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9년 10월 7일에 대한민국의 전 중앙정보부장인 당시 54세였던 김형욱이 실종된 영구 미제사건.2. 상세
김형욱은 본래 역대 최장기 중앙정보부장으로서 6년 동안 재임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가 3선 개헌에 반대했다는 명목으로 박정희 정권에 토사구팽당하자[1]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해[2]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미국에 공개하는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일으키고 당시 박정희가 보낸 여러 인사들에 의해 각종 회유와 귀국 종용을 받은 김형욱은 1979년 앞서 언급된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3]으로부터 원고료로 거액을 준다는 말을 듣고 그와 만나 돈과 원고를 교환했고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4]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고 파리의 모 호텔에서 6일 동안 머무르다가 10월 7일 그곳에서 행방불명됐다. 10월 1일 파리의 A호텔에서 10월 7일까지 투숙했다가 10월 7일 오전 7시 30분경 파리의 B 호텔에 10월 12일까지 투숙하겠다고 하고 짐을 놓고 10월 7일 오전 11시 30분경 인근 카지노에서 그날 밤까지 카드게임을 한 것이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목격되었다.[5] 예정 투숙 만료일인 10월 12일이 되어서도 김형욱의 짐이 그대로 남겨져 있어서 호텔 관계자가 경찰에 신고했다. 이때 남은 김형욱의 유품은 밤색 중형가방과 골프세트인데 후일 김형욱의 가족들이 챙겨갔다.
그의 실종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공식적인 국가정보원의 조사 결과가 있으나 시원치 않은 구석이 있어 의문이 남아 있다.
이 사건에 대한 특종은 조선일보가 최초로 터뜨렸다. 1979년 10월 16일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김형욱씨 파리서 행방불명, 1주일 째 호텔에 안 나타나'라는 제목의 박스기사였다.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가 나가자 대한민국의 여러 신문의 파리 특파원들이 김형욱의 호텔 숙소에 찾아가서 소지품들을 발견하였고 이후 며칠 동안 여러 언론에서 계속해서 후속보도가 실렸다.
이 보도 자체가 박정희 정부로서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정부에서는 김형욱의 사망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가[6] 그러던 중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터지면서 이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사건 당시 김형욱의 나이는 54세로, 당시에도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지병을 무시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이미 소소한 지병이 있었기 때문에 김형욱의 가족들은 이 시점에서 김형욱이 이미 사망했다고 잠정 결론을 짓고 2001년 장남 김정한이 사망하자 2002년 가족 묘를 만들 때 김형욱의 몫까지 만들어 김형욱의 가묘를 만들었다. 거기다 김형욱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딘가 숨어서 살아있다고 해도 2024년 현재 시점에는 이미 99세, 2025년에는 100세가 되기 때문에 박정희에 의한 납치 암살설이 맞든, 납치되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서 천수를 누렸다고 해도 현재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23년(98세) 기준 1925년생 생존율은 이미 1.2%만 생존해있다. 이미 실종 5년만인 1984년 향년 59세로 공식적으로 이미 사망 처리하기도 했다.
3. 국가정보원의 조사 결과
2005년 5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지시로 권총으로 암살당했다는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발표는 서울 내곡동 국정원 강당에서 김만복 기조실장과 진실위의 위원들이 공동 발표하는 기자회견 형식으로 이뤄졌다. 참고로 당시 진실위에서 사건 조사에 참여하였고 국정원과 함께 김형욱 실종 사건 발표도 담당했던 위원이 바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였는데 한 교수는 이후 저작물들과 연구서, 칼럼,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 진실위의 사건 조사 내용과 사건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참고로 진실위의 국정원 쪽 간사를 맡았던 사람이 나중에 국정원장이 되는 김만복 당시 기조실장이었는데 그는 이 사건의 조사를 자신했다고 한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에 의해 프랑스에서 연수 중이던 중정요원에 의해 납치, 살해당했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중앙정보부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김만복 실장은 김형욱을 살해한 요원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고 이미 그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진행 중이었는데 "업보는 우리 세대가 짊어지고 가자"며 관련자들에게 인간적인 설득까지 했으며 결국 당사자들이 김만복에게 상당한 정도의 진상을 털어놓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제는 이 사건 관련자들이 당시 그들에게 '작전'을 직접 지시했던 전 프랑스 공사 겸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 이상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이상열이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7]
어쨌든 발표된 조사 결과를 요약하자면 대략적으로 이러했다.
79년 10월 1일, 이상열 공사가 한국으로 귀국하여 김재규 부장을 두 차례 만났으며 다음날 파리로 돌아갔다.[8] 당시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는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을 겸하고 있었다. 사건 수행은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던 A요원, B요원이 담당했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상열 공사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공사는 전주를 소개시켜 주겠다며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A요원과 협력자 2명이 나타나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로 끌고 갔다. 협력자가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살해한 시신은 낙엽으로 덮어두었다. 이상열 공사는 A요원에게 관저에서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는 김형욱 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을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다. A요원이 귀국 후 10월 13일 직접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김재규는 직접 A요원을 불러 거액의 돈 봉투를 쥐어주며 앞으로의 근무나 생활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10월 18일 이상열 공사도 은밀히 귀국해 김재규 부장에게 직접 보고하고 다음날 파리로 돌아갔다.
- 진실위에서 당시 발표한 자세한 조사 결과는 이 기사에 잘 나와 있다.
- 김재규가 이상열에게 사건을 지시했고 이상열이 다시 현지 요원들에게 사건을 지시했으며 이후 이상열과 현지 요원이 사건의 결과를 김재규에게 보고했다는 흐름은 당시 중정에서 일하면서 이 일에 직간접적으로 엮인 모든 사람들이 일관되게 한 진술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 사건을 직접 수행했던 두 요원에 대한 일화도 전해지는데 불교 신자였던 A요원은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법당 앞으로 가서 절을 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살았다고 하며 천주교 신자였던 B요원도 종교 생활을 통해 정신적인 고통을 달랬다고 한다.[9]
- 2020년 12월 15일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국정원과 진실위에서 조사하여 발표한 해당 내용을 토대로 방송했다.
3.1. 조사 결과에 대한 의문점
-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동선 및 김형욱 살해 이전과 살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주요 인물들의 진술이 일치하지만 정작 살해된 김형욱의 시체를 도대체 어떻게 처리했는 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술이 매우 불분명하고 의문스럽다는 점이 큰 약점이다. 김형욱의 최후 처리를 외국인에게 맡겼고 살해 후 시신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비상식적이며 엄혹한 냉전 시대에 공산권인 동유럽의 협력자와 접촉하여 암살을 위해 그들을 돈으로 고용하였다는 점도 석연찮다.[10]
- 이상열 전 공사는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 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 노(No)라고 기록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는데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11] 약 1년 뒤인 2006년 4월 3일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상열뿐만 아니라 다른 관련자들도 조사 도중 진술을 잘 하다가도 정작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입을 다물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 한편 10.26 사건 직후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국정원과 진실위의 해당 발표를 부인하였다. 10.26 사건 직후 김재규에 대한 변호 과정에서 김재규에게 '김형욱 실종 사건'에 대해 아는 바 있느냐고 수차례 질문했지만 늘 김재규는 늘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김재규는 김형욱이 실종되었다고 보도가 나온 그 즈음부터 유럽 출장을 가겠다고 보고서를 올린 부하 직원들에게 되려 '괜히 의심받을 짓을 하지 말고 출장지를 아시아 쪽으로 바꾸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런 증언은 10.26 사건 직후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을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 참고.
- 10.26 사건 직후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서 발표한 김재규에 대한 조사 보고서와 김재규에 대한 재판에서 김형욱 사건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도 석연찮다. 다시 말해 내란을 모의한 죄목으로 기소된 김재규의 주요 범죄 혐의에 충분히 포함될 만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두환과 신군부의 집권 이후 중앙정보부가 안기부로 재편되면서 김재규 라인은 전부 좌천되거나 쫒겨났는데 국정원의 발표에서 김형욱 실종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인물이자 김재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이상열은 전두환 정부 내내 승승장구하면서 안기부의 고위직까지 올랐다는 점도 의문으로 남는다.
3.2. 김형욱 유족들의 반발
김형욱의 유족들은 이 조사 결과를 믿지 않았으며 결과조차도 매우 부실하다고 주장하였다. A요원과 B요원의 진술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용한 총기는 분실했으며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부실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유족 측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명색이 암살까지 했다는 요원이라는 사람들이 총기를 분실했다는 아마추어나 할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오히려 총기를 분해해서 여기저기 버려 증거를 인멸했다는 식의 진술이 차라리 요원들 본인에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만약 분실한 총기가 제3자에 의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12]
- 둘째,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 두었다는 게 시신 처리 방법으로선 매우 부실하다. 일단 사체를 정말 낙엽으로 덮었다면 무풍지대가 아니고서야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 경찰도 사체는 찾을 수 없었으므로 낙엽으로 시신을 덮어두기만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닭모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질까특히 살해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진술한 당시 중정 요원이 김형욱의 사체를 버린 장소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회피했던 점도 석연치 않다. 사건 발생 당시 프랑스 경시청에서 미국과 프랑스 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아 4개월이나 수사했지만 낙엽에 덮여서 버려진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 한편 김형욱은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스위스에도 방문했으며 당시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우 화가 난 상태로 전화했다고 김형욱의 맏며느리가 주장했다.[14] 유족들은 국정원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서울로 납치·송환되어 피살당했다거나 사우디로 끌려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파리에서 살해당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의 발표와 전직 중앙정보부 관계자의 직접적 증언을 인용한 언론 보도 사이에는 몇 가지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중앙정보부와 연관된 파리 현지 요원들이 권력의 고위 인사로부터 지시를 받았고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로 유인당했으며 이후 파리 근교에서 중정 소속의 요원 혹은 해당 요원의 고용인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살해 직후 김형욱의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대략적인 몇 가지의 얼개는 일치하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사건 관계자들의 입을 열 방법이 아예 없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실종 사건에 깊이 개입되었을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 세 사람은 김형욱의 실종으로부터 19일 뒤 10.26 사건에 휘말려 둘은 그 당일에 죽고 한 명은 바로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말이다.
4. 김형욱의 최후에 대한 그 밖의 주장
4.1. 양계장 닭모이 설
2005년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라고 밝힌 사람이 자신이 김형욱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 소속 공작원 출신이라고 밝힌 인물은 《시사저널》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건 직전에 박정희를 직접 만났고 중앙정보부의 지시 없이 조력자들의 도움만 받아서 스스로 사건을 수행했으며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 당일 김형욱을 마취시킨 뒤 반쯤 의식불명이 된 김형욱을 파리 근교까지 찾아가서 산 채로 머리부터 양계장 대형 믹서(해머밀)에 넣어 갈아 죽였다고 설명했다. 즉, 시신은 닭모이가 되었다는 것이다.[15] 이는 폐차장을 비롯한 다른 방법과는 다르게 시신의 흔적조차 찾기가 불가능한 방식이므로 일반인들도 이 설을 사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위에서 서술된 진실위의 조사 결과 발표 당시 시사저널과 이 내용을 인터뷰한 당사자가 중정 출신이 맞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김경재도 자신의 저서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을 통해 위에 소개된 동일한 인물로부터 들은 동일한 내용을 주장했지만 시사저널 인터뷰보다 훨씬 자세한 주장을 했는데 해당 주장을 한 인물이 '조용박'[16]이라는 사람이고 코드명은 '천보산'이며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를 지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한 뒤 남파 교육을 받고 남파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한에서 전향하여 다시 북파 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중정 요원 출신이라고 하며 김형욱을 산 채로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목을 꺾고 마취제를 입에 집어넣은 뒤 양계장 믹서에 넣었으며 결정적으로 이 사건이 김재규 라인이 아니라 차지철 라인을 통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
한편 이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하였으며 최초 시사저널 보도를 작성했던 주인공이자 현재 시사IN 기자로 활동하는 정희상은 이후에도 국정원과 진실위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작성하였다.#1, #2 정희상 기자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할 즈음 새로운 기사를 썼는데 양계장 닭모이설의 주인공인 조용박이 2007년에 국정원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통장을 자신에게 확인시켜 줬으며 국정원은 왜 김형욱 암살과 무관하다던 조 씨에게 돈을 건넸던 것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정희상 기자는 국정원과 진실위의 당시 발표에 대해 큰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희상 기자의 저서 '팩트와 권력'에서 더욱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논픽션 남산의 부장들[17]을 집필한 김충식 전 기자는 한 방송에 나와 '양계장 암살설'을 긍정하며 "정부의 입장으로 그걸 발표할 경우에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에서 일종의 부채를 공식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냥 사체를 낙엽에 파묻고 말았다라고 처리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MBC의 PD수첩의 2005년 5월 3일 방송분에서 위의 '양계장 닭모이 암살설'을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결론은 '그랬을 가능성이 낮다' 였다. 취재진은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했던 이모 씨와 함께 일본, 프랑스로 검증 차원의 동행취재를 수행했고 당시 프랑스에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 해당 인물이 프랑스와 파리의 지리나 정확한 살해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닭모이 암살설'은 신빙성이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2005년 7월 23일 방영된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당시 실제 프랑스에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되고 있었다는 증언을 확인했으며[18] 시사저널 측에서도 PD수첩의 보도를 반박하는 장문의 기사를 냈고 PD수첩에서는 다시 시사저널에 대한 반박문을 내는 등 한동안 이런저런 논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결론이 제대로 나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
4.2. 기타 설
- 1980년대에는 대한항공 특별기(화물기)편으로 청와대 지하실로 실려와 박정희가 직접 M1 카빈을 머리에 대고 쏴 처형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른바 '오작교 작전'이라는 것인데 이 주장은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 기자에게 프랑스어로 배달된 출처 불명의 문서가 일본 '주간문춘'과 프랑스 '르몽드'에 보도되었다.관련 기사 신상옥 감독의 1994년 영화 <증발>은 이 설을 따랐다.
- 차지철의 대통령 경호실 주도로 납치해서 한국에 끌고 왔고 기절시킨 후 폐차장 폐차기에 넣어서 살해됐다는 설도 있다. 앞서 말한 문명자 기자가 세 다리 건너 들었다는 이야기로서 서울신문에 연재되던 문명자의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인데 메인 소스는 중앙정보부 요원이고 이걸 정일권 총리가 들었으며 문명자가 정일권에게 들었다고 한다. 문명자의 기록에 따르면 김형욱이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 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끌려갔고 '잘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라고 빌었으나 폐차장 압착기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다. 해당 내용은 문명자의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자세히 나온다. 이 설은 소설가 이병주의 '김형욱 최후의 날'이라는 르포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백무현 화백의 <만화 박정희>에서도 볼 수 있다.
- 납치는 차지철의 주도가 아니라 김재규 중정부장이 주도했으며 혼수 상태인 김형욱을 스위스 취리히 발 대한항공기를 통해 서울로 공수해서 폐차장 폐차기에 산 채로 넣은 뒤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이는 당시 경찰 외사과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신동아 기자에 진술한 내용이다. 위의 내용과 사건의 얼개가 일치하지만 납치의 주도자가 차지철이 아니라 김재규였다는 점이 다르다.
-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한 후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서 살해하였고 그 시체를 파리까지 옮긴 뒤 외교화물로 위장하여 한국으로 공수했다는 설도 있는데 다른 설들과는 다르게 일본의 문예춘추에서만 보도된 외국발 설이다. 이 기사를 보도한 일본 기자는 한국의 어느 지위 높은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했다.
- 김형욱이 최종적으로 행방불명된 곳은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설도 있다. 이는 2005년 5월 20일에 해제된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에 나온 내용인데 "김형욱은 한인 남성 한 명과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행적이 묘연하다"고 적혀 있다. 기존의 추정 실종 날짜인 10월 7일보다 이틀 뒤인 10월 9일이라고 특정되었다. 다만 이 내용은 일본 외무성이 파리 경찰을 상대로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다시 주미 일본 대사관을 거쳐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고 국무부에서 다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내려보낸 자료라고 한다. 일단 전언이 네 단계이며 한국 중앙정보부와의 교차검증이 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점이 약점이다.
- 고향이 이북 출신이기에 10.26 이전에 잠시 월북설이 돌기도 했으며 1980년대에는 생존설로서 남미에 숨어 산다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2001년 아들 김정한이 사망할 때 미국 뉴저지의 한 공동묘지에 가족들이 김정한의 묘를 만들면서 김형욱의 가묘가 세워져 실제가 어떻게 되었든 김형욱의 가족들은 김형욱이 실종된 시점에서 이미 사망했다고 여겼다.
이상의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것 하나 명확히 증명된 바가 없다.김형욱 미스터리, 누구 말이 맞나
5. 매체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미스터리로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졌다. 특히 가설 중 양계장 닭모이설은 증거가 부족하여 진위 여부는 알 수 없긴 하지만 사건 자체가 주는 임팩트 때문인지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궤짝: 1~4화에서 김준호가 꿈 속에서 진상 손님을 사료분쇄기에 넣어서 잔인하게 보복하겠다고 다짐한다.
- 그것이 알고싶다: 선술했듯이 유튜브 채널 그알에 영상이 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2021년 5월 27일자 12회. 영상
- 남산의 부장들: 2020년 개봉 영화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 영화 중간에서 다루었다. 영화에선 실제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며 여기선 양계장 닭모이설과 국정원 공식 발표를 절충하여 묘사하였다.
- 민족과 운명: 북한에서도 해당 사건을 드라마로 다루었다. 남한 출신의 고위급 월북자의 전기를 다룬 작품으로 10부 홍영자 편에서 그려졌다. 다른 월북자와 달리 홍영자는 가상의 인물이다.
- 역사저널 그날
- 제4공화국: 23회, 24회((상), (하))
- 증발: 신상옥 감독의 영화로 시대 때문에 사전조사를 못 했는지[20] 극적 연출을 위해서였는지 재현 오류가 제일 심한 축에 든다. 김형욱은 극중에서는 박진욱이라는 이름으로 김희라가 역할을 맡았다.
- 코리아게이트
- PD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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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나마 1969년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후 백수로 야인 생활을 하다가 1971년 민주공화당 전국구 5번으로 제8대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불과 1년 만인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 자체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자동 상실하였다.[2] 어떻게 보면 김형욱은 남한판 이한영으로 볼 수 있다. 둘 다 독재자의 측근으로 한때는 본국에서 호의호식했다는 점과 타국에 망명해 조용히 살다가 회고록을 출판해 본국의 독재자에게 어그로를 끌어 망명국 땅에서 암살당했다는 점까지 똑같다.[3] 훗날 중앙정보부장 직무대행을 역임했다.[4] 김형욱과 친분이 있던 어느 여자 배우의 회유와 연락을 받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는 설이 있었으나 그때 파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발견되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5] 이 점 때문에 10월 7일 사망이 아니라 10월 8일 사망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서울과 파리는 서머타임 적용 기준으로 7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국 시간으론 이미 10월 8일이다.[6] 그런 거 신경 쓸 새도 없이 1979년 10월 16일~20일에 부마항쟁이 일어나서 진압하느라 바빴다. 물론 김형욱 실종 건에 대해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의 한국에 대한 압박도 상당했지만.[7] 이상열은 예전부터 김재규와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재규가 과거 3사단 부사단장을 지낼 때 이상열이 그의 부관이었고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을 지낼 때도 함께 보안사에 근무했으며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 이상열은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8] 진실위는 이상열 공사가 이때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살해 계획을 보고하고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수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9] 당시 발표에 따르면 A요원은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정보부를 그만두었고 B요원은 상당 기간 재직하며 고위 간부에 올랐다고 한다. A요원과 B요원이 종교에 의지하며 정신적인 고통을 견뎠다는 일화는 조사 결과 발표 당시 실제로 공개되었던 내용이다.[10] 하지만 김형욱을 정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로 판단하고 그를 제거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제거를 명령한 명령권자조차도 제거 대상의 생사를 모호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정권 차원에서는 김형욱의 생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저 사회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고 명령권자가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면 그런 시도 자체가 살해 사주를 했다는 근거가 되며 표적의 제거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하는 것 자체가 살해 동기나 살해범을 추론하는데 혼선을 줄 수 있다.[11] 국정원 후배들도 진실을 위해 이제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정보기관 출신은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한다"며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12] 이 부분은 요원들의 연막일 수 있다. 정석대로 분해해서 인멸했어도 아예 한겹 더 덮어 분실했다고 하는 것.[13] 물론 이 보고서의 정보 소스가 일본 정부-주미 일본 대사관-미국 국무부-주한 미국 대사관이라는 4단계 전언이라는 점은 상당한 약점이다. 거기다 보고서 자체가 조작되었거나 거짓 정보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4] 이 주장대로면 실종 이전에도 이미 공작에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도망 다니는 와중에 화를 낼 일이라면 이런 공작 정도다.[15] 김기영의 1971년 영화 화녀에 납치한 여자를 갈아넣어 닭 먹이로 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이 설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화녀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09년 영화 실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16] 여러 기사를 미루어 보아 동일한 이름으로 소개되긴 하는데 해당 이름이 가명인지 실명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17] 나중에 영화화된다.[18] 그러나 해당 인물이 프랑스와 파리의 지리나 정확한 살해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반박되지 못했다.[19] 김진명은 자신의 소설에서 이 설을 채택했다.[20] 신상옥 감독은 사건 당시 전 아내 최은희와 함께 납북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