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로 '가라후토'라고 칭하는 섬 전 지역에 대한 내용은 사할린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 제국{{{#FFF'''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지역 | 통치지 | 통치기관 |
<colbgcolor=#de8b94,#742129> 남사할린 | 가라후토(樺太)* | 가라후토청 | |
한반도 | 조선(朝鮮) | 조선총독부 | |
타이완 섬 | 대만(臺灣) | 대만총독부 | |
태평양 제도 | 남양 군도(南洋群島) | 남양청 | |
요동 반도 | 관동주(關東州) | 관동주청 | |
일본령 칭다오 | 산동반도 이남 | - | |
* 가라후토는 1943년 이후 내지로 편입 | |||
괴뢰국 · 군정청 | }}}}}}}}} |
가라후토청 樺太廳[1] | Префектура Карафуто | ||
일본 제국의 식민지 | ||
국기 | 휘장 | |
진한 초록색 부분이 가라후토(사할린 남부). | ||
1905 ~ 1945 | ||
점령 이전 | 멸망 이후 | |
러시아 제국 | 소련 | |
국가 | 일본 제국 | |
위치 | 북위 50도선 이남 사할린 | |
면적 | 36,090.3 ㎢ | |
인구 | 557,000명 (1941년) | |
최대 도시 | 도요하라시(豊原市)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군사독재 · 익찬 체제 | |
통치기관 | 가라후토청 | |
군주 | 천황 | |
언어 | 일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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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라후토(樺太)는 사할린 섬을 가리키는 일본어 표현으로, 역사적으로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에 의해 통치되던 북위 50도선 이남 사할린 지역을 말한다.사할린 문서에서도 다루고 있듯 '가라후토'라는 지명은 아이누어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왔으며,[2] 樺太는 한자 훈차 표기이다. 한국에서는 樺太를 한국 한자음으로 '화태'라고 읽기도 한다.
2. 역사
2.1. 성립 이전
자세한 내용은 사할린 문서의 역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8~19세기 즈음부터 러시아인, 일본인이 정착을 시작했고 공동통치령(1855~1875), 러시아 단독 점유(1875~1905) 시기를 거쳤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북위 50도 이남 일본령 사할린의 통치는 러일전쟁 뒤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2.2. 러일전쟁 후 남북 분할 점령
일본의 외지로 편입된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에 일본 정부는 일본인들을 정착시켰다. 1905년 9월 5일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립했고, 1907년 3월 15일 가라후토청으로 개편했다. 청사는 1907년 오도마리 정(현 코르사코프)에 설치되었으나 이듬해인 1908년 도요하라 시(현 유즈노사할린스크)로 이전되었다.1929년 일본 제국은 척식국을 내무성에 합병, 척무성을 새로이 발족하여 가라후토를 편입했다. 이후 한동안 가라후토청은 척무성의 관할이었으나, 한창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11월 1일, 일본 제국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내외지(內外地)를 일원화하면서 가라후토청을 내무성 산하에 편입했고 이듬해인 1943년에는 가라후토가 내지로 편성되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탄생한 소련은 당시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 양도했다. 일본은 러시아 내전 당시 러시아령 북사할린(사가렌)을 점령하였으나 오래 못 가 철수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련의 사할린 지배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 북사할린 역시 일본에 양도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2.3. 소멸과 흔적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쿠릴 열도와 더불어 사할린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3] 소련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가라후토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귀속 문제를 보류했는데, 그 직후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공식 요구는 남쿠릴 열도 4개 섬 반환이고 가라후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북쿠릴 열도와 가라후토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약을 러시아가 조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일본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법적으로 러시아령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4][5] 다만 일본 정부에서는 현 사할린 최대도시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일본 영사관을 설치해 암묵적으로 러시아 영유를 인정했다. 일본인들은 가라후토의 상실을 아쉬워하지만 이곳에 투자하며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3. 일본 내 지위
1905~1945년 일본령 시절 가라후토의 지위는 이중적이었다. 가라후토는 공식적으로 조선, 대만, 남양군도와 같은 외지로 분류되어 본토가 아닌 식민지로 분류되었다.반면 가라후토와 제반 환경이 유사했던 홋카이도와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내지였다. 홋카이도의 경우 혼슈와 인접한 지리 특성상 이미 가라후토 개척보다 훨씬 앞선 14세기에 최남단부(마츠마에 번)부터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이후 17~18세기에 일본인들에 의한 실질적인 식민화가 완료되었고, 1807년 에도 막부의 직할령으로 공식 편입되었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국가에 의해 처음부터 일본 영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변방일지언정 내지로 분류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치시마 열도의 경우에도 현재 분쟁 중인 북방영토(남쿠릴 열도)는 1855년, 그 이북의 북쿠릴 열도는 1875년 각각 러시아에 의해 일본령으로 인정받았으며 면적도 워낙 협소했기 때문에 내지인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로 기능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가라후토는 큰 섬일 뿐만 아니라 1905년까지 러시아령이었기 때문에 병합 후 바로 내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라후토는 외지 중 가장 내지와 유사한 성격의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점령 기간이 워낙 짧은 남양군도는 차치하고라도 조선이나 대만의 경우 각각 조선인과 대만인의 인구가 이주한 일본인의 인구를 압도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일본인이 소수인 외지의 실제적 정의에 부합하였다. 반면 가라후토의 경우 원주민(사할린 아이누, 윌타족, 니브흐족)의 인구가 조선과 대만에 한참 못미쳤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자 이주민의 수가 본토 원주민을 크게 압도하였다. 실제로 1940년 무렵이 되면 가라후토 인구의 90% 이상이 본토에서 이주한 일본인이었고 나머지도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며[6] 원주민은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이 소수 민족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이유로 가라후토는 조선과 대만에 비해 내지화하기 유리한 환경이었고 실제로 일제는 패망 2년 전인 1943년 가라후토를 본격적으로 내지로 승격했다. 다만 1945년 소련에 의해 다시 빼앗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법적으로 외지였다.
이렇듯 일본령 가라후토는 홋카이도와 조선/대만의 중간지적 성격이었으며 이주민의 인구로 원주민을 압도하여 이주민 위주의 정책을 폈다는 점에서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이나 호주 등을 개척해 형성한 식민지와 유사하다.
4. 민족 구성
4.1. 토착민
일본인이 도래하기 전의 남사할린에는 사할린 아이누, 윌타족, 니브흐족 등이 분포해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아이누가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7] 일본 통치기에 이들은 그냥 가라후토 토인(樺太土人)로 퉁쳐 분류되었으나 1932년에 호적법을 고쳐 공식적으로 아이누에 한해 내지인(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일반 일본인과 법적으로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인들로부터 야만적이라 여겨졌던데다 머릿수도 밀리게 된 남사할린의 토착민들은 정책적으로 차별받기 일쑤였다.소련은 남사할린을 점령한 이후 아이누로 분류된 원주민은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다른 일본인과 함께 일본 본토로 추방하였다.
4.2. 일본인
일본인은 근대 이후부터 남사할린에 진출하였다. 남사할린은 본래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지역이었는데 일본인의 진출이 활발해져 1940년대에는 일본인 비율이 90%를 넘었다.소련은 남사할린을 점령한 이후 남사할린 내 일본인을 모두 일본 본토로 추방하였다.
4.3. 조선인
자세한 내용은 사할린 한인 문서 참고하십시오.사할린에는 조선인의 이주도 활발했다. 자발적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1930년대와 1940년에 징용으로 인해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강제노동이나 다름없는 노동자로 종사하였다.
일본인과 달리 사할린의 조선인은 소련의 추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일본인들만 본국으로 송환하고 자신들이 징용한 조선인들은 신경쓰지 않아, 조선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의 귀환을 위한 소송이 일본에 대해 제기되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새로이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는 소련과 적대하는 관계라 오랫동안 이들의 사정에 무관심했고, 북한 정부는 송환에 노력했으나 대다수의 사할린 한인들이 삼남 지방 출신이라 고향인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의 송환을 꺼려 진전이 없었다. 1989년부터 한국과 소련 간 실무자 접촉 등의 가시적 진척이 있었고, 그 후 2000년에 407세대(814명)가 귀국하는 등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영구귀국을 희망하나 미처 귀국하지 못한 사할린 한인들이 많이 남아있다.
사할린은 과거 일본 영토였음에도 일본계 인구는 거의 없는 반면, 한국계 인구는 수만 명에 이르며 이들은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소수민족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이 주민의 83%를 차지해서 1위인데, 2위는 바로 한인이다. 30,000명으로 주민 수의 5.5%를 차지한다.
5. 교통
오늘날 사할린의 철도 남쪽은 이 시기 일본 제국이 깔아놓은 철도를 바탕으로, 약간씩 연장한 것이다. 북쪽 부분은 러시아 제국 말기 및 소련 당시에 지은 산업철도이다.특이한 것은 러시아 본토의 철도가 광궤인 것과 달리 이 곳은 일본 철도와 같은 케이프 협궤 철도가 깔려 있었다. 일본이 이 시기 철도를 갈고 닦아가며 써서 그렇다. 북쪽 부분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 본토의 광궤가 아닌 700mm/762mm 협궤 경편철도로 부설된 것을 1945년 이후 단일 철도국으로 통합되면서 운영편의를 위해 남사할린와 같은 1067mm 케이프 협궤로 개궤. 이 노선들 역시 2019년부로 러시아 광궤로 개궤 완료되었다.
이 시기에는 오도마리역과 홋카이도의 왓카나이역을 잇는 치하쿠 연락선을[8] 통해 일본 홋카이도의 소야 본선 철도와 연계되어 운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사할린을 점령하며 자연스레 왕래는 끊어졌으나 냉전 이후 일본과의 정기여객선이 다시 취항했다. 다만 해운을 이용해 양국의 철도를 연계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도 2020년대에는 코로나 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끊어졌고 재운항은 요원한 상태이다.
6. 행정구역
각 군별로 색상이 칠해진 모습. 진나이정 일대를 제외하면 현행 러시아 행정구역과 경계가 대체로 일치한다.
6.1. 토요하라지청(豊原支庁)
- 토요하라시(豊原市) - 오늘날 유즈노사할린스크
- 토요사카에군(豊栄郡)
- 오치아이정(落合町) - 오늘날 돌린스크
- 토요키타촌(豊北村)
- 카와카미촌(川上村)
- 사카에하마촌(栄浜村)
- 시라누이촌(白縫村)
- 오토마리군(大泊郡)
- 루타카군(留多加郡)
- 루타카정(留多加町) - 오늘날 아니바
- 산고촌(三郷村)
- 노토로촌(能登呂村)
6.2. 마오카지청(真岡支庁)
- 혼토군(本斗郡)
- 혼토정(本斗町) - 오늘날 네벨스크
- 나이호로정(内幌町) - 오늘날 고르노자보츠크
- 고니촌(好仁村)
- 카이바촌(海馬村)
- 마오카군(真岡郡)
- 마오카정(真岡町) - 오늘날 홈스크
- 노다정(野田町) - 오늘날 체호프
- 히로치촌(広地村)
- 란도마리촌(蘭泊村)
- 시미즈촌(清水村)
- 코노토로촌(小能登呂村)
- 토마리오루군(泊居郡)
- 토마리오루정(泊居町) - 오늘날 토마리
- 나요리촌(名寄村)
- 쿠슌나이촌(久春內村)
6.3. 에스토루지청(恵須取支庁)
- 에스토루군(恵須取郡)
- 에스토루정(恵須取町) - 오늘날 우글레고르스크[10]
- 도로정(塔路町) - 오늘날 샤흐툐르스크
- 진나이정(珍内町) - 오늘날 크라스노고르스크
- 우시로촌(鵜城村)
- 나요시군(名好郡)
- 나요시정(名好町)
- 니시사쿠탄촌(西柵丹村)
6.4. 시쿠카지청(敷香支庁)
- 모토도마리군(元泊郡)
- 시루토루정(知取町) - 오늘날 마카로프
- 모토도마리촌(元泊村)
- 호요리촌(帆寄村)
- 시스카군(敷香郡)
- 시스카정(敷香町) - 오늘날 포로나이스크
- 도마리키시촌(泊岸村)
- 나이로촌(内路村)
- 지리에촌(散江村)
7. 여담
- 일본령 남부 사할린과 구분하여 러시아 제국 및 소련이 통치했던 북위 50도선 이북 사할린 지역은 사가렌(薩哈嗹, サガレン)이라고 불렀다. 본디 가라후토든 사가렌이든 사할린섬 전역을 일컫는 명칭이었으나, 일본과 러시아가 사할린섬을 분할한 시기에는 일부러 구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남사할린이 일본 영토였을 적에 이곳에서 하드로사우루스류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은 '일본의 도마뱀'이란 뜻으로 니폰노사우루스라는 학명을 명명했다. 다만 출토지가 현재 러시아령인 관계로 일본에서는 연구 진척이 부진하며 학명이 학명인지라 러시아 역시 이 공룡 연구에 큰 관심이 없다.
- '지청'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홋카이도에서도 2010년까지 사용했다. 현재는 진흥국/종합진흥국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8. 관련 문서
[1] 신자체: 樺太庁[2]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에서는 이 명칭을 "중국의 섬"이라는 뜻이라고 잘못 풀이하고 있다.[3] 소련은 홋카이도 또한 반분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수립했으나 이는 미국 해리 트루먼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완강한 거부로 기각되었다.[4] 쿠릴 열도를 포기했음에도 일본에서 소위 '북방 영토'라 부르는 4개 섬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일본 정부가 이들 섬을 쿠릴 열도가 아닌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로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 따르면 일본은 쿠릴 열도를 이미 포기했으며 북방 영토는 쿠릴 열도가 아닌 홋카이도 소속이기 때문에 가라후토나 북쿠릴 열도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5] 우익 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서는 단순히 남쿠릴 4개 섬을 넘어 쿠릴 열도 전체와 가라후토에 대해서까지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지만 당연히 현재 실효지배국인 러시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정작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주장을 무시하고 있다.[6] 그리고 후술하듯 1945년 일본인들이 히키아게샤로 추방되고 러시아인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과정에서 조선인은 방치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할린 한인은 사할린 내 인구 비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7] 윌타나 니브흐의 경우 줄곧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 북사할린에 다수 분포했다.[8] 왓카나이(稚内)의 稚, 오도마리(小泊)의 泊을 이어붙여 치하쿠(稚泊)라 명명한 것이다.[9] 한국 기준으로 구글 지도에서는 아직 이 지명이 남아있어 현재 이름과 같이 나온다.[10] 1945년 10월 1일부로 시(市)로 승격될 예정이었으나 남사할린 침공으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