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6 15:44:14

만화 검열제

1. 개요2. 검열 방법3. 역사
3.1. 한국아동만화자율회 시절3.2.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 시절3.3. 한국도서출판(주간신문)윤리위원회 시절3.4.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시절3.5.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산하 간행물윤리위원회 시절
4. 당시의 심의기준5. 만화 검열제의 허와 실6. 해외의 경우
6.1. 왜 한국에서 성공했는가?
7. 그 외8. 관련 문서9. 관련 링크

1. 개요

1961년부터 19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에 따라 사후심의로 바뀔 때까지 한국에서 시행된 대표적인 만화 탄압 정책이자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오랫동안 시행했던 만화 사전심의제도의 총칭. 사후심의로 바뀐 오늘날에도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이름의 위장된 검열이 행해지고 있다.

이때 일어난 만화 검열제 시행과 1967년에 설립한 합동출판사독점체제 구축이 겹쳐지면서 한국만화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당대 만화가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내우외환인 셈.(시장적으로만 따진다면 지속적인 성장을 했지만 질적 저하가 가속화되었다.) 영국 자동차 산업으로 비유하면 적기조례브리티시 레일랜드(이하 BL사)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격[1]이다.

만화 검열제 기간 동안에는 당연히 자유로운 창작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에(심지어 어느 분량까지 그릴 수 있는지도 정했던 적도 있었으니 놀라울 따름) '건전한' 어린이 명랑만화, 스포츠 만화[2], 역사 만화[3]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때 작품 중에는 물론 꼽아보자면 명작들도 많고 출판량은 늘었지만 만화의 질은 해방 전보다도 떨어졌다 라고 만화계에서는 자평한다.(이는 합동출판사의 독점도 한 몫했다.)

2. 검열 방법

1997년 청보법 시행 이전 만화 심의 방법은 사전심의와 사후심의로 나뉘어 있었는데, 사전심의는 인쇄 전 편집상태에 있는 원고를 접수해 심의하는 방식으로서 청소년 및 아동만화에 해당되었고, 사후심의는 심의 없이 나온 정기간행물 연재 만화 및 성인만화를 대상으로 하여 납본 뒤에 심의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사전심의의 경우, 간윤이 출판사로부터 심의신청을 받아[4] 만화윤리실천요강 및 아동만화 또는 청소년만화 심의기준에 따라 무수정 통과, 수정 통과, 반려[5], 전면 개작, 폐기에 이르는 다섯 가지 결정을 내리며, 심의가 부당하다고 작가나 출판사가 항의할 경우 재심요청(2차 심의)을 할 수 있다.

또 사후심의의 경우, 사전심의와는 달리 표현의 선정/잔인성 등 불건전성의 정도에 따라 경고, 주의, 게재 중지, 제재 건의라는 네 가지 결정을 내리며, 특히 '게재 중지'는 연재 만화로서 계속되는 경고 결정에도 불구하고 상습적으로 불건전한 내용을 게재할 시 연재 중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제재 건의'는 그 정도가 심하여 공보처, 문화체육부, 경찰, 검찰 등 관계당국에 건의하여 이에 대한 행정 조치까지 내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었다.

3. 역사

3.1. 한국아동만화자율회 시절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12월에 만화가들과 출판업자들로 구성된 한국아동만화자율회가 세워지면서 사전심의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만화가들이 자율적으로 심사위원을 구성한 것처럼 위장해 유료 심사했던 방식은 일부 심의위원들이 매수되어 편파적인 심의를 자행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이 때문인지 자율회에 반대하는 젊은 만화가들은 부녀복지회와 연계하여 새 사전심의 기구를 만들기까지 했다.

자율위 창설 이후로 출판되는 모든 만화는 이 강령에 따라 검열을 받아야 하며,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만화는 연재/출판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명문화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화를 내기 전에 원고부터 검열하는 식의 사전심의(검열)이다. 그래서인지 1997년 이전까지 시중에 나온 아동/청소년 만화책 표지에는 '심의필' 마크가 찍혀 있다.

3.2.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 시절

1968년부터 문화공보부가 아동만화정화대책을 수립하여 만화 사전심의제도 시행,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개정, 아동복리법(현 아동복지법) 개정으로 시작하여 8월 31일에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를 신설한 뒤 내부 규정인 아동만화윤리강령, 아동만화윤리실천요강을 제정하여 9월 9일부터 한국아동만화자율회를 해체하고 사전에 원고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마다 전체위원회를 소집해 심의를 했으며 목/토요일에 열린 분과위원회에서는 폐기될 만화를 선별해 이를 본 위원회의 심의에 상정시켰다.
a. 만화표지에는 독한 적원색을 피하고 선명한 주홍색(연한 홍색)을 사용케 한다.[6] (1968. 9. 27.)
b. 순정물 만화에서, 어른과 소녀사이 또는 국민학생 간의 교우관계를 이성간의 교제(애정)로 착각케 하는 내용이라던가 성인 사회의 어두운 이면의 필요이상 강조 등은 각별한 주의를 환기함. (1968. 10. 2.)
c. 이성간의 연애관계를 묘사, 표현해서는 안된다. (1968. 10. 19.)
- 1968년 한국아동만화가협회 기관지 <캐리커쳐>에 실린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 심의규정 중에서.

아동윤리위를 통과한 만화 작품에는 자율회 시절 '검필'의 후속격인 '심의필' 마크를 붙였으며, 심의기준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주체적 규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만화의 용지와 판형, 편수와 쪽수까지도 포괄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의해 1968년 이후 선화지는 갱지로 대체되었고, 국판은 4×6배판으로 확대되었고, 무제한 편수는 상중하 3권으로, 각 권 50페이지는 130쪽 이상으로 규제되기 시작했다. 결국 1권이 50쪽에 불과했지만 수십 권의 시리즈를 이어나가며 긴 이야기를 소화할 수 있었던 60년대의 상황에 비해 70년대 만화방 만화는 불과 390페이지에서 모든 이야기를 마쳐야 되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다.

3.3. 한국도서출판(주간신문)윤리위원회 시절

이후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는 1970년에 한국도서윤리위원회(이하 도륜), 한국잡지윤리위원회와 통합하여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가 되었고, 1972년 3월부터 만화전문위원회를 세워 전문위원 9명을 두어 사전 검열을 맡도록 하였다. 1976년에는 '한국도서출판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로 바뀌면서 조직은 더 거대화되었다. 그 사이 만화부문에 관한 규제조항은 아동윤리위 시절에 비해 세부적인 부분으로 확대되어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직접 통제하게 되면서 도서윤리위 스스로가 '규제의 도그마'에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일었다.

1974년에는 고우영 화백의 <수호지> 등의 성인 극화만화가 유행하자 그해 3월 7일에 <수호지> 2~3호를, 6월 28일에는 결정문을 통해 장병욱 화백의 <성인극화 대부> 1권을 경고 처분한 뒤 12월에는 성인만화윤리실천요강을 제정하여 성인만화에도 사전 검열을 시작했지만, 1977년 1월에 이르러 성인만화에 퇴폐적인 내용들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일제 단속을 실시한 뒤 성인만화 윤리 실천요강을 폐기하고 성인만화를 사전심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이후로 나오는 모든 만화들은 검열을 받기 위해 아동 및 청소년용으로만 출간해야 했다.

이 때문인지 우석출판사에서 낸 <고우영 삼국지> 등의 고우영표 성인 극화만화 단행본은 초판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분량이 아동/청소년 수준에 맞추어 가위질을 당하는 참극을 당했다. 반면 신문만화의 경우에는 1972년 10월 유신 뒤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하여 다른 기사들보다 더 민감하게 신문의 만화를 감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검열의 기준이 일정했는가 하면, 그 것도 아닌게 기준 자체가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곧 후술할 별도 항목에서 기준에 걸렸는데도 심의를 통과해 출판된 경우가 꽤 있었고(예: 공포의 외인구단) 심지어 반공만화의 경우 폭력성, 선정성이 엄청나도 멀쩡히 출판되었다.[7][8]

1979년에는 미성년자보호법을 개정하면서 불량만화를 팔면 형사처벌한다는 내용을 담은 제2조 2항을 추가한 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한 후 신문사에도 계엄사 소속 검열관들을 상주시켜 신문만화에 가위질을 가했고[9], 이후 신군부 세력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난 뒤 만화계에 사회정화의 폭풍을 일으켜 그해 9월 5일 도서윤리위에서 '만화정화방안'을 마련하여 더 강하게 억압하였고, 그해 11월에는 사회정화위원회가 불량만화 출판업자 13명을 구속하는 한편 69명의 만화가들을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한편 1977년에 도서윤리위는 내부 규정인 '아동만화심의기준'을 제정하여 도서잡지윤리강령 및 만화윤리실천요강에 의거 명랑/순정/역사 등 13가지의 만화종류별 규제사항과 대사 및 그림의 묘사, 표지 등에 대해 규제 기준을 시시콜콜 명문화시켰으며 1984년에 일부 수정을 거쳤다. 이는 1997년에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사전심의가 폐지되기 전까지 만화가들에게 헌법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실 도서윤리위의 철저한 사전심의가 이루어진 데에 대한 배경은, 일부 만화작가들이 인기를 의식해 선정적이고 잔혹한 장면을 만화에 넣은 것에도 그 원인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또 일본만화의 내용을 그대로 불법복제해 시중에 유포시킨 출판사나 작가들에도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부'의 제거를 위해 일률적으로 실시했던 사전심의제도는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이 제도는 건전만화를 정착한다는 명분 하에 만화산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의 기발하고 재미있는 출판만화 창작을 원천적으로 막는 족쇄 노릇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또 도서윤리위는 만화문화의 특질에 이해가 부족한 보수성향의 학계, 문화계 인사들을 심의위원으로 주로 참여시켜 이들로부터 불량만화 관련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케 했다. 게다가 도서윤리위는 '불량만화 시비'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각급 사회단체나 초/중등학교들을 동원해 '불량만화 추방' 같은 관제 캠페인을 연례행사처럼 치러왔다. 이런 행사들은 결국 사전심의제의 확대 재생산을 지지하는 시민운동인 일반에 널리 홍보되었다. 이 시기를 계기로 김경언, 김산호, 김종래, 엄희자, 조원기, 민애니, 박부길 등 유명 만화가들이 절필/전업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간 것도 만화계의 큰 손실이라 할 수 있다.

3.4.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시절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후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이에 따라 사회 각지에 민주화 바람이 불자 이를 의식한 도서윤리위 역시 1989년에 '사단법인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 바꾸어 명칭과 위상을 격상시켰다. 초대 정한모 위원장 체제로 시작한 간윤은 민간기구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아동/청소년 만화 사전심의에 대한 강제력만큼은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신문만화는 1987년 6.29 선언 이후 시사/정치풍자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간윤은 기존의 9개 위원회를 3개 위원회로 개편하면서 만화 사전심의를 '제3 심의위원회'에서 맡도록 했고, 심의위원 5~6명이 이를 맡도록 했다. 그래도 심의기준 완화에 따라 이전에는 출간이 금지되었던 민중만화가 당당히 출판되고 성인만화의 수위도 한층 높아졌으며 만화 장르도 늘어나는 등의 여러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왔으나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와 YWCA 등 시민/종교단체에 의한 민간 차원의 규제가 오히려 대두했고, 신문만화 역시 사주와 데스크 눈치를 피할 수 없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 일부 만화 작가들이 사전심의제를 작품권 침해로 간주하여 무용론을 주장하였으나, 대다수 출판인과 유통업자, 사회 여론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1997년 3월에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면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동법 45조에 따라 법제화되고 36년만에 사전심의에서 사후심의로 바뀌는 순기능이 있었지만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또다른 만화 검열제를 만들어 사후심의 업무를 문화체육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에 위임시켰다. 7월 1일 청보법 시행 이후 수많은 만화방 영업자, 출판업자, 만화가들이 '음란만화 작가'라는 죄로 검찰로 나와 조사받아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 참조.

1998년 4월 30일에 '출판사 및 인쇄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 5호[10] 중에 '저속한 간행물' 부분이, 2002년 2월 28일에 구 미성년자보호법 제2조 2항이 각각 위헌 판정을 받고 2004년에는 청보법 시행령 별표1의 2호에 명시된 '동성애' 부분이 삭제됨에 따라 만화에 대한 규제가 좀 더 완화되어 프랑켄 프랑 같은 것도 무수정/무삭제로 정식 발매될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그 시대와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자유로워졌다.

다만 악습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없는 만화 검열제의 잔재는 남아서, 아직도 시중에 나오는 만화책들은 간윤 사후심의까지 거쳐야만 하며, 사회 역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애들이나 보는 것'내지 '교육적이어야 한다'라는 보수적 시선은 강하게 남아 있으며 이는 한국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에 여전히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때 검열을 겪은 경험 덕분에 2012년 한창 학교폭력이 사회문제화 되어 방심위에서 일부 웹툰을 음란, 폭력성 여부로 심의한다고 했을때 만화계와 독자층에서의 반발이 컸다.

3.5.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산하 간행물윤리위원회 시절

그러나 2013년에 한국도, 일본도 아닌 스페인 역사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음란성을 이유로 간윤에서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을 내리자 원작자인 안토니오 알타리바가 실망을 표하면서 간윤이 재심의를 안 하면 절판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선전포고를 내리고 한국어 판권자를 응원했다. 결국 해당 작품은 간윤의 재심의를 거쳐 8월 26일에 청소년 유해매체 등록이 취소되었다.

2016년에 만화 검열제가 재림할 수도 있다는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레진코믹스 집단 환불 및 탈퇴 사태웹툰 규제 찬성 운동 항목 참조. 다만 80년대 당시와는 다르게 작가들이 메갈리아를 집단 옹호하고 독자들을 무시함으로서 자초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그러나 워낙 이 움직임 자체가 흐지부지 끝나서 없던 것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4. 당시의 심의기준

문서 참고.

5. 만화 검열제의 허와 실

1970년대
a. "죽고싶다", "죽인다", "죽었다" 등의 표현은 '아동들에게 불행과 염세주의적 사고를 전파시킨다고 하여 금지.
b. 모자, 부녀, 남녀가 포옹하는 그림 금지.
c. 20세 가량의 오빠가 7세 가량의 여동생을 데리고 잠자는 장면도 금지.
d. 일본과의 경제협상 때면 독립군 소재 및 일본 비방(?)의 표현도 금지, 이때 일본을 배경으로 한 원고를 파기당한 어느 만화가는 실의에 빠져 작가생활을 포기.
폭력에 대한 과민반응
a. 칼은 흉포한 무기라 하여 그릴 수 없게 했다. 이 때문에 검객들이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장면으로 바뀌거나 칼날을 모두 지워 손잡이만 들고 싸우는 장면으로 대체[11].
b. 싸움 장면은 주먹이 얼굴이 닿으면 안 되고, 신체 일부끼리의 접촉도 안 되며 이같은 폭력 장면은 3쪽 이상 연속될 수 없다. 심지어 권투/레슬링 만화에도 이같은 규정을 적용. 프로레슬링 만화는 아예 없어져 버렸다.
c. 빈곤묘사 - 판잣집, 기타 가난한 가정의 묘사는 우리나라가 못산다는 인식을 준다 하여 제재. 이 금기사항은 최근(1987년)까지도 유지됐다[12].
기타
a. 자살금지 - 주변 사람들의 원한과 반목을 괴로워하던 여주인공의 화해와 평화를 바라며 자살하는 내용도 실족사로 대체.
b. 미국 이민간 남자가 적응에 실패하여 아내에게 귀국을 간절하는 장면에서 '미국의 인종차별, 냉정한 사고방식, 이기주의' 등을 언급한 것은 우방인 미국을 비방했다 하여 남편 자신의 무능력과 불성실로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수정되다.
c. 명암처리 - 인물의 명암처리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로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금지.
d. 악인 묘사 - 나쁜 사람은 악인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그리도록 요구.
e. 계모 이야기 - 계모의 학대를 다루는 것도 금지돼 있어 신데렐라, 콩쥐팥쥐 등은 모두 만화 소재가 될 수 없다.

- 만화가 장태산 화백이 언급한 당시 심의내용. 일간스포츠 1987년 10월 4일자 11면 <만화, 민주화는 언제> 기사내용 중에서.

위와 같이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어린이/청소년 만화 사전심의 부분이다. 이는 한국 만화문화의 발전을 가늠하는 기초가 되는 출판만화 분야일 뿐더러 관련 만화산업적 측면에도 캐릭터 등의 창작원 역할을 하기에 이의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현재 한국 만화 작가의 80% 이상이 어린이/청소년용 만화를 만들고 있으며 이 부분이 만화매출액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 만화가 작가의 고유적인 창작을 통해 생산되는 대중문화 산업의 하나라고 본다면, 첫째는 문화예술 창작품으로 창작여건이 보장되고 이를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둘째는 사회의 일반적 도덕통념에 비추어 대중매체인 만화는 교육적 내용을 담아 소비자를 건전한 사회구성원이 되도록 교육시키는 계도적 측면으로 나뉘어진다.

'만화는 교육적이어야 한다'라는 후자의 이론은 현재 문화당국이 시행중인 어린이/청소년 만화 심의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전심의는 문화성을 띤 창작작품에 공권력이 개입하여 그 내용을 수정하고 폐기하는 반문화적 행위를 합법화한다는 점에서 수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만화 창작의 타율적 규제는 만화가들의 정신세계를 위축시켜 상상력에 족쇄를 채울 뿐더러 만화를 심의 및 사법처리하는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과 출판의 자유'까지 박탈하는 위헌 소지가 있는 제도이다.

일본과 같은 선진국들의 예를 살펴보면 만화 원고에 대해 공권력이 일일이 심사하는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만화 내용이 사회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을 때 시민단체 등 사회 구성원들의 자체 정화기능이 발동해 불량만화 생산/유통을 시민의 힘으로 통제시킨다는 건 선진국의 예로 볼 수 있다. 또 불량매체 생산을 공권력이 원천 봉쇄하고 이를 어린이들로부터 격리하기보단 어린이에게 불량과 우량을 구분하고 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일찍부터 길러주는 게 현재 선진 시민사회의 사회교육 시스템이다.

그러나 한국의 만화 사전심의제도는 의견을 교환하고 동의를 구하는 '심의' 방식이 아니라 힘에 의한 일방적 순응을 강요하는 '검열' 방식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비민주성 시비가 제기되어 왔었다. 또 들쭉날쭉한 사전심의 패턴은 1970년부터 1996년까지 간윤의 사전심의 현황에서도 나타나는데, 1976년 당시 전체 심의건수 11,816건 중 한 작품만 폐기를 받았으나 1977년에는 전체 심의 6,454작품 중에 1할에 가까운 분량인 575건이 폐기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 이후부터 갑자기 재심의 청구가 증가한 것으로 나왔다.

이런 패턴은 규정과 관계없이 심의의 잣대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으며, 창작물에 대한 인위적 통계가 얼마나 허구인지 인위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 심사 기준에 관계없이 심의 담당자나 사회 분위기가 바뀌는 개연성도 그 요인 중 하나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후 드디어 말도 안되던 만화규제가 완화되어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나 싶었더니만 사전심의는 아직도 존재했고, 그리고 시민단체의 증가에 따라 YWCA나 음대협을 위시한 시민단체들이 민간 주도의 불량만화 정화 캠페인을 벌이며 만화가를 토론 등의 명목으로 소환하여 비난하는 일을 저지르면서 많은 만화가의 속을 뒤집히게 만든다. 김수정 항목이나 YWCA 항목을 봐도 여기가 받아온 증오는 만화 검열제 및 합동출판사 못지않았다.

이렇게 민간이고 국가고 할 것 없이 이런저런 검열에 시달리다 보니 고우영 삼국지처럼 원고 자체가 훼손당하는 등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극을 겪은 것과 더불어 만화가들도 만화를 제대로 그리질 못했으며, 위에서 말한 대로 김종래, 김산호 선생처럼 펜을 놓거나 아예 해외로 떠난 경우도 허다했다. 당연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탄하고 그 때 당시의 검열제도를 증오한다. 김수정은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에서 검열이라는게 단순한 무소불위 권력에 지나지 않았다 라며 분노를 쏟아냈으며 허영만은 이런 검열에 시달리다 보니 나중에 제대로 그리고 싶어도 그릴 수가 없더라, 걸리지 않을까 해서라고 회고했다. 이정문은 2000년대 와서 여자 팬티가 보이고 그리고 가슴이 보이는 한국만화 보면 와 이렇게 그려도 되냐?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라. 그땐 절대로 안되던 것들이라...라고 씁쓸하게 글도 남긴 바 있다. 나중에 웹툰 규제 찬성 운동, 레진코믹스 유해사이트 차단 사건, 네이버 웹툰 검열 논란 등의 사례에서 원로 만화가들이 경악하고 우려를 표한 것도 이 때의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검열이 그나마 덜했던 잡지가 박근혜육영재단이 운영했던 보물섬이었는데, 이 때도 아기공룡 둘리에서 둘리고길동에게 반말하고 싸가지 없게 군다는 이유로 많은 검열을 받았다.

근데 검열이 극심했고 정권과 사회를 비판해도 강제로 연재 중단되지 않은 만화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바우 영감. 영향력이 워낙 막강했고, 미국에 연줄이 있기도 해서 작가였던 김성환 씨는 그 독재 정권 시기에도 손찌검이나 고문 한번 당하지 않고 겨우 벌금형이나 가택연금 등으로 끝냈다.

6. 해외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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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서도 이와 같은 만화 검열이 있었다. 프레드릭 워댐 박사의 책 '순수에의 유혹(Seduction of Innocent, 1954)'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후, 50년대 ~ 60년대에 만화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져서 배트맨의 숙적 조커는 폭탄 테러와 무자비한 살인들 대신 수돗물을 젤리로 바꾸는 동네 바보 형이 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 외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고. 위 사진은 당시 사람들이 만화점과 가정집에서 가져온 만화책들을 모아 버리는 장면이다. 이 때 당시 시절을 코믹스의 황금기를 뒤따랐다고 해서 실버 에이지(Silver Age)라고 불린다.
  • 일본에서도 1930년대 군부정권 및 5~60년대에 한국과 비슷한 만화검열제가 있었다. 1938년에는 이미 군부가 만화 등 아동서적 33종을 발매금지한 사례가 있었고, 패전 이후 만화책을 비롯한 각종 서적의 증가에 따라 수준 미달의 만화책까지 범람하면서 만화책을 '빨간책(赤本)' 또는 '악서(惡書)'라고 부르던 시절, 학부모단체 PTA가 '악서추방운동'과 같은 문화 정화운동을 주도했는데 이 검열에 호되게 당하던 사람이 일본 만화의 전설 데즈카 오사무이다. 소녀가 손이 더러워서 손을 씻고자 하다가 안경을 입으로 물고 있는 장면을 두고 성적 코드가 느껴진다고 삭제 및 수정을 요구한다든지 당시 일본만화에서 속옷 노출이나 여러가진 지금과 전혀 다르게 나오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다. 아예 대놓고 이런 걸 그리면서 PTA와 정면대결하던 게 데즈카 오사무와 나가이 고. 다만 이는 국가에서 직접 진행한 일은 아니고[13] 서울 YWCA 만화 모니터회가 했던 짓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우습게 볼건 아니라서 일본 만화가들도 엄청 시달려왔고 당시 일본 교육단체이니 정부기관과 지자체들도 이런 PTA의 행위를 옹호했기에 일종의 검열제라고도 볼 수 있다. PTA 항목을 참고하면 데즈카 오사무가 재판 끝에 여길 상대로 법적 투쟁을 벌인 게 나온다. 결국 이런 만행은 1950~60년대 각 지자체가 '청소년육성보호조례'를 제정하고 1963년부터 출판사 출판윤리협의회를 통해 자율심의를 하는 방식으로 타협을 하여 마무리되었다. 하여튼 이런 일 때문인지 일본만화 곳곳에서 PTA는 풍자[14]되거나 심지어 에로게 게임에서 성에 굶주리는 단체로 나올 정도로 일본 대중문화계의 증오를 받아왔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

6.1. 왜 한국에서 성공했는가?

하지만 저 두 나라는 그럼에도 만화산업이 끝까지 버텨서 다시한번 황금기를 이루어 냈다는 차이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렇게 미국/일본과 한국의 운명이 갈린 이유를 몇 가지 들자면 민주주의 체제에 표현의 자유를 더 중시했던 미국과 일본은 순수한 민간 시민단체에 의해 규제와 검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화가와 만화 독자층들의 항의를 쉽게 받아줄 수 있었고 1960년대 히피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으로 사회가 급변한 영향을 받은 반면 군사독재정권이었던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만화가가 항의하면 당사자나 주변에 압력을 넣거나 데모를 해도 경찰력으로 찍어누르면 장땡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검열, 규제에 항의할 힘이 없었다. 만화가들의 정점 그 자체인 한국만화가협회가 정부의 통제 하에 친목단체로 전락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국가가 직접 검열과 규제에 나섰으므로 항의나 풍자는 원천적으로 막혀있었다. 게다가 언론 역시 정부의 보도통제와 언론 자신의 외면으로 인해 만화 검열에 대한 비판이나 만화가들의 고난을 실을 수도 없었다. 이런 연유로 유명 만화가들과 만화방 주인들 역시 매년 어린이날마다 불량만화 추방운동에 동참하는 등으로 이에 순응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 당시 대한민국은 저개발국으로 경제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론 유교 문화의 잔재가 짙게 남아있던 시기였다.[15] 그러다보니 문화적 여유를 즐길수없는 결핍욕구 국가에 가까운 상태였고, 즉 경제적인 요인, 정치적인 요인, 문화적인 요인 3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대한민국의 만화 검열제(를 비롯한 대다수의 미디어 검열) 정책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한국의 문화는 만화만 탄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문학, 음악, 연극, 영화 등 모든 영역에서 검열과 규제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이 시기에 작살난 문화인이 한둘이 아니었다.[16]

즉, 다른 국가들의 경우 이미 만화 산업이 크게 발달한 후인지라 짓밟혀도 버티고 있을 기반이 존재해서 근근히 버텨오다가 다시 해제되자 미리 닦아둔 기반을 시작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한국은 만화 산업이 완전 붕괴했다가 간신히 머리를 살짝 들었는데 도로 짓밟히면서 일어설 기반 자체가 완전히 붕괴한 것이다.

7. 그 외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부천시, 문화체육관광부와 공동으로 만화 검열에 대한 기억의 환기와 반성의 의미로 2017년 5월 17일부터 7월 9일까지 한국만화박물관 1층 제2 기획전시실에서 '빼앗긴 창작의 자유'란 이름의 만화 검열사 전시회를 열었다.

조금 의외일 수도 있지만 해적판 만화도 당연히 심의권에 들었다. 만화 검열제가 횡행했을 때 해적판도 당시에는 트레이싱으로 그려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원고를 제출해야 했다. 그래서 간윤위의 필터링을 거친 해적판 만화는 단순한 식질만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내용이 개변되는 수준으로 나오는데, 단적으로 내일의 죠의 한국 해적판은 희망찬 결말로 끝나게 되고 타이거 마스크는 군대에 가면서 끝나게 된다. 물론 80년대 이후 복사기 같은 게 해적판 업계에 보급되면서 일본만화 원본의 식질만 하면 되는 수준으로 스타일이 바뀌고 나서는 원고를 제출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진지 몰라도 해적판 업자들의 자체검열은 조금 더 느슨해졌다. 그래도 공권력이나 언론, 학부모단체는 여전히 무서웠는지 로컬라이징과 자체검열을 했는데, 로컬라이징은 방송국에서 방영되던 일본만화들보다도 질이 더 조악했고[17], 자체검열은 어설프게 덧칠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실소만 자아냈다. 상세한 것은 해적판 문서 참조.

8. 관련 문서

9. 관련 링크



[1]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적기조례로 인해 후발주자인 유럽대륙 및 미국에 추월당했다가 백 년 만에(적기조례와 BL사는 약 1세기 간격을 두고 존재했다) 간신히 머리를 살짝 들었는데 BL사로 인해 다시 쇠퇴하면서 한때 영국 '국적' 브랜드가 없었을 정도로(롤스로이스/미니는 BMW에, 로버/재규어는 타타에 매각되는 등) 붕괴하였다. 그러니 이 2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던 격인 한국 만화계가 어땠을지는 말이 필요없으리라.[2] 권투, 레슬링 등 격투기 스포츠를 다룬 만화는 폭력성을 이유로 창작에 제약이 붙었다.[3] 물론 심의기준에 따라 각색되거나 묘사가 생략되는 경우도 많다.[4] 신규접수는 4일 내, 재접수는 당일 내 처리.[5] 작품 원본을 작가에게 돌려보내 수정을 요구하는 것.[6] 이 조치는 붉은색이 북한의 공산주의를 상징한다는 이유였던 것이다. 이는 만화 심의가 반문화적인 공권력의 남용이었으며, 당국의 레드 콤플렉스가 아동만화에까지 스며들어 반공교육의 한 단면으로 굳어진 것이다.[7] 북한도 김부자 찬양만화이나 반미만화에선 아무리 허무맹랑해도 설명을 넣지 않지만 타 장르의 만화에선 설명을 넣어야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8] 그러나 1971년에 도서윤리위의 '반공만화 구성상의 주의환기'에 따르면 "서울이나 대도시에 고정간첩이 '아지트'를 두고 암약하든지, 높은 지식층이나 존경해야 할 인격자(교직자, 의사, 정부기관의 요직자 등)가 간첩으로 활약하면 안 되며(중략), 반공만화를 그릴 시 고정간첩의 활약상을 피해야 하며 간첩활동 대상은 무식층에 해당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 당시 도서윤리위 심의실장인 최영보 씨가 한국아동만화가협회 기관지 <캐리커쳐> 1971년 1월호에 낸 <아동만화심의의 문제점> 중 에서.[9] 당시 <중앙만평>을 정운경과 격일제로 연재하던 박기정 화백은 이 시기에 만평을 그릴 때마다 무수한 협박전화를 들어야 했다고 증언했다.[10] 음란 또는 저속한 간행물이나 아동에 유해한 만화등을 출판하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11] 실제로 이런 검열 규정 때문에 많은 만화들 중에서 주인공이 칼 같은 날붙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내용 대신에 아예 맨주먹으로만 싸우는 내용들이 들어가야했다. 그리고 허영만 화백의 쇠퉁소도 이런 검열 규정 때문에 주인공이 사용하는 무기가 칼에서 쇠퉁소로 바뀌었던 것이다.[12] 이게 농담 같지만 엄연히 실제로 있었던 규정이었다. 그래서 사진 작가 최민식 같은 경우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발표했는데, 그렇게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왜 가난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느냐? 혹시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적화통일을 노리는 수작으로 그런게 아니냐?"라는 황당한 취조를 받았고 심지어 필름 6만개를 몽땅 중앙정보부에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13] 물론 항복전에는 영화, 만화, 소설 가릴것 없이 이런식의 검열을 실컷 했었다.[14] KKK처럼 입고 나와 아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책을 불태우기도 한다...[15] 당시 1인당 소득이 67~100달러정도밖에 되지 못했다.[16] 천상병, 김지하, 백두산 등[17] 왜색 에피소드는 보통 삭제하지만 해적판 만화는 우기기로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 가장 심한경우는 한국에 대한 언급과 일본에 대한 언급이 뒤바뀌는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