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이리역 폭발사고 裡里驛爆發事故 Iri station explosion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77년 11월 11일 사고일로부터 [dday(1977-11-11)]일 | |
발생 위치 | 전라북도 이리시 창인동 이리역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대로 153 익산역) | |
유형 | 폭발 | |
원인 | 열차 화재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 59명+α[1] |
부상 | 134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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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폭발 이전의 이리역(현 익산역) |
대한뉴스 영상 |
2. 사건의 경위
당시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가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고성능 폭발물 40톤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에 초대형 폭발 사고를 냈다.수사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 신무일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열차 안에 켜 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허나 이러한 행동이 이런 대형 사고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온갖 악습과 인재가 얽히고설켜 벌어진 것이었다. #
- 원래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었으나, 이 규정이 무시되어 다이너마이트들이 뇌관이 결합된 채로 적재되었다.
- 철도역 화차 배차 직원들이 기관사를 비롯한 같은 철도 직원들에게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고자[2]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강제로 대기시켰다. 당시 철도법 제61조상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며 지금도 위험물 운송차량은 대통령 전용열차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높다. 이 급행료 관행은 화물열차가 주 대상이었다. 여객열차에게 급행료 내놓으라고 잡아두었다간 승객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날게 뻔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대기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자 화가 난 호송원은 술을 마시고[3] 열차 화물칸에 들어갔다. 본래 운송 과정에서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들어갈 수 없으며, 호송원은 총포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 했고 흡연자나 과다 음주자를 쓸 수 없는데 이런 규칙 역시 모두 무시되었다.
- 호송원 신무일은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규칙을 무시하고 폭약이 가득 실린 화물칸에서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다.
- 호송원은 촛불이 쓰러져 상자에 불이 옮겨 붙은 시점에서 잠에서 깨어났으나, 마땅한 소화기구가 없어 번지는 불을 잡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침낭으로 불을 꺼 보려 했으나 불은 오히려 더 크게 번졌다. 위험물을 운반하는 열차에 소화기 등 기초적인 화재진압도구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 화약 열차에 불이 붙었음을 알고 철도 요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 못했다.
3. 사건의 여파
폭발 사고 현장 모습 |
결국 열차에 불이 붙어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발물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사고로 인해 이리역에는 지름 40m, 깊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기관차 본체는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실제 사고 현장 모습 영상 |
역 주변은 큼지막한 건물조차 형체만 남아있는 정도로 대파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1,343명이 중상 및 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폭발사고 중 최대 규모의 피해였다.
사건 이전에 이리역 주변은 창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했던 슬럼이라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창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하지만 폭발이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 버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재개발의 기회가 되었다.[4] 사고 이후에는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서 중앙시장을 경유하는 중앙로1길 확장노선과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익산대교를 경유하는 익산대로가 건설되어 익산의 주요 간선도로로 활용되고 있다.[5]
대폭발로 인해 이리역은 물론이고 주변 시설들이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이리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 중이던 기관차/객화차 등 117량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 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채가 완파, 1,288채가 반파되었다. 또한 당시 이리시 창인동에 있었던 익산군청이 폭발의 진동으로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는 피해를 입었는데 1979년 익산군청이 함열로 신축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6] 철도 바로 옆에 있었던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폭발사고의 직격탄을 맞아 교사가 파괴되었고[7][8] 본래 이리고등학교 앞에 있던 남성고등학교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1979년 현재의 소라산 자리로 옮기고 남겨진 자리에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임시 입주하여 소라산 신교사가 완공되는 1985년 4월까지 임시 교사로 활용되다가 이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남성맨션이 들어섰다.[9]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4km 이내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주변 1km 이내로 부서진 철도 레일 및 객화차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또한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 및 김제군 백구면, 공덕면 등에서도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고, 20여 km 거리인 군산, 전주 및 백 리(40 km) 밖 논산군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사고의 확대를 막은 뒷이야기도 있다. 사고가 나던 때에 승객 600여 명이 탄 여객열차[10]가 이리역 직전 역인 부용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 시각에 이미 이리역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기관사가 부용역에 진입하면서 통표(운전허가증) 회수에 실패[11]하는 바람에 부용역 통과 허가가 나지 않아 통표를 획득할 때까지 계속 멈춰있어야 했다. 사고 발생 약 5분 후 통표를 회수하여 출발이 가능해졌음을 무전으로 보고하던 중 "이리역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진입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 본인의 실수 탓에 열차를 지연시킨 기관사는 초조해져서 "화재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진입해도 되지 않느냐"고 재차 문의했지만 이리역 측은 "상황이 심각하니 무조건 대기하라"고만 답하였다. 그러나 기관사는 통표를 얻었으니 운행을 강행하기로 하고 결국 열차를 이리 방향으로 출발시켰다. 한편 이리역 역무원 송석준은 폭발 충격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뒤 해당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로를 따라 1km를 달려가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던 열차를 향해 윗옷을 펄럭이며 정지 신호를 보내어 가까스로 열차를 세웠다고 한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송석준 역무원은 2013년 코레일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또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화차로 조성된 열차가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 모현동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열차를 신속히 이동하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나와 열차를 황등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만일 유조 열차가 역 구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마저 폭발하면서 역 일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리역(현 익산역)은 철도교통의 요충지[12]로서 그 중요도로 말미암아 신속한 복구작업이 전개되어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운행을 재개하였고 11월 20일에는 모든 선로의 복구를 완료했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해당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한다.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라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 중에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라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다.[13]
이리역 폭발 당시 모습 |
4. 사고 이후
피해자 천막 생활 모습 |
이리역 새역사 준공 |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현암 김종희 회장[14]은 즉각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당시 자신의 모든 재산이었던 약 90억 원(현재 가치로 약 5,000억 원)을 모두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을 피해자들을 위해 강제 헌혈시켰으며 이리역에 직접 파견을 나가게 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지급된 보너스를 몰수했고 직원들의 11월 급여 중 2%를 공제하여 재해 기금으로 갹출하였다.
사고 때문에 이리역은 1년 뒤인 1978년 11월에 당시의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신설되었다. 이후 1995년 5월 10일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출범하자 같은 해 9월 1일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사실 1995년 2차 시, 군 통합 당시 통합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했던 군 지역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익산군은 익산이란 명칭을 이리에 뺏긴 셈이 되어 버렸다. '익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여러 기관들이 그 이름을 이리에 있는 동종 기관에 넘겨주고 새 이름을 써야 하기도 했고[15] 이리시와 익산군은 1994년 1차 시군 통합 당시 익산군 지역의 반대 여론이 과반이었기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다.
이 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이듬해(1978)에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를, 또 이듬해(1979)에 창인주공아파트를 건설했다. 이 중 모현주공1단지는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림산업에서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들어섰다. 창인주공아파트도 재개발 승인이 났다.
이리역 앞에 있던 삼남극장 |
이 사고 때문에 인생 자체가 바뀐 사람도 있는데 바로 '코미디의 황제'로 불렸던 이주일이다. 한편 당시 슈퍼스타였던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을 시작한 지 약 15분 만에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16]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직후 극장 지붕이 무너져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때 공연 보조 MC로 같이 있던 무명의 코미디언 이주일이[17] 본인도 피를 흘리면서 하춘화를 업고 뛰어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때 이주일은 무너지는 지붕에서 떨어진 벽돌을 머리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였는데도 하춘화가 벽을 넘지 못하자 자기 머리를 딛고 넘어오라고 해 그녀를 현장에서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출연해 이 사건에 대해 증언한 하춘화는 '이주일 씨 말로는 내가 잘못되면 자기 밥줄이 끊길 테니 구했다고 했지만, 그 (자기 목숨 건지기도 급한)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할 새가 어디 있겠나, 내 생명의 은인이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이리시 내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 기관이 없었던지라[18] 이들은 군산으로 이동하여 도립의료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 서울특별시로 올라왔는데, 이때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관계로 언론에서는 한바탕 하춘화가 실종되었다는 속보를 내보냈고 이 때문에 한때 하춘화의 생사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사고 다음날 현장에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도 하춘화의 생사 여부와 관련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하춘화의 당시 인기는 '국민 여동생' 아이유 등 요즘의 어지간한 톱가수들 이상인 '국민 가수'급이었다. 하춘화는 6살 때 데뷔했는데 그때부터 스타였고 이 시점에는 이미 데뷔 16주년이었다. 하춘화의 생존이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사고 다음날(12일) 저녁이었다. 한편 상경한 이후 한양대 병원에서의 정밀진단 결과 하춘화는 다행히 타박상 정도로 그쳐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으로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뇌는 다치지 않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 유명해졌고[19] 하춘화도 본인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TV 방송국을 찾아다니며 이주일의 출연을 주선해줬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1979년 이주일의 TV 데뷔가 이뤄졌고 1980년대에는 전성기를 맞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코미디의 황제로 등극했다.
사고 당시 한국과 이란의 1978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 7차전이 TV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고 폭발이 일어난 후 이 경기를 중계하던 KBS에서는 자막으로 이리역 폭발 사고를 속보로 알렸다. 해당 영상 그리고 한국 vs 이란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학생도 있었는데 사고 직전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그 학생의 아버지가 축구 중계를 보고 공부하라며 권유하여 안방으로 건너가 TV를 보던 중 폭발이 일어났고 굉음과 함께 학생의 방 쪽에서 진동이 느껴져 달려나와 보니 이리역에서 날아온 집채만 한 기차 화통이 학생의 방을 덮쳤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 학생 입장에서는 천년감수를 한 셈이다.
한편, 사고 당시 군산수산전문학교[20] 기숙사에서 축구를 보고 있던 이리시 출신 학생들은 기숙사 방송을 통해 '본가가 이리인 학생들은 전부 기숙사 앞으로 나오라'는 말을 듣고 운동장으로 나갔고 당직 교사로부터 '이리에서 사고가 크게 났으니 빨리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가족들 안부를 확인하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이에 학교에서 마련해 준 택시를 타고 가족들이 있는 이리시로 향하던 중 이리역으로부터 5km 넘게 떨어진 목천포에서부터 깨진 건물 유리창 파편이 도로 위에 깔려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택시 바퀴에 유리 조각이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사망자 중 역무원이었던 한인석 씨는 부친 역시도 철도공무원이었고 광주역에서 무단횡단하던 어린이를 구하려다 순직한 바 있다. 이후 정부는 유가족에게 재건된 역의 매점운영권을 주었다.
이 사고로 최경록 교통부장관이 경질되었고 후임에는 민병권이 임명되었다.
사고 이후 이리역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 '보물찾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집[21] 근처에서 목걸이나 반지 같은 패물을 주워 횡재한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보물을 찾겠다고 폐허를 뒤적거렸는데 보물뿐만 아니라 인체의 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훗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도 재현된 풍경이다.
대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위험이 진정되자 동네 어르신들이 진두지휘하고 청년들이 군말 없이 따르며 각 가정에서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었다. 또한 사고 소식을 접한 전국 각지의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성금과 구호품을 보내는 등 사고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해 나섰고,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하춘화도 이재민 돕기 공연을 개최하여 공연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임시 대피소 건설을 위해 군은 물론이고 인근 공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징발하여 전기 공사 등을 시켰다고 한다.[22]
익산역에는 이 사고의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리역 폭발 당시 군의관으로서 현장에 달려간 윤장현 제12대광주광역시장이 201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 40주년 추모행사'에서 익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당시 군의관이었던 윤 시장은 다급한 마음에 파견 명령도 받지 않은 채 인원과 장비를 챙겨서 독단적으로 이리에 가서 의료 활동을 하였다. 법적으로는 탈영이지만 서종철 국방부장관이 훌륭한 초동 출동이라며 크게 칭찬하고 격려를 받아서 넘어갈 수 있었다.
최근까지도 익산역에는 위험물을 운반하는 화물열차가 존재하였는데, 전남 여수시 흥국사역에서 나주역까지 프로필렌을 운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프로필렌을 운송하는 화물열차가 운행했었으며, 익산역에서 기관차교체, 기관사 승무교대와 진행방향 변경을 위해 익산역에 잠시 정차했다가 출발하였다.
5. 재판
5.1. 호송원 신무일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무일은 사고 직후 도주했다가 검거되었다. 합동수사단이 꾸려져 신무일을 집중 추궁하였다. 과실범인지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고의범인지가 초기 쟁점이었다. #- 제1심: 사건번호 불명
- 항소심: 광주고등법원 1978. 7. 6. 선고 78노126
- 상고심: 대법원 1978. 9. 26. 선고 78도1996 판결
원심은 제1심 판결을 유지함으로써 그 판시 증거들에 의하면, 피고인은 그 판시와 같은 경위로 자기가 호송임무를 맡고 있던 그 판시 화약류 1,139상자 (27.3195톤)가 적재된 화차내에서 금지되어있는 촛불을 켜놓은채 잠을 자다가 촛불이 다 타어가서 촛물받이 종이와 인접된 3개의 다이나마이트 상자에 불이 붙어있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 이를 발견하였는 바, 그 정도의 화재라면 화약류에 대한 초보적인 상식이 있는 피고인으로서는 침랑이나 잠바로서 불이 붙어있는 상자를 덮거나 이를 뒤집어 엎어 놓으므로서 쉽게 진화할 수가 있고, 또는 불붙은 화약상자를 화차밖으로 던지는 방법등으로 본건과 같은 대형폭발사고만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화약호송임무자로서 더구나 본건 위험발생의 원인을 스스로 야기한 자로서의 진화 및 위험발생원인제거에 관한 의무에 위반하여 위와같은 진화나 위험제거 방법을 취하지 아니한채 만연히 닭털침랑으로 불붙은곳을 몇번 두드리다가 쉽게 진화되지 않게되자, 그 대로 방치하면 화차안이 밀폐되어 있기 때문에 화세가 확대하여 그 압력으로 다이나마이트와 함께 모든 화약류가 한꺼번에 폭발하리라는 정을 예견하면서도 그 화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도주하여 버림으로써 결국 불이 계속 확대하여 그 화차안에 있던 모든 화약류를 동시에 폭발케하여 본인 사고에 이르게 한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로 의률하여 피고인을 처단하고 있다. |
꼬꼬무에서는 '폭발성물건파열치사상죄'가 적용되었다고 소개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형법의 폭발성물건파열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행 형법상 내용이다. 당시 형법상 존재하지 않았던 죄책이다.
구 형법
제172조(폭발물파열) ①화약, 기관 기타 폭발성 있는 물건을 파열하게 하여 제164조 내지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을 손괴한 자는 방화의 예에 의한다.
②전항의 행위가 과실로 인한 때에는 실화의 예에 의한다.
제172조(폭발물파열) ①화약, 기관 기타 폭발성 있는 물건을 파열하게 하여 제164조 내지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을 손괴한 자는 방화의 예에 의한다.
②전항의 행위가 과실로 인한 때에는 실화의 예에 의한다.
일단 신무일의 행위에 따른 결과(역무원이 사망하고 이주일이 부상당한 것 등등)에 대한 고의는 없었으므로 후행결과에 대해서는 과실범인 결과적 가중범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당시 형법에 폭발물에 의한 죄책의 치사 범죄에 가중하는 규정을 두지 않었다. 초반의 논의도 제172조 제1항을 적용할지 제2항을 적용할지 문제였다.
어쨌든 부작위에 의한 고의범이 성립되면서 사람이 공연하고 있던 건조물을 손괴하고, 공익에 공하는 기차를 손괴하였으니 상당 처벌을 받게 되었다.
5.2. 한국화약, 인천공장 관계자
특별수사단은 관련자를 모두 구속시키는 등 엄벌주의적 기조에서 강하게 수사를 하였다. # 그렇게 그 외 관련자들은 철도법위반죄로 기소되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징역형과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상고기각되어 이들의 형도 확정되었다. #- 심재황 - 한국화약 이사/공장장 -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 윤재영 - 한국화약 총무이사 -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 오재선 - 한국화약 총무부장 -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 강인수 - 前 인천역 화물과장 -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 이기원 - 인천역 역무원 -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
- 정종옥 - 대한통운 직원 - 벌금 10만원[24]
5.3. 한국화약에 대한 민사소송
공연 중 피해를 입은 한 여가수가 한국화약을 피고로 하여 손해배상을 구하는 민사소송도 제기했다고 한다. 차후 소송 경과는 불명이다. #6. 매체에서
-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가 2008년 개봉했으며 재난 영화는 아니다. 작중 주인공의 출생 직전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설정' 정도. 가을로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다뤄지는 것보다도 더 적게 다루는 수준.
- 당시 상황을 다룬 소설로 기찻길 옆동네의 1부가 있다.
- 2007년 9월 18일 KBS 상상플러스 147회 하춘화, 장윤정 편[26]의 스타댓글에서도 사고 당사자였던 하춘화가 이 사고에 대해 언급했다. # 그리고 하춘화는 2023년 12월 17일 KBS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출연해 다시 한 번 이 사고를 언급했다.영상
- 2024년 3월 21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고를 다루었으며, 당시 인기스타로 근처 삼남극장에서 공연을 했었던 하춘화가 증언자로 등장했다.영상
7. 관련 문서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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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9일 | 179 | ||
2024년 6월 24일 | 23 | ||
2022년 10월 29일 | 159 | 이태원 압사 사고 | |
2020년 4월 29일 | 38 |
- [ 201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2019년 5월 29일27 25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8년 1월 26일51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2017년 12월 21일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7년 3월 31일22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2014년 12월 1일27 501오룡호 침몰사고 2014년 5월 28일21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299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0년 12월 13일22 제1인성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46 천안함 피격 사건
- [ 200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2008년 1월 7일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192 대구 지하철 참사 2002년 4월 15일13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25일25 제7호 태창호 사건 2001년 9월 11일2,996 28 9.11 테러 2001년 7월 24일20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고 2000년 10월 27일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 199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0일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103 1997년 9월 3일 65 21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101 1994년 10월 24일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78 1993년 1월 7일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 198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7일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 197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 196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31 서울역 압사 사고
- [ 195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 194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549~,000+우키시마호 사건
- 철도 폭발사고
-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 이리역 폭발 4년 전에 발생했다.
-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 - 그나마 이리역 사고에선 일부 역무원들이 목숨을 걸고 대피활동을 하였고 행운까지 따라 주면서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룡천역 참사는 운도 지지리도 없어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모두 벌어졌다. 질산암모늄 수송열차와 유류 수송열차가 충돌하였고 거기에 전신주가 엎어지면서 튄 스파크가 유류 폭발과 질산암모늄 폭발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면서 반경 500m 내의 모든 건물이 완파되는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 평강역 폭발사고
- 네이샤부르 철도 참사
- 우파 철도 참사
- 킹맨 가스 폭발사고
- 톈진 항구 폭발 사고
-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 핼리팩스 폭발 사고
- 철도 사건 사고
- 안전불감증
[1] 신원 파악이 가능한 사람만 집계했을뿐,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의 집계되지 않은 수치다[2] 이렇게 뇌물을 요구했던 이유는 공무원 급여가 너무 낮아서였다고 한다. 당시 공무원의 시급은 직급에 따라 달랐으나 1인당 300원 내지 500원 수준이었는데, 2020년의 물가로 비교하면 대략 6천 원~1만 원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맡은 업무를 감안하면 급여가 후한 편은 아니다.[3] 막걸리와 소주를 한 병씩 섞어서 마셨다.[4] 불법건축물인 판자촌과 홍등가로 가득했던 지역이었으니 이 무허가 건물들과 땅의 실소유주들은 거주민과 무관한 지주들이었다.[5] 출처[6] 이후 군청을 익산군 관내로 이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당시 함열면과 금마면, 황등면 등이 군청 유치 경합을 벌였는데 금마면은 철도가 통과하지 않았고 황등면은 이리시와 너무 가까워서 결국 함열면이 군청을 유치하게 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전국의 군청 소재지가 일괄적으로 읍으로 승격되면서 군청을 유치한 함열면도 함열읍으로 승격되었다.[7]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던 남성여고 구 교사는 남성여고가 남중동 구 남성고 교사로 이전된 후 이리서초등학교 교사로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상황이며, 피해가 컸던 남성여중 교사는 붕괴, 균열된 부분은 철거되고 남겨진 일부분이 상가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중이다.[8] 남성여고 교사가 남성여중 교사보다 피해가 덜했던 데는 남성여중 교사가 벽돌 조적식으로 지어진 반면 남성여고 교사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다는 점도 한몫했다.[9] 남성맨션이 지어진 때는 훨씬 뒤인 1980년대 중반이다.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남성여중고의 소라산 이전과 남성국민학교의 폐교 전후 시점에 있었던 일.[10] 탑승객 규모로 보아 특급(통일호) 또는 보급/보통(비둘기호)열차였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새마을호 1칸의 정원은 56석이며 600명을 태우려면 무려 11량으로 운행했다는 뜻인데 그 당시 그렇게 긴 새마을호를 호남선에 운행했던 적도 없을뿐더러 당시 초호화 귀족열차였던 새마을호에 600명을 태울 만큼의 수요가 호남선 지역에 있었을 리 만무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호남선 새마을호는 3~4량 편성이었다.[11] 통표폐색 문서 참조. 기관사가 창문을 열고 승강장에 세워진 통표걸이에서 통표를 직접 낚아채는 방식으로 회수해야 한다. 통표를 놓쳤다면 통과역이라고 해도 열차를 멈추고 통표를 가지러 가야 했다. 현재는 거의 대부분의 구간이 자동화되었으나 정선선과 호남선 와룡역 차량기지 인입선 구간에 아직 통표폐색이 남아있는 구간이 있다.[12]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이 교차하는 역[13] 바로 1년 전에 있었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마오쩌둥 사망, 그리고 1977년에 출범한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갈등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안보 불안이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리에 왔다가 사고를 당했던 하춘화도 사고 직후에 '드디어 전쟁이 터졌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무엇보다 당시는 한국전쟁 휴전 이후 20여년밖에 흐르지 않았던 때로 대다수의 성인 인구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였던 탓도 클 것이다. 정말로 국토가 폭격을 맞는 모습을 봤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14] 한국화약그룹 창업주이자, 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이다.[15] 예를 들자면 익산우체국은 그 명칭을 구 이리우체국에 넘겨주고 함열우체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든지(현 익산함열우체국), 현재는 없어진 익산등기소는 이름을 이리등기소에 넘겨주고 북익산등기소로 바뀌었다든지.[16] 하춘화는 오프닝 공연을 마치고 다음 순서를 준비하던 중에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고 증언헀다.[17] 하춘화는 월남 위문 공연 때 이주일을 처음 만났고 월남전 종전 후에는 국내 공연의 보조 MC를 이주일에게 전담시켰다고 한다.[18] 원광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설립되고 원광의료원이 개설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19] 거기다 이때 이주일 덕에 목숨을 구한 하춘화가 이후 자신의 공연에 사회자로 항시 이주일을 지목하면서 인지도가 더 높아졌다.[20] 현재 군산대학교 해양과학대학[21] 사고로부터 7년이 지난 1984년까지 철거되지 않은 채 남겨진 폐가도 있었다.[22] 당시 이리시에 있던 공업고등학교는 이리공업고등학교와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다.[23] 대법원은 행위자의 보증인적 지위 및 의무의 존재와, 진화가 가능했음에도 도주한 부작위행위와 폭발물을 직접 파열케 하는 작위행위의 동치성을 인정하였다.(78도1996)[24] 말도 안되는 벌금액이라고 생각이 들 수 있는데, 1979년 판결이며 당시 물가를 고려해야 한다.[25] 당시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가 일어난 시기에 방송되어 마지막 부분 서경석이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에 대해서도 언급한다.[26] 여담으로 이 방송분은 세대공감 OLD & NEW의 마지막 방송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