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3:49:52

박정희 정부/평가/논란이 있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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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835b38><colbgcolor=#f5f5f5,#2d2f34> 구성 인사(3공) · 인사(4공) · 통일주체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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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정치 · 사회·문화 · 안보·국방 · 외교 · 경제) · 논란이 있는 평가
타임라인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16 군사정변 · 국가재건최고회의 설립 · 혁명재판 · 전국 18개 학군단 창설 · 수도방위사령부 창설 · 농어촌고리채법 · 은행국유화(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 · 경제기획원 설립 · 중앙정보부 창설 · 한국전력주식회사 창설 · 농업협동조합 창설 ·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 연호에 관한 법률 개정
1962년 서력기원 사용 · 문화재보호법 제정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주민등록법 제정 · 화폐개혁 · 4대 의혹 사건 · 마포아파트 준공 · 김종필-오히라 메모 · 대한항공공사 설립 · 5차 개헌 공포 · 제1차 국민투표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 민주공화당 창당 · 3.16 성명 · 감사원 개원 · 의정부역-능곡역 구간 교외선 개통 · 서울 대확장 · 부산 직할시 승격 · 박정희 의장 예편 후 민주공화당 입당 · 삼양라면 출시 · 서울가정법원 개원 · 제5대 대통령 선거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구로공단 조성 · 황태성 사건 · 의료보험법 제정
대한민국 제3공화국
1963년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 파독 근로자 파견
1964년 미터법 실시 · 삼분폭리사건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계획안 발표 · 울산정유공장 준공 ·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 6.3 항쟁 · 베트남 전쟁 파병안 통과 ·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 무즙 파동 · 서독 공식 방문 · 국가기술자격 시행
1965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 독도 밀약 · 수출제일주의 표방 · 제2한강교 준공 · 춘천댐 준공 · 광복회 발족 · F-5 20대 도입 · 원충연 반혁명 사건 · 한일기본조약 조인 · 전매청 신탄진공장 준공 · 야당 불참 속 한일협정 비준 및 베트남 전쟁 파병 동의안 가결 · 베트남 전쟁 1개 전투사단 파병 · 이승만 대통령 서거 · 한국해외개발공사 발족 · 농어촌 전화 사업 추진
1966년 KIST 설립 · 국세청 발족 · 장면 별세 · 태릉선수촌 설립 · 한미행정협정 조인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 국회 오물 투척 사건 · 사카린 밀수 사건
1967년 산림청 개청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 한국외환은행 발족 · 대도시 그린벨트 설정 · 짜빈동 전투 · GATT 가입 · 과학기술처 신설 · 제6대 대통령 선거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동백림 사건 · 한국수자원개발공사 설립 ·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 정부종합청사 착공
1968년 1.21 사태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684부대 창설 ·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설립 · 향토예비군 창설 · 주민등록법 개정 · 통일혁명당 사건 · 만화 검열제 · 육군3사관학교 창설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 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 국민교육헌장 발표 ·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오산 구간 개통 · 경인고속도로 개통
1969년 교련 과목 개설 · 한국도로공사 발족 · 가정의례준칙 · 서울 중학교 무시험 제도 · 금화시민아파트 준공 · 경부고속도로 오산-천안-대전 구간 개통 · 호남정유 여수공장 준공 ·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 MBC 개국 · 3선 개헌 · 제2차 국민투표 · 제3한강교 개통 · 울산고속도로 개통 ·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 개통
1970년 정인숙 살해사건 ·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포항종합제철소 착공 · 새마을운동 제창 · 우편번호제 도입 · 경부고속도로 대전-대구 구간 개통 (완공) · 호남고속도로 대전-전주 구간 개통 · 백원 주화 발행 ·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 병무청 설립 · 모산 수학여행 참사 · 전태일 분신 사건 · 번개사업 · 남영호 침몰사고 · 4대강유역 종합개발 계획 확정 · 정부종합청사 개청
1971년 전국 중입시험 폐지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 · KAIS 설립 · 주한미군 7사단 철수 · 제7대 대통령 선거 · 진산 파동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 광주대단지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 종료 · 실미도 사건 · 국토종합계획 발표 · 통일로 개통 · 영동고속도로 신갈-새말 구간 개통 · 대연각호텔 화재
1972년 정병섭군 자살사건 ·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 · 7.4 남북 공동 성명 · 통일미 개발 · 8.3 사채 동결 조치 ·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 · 10월 유신 ·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 · 제3차 국민투표 · 통일주체국민회의 발족 · 제7차 개헌 ·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대한민국 제4공화국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추진 · 남서울아파트 분양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 승압사업 개시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KBS 설립 · 베트남 전쟁 종전 · 유신정우회 창립 · 윤필용 사건 ·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 서울어린이대공원 개장 · 1973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 화전민정리 5개년 계획 수립 · 포항종합제철소 준공 · 대덕연구단지 착공 · 불국사 복원공사 준공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 김대중 납치 사건 · 소양강댐 준공 · 제1차 오일쇼크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태백선 고한-황지 구간 개통(완공) · 호남고속도로 전주-순천 구간, 담양지선 개통(완공) · 남해고속도로 개통 · 친아랍 성명 4개 조항 발표
1974년 율곡사업 추진 · 긴급조치 1·2호 선포 · 긴급조치 3호 · 현대울산조선소 제1호선 진수 · YTL30호 침몰 사건 · 서울/부산 고등학교 평준화 첫 실시 ·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 · 민청학련 사건 · 긴급조치 4호 선포 · 팔당댐 준공 · 속초해전 ·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 새마을호 운행 시작 · 긴급조치 1·4호 해제 · 대왕코너 화재사고 · 주안국가산업단지 준공 ·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1975년 제4차 국민투표 ·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 · 핵확산금지조약 비준 · 민방위 결성 · 긴급조치 7호 선포 ·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사형 집행 · 김상진 할복 사건 · 종합무역상사 제도 실시 ·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 영동고속도로 새말-강릉 구간 개통(완공) · 동해고속도로 개통 · 여천석유화학단지 기공 ·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개장 · 1975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1976년 포항 석유 발견 사건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 한독맥주 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 잠수교 개통 · 국산자동차 현대 포니 첫 수출 · 코리아게이트 · 안동댐 준공 · 함평 고구마 사건 · 직업훈련기본법 제정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백지계획 발표 · 박흥숙 살인사건 · 월성 원자력 발전소 기공 ·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 · 의료보험 시행 · 부가가치세 시행 · 남해화학 여수공장 완공 ·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 구마고속도로 개통 · 이리역 폭발사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발족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 제9대 대통령 선거 · 8.8 조치 시행 · 백곰 미사일 발사 성공 · 자연보호헌장 선포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9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착공 · 정부 제2청사 착공 · 보문관광단지 개장 · 고리 원자력 발전소 3.4호기 착공 · 2차 오일 쇼크 · YH 사건 · 성수대교 개통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형욱 실종 사건 · 부마항쟁 · 삽교천방조제 준공 · 10.26 사태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서울의 봄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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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란이 있는 평가
1.1. 정치에 대한 평가
1.1.1. 통치 능력1.1.2. 보수우익 정치세력의 아성1.1.3. 정치적 후계자들의 공과
1.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1.2.1. 산아제한 정책1.2.2. 한글전용 정책1.2.3. 군가산점 제도1.2.4. 주민등록증 실시
1.3.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1.3.1. 반공 기조 유지1.3.2. 핵무장 추진
1.4. 외교에 대한 평가
1.4.1. 한일 어업문제1.4.2. 간도 프로젝트 주도
1.5. 경제에 대한 평가
1.5.1. 우방국의 막대한 원조1.5.2. 일본의 지원1.5.3. 기타 지원1.5.4. 8.3 사채 동결 조치
2. 개인적 논란
2.1. 친일 행적
2.1.1. 사실인 내용2.1.2. 논란이 있는 내용
2.1.2.1. 일본 식민지교육 찬양?2.1.2.2. 일본군복 코스프레?
2.1.3. 사실이 아닌 내용
2.2. 민주화 시위 발포 암시 발언?2.3. 탈일 행적
2.3.1. 셀프 훈장2.3.2. 기회주의자적 이중잣대 면모
2.3.2.1. 남조선로동당 활동 경력2.3.2.2. 친일 논란
2.4. 엽색 행각
3. 그 외 논란
3.1.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

1. 논란이 있는 평가

이 문서에서 사용된 '논란이 있다'라는 의미는 박정희 정부의 특정 정책/통치행위가 부정적이라거나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 문서에서는 인터넷에서 파생된 의미의 논란이 아니라 해당 어휘의 본래뜻인 '다른 주장이 존재함'을 따른다. 예를 들어, 어떠한 정책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을 때, 혹은 해당 정책의 집행 맥락이나 미래시점에서 되돌아보았을 때 문제점이 지적되었을 때 '논란이 있는 평가'로 기술한다.

1.1. 정치에 대한 평가

1.1.1. 통치 능력

통치 능력에 대해서는 "독재자이다", "경제 부흥을 이뤄낸 훌륭한 통치자다",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다"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중화학공업화에 매달리기 직전이었던 처음 10년 동안은 국가 경영을 잘 했다 하는 사람들도 있고, 유신 선포 이후로는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때문에 박정희가 자신이 통치하는 기간을 12~13년 정도로 정해 놓고, 그 이후로는 완전히 국가 통치에서 물러나서 일반인으로 돌아가서 살았다면 부일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국가 경영 및 인품에 대해서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거나, 사회 원로 대접을 받으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때문에 죽을 때까지 박정희와 전두환을 매우 싫어했다.

1.1.2. 보수우익 정치세력의 아성


박정희의 정치적 공과 중에서 현재까지 가장 강력한 영향력으로 남아 있는 요소는 그의 직접적 정치적 업적보다는 박정희가 뿌린 경제제일 우익보수 이념과 이를 기반으로 세운 민주공화당 등의 보수우익 정치세력이다. 박정희는 장장 18년에 이르는 집권 기간에 '민족중흥'이나 '잘 살아보세'란 강력한 구호로 대표되는 경제제일주의와 친재벌, 국가주의 성향, 반공주의 성향, 권위주의 성향 등 오늘날 한국보수의 정치적 특성을 대부분 확립하였다.

반면 민주주의·정의·평등·인권 등을 경시, 배금주의, 개인 숭배 성향[1][2] 등 한국 보수의 부정적 특성도 이때 확립되었다. 박정희 사후에 더해진 건 뉴라이트, 그리고 전광훈기독교 우파를 위시한 개신교의 보수화[3] 정도뿐이다.

이런 보수이념과 박정희가 세운 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보수세력이 결집했으며 그 이후에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정당 계보에서 이념과 세력이 이어지며 한국 보수우익 세력의 이념적 정치적 구심점이자 집결지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 한국 보수우익 세력를 세운 중흥조다. 그러므로 박정희에 대한 찬반입장이 바로 한국의 보수우익과 진보좌익 스펙트럼 판별의 기준이 되고 있고, 보수 정치인은 박정희의 묘에 대한 참배 등의 행보로 보수층에 어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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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박정희의 출생지인 TK 지방은 보수우익 세력의 본거지가 되고 있다. 특히 이 지방의 노인들에게는 박정희반신반인에 가까울 정도로 숭배를 받고 있어서 대구와 경북 지방은 대대로 보수우익 정치 세력의 강력한 아성과 지지세력의 근거지가 되고 있고 현재도 많은 보수우익 정치인을 배출하고 있다. 한때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렸고 진보-좌파의 상징적인 지역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인 2.28 학생운동이 시작된 대구가 보수의 심장으로 굳어진 계기는 바로 인혁당 사건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2016년 일어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TK 지방도 과거에 비해서 박정희에 대한 우호도가 꽤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2020년대부터 보수정당 지지세가 회복되었다.

동일하게 보수 성향이 비교적 강한 PK 지방의 경우에도 고령 인구를 중심으로 박정희에 대한 지지세가 강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고령인구가 많은 서구 같은 지역은 관공서나 길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새마을기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4] 다만 PK 지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마항쟁 등에서 볼 수 있듯 진보 성향이 강했고,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여파로, 그리고 김영삼, 노무현, 문재인 등 여러 PK 출신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이 탄생한 것으로 보면 그 세력이나 정도는 TK보다는 덜하며, 2010년대 중반 들어 더불어민주당이 이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고, 2018년 지방선거 결과는 아예 민주당이 이 지역에서 압승을 했으므로 박정희에 대한 긍정평가와 그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가는 중이다. 물론 최근에 들어 더불어민주당 지지세가 다시 급락하고 있기는 하다.문재인 정부의 기록적인 집값상승[5], 조국 사태 등으로 인하여 20대 지지율은 전연령층에서 가장 낮은 23%를 기록하며 폭락하면서 21대 총선부터 민주당 지지세가 꺾이고 오거돈 성추행 사건으로 부산시장 자리를 잃으면서 다시 보수화됐다.

다만 박정희 시절 납치를 당하는 등 죽을 위기를 겪었던 김대중15대 대선에서 김종필과 연합을 하고 민정당계 인사들을 영입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대통령 당선이 됐고 퇴임 후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찾아오면서 사과하자 환영하는 등 박정희를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호남이 철저한 反보수정당 성향이 된 건 박정희가 아니라 전두환신군부가 저지른 5.18 민주화운동 학살 때문이고 박정희는 호남에서도 반감이 덜한 편이기 때문에[6], 호남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계 정당에서도 박정희는 대경권에서 유세를 할 때 군사 정변이나 독재 체제 구축 등의 확실한 부정적 요소를 제외하면 적어도 경제발전 측면에서는 립서비스 정도로나마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1.1.3. 정치적 후계자들의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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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자신의 공과와는 별개로 장녀인 박근혜가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이에 대한 공과가 있다. 박근혜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 지도자로서의 능력이나 업적보다는 박정희의 장녀라는 큰 후광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므로 박근혜의 공과는 곧 박정희의 공과가 된다. 특히 박근혜는 노년층의 박정희 향수에 기대어 소속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승승장구했으며,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민을 유발해 선거에서 큰 성과를 올려서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제18대 대통령이 된 것도 부모인 박정희육영수가 정적에 의해 살해당한 불행한 가족사에 대한 노년층의 연민과 박정희 향수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사실상 정치적인 세습이다. 추가적인 내용은 여기, 그리고 나팔새 참고.

무엇보다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박근혜를 박정희의 재림으로 보고 지지한 일종의 적하 신앙이므로 박정희를 지지하는 노년층에게는 박정희가 박근혜를 후계자로 내려준 셈이고 박정희 시대 이후 민주공화국 시절에 출생한 청년층에게는 박정희 시절의 기억은 없지만 죽고나서도 두고두고 대한민국에 해를 끼친 재앙의 씨앗과 우환거리를 남긴 셈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업적과 과오는 이런 결정적인 유산을 물려준 박정희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박근혜의 최대실정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역시 박정희의 집권 시기에도 최태민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정치적 문제가 되었는데, 박정희는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여 나중에 파국의 씨앗을 뿌렸다. 즉 현 세대에게 있어서 박정희의 최대 실정은 경험하지 않은 독재가 아니라 바로 박근혜라는 국가적 재앙거리를 낳은 것이다.

부친의 후광을 물려받아 대통령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벌어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역대 대통령 임기 중 최악의 지지율을 갱신[7]하며 무능을 뛰어 넘은 꼭두각시 대통령이 됨에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 역시 영향을 받아 떨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박정희의 기념사업[8]을 추진하는 것이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다. TK쪽 시민들 사이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 이제 끝났다. 더 이상은 무덤속에서 기어 나오지 마라'와 같은 평가도 나오고 있는 중이다. 특히 제7회 지방선거에서는 박정희의 고향인 구미시에서 3선을 한 남유진 전 구미시장이 박정희 기념사업에 돈을 너무 많이 쓰면서 구미 시의 재정을 악화시켰기에 구미 시민들의 반감을 크게 샀으며 그중에서 젊은 세대의 반감이 심해져 구미시장과 시 의회를 민주당이 장악하는 역풍을 불렀다.

북한에서도 김정일,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할 수 있는 배경에는 현 북한의 노년층에게 김일성에 대한 향수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살아있던 1960년대 후반[9]까지는 북한은 한국보다 공업 수준이나 생활 수준, GDP도 높았을 정도로[10] 경제적으로 무난한 국가였고, 이 시기를 경험한 북한 노년층의 김일성에 대한 존경이나 숭배는 (개인숭배인권 탄압을 감안하지 않아도) 남한의 노년층의 박정희에 대한 숭배와 맞먹는다.[11] 그래서 김정일·김정은의 독재 권력도 상당부분 김일성의 권위와 정치적 유산에 의지해 집권했으므로 이들의 공과는 바로 김일성의 공과와도 연결된다.

11/12대 대통령인 전두환도 박정희가 키운 육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통해 군을 장악하였고 박정희 사후 혼란을 틈타서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하였고 박정희가 남긴 유신체제헌법 하에서 소위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박정희가 만든 군부독재의 장치를 이용해 군부독재를 계속했으므로 사실상 박정희 독재의 연장선상에서 박정희 독재 시즌 2에 불과하다.

그리고 제17대 대통령 이명박도 민주화보다는 경제개발에 치중한 박정희 시대의 경제건설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박정희의 이미지와 겹치는 점으로 인하여 박근혜를 내부 경선에서 물리치고 올라온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지지자들의 지지마저 어느 정도 얻어내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근혜만큼 직접적이고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12]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에는 박정희에게도 나름 기여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박근혜나 이명박 외에도 많은 보수우익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계승하는 것을 내세워 박정희 지지자들의 지지로 보수정치인으로 입신한 경우가 많으므로 이들의 공과도 상당부분 박정희의 공과로 돌릴 수 있다. 사실상 박정희 지지자와 한국 보수우익 지지자는 거의 겹치는 집단이라 이런 현상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기존 지지층들이 다른 정당 지지로 돌아서거나 부동층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폭락한 상태에서도 박정희 육영수에서 이어져 내려온 박근혜 지지층만으로 (1위인 더불어민주당과 차이가 매우 크긴 하지만) 지지율 2-3위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외연확장을 포기한 채로 이 지지층을 안고 가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박근혜를 강제출당시킨 후에도 박정희 향수를 자극해서 TK의 표심을 얻으려고 한다.#

이에 왕조국가의 후계자들의 공과가 개국조의 책임이냐는 반론이 있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왕조국가가 아닌데도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되었거나 소위 박정희 신화나 박정희의 독재 기조를 이용해 정권을 잡은 경우에는 그 공과에 있어 박정희의 역할을 부정하기 어렵다.

1.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1.2.1. 산아제한 정책

이승만 정부와 장면 내각은 지도자가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 포함)를 믿고 있어 가족계획을 주장해 산아제한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산아제한 정책을 폈다. 1961년부터 박정희 정권은 피임약과 피임도구의 수입을 금지했던 법을 폐지했고, 보건사회부 관할 하에 가족계획사업을 추진했으며, 민간단체인 대한가족계획협회 또한 보건사회부 관리 하에 두면서 산아제한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이 시기 정부 관리들의 피임 강요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이 정책에 대해서는 '박정희 때까지는 문제가 없고 잘했는데, 전두환 정부 때부터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과 '산아제한을 안했으면 내수가 더욱 성장했을 것'이란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사실 전두환 정부는 '둘도 많다.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한술 더 떴다. 뭐 물론, 우리나라는 수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내수의 영향을 덜 받는다지만, '산아제한정책이 유지되면서 내수가 축소'된 것과 '당시에는 아기가 너무 많아서[13] 사회적으로 문제'였던것 모두 사실이다.

전두환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보다는 비판이 훨씬 덜한데 박정희 정부 때까지는 출산율이 이전보다 낮아졌다고는 해도 2명대 후반 정도로[14] 대체출산율(2.1명)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전두환 정부의 경우 출산율이 대체출산율보다 낮아졌는데도[15] 산아제한정책을 계속했다.

1.2.2. 한글전용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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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국한문이 혼용되며 중장년층만해도 글을 읽을줄 아는 사람이라면 한문 독해가 가능한 세대였으나, 박정희 정부는 한글전용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고, 1968년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며 모든 공문서와 행정업무에 있어 1969년까지 한자 병용을 금지시키며 오로지 한글로만 전용하게 하였다.

이후 각급 교과서, 정부 간행물 및 일반 정기 간행물도 1973년까지 한글로만 전용하도록 하며, 이후 1970년에는 한발 다 나가 한자 폐지 선언을 발표하여,[16]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안 모든 교육 과정에 있어 필수적으로 여겨졌던 한자 교육을 모두 전면 폐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언론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상당하여, 72년부터 국민학교에 한해서만 다시 부활하였으나,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70~72년 사이 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은 자기 이름도 한자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당시 학생이라면 필수적인 사항이였던 한문 독해력이 추가적인 교양으로서 떨어진 시기가 이후부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박정희 정부의 한글전용 정책은 문맹률 감소와 민족적, 자주적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며, 향후 전산화되는데 한문보다 훨씬 수월하게되어 향후 대한민국이 IT강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게하는 큰 발판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일부 논란도 있다. 그 이유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한자 상식으로 인한 어휘력의 저하가 있다. 시대상 일본, 중국과는 아직 여러 방면에서 교류가 미미하였고 미국과의 떼어놓을수 없는 관계로 인해 영어가 제일이었던 60, 70년대와 달리,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나라들과 교류가 현저히 증가한 현재 시점에서, 박정희 정권이 어느정도 국한문 혼용체를 유지하며 한문 독해 능력을 유지시켰더라면, 한자권 외국에서의 활동이 더 수월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목소리도 나오는 상황이다.

1.2.3. 군가산점 제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를 위시로 한 국가재건최고회의 군부는 이승만 정부와 장면 내각 시절 동안 사실상 방치 상태에 있었던 건국초기 유공자 및 6.25 전사상 군경에 대한 보훈 및 보상 대책에 대해 1961년 7월 5일 『군사원호청설치법』을 제정하고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던 원호업무를 총괄하는 ‘군사원호청’을 동년 8월에 설치하였다. 적극적으로 보훈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는 당시 많은 호응과 지지를 얻었고 동시에 군복무자에 대한 여라가지 보상혜택도 도입된다.

하지만 당시는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많은 수의 군인이 필요했기에 이전보다 더욱 더 강압적으로 되어가는 징병제를 통해 인력 수요를 해결하고 있었고, 복무 여건도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으며 군부는 군복무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역병 월급을 인상한다던가, 군 제대자에게 감세, 복지등 금전적 혜택을 제공하는 보상 방안은 당시 국가 예산상 불가능한 것이였다.

따라서 당시 박정희 군부는 1961년 국가원호대상임용법#을 제정해 군복무자의 학업단절 공백을 메워주는 보상 차원에서 공무원과 공기업의 관련 취업에 대해 여러 특혜를 주게 되는데, 공무원이나 국고 반이상이 국영 소유이 기업체는 기타유급자가 발생해 추가 채용이 필요하면 우선적으로 상이군인과 군복무자가 임용되도록 법령으로 정했으며, 군에서 동일한 업무계통에 복무한 자의 군경력은 인정하도록 했고 마지막으로 공무원과 공기업 시험에 대해 군복무자는 5%의 상이군인과 그 유족에 관해서는 10% 가산점 점수를 주는 군가산점 제도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은 1969년 군사원호대상자고용법의 개정#으로 더욱 더 확대되어 공무원과 공기업에 한정되었던 군가산점을 1일 16인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민간 기업체 또는 단체도 적용되게하며, 3퍼센트 내지 8퍼센트의 범위안에서 군복무자와 상이군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하는 일종의 할당제도 도입했다.

이러한 박정희 정부의 군사원호대상자고용법에 의한 취업 관련 군복무 보상 특혜는 1984년, 군사원호보상법·국가유공자등특별원호법등 7개 법률을 흡수·통합한 국가유공자법으로 이후 40여년 동안 이어져왔지만, 1999년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성계의 주도로 불공정 문제와 반발이 심화되면서 2001년 헌재의 위헌 판결로 완벽히 폐지되었다.

현재 군가산점이 폐지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관련한 군복무 보상에 대한 논쟁은 아직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으며, 이러한 취업의 혜택 관련한 군복무 보상은 위헌 소지를 받은 만큼 현실적인 보상체계가 아닌 군사정권의 구시대적 정치 산물의 잔재이자 불공정의 요소였다며 부정적인 평가도 있는 반면, 시대적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여성들은 군복무자들의 군복무 이행기간 동안 충분히 공부를 더 할수 있고, 점수 1~2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당연히 군필자들이 불리하니 가산점 제도는 불공정이 아니며, 이러한 논지로 2001년 헌재의 위헌 판정을 받기는 했지만 박정희 정부의 군복무 보상 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도 상당하다.

1.2.4. 주민등록증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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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1.3.1. 반공 기조 유지

장면 내각이 국시로 삼았던 반공을 유지하였다. 청와대에 특수부대를 파견해 대통령 암살TKD을 꾀한 1.21 사태, 국경 지대에서 인민군이 미군을 살해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정전 협정을 위반하는 북한의 적극적인 무력 도발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북한의 사상적인 위협 선전이 공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응하여 적극적인 반공주의를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공산당 1당독재를 기반으로 태어난 북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행했고 6.25 전쟁으로 나라 근간을 뒤집어 놓았으며 그 이후로도 간첩, 테러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여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적이었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 따라 북한을 배격하는 것은 필연적 행위이다.

다만, 제1공화국 때부터 대한민국은 반공주의를 채택했으며 제2공화국 시절에도 보수야당으로 분류되는 민주당[17]이 집권했기 때문에 평화통일 논의는 있었더라도 2대 악법이 등장하는 등 반공기조는 여전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 반공주의가 이승만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야당과 학생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 세력의 탄압과 공포 정치 조성, 정권유지용 수단으로 악용됐다는 부정적 측면이 더 컸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에 크게 비난받았다. 박정희의 과거 남조선로동당 재직 전력과 7.4 남북 공동 성명 합의도 비판이 따르는데, 일관되지 못한 박정희의 행동은 결국 반공은 핑계였을 뿐 특별한 신념이 있어 시행했다고 보긴 어려워서다. 비단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독재와 반대되는 모든 사상을 탄압했기 때문에 권력유지를 위한 명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8]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있었던 독재와 민주인사, 인권, 언론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은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이며 실제로도 저질렀기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 또한 박정희는 공산당 1당독재를 비판하면서 정작 스스로 민주주의 제도를 파괴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은 모순이 아닌지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평가도 같이 나락으로 떨어져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나 공부도 모조리 금기시되었으며, 국민들에게 종북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일시하게 되는 편견을 심어주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인데, 공산주의로 왜곡하여 선전했기 때문이다.[19]

1.3.2. 핵무장 추진

1969년 7월 닉슨 대통령이 닉슨 독트린이 발표하며 당시 미국 아시아권 개입을 최소하는 정책의 기조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1970년 3월, 주한미군 2만명을 이듬해까지 철수하고 75년에 완전 철수하겠다는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20] 중국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과의 군사력 격차에 따른 안보 위협을 막고, 대비책으로서 자주국방과 자주방위산업 육성에 열을 올렸고, 번개사업 등을 통해 70년대 동안 보병용 소화기 등의 기본병기와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국산화하는 개가를 올렸고, 이는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나, 이와 동시에 자체 핵무장을 추진하였다.

이는 1960년대 양호했던 한미관계가 70년대 동안 급속도로 얼어붙게되는 큰 요인이 되었다. 결국 지속되는 압박에 미국이 1976년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남한과의 모든 관계를 중단할 것이라고 강력히 압박했고, 표면상 박정희 정부는 이에 승복하여 개발을 중지하였지만, 여전히 핵개발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피살되기 전까지 공공연하게 지속되어왔다.[* 이후에도 핵무장 계획은 지속되었고, 당시 오원철 제2경제수석의 진술에 따르면 프랑스와의 계약 파기와 관련없이 재처리기술도 확보되어있는 상황이었으며, 핵심 기자재들을 밀반입하는데에 성공했다고 한다.[.#.] 1978년에는 CIA가 청와대를 도청한것이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여 한미관계는 더욱 최악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이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군부 쿠데타와 체육관 선거, 인권탄압으로인한 약한 정통성을 보장받기 위해 미국에 대해 저자세로 나가면서 박정희 정권 동안 추진되었던 핵무장 계획과 지대지 미사일 개발 사업을 포기하며 백지화되었고, 비로소 한미관계는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리갈수 있게 되었다.

이후 부분적으로 공개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추정해 볼 때 당시 대한민국의 핵개발이 성공에 근접한 수준까지 도달하였음은 사실이다. 자주적 국방 의식 의거하여 아직 국제사회의 제재가 약하던 시기에 독자 핵무장을 시도했던 것은 결론적으로는 핵 무장을 교섭 카드로 주한미군 철수를 지연시키면서도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따른 각종 지원을 받아내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었던 미국과의 여러 충돌에 따른 관계 악화와 만약 박정희가 1980년대 계속 생존해서 핵무장을 고집하였다면 이에 대해 아예 수교 단절까지 고려하였던 미국의 강한 제재와 압박과 거기에 부마항쟁의 진압과정에서 김재규의 진술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가정한다면, 인권 외교를 내세우던 당시 미국의 카터 정부와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 결국 극단적으로는 지금의 북한처럼 됐을지도 모른다며 박하게 평가하기도 한다.[21]

실제로 이 과정에서 학무기 탑재를 위한 미사일 거리 확장을 위해 1979년에도 미국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도용하기 위해 미국 기업의 아틀라스 ICBM 설계도와 설명서 등을 밀수입 했던 것이 미 의회를 통해 알려지면서, 이는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작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2021년 문재인 정부 들어 폐지될때까지 40여년이 넘도록 대한민국의 항공우주산업과 지대지 미사일 개발 산업에 대해 큰 족쇄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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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외교에 대한 평가

1.4.1. 한일 어업문제

1952년 1월 18일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통해, 우리의 독도와 일본의 오키도 사이에 '한일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 바란다'는 의미로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긋고, 외국 어선이 침범하는 것을 금지했다. # 우월한 장비를 갖춘 일본 어선이 일방적으로 동해를 휩쓸고 다녔던 당시 어업 실태를 감안할 때, 평화선 선포는 한국 어민들의 생존권과 어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용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는 국제법상 문제가 많은 조치였고, 해안선으로부터 12해리까지가 영해인데 무려 20배가 넘는 해역이 대한민국의 영해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이었던 한일어업협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의 어업문제를 합의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기존의 평화선을 무시하고 한국 어민들만이 어로할 수 있는 전관수역을 12해리로 축소시켰다.
2.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여 한국 연해어장이 일본과 공동소유임을 밝혔다.
3. '기국주의' 실시에 합의하였다.[22] 기국주의란 일본 어부들이 협정 이외의 수역에서 불법 어로작업을 하면 일본 정부가 자국법에 의하여 자국법정에서 재판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발표되자 가장 격렬하게 항의했던 사람들이 어민들이었다. 어민들은 기존 평화선 포기가 한국 어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2

1.4.2. 간도 프로젝트 주도

간도 영유권 연구를 주도하였다.

기사1, 기사2

국회도서관에서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료를 1975년에 발간한 적이 있다. 주간경향에 의하면 국회의원장 정일권과 대통령 박정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1975년 정일권 국회의장이 쓴 머릿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타나 있다.

‘오두(吾頭)는 가단(可斷)이언정 국강(國疆)은 불가축(不可縮)’이란 불굴의 의지로 선인들이 지켜온 간도가 구한말에 이르러 우리의 국력 쇠퇴로 국권이 일제에 탈취된 상태에서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른바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일제의 대륙 진출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 안봉선 부설권의 흥정에 의하여 우리 강역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는 사실은 통탄치 않을 수 없다.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은 간도 연구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의 당면 과업은 분단된 통일이지만 차원을 달리할 때는 통일 이후의 민족 진로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통일이 성취되는 즉시 두만강북의 국경 문제는 중대한 외교 문제로 등장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다. 따라서 이 간도 문제에 관한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국가적인 중대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도오딧세이 국회 간도자료집 아쉬운 ‘미완성’
일제의 기밀문서 복사본이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음을 알게 된 강 박사는 미국 국회도서관의 협조를 얻으면 필름을 입수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 의장은 다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필요한 예산을 배정받고 발간 사업을 추진한다.……국회도서관에 입수된 마이크로 필름은 모두 51책 분량으로 상당한 양이었다. 할당된 예산으로는 전체를 책으로 엮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자료의 발췌작업이 시작됐다. 발췌작업은 당시 통일원 기획관리실장이자 간도연구가로 알려져 있던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이 맡았다. 노 전 총장은 3개월 남짓 자료를 선별했다. 공문과 각종 자료에 제목을 달고 연대별-종류별로 분류해서 국회도서관에 다시 이관했다. 이런 정황은 정 의장이 쓴 자료집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정 의장은 자료집 발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예산을 배정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김용태 국회운영위원장도 "정부의 예비비에서 예산이 할애됐다"고 적고 있다. 노 전 총장은 "박 대통령이나 정 의장 모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 누구보다 간도 문제에 관심이 컸을 것"이라며 "하지만 단순히 최고통치권자의 관심 때문에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국가가 예산을 지원하고 국회 산하기관인 국회도서관이 발간 주체였다는 것은 이 사업이 국책 사업으로 추진됐음을 말해준다'''.
간도를 되찾자,30년 전 국회서 간도문제 다뤘다

위처럼 이 사업은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이 사업은 박정희 정권 시절엔 탄탄했는데 10.26 사건 이후 위축됐다고 한다.
간도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의해서 우리 영토였는데 1909년 청-일 간도협약으로 빼앗긴 땅이기 때문에 간도협약은 무효이니 1712년 백두산정계비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영토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즉 을사조약이 무효이니 간도협약도 무효라는 것이다. ... 백산학회가 창립되던 19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아래 국회 차원의 간도자료집이 발간되고 정부와 기업의 후원으로 학회 운영이 탄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간도 프로젝트는 위축되고 열의가 식어갔으며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엔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아, 간도! 되찾아야 할 우리땅

1.5. 경제에 대한 평가

1.5.1. 우방국의 막대한 원조

당시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미국과 일본의 막대한 경제 원조였다. 아래에서 서술하지만, 박정희 정부의 경제 발전 상에는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에게 지급 받은 전쟁 보상금[23], 소련을 겨냥한 미국의 자금 원조와 경제 고문 파견이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개발도상국 특성상 높은 경제성장률을 자랑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승만 시절의 경제개발계획과 지주계층의 해체, 우방 원조 등의 유리한 조건이 작용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과 당시 비슷한 규모로 원조를 받은 국가는 일본의 경제원조를 받은 필리핀,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은 베트남과 비교 했을 때 한국만큼 발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 반대측의 의견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박정희를 평가하려면, 유리한 조건을 적절히 이용하여 중공업 시설 등 경제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덕분에 제5공화국 때부터 정부 차원의 정책으로 절대 빈곤율을 줄일 수 있었다고 보는 게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1.5.2. 일본의 지원

파일:external/www.jajusibo.com/2015062923446667.jpg
박정희(왼쪽)와 이케다 하야토(오른쪽)
박정희는 만주군 시절의 인맥을 활용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1961년 11월에 방일하여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 한일관계 정상화와 일본의 대한지원을 요청하였다. 미국 또한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원하고 있었으며, 1962년 11월 12일에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 간에 "일본이 한국에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 지불하는 동시에 정부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조건으로 제공하며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는 소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하여, 청구권 문제의 해결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김종필
1. 청구권은 3억 달러(무상 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2. 장기 저리 차관도 3억 달러로 한다.
3. 한국의 대일 무역 청산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라
1. 청구권은 3억 달러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2. 무역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한다.
3.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합의 사항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천5백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 차관).
1963년 7월 김용식 외무장관과 오히라 일본외상 간의 회담에서는 어업문제의 조속해결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1964년 봄 한일회담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만행으로 국내 여론은 한일회담을 극도로 부정적이었지만, 박정희는 한일회담을 강행하여 국교를 정상화했다.

일본은 대한지원의 요구조건으로 '과거사 청구권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내걸었고, 한국정부(박정희 정부)는 이것을 수락하였기에, 이후 벌어진 양국의 갈등에 빌미를 주었다. 이 협정으로 당시 일본 정부에게서 받은 보상금[24]이 투입되어 지어진 곳이 바로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이다. 2019년 JTBC 보도에 따르면 상당한 금액이 일본 전범기업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1.5.3. 기타 지원

국가적 차원이 아닌 외국 기업이 대한민국 정부를 지원한 경우도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세계 곳곳을 돌며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정착하기 위해서 정착지원금이 필요하다는 홍보를 하고 다녔는데 전세계를 상대로 일종의 크라우드 펀딩을 했다. 그러자 걸프 오일, 칼텍스 등 여러 회사가 이에 응해 대한민국 정부의 크라우드 펀딩에 후원금을 보냈다. #

이 과정에서 밥 도르시 당시 걸프 오일 사장은 "1969년 8월 21일, 피츠버그에서 전신환으로 20만 달러를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유니온 뱅크에서 '서정귀'라는 한국인의 명의로 된 계좌에 송금했다."고 밝혔다.

1.5.4. 8.3 사채 동결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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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적 논란

2.1. 친일 행적

2.1.1. 사실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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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rk_Chung-hee%2C_Manchu_Shinmun.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rk_Japan.jpg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박정희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 <국가와 정보>, 주한일본외교관 저서, 10.26 사건 보고를 받고 [25][26][27]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로 일본인 교장과 갈등을 빚었다. 이 사건은 박 대통령이 일본군 육군 장교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28][29] 당시 일제는 군국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장교만 되어도 지역 유지에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30]

박정희는 구미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서 일제 괴뢰국(만주국)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하였다. 당시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 하지만 나이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자 재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입대하고자 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에 박 대통령의 혈서와 편지 내용이 실려 있으며,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이 신문기사를 소장하고 있다.

이때 박정희와 같이 교사 생활을 한 유증선은 나중에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하였다. <박정희 평전 : 가난에서 권력까지>의 저자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이나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에 장교로 임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하였다.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일제 신경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주목받았다. 박정희의 제자 이순희의 증언[31]에 따르면, 재학 시절에 문경에 돌아와서 자신을 괴롭힌 지역 유지들을 협박하여 원한을 풀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군인이 없었으나, 간도와 용정의 광명중학교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나오는 등 이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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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병적기록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우등 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그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하고 1944년 300명의 동기생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수습 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에 주둔한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23일 정식 소위로 임관하면서 8.15 광복까지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10개월 동안 만주국 장교로 근무하였다. 만주국군에서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정변의 주축으로 활동한다.

1944년 중일전쟁의 전선은 황하 부근에서 화북에서 형성되어 있었는데 박정희가 소속된 제8단은 만주 열하성에 위치해 전선에서 먼 후방이었고 산발적인 팔로군 토벌이 임무였다. 그때 박정희는 단 본부(연대본부)의 을종부관(연대장을 보좌하는 갑종부관이 있고, 그 갑종부관이 또 부관으로 을종부관을 둠)으로서 팔로군 토벌에 나선적이 없었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제8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한 바도 있다. 그러나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소속 부대가 없어지자, 동료들과 함께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당시 광복군은 세 불리기에 혈안이 돼 있어 만주군 출신 한국인들을 대거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은 친일파 청산 작업이 한창이던 참여정부 시절에 박 전 대통령의 병적 기록을 공개하였는데, 조선일보는 박정희가 표면상으로는 독립국인 만주국에 소속돼 있으므로 조사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다카키 마사오'로 적혀 있으며, 박정희의 큰형인 박동희의 서명이 적혀 있어 일제가 군인과 군속 가족에게 나눠준 문서 양식에 박동희가 내용을 직접 적어 1945년 3월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것을 알 수 있다.

2004년 3월 22일 노무현 정부 시절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출범한 대통령 소속 기관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4년간 연구 끝에 친일반민족 진상규명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박정희는 이 명단에 없다.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254890|친일진상규명위 "박정희=친일파 입증 불가"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에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입증하는 만주신문의 사본을 공개하였으며 ##2, 몇 년 뒤에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여 친일인명사전에 기재하여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3

이에 성대경 위원장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반민규명위는 국회에서 만든 특별법에 의해 진행된다"며 "민간 연구소와는 달리 제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일본군 장교로 재직한 이후 친일 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성 혈서에 대해서도 그는 "<만주신문>을 통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한 보고서가 발간되기 직전 밝혀졌기 때문에 거론하기가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뒤 1961년 11월 12일 일본을 처음 방문한다. 아카사카의 한 요정에서 일본의 유력인사들과 술자리를 가진 박정희는 자신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만주군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밝혀 동석한 일본 정객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962년에는 자민당 부총재와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인물이자 대동아공영권 부활을 부르짖은 오노 반보쿠가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가졌는데, 도쿄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는 (피차에)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말해 김영삼김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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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 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귀하가 귀국의 어느 위정자보다도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특히 깊은 이해와 호의를 가지고 한일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양국의 견고한 유대를 주장하시며 그 실현에 많은 노력을 하시고 있는 한 분이라는 것을 금번 귀하가 파견하신 신영민씨를 통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동씨는 더욱 나와는 중학 동창 중에서도 친우의 한 사람인 관계로 해서 하등의 격의라든가 기탄을 개입시키지 않은 자유로운 논의를 수차 장시간에 걸쳐서 교환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군사혁명정부의 오늘까지의 시정성과와 향후의 방침과 전망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판단과 이해와 기대를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확신하오니 금후에도 동씨를 통하여 귀하와 귀하를 위요한 제현의 호의로운 협력을 기대하여 마지 않습니다.

더욱 장차 재개하려는 한일국교정상화교섭에 있어서의 귀하(기시 노부스케)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귀하에게는 신영민씨가 약 이순에 걸쳐서 듣고 본 우리 국가의 정치경제 군사 민정 등 제 실정을 자세히 보고 설명 할 것으로 알고 나는 여기서 귀하의 건강을 축복하며 각필합니다.

1961년 8월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거반(지난번) 귀국을 방문한 바 있는 박흥식씨 편으로 전해주신 귀하의 서한에 접하고 상금(이제까지) 회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차에 금번 다시 박흥식 씨가 귀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귀하에게 경의를 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일 간의 국교가 하루 속히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인의 변함없는 신념입니다. 이는 한일양국의 공동번영의 터를 마련할 것이며 현재의 국제사정하에서 극동의 안전과 평화에 기여하는 바 지대하리라고 믿습니다. 귀하께서도 항상 한일관계의 개선에 관심을 가지시어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시지 않는 데 대하여 본인은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며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위하여 배전의 협조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귀하의 가일층의 건승을 빕니다.

서기 1963년 8월 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이전 일본 총리였던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와도 친한 사이였다. 기시를 필두로 한 일본 전범세력은 박정희의 군사정변과 정권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박정희가 두 번째 유신 대통령에 오른 1978년 12월에도 유일하게 비공식 축하 사절로 외국에서 올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 심지어는 1965년 한일협정을 일본 정계 막후에서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A급 전범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노부스케와 친서까지 교환할 정도로 친했는데[32], 2013년 10월 이 사실이 드러나 커다란 논란이 됐지만,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부에서 적법하게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서훈을 취소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번에 KBS에서 방영하기로 한 <친일과 훈장> 내용에서 관련 부분이 삭제돼서 외압이 있지 않았냐는 의혹을 샀다.##2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인데, 그때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며 기술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재일교포 학자인 강상중 교수와 현무암 두 사람이 같이 저술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보면 된다.

여담이지만 만주군 장교 선배인 신현준의 회고에 의하면, 1946년 5월 10일 박정희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조선 사람은 풀어놓으면 모두가 지 잘났다는 것뿐이고, 지멋대로 아닙니까? 조센징과 명태는 두들겨패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왜놈들을 패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꼬라지를 보니 그런 비아냥을 들어도 싸다 싶습니다. 누군가 매를 들고 두들겨 주기 전에는 이런 무질서는 백년하청일 겁니다."[33] 일제의 식민사관 교육으로 인한 관점일 수도 있지만 고려해야 할 점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각종 이념으로 인해 많이 혼란스러운 상황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친일파는 아니다.[34] 다만 박정희를 을사오적이나 이광수, 윤치호 등의 악질 친일파와 동등하게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직접적으로 항일투사나 독립운동가와 그 일가를 핍박한 기록이나 증언은 없으며, 이는 같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인 신상묵과 대조적이다. 거기다 박정희는 셋쩨 형인 박상희 덕분에 개인적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해 정보망이 넓은 편이었다. 박상희신간회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친형의 동료를 밀고해 얼마든지 공훈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일제 패망 뒤 광복군 입대, 귀국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였던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로동당에 참여한 행적을 보면 박정희는 출세하려는 의도로 친일을 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박정희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 처단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 수준이었다. 한국 군부에는 백선엽과 같이 만주군 출신 인물이 많았던 데다가 알고 보면 식민지배국 군대 출신 군인들을 독립한 고국의 군대에 편입하는 일은 신흥독립국 대다수가 거쳤던 일이었기에[35]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36]

다만, 군사정변 이후에 박흥식[37] 등의 국내 친일파와 함께 일본의 전범들과 국교정상화를 논의하여 과거사 배상 문제를 묵인한 점을 들어 박정희를 악질 친일파로 보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박정희의 차녀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가 타결된 이후 더 커졌다. 두 합의 모두 격렬한 반대 여론을 일방적으로 묵살했다는 것도 반감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런 친일 행적이란 요소 때문에 비밀 독립군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광복군이 된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그것이 8.15 광복 이후라는 것이다. 해방 직후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은 '해방 조국의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기존의 3개 지대로 구성된 대한 광복군의 인원만으로는 부족해서 7개의 잠편지대를 확충하고, 이 잠편지대에 구 일본군 출신의 인재 또한 받아들이려 했다. 이 때 박정희가 광복군에 가담한 것이다.[38] 이 낭설이 처음 퍼지게 된 것은 1967년 박영만이란 사람이 대한광복군의 활동을 소재로 한 '광복군'이라는 소설을 쓰면서부터다. 박영만은 박정희 등 일부 군인들이 광복군과 접촉해서[39] 몰래 비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을 창작해 소설에 적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며 박정희 본인도 책을 읽은 뒤 사실이 아닌 내용을 왜 썼냐며 화를 내 결국 그 소설의 출판기념회는 열리지 못했다고 한다.

새누리당에서도 박정희가 비밀 독립군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박정희가 백강 조경한 선생을 도왔다는 주장인데, 물론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이자 독립운동 연구가인 심정섭씨는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며 박정희 본인은 친일파란 부끄러운 이력을 감추거나 조작하려 들지는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2.1.2. 논란이 있는 내용

2.1.2.1. 일본 식민지교육 찬양?
1970년 내한했을 때 동아일보에서 진행한 이시하라 신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시하라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例えば韓国の日本の統治の問題。あれは合法的にやって、しかも世界が是として、べつに外国から文句が出たものでもない。しかも韓国、朝鮮人が自分たちで選んだ道なんだ。

その判断を、ある意味で冷静に評価したのは韓国の大統領だった朴正煕さんだ。私も何度かお目にかかった。あるとき、向こうの閣僚とお酒を飲んでいて、みんな日本語がうまい連中で、日本への不満もあるからいろいろ言い出した。朴さんは雰囲気が険悪になりかけたころ「まあまあ」と座を制して、「しかしあのとき、われわれは自分たちで選択したんだ。日本が侵略したんじゃない。私たちの先祖が選択した。もし清国を選んでいたら、清はすぐ滅びて、もっと大きな混乱が朝鮮半島に起こったろう。もしロシアを選んでいたら、ロシアはそのあと倒れて半島全体が共産主義国家になっていた。そしたら北も南も完全に共産化された半島になっていた。日本を選んだということは、ベストとはいわないけど、仕方なしに選ばざるを得なかったならば、セコンド・ベストとして私は評価もしている」(拍手)。

いや、こんなところで拍手しなくていい。

朴さんが、「石原さん、大事なのは教育だ。このことに限ってみても、日本人は非常に冷静に、本国でやってるのと同じ教育をこの朝鮮でもやった。これは多とすべきだ。私がそのいい例ですよ」と言う。

「私は貧農の息子で、学校に行きたいなと思っても行けなかった。日本人がやってきて義務教育の制度を敷いて子供を学校に送らない親は処罰するといった。日本人にしかられるからというんで学校に行けた。その後、師範学校、軍官学校に進み、そこの日本人教官が、お前よくできるな。日本の市谷の士官学校に推薦するから行けといって入学。首席で卒業し、言葉も完璧で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が、生徒を代表して答辞を読んだ。私はこのことを非常に多とする。相対的に白人がやった植民地支配に比べて日本は教育ひとつとってみても、かなり公平な、水準の高い政策をやったと思う」

...예를 들면 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문제. 그것은 합법적이고 게다가 세계도 인정하고 외국이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국인, 북한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그 판단을 냉정하게 평가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나도 몇번인가 만나뵈었습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각료들과 술을 마셨는데 모두들 일본어를 잘했고 일본에 대해 여러 불만도 있어서 여러가지 말을 꺼냈습니다. 박 대통령은 분위기가 험악해질 즈음에 "자자..."라고 말하며 진정시키고 난 뒤 이리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우리 민족은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일본이 침략한 게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선택한 겁니다. 만약 청나라를 선택했다면 청은 바로 멸망해서 더 큰 혼란이 한반도에 일어났겠죠. 만약 러시아를 선택했다면 러시아는 바로 쓰러져 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됐다면 북도 남도 완전히 공산화가 되었겠지요. 일본을 선택한건 최고라고는 말 안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다면 두 번째로 최고라고 나는 평가합니다."

아니, 여기서 박수칠 게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이시하라 씨, 중요한 건 교육입니다. 여기에 한해서 일본인은 매우 냉정하고 우리나라가 행하고 있는 똑같은 교육을 조선에서도 행했습니다. 이건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내가 좋은 例(예)지'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이 행한 의무교육제도에 따라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처벌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인에게 혼난다고 하니까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사범학교, 군관학교에 갔고 그곳의 일본인 교관이 "넌 기특하구나"라고 말한뒤 일본 시부야 사관학교에 추천해준다고 해서 그곳으로 입학, 수석으로 졸업했고 말은 완벽하지 않았을지도 몰라도 학생을 대표해서 답사를 읽었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백인이 행한 식민지 지배에 비해 일본은 교육 하나에도 꽤나 공평하고 수준 높은 정책을 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이 인터뷰는 미심쩍은 점이 있는데 일제는 한국 강점기 동안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시부야 사관학교는 일본 본토에 있었단 점이다. 박정희 본인의 기억이 잘못됐거나 혹은 이시하라 신타로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 둘 중 하나이지만 아직까지도 진위여부는 불명.
2.1.2.2. 일본군복 코스프레?
해방되고 대통령 된 후에도 일본 군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했다는 말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이 1991년 12월 24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 집무실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을 말하는 것이다.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일본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을 타고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강창성의 이 같은 증언은 아직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박정희를 비판하는 데 이용되고 있지만, 반대로 이 주장에 대해 공적인 출처를 통한 반박 또한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블로그 등 일부에선 강창성이 박정희가 승마복을 입은 것을 일본군복을 입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라 주장한다. 당시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점퍼 스타일의 옷을 착용한 건 항공대의 파일럿들 뿐이고, 기병 제복에는 점퍼가 없으며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병과는 보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를 회상하는 코스프레를 즐겼다는 사람이 점퍼 입고 기병 장교 코스프레를 한다? 차라리 망토를 걸치고 칼을 차고 있더라고 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발언은 하나회 적발 사건 이후 군사정권과 정치적으로 등진 강창성이 비난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내뱉은 발언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승마복이라고 해서 승마 경기에서 입는 연미복 스타일만이 아니라 점퍼 스타일의 승마복도 있기는 있으며, 사실 "추억을 되살린다"는 목적에 맞추려면 일본군복이 아니라 만주군복을 입는 게 맞다.

하지만 강창성의 발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강청성은 박정희가 기병 코스프레를 했다고 하지 않았고 "일본군 장교로 말을 타던 추억을 떠올렸다"고 했다. 강창성은 박정희가 기병이란 얘기는 하지도 않았고, 일본군 장교로서 말을 탔다고 얘기하였다. 그런데도 위의 서술은 '박정희가 기병코스프레를 했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해석하여 당시 기병 복장을 운운하고 있다. 위의 서술처럼 '강창성은 박정희가 기병코스프레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기병복장은 이러이러했으니 강창성의 발언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게다가 청년기에 일제시대를 경험하고, 해방직후에 육사에서 군사관련지식을 습득한 강창성이 일본군복과 승마복을 헛갈렸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강창성은 분명히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음을 유념하자.

아무튼 논란이 되는 문제이니만큼 강창성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는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최대한 양측 주장을 절충해서 해석해 보자면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그대로 입은 것은 아니고 일본군복을 떠올리게 하는 밀리터리 룩을 입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고로 보자면 박정희는 골프를 치러 갈 때점퍼를 입고 가죽장화를 신고 말채찍을 들었다(...). 아마 강창성이 보았다고 하는 "점퍼에 가죽장화에 말채찍"은 이 복장일 가능성도 있다.[40]

2.1.3. 사실이 아닌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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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2판)에는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나와 있다.

2005년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에 박정희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게재되면서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했으니 악질 친일파가 아니냐?"는 논란이 생겨났다.[41] 조희연 교수도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으며,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말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설과의 깊은 연관성을 표명하였고, 나아가 박정희가 당시 연대장의 성을 따라 오카모토로 개명하였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박정희가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기 전의 행적으로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주둔한 관동군 635부대 혹은 관동군 23사단 72연대[42]에 배속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박정희가 잠깐동안 착임하여 복무하였던 72연대에서 김병태 명예교수의 주장대로 창씨개명의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72연대의 당시 연대장은 물론, 역대 연대장의 이름에서 오카모토라는 성은 찾아볼 수 없다. #1, #2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설은 역사가 길다. 2005년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이전에도 2002년 한국의 저널리스트 지동욱이 일본에서 출판한 '한국 대통령 열전(韓国大統領列伝:権力者の栄華と転落)에서 박정희가 두번째로 개명한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서술하였고, 더 이전으로는 1987년 미국에서 출판된 'Two Koreas-One Future? '라는 서적에서 재일교포 김일면(金一勉)의 저서 '일본인과 조선인(日本人と朝鮮人)'을 근거로 인용하여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이며 육사 동기들로부터 '특등 일본인'이라 불렸다고 서술하였다.[43] 세카이 1975년 12월호에 재일언론인 정경모가 기고한 '장준하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나'에서도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 기고문 역시 '일본인과 조선인'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1975년 5월 출판되었으며, 이보다 더 일찍 오카모토를 언급한 매체는 1973년 8월 11일자 로동신문이라는 말이 있다.#[44]

'일본인과 조선인'은 박정희의 만주국 장교 시절 행적을 묘사한 초기 서적으로서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는데, 박정희의 만주국 당시 친일 의혹을 대부분 망라하고 있다. 만주군관학교로 혈서를 보낸 사례 등의 실제 에피소드는 물론 "요시 토벌이다!"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조선인 토벌이라면 내게 맡기라"는 발언 소개, 박정희가 만주국 황제 앞에서 충성 답사를 했다는 주장[45], 일본육사 57기생으로 들어온 박정희를 일본육사 교장 나구모 중장[46]이 "일본인보다도 일본인답다"고 극찬하였다는 일화 게재 등, 현재까지 인터넷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박정희 관련 친일의혹 프로토타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1973년 로동신문 기사내용과 '일본인과 조선인' 에서 오카모토 미노루 즉 박정희 과거행적 표현의 상당수가 겹치기 때문에 내용적 유사성 면에서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박정희의 육사 시절 별명을 '특등 일본인'과 '돌격대장'으로 표현한 점은 로동신문과 '일본인과 조선인', 그리고 이를 인용한 후대의 서적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로동신문에서는 아직까지도 박정희를 가리키는 주된 비하표현으로 특등 일본인을 사용하고 있다.‘항일운동 탄압에 앞장섰던 특등 일본인의 후예’ 반면 차이점으로는, 로동신문에서는 박정희의 일본명을 '오까모도중위'라 하여 성만 표기함과 동시에 이것이 두 번째 이름이라는 주장은 싣지 않았으나 '일본인과 조선인'에서는 '오까모도 미노루'라는 성명 전체를 공개하였고 이 이름이 두 번째 창씨명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로동신문의 기사와 '일본인과 조선인' 양쪽의 뿌리가 되는 더 이전의 자료가 있는 것인지, 혹은 로동신문 기사를 토대로 발전시킨 것이 '일본인과 조선인'인지는 관련자료가 더 모여야 알 수 있을 듯하다.

현 시점까지는 오마이뉴스한겨레 등 언론에서 기사를 내고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기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고 밝히면서 해당 설이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 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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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복무 시절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실제로는 1941년경 동부 뉴기니 전선의 일본 육군대위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가 독립군들을 처형장으로 인솔하는 모습이라면서 떠돌아다니는 사진난징대학살 때 찍은 사진이다.[47]

박정희가 엔카를 즐겨 들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심수봉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엔카를 부르자 어디서 왜년을 데리고 왔느냐고 화냈다고 한다.

반박정희 성향의 재미교포 언론인 문명자는 박정희가 간도에서 독립군 토벌하러 나갈 때마다 "요시 토벌이다!" 라는 전투함성을 지르곤 했다고 주장하며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을 제기하였으며, 이후 만화가 백무현이 이 떡밥을 물면서 '요시 토벌이다!'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만 반박정희 성향의 민족주의 좌파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48]는 당시 만주에 활동한 독립군 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굳이 따지면 당시 팔로군이라는 공산군에 일부 독립군이 합류하기도 했었는데, 당시 박정희가 속한 부대는 팔로군과 교전한 적 자체가 없으며, 박정희가 속한 부대 자체도 팔로군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방[49]에 있었다.

한때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것을 넘어 독립군 토벌 전문 부대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주재덕의 서적 탄백서[50]에서 박정희가 간도 특설대원으로 근무하였다고 적힌 것을 보았다고 차상훈이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4)의 결전편에서 증언을 실었다. 하지만 그 외의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탄백서란 내용을 바탕으로 한 박정희 간도특설대 근무설의 골자는 1939년 대사하 전투에 참여하여 무공훈장까지 받은 간도 특설대원 마츠모토란 인물이 있는데 그 인물이 박정희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류연산 작가는 박정희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역시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

헌데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소문에서 박정희의 이름이나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는 언급되지 않았다. 게다가 박정희는 1939년 9월까진 교사로 근무했고 동년 10월에 시험을 쳐서 1940년 4월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마츠모토란 자는 박정희가 입학하기 전부터 복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것은 1940년 2월 17일인데 창씨개명을 하기도 전이고 군관학교 입학을 하기도 전인 1939년에 전투에 참여해서 일본 이름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오마이뉴스의 기자 정운현[51]과 연변의 역사학자 박창욱[52]도 박정희 간도 특설대 근무설을 조사한 끝에 간도 특설대 명단에도 없으며 심지어 임관 이후에 만주군에서 전투에 참여한 기록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정희와 함께 복무했던 조선인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53] 박정희는 단(연대) 을종부관[54]이라서 전투 경험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마츠모토란 자의 정체도 박정희가 아닌 현학춘이란 자로 밝혀졌다.

2.2. 민주화 시위 발포 암시 발언?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가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 1980년 1월 28일 항소이유 보충서 中
나는 그런 짓[55] 안 한다. 나는 내가 (발포 명령을) 직접 한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물러가면 그만이지. 나를 사임까지 시키겠느냐?
김재규의 최초 진술 녹음 녹취록 중 #

10.26 사태로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부마민주항쟁 이후 앞으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면[56]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의거해 부마민주항쟁 이후 일어날 민주화 시위에서 결국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미는 발포 명령을 고려하여 사실상 전두환과 다를바 없이 비난받을 여지가 많다는 평가가 상당수 존재한다. 다만 박정희는 10.26 사태로 피살되었기에 이후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서 발포 명령을 내릴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 시위에서의 발포 관련하여 당시 청와대 주요 인사들 중 김재규를 제외하면 당시 박정희의 발포 명령에 관해 증언한 이가 없고, 이와 반대되게 10.26 사태 불과 두달 전 1979년 긴급조치 9호보다 더욱 더 강경한 긴급조치 10호를 박정희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한 인물이 김재규이며 오히려 박정희가 이를 부결했다는 것이 고건, 김계원, 김정섭 등 당시 관련 청와대 관련 인사의 다수의 증언으로, 확실시되고, 당시 정무 제2 수석이던 고건 전 총리에 따르면 이전 사망자[57]까지 발생한 YH무역 사건에 대한 강경 진압도 중앙정보부의 결정이었고 밀고 나간 인물은 김재규 부장이었다는 오히려 시위 진압에 있어 온건파보다 강경파에 해당했다는 증언도 존재하기에, 암살의 명분을 쌓기 위해 거짓으로 한 발언 아니냐며 부정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결론적으로는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이 없는 이상 발포 발언의 진위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쨋든 발포 발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 당시 취재기자인 조갑제에 따르면 곤봉으로 머리를 내려치는 강경한 진압방식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정부 공식 발표로는 사망자가 단 한명도 없었지만 당시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한 사망이 의심되는 사망자가 나왔다.[58]결국 40년이 지난 2019년에 당시 과도한 진압으로의 사망이 의심되었던 유치준씨가 공식적으로 부마항쟁에서의 첫 사망자[59]로 인정받음에 따라(#) 이에 대하여 비난의 여지를 피하기는 힘들다.

한편 문영심이 2014년 쓴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에서 박정희가 차지철의 킬링필드 발언을 듣고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김재규에게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그렇게 물러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나?"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하지만,(#) 이는 문영심의 책 외에는 아무런 출처가 없다.

2.3. 탈일 행적

2.3.1. 셀프 훈장


박정희는 재임 기간 동안 스스로에게 다섯 차례 훈장을 수여하여 비판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에 수여한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하고 일등보국훈장과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은 변명할 수 없는 '셀프 훈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셀프 훈장은 좀 민망한 일"이라며 "후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에게 업적을 치하하면서 수여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지적하였다.[60] 박 전 대통령은 10.26 사태 이후인 1979년 11월 3일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도 받았는데, 일제 시절 만주군 출신인 박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 대한민국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들과 동격의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3.2. 기회주의자적 이중잣대 면모

일제강점기 때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육사 졸업 후 만주군 장교로서의 활동, 만주군 해산 직후에는 고국에 돌아갈 방법이 없자 광복군에 들어갔고, 해방이후 남조선로동당 입당 및 프락치로 활동 이후 깨끗히 바로 전향을 인정하고, 같은 만주군 출신 장성인 백선엽의 선처로 총살형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살아남는다[61].

다만 6.25 전쟁 당시 정보장교였던 김종필에게 남침 징후를 보고받은 후 도주하지 않고 신설된 9사단 참모장으로서 최전선에서 참전하였기 때문에 악질 기회주의자 꼬리표를 붙이는건 무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후 국군 내 사조직을 통한 5.16 군사정변를 주도하였고 헌법 개정을 가장한 친위 쿠데타였던 10월 유신을 저질렀으며, 하나회의 존재를 방치하는 등 일관적인 모습보단 현재 자신한테 가장 유리한 쪽을 택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비판이 있다.[62]

남로당 경력 때문에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게 '사상이 의심된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반박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메카시즘을 타도하자는 내용의 신문광고를 올리기도 했다. 훗날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행보다.
2.3.2.1. 남조선로동당 활동 경력
박정희는 남한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했으며, # 대구 10.1 사건에서 친형 박상희가 죽은 후 여수·순천 10.19 사건에도 남로당 군사총책으로써 연루돼 숙군된 바 있다. ##2
2.3.2.2. 친일 논란
본인부터 친일 논란이 있으며, 한일 정치인들 양쪽, 특히 만주국 시절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이른바 '만주국 커넥션')끼리 친분을 쌓았으며# 일제의 군사주의, 권위주의 문화를 도입했음에도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는 왜색과 친일 잔재를 몰아낸다는 이유로 표면상 일본의 대중문화[63]를 통제하고 금지했다. 이는 자신의 친일 성향을 숨기기 위한 기만이라는 분석이 많다. 본인은 조선일보의 방일영과 일본 춤을 추거나 구일본군 군가 등을 본따서 나의 조국을 작성하는 등 일본 문화를 긍정하고 향유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술을 마시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일본의 한시를 읊곤 했는데 한 번은 박정희가 육군 준장 시절 술에 취해서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를 보네."라는 일본 시를 읊었는데 박정희와 함께 술자리에 있던 한 육군 소장이 그 시가 사무라이를 주제로 한 시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박정희를 향해 "그, 일본 것 되게 좋아하네~"라고 비아냥거리자, 박정희는 기분이 상했는지 벌떡 일어나 술자리를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64]

또한 박정희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부시도)의 열렬한 팬이었다. 박정희의 정보담당관이었던 최세현은 박정희에 대해서 "그(박정희)는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사무라이 영화는 거의 대부분 (직접) 들여와서 보곤 했었다."라고 말했으며, 일본으로 파견된 중앙정보부 간부는 "일본에 근무할 때 사무라이 영화나 메이지 유신 전후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거의 다 사 모아 고국(한국)에 보냈었다."라고 증언했다.[65]

2.4. 엽색 행각

박정희의 일생에 대해 조갑제조선일보에 기고한 내용에 따르면 따르면 박정희는 1955년 경 휴전 직후 2군단 포병사령관으로 복무할 당시부터 육영수와 일찍부터 여자 문제로 부부싸움을 벌여왔다고 한다.
박정희는 야전에 근무할 때는 꼭 단골술집과 단골작부를 정해놓고 다녔다고 한다. 일과시간엔 엄격한 군인, 일과 후엔 소탈한 인간으로 돌아가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한 박정희는, 이 2가지 면을 혼합시키지 않고 선명하게 구분해놓았다. 그러나 육영수의 입장은 달랐다. 육영수는 소실을 5명이나 둔 아버지 아래에서 본처인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 하는지 지켜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편의 외도를 허용하면 자신도 어머니처럼 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중략) 이런 태도는 청와대 생활에까지 이어져, 대통령 수행 경호원들은 육영수만 보면 숨거나 달아나곤 했다. 영부인에게 붙들려 가서 간밤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서 문초를 당한 경호원도 많았다. 충현동 집에서 함께 살던 여고생 박재옥의 눈에 비친 육영수 또한 행복하기만 한 주부는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와 육 여사가 싸우는 것을 딱 한번 봤다. 어느 날 아침 온 가족이 식사를 하는데 박근혜가 큰 소리로 떠드니까 아버지가 꾸중을 하셨다. 육 여사가 싫은 기색을 보였다. 큰 소리가 오갈 조짐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영옥이 언니 집에 잠깐만 가 있으라고 하셨다. 그 뒤로 두 분이 어떻게 다투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상하게 육 여사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신 것은 아닐까,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 의문이 풀린 것은 내가 결혼한 뒤였다. 아버지의 부관이었던 남편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육 여사는 아버지의 여자 문제 때문에 늘 수심에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조갑제 1998.06.07 박정희의 생애[66]

박정희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여자김호남결혼하여 딸 박재옥을 낳았으나, 억지로 했던 결혼인 탓에 김호남에게는 별로 정이 없었다. 김호남과 이혼하기도 전에 이화여대생 이현란과 동거하며 사실혼 관계로 몇 년을 지냈으나,[67] 이현란과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현란과 헤어지고 김호남과 이혼한 후 육영수재혼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까지도 박정희의 복잡한 여성관계와 독재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연예인과 밀회하고 접대를 받았다는 논란은 10.26 사건 전에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영부인 육영수는 박정희의 정조 의무 위반에 자주 문제를 제기했으며, 박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사이트에도 여자 문제로 부부싸움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육영수는 방첩부대장이었던 윤필용에게 "이건 절대로 여자의 시샘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하께 여자를 소개하면 소개했지, 왜 꼭 말썽날 만한 탤런트들을 소개합니까?"라고 하소연한 적도 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실제인물인 박수웅 씨도 원래는 대연각 호텔의 여자 이발사가 이발을 담당했는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육영수 여사에 의해 자신이 담당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간혹 박정희가 육영수가 죽은 이후부터 외로움 때문에 여성편력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제로는 육영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박정희의 여성편력은 심각했다. 육영수가 생존해 있을 때도 박정희는 경호원 1명만 대동하고 나가는 '심야 단독행사'도 자주 즐겼다.[68] 애초에 상기한 이현란과의 연애 자체가 불륜으로 시작했으며, 심지어 전쟁 중에 참견할 사람이 없어지자마자 조강지처인 김호남을 버리고 바로 육영수와 결혼해버렸다. 친딸인 박재옥도 엄연히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번은 육영수가 ‘현장’을 덮친 적도 있는데, 1970년대 초반 유명 여배우를 박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의 한 기업체 사장 집에서 몰래 만난다는 정보를 입수한 육 여사는 방문 앞에서 ‘나예요, 문 열어요’ 하고는 박 대통령과 맞부딪친 적도 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나중에는 손찌검까지 동원된 육박전으로까지 번져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육영수 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포착하는 등 파란이 있었다.[69]

< 10.26 사건과 궁정동 안가 >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은 100명 정도 된다. 임신해서 낙태한 사람도 있고…. 징징 울고 불응하겠다고 해서 배우 K모, H모양은 오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간호여성이 임신해서 애먹기도 하고…
강신옥 변호사의 접견메모[70]
궁정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을 거쳐간 여성이 200명 가량 되는데, 이 때문에 박선호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대통령에게 다 불려갔었다. 당시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71],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72] 등이 모두 사실이었다.[73]
안동일 변호사

10.26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당시 대학생이던[74] 유명 모델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 등 여성들과 술을 마시다 피살당했다. 전 세계의 국가 지도자 중에서 여자를 끼고 마시다 부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사례는 없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다. 1980년 항소심 2차 공판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비롯, 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궁정동을 거쳐간 여성들에 대한 증언을 했다. #, #2, #3 박정희 정권의 밀실정치 역할을 한 궁정동 안가는 YS 정권 때 철거되었는데, 당시 상황을 취재한 MBC 뉴스데스크 기사를 보면 안가 내부에 2인용 침대가 있는 침실 바로 옆에 접대장소가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자 역시 "안가가 만들어진 70년대로서는 꽤 호화스러운 응접세트에 침실까지 갖추고 있어 안가의 용도를 짐작게 해주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하고 있으며, MBC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보도에서 궁정동 안가가 박 대통령의 사생활을 은밀히 영위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됐다고 주장하며, 해당 방송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증언과 조서가 공개되는 등 성접대 논란 의혹에 무게를 더했다.
이들 프로[75]는 박 전대통령이 측근 및 술마시며 연회를 즐기는 '대행사'와 유명 여배우들과 단 둘이 침실에서 보내는 '소행사'를 침실과 함께 소개하였다.
한겨례 1998.10.31 <생생한 증언통해 박정희 말년 파헤쳐> 일부 발췌 #

궁정동 안가에서의 박정희의 술판은 10.26의 그날처럼 박정희, 경호실장, 중정부장 등 3~4명의 최측근이 함께 하는 '대행사'와 대통령 혼자 즐기는 '소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대행사는 월 2회, 소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술자리에 한 번씩 왔다 간 여성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의 채홍사' 노릇을 한 박선호 전 중정부 의전과장은 증언한다. 또한 10.26 재판에서는 진술을 거부[76]했지만, 변호사에 따르면 박선호는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하고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술자리 여성으로는 유명한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고 하며, 그 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성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으며, 심사에 이어 여성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보안서약과 동시에 접대법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의 특별한 만찬은, 절대군주나 봉건영주 시대가 아닌 20세기 말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개탄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 이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술자리 동원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첫째, 단독 후보는 안되며 반드시 복수로 부르는 것이고, 둘째로 결코 동일인을 두 번 이상 들이지 않는 것[77]이 그것이다. 복수 후보로 하는 것은 그의 선택 폭을 보장하기 위함이었고, 한 여인을 두 번 이상 부르지 않는 것은 박정희와 인연이 깊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78] [79]

또한 전직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이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 남긴 기록을 보면, 박정희의 여자 문제와 관련한 소문은 일본 정치계에까지 흘러들어가, 일본 정치인 고다마 요시오는 그 소문이 일본에까지 자자하게 퍼졌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80]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81]는 김재규로부터 박정희의 엽색행각에 대해 자세하게 전해들었는데, 당시 현역 연예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82] 강신옥이 김재규로부터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연예인들을 밝혔다면서 당시 박정희의 엽색행각이 도를 넘는 수준이었으나 재판에선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박정희의 엽색행각은 당연히 세간에 퍼졌고, 김재규의 여동생은 가족모임 때 김재규에게 이런 소문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김재규는 “내가 그게 제일 고민이다. 여자 형제 다섯이나 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려니 나도 힘들다. 너희들은 모르는 척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박정희의 성접대 논란에 대해 부정하는 일각의 주장으로는, 김재규, 박선호, 김형욱 모두 박정희에게 숙청을 당한 사람들이니 앙심을 품고 발언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10.26 사태의 증인이이었던 심수봉과 신재순은 오히려 박정희를 호의적으로 묘사했고, 10.26 사태 때에 김재규가 발언했다는 말이 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없었다는 점에서[83]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되고, 궁정동을 거쳐간 여성이 200명이 넘는다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지금까지 신빙성 있는 증언을 통해 성상납당했다고 증언한 이가 단 한명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상납 행위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위 세 사람은 박 대통령을 오랜 시간 보좌한 심복이거니와 모두 숙청당한 시기(앞에서부터 1979년, 1977년)도 각각 다르지만, 모두가 박정희의 문란한 여성편력을 증언하였고, 당시 김재규 측의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원래 박정희의 문란한 여성관계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지만, # 오히려 김재규는 이러한 발언을 자제하며 조사 과정에서 박선호가 박정희의 여성편력을 폭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지할 정도였다.

또한 지금까지 성삽납에 대한 증언의 당사자가 없다는 점에서는 철저하게 지켜졌던 궁정동의 보안 유지와 피해자와 당사자들조차 어려워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야하며, 무엇보다도 10.26 사태 당시 청와대 깊숙한 궁정동에서 술시중을 받았고, 안의 2인용 침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접대의 의혹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한편 박정희의 이러한 문란한 여성편력은 1974년 육영수문세광의 총탄에 피살된 후로는 더욱 더 잦아진 대행사와 소행사로 인하여 자녀인 박근혜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고, # 이러한 연유로 딸에게 약점을 잡혀 박정희가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방조하게 만든 원인으로도 지목되기도 한다. 박지원 전 의원이 김종필 전 총리에게 들었던 관련된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는 처음에 이와 같은 행위를 알고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을 시켜 조사하라고 했지만, 박근혜가 사생활 침해라며 적극 반발하였고, 이전 박정희가 못된 짓을 워낙 많이 하였기에 때문에 딸에게 약점이 잡혀 아무 소리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

다음의 사건은 관련자나 제 3자를 통해서, 알려진 박정희의 성삽납 관련 의혹이며 이는 다음과 같다.

< 압구정 현대아파트 아파트 목격 사건 >

1977년에는 어떤 가정주부 B씨가 지인인 가정주부 박 씨에게 "박 대통령이 유명 여성 탤런트의 집을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가정주부 B씨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동승하게 되었고, 경호원이 "뒤돌아보지 마세요!"라고 해서 내렸고, 다음 날 탤런트 옆집에 사는 B씨에게 당시 남자 3∼4명이 찾아와 신분증을 보여주며 ‘어제 밤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혹여 당신이 어떤 사람이나 장면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상당히 재미가 없을 것이다. 남편의 직장이 어딘지 알고 싶다’고 했다”면서 “이에 B씨가 ‘(그 남자가) 대통령이 틀림없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가정주부 박 씨에게 전했고, 가정주부 박 씨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 받았으며 2014년에 열린 재심에서 3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정희의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출입 염문이 귀에서 귀로 번진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현대 아파트에 사는 배우[84]를 만나기 위해 깊은 밤에 대통령이 나타난다.’, ‘그분의 여염집 나들이 때는 잠시 X동의 전깃불이 나간다.’, ‘K여고를 나온 재벌집 며느리가 목격담을 퍼뜨리다 혼쭐이 났다.’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이 귀를 의심할 만한 소문들이 대체로 사실로 확인된 것은 1981년 서울 민사지법에서였다.

현직 법관 H씨는 “81년경 기이한 민사소송이 들어왔다. 그 아파트 6동엔가 사는 한 주부가, 경찰관을 상대로 갈취당한 돈에 대한 반환 청구소송을 낸 것이었다. 그 주부는 승강기에서 대통령을 목격했고, 즉각 경호원들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동네 주부들에게 귀엣말을 해, 이 사실이 한 경찰관의 귀에 들어갔다. 문제의 경관은 발설한 아주머니를 유언비어 사범으로 입건하지 않고 눈감아 준다는 조건으로 돈을 갈취했다. 상당 기간 뜯어낸 액수가 1,000만 원도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죽고 세상이 바뀌자 주부는 분한 생각에”라고 증언했다.

< 국군 간호장교 추문사건 >

박정희는 정기적으로 서울지구 국군통합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았고, 여러가지 검사를 그 수발을 현역 여자 간호장교가 맡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그 간호 장교를 범하였고, 결국 간호장교가 임신을 하게 되어 청와대에 알려지게 된다.

보안사령관을 지낸 A씨에 의하면 "박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까운 통합병원에서 안마를 받은 일이 많다. 안마를 받고는 사령관실로 직접 걸어오셔서 정보 보고를 받거나 관심사항을 묻곤 했다"고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에서 위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김재규의 변호사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저서와 인터뷰와 재판 당시에도 '여군 장교 얘기는 사실이다'라고 짧게 밝히고 있다. 추가 인터뷰에서 따르면 연예인 여성이 가장 많았지만 "군 병원의 간호장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해요. 사단과 군 병원 등에서 ‘괜찮다’ 싶은 여군이 있으면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여 대통령 수발을 들게 했다는 거죠."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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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

김재규 측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가 2005년 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군추문사건과 함께 짧게 사실이라고 증언한 내용이다. #

일명 "후처소동"으로 스타 C양이 궁정동에서 박정희와 한번 인연을 맺은 뒤, 다음 퍼스트 레이디 후임을 노리고 C양은 궁정동 행사에 연속출연을 요구했고, 박선호와 안가요원들이 같은 여자는 두번 이상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잘랐다. 그러자 박정희의 연심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 C양의 어머니가 박선호에게 찾아와 "각하께서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데 당신들이 중간에서 차단해도 되는 거요?"라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정인숙 스캔들>

선운각 호스티스로 일하던 '정인숙'은 박정희, 정일권 등의 고위층들을 상대하는 고급 종업원이었다. '정인숙'은 여러차례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으나, 1968년 6월에 '정인숙'은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고위층 인사라는 것은 당연했고, 끝내 친부에 대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국무총리 정일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해외로 떠났으나 타향살이를 견디지 못해 정일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국했다. 1970년 3월, 정인숙은 총격 암살 당한 미제사건으로, 박정희를 포함한 고위 저명인사 27명[85]의 명암이 발견되었다.[86] 정인숙의 아들이 박정희의 친자식이 아닌 정일권의 친자식임은 김종필의 회고에 의해 밝혀졌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그 외 여러 풍문들이 있으나, 기록이 아닌 어디까지가 정확히 사실인지 확인되지 못하는 뜬소문들로 전해지며, 대부분 출처가 불분명하다. 또한 이 중에서는 근래의 들어서 노골적인 폄하 목적의 찌라시성으로 쓰여진 것도 상당하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조금은 걸러서도 봐야 한다.[87]

3. 그 외 논란

자세한 내용은 문서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참조.

3.1.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

박정희는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대통령이다. 호 측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호감을 가지는 반면, 불호 측은 집권기에 국민들을 탄압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 내에서의 군사 문화, 고속 성장으로 인한 폐해 등과 같은 박정희가 남긴 여러 부정적 잔재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는 점에서 극도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88] 즉, 박정희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국민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준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저서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서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지만, 강고한 독재체제로 반대/불만세력을 가혹히 탄압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국민들에게는 자신의 견해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중성과 서로 간의 불신풍조 같은 고질적인 후유증도 낳았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1982년 부미방 사건 관련자였던 문부식 시인도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박정희가 남긴 '조국 근대화'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국민들의 자율적 반성과 성찰능력을 빼앗아 그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수신형 인간'으로 만들어버렸고, 이러한 광기는 전두환 체제에서도 이어졌다는 식으로 견해를 제시했다.


[1] 다만 개인숭배 성향은 박정희의 라이벌이었던 김일성도 마찬가지였으니(물론 강도는 김일성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했다) 민족적 시대적 특성이라고도 볼 가능성도 있긴 하다.[2] 또한 호남(특히 광주광역시전라남도) 지역에서도 김대중 개인 숭배 성향이 강한 편이다.[3] 이들은 실제로는 앙숙 관계였던 이승만과 박정희를 동시에 숭배하는 특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물론 이들도 전두환 찬양은 겉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이들보다 더한 강경우익이나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군을 위시한 서부 경남과 연고가 있는 대경권 등지에서는 쿠데타 빼곤 정치는 잘했다 또는 아예 빨갱이 잘 때려잡았다 식의 적반하장으로 전두환을 옹호하는 이들이 상당하다.[4] 여담으로, 경상도는 아니지만 강원도에서도 농촌으로 들어가게 되면, 새마을기를 많이 찾아 볼 수 있긴 하다.[5] 임대차 3법이후로 비수도권지역중에서는 최고수준으로 올랐다. 부산시의 집값은 평균적으로 4~5억 올랐다. 삼익비치같은 경우는 임대차3법이후 무려 13억이 올랐다.[6] 물론 수도권-경부축으로 산업시설이 집중적으로 지어져 호남이 상대적으로 경제발달 측면에서 소외됐고 전국구 선거 때 참모가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반감이 아주 없다고 하기엔 곤란하다. 단지 전두환처럼 반쯤 찢어죽어야 된다는 수준은 아닐 뿐.[7] 한국갤럽 11월 조사 결과 당시 5%[8] 광화문 박정희 동상 건립 계획, 구미시 박정희 탄신제[9] 70년대부터는 서서히 김정일이 일선에 나오기 시작함[10] 세상에 부럼없어라이밥에 고깃국이라는 구호도 60년대 초반에 나왔다.[11] 물론 소위 '장마당 세대'라고 불리우는 젊은 세대들은 고난의 행군과 그 여파를 겪어왔기에 국가가 자신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강하다.[12] 대선 득표율로 따져봤을 때 2위와 어마어마한 차이를 벌려 압승한 만큼 이명박의 당선에는 지난 정권에 대한 염증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다.[13] 참고로 박정희 시대에 1인당 출산율이 평균 6명이었다.[14] 1979년 2.90명[15] 1984년 1.74명[16] 당시 정조가 쓴 광화문 한문 현판이 박정희가 쓴 한글 헌판으로 바꾸어 진 것도 이 시기이며, 이후 박정희의 한글 현판은 47년간 서울 한 복판을 지키다가 2005년에 다시 정조의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17] 당시 한민당에서 이어진 우익 정당이므로 취급됐으며 진보 좌익 정당으로 분류 되지 않았다.[18] 사실 과거의 극좌 인사들이 후에 기존의 극단성은 그대로 둔 채 극우 반공 인사로 방향만 트는 것은 굉장히 흔해빠진 일이다.[19] 더구나 북한은 논외급인 민주 캄푸치아를 제외하면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제일 극단적인 성향의 공산주의 국가였으며, 주체사상극우 아니면 사이비 종교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원본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상이다.[20]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이 당시 주한미군 감축을 막기 위해 미 의회 의원들을 자금으로 매수하려 시도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며, 한미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는 원인이 되었다.[21] 실제로 당시 카터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현재까지 역대 최악의 한미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지 않았다. #, #.[22] 공해상의 선박은 그 선박의 소속국, 곧 그 선박이 등록되고, 그 국기를 걸고 있는 나라만이 관할권을 가진다는 국제법상의 일반 원칙.[23] 당시에는 '독립축하금'이란 명목으로 받았고, 협정 과정에서의 굴욕적인 태도로 6.3 항쟁,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일어나는 등 부정적 반응이 컸다.[24] 명목은 독립축하금으로 주었다.[25] 이상우. 1986.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26] 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3》 (평민사, 1990) 222p[27]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28] 문경 교사 시절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 그 동네 순사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어 시간에 몰래 태극기나 한국의 역사를 가르쳐주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가인 셋째 형 박상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29] 그러다가 결국 교내 관련 인사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홧김에 만주군에 지원했다고 하는 것이다.##2[30] 이게 얼마나 심한가 하면 군수가 하급 장교에게 싸대기를 맞아도 아무 소리를 못할 정도였다. 일본군의 흑역사 중 하나인 오사카 고스톱 사건이 논란이 된 것도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는 '감히 짭새가 황군에게 깝치다니!'란 입장이었다.[31]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32] 무려 수교훈장 중에서 1등급인 광화대장을 받았다.[33]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34] 애초에 광복 이후 50년간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나라에서, 당연히 정부에서 인정한 친일파보다 훨씬 더 많은 친일행위자들이 있을 거라 보는 게 타당하다.[35] 신흥독립국의 군사독재자들의 약력을 보면 대다수가 식민지 시절 식민지배국 군대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다. 그리고 신흥독립국의 독재자들이 과거 식민지배국의 고위층들과 유착 관계를 맺는 일 역시 흔한 일이다.[36] 반박정희 성향 학자로 유명한 한홍구도 박정희의 친일은 '경미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뒤이어 한홍구는 박정희가 한국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37] 기시 노부스케의 친서를 전달하였다.[38] 당시 박정희의 상관이 김학규 장군이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에 박해를 받아 병고를 치르고 있던 김학규를 보살피고 건국독립장도 수여했다.[39] 당시 대한 광복군 측에서 일본군 내 조선인 군인들에게 '겉으로는 친일하되 내부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방해하라'는 선전문을 살포한 적은 있다.[40] 강창성의 증언 또한 의심해 봐야 한다. 이 사람은 채명신 장군도 월남에서 부정축재를 했다고 누명을 씌운 적도 있고, 자기 아들의 의심스런 병역면제에는 침묵하면서 반대 세력의 병역 비리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이다. 실제 강창성이 들먹인 병역비리 문제로 가장 피를 본 사람은 이회창이다. 즉, 이 코스프레 논란도 강창성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꾸며내거나 과장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41] 일단 악질 친일 고문경찰 하판락이 창씨개명을 2번 한 바가 있긴 하다.[42] 1944년까지 치치하얼 인근에 위치한 하이라얼에 주둔해 있었다[43] Sullivan, John, and Roberta Foss. "Two Koreas - one future?". Boston (Mass.): U Press of America, 1987. p. 146.[44] 해당 일자의 신문 사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중이다.[45] 국내에서는 천황 앞에서 답사했다는 식으로 퍼져 있다[46]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라는 인물이 있기는 하나 이는 만주군관학교장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어째선지 나구모 주이치로 소개되는 듯. 후자는 해군 장성이다.[47] 덤으로 난징대학살 당시 박정희는 교사였고, 박정희가 관동군에 입대한 것도 난징대학살 7년 후인 1944년이다.[48] 박정희를 이디 아민, 장 베델 보카사, 네 윈에 비교할 정도로 반박정희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49] 당시 중일전쟁 전선이 황하 부근~화북이었는데, 박정희가 속한 부대는 만주 열하성에 있었다. 6.25 전쟁 후기 경상남도 지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50] 중국어로 坦白书.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글이라는 뜻인데 정치적으로 자아비판하는 책이란 뜻으로도 쓰인다.[51] 참고자료[52] 참고자료[53] 전술한 2004년 정운현 기사에 실렸다.[54] 대대급 부대의 작전장교인데, 단장(연대장)을 보좌하는 것도 아니고, 단장을 직접 보좌하는 상위(대위) 계급의 갑종부관을 보좌하여 단기(연대기) 관리 및 명령 전달 임무만을 하는 보직이라고 한다. 애초에 작전장교 자체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직책이다.[55] 부하에게 발포 명령을 맡기는 일. 실제로 내무부 장관 최인규4.19 혁명 당시 발포 명령을 내린 혐의로 사형당했다.[56]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부마항쟁을 지칭한 말은 아니다.[57] YH 사건 당시 사망자 김경숙(YH무역 여성 노동자)씨로 유족의 동의 없이 부검을 끝내고 신속한 화장을 종용하는 등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사건 은폐 시도가 있었다.[58] 사망자 신원은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무자 유치준(당시 51세)씨로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한 10월 18일에 노무 일을 나갔다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10월 19일에 작성된 마산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에서는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 적혀져 있었지만. 진압에 따른 사망자로 인정되지 않았다.[59] 박정희 시기 시위 진압 과정에서의 유일한 사망자는 아니다. 전술한 김경숙도 그렇고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진압 과정에서 대학생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60] #[61] 새뮤얼 버거 전 주한미국 대사의 보고서인 한국의 변혁(1961~1965)에서는 박정희가 공산주의자 300명의 명단을 넘겨 숙군작업을 도왔기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보고했으며, 조갑제 기자가 1989년 당시 숙군작업 방첩대장이였던 김안일씨를 인터뷰한 내용 따르면, 숙군작업을 대조하여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사람은 이재복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와 김종석 남로당 비서고, 박정희가 사형을 면하게 된 원인은 수사과정에서 박정희가 공산주의와 무관하고, 포섭되긴 하였지만 남로당 활동 경력이 전무하다는걸 알아낸 김창룡이 김안일 방첩대장에게 소개시켜주었고, 김안일이 다시 같은 만주군 출신 백선엽에게 박정희를 소개시켜주면서 선처를 부탁한 까닭에 사형판결을 피할수 있었다고 한다.# 신빙성으로 볼때 당시 숙군작업 책임자이자 박정희를 대면하였던 직접적인 관련 당사자의 증언이기에 후자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인터뷰 당시 조갑제는 오늘날과 정반대로 박정희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 터라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묘사할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62] 이는 인도네시아의 군사독재자 수하르토도 마찬가지이다. 수하르토 역시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는 네덜란드군으로 복무했으나 일본 제국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네덜란드군에서 전역한 후 얼마 안 가 다시 일본군에 입대했고, 일본의 항복 후 네덜란드의 재침략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인도네시아 독립군 측에 가담하는 등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강하게 보였다.[63] 대표적인 예가 일본 엔카, 몇몇 엔카 가수가 일본 군부에 협력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엔카 자체는 음악 장르로써 일본 군부와는 무관하다.[64]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권/ 125~126쪽[65]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권/ 277~278쪽[66] 후일 이를 모두 묶어 출판한 박정희의 전기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된다.[67] 이때 이현란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68] 손광식, 한국의 이너서컬 : 대기자 취재파일. 중심,2002 213쪽[69]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 1970년대편 3권』(인물과 사상사, 2002년 11월)[70] 2012년 인터뷰에서 남산의 부장들의 저자로 유명한 김충식 교수가 밝힌 내용으로, 김재규가 1980년 1월 15일, 자신을 옥중접견한 강신옥 변호사에게 했던 말이라고 전한다. #.[71] 국군통합병원 서울지부에 있던 간호장교라는 이야기가 있다.[72] 일명 후처소동으로... C양 모친이 채홍사에게 “각하께서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데 당신들이 중간에서 차단해도 되는 거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향간에 있다.[73] 2005년 김재규 측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의 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 따른 내용이다. #.[74] 한양대 연극영화과 3학년 재학 중, 대학 2학년 때 이미 부자집 아들과 결혼해 딸까지 낳았다가 이혼한 이혼녀.[75] <다큐 스페셜-4심, 10.26과 김재규>와 <시사매거진2580-10.26과 채홍사>[76] 이에 대해 박선호는 '답변하게 되면 지금 현재 시내에서 일류배우들로 활동하고 있고 이것이 역효과가 나고 사회적으로 혼란문제가 되고 돌아가신 분(박정희)에게 욕되고 했기 때문에 제가 그 문제를 피했습니다.'라고 말했다.[77] 물론 예외 경우도 많았다.[78]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군법회의 증언 녹취록, 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의 인터뷰,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여자관계에서 ‘기자 박치기’까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와 김재규 쪽 변호사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79] [빛과 그림자③] 궁정동에 불려간 여자연예인은 누구, 수고료는 얼마나 받았을까?, “박정희 궁정동 드나든 여인 100명도 넘어”.[80] 이는 윤필용 사건 문서를 참조.[81] 이후 재선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82] 10.26 사건이 터지기 전까진 여자연예인들이 자기만 박정희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83] 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를 향해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나 차지철을 향해 "일갈했다는 각하를 똑바로 모셔!" 같은 김재규가 했다고 알려진 발언들에 대해서 "김재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며, 쏘는데 급했지 여유를 부리면서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라고 증언을 했다.[84] 이 의혹의 배우가 1970년대 트로이카로 명성을 떨쳤던 정윤희라는 루머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윤희가 압구정동 아파트에 거주한 건 결혼 후 1988년부터이며, 이 의혹의 배우가 누구인지는 지금까지 영영 미스테리로 남았다. #[85] 정일권, 김형욱, 박종규, 장관, 차관, 국군 장성, 국회의원.[86]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6회 "땅에 묻은 스캔들 - 정인숙 피살사건"[87]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60년대 당시 유부녀였던 배우 김삼화가 박정희에게 강제적으로 성상납을 당했다는 내용의 주장이 생겨나 한동안 인터넷에 떠돌았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틀린 어물쩍한 부분이 많으며, # 법원에서 허위사실 유포로 벌금형 처분을 받았다. # 이 외에도 김충식의 1992년판 김충식의 남산의 부장들이나, 1998년 실록 박정희와 같은 현재는 입수하기 어려운 90년대 고서적을 인용한 것처럼 출처가 명시되며 해당하는 노골적인 엽색 행각이 팩트인 것 마냥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막상 해당 서적들에는 그러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88] 다만 불호 측에서도 초고속 성장을 이룩한 것만큼은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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