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02:00:54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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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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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070112120237197113282.jpg
이름 이후락(李厚洛)
출생 1924년 2월 23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사망 2009년 10월 31일(총 31297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
본관 학성 이씨
가족 부인, 슬하 6남 1녀
직업 군인
정치인
종교 불교

1. 개요2. 일생3. 선거이력4. 기타5. 매체에서6. 둘러보기


1. 개요

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손에 묻는 법이다.
수상 각하[1],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입니까?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습니까?
1972년 5월 김일성과의 대담 중에서

대한민국군인, 외교관, 정치인.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주 일본 대사, 중앙정보부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2. 일생

2.1. 군인 경력

1924년 2월 경상남도 울산군(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 입대, 육군 하사관까지 이르렀다가 해방 이후 귀국,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듬해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9년 남로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2][3] 1951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1952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국방부에서 만들어진 79 부대라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어[4] 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5] 196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여 제2공화국 장면 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이 만들어준 정보기관인 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2.2.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 대통령비서실장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남로당 입당 전력을 미국대사관에 밀고(?)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영어 실력과 중앙정보연구위 연구실장 경력 덕분에 곧 석방되어 민간인 신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였다. 제갈공명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책사가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12월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허나 이후락을 좋게 보지 않는 쪽에선 제갈조조는 커녕 조조만도 못하다고 깐다. 사실 이후락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방면으로 영민했던 사람이다. 이 시기 글자 그대로 브레인이라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 등을 꼽을 수 있다.

2.3. 주 일본 대사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 3선 개헌의 막후 원흉으로 지목되어 대통령비서실장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지병으로 사망한 엄민영의 후임으로 1970년 1월 주 일본 대사에 임명되었다.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은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 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주 일본 대사로 있으면서도 박정희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초밥 에피소드'이다.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부근에 '이즈미'라는 유명한 일식집이 있었는데, 이후락은 이집의 맛있는 스시를 특별 주문하여 잘 포장하고 간이 냉동상태로 대사관 사무관을 시켜 비행기편으로 청와대까지 직배송을 시켰다고 한다. 그것도 몇 차례나, 이 정성스런 선물을 받은 박정희는 이후락을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을 것은 자명할 것이다. 이 일화를 소개한 책인 '남산의 부장들' 초판이 발행될 당시(1992년) 이 스시 심부름을 하던 사무관은 외교부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외교관이 되었다고.[6] 이는 황병태대한민국 국회의원의 회고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2.4. 중앙정보부장 당시

1970년 12월에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여 유신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가장 큰 배경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앞세운 야당(신민당)의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에, "남산골 샌님" 얘기나 듣던 김계원 대신 정치공작과 막후 술수에 능했던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힘으로써 대선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락은 정치공작의 달인답게 검찰, 경찰, 지방자치단체, 육군보안사령부 등 관권 조직을 총동원하여 제7대 대선을 막후에서 관리하여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7][8][9] 그리고 그 해 10월 2일 당시 내무부 장관 오치성의 해임 결의안을 저지시키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항명한 여당 국회의원들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하여 고문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10.2 항명 파동이라고 한다.[10]

또한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그 직전까지는 비록 형식뿐이나마 야당의 견제기능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10월 유신으로 말미암아 한국 헌정사는 다시 유사왕정시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10월 유신을 작업했던 곳은 궁정동 안가였으며,[11]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는 나중에 이곳에서 미녀파티를 하다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이때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바로...[12]

중앙정보부장 재임중 대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업적으로는 1972년 5월 밀사로 북한평양을 방문하여 당시 주석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다.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44950_1.jpg

좌측 끝이 이후락. 제일 오른쪽이야 뭐 다들 알고 있듯이... 뒤쪽에 작게 보이는 인물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이다.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변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북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 기밀을 대라고 요구할 경우 자살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휴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밤에 북한측 수행원이 이후락 일행을 불러냈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이 때 이후락은 엄청난 긴장감에 안절부절.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주석궁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자마자 김일성이 서 있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고.[13] 김일성은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평양까지 와준 것을 치켜세웠고 이후락은 자신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라고 소개한 뒤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이후 만찬을 함께 하며 1.21사태에 대한 김일성의 사과발언도 나왔다.

이때 나눈 대화가 흥미로운데 김일성이 "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라고 대화 첫마디에 농담삼아, 어쩌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항의하자, 이후락은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요.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소?"라고 대답했고 김일성하하하 이녀석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방북에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대담내용과 청산가리 일화를 언플 기자회견하면서 이후락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신직수 법무부장관 등과 함께 유신헌법 작업을 주도하면서 최고의 권력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해가 뜨면 언젠간 지는 법. 1973년 박정희의 차기 후계자로 이후락이 거론되면서 독재자는 2인자 따위 안 키운다 윤필용과 관련된 군 인사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이것은 이후락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또 다시 탄압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뭔가 큰 건수가 필요했고 충성다짐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사건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사건 발생 장소인 일본을 비롯한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그 해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었다.[14]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주 일본 대사인 김석규가 김대중을 납치하기 전에 박정희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한편 1980년 친구 최영근 전 신민당 의원에게 "1973년 박정희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 갑자기 홍콩을 거쳐 영국으로 출국했다가 종적을 감춘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전전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처럼 해외 망명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영국을 거쳐 중남미 바하마로 날아가서 거기서 한동안 숨어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망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고,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에 정치적으로 다칠 것을 우려하여 "나는 정권의 비밀 다 알고 있으니 날 건드리지 말아라, 그러면 나도 입다물겠다."는 식으로 박정희 측과 모종의 협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숙청당한 후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박정희도 이후락에 대해서는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등과 달리 숙청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2.5. 국회의원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향인 경남 울산울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투표율 1위로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5] 이후락은 당연히 공화당 공천을 원했으나,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었던데다가 여러 불법적인 정치공작에 관여한 것도 있어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박정희와 공화당 측에서 공천을 안 주었다. 하지만 이후락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각하께서 체면 때문에 공천을 안 주신거고 국회의원 당선 후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여 남북대화를 맡는다"는 말을 퍼트리면서 선거운동을 했고 이것이 먹혔다. 당시 울산 지방공무원, 경찰 등도 모조리 이후락 편을 드는 바람에 공화당 공천을 받았던 서영수는 명색이 여당 후보임에도 야당 취급을 받고 여당 공천장이 휴지조각 결국 선거에서 떨어졌다.

이듬해인 1979년 6월 최치환, 김진만, 변정일, 김수, 박용기, 함종빈, 박정수, 정휘동, 임호, 임영득, 한갑수, 홍성우, 권오태, 윤재명 등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하여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고 버티다 신군부 측에서 김종필의 부정축재에 대해 증언해주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자 승낙하고 김종필이 연행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 부정축재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치자금을 떡고물에 비유해 "떡고물 안 흘리고 떡을 주무를 수 있나"라는 항변으로 재산 형성을 자기 합리화해 대중들을 벙찌게 하기도.(...) 이 때문에 당시에는 이른바 '떡고물' 발언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94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16] 군인으로 전역한 사람이 20년만에 저 돈을 모았다는거니 그 당시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물가 따질 때 흔히 나오는 강남의 한보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80년대 초반 당시 2천만 원대. 지금 10억 원대 거품 매매가를 자랑한다. 그것으로 계산하면 현재 가치로 대략 9700억 원.(...) 은마아파트가 비정상인 것이긴 하지.

2.6. 말년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17] 2003년에는 생리현상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이 되었다.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인생무상 그 후 2009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향년 86세 (만 85세).[18] 그렇지만 박정희 밑에서 일하던 동료와 선후배 대부분은 끝이 좋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천수를 누린 셈. 김재규는 10.26으로 인하여 이듬해 처형되었고, 차지철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형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박종규는 질병에 시달려 5공화국이 끝나기도 전에 숨졌다.[19]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4선거구)[20] 무소속 97,393 (48.32%) 당선 (1위)

4. 기타

  • 제 9대 국회의원 김원규는 그의 6촌 처남이었다.
  • 딕패밀리의 멤버 김후락의 본명은 홍수진인데, 그룹 결성 초반에 우연히 MBC 방송국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만나 예명을 김후락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락이 홍수진의 이름을 듣고 자신의 이름으로 예명을 쓰라고 했는데, 성까지 쓰지는 말고 김이박최에서 돌 던지면 맞는 성으로 써라고 해서 예명이 김후락이 되었다고 한다. 링크

5. 매체에서

파일:LeeHR-3.jpg 파일:LeeHR-5.jpg
제3공화국의 이후락 제5공화국의 이후락

6. 둘러보기

재단법인 한국기원 총재
(초임) 초대 이후락 2~4대 김우중

[1] 당시 김일성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방북한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불렀고, 이후락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참고로 일본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는 총리 퇴임 이후, 마찬가지로 정계은퇴한 이후락을 "각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2]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3]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그 시절에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4] 당시 이후락 자신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 부대라고 지은 것이다.[5] 라오스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6] 출처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7] 2018년에 이 글을 읽는 위키러들은 잘 이해가 안될 수 있겠지만, 1960~7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 정치의 상수(常數)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중앙정보부와 접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아예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야당 당사, 언론사, 주요 정부기관, 대학 등에 상주하면서 정보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며, 이들의 선거개입을 총괄하는 것은 중앙정보부였다.[8] 물론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관변조직을 총동원하고, 정부와 여당이 당시 금액으로 무려 600억~700억이라는 거금을 선거에 쏟아부었음에도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을 그야말로 겨우 겨우 이기는데 그쳤다. 박정희는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 뿐이냐"고 주변을 닥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 이 당시 김대중의 선거 전략가 참모 엄창록을 잠시 며칠 동안 실종되게 하기도 했다. 초대 김종필부터 5대 김계원까지 역대 자신의 전임 중앙정보부장들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다.[10] 이들 중엔 박정희의 처남이자 또는 박근혜의 외삼촌 영부인 육영수의 친오빠인 육인수도 끌려갔고,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 김성곤은 그 고문 후유증으로 4년 뒤 사망했다.[11] 작업 암호명은 풍년사업.[12] 출처 :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187567[13] 이 당시 이후락은 여차하면 삼키려고 청산가리 알약을 주머니 속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나타나 악수를 청하자 손을 주머니에 뺴려 했는데 청산가리 알약이 땀에 붙어서 잘 안떨어지는 바람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 북한에선 이를 두고 이후락이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수령님의 신묘한 술수라고 자화자찬하는데 사람을 한밤중에 갑자기 불러내는건 공산권 국가에서 상대를 당황하게 하여 헛점을 포착하려는 고전적인 수법이긴 했다.[14] 여기서 진짜 재밌는 점은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 바로 이전에는 주 일본 대사였는데 하필 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다. 완전 나라 망신을 제대로 저지른 셈[15]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였고, 이후락과 악연이 있던 최형우 신민당 후보도 동반 당선되었다.[16] 2018년 현재 화폐가치로 약 1200억원 정도[17] 그러나 1987년 7.4 남북 공동 성명 15주년 특집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하고 같은해 제13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신민주공화당을 방문해 낙선한 김종필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다[18] 여담으로 이후락이 1971년 4월 7대 대선에서 낙선시키고, 또 2년 뒤인 1973년 8월에 무리하게 납치했던 김대중이 자기가 사망하기 2개월 전에 서거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같은 1924년생이다. 태어난 해도 같고 저 세상에 간 해도 같고 완전 닭살[19] 여기에 언급된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 중에선 친인척 지간이기도 한 김종필을 제외하곤 가장 오래 살았다. 그리고 김종필을 포함해서 가장 나이가 연상이다.[20] 울산시, 울주군[21] 이들 학교들은 모두 남구에 있는 공업탑 로터리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세 학교 모두 공립화되었고 울산의 일반계 고등학교 입시도 평준화되었지만 학성고와 신정고 간의 라이벌 의식은 아직도 남아있다.[22] 형수가 한국인인 인연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금융 브로커. 메나도가 아닌 메리도라고도 불렸으며, 훗날 이스라엘의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인터뷰집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86년, 삼성출판사),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도 등장한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인터뷰에서 그를 일컬어 "대단한 수완과 정보력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경제차관도 많이 주선했지만, 반면에 (빚을) 크게 씌우기도 한 사람"이라 평한 바 있다.[23] F-4 팬텀 25대 분량의 자금을 동북아 차관 중개로 확보했다는 후문(後聞)이 있다.[24] 당시 메나도가 소유한 노르웨이 아카 조선소 이름으로 사들였다고 한다.[25] 개명전 이름, 개명 후 홍훈으로 활동 중이며, 허준, 상도에 출연한 이력이 있다.[26] 여담으로 임채무와 박광남은 전원일기에서 김회장(최불암분)의 사위들로 고정출연했었다. 그리고 최불암은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 역을 맡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