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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陸軍武官學校. 대한제국에서 신식 군대의 장교를 교육하던 양성 기관. 사관학교이다. 대한제국 육군의 장교를 공급했다.[1] 임시 정부 같은 경우에도 육군무관학교를 두긴 했다.통제영학당을 대한제국의 해군사관학교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통제영학당은 근대적인 사관 양성 학교이긴 했지만 1893년에 생겨 1894년에 사라졌으므로 대한제국 해군의 사관학교는 아니었다. 즉, 대한제국에 해군사관학교는 없었다.[2]
2. 신식군대의 장교 육성 역사
2.1. 별기군(18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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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교련병대#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교련병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881년 창설된 별기군의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3]는 장교 양성을 위해 사관 생도대를 설치할 것을 조선 왕실에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881년 9월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사관생도를 모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2월 즈음에는 140명의 사관생도가 교육 중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일어난 구식군의 저항인 임오군란으로 사관생도대는 해체된다.
| 청일전쟁(1894) 전후 조선군 모습, 출처 : 르 몽드 일뤼스트레 1894년 |
2.2. 연무공원(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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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연무공원#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연무공원#|]]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883년 조미 수호 조약에 의거 조선 정부는 미국에 군사 교관 파견을 요청했지만 당시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1886년 톈진 조약으로 양 군이 물러가자 1888년 미국은 윌리엄 다이(William McEntyre Dye) 준장[4] 등 4인의 퇴역 장교로 구성된 군사 교관단을 파견하였다. 다만 이들 중에 다이 준장만이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커민즈 대령과 닌스테드 대령, 리 소령[5]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 윌리엄 다이 준장. 이집트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DC에서 경찰청장으로 일했는데 1888년 셰리던 장군이 그를 고종에게 교관으로 추천했다. |
조선 정부에서는 교관들이 입국하자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치하여 다시 사관생도를 모집하고 훈련을 시작하였는데, 문제는 근대식 편제 및 장교 계급 체계에 정부 각료와 조선군 내에서 일본식이라며 도입에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근대식 군대 체계가 갑신정변을 이끈 급진개화파들이 일본을 통해 주도적으로 들여온 제도다 보니 갑신정변의 여파로 조선에서 도입을 꺼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연무 공원은 1894년에 일본군이 청일전쟁 중에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폐지된다. 다만 다이는 1899년까지 고종의 측근에서 군사 업무를 보좌했고 그 해에 미국으로 돌아가 죽었다.
1887년 12월 25일 승정원일기에 연무공원의 개설 사실이 있다. 이듬해인 1888년에 열린다.
○ 전교하기를,
“군사와 관련된 대비는 나라의 중요한 임무로써 또한 형식적으로 하거나 천천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반드시 먼저 무술을 익숙히 한 뒤에야 대오를 정비하고 군대의 위용을 엄하게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추천한 사람들이 이제 일과(日課)를 정하여 훈련하게 되었으니, 연습 장소를 ‘연무공원(鍊武公院)’이라 부르고, 제반 실행해야 할 규정들은 내무부에서 토의 확정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군사와 관련된 대비는 나라의 중요한 임무로써 또한 형식적으로 하거나 천천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반드시 먼저 무술을 익숙히 한 뒤에야 대오를 정비하고 군대의 위용을 엄하게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추천한 사람들이 이제 일과(日課)를 정하여 훈련하게 되었으니, 연습 장소를 ‘연무공원(鍊武公院)’이라 부르고, 제반 실행해야 할 규정들은 내무부에서 토의 확정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1889년 2월 1일 승정원일기에 연무공원의 학도 기록이 남아 있다.
○ 또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의 말로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연무공원 학도(鍊武公院學徒)인 훈련원 첨정 윤경근(尹景根), 선전관 백명기(白命基)ㆍ이병무(李秉武), 출신 한장렬(韓章烈)ㆍ권승필(權承弼)ㆍ박제범(朴齊範)ㆍ송재현(宋在顯)ㆍ김진우(金鎭宇)ㆍ김재영(金在溁), 사용 신덕성(愼德晟), 부사용 김동진(金東振), 한량 이범래(李範來)ㆍ이문환(李文桓)을 모두 본영의 초관(哨官)으로 차하(差下)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삼가 하교대로 연무공원 학도(鍊武公院學徒)인 훈련원 첨정 윤경근(尹景根), 선전관 백명기(白命基)ㆍ이병무(李秉武), 출신 한장렬(韓章烈)ㆍ권승필(權承弼)ㆍ박제범(朴齊範)ㆍ송재현(宋在顯)ㆍ김진우(金鎭宇)ㆍ김재영(金在溁), 사용 신덕성(愼德晟), 부사용 김동진(金東振), 한량 이범래(李範來)ㆍ이문환(李文桓)을 모두 본영의 초관(哨官)으로 차하(差下)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뒷날 친일파로 유명해지는 제26대 군부대신 이병무도 연무공원의 학도였다.
1890년 윤2월 26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윌리엄 다이에게 2품 병조참판, 닌스테드에겐 3품 병조참의 직함을 내렸다.
○ 민종식에게 전교하기를,
“연무공원(鍊武公院) 및 통위영, 장위영의 조련이 이미 효과를 거두고 있으니, 교사(敎師)의 여러 해 동안의 노고가 가상하다. 다이[茶伊;Dye, William M.]에게는 특별히 2품의 병조 참판 직함을 더해 주고, 닌스테드[仁是德;Neinstead, F.H.]에게는 특별히 3품의 병조 참의 직함을 더해 주어 조정에서 우대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연무공원(鍊武公院) 및 통위영, 장위영의 조련이 이미 효과를 거두고 있으니, 교사(敎師)의 여러 해 동안의 노고가 가상하다. 다이[茶伊;Dye, William M.]에게는 특별히 2품의 병조 참판 직함을 더해 주고, 닌스테드[仁是德;Neinstead, F.H.]에게는 특별히 3품의 병조 참의 직함을 더해 주어 조정에서 우대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연무공원의 교관들은 통제영학당과 비슷한 업무 과다에 시달렸다. 장교 양성 뿐만 아니라 사병 교육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무공원 졸업자는 다시 무과를 치러야 무관이 될 수 있었다. 무과의 커트라인이 상대적으로 낮긴 했지만 부담이 있었다. [6]
2.3. 조선군 훈련대 사관양성소(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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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조선군 훈련대#s-3|3]]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조선군 훈련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연무 공원이 해체되면서 남은 것은 훈련대의 사관 양성소 뿐이었다. 청일 전쟁 중에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기 위해 한성에 주둔하던 친군영과 교전을 벌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 후 김홍집 내각을 세워 갑오개혁을 실시하고 일본군 주도하에 새로 군을 편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훈련대이다.
| 훈련대는 일본군 중령 쿠스노세 유키히코(楠瀬 幸彦, 1858년 - 1927년)[7]를 교관으로 두었다. 일본식 교육 제도로 훈련대는 기존의 3군영에서 인원을 징발하여 훈련을 시켰는데 1895년 말까지 6개 대대 7,800명 규모의 상비군을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못 가고 을미사변으로 폐지된다. |
○ 군부 주사(軍部主事) 4등에 채장묵(蔡章默), 군무국 마정과원(軍務局馬政課員)에 윤철규(尹喆圭), 겸임 훈련대사관양성소장(兼任訓鍊隊士官養成所長) 2등에 유돈수(柳敦秀), 부관(副官) 5등에 윤철규(尹喆圭)를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1895-05-20
승정원일기 1895-05-20
2.4. 무관학교(1896년)
| |
| 1896년 무관학교 졸업 기념 사진[8][9][10] |
이 무관학교는 조선군 훈련대의 무관양성소를 대체하는 친일내각이 만들었기 때문에 아래의 육군무관학교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교관들이 일본인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잠시 운영이 중단되었다가 4월에 입학생 100명을 받아들이고 교두는 참령 이병무가 맡았다. 하지만 곧 이병무는 친위대 제4대대와 제5대대 교련을 맡는다.
1897년 5월 기준 임관자는 19명인데 이름이 전하는 인원은 5명으로 박승환, 민중식(閔仲植), 사재흡(舍在洽), 주시준(周時駿), 황태수(黃台秀)이다. 나머지 14명은 1897년 3월에 참위로 임용된 3품 김학수(金學秀)ㆍ최봉규(崔鳳奎), 9품 김병도(金炳道)ㆍ김기건(金基建)ㆍ박규환(朴奎煥)ㆍ김성근(金成根)ㆍ최재익(崔在翊)ㆍ심상윤(沈相潤)ㆍ박흥엽(朴興燁)ㆍ목영석(睦永錫)ㆍ유기원(柳冀元)ㆍ이한갑(李漢甲)ㆍ문희선(文熙善)ㆍ이동휘(李東暉)로 추정된다. # 이동휘의 회고에는 한성무관학교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위치는 경운궁이었다. 일본사관으로 처음에 훈련했으나 이후에 러시아교관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896년 10월 푸챠타 대령과 러시아교관단이 도착했다.
- 무관학교 졸업자 19명의 명단
| 순번 | 이름 | 한자 |
| 1 | 김기건 | 金基建 |
| 2 | 김병도 | 金炳道 |
| 3 | 김성근 | 金成根 |
| 4 | 김학수 | 金學秀 |
| 5 | 목영석 | 睦永錫 |
| 6 | 문희선 | 文熙善 |
| 7 | 민중식 | 閔仲植 |
| 8 | 박규환 | 朴奎煥 |
| 9 | 박승환 | 朴昇煥 |
| 10 | 박흥엽 | 朴興燁 |
| 11 | 사재흡 | 舍在洽 |
| 12 | 심상윤 | 沈相潤 |
| 13 | 유기원 | 柳冀元 |
| 14 | 이동휘 | 李東暉 |
| 15 | 이한갑 | 李漢甲 |
| 16 | 주시준 | 周時駿 |
| 17 | 최봉규 | 崔鳳奎 |
| 18 | 최재익 | 崔在翊 |
| 19 | 황태수 | 黃台秀 |
2.5. 육군무관학교(1898년)
1898년에 정비하여 육군무관학교란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교직원 숫자는 교장 1인에 교관 4명, 조교 10명, 번역관 및 주사 등으로 총 20명 수준으로 사관학교라기엔 다소 작은 규모였다. 1898년 6월에 1기 200명을 모집했는데 1,700명이 지원하였다. 입교일은 다들 며칠씩 차이가 났는데 1기의 임관일이 1900년 1월 19일로 정해진 걸 볼 때 1년 6개월 정도의 교육 기간으로 현재의 3사관학교보다 짧았다.1899년 11월엔 다시 법령이 바뀌어 교직원이 39명으로 늘어났으며 응시 연령도 낮아졌다. 그리고 현재의 생도대에 준하는 학도대(學徒隊)를 설치하였다. 1900년 1월 19일에 장연창 등 128명의 무관 학교 1기가 졸업 시험을 통과하여 참위로 임관하였다.
1900년 9월에는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교직원을 70명으로 늘렸으며 학도대 밑에 중대 몇 개를 추가해 인원을 늘릴 것을 시사했다. 오늘날의 교육을 맡은 교수부와 훈육을 맡은 생도대처럼 무관 학교의 교육 체계를 교관단과 학도대로 이원화하였다. 교장도 초기에는 영관급이 맡았으나 이 즈음에 가서는 참장[11]까지 상승한다. 다만 국운이 흔들리는 탓인지 무관학교를 이탈하는 인원도 자주 나와 1900년 9월엔 학도 집단 이탈로 학교장 대리인 백성기 참장, 학도대장 이희두 참령, 학도대 중대장 신우균, 민영재, 조의범 정위, 당직 사관 김성계 참위 등이 직위 해제되었다.
| |
| 훈련 중인 대한제국군[12] |
1909년 폐지될 때까지 28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기록에 따라서는 500명을 배출했다는 곳도 있다.[13] 이 중 14명은 한일합방 당시에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
1902년 1월 11일과 7월 6일에 대한제국 육군에선 각각 92명[14]과 207명[15]의 신규 참위를 임용하였다. 이들을 합치면 299명인데, 이때 임용되었던 장교 노덕세 등의 기록에는 이 임용을 육군무관학교 졸업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해당 임관 사례에 대해서 좀 더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황태연의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에 따르면 1902년의 이 임관자들은 2회 입학자 중에 1년 3개월 속성과(94명)와 제2과 속성과(209명)였다고 한다. 이들은 1902년에 임관했고 1903년 6월에 180명만이 졸업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나머지 인원은 1904년 3월에 45명이 임관했다.
3. 교육 과정
대한제국군 밑에는 교육 기관으로 육군무관학교, 육군유년학교, 육군연성학교 등이 있었다.[16] 무관학교는 양성 교육을 담당했고 유년학교는 일종의 JROTC 같은 예비 학교였으며 연성학교는 장교나 부사관의 보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일보 기사1895년 1월 훈련대가 폐지되면서 장교 양성 기능은 1896년 11월 11일에 육군무관학교로 넘어갔다. 학도는 18세에서 27세 사이의 청년을 천거(추천)로 선발했다. 교육부가 1904년 2월에 세워지자 교육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에 교육부가 폐지되자 군부에서 지휘 감독했다. 교육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1904년에 육군유년학교가 생기면서 유년학교를 거쳐 무관학교에 들어온 경우는 6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초기에는 한국어로 된 교재가 없어 외국어로 공부했으며 전술학과 화기학, 학술학[17]을 가르쳤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는 무관학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외국어 교육이 전체교육 시간의 42%에 달했고, 전술학은 그 절반에 못 미치는 18%를 차지했다. 근대적 군사학 교재들이 거의 외국어로 쓰여 있었고,당시 근대화에 힘쓰던 조선정부의 개혁 과제 시행을 위해 정치적으로 중요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의 확보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관학교에서는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의 과목을 중시했다. 원어민 교사를 구해서 생도를 가르쳤으며 어학 능력이 우수한 생도 40명에게는 특별히 하루 1시간 추가 수업의 기회를 주었다.
출처: 국경의 동요―20세기 초 미국의 동양인 이민자 박룡학 연구
출처: 국경의 동요―20세기 초 미국의 동양인 이민자 박룡학 연구
4. 사용 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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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졸업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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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육군무관학교/졸업자 명단#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육군무관학교/졸업자 명단#|]]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대한민국 육군과의 관계
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공식적으로 무관학교를 자교의 전신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다. 식민 통치로 단절된 기간으로 인해 육군무관학교 육사의 형성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는 육군사관학교 30년사와 50년사에 공통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내용이다.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은 창군 과정이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단순히 육군사관학교와의 연계 여부만으로 육군무관학교와 대한민국 육군 간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건 지나치게 편협한 관점이다.
육군사관학교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달리, 30년은 그리 긴 세월까진 아니다. 대한제국 당시 무관생도였던 인원들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군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18]
일단 대한민국 육군의 건군을 주도했던 이응준과 김석원, 지청천은 셋 다 원래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 당시 대한제국의 무관생도들은 전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되었고, 임관 자체는 일본군 장교로서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 무관생도들은 홍사익을 필두로 한 일본군 잔류파와 김경천을 필두로 한 탈영파로 나뉘게 되는데, 탈영파는 당장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했고 잔류파는 기왕 입대한 거 (일본군에서) 좀 더 복무하며 실전경험을 쌓고 난 뒤 독립운동에 합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양쪽 인원은 별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고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약속은 지켜지기도 전에 해방을 맞으며 영영 이뤄지지 못하게 되고 만다. 홍사익은 전범으로서 처형당했고, 김경천 역시 소련 땅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만 비록 독립군과 친일파라는 다른 길을 걷긴 했지만 대한제국 무관생도 출신의 조선인 장교들은 같은 민족이자 동문이라는 동질감이 있었고, (당시 온갖 파벌이 즐비하던 건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이는 돈독했으며 심지어 전우애도 매우 강했다.[19]
특히 이 일본군 장교들과 광복군 장교들을 연결시켜 준 인물이 바로 유동열인데, 이쪽은 비록 육군무관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엄연한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역시 무관생도 출신인 이응준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고 그에게 광복군 인사들을 연결시켜 주며 (일본군과 광복군 간의 마찰 없이) 건군이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탓에 대한민국 육군이 해산된 대한제국군을 사실상 다시 부흥시킨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정상적인 나라였다면 대한제국군 장교로 활약했을 인재들이 나라 자체가 망해버리며 뿔뿔히 흩어졌다가 광복 이후 다시 한 데 모여 대한민국 육군 창군의 주역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7. 동문
- 권영한
- 김석원
- 김인욱
- 김정식
- 김준원
- 김좌진
- 남태현
- 류관희
- 민덕호
- 박승훈
- 박창하
- 백홍석
- 서정필
- 신규식
- 신태영
- 안종인
- 염창섭
- 원용국
- 유승렬
- 윤상필
- 이강우
- 이동휘
- 이은우
- 이응준
- 이정혁
- 이호영
- 이희겸
- 장기형
- 장성환
- 장석륜
- 장유근
- 지청천
- 정훈[20]
- 조철호
- 지청천
- 홍사익
8. 여담
역사비평 통권 136호 2021년 가을호에 실린 <국경의 동요 ―20세기 초 미국의 동양인 이민자 박룡학 연구>에 따르면, 베이징 태생의 중국인인 박룡학은 육군무관학교에 3년간 다녔다고 한다.[21] 박룡학의 부모는 북경의 상인으로 1892년에 가족과 조선으로 넘어왔다.
저자인 현명호는 박룡학이 입시 경쟁이 치열했던 1898년 입학(1회)은 아니고, 1900년(2회) 입학자로 추정한다. 추천서를 받아야 함에도 200명 모집에 1700명이 몰렸던 1회와 달리, 2회 모집 무렵에는 예산 부족으로 일부 학생에게 사비로 다니게 하는 등 좀 더 입학이 수월했기 때문이다.[22] 그런 불안한 배경 탓에 2회 생도들의 경우 1902년 1월에 대거 이탈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박룡학도 이 시기에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박룡학은 대한제국 여권을 갖고 미국을 방문했으며, 자신의 이름 표기도 한국 한자음에 기반해 적었다.[23] 미국측 자료에 따르면 박룡학은 중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으며 조사자들에게 한국인처럼 보였단 점에서 오늘날의 구화교[24]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1] 당시 무관학교만으로는 초급 장교 수요가 감당이 되지 않아, 특별임관도 자주 있었다. 승정원일기의 임용 내용을 찾아보면 무관학교 출신이 아닌 장교들의 임용이 자주 있다.[2] 1900년 3월 22일 관보에 실린 원수부 관제 개정안에 따르면 해군사관학교의 설립 자체 목표는 있었으나 1904년 이후 무산되었다.[3] 고종 실록에도 등장한다. 高宗 18卷, 18年(1881 辛巳 / 청 광서(光緖) 7年) 6月 20日(庚戌) 2번째 기사 일본인 호리모도 레이조가 우리 군사들의 교사가 된 것을 일본 외무성에 통지할 것을 윤허하다 統理機務衙門啓: “日本敎師堀本禮造, 向因公使所懇, 方留敎場, 鍊習兵士, 而此合有往復於該國外務省。 請撰出書契, 下送萊館。” 允之。[4] 1831년 - 1899. 남북 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했고 미군을 전역한 뒤에 이집트군에서 대령을 지내기도 했다.[5] 주일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인물이었다.[6] 이때의 전훈 때문인지 뒤의 대한제국은 러시아식으로 다시 군대를 조련할 때 무관학교를 세워 사병들을 교육할 장교단을 초반에 양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병력을 불려나갔다. 무인에 대한 기피도 군인에 대한 지속적인 급여 인상 등으로 돌파하려고 하였다. 다만 이 기간이 짧아서 고급 장교의 양성까지 이어지진 못했고 그탓에 군대 자체가 대대 이하의 작전수행능력만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7] 을미사변 연루자. 뒷날 초대 가라후토청 장관, 일본군 중장까지 지냈다. 육군대신, 즉 육군 장관을 맡기도 했다.[8] 1896년 7월 12일 촬영. 이 당시는 아직 칭제하기 전이었다.[9] 출처: 독립기념관[10] 사진에 약 140명 이상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졸업자가 5명임을 감안하면 졸업 사진이 아니 입학자 사진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11] 대한 제국군은 지금의 한국군처럼 장성급이 대 - 중 - 소 - 준 4단계가 아니라 정 - 부 - 참 3단계였다. 준장이 존재하지 않았다.[12] 1904년 서울 훈련원에서 유럽 교관에 의해 훈련받고 있는 한국군대라고 한다. 유럽인 교관은 프랑스 하얀 군모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프랑스 교관임을 알 수 있다. 훈련원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27에 있다.[13] 러일전쟁 후 일본의 간섭이 반영되기 전까지 졸업한 인원이 대략 280명대이다. 이후의 졸업자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운데, 이후 졸업자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는 282명이라 보고, 이후 졸업자를 포함한 곳에선 500명대라 보는 것으로 보인다. 1904년 1월 졸업방 이후에 폐교까지 5년이 넘게 학교가 운영되는데 이 시점의 졸업자 명단은 현재 찾기 어렵다.[14] 백명기(白命基), 심상희(沈相煕), 김사석(金思錫), 최진하(崔鎭夏), 남준희(南俊煕), 김동원(金東元), 남기석(南基奭), 장용석(張容奭), 오규영(吳奎泳), 최승학(崔承鶴), 이봉호(李鳳鎬), 한창리(韓昌履), 김종완(金鍾完), 이명규(李明奎), 백충기(白忠基), 권용중(權用重), 강필호(康弼祜), 홍승원(洪承遠), 김우현(金禹鉉), 최진영(崔鎭泳), 송우영(宋禹榮), 박희원(朴希元), 김형두(金炯斗), 김채욱(金采煜), 서병덕(徐丙德), 장규형(張圭炯), 김계환(金桂煥), 이응하(李應夏), 신순희(申舜煕), 김종호(金鍾浩), 최영석(崔榮奭), 김동은(金東殷), 조희용(趙煕庸), 이은로(李殷輅), 서병억(徐丙億), 오천묵(吳天默), 이범서(李範緖), 박태영(朴泰永), 조인순(趙藺淳), 유치남(兪致南), 심상렬(沈相烈), 김인배(金仁培), 이병하(李秉河), 이주태(李柱泰), 오승근(吳承根), 이호진(李浩鎭), 홍순정(洪淳正), 한인복(韓仁復), 김낙규(金洛圭), 최기환(崔琦煥), 조동성(趙東星), 정희찬(鄭煕燦), 박승준(朴勝俊), 이필상(李弼相), 김정현(金晶鉉), 정달진(丁達鎭), 윤원성(尹元成), 김정진(金貞鎭), 김흥종(金興鍾), 피병건(皮秉健), 김기승(金基昇), 이우승(李羽承), 태원엽(太源燁), 목우석(睦祐錫), 김광순(金光淳), 오희영(吳僖泳), 김중희(金重煕), 이세필(李世弼), 홍우록(洪祐祿), 조동겸(趙東謙), 백세기(白世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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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22] 오늘날에야 사관학교가 학비를 전액 지원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재정이 불안정했던 시대엔 자비로 다니거나 관비를 일부만 보조 받는 경우가 초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있었다.[23] 중국은 근대적인 국적법을 1909년부터 실시했고, 그런 탓에 홍콩은 한동안 도착지주의를 택해서 그냥 국경을 넘어가면 홍콩 사람이 되던 시절도 있었다. 한국의 경우 1890년대부터 호구조사를 새로 실시하며 광무호적이 작성되었지만, 외국인의 호구조사는 통감부 시대에 이르러 이뤄졌기 때문에, 한국어가 유창한 박룡학은 대한제국 여권을 얻는 데 큰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저자는 추정한다.[24]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 한국에 들어온 중화민국 출신 화교들을 말한다. 한중수교 이전에는 F-2 거주자격으로 살던 이들이 화교를 뜻했지만, 요즘은 1992년 이후 들어온 신화교와 조선족, 구화교가 사실상 구분없이 다 화교라고 쓰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