||
학력 | 선린상업학교 (졸업)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9 | ||
경력 | 한국은행 부총재 조선일보 사장 코리아타임스 사장 한국일보 창간, 사장 서울경제신문 창간, 사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IOC위원 일간스포츠 창간, 사장 제9대 국회의원 대한축구협회장 | ||
서훈 | 수교훈장 광화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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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체육인, 금융인, 정치인, 관료.2. 생애
1916년 경성부 용산면(現 용산구)에서 곡물 무역상이었던 장동후(張東厚)와 고성 이씨 부인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외할아버지인 이종묵(李鍾默) 아래에서 한학을 배우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장기영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1등을 도맡았는데, 당시에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선린상업학교[4]에 들어가서도 최상위권에 올랐고 졸업하던 1934년에는 ‘우등 졸업자’로 일간신문에 이름과 사진이 함께 실렸다. 졸업 무렵에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에 무시험 입학할 특전을 받았지만 어려워진 가정형편 탓에 진학의 뜻을 접은 그는 선린상업학교 졸업 이후 지금으로 치면 거대 다국적 기업인 조선은행[5]에 입사해 청어잡이로 번성했던 청진점에서 스무 살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43년에는 은행 내 공모에 제출한 ‘저축과 물가, 그리고 인플레’라는 제목의 논문은 당대 일본의 경제학자·사회학자인 다카다 야스마 박사의 경제학·사회학 이론에 케인스 이론을 접목해 큰 주목을 받았다. 백상은 이 논문으로 당대 엘리트들이 집결한 조선은행에서 1등 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1948년에 조사부장, 1950년에는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지냈는데, 조사부 시절에는 6·25전쟁으로 굶주린 인사들을 위한 전시(戰時) 신용대출을 밀어붙였다.#언론인이기도 했던 장기영은 1952년에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1954년 4월에는 김활란으로부터 코리아타임스를 인수했고 같은 달에 임원규로부터 태양신문(1949년 창간)을 인수했다. 1954년 6월 9일부터 태양신문을 한국일보로 바꾸어 창간했다. 그는 한국일보 사장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1954년에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기자 공채를 시행했고, 1958년에는 국내 신문 최초로 과학부를 신설해 한국일보의 기반을 다졌다.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여 사장을 겸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HLKZ-TV를 인수해서 한국 최초로 신방겸업을 하기도 했다.[6] 그는 사람이나 컨텐츠를 보는 안목이 좋고 추진력도 강했다. 인재 욕심이 많아서 글빨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든 기자로 데려오려고 했고, 당시 무명이었던 황석영을 발굴하여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게 한 것도 장기영이었다. 그리고 고우영을 메이저급 만화가로 만든 일등공신이었으며 1970년대 초반 전반적으로 만화를 하대하는 풍토가 있었음에도 만화사업에 관심이 있었는지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7]
그러나 1964년에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입각하면서 신문사 경영에 소홀해졌고 이틈에 중앙일보가 기자와 광고국 직원을 대량으로 빼가버려서 한국일보가 위기를 맞기도 했다.[8] 한편, 그는 경제부총리로 발탁되어[9] 3년 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재임 기간 동안 외자도입정책 주도와 금리현실화, 유리창행정과 연탄의 흑백논쟁 등 일화를 남기면서 성장 기틀을 잡았다. 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10] 한국은 경제개발 단계에 진입하였다. 이 점에서 장기영은 후임인 김학렬, 남덕우 등과 함께 박정희 시대의 경제관료로 꼽힌다. 장기영은 그 추진력과 수완 덕에 관료사회에선 왕초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다가왔으니... 19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때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이 뿌린 똥물을 맞는(...) 봉변을 당했고 얼마 안되어 경제부총리 직에서 3년 반만에 경질됐다. 그 뒤 1967년에 한국일보로 복귀했으며, 이후 IOC 위원, 아시아경기연맹(AOC) 종신 명예위원장,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11] 등으로 활동했으며 1972년, 이후락과 함께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때 북한의 경공업 기술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두 한켤레만 맞춰달라고 부탁했는데,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강인덕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의 주도 하에 북한의 경제 실태를 확인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장기영의 요청도 이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북한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장기영이 구두쇠라고 비웃으면서 구두 한켤레를 맞추어주었다. 1977년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그는 국내 최초로 상업 신문 시대를 열고 각종 참신한 시도들을 하며 한국일보의 방향을 잡고 신문 제작을 주도적으로 진두지휘했다. 욕도 잘했다고 한다.[12] 그래도 언론사에 대해 잘 알고 직원들과 소통도 꽤 잘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일보에서 장기영과 함께 일했던 기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평가도 받는 모양.# # #
한국일보는 1973년부터 첫째 아들인 장강재가 사장직을 물려받아 운영했으나 1993년 8월에 간암으로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같은 해 11월에 장기영의 둘째 아들이자 장강재 회장의 동생인 장재구 회장이 물려받았다가 경영을 말아먹고 2013년에는 편집국을 폐쇄하는 등의 막장 행각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 후 한국일보는 2015년에 동화그룹에 인수돼 장기영 일가는 경영권을 완전히 잃게 됐다. 2010년대부터는 조중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겨레에게도 밀리지만 사실 한국일보는 1990년대까지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메이저급 정도가 아니라 장기영이 타계하기 전 1970년대의 한국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한국의 양대 일간지에 가까웠고, 그 밑에 조선, 중앙, 경향, 서울 등의 메이저가 포진하고 있었다. 장기영은 스스로를 '장 기자'라고 자칭하며 정부의 감투를 쓰고 있던 시절에도 자신의 본업이던 언론에 대하여 애정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이만섭, 최창봉 등 그 시절 원로 언론인들의 회고에 장기영의 당시 행적이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종로구 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0,383 (24.89%) | 낙선 (2위) | |
1960년 지방선거 | 서울특별시장 | 117,145 (32.35%)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13] | [[민주공화당|]] | 36,404 (43.47%) | 낙선 (2위) |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14] | 57,607 (43.31%) | 당선 (1위) | 초선[15]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60년 지선 (서울특별시장) | 8대 총선 (서울 1[16]) | |
9대 총선(서울 1[17]) |
}}}}}}}}} ||
4. 기타
- 당시로서는 무명이던 황석영을 발굴하여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게 하고 엄청나게 밀어줬다. 황석영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1974년에 처음 장길산을 연재할 당시 자료 조사비로 장기영이 거금을 덥석 내줬는데 어쩌다 보니 소문 듣고 몰려든 배고픈 주변 문인들 술 사주고 밥 사주고 하느라 돈을 그만 보름만에 다 써버렸다. 다시 장기영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번에는 자료비로 꼭 써라. 안 그러면 다음은 없다"면서 처음보다는 적게 자료비를 내주고 자주 가는 술집 명함에 장기영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앞으로는 술이 마시고 싶으면 여기서 내 이름 앞으로 달아놓고 마셔라. 단 자료비로는 술 마시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18]
- 김훈(소설가) 을 등용한 것도 이 사람. 당시 한국일보는 주요 신문들 중 유일하게 기자 공채에 고졸 출신도 응모할 수 있었는데, 당시 김훈(소설가)은 아버지 김광주의 사망 후 가계가 어려워지면서 고려대학교를 중퇴해 고졸 신분이었다. 아무리 응모가 가능하더라도 당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기자를 뽑는데 고졸 출신을 뽑는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장기영은 면접까지 올라온 김훈을 보고 "눈에 불량끼가 있어 기자를 잘하겠다"며 뽑았다고 한다.
5. 가계도
- 장동후 / 妻 이성녀
- 1남 장기영 전 한국일보 사장 및 경제부총리 (1916 ~ 1977) / 妻 이문자 (1920 ~ 2004)
- 1녀 장일희 전 백상기념관장 (1943 ~ ) / 夫 현순구 전 한길사료 회장 (1941 ~ )
- 1남 현상엽 전 한국일보 기자 (1970 ~ )
- 1남 장강재 전 한국일보 회장 (1945 ~ 1993) / 妻 이순임(예명: 문희) 영화배우 (1947 ~ )
- 1녀 장서정 (1972 ~ )
- 1남 장중호 전 일간스포츠 회장 (1973 ~ )
- 2남 장서호 (1980 ~ )
- 2녀 장서현 (1991 ~ )
- 2남 장재구 전 한국일보 회장 (1947 ~ )
- 3남 장재민 미주한국일보 및 서울경제신문 회장 (1949 ~ )
- 4남 장재국 소년한국일보 회장 (1952 ~ )
- 5남 장재근 전 한국일보 부회장 (1954 ~ )
적어도 장강재 회장 시절까지 한국일보 일가는 가족들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강재 회장 말기부터 시작된 경영난으로 인해 장강재 집안 + 장재구 + 장재민과 장재국 + 장재국의 갈등이 빚어졌다.
이후 장재구가 한국일보 회장이 되면서 모종의 이유로 장강재 집안과도 갈라섰고, 장재구 회장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수감되는 등의 일을 겪은 후 재산 문제로 장재민 회장과도 서로 의절했다고 한다.
사실상 백상 장기영 일가는 말이 좋아 형제지 실질적으로는 전부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6. 관련 자료
7. 대중매체에서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배우 백일섭이 장기영 역을 연기하였다.8. 둘러보기
서울특별시 제9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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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도 정대철 | 강상욱 송원영 | 민병기 정운갑 | 고흥문 정래혁 | |
서대문 | 마포·용산 | 영등포 갑 | ||
김재광 오유방 | 김원만 노승환 | 김수한 정희섭 | 박한상 강병규 | |
* 종로·중 정일형 사퇴 (1977.3.22.) * 종로·중 장기영 사망 (1977.4.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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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로구[2] 중구[3] 경파 33세 ○순(淳)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쓰지 않고 ○영(榮) 돌림을 썼다. 아버지 세대는 석(錫)○ 항렬 대신 동(東)○ 돌림을, 아들 세대는 동(東)○ 항렬 대신 재(在)○ 돌림을, 손자 세대는 ○희(熙) 항렬 대신 ○호(鎬) 돌림을 썼다.[4] 現 선린인터넷고등학교이며, 1899년 고종황제 칙령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실업교육기관인 관립상공학교가 모태다.[5] 現 한국은행으로, 대한제국 시기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에서 시작해 일제 강점기 조선의 중앙은행급 은행이었다.[6] 하지만 장기영이 인수한 지 2년만에 화재사건으로 폐업하게 되었다.[7]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고우영은 1996년부터 2년간 한국일보 소속으로 잠깐 만평을 그리기도 했다.[8] 1965년 중앙일보 창간 당시 기자와 직원 대부분이 한국일보에서 빼온 인원이었다고 한다.[9] 당시 장기영을 천거한게 김용태리고 전해진다.[10]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건설 5개년 계획은 경공업 중심으로 전임 장면 내각에서 마련한 것을 실천하는 성격에 가까웠다. 박정희 정부가 경제건설에서 본격적으로 독자성을 발휘한 것은 196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 육성부터다. 물론 이전 내각도 공업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있었으나(애초에 울산을 공업도시로 기획한 것도 장면 내각이었다), 한일협정 보상금이나 서방 지원금, 월남전 참전비용 등을 삥 뜯기받기 전까진 실질적으로 그것을 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장면 내각 시절에도 사실 한일협정을 모색하면서 비용을 요구했는데, 재미있는건 물론 초기 협상을 위한 뻥카 성격도 있겠지만 박정희 정부 시절 받은 돈보다 10배가 많은 수준이었다.[11]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12] 공교롭게 장기영이 부총리 시절 차관으로 데리고 있던 김학렬 또한 전설적인 욕쟁이였다.[13] 종로구[14] 종로구, 중구[15] 신민당 정일형 후보와 동반 당선
1977.4.11 임기중 별세[16] 종로구[17] 종로구, 중구[18] 출처: 백상재단 홈페이지
1977.4.11 임기중 별세[16] 종로구[17] 종로구, 중구[18] 출처: 백상재단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