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赤旗條例Red Flag Act
영국에서 만들어진 법으로 '붉은 깃발법'이라고도 한다. 정식 명칭은 'The Locomotives on Highways Act'. 줄여서 'Locomotive Act'라고도 한다. 3번에 걸쳐 개정되었다. 이른바 '적기조례'라고 알려진 것은 1865년의 2차 개정법률. 표제어는 '조례'로 되어 있지만, 제정 주체가 국회인 영국 의회였기 때문에 조례가 아닌 법률이다.
세계 최초의 교통법이지만, 현대에는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알려졌다.
성격 자체는 러다이트 운동과 비슷하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은 기득권에 맞선 폭력으로 실행하여 실패한 반면, 적기조례는 정치인에게 로비하여 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력이 있었다.
2. 역사적 배경
1826년 영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실용화된 자동차가 등장했다. 증기기관을 탑재한 28인승 자동차였는데, 런던 시내와 인근 도시 간에 정기 노선 버스로 10대가 투입돼 큰 인기를 끌었다.그런데 이 증기 자동차가 실용화 단계를 밟을 즈음 현대의 눈으로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법안이 통과돼 막 불이 붙기 시작한 영국의 자동차 산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에 증기기관은 놀랄 만한 발명이었다. 이후로 끊임없는 증기자동차를 상용화하고자 노력하여 1820∼40년대에 걸쳐서는 '증기자동차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증기자동차가 보급이 늘어나자 문제가 생겼다. 마부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데다, 종종 증기자동차가 폭발하는 사고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정된 법이 1865년 선포된 '붉은 깃발 법', '적기법' 등으로도 번역되는 적기조례(Red Flag Act)이다. 자동차가 등장하여 피해를 본 마차업자들이 하도 징징대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성은을 내린 것이다.
3. 법안 내용
The Locomotives on Highways Act(1861)
The Locomotive Act 1865(적기조례)
Highways and Locomotives Act 1878(개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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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많고 탈많은 법은 내연기관이 태동하는 1896년에 와서야 비로소 폐지되었다. 단, 속도 제한은 14mph(23km/h)로 상향된 상태로 존치시켰다.
4. 영향
4.1. 정설
자동차의 속도와 운송 능력을 마차 시대의 의식 수준에 얽매인 어이없는 규제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법안이 선포된 1865년, 자동차는 이미 시속 3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로 시속 6.4km, 그것도 마차 뒤에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 땅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좋은 자동차를 개발할 의욕을 꺾었다.말은 생물이기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기상, 생물, 지형에 의해 놀라면 어디로 꺾여서 돌진할지 모르는 문제가 있다. 그에 비하면 자동차는 운전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제동거리가 매우 짧았기 때문에 안전성 또한 초기부터 마차에 비하면 매우 높았다.
현대인들은 흔히 당시 마차를 퇴역 경주마가 이끄는 관광마차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운송수단으로 쓰인 마차는 그런 장난감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 당시 차량이 현대 승용차보다 크긴 했지만 마차의 사이즈는 그보다 훨씬 더 컸다. 또한 마차를 끄는 샤이어 등의 역용마는 말 한 마리가 전고 1.8미터에 전장 2미터가 넘어서 말 한 마리가 상당히 컸다. 더군다나 마차의 구동방식상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구동부가 마차 훨씬 앞쪽에 배치되어서 마차에 브레이크를 달아봐야 말이 내달리면 마차가 그대로 뒤집히는 전복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이런 말 4마리가 끄는 역용마차는 현대의 트레일러만 한 크기였다. 마차를 끄는 말들이 어떠한 이유로 놀라서 기수의 제어를 듣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브레이크 없는 대형트럭의 폭주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마리 퀴리의 남편이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피에르 퀴리가 술 취한 마부가 모는 마차에 깔려 현장에서 즉사하여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게 불과 117년 전인 1906년도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 법은 이후 30여년이나 효력을 발휘했다. 산업 혁명의 발원지로서 다른 나라를 앞서갔던 영국은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기조례 때문에 아주 간단히 제2차 산업 혁명(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까지)의 주역인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 등에게 빼앗겼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이미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를 발명한 데다 대량생산체제까지 갖추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카를 벤츠는 독일에서 자동차 사업을 성공해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를 열고 있었다. 모델 T로 2백만 대를 찍어내 자동차로 세상을 뒤엎었다는 미국의 포드사가 1905년에 창립되었다.
사양산업인 마차를 보호하고자 입법한 규제가 결국은 마차와 자동차를 모두 잃게 한 셈. 영국은 자기 빼고 발전해가는 주변국들을 돌아보며 아마 땅을 쳤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제정된 법은 바꾸기 어려운데 산업이 망하기는 순식간이었다. 이후 한동안 영국 자동차 산업은 상당히 뒤쳐졌으며, 현대에도 영국 자동차 브랜드의 인지도는 롤스로이스나 벤틀리를 빼면 낮고 후발주자들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과 비슷하거나 뒤쳐지고 있다.
1988년에 방송한 KBS 퀴즈박사 자동차 편에도 보면 적기조례 관련 내용이 나온다.(28분 22초~29분 40초 사이)#
이 법이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된 것은 일단 정식 법률절차를 거쳐 '제정'되었다는 이유가 크다. 영국은 의회민주주의가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정착되었고 도시 빈민층이나 서민들도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마부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단 제정된 법을 폐지하기는 제정되지 않도록 막기보다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보에 대해서도 비슷한 규제법안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전보가 발명되자 당시 연락을 전담하던 전령, 주로 급사라 번역되는 메신저들도 어려움을 겪겠다 싶어서 비슷한 법을 제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어느 토리당 정치인은 '영국은 우수한 급사들이 있기 때문에 전보 따위는 필요없다.'는 말을 남겨 후대에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한다.[4]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의 본산으로서 수많은 발명이 나오고 산업이 급변하던 때였다. 그러나 인클로저 운동이 농노를 도시빈민으로 내몬 것처럼 산업변화에 저소득층은 적응이 곤란해 저항했는데 러다이트 운동처럼 폭력적 수단을 통하기도 했고 합법적 청원과 로비운동을 통해 저항하기도 한 것이다.
4.2. 수정주의적 시각
해당 법안이 실제로 시행된 영국에서는 증기 자동차의 기술적인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관계로 적기조례가 영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 정체 및 퇴보에 미친 영향이 적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도 있다.적기조례가 제정된 1865년 당시의 자동차란 증기자동차였다. 칼 벤츠가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 특허를 출원한 건 그보다 20년 후 일이다. 증기자동차는 종종 폭발사고를 일으켰고, 증기의 소음도 시끄러웠으며, 연료가 자주 바닥나는가 하면,[5] 느린 속도로 도로 주행을 방해했고, 보행자와 마차의 안전을 위협했다. 현대로 치자면 트랙터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도로는 지금보다 좁았고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미비하던 시절이라 차가 다니든 말든 사람과 아이들로 도로가 항상 꽉 차 있었다. 이러한 도로 상황에서 육중한 증기자동차가 규제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은 도로의 확포장, 신호체계 완비, 대중들의 인식 개선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증기자동차가 자주 사고가 터진 이유가 당시 자동차들은 프로토타입 및 시험주행이라는 개념이 매우 약했다. 아무리 산업 혁명 시절이었다곤 하나 증기자동차가 워낙 비싸서 현재의 자동차처럼 시제품을 운행해보고 문제점 리스트를 개선한 뒤 생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고, 일단 생산부터 하고 결함은 발생할 때마다 땜질식으로 A/S만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증기자동차도 마차처럼 운 없으면 결함이 발생할거라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속도제한 6.4km/h 역시 잘 살펴보면 그렇게 과도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당시 30km/h의 고속을 낼 수 있는 차량은 승용차가 아니라 버스였다. 그것도 최고속력이 그 정도였다. 기술력이 떨어지던 당시 30km/h로 달리다간 차가 고장나기 일쑤였으며 승용차는 당연히 더 느렸다. 19세기 후반 벤츠의 가솔린 자동차조차 최고 16km/h에 불과했다. 따라서 6.4km/h라는 속도제한은 당시 자동차의 최고 속력에 비해 그렇게 과도하진 않았다.[6] 무엇보다 최고 50km/h까지 낼 수 있는 말 역시 속도제한을 받았다.
적기조례 제정 당시 영국의 도로 주행조건도 생각보단 좋지 않았다. 최초의 타이어부터 영국의 로버트 W. 톰슨이 비포장도로에서 추락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역마차용으로 1848년에 생고무를 붙여 발명되었다. 자동차의 하중을 견딜 수 있으면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타이어는 1895년에 나왔다.[7] 서스펜션도 판스프링이 유일했고, 코일 스프링이나 에어 서스는 1900년대는 되어야 등장했다. 그리고 적기조례가 제정되기 한참 전인 1825년에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업한 이래로 장거리 고속 주행은 빠르고 편안한 철도가 담당하는 것이 당시 기준에선 당연한 상식이었다.[8] 즉, 위에서 말한 "증기자동차의 황금 시대"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좋은 예시로 아시아권에서는 위에서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하는 증기자동차가 도입된 사례가 거의 없다. 트럭도 처음부터 증기 자동차는 건너뛰고 매우 비싼 연료인 가솔린 엔진으로 도입되었으니...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면 아시아권에서는 상업적인 증기자동차는 인도보다 더 동쪽으로 진출하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9]
당시의 도로포장은 아스팔트가 아닌 자갈포장 혹은 로마 가도와 비슷한 마름돌 포장이었다. 무거운 증기자동차, 특히 증기버스가 이 도로를 빠르게 지나가면 도로 포장이 파손되는 경우가 매우 빈번했다.[10] 그것때문에 도로 관리가 매우 안되었고, 특히 민자도로 운영자들의 불만이 높았다. 통행료를 아무리 받아봐야 수리비로 다 까먹으니... 적기조례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의 하나가 민자도로 운영자들이었다. 증기버스 업자들과 엔지니어들이 적기 조례 제정 당시에 증기버스는 바퀴도 넓고 브레이크도 잘되어 있어서 마차가 더 도로파손이 심하다고 뻥을 치다가[11] 중간에 듣고 있던 민자도로 운영자들이 동작 그만 밑장빼기냐고 역습을 해버렸기 때문. 예외적으로 증기트램의 경우는 바퀴가 도로면을 직접 만나지 않고 강철 선로 위를 지나가는 관계로 적기조례에서 제외되었다.
- 참고로 증기버스의 도로 파손은 전체 교통수단에 의한 도로 파손의 1/3 정도였다. #
세계 최초의 자동차 사망자도 증기자동차에서 발생했다. 메리 워드라고 하는 아마추어 과학자였는데, 당시 사망사고가 났을 때의 증기자동차의 속도는 겨우 6km/h였다. 이러니 적기조례가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연기나 증기로 말을 놀라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도 이상하지 않다. 당시 말의 위상은 현대의 자동차였다. 반면 증기자동차는 마치 트랙터와 같은 크고 시끄러운 쇳덩어리였고, 증기는 철도의 경적과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오히려 현대의 경적 관련 규제가 당시보다 더 복잡하다.
게다가 증기 자동차는 증기기관 특성상 엔진 자체의 하중 + 당시 재료공학의 한계로 차체 중량이 매우 무거웠다. 마차처럼 목재로 만들 수가 없으므로 말 그대로 쇳덩어리였다. 당연히 법 제정 당시 영국인들은 자동차의 제동거리가 짧거나 제어가 쉽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당시 증기자동차의 제동장치는 매우 원시적이라서 사람이 직접 레버를 작동시켜서 바퀴 접지면 자체를 멈추게 하는 방식이라 제동 성능이 매우 나빴다. 당시의 증기버스가 현대 카운티급의 25인승이었는데, 45인승급의 현대 유니버스와 공차중량이 비슷했다.
수정주의적 시각은 적기조례 때문에 영국이 자동차 기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해석도 반박한다. 법안의 정식 명칭부터가 증기차를 제한하는 법령이지 내연기관을 규제하는 법령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후 20세기 자동차 산업의 메카가 될 미국은 정작 더 심한 규제들이 넘쳐났다. 예를 들어 1889년 일리노이주는 자동차나 기차가 시내를 통과할 때 속력을 16km/h 이하, 화물차나 화물기차는 10km/h 이하로 제한했다. 1901년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는 중에도 코네티컷 등 여러 주에서는 시내에선 19km/h, 교외에선 24km/h 등으로 규제했다.
반대로 적기조례같은 규제가 없었던 프랑스 등의 유럽 대륙에서도 증기자동차가 그다지 많이 팔리진 못했다. 이건 증기자동차의 한계 때문인데, 증기차는 가다가 멈추면 물 길어와서 넣고, 물이 수증기가 될 때까지 10분을 기다리고, 다시 가는 것을 반복했기 때문에 빨리 달려봐야 연료소모가 심해서 가성비가 안나왔다.[12] 그래서 증기자동차는 고출력이 필요했던 단거리용 트럭이나 로드 트레인, 또는 농업용 트랙터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적기 조례로 제한 받아 고사했다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의 출발선은 적기조례같은 악법 없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던 유럽 본토의 회사들의 설립 시기와 비교해도 몇 년 차이도 나지 않았다. 1910년대에는 유럽 대륙의 증기자동차 선도 국가였던 프랑스와 비슷하거나 앞서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극초기까지는 포드 사가 대량생산체제를 만들기 전까지 전세계의 자동차 회사들 중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곳은 없었고, 모두 소수의 주문생산에 의존했다.[13]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다른 지역은 전쟁으로 박살이 났기 때문에 1950년의 통계에서 영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약 80만 대로 세계 2등이었다.[14] 영국의 자동차 산업 멸망을 찾으려면 차라리 브리티시 레일랜드에서 찾는게 더 빠르다.
수정주의적 시각은 마부들의 로비로 적기조례가 제정되었다는 의견도 반박한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증기자동차의 단점이 워낙 컸기 때문에, 내연기관의 성능이 향상되어 대형 트럭, 버스에도 내연기관을 달고 1920-30년대에 자동차의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뀔 무렵에는 석탄업계 및 증기자동차 조수들이 로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15] 급속하게 퇴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실용적으로 증기자동차를 쓰던 곳은 트럭업계이다. 당시에는 북해 유전을 발견하기 전이라서 영국이 본토 밖에서 석유를 운송하는 운송비+관세가 많이 붙었는데도 결국 증기자동차는 퇴출되었다.
4.2.1. 반론
- 느린 속도로 주행을 방해했기 때문에?
느린 속도로 주행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최고속도 제한을 가했다는 주장은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이다.
- 적기조례 시기 증기 자동차의 항속거리는 20km도 안 되었다?
일찍이 1830년대부터 이미 평균속도 시속 19km로 최장 4시간 동안 주행할 수 있는 증기버스가 상용화되었다.# 아무리 연비가 나빴어도 항속거리는 70km 이상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니콜라스 조제프 퀴뇨의 초기형 증기자동차라면 모를까 15~20km의 개판이어서 적기조례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은 부적절하다. 참고로 칼 벤츠의 초기형 가솔린 자동차 조차도 첫 장거리 주행 당시 중간에 비스로흐 약국에서 리그로인을 구해다 보충해야 했을 정도로 항속거리가 수십 km에 불과했다.
- 증기자동차의 속도 제한은 최고 속도 대비 해서 과도하지 않다?
6.4km/h는 교외지 기준이며, 시가지에서는 3.2km/h로 제한되었다. # 참고로 성인 남성의 평균 걸음 속도는 1시간에 5km이다. 시내에서 3.2km/h면 사람(성인)이 걷는 것보다도 느렸기 때문에 사실상 운행하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증기자동차가 혁신적인 기술이라면서 아시아권에는 보급이 안 되었으니 모순이다?
동아시아 중심으로 설명하자면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강제로 개항당하면서 1882년에 처음으로 증기기관차를 이용한 철도 운영이 시작되었고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때는 1902년[16]이었다. 한국(당시 조선)은 1899년이 되어서야 경인선이 개통되었으며, 한반도에 자동차가 처음으로 들어온 때는 1903년[17]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조차 처음으로 철도를 개통시킨 때가 1881년이었으며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때는 1897년이었다. 새로운 교통수단, 특히 자동차의 도입 시점부터가 이미 20세기의 문턱을 전후한 시기였고, 이때면 이미 가솔린 자동차가 시장을 빠르게 확장해가던 시기였다. 당연히 최신 문물인 가솔린 자동차 중심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오래된 기술인 증기자동차가 동아시아에 들어올 일은 사실상 없었다.
- 최초의 증기자동차 사망사고는 메리 워드의 사망사고였다?First fatal automobile accident. 19th century artwork of the explosion of a steam stagecoach in Paisley, Scotland, on 29 July 1834. One of the wheels collapsed, rupturing the boiler which exploded, killing 5 people. This is said to be the first fatal automobile accident. Following the accident, further steam stagecoach journeys were banned. The Scottish engineer John Scott Russell (1808-1880) had started the service, between Glasgow and Paisley, in April 1834. The distance was covered in 34 minutes, at speeds of up to 27 kilometres an hour. The stagecoaches carried 26 passengers, but were very popular and were often overcrowded. Based on eyewitness accounts, this artwork was later published in Histoire de la Locomotion Terrestre (Paris, 1936).세계 최초의 자동차 사망 사고. 1834년 7월 29일 스코틀랜드 페이즐리에서 발생한 증기 자동차 폭발사고를 묘사한 19세기 작품. 바퀴 중 하나가 무너져 보일러가 파열되어 5명이 사망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자동차 사망 사고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사고 이후, 증기 자동차의 운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기술자 존 스콧 러셀 (1808년-1880년)은 1834년 4월 글래스고-페이즐리 간 노선의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거리는 시속 27킬로미터로 34분 만에 주행했습니다. 그 증기 자동차는 승객 26명을 태웠으며, 매우 인기가 있었고 종종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 작품은 나중에 1936년 파리의 Histoire de la Locomotion Terrestre에 실렸습니다.
세계 최초의 증기자동차 사망 사고는 스코틀랜드 페이즐리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이다.
- 19세기 말 미국의 제한속도 규정은 영국보다 심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이 1896년에 문제의 1865년 법령을 해제했을 때 개정한 제한속도가 23km/h였다. # 미국의 법령 제한을 영국보다 더하다고 설명할 근거가 없다.
- 영국 외 국가에서는 악법 없이 발전했다?
독일의 칼 벤츠도 마찬가지로 내연기관 자동차를 상용화하던 초기에는 경찰로부터 6km/h 속도 제한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내무장관에게 속도 제한없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도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요청한 끝에 내무장관이 그 대신으로 경찰에게 단속 중단 지시를 내려 규제를 철폐했다. 이 일화는 영국 외 국가에 적기조례 같은 속도규제가 없었다는 주장과 전술한 사람이 뛰는 수준의 속도로의 제한이 그렇게 과도하진 않다는 주장의 반례가 된다.
- 영국의 자동차 산업 멸망은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근본 원인이다?
1950년에 영국이 2등이었던 것은 맞으나 전 국토가 폐허가 되다 못해 영토까지 둘로 갈라진 독일은 종전 이후 11년 만인 1956년에 서독 단독으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을 제꼈다. #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설립 배경부터가 독일(서독), 프랑스, 일본 등에게 생산량을 추월당한 것이었다.
5. 여담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 빌헬름 2세도 자동차를 부정적으로 여겼지만 적기조례 같은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잠깐의 유행 정도로 취급해 곧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19세기 독일 제국은 증기 자동차의 후발주자였던 관계로 내연기관 자동차에 힘을 더 실어줬기 때문이다.다만 경찰이 자체적으로 자동차 속도를 6km/h로 제한한 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내무장관 지시로 폐지되었다.
[1] 12톤이라는 게 어이없어보이지만 증기자동차는 매우 무겁다.[2] 성인의 빠른걸음 속도와 비슷하다.[3] 성인 남성의 평균 걸음 속도보다 약간 느리다. 걷기 문서 참고.[4] 해당법안은 시행되지 않았는데, 초창기 전보의 경우 글자수로 요금을 매기는 비싼 요금으로 악명이 높아서 급할때나 쓰는 용도였기 때문. 그래서 전보는 최대한 내용을 줄여서 보냈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전보요금은 겨우 20글자를 보내는데 노동자 1주일치 수입었다고 하니... 이는 2차대전 시기에도 마찬가지여서 전보를 부칠 때에는 필수적인 단어들만 발송하였다.[5] 항속거리가 극도로 짧았다. 가솔린 자동차의 항속거리를 350km로 가정하면 증기자동차는 15~20km 정도로 연비가 개판이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최초의 시외버스로 운행했던 포드 모델 T의 항속거리가 360km 정도였다.[6] 현재 일반적인 자동차의 최고속도가 220km/h 정도임을 감안하면, 16km/h도 오늘날로 치면 스포츠카 수준이다. 스포츠카의 속력을 300km/h으로 본다면, 아우토반같이 속도 무제한인 도로를 제외한다면 제한속도가 140km/h을 넘는 도로는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다.[7] 타이어 업체 미쉐린이 설립된 배경이다.[8] 장거리에서 증기자동차가 힘을 못쓴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구조상 탄수차를 다는 순간 트레일러가 되기 때문에 여객수송에서는 역마차보다 효율이 확 떨어졌다. 그래서 증기차는 디젤동차와 유사하게 차 내에 증기엔진과 연료, 물탱크를 모두 집어넣다보니 항속거리가 매우 짧았다. 당시 증기차의 항속거리는 10~20km 사이였는데, 이정도면 서울시청 기준으로 서울시 경계도 벗어나기 힘든 거리다.[9] 개인의 취미 수준의 수입은 일본에 1~2대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10]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무거운 트럭일수록 유료도로의 통행료가 비싸다. 트럭이 산업에 기여를 많이 하지만 도로 통행료는 칼같이 비싸게 받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도 화물차한테는 통행료를 많이 받는 도로가 많고, 아우토반도 12톤이 넘어가는 트럭은 1년치 통행료를 한꺼번에 징수한다.[11] 당연히 훨씬 무거운 증기자동차가 마차보단 바퀴가 넓고 브레이크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마차처럼 만들었다간 차 자체가 제대로 달리지도 못한다. 이것도 일부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원가절감 한다고 바퀴를 일반 마차처럼 만들고 약간의 보강만 했다.[12]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위인전에서 자주 나오는 에피소드인 헨리 포드와 토머스 에디슨의 자동차 이야기.[13] 참고로 증기 자동차는 당시 기준에서 대량생산에서 경쟁자대비 패널티를 먹을수 밖에 없었다. 전기차, 휘발유차, 증기차 중에서 엔진이 제일 무거운게 증기차였기 때문.[14] 당시 세계 1위는 미국으로 영국의 10배가 넘는 약 800만대.[15] 대형 증기자동차는 특성상 증기 기관차처럼 화부가 따로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16] 자희태후의 66번째 생일 선물로 제공됨.[17]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 선물로 제공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