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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 비판,(지역주민에 대한 폭력 · 빈주 사건), | ||
대중매체 | 대중매체,(야인시대에서), | ||
관련 단체 | 육군무관학교 · 북로군정서 | ||
기타 | 청산리 전투 · 자유시 참변 · 김좌진 장군묘 ·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 김좌진함 |
1. 개요
빈주 사건은 중화민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빈현(賓縣) 일대에서 김좌진 진영인 신민부 군정파가 농민들의 회의현장을 습격하여 농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2. 과정
1925년 3월 10일 영안현 영고탑에서 대한독립군단 대표 김좌진, 남성극(南星極), 최호(崔灝), 박두희(朴斗熙), 유현(劉賢)등과 재건 대한군정서 대표 김혁(金爀) 등이 북만주의 지역대표들과 함께 모였다. 이들은 수일간 협의하여 3월 15일에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로 신민부를 창설했다. 신민부 창설을 위한 이 회합은 ‘부여족통일회의’라고 한다.[1]1927년 2월 일본 제국은 석두하자의 신민부 본부를 습격해서 김혁과 유정근 등을 체포했다. 이후 이에 대한 수습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적극적 무장투쟁을 주장한 군정파와 민중본위의 자치를 주장한 민정파로 분열되었다. 군정파는 김좌진이 위원장이었다. 김좌진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을 역임했다.[2] 군정파는 1927년 5월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부를 편성하여 영안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3]
김좌진 측이 우선했던 건 무장투쟁이었다. 무장투쟁을 위해선 재만동포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예로 무기 구입·독립군 양성·무장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얻기 위해선 재만동포들에게 돈을 걷어야 했다.[4] 사건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3. 사건
당시 만주에서 신민부가 관할하던 지역은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이기도 하였지만 재만동포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무장투쟁을 하려면 당연히 재만동포에 대한 배려는 기본으로 갖춰야 했다.[5]그러나 당시 군정파는 그게 부족했는데 그 예가 빈주현이었다. 이 지역의 재만동포들은 대부분이 중국인의 소작인이라 빈곤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군정파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않고 모금을 강제하였다.[6]
결국 빈주현 주민들은 참지 못하고 신민부 탈퇴를 결의했으며 이를 신민부에게 통보했다. 11월 18일엔 재만동포 40명이 "군정파 보안대의 무력적인 행동에 대해 자위책"[7]이나 "일제의 무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자위책"[8]에 대한 회의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신민부 군정파는 그 현장을 습격해서 농민 5~6명 에게 총을 쏘아 살상했다 [9]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다.
북만 빈주현에서는 지난달 그믐날 저녁 여섯시경에 신민부원이 그곳 주민 오륙 명을 살상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빈주현은 본래 신민부 구역으로 오래전부터 운동비로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갔는데 근자에 이르러 주민 일동은 주민 대회를 열고 신민부로부터 탈퇴하기를 결의하고 이 소식을 신민부에게 통지하였더니 그 말을 들은 신민부원들은 무장대 오륙 명을 보내어 주민과 충돌되어 그와 같은 참극이 생긴 것이라는 바 유연동, 김봉진, 황혁 세 사람은 즉사하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 세 사람은 중상하여 목하 생명이 위태하며 그 밖에도 경상자가 많은 모양
- 동아일보 1928. 11.18
- 동아일보 1928. 11.18
4. 파장
당시 신민부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으로 인해 불만이 폭발했다.1928년 11월 하순 영안현에선 민정파를 지지하는 신민부 관할 6개현 16지역이 화합하여 북만주민대회를 열었다. 군정파의 행위를 성토하는 것이었다. 이 대회에선 군정파 책임자인 김좌진에게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내렸다.[10]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물론 신민부 민정파인 최호계열에서도 김좌진을 강하게 비판했다. 최호의 민정계열에서는 김좌진계열을 향해 “민중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 賣族的 走狗(매족적 주구), 혁명적 사기한의 장본인 김좌진, 鄭信(정신) 등을 매장하라”고 구호를 내걸었다.[11]
이후 김좌진 장군은 사람들에게 마왕(魔王), 폭군 같은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12]
이 사건이 영향을 끼친 것인지 결국 신민부는 해체되었다.
거기다 김좌진은 이 사건 2년 후에 암살당했는데 일본 내무 보고서에는 빈주 사건에 대한 보복이 김좌진 암살의 원인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김좌진이 빈주 사건으로 민심을 잃은 것을 보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결국 김좌진은 빈주 사건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자기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여담
독립운동가의 흑역사 중에서 치하포 사건이 별 거 아닐 정도로 더한 사건이다.[13] 영남 지방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영남에 임시정부와 독립단체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천석꾼 지주가 있었는데 어느 날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지주를 일본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지주의 소작농이었다. 당시 천석꾼이 독립자금을 더 마련하고자 소작료를 높였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소작농 중 하나가 지주가 독립자금을 대 주는 것을 알고 소작료를 면하기 위해 일본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 소작농의 행위는 민족반역죄지만 당시 생계가 궁핍하였던 소작농으로서는 생존의 문제였다 보니 생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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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현주(李賢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47권 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217쪽.[2] 박환, 신민부의 이념, 한민족독립운동사 4 4권 독립전쟁.[3] 이현주(李賢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47권 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233쪽.[4] 박환, 신민부의 활동, 한민족독립운동사 4 4권 독립전쟁.[5] 박영석, 白冶 金佐鎭將軍硏究, 國史館論叢 第51輯, 198쪽.[6] 박영석, 白冶 金佐鎭將軍硏究, 國史館論叢 第51輯, 199쪽.[7] 이현주(李賢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47권 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233쪽.[8] 채영국(蔡永國),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50권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282쪽.[9] 박영석, 白冶 金佐鎭將軍硏究, 國史館論叢 第51輯, 199; 이현주(李賢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47권 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233쪽; 채영국(蔡永國),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50권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282쪽; 박환, 신민부의 활동 , 한민족독립운동사 4 4권 독립전쟁.[10] 채영국(蔡永國),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50권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283쪽[11] 박영석, 白冶 金佐鎭將軍硏究, 國史館論叢 第51輯, 199.[12] 박환, 김좌진 평전, 2010, 7장 부분 참고. 2016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개정판에선 8장으로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13] 치하포 사건은 외국인인 일본인을 죽인 것이며 그 과정에서 다른 한국인의 피해는 없었다. 거기다 당시 을미사변 때문에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저런 사건이 일어나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이때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것도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빈주 사건은 지원금을 주지 않고 신민부를 탈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그것도 신민부 본인들의 잘못 때문에 나간 것이다.) 같은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했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