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5-31 02:54:39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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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 사진[1][2]
1. 개요2. 사건의 재구성3. 허술한 대응4. 범인의 배경5. 의혹과 음모론6. 사건 이후7. 기타8. 둘러보기

1. 개요


1974년 8월 15일에 일어난 박정희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

동시에 이 사건이 기록된 영상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방송사고이자, 일종의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당시 범인 문세광(재일교포)이 박정희를 겨냥해 총을 발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영부인 육영수와 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장봉화 양이 사건에 휘말려 사망하였다.

2. 사건의 재구성

사건의 범인 문세광은 일본 오사카 미나미구 소재의 코쯔(高津) 파출소에서 권총을 절취하였다.

1974년, 그는 지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 받아 입국하였다.[3]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난 8월 15일 오전 7시, 문세광은 조선호텔에서 프론트로 전화를 걸었다.
8.15 광복을 기념하는 국립극장에 가야 하는데 오전 8시까지 승용차를 대기시켜주세요. 출발은 오전 9시입니다.
문세광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 40분에 택시 M-20 포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차안에서 운전기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1만원권을 주었다.

국립극장으로 가는 도중, 문세광은 왼쪽 옆구리에 숨겨둔 권총으로 손을 넣어 총의 공이치기를 올려놓았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정각 9시 문세광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가 극장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주었다. 175cm 정도의 키에 약간 통통한 몸집, 검은색 외투와 테두리가 검은 안경, 중절모를 쓴 문세광은 기사가 공손히 예의를 갖추고 있는 가운데 계단을 올라갔다. 문세광은 왼쪽 현관으로 향했다.

당시 현관에는 대통령 경호원이 3명, 경찰관이 8명 근무중이었다. 하지만 문세광은 별다른 검사절차 없이 통과했다. 반듯하게 차려입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그를 본 경호원들이 고위인사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일본인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점도 한 몫 했다. 당시 경호원들은 훗날 이루어진 조사에서 3.1절 행사 당시 외국인에 대한 경호를 너무 심하게 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대했다'고 밝혔다. 즉 외국인에 대한 검문이 느슨해진 틈을 적절히 노렸던 것이고, 여권 상 이름은 '요시이 유키오'였던 문세광은 매우 운이 좋았던 것.

극장 안으로 들어온 문세광은 1층과 2층 로비를 오고가면서 저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통로에 카펫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는 박정희가 지나갈 때 저격하려고 카펫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장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다가는 경호원의 검문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세광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 10여명이 한 곳에 모여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자신이 먼저 경호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대화를 걸었다.
문세광: 우시로쿠 도라오 일본 대사[4]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습니까?
경호원: 잘 모르겠습니다.
문세광: 극장 로비는 여기 뿐인가요?
경호원: 2층에도 있습니다.

경호원은 문세광을 2층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문세광은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지'라고 하면서 1층으로 되돌아왔다. 경호원은 다른 간부 경호관에게 그를 인계했다. 경호원은 "저 분이 일본 대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인계받은 경호관은 문세광을 보고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박정희가 나타나자 경호관은 문세광의 팔을 잡고는 기둥 뒤로 데리고 가서 서 있으라고 했다. 문세광은 박정희가 입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약 10분 정도 로비에 머물렀다.

문세광은 다시 로비 근무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박정희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근무자는 문세광의 요청을 승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로비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하니 출입구 근무자가 비표를 달지 않은 그를 제지했다. 문세광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들어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고 둘러대었다. 역시 일본어를 모르는 출입구 근무자가 로비 근무자를 바라보니 그는 무표정이었다. 출입구 근무자는 이를 들여보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문세광을 1층 C석 맨 뒤 열의 재일교포석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혔다. 박정희는 연설중이었다.

당시 행사는 KBS, MBC, TBC TV채널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었고, 동아방송, 동양방송, 기독교방송 등 라디오채널에서도 음성생중계를 진행하고 있었다.[5] 오전 10시 6분, 경축식의 클라이맥스라 할 박정희의 경축사가 낭독되기 시작하였다. 이날 경축사의 내용은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이었다. 문세광은 약 10분간 연설을 듣고 있었고, 이윽고 저격을 결심하고 허리춤의 권총을 배 밑으로 옮기려 했다.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10시 23분 경, 박정희가 이 구절을 말하고 있는 순간 ‘퍽’소리가 났다. 앞서 문세광은 언제든 쏠 수 있게 권총의 공이치기를 올려놨는데, 권총을 꺼내다가 격발이 되어 자기 자신을 쏴버린 것이다. 총탄은 문세광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6]

문세광은 허벅지로 오발을 하자마자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1층 B석과 C석 사이의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하여 뛰어갔다. 통로쪽 자리엔 경찰관들이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문세광을 제지하지 않았다.[7]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
박정희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2번째 총소리가 울렸다. 총탄은 박정희가 연설중이던 연대를 맞췄다.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문세광이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C석 가운데 앉아 있던 광복회원 이옥희가 "저놈 잡아라!"하고 소리쳤고, 그제서야 "잡아!" 하는 소리가 장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장내가 웅성거리는 사이 문세광은 이미 단상 밑 시립 교향악단이 자리 잡은 곳 2미터 앞까지 달려나갔다. 여기서 경축사를 낭독하는 박정희까지의 거리는 불과 10여m였다. 그는 C석 맨 앞줄에서 권총 사격 자세를 취한 후 3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제3탄은 불발되었다. 제4탄은 박정희가 연대 뒤로 몸을 숨겨 보이지 않자 오른쪽에 있던 육영수를 향해 쐈다. 18.2m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육영수는 총탄에 머리를 관통당했다. 제5탄은 단상 위의 태극기를 맞췄다.

그 때 독립유공자 자리에 앉아 있던 서대문세무서 재산세계장 이대산이 문세광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연단 위에서 경호원들이 박정희의 연설대를 둘러쌌다. 그리고 다른 경호원들과 C석의 독립유공자들이 문세광을 덮쳐 제압했다. 그가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이 튀어 시향 바이올리니스트 김영목의 왼뺨에 맞아 피부가 2cm 가량 찢어지는 찰과상을 입었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웅성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찼다. 범인의 총에 머리를 맞은 육영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비스듬히 뉘어졌으며, 당시 중계카메라는 카메라를 급히 돌려 연단으로 뛰어나오다가 넘어져 청중들에 둘러싸인 문세광의 모습을 2초간 클로즈업했고, 충격적 상황에 놀란 조정실은 다른 중계카메라로 화면을 넘겼고 이 카메라는 단상 위 벽을 비추게 되었다. 그러나 연단 마이크는 꺼지지 않은 채로 계속 송출되고 있었고, 아래로 몸을 숨긴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원의 대화가 그대로 송출되었다.[8] 이 때 총성이 더 울렸고, 이에 합창단원인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이 맞았다.[9]

쓰러져 있는 육영수를 한 50대 여인[10]이 올라가 부축하자,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이 거들었다. 라디오방송은 모두 중계를 멈추고 음악을 틀었다.

육영수가 호송되고 3분 쯤 뒤 연설대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는, 연단 위의 보리차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여러분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남은 경축사를 마저 이어나갔다.

육영수는 사건 발생 9분 만에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오전 11시 경부터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교수의 집도로 오후 4시 20분까지 뇌 수술을 받았다. 근처 병원과 적십자 혈액원의 모든 AB형 혈액을 쏟아붓는 대 수술이었는데, 400mL 혈액 148병을 집어넣었다. 용량은 59,200cc, 이 정도면 몸속의 모든 혈액을 거의 10번은 갈아 치울 만큼 많은 양이다.[11]

하지만 총탄이 뇌정맥을 꿰뚫었기 때문에 소생할 가망은 없었다. 집도의는 사건 다음날 "꼭 살렸어야 했는데… 5mm만 비껴갔어도…"라며 침통해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난 뒤, 박정희가 찾아와 회복실에서 약 20~30분 가량 아내와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육영수는 이날 오후 7시경에 숨졌다.

3. 허술한 대응

청와대 경호실 입장에선 역대 최악의 경호 실패이기 때문에 청와대 경호원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배우고 넘어간다. 확실히 경호원 입장에서는 배울 게 참 많은 사건이긴 하다.

우선 가장 큰 실책은 비표(출입증)가 없는 사람을 통과시킨 것. 앞에서 설명한 대로 당시 문세광은 비표가 없었는데, 고급 외제차를 타고 일본어를 쓰면서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척 하자 몸 수색 없이 출입을 허가해 버렸던 것이다. 이로부터 교훈을 얻은 청와대 경호실은 이후 어떠한 경우라도 예외 없이 출입증을 검사하고 몸수색을 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박정희가 연설을 하던 중 '텅'하는 금속성 소리가 울렸을 때, 오케스트라석에 앉아 있었던 연주부들은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객석, 단상 위의 경호원들과 박정희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이것부터가 경호원들의 어이없는 실책이다. 저게 총성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더라도 일단 총성과 유사한, 혹은 무언가 확인되지 않은 소리가 들린 시점에서 경호원들은 즉시 박정희를 감싸거나 연단에서 내려오게 하고 주변을 경계했어야 한다. 만약 그랬다가 총성이 아니라 다른 소리를 오해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경호원들의 책임은 전혀 없다.

문세광은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쪽을 달리면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객석에 배치된 경찰들과 경호원들은 그가 권총을 들고 유유히 통로를 뛰어다니는 걸 보았는데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후에 그를 경호원으로 착각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이니 민간인이라면 이해가 간다만 경호원이 할 착각은 아니다. 결국 한 발이 아니라 대여섯발이 넘게 발사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연단에 맞아서 그렇지 조금만 위로 날아갔더라면 박정희를 죽인 사람이 김재규가 아니라 문세광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이 때 가장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한 사람이 당시 단상 위에 앉아 있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다. 그가 박정희 쪽으로 뛰어오는 걸 보자마자 앞으로 뛰쳐나가 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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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송출된 방송화면 캡쳐장면. 역광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박종규 경호실장이고 왼쪽 하단에 검은 형체가 범인이다. 그는 일어서더니 권총을 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오고, 그가 일어선 것은 문세광이 제1탄을 쏘아 ‘퍽’소리가 난 지 5초 정도 지난 때였다. 그는 범인을 향해서 쏘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관중석이 조명으로 너무 환해 눈이 부셨다. 표적을 잃은 것이었다. 이 행동에 대해 1998년 청와대 경호실이 펴낸 사례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경호실장이라면 범인에 대한 응사가 主가 아니라, 피경호인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연대로 나와 피경호인의 머리를 숙이게 조치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스스로 연대 위에 몸을 숨긴 시기는 2탄이 연대에 맞은 후이거나, 3탄이 불발된 이후이기 때문에 범인이 제2탄을 정확히 사격했거나, 3탄이 불발되지 않았더라면 저격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98년 경호실의 사례연구서는 육영수 여사 피격은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범인이 대통령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하기 위하여 통로를 달리면서 총을 쏘는 상황인데도 통로 좌우측에 앉아 있던 경찰근무자들은 아무런 경호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총을 쏘는 범인을 밀어 넘어뜨리거나 정조준을 할 수 없도록 범인의 몸을 건드리기만 했어도 육 여사는 머리에 총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 설명한대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범인과 대적 자세를 취한 게 잘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문제는 경호원의 최우선 임무는 요인의 경호이지 위험인물의 제압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박종규는 맞대응으로 총격전을 벌일 것이 아니라 연대로 나와 박정희부터 보호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범인을 쏘려고 단상 앞으로 뛰쳐나왔고, 정작 그마저도 실패했다. 만약 범인이 2인 이상이었다면 이 과정에서 경호 공백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다른 경호원들의 대응 또한 최악이었다. 경호원들은 총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고 있다가 범인이 제압된 후에야 뒤늦게 박정희를 호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덕년 경호원은 첫 번째 총성이 들리자 바로 커튼을 제끼고 단상으로 달려오는 범인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으며 이 총알이 범인의 다리를 스쳤다고 주장했지만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이 체포된 후에도 경호원들의 막장 행위는 계속됐는데, 대통령에게 연설을 그대로 놔두게 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자신을 향한 총탄이 빗나가 신변이 몹시 위험한 상황에서도 예정대로 그대로 진행하는게 '담대한 대통령'처럼 보일진 몰라도, 경호 측면에서 보면 이건 정말로 말도 안되는 행위다. 암살자가 제압되었다 하더라도 행사장 안에 제 2, 3의 범인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은 매우 위험하다.

예를 들어 사라예보 사건의 경우 5명이나 암살에 투입되었다. 그중 처음 암살은 황태자의 차에 폭탄을 던젔다가 실패했고, 흔히 알려진 권총을 쏜 가브릴로는 원래는 황태자의 행선이 변경되어 암살을 포기했다가 우연히 황태자 일행과 만나면서 암살에 성공했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도 예비로 거사를 계획한 별도의 인물들이 있었다. 주요인물을 암살한다는게 매우 어려운 일인만큼, 암살하는 쪽에서도 세세하게 준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사건의 경우엔 그나마 문세광의 단독범행이었기에 저렇게 했어도 문제는 없었다만, 이는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다만 연설을 계속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고집 때문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청와대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대통령이 하겠다고 하는데 그걸 경호 측에서 제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사건 발생 이후에도 연설을 이어나간 것은 경호 측의 미스라기 보다는 대통령의 실책이다. 그는 한술 더 떠 아예 그 다음 예정되어있던 서울 지하철 준공식[12]에도 가려했다가 참모진의 만류 끝에 가까스로 결심을 꺾고 참석을 포기했다고 한다.

4. 범인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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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14일 재판을 받고 있는 문세광.

범인인 문세광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로, 사건 당시 만22세였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문세광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 인질극을 벌이고 폭발테러를 벌이자고 한청 중앙본부 부의장인 김군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허나 문세광이 보내는 주소를 착각하여, 한청본부로 보내려던 이 편지가 같은 건물을 쓰고 있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 보내졌고, 민단은 깜짝 놀라 주일 한국대사관에 이 편지를 보내게 된다. 문세광이 보낸 편지는 최종적으로 중앙정보부가 입수하였고, 이때부터 중정은 문세광을 예의주시하게 된다.[13]

1974년 5월 그는 북한의 대일 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萬景峰號)'에서 박정희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문세광은 전혀 공작원 훈련을 받지 않고 조총련과도 관계가 미약한 재일교포 운동권에 불과했다. 장거리에서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권총사격을 포함한 특수공작훈련은 커녕 가벼운 고문에도 쉽게 술술 불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었다.

문세광의 생애와 사건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문세광 문서 참조.

5. 의혹과 음모론

이런 사건들이 늘 그렇듯, 범인이 문세광이 아니라는 주장 등 여러가지 의혹과 음모론이 존재한다.

당시 사건 수사 본부 요원으로 현장 검증을 담당했던,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 이건우는 1989년 8월에 육영수를 죽인 게 문세광이 아니라는 내용의 주장과 함께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범인은 재일교포 출신의 문세광으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였고,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입국하였다. 문제는 이미 문세광은 김대중 납치 사건 때 반한 운동을 벌인 전적이 있어서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세광이 가짜 여권으로 한국에 건너오는데 오사카 총 영사관은 문세광에게 비자를 내주었고, 이는 모두 중앙정보부에 보고가 올라갔다.

문세광은 사건 당일 조선호텔에서 '서울 2바 1091' 번호판의 포드 20M[14]을 타고 나타났는데, 특별한 귀빈도 아닌 문세광에게 이런 고급 외제차를 제공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후일 이 고급 외제차는 호텔 측에서 불러준 호텔택시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자동차는 승차 입장 카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극장 정문을 그냥 통과했다.

또한 식장에 출입하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에게 경호관이 가슴에 달아주는 비표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문세광은 남쪽 정문을 통과해서 입장하였는데 남쪽 정문을 경비하던 인력은 대통령경호실 1인, 경찰관 4인, 행사 안내 요원 3인의 총 8명이었다. 그리고 금속 탐지기가 설치되었음에도 문세광이 어떻게 권총을 소지한 채 안으로 들어갔냐는 것도 의문.[15]

이날 식장에는 치안국(현 경찰청)을 비롯해 서울시내 중부, 성북, 성동, 용산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250명을 비롯해 국립극장 내외에 총 548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고 경호원, 중앙정보부 요원까지 더하면 600여명이 경비하고 있었지만,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관들 외에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한다.

8.15 기념행사장의 입장은 오전 9시 50분에 완료되었는데, 문세광은 행사 직전에 이미 착석했었으나 문세광이 비표를 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경호실 직원이 문세광에게 로비로 내보낸다. 문세광은 23분 후인 10시 13분 다시 입장했다. 이때 경호관이 검문하자 문세광은 자신을 일본대사관 직원이라 했고 그대로 통과, 중부서 정보과장 최정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때문에 아무리 일본대사관 직원이라 해도 박정희가 참석한 식장에 그렇게 쉽게, 그것도 입장이 다 끝난 상황에서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문세광을 내보냈던 경호실 직원은 문세광이 여전히 비표도 없이 다시 입장해서 착석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세광의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문세광이 앉은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있던 맨 뒷자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경호원을 제외한 모든 경호원은 빠져나오라는 무전이 계속 왔다고 한다.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 때도 총이 몇 발 발사 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재판부 사형언도 판결문 내용에 따르면 문세광은 총 5발을 쐈으며 1발은 오발로 자신의 대퇴부, 2발은 연설대 좌측, 3발은 불발, 4발은 육영수의 우측 두부에 명중, 5발은 국기에 맞췄다고 나와 있다. 반면 이건우는 문세광이 총 4발을 쐈다고 주장했다. 1발은 오발, 2발은 연단, 3발은 태극기, 4발은 천장에 맞췄다고. 하지만 이 5번째 총탄이 문세광이 말한 3번째 불발탄이면 맞아 떨어진다. 불발탄이므로 총성이 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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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을 당해 사망한 장봉화. 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많은 이들은 총성이 총 7번 울렸다는 증언을 했다. 1탄은 총을 꺼내다가 오발하여 문세광의 대퇴부에 명중, 2탄은 연단, 3탄은 불발, 4탄은 영부인의 오른쪽 머리, 5탄은 태극기,[16] 그리고 6탄은 합창단원으로 참석했던 장봉화 양이 맞았고, 7탄은 천장에 맞았고, 추가로 의문의 8탄이 있었다고... 여기서 3탄이 불발이라 총성이 들리지 않았기에 총 8개의 탄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다만 여기서 6탄(5번째 총성)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발사한 오발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박종규의 총은 총을 쏘기도 전에 놓쳤고 경호원이 문세광에게 연단 좌측에서 지향사격을 한 것이 문세광을 빗나가면서 장봉화에게 맞았다는 이야기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서 방영되기도 했다. 심지어 이때 자신이 실수했다는 당시 경호원 최모의 인터뷰까지 나갔다. 사실 의문은 천장을 도대체 누가 쐈느냐이다. 공식적으로는 경호원이 장내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발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무대 전면에서 총을 쏜 사람은 박종규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고, 음향 분석중에서도 문세광이 제압된 이후에 발사된 총성은 장봉화를 사망케 한 그 총성으로 이외에는 없었다. 이건우는 이 총탄이 문세광이 제압되는 과정에서 발포된 것으로 추정했다. 문제는 이러면 영부인을 사망케 한 총알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경호실은 이후 현장을 모조리 뒤졌지만, 불발탄을 포함해서 6개의 탄자밖에 찾아내지 못해서 2개의 탄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문세광이 총을 가지게 된 경위도 문제가 많다. 문세광의 총은 일본 경찰서에서 도난 당한 2자루의 S&W M36 권총과 미네베아 뉴 남부 M60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파출소 도난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이나 지문이 문세광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소지하지 않은 뉴 남부의 행방도 문제가 된다. 문세광은 오사카의 한 호수에 버렸다고 진술했는데, 이 총은 호수를 박박 긁었는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SBS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소리 분석[17]이나 각도분석 등으로 고의적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경호원이 쏜 총알에 육영수가 사망했다는 주장을 내세워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홈페이지에서 해당편을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326회(2005-02-12), 332회(2005-03-26) 해당 내용을 요약하면 상단과 거의 같다. 문세광의 뒤에 있던 경호원이 문세광을 제압하기 위해서 총을 쏘았는데, 문세광은 이미 제압되면서 쓰러졌고[18] 뒤에서 쏜 총알이 빗나가서 영부인에 총탄이 맞추게 되었다는 것.

일부에서는 한술 더 떠서, 박정희가 평소 육영수와 불화가 있어서 이를 기회로 죽게 했다는 음모론까지 나왔었다. 즉 경호원이 우발적으로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육영수를 맞췄다거나, 심지어 문세광이 박정희의 사주로 저격 미수를 일으키는 척 하며 처음부터 육영수를 노린 거고 이후 입막음으로 급하게 사형당했다는 것. 하지만 상식적으로, 국가지도자가 정치적 목적이나 사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눈앞에 위험하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실내에서 실탄이 발사되는 방식으로 국민이나 아내를 죽게하는 자작극이 아니더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북한의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도 아예 "박정희가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고 이야기를 꾸며냈다. 제 손으로 아내를 죽여서 전 국민을 북한이 일으킨 테러리즘의 공포에 놓이게 했다는 것. 해당 영화에서는 육영수가 총에 맞아 절명하자 박정희는 안전하게 식장을 걸어 나가다가 뒤를 슬쩍 돌아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북한의 선전물이 으레 그렇듯, 모두 거짓에 가까우니 그냥 웃어넘기자. 사족이지만, 북한은 36년 후 이것과 완벽히 동일한 스토리를 자신들이 일으킨 범죄를 덮기 위해 써먹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차량 문제의 경우 이미 이유가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당시 문세광이 타고 온 차량은 '호텔 택시'로, 호텔에 소속되어서 호텔 손님들을 목적지로 데려다 주는 차량이었다. 문세광은 당시 조선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국립극장에 가기 위해 차량 대절을 요구했으나, 조선 호텔에는 이 호텔 택시가 없었다. 그래서 호텔 측은 마침 조선호텔에 온 다른 호텔 택시를 타고 가게 한 것이다. 당시 호텔 택시는 일반 택시와는 달리 택시 캡과 같은 표식이 없고, 고급 호텔의 손님을 모시는 특성상 고가의 고급 차량으로 운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문세광의 연기가 합쳐져서 마치 문세광을 고급 차량을 타고 온 귀빈으로 오해하게 된 것.

재미있는 게, 당시 문세광이 타고 온 택시는 이후 영화 택시운전사로 유명해진 김사복의 택시였다는 것이다. 다만 김사복이 호텔 택시 운전기사 였기 때문에 해당 택시는 당시 해당 택시를 운전했던 황수동이 운전했다고 한다. 일부 극우에서는 이를 근거로 김사복이 문세광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물론 애초에 5.18과 북한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만큼 그냥 헛소리라고 보면 된다.

6. 사건 이후

대한뉴스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서거> 보도

문세광은 즉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중간 브리핑에 따르면 문세광은 체포된 지 불과 5시간 만(=15일 저녁)에 수사관의 강한 압박에 굴복, 자신이 암살범이며 본명은 문세광이라고 자백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담당검사는 김영수, 정치근 검사로 나온다. 당시 김기춘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이던 검사로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문세광을 심문했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조총련의 김호룡을 통해서 공작금을 받고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당시 일본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김호룡이 줬다는 공작금은 문세광의 모친이 준 돈으로 주장되었다.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한국 언론 최초로 김호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자신이 암살을 교사했음을 부정했다. 또한 당시 사건 조사를 맡았던 일본 경시청 경비국장 야마모토 시즈히코도 조총련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에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무엇보다도, 김호룡은 이 사건으로 한국 수사당국을 통한 어떤 조사조차 받은 적이 없다. 김호룡 연루 의혹에도 불구하고 한국측에서 조총련 인사를 조사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 당시 일본은 재일교포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한국의 반대를 묵살하고 만경봉호를 통해 북한으로 재일교포들을 북송해오던 시절이다. 이주하는 재일교포나 그들을 인질로 삼아 일본에 잔류한 그 가족의 재산을 노린 북한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일본이 북한과 조총련을 자극하지 않던 시절이다.

김일성의 경우에는 다른 여러 북한이 저지른 테러와 마찬가지로 늘 그렇듯이 이 사건과 자신과의 연계를 부정하였으며, 한 술 더 떠 김대중 지지 세력이 배후인 것처럼 1974년 10월 25일 북한주재 신임 소련대사 글레브 크리울린에게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여튼 그 결과 문세광에게는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고 사건 발생 4개월 뒤이자 대법원 확정판결 3일만에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울구치소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경호책임자인 박종규 경호실장과 국립극장 행사 관리 책임자인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차지철, 구자춘이 임명되었다. 양택식 시장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에 열성을 기울였지만 경질된 탓에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열렸으며 이로 인해 서울 지하철의 건설 계획 대부분이 뒤바뀌어 오늘에 이른다.[19]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경호 실패의 후임으로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경호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군·경 예하에 대통령경호실 지원부대들을 창설하고[20] 중앙정보부, 대통령비서실을 비롯한 권력기관들에 월권을 행사해 어그로를 끌었고[21], 정작 그러면서 10월 26일 당일에는 권총도 휴대하지 않았으며,[22] 총 한방을 맞고 정작 대통령을 두고 자신은 화장실에 도망가는 도저히 경호원으로 볼 수 없는 추태를 벌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홍성철 내무부 장관, 이봉성 법무부 장관 등의 각료들이 경질되고, 대신 김재규 건설부 장관 등이 새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치안국도 이 사건을 계기로 1974년 12월 24일 치안본부로 승격된다.[23]

한편 재일 한국인 출신 암살범이라는 것 때문에 이 시기 한일관계도 대단히 악화되었다. 사건 다음 날인 16일 노신영 당시 외무차관은 주한 일본 대사를 소환해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한 데 대한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김호룡 당시 조총련 오사카지부 정치부장 등 일본 내 공범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일본의 수사가 정부가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 내에서는 내정간섭을 받고 있다는 반한여론이 고조되었고 당연히 국내에는 반일 여론이 거세어져 주한일본대사관주변에 매일 같이 시위대의 항의집회가 벌어지고 자칫하면 흥분한 이들에게 점거당할 수 있어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데모 대의 대사관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렸다.[24] 이러한 때 한국 정부는 을미사변을 파헤쳐 공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일본과의 단교까지 고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박 대통령 저격' 배후 수사 한·일 첨예 대립 이러한 사태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1965년 한일수교 당시 외무장관을 맡았던 시나 애쓰사부로를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책임 인정과 한국 수사기관과 협조한다는 내용의 친필을 전달해 일단락되었다.[25]

에쓰사부로 부총재가 청와대를 방문해서 박정희와 대면했을 때 일본이 처음 보였던 무성의함에 노골적으로 불평하면서 질타했다.
금번의 일본 측 태도는 한국을 너무 무시한 것이다. 일본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미국 청년이 미국 정부를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의도하에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일본 관헌이 사용하던 무기로써 미국의 포드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요행히 대통령은 난을 면하고 포드 대통령 부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면 일본 정부는 미국에 대해 법적, 도의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일본에 있는 조선대학은 공산당 간부를 교육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파괴하고 전복하기 위한 간첩 양성소이다. 왜 조총련을 그렇게도 비호하고 두둔하는가?

사실 일본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 것은 불과 1년 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국에 망명 중이던 외국인 인사를 외국 정부 요원들이 멋대로 납치하면서 치안당국의 수사에는 전혀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발뺌한 사건이라, 일본 입장에선 주권 침해라며 굉장히 불쾌해 했었던 사건이다. 그 때문인지 이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당시 많은 일본 언론들은 "아돌프 히틀러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연상케 하는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논평을 했다.[26]

박정희는 이 때 일본과의 단교도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고,[27] 미국도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두 나라 사이를 중재해야 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온다고 보고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당시 조일환 같은 조폭들이 서울특별시로 상경하여 손가락을 끊는 단지 시위를 벌이며 "또 다시 국모를 죽인 일본에게 원수를 갚자!"라는 시위를 벌였다. <조폭으로 보는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반면 박정희는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이득을 보았다. 그때까지 대외적으로 인권문제와 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일본 정치인들의 초청을 받아 도쿄에 머물고 있었고, 그걸 1973년 8월 8일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무단으로 손님을 납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반발은 엄청났었다. 그런데 문세광일본 여권으로 입국하였으며, 암살에 사용된 총이 어쨌거나 일본 경찰이 도난 당한 총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책임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기존의 불리하기만 했던 상황에서 비슷한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미국 역시 인권 문제 언급에 대한 수위를 낮추었으며, 학생 운동까지 약화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이 사건 1주일 이후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하는 것으로 이런 상황을 안정화시켰지만, 얼마 뒤 조총련계 재일교포 고향방문단 입국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대일본관계도 관리에 들어갔다. 이런 점들이 자작설과 음모론이 탄생하였던 배경이다.

1974년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 집무에 들어갔다. 이날 김종필 국무총리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대통령을 면담해 영부인 서거 후의 국정방향에 보고하고 자리에서 金총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당시 국세청장을 맡고있던 오정근을 추천하였고, 박 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5.16 당시 출동한 해병여단의 병력을 이끈 대대장을 맡았으며 가장 먼저 한강다리를 넘은 해병대 병력의 지휘관이었다. 이 날에 당시 사위이자 칠레대사를 맡던 한병기는 경호실장으로 당시 차지철 공화당 의원을 추천했다. 이날 오후 4시 33분부터 5시 20분 사이 차지철 의원을 부르고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8월21일 오후 2-3시 사이 박종규 실장이 대통령에게 사임인사를 하고 신임 차지철 실장이 취임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당시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근엄하고 딱딱해보이는 박정희는 내적으로는 아내에게 내심 굉장히 의지해서 자신을 죽이려던 문세광의 테러로 부인이 사망한 충격 탓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져 이는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사던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유신 말기 박정희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것이며, 실제로 박정희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내놓고 글을 쓴 조갑제는 2인자가 지나치게 부상하는 것을 방지하고 심복들간에 상호견제를 하는 방법으로 정권을 지탱하던 박정희의 통치력이 약화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며 김일성이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려 이 주장에 동의를 내린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육영수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는 2/3년제 대학인 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이후 기념관은 배화여대의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한편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육영수의 장녀 박근혜(당시 22살)가 귀국해서 10.26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 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7. 기타

박정희 암살 사건인 10.26 사건과 달리 간혹 사람들의 입담에서 간간히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초, 중, 고, 대학교 한국사 교육 과정에서 그리 비중있게 교육되지 않고 있다. 1.21 사태실미도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같이 박정희 시절에 있었던 사건의 일부로만 가끔씩 거론되어지고 있다.

여고생인 장봉화는 이 사건으로 숨졌는데, 공식 발표는 암살범 제압 과정에서 발생한 경호원의 오발 사고이다. 2005년 인터뷰에서 유족들은 "성금을 일부 받았을 뿐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배상 받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MBC를 비롯한 국내의 방송사들은 일제히 육영수를 추모하는 ID 타이틀 카드와 뉴스 프로그램 등을 제작해 방송하였다.

박근혜는 해마다 8월 15일 육영수 추도식에 참석했으나 18대 대통령 취임한 후에는 불참했다. 같은 날 열리는 광복절 기념 행사가 더 중요도가 큰데다, 대통령 신분으로서 추도식에 참석하면 자칫 정치 논란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대통령 파면 이후에는 징역을 받고 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1986년작 KBS1 반공 미니시리즈 <멀고 먼 사람들>에서는 대사없는 썬글라스의 역전의 명사수인 백찬기가 열연했다.[28] 극 중에서 수십병의 맥주병을 일발필중으로 맞춘다! 한덕수 조총련 의장이 직접 지령을 내리고, 저격 성공후에 조총련 본부에서 만세 부르는 장면이 일품이다. 그러다 박정희가 안 죽었다는 걸 알자 놀란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그해 9월에는 KBS에서 반공 일일드라마 '조총련'을 방영하기도 했다. 이 사건만을 다룬 것은 아니고 조총련 전체의 실상을 소재로 한 드라마이다. 물론 사건의 배후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임을 주장하고, 조총련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제작자인 김연진 PD의 회고에 따르면 정부에서 제작 결정을 내리고 난 뒤 겨우 2일 만에 제작을 해서 방영을 했다. 주인공은 당시 영화 배우문오장[29]이었다. 박태원 감독의 동명의 영화도 나온 바 있는데, 문세광 역은 탤런트 장학수가 연기했다.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김상중이 문세광 역을 맡았다. 위에 소개한 월간 조선 기사에 충실한 고증을 했지만, 역시 오발설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김상중은 재미있게도 2008년부터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맡고 있다.

당일은 바로 국내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되는 날이었다. 허나 이 사건으로 인해 큰 축제여야 할 지하철 개통식은 조촐하게 치룰 수 밖에 없었고, 그 후 예정 되었던 지하철 2~5호선 기획이 전면 백지화 되었다. 지하철 기획과 광복절 기념행사를 담당한 양택식 당시 서울특별시장이 이 사건으로 의해 사퇴하면서 그의 후임인 구자춘 서울시장이 지하철 2~5호선 기획을 갈아 엎고 지금의 노선으로 수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박정희가 저격당한 날삽교천 방조제가 준공된 날이다.

지영선의 2001년 리메이크 곡 가슴앓이뮤직비디오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 5화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채널A 실화극장 그날 2화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사건 당시 총격으로 숨진 장봉화 양의 이야기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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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우 많은 사람들이 맨 위 사진에서 총을 정조준하고 객석 쪽을 겨냥하는 사람을 박종규 경호실장으로 착각하는데, 사실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아니라 박상범 당시 경호원이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때 총을 바닥에 떨어뜨린 상태였고, 2번째 사진에서 박상범 경호원 바로 옆에 행사기록부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종규 경호실장이다. 그리고 2번째 사진 우측 하단을 자세히 보면 박종규 경호실장이 떨어뜨린 권총도 보인다.[2] 이 사진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때 유일하게 사건을 생생하게 촬영한 사람이 바로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 사진부였던 임희순 단 1명이었다. 당시 사진기자들은 엄숙한 경축행사장에서 경호원들의 눈치도 있고 해서, 일단 행사가 시작되면 전경을 찍고 연설하는 대통령 사진 몇 장 찍은 뒤 철수하는 게 일상적이었지만, 유일하게 임희순 사진기자는 '어떤 현장이든 항상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서 끝까지 현장에 남아 끝내 엄청난 특종 사진을 얻었다. 당시 위의 사진을 비롯한 총격 후 찍힌 사진들은 거의 다 임희순 기자가 촬영했다.[3] 어떻게 권총을 숨겨 가지고 비행기를 타냐 싶겠지만, 당시는 공항, 항만 검문 검색이 거의 없고 엑스레이 검색대도 있는 공항이 거의 없었다. 권총은 커녕 손톱깎이에 달린 칼도 기내에 못 들고 들어가게 된 것은 9.11 테러 이후이다.[4] 3대 주한 일본 대사, 1972.3.8~1975.3.6 재임.[5] 이는 당시 TV 보급율이 열악했을뿐더러 난시청지역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뉴스는 대부분 라디오를 통해 접했으며 그마저도 음질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산간지역은 다음날 조간신문이 나와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6] 이 때의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면 박정희가 연설을 할 때 '퍽' 소리가 잡힌다. 하지만 다들 총소리인걸 몰랐는지 행사는 계속 진행되었다.[7] 이 때 행적을 보면 다리에 총맞은 사람 치고는 굉장히 잘 움직이는데, 아마도 대동맥 등 위험한 부위는 빗나갔고 흥분과 긴장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8] 경호원이 "가만히 계십시오."라 하자 박 대통령은 "잡았나?"라고 묻고, 경호원은 "잡았습니다."라고 답했다.[9] 후술하겠지만 장봉화양을 맞춘 건 문세광이 쏜 것이 아니라 경호원이 거기에 대응사격을 하다가 발생한 유탄이라고 추정된다. 이 외에도 천장에도 총알 한 방이 박혔으며, 이 역시 누군가가 장 내의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쏜 것이라 추정된다고 한다.[10] 훗날 독립운동가 박해근의 아내 탁금선으로 밝혀졌다.[11]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수많은 시민들과 경호원들이 헌혈을 자처했고, 심지어 외국인도 참여했다고.[12] 이 날은 공교롭게도 서울 지하철 1호선, 즉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되는 날이었다.[13]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김군부는 이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1년후 민단계 언론인 통일일보에서 이 편지가 공개되었다.[14] 미국 포드가 아닌 유럽 포드의 차량으로, 유럽에서는 Taunus P7.2라는 모델로 당시 팔렸다. 당시 이 차는 현대자동차가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면허 조립 생산한 적이 있다. 후계 기종은 1978년에 출시 된 그라나다. 이후 1986년 7월에 그랜저로 이어진다.[15] 당시 중부경찰서 송영기 경감의 말에 따르면 8•15저격 사건 전날 청와대 경호실 장OO계장이 중부경찰서로 문세광을 데려와 김원모 중부경찰서장과 최종환 정보과장에게 소개하고 문세광을 검문하지 알고 입장하도록 부탁했다고 함.[16] 여기까지는 문세광의 주장과 일치한다.[17] 하지만 이 방송에서 분석을 담당한 숭실대학교 배명진 교수는 후일 능력 및 기술에 대해 신빙성 논란이 크게 일어난 사람이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배명진은 박근혜를 옹호할 정도로 우파 성향에 가까운 사람이라 정치적 성향 때문에 동조할 이유는 없으나, 자시홍보 등 다른 이유로 그런 듯 하다.[18] 이것도 경호원도 경찰도 아닌 당시 참석했던 일반 서무서 직원이 제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적어도 3, 4발을 쏜 뒤에.[19] 원래 서울 지하철 건설 계획김현옥 시장 시절에 만들어져 양택식 시장 시절에 본격 추진될 예정이었으나 1호선만 이 계획대로 됐다. 이후 취임한 구자춘 시장이 지하철 건설 계획을 죄다 갈아엎고 새로 짰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가 서울 지하철 2호선 노선 선정이다. 포병장교 출신이던 구 시장은 서울시 지도를 훑어보며 30분 만에 사인펜으로 줄을 슥슥 그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노선이 됐다는 것.[20] 이 부대들은 아직도 존재한다.[21] 10.26 사건의 배경에는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갈등이 상당부분 차지한다.[22] 단, 박정희가 명령한 것이기는 하다.[23] 1991년에 치안본부는 1991년 대통령령에 의거하여 경찰법이 제정됨에 따라 대한민국 경찰청으로 변경되었다.[24] 기사.[25] 기사.[26] 참고로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나치 독일의 자작극이 아니라는 게 정설. 그냥 우연한 타이밍에 터지고, 나치당은 이것을 이용한 것이다는 것이다.[27] 박정희가 동경을 폭격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28] 참고로 해당 배우는 김재규와 외모가 상당히 닮아 한동안 김재규 전문 배우였다.[29] 훗날 목사가 된다. 1999년 9월 9일, 뇌졸중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