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 |||||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초대 이응준 | 제2대 채병덕 | 제3대 신태영 | 제4대 채병덕 | 제5대 정일권 | |
제6대 이종찬 | 제7대 백선엽 | 제8대 정일권 | 제9대 이형근 | 제10대 백선엽 | |
제11대 송요찬 | 제12대 최영희 | 제13대 최경록 | 제14대 장도영 | 제15대 김종오 | |
제16대 민기식 | 제17대 김용배 | 제18대 김계원 | 제19대 서종철 | 제20대 노재현 | |
제21대 이세호 | 제22대 정승화 | 제23대 이희성 | 제24대 황영시 | 제25대 정호용 | |
제26대 박희도 | 제27대 이종구 | 제28대 이진삼 | 제29대 김진영 | 제30대 김동진 | |
제31대 윤용남 | 제32대 도일규 | 제33대 김동신 | 제34대 길형보 | 제35대 김판규 | |
제36대 남재준 | 제37대 김장수 | 제38대 박흥렬 | 제39대 임충빈 | 제40대 한민구 | |
제41대 황의돈 | 제42대 김상기 | 제43대 조정환 | 제44대 권오성 | 제45대 김요환 | |
제46대 장준규 | 제47대 김용우 | 제48대 서욱 | 제49대 남영신 | 제50대 박정환 | |
제51대 박안수 | }}}}}} ※ 초대~제8대: 육군총참모장 / 제9대~현재: 육군참모총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colbgcolor=#dd0000><colcolor=#ffffff> 출생 | 1915년 4월 17일 | ||
평안남도 평양부 이향리 5 (現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 |||
사망 | 1950년 7월 26일 (향년 35세) |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 |||
본관 | 평강 채씨[2] | ||
호 | 상서(霜緖)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37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50년 | |||
재임기간 | 제2대 육군총참모장 | ||
1949년 5월 9일 ~ 1949년 9월 30일 | |||
제4대 육군총참모장 | |||
1950년 4월 10일 ~ 1950년 6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d000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채관수 | |
형제자매 | 3남 3녀 중 차남 | ||
배우자 | 백경화(1913~1986) | ||
학력 | 평양종로보통학교 (졸업) 평양제1중학교 (졸업) | ||
신체 | 167cm, 136kg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49기) 군사영어학교 (1기)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영남편선관구사령관 | ||
주요 보직 | 육군 제4여단장 국방부 참모총장 육군총참모장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한국 전쟁 개전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참모총장. 역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장군들 중에 유일하게 전사한 인물이다.당시 한국인으로서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167cm의 키였지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몸무게가 무려 136kg인 비대한 몸집인지라 미 육군 기준에서는 키가 작은 그를 'Fat Chae', 'Fat Boy'라고 부르며 조롱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5년 4월 17일, 평안남도 평양부 이향리 5번지에서 채관수(蔡觀洙)와 황씨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실 채병덕은 젊은 나이에 전사해 회고록이 없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알려진 기록을 보면 1923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성적이 우수하여 6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며 하루도 결석하지 않아 6년 개근상을 탔다. 1929년 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인 학교인 평양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수석의 성적으로 대수, 기하 등 수학에 능통했으며 물리, 역사, 지리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나 영어만큼은 유독 싫어했다고 한다.채병덕이 또 특출났던 분야는 체육이었는데 유도, 육상을 특히 잘했으며 씨름, 축구, 스케이트, 야구, 기마전에서도 능하여 일본인들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유도부에 입단, 매우 건장한 체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유도부 부장이 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힘이 세고 머리도 좋았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고 한다.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웃거나 울기도 잘했고 호승심이 강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재학 도중 평양 제1중학교 배속장교로 부임한 오가미(大上) 소좌가 1932년 후반기부터 채병덕에게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줄기차게 권유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사람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했는데, 채병덕의 우수한 성적과 체력을 눈여겨 본 오가미 소좌를 비롯한 평양 제1중학교의 장교들과 교장은 채병덕을 적격자로 판단해 일본 육사 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유했다. 채병덕은 1932년 11월 용산의 조선군 사령부 장교 구락부인 해행사에서 체력검정을 받게 되었고, 이종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용산에서 신검을 받던 건장한 청년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체격이 당당한 채병덕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채병덕은 손쉽게 1차 신검을 통과했고 1주일 후 평양에서 치른 학과시험 역시 합격했다.
1933년 2월, 조선인 신분으로 육사시험에 합격한 채병덕은 일약 평양의 유명인이 되었다. 3월 하순에 채병덕은 일본으로 가 일본군 교육사령부에서 주관하는 2차 신검에 응시했고 이때 이종찬을 만나 정식으로 통성명을 했다. 2차 신검에서 채병덕은 신장에 약간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재검사를 받았으나 평양에서 도쿄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과 중학교 유도부장으로 과하게 유도를 연습한 탓에 일시적인 이상이 나타난 것으로 판명되어 최종 합격판정을 받았다.
2.2. 일본육군사관학교 시절
1933년 4월 1일, 채병덕은 일본 육사 예과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먹성이 좋던 채병덕은 한끼에 우동 세그릇, 과자 두봉지, 사이다 두 병을 너끈히 먹어치웠고 종종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주보에서 우동을 다섯 그릇씩 먹기도 했다. 처음에는 일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퇴교를 고민하기도 했으나 이종찬의 설득으로 남아 주말마다 외출해 중국요리나 조선요리를 먹는 것으로 입맛을 충족시켰다.당시 일본 육사생도들은 동향 출신 선배들이 운영하는 현인회라는 이름의 하숙집에 주말마다 가는 것이 상례였는데, 채병덕은 일본 육사에서 극히 드문 조선인 생도였으므로 주말에 갈 곳이 없었다. 선배인 이형석의 안내로 히로시마 현인회 초수회에 몇 차례 간 적은 있었으나 1933년 6월에 이형석이 졸업하면서부터는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일본군 교육총감부 중좌였던 영친왕이 육사의 조선인 생도들이 일요하숙 문제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족부 무관 김인욱 소좌를 보내 도쿄의 요쓰야에 이들을 위한 일요하숙을 마련해주었다. 이 때 채병덕은 이종찬과 함께 친목모임을 결성했는데, 신라의 옛 이름 중 하나인 계림을 따 <계림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1934년 4월에 평양고보 출신의 이용문과 군산중학 출신 지인태가 입학하면서 계림회 멤버들은 4명으로 늘어났다.
1934년 후반기, 병과 구분 시기가 되자 채병덕은 장차 세워질 국군에 기술병과 출신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여겨 1지망에 야전포병, 2지망에 중포병을 신청했다가 중포병 특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육사의 대부생활 규정에 따라 규슈의 사세보 중포병연대에 최선임 상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군 오장들에게 시달렸으나 2달 가량 적응기간을 거쳐 최선임 오장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다시 군조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후 1935년 10월에 육군사관학교로 복귀하여 본과수업을 받았다. 1937년 6월 29일, 일본 육사 49기 생으로 졸업하였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이 무렵 채병덕은 창씨개명한 이름인 오시마 헤이토쿠[3]로 불렸다.
2.3. 일본군 시절
짧은 졸업휴가를 보낸 채병덕은 다시 규슈 사세보 중포병연대 육군소위로 부임되었다. 직후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동기인 이종찬은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함에 따라 중국에 파병되었으나 채병덕은 계속 사세보에 머물렀다. 1937년, 채병덕은 육군 중위로 승진했고 1938년 6월 5일 평양에서 육사 시절부터 교제해왔던 일본육사 27기 백홍석 중좌의 딸인 백경화와 결혼식을 올리고 사세보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1939년 겨울에 육군포공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도쿄로 이동하여 유기화학, 탄도학, 고등수학, 야금학, 화약학 등을 공부했다.우수한 성적으로 육군포공학교를 졸업한 채병덕은 가나가와 현 육군병기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1940년 오사카 육군조병창으로 전임되었다. 이 즈음에 이미 몸이 많이 불어 체격이 건장한 수준을 넘어 뚱뚱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1941년 3월에 대위로 승진했으나 오사카 조병창장과 자주 싸우는 바람에[4] 육군대학교 입학이 취소되었다. 1943년에 소좌로 승진했으며 부평에 육군조병창이 신설되자 3공장장으로 부임되었다. 당시 부평조병창의 간부진은 모두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조선인인데다 체구까지 눈에 띄게 뚱뚱한 채병덕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당시 부평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다수 채병덕에 대해 우호적인 회고를 남긴 바 있다. 자신의 월급을 털어 아이스크림이나 찹쌀떡을 한 양동이씩 사서 학생들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참고로 그 당시 채병덕이 근무했던 조병창은 한반도 내에서 무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씩은 채병덕과 접선을 시도해서 무기를 반출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은 그때까지도 내부통제능력이 확고했기 때문에 채병덕 혼자서 무기나 물자를 빼돌리기는 어려웠으므로 독립운동에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최소한 접선을 시도한 사람을 일본 육군에게 신고하지는 않았으므로 적어도 일본군 앞잡이로 평가받지는 않았다. 그때는 어떻게든 출세를 위해 독립운동가를 밀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1944년 7월, 전황이 나빠짐에 따라 현재의 고려대학교인 당시 보성전문 학생들이 징용되어 병공창 노동에 투입되었다. 학생들은 일제를 위한 무기를 만들 수는 없다고 사보타주를 하며 저항했고 이에 총독부는 보성전문을 폐교시키겠다고 나왔으나 공장장인 채병덕이 자신도 조선사람이라고 나서서 중재하여 학생들에게 무기를 만들 필요 없이 일하는 시늉만 하면 자신이 일본군 당국자들을 상대하겠다고 나섰다. 이후 보성전문 학생들은 공장에서 사소한 일만 하게 되었으며 보성전문의 폐교 위기는 해결되었다.[5] 이 때문에 채병덕은 일본군 출신이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아져서 이 인기를 바탕으로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어쨌든 일본군 경력은 경력인지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이후 공장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채병덕은 이 조병창이 장래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될 거라고 보고 한국인 군무원들을 설득하여 설비가 파손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미 육군 제24군단이 와서 이곳에 주둔하며 몽땅 때려부순 후 불도저로 파묻어버렸다. 하지만 부평 자리 자체는 중요한 군사시설이라서 이후 미군 조병창(캠프 마켓)이 들어서서 한국군 공병 등이 이곳에서 건군되었다. 이후 2019년 12월 대한민국에 반환되었다. 현재 철거 계획이 잡히고 있으나 결정 주체가 불분명하고 강제동원 역사의 증거물의 파괴에 사학계의 반대의견도 일고 있다. #
2.4. 광복과 건군
한편 미군정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28호를 하달하여 국방사령부를 설립하여 국군 창설을 준비하게 하였다. 국방사령부는 국군의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하였다. 채병덕은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1기를 졸업하고 남조선 국방경비대 정위(正尉: 현재의 대위)로 임관하였다. 원래 규칙은 군사영어학교의 졸업자는 전원 소위에 해당하는 참위로 임관한다는 것이었으나 이형근, 유재흥, 장석윤, 정일권, 채병덕 등 5명은 어느 정도 짬밥이 있었기 때문에 정위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채병덕은 군번 10002번을 받았는데 자신보다 계급도 낮고 일본 육사 기수도 7기수나 낮은 이형근이 10001번을 받은 것을 보고 격분하여 경비대 총사령부 부관 임선하[6] 소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이형근보다 일본 육사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더 선배인데 내가 왜 군번 2번이고 이형근이가 1번인가? 선배를 제쳐놓고 후배인 이형근이가 1번이 되다니, 도대체 이 무슨 이유이냐? 설사 상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치더라도 사양하여 5번인 정일권 다음이 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임선하는 행정 처리상 서류 접수 순으로 부여한 것이라 해명했지만 채병덕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이형근의 주장에 따르면 채병덕은 이형근에게 미군 당국에 건의해 군번을 수정하라고 요구했다고 하는데 이형근은 이를 실행에 옮겼으나 미군 측은 자신들은 지금 일본군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를 일축했다고 한다. 이후 채병덕은 이형근과 감정이 아주 나빠져서 이형근이 오만불손하다거나 공산주의자라고 비방을 하였다고 하며 국방경비대 1연대장으로 보직을 받은 후 같이 태릉 병영에서 근무하던 육사교장 이형근과 불과 한층을 사이에 두고 사무실을 뒀음에도 대화는 커녕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하간 남한의 8개 도에 각각 1개 연대를 우선적으로 창설한다는 미군정의 <대나무 계획>에 따라 1946년 1월 15일, 구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가 위치한 태릉에서 국방경비대 1연대 1대대 A중대가 창설되었다. 채병덕은 A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월 17일 중대 편성을 완료하였다. 이때 1연대장은 미군 소위였는데 영어에 능하지 못했던 채병덕은 미군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 미군 소위는 채병덕이 나이도 많고 계급도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실수에도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고 껌을 씹으며 채병덕을 마구 갈궈서 격분한 채병덕은 군복을 벗겠다고 굉장히 화를 냈으나 결국 참고 군에 남았다.
1946년 2월 8일, 3개 중대가 편성됨에 따라 1대대가 완전히 편성되었고 채병덕은 소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에 임명되어 국방경비대의 최초의 영관급 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1946년 5월 23일에 1대대 소속 병사들이 영등포 보급중대에서 2개 차량의 보급품이 부정처분되었다며 이런 사이비 장교들을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색출하여 쫓아낼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대사건이 터졌다. B중대장 정일권 대위가 훈시하여 이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열악한 사정과 상습적 구타 등에 불만이 많던 병사들은 야유하며 정일권을 쫓아냈고 미군의 출동으로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에 중대 선임부사관들이 정일권의 숙소를 찾아와 요구의 관철을 주장하고 대표자 체포에 항의하며 정일권을 폭행하는 등 7~8시간이나 난동을 부렸다. 결국 시위 주모자들과 부정축재를 한 장교들이 모두 처벌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으나 채병덕은 대대장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 통위부 병기국장으로 전보되었다.[7]
1948년 4월 27일, 청주에서 4여단이 신설되자 채병덕은 4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마침내 국군도 창설되었다.
2.5. 초대 국방부 참모총장
1948년 8월 14일,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이종찬에게 국방부 참모총장 직을 제시했으나 이종찬은 이를 거절하고 민족운동가들에게 인기가 있는 채병덕을 참모총장에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8][9] 이에 이범석은 이승만에게 이응준, 노태준, 채병덕 세 사람을 국방부 참모총장 후보로 추천하였다. 이승만은 젊고 미군 군사고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은 채병덕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였다. 노태준 역시 채병덕을 추천하였으며 이응준은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에 대해서 미 대사관과 미군 군사 고문단은 한국군 중에서 제일 뚱뚱하고 둔해보이는 채병덕을 참모총장에 임명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는데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나의 채 장군은 날씬한 장군이 못 가진 기민성을 가지고 있어요. 전문적인 군사 지식은 물론 우리나라에 무슨 무기가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는, 경험으로 뭉쳐진 장군이야, 또 미남 장군들의 시원스런 큰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채 장군의 졸리는 듯한 눈이 꿰뚫어 본단 말이야!"
1948년 8월 16일, 채병덕은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통위부 참모총장 이형근 대령으로부터 사무인계를 받고 국방부 참모총장에 부임하였다. 국방부 참모총장 재임 시절 채병덕은 국군조직법을 제정하였으며 일본군 포병소좌 출신 신응균 등을 특채하여 중임을 맡겼다. 이후 국회에 출석하여 국회의원들의 심의를 받았는데 까다로운 심의과정에 다음과 같이 불만을 터트렸다.
"군인들이 무식하다구 하면서 국회의원들 자신은 더 유치하게 구니 이거 어디 해먹갔어? 독립운동할 때의 자세를 그대루 가지구 우리들을 마치 총독부 관리 대하듯 하니 열통터져 이거 살갔나."
이후 채병덕은 국회의원들을 요정에서 대접하며 로비를 하였고 1948년 11월 국군조직법이 확정 공포됨에 따라 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해양경비대가 해군으로 정식 개편되었다. 부임 2달 후인 10월에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생하자 38선에 대한 경비강화, 지리산 공비 토벌 등을 진두지휘하였으며 군 내부의 남로당원들에 대한 색출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응준 총장의 육군 강화 작업에 대하여 국가방위를 위해서는 모든 인재가 필요하며 군 고급장교들로 특채된 사람들의 '아픈 상처'를 건드려봤자 좋아할 것은 김일성과 박헌영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구 일본군은 물론 경찰 출신의 인원들을 대거 군으로 영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군이 친일 경찰의 대피소냐는 비판을 받았다.
2.6. 2대 육군 참모총장
그러다가 1949년 5월 4일, 6여단(현: 제6보병사단) 8연대 1대대장 표무원과 2대대장 강태무가 5월 2일에 훈련을 핑계로 병력들을 이끌고 월북[10]하는 대사건이 터짐에 따라 5월 8일 이응준이 책임을 지고 육참총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 후임으로 채병덕이 5월 9일 임명되었다. 국방부 참모총장직에는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았으므로 그 직위 자체가 폐지되었다. 5월 16일,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군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채병덕이 정식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채병덕은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남겼다."오늘 평소 존경하며 우리 군의 원로이신 이응준 총장의 뒤를 이어 불초 본인이 제2대 총참모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간 전임 총장의 영단으로 단행된 대숙군공장으로 군내 좌익 세포망은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나, 지금 북한 괴뢰 집단은 대남 유격대를 대거 남파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하여 사회적 혼란을 조성시키며 신생 대한민국의 국기마저 뒤엎으려 한다. 이에 본관은 전임 총장의 지휘방침을 이어받아 계속 대숙군을 전개하여 반공을 국시로 한 군의 기강을 확립하고 국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 전 장병들에게 국민들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충성된 군인이 되어 행동과 실천으로 국가수호에 전진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채병덕은 5월 12일, 육군총참모부장제를 폐지하여 행정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직을 신설하여 신태영 대령과 정일권 준장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국군조직법 3하 12조에 의거하여 전국의 6개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옹진지구전투사령부에 1연대과 21연대를 통합하여 8사단을, 서울 용산에 2연대와 7기갑연대를 통합하여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함으로 총 8개 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 8월 15일에는 북한군 귀순장병 600명을 바탕으로 육군보국대대를 창설하였으며 육군본부의 항공대를 확충하여 공군으로 독립시켰다. 또한 최덕신, 최홍희, 심홍선, 장은산, 강관용, 이승호 등 6명을 미보병학교와 포병학교로 유학시키고 1949년 7월 1일 육본직할 육군참모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했다. 또한 육군정보학교, 군의학교, 경리학교 등을 만들어 다양한 병과 교육을 추진했다.
또한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2차 숙군을 실시, 현역장병 215명, 군관계 민간인 30명을 적발하여 중앙고등법회의에 송치하여 국군 내부의 남로당을 근절하였고 6월 25일 대통령령 134호에 의거하여 국군징계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또한 8월 20일에 각 지구에 위수사령부를 설치하여 대인안전보호의 책임을 지고 유사시에 일반행정 지휘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공비 토벌에 있어서도 1949년 9월 28일, 단양에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충청도의 공비를 토벌하게 하는 한편 개성, 옹진에서의 북한의 무력도발을 분쇄하였다. 허나 1949년 가을에 발생한 명태 사건으로 1사단장 김석원 장군과 격렬히 충돌하고[11] 결국 1949년 10월 1일 현직에서 해임되어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허나 병기분야에서 국군 내부 최고 전문가였기 때문에 병기행정본부가 신설되자 2달도 안되어 12월 14일, 병기행정본부장에 임명됨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에 대해서 다행스러워 하는 여론도 있었으나 같이 해임된 김석원은 복직하지 않았는데 채병덕만 복직된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 때문에 채병덕은 실의에 빠져 1950년 봄에 군에서 은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종찬 등이 얼마 안가 그가 육참총장에 복직하게 될 것이라고 만류하여 군에 잔류하게 되었다.
2.7. 4대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이 사표를 내니 마니 하는 사이에 신태영 총장이 총장직에서 사퇴함에 따라 채병덕은 1950년 4월 10일, 6개월 만에 4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취임 직후은 4월 22일, 채병덕은 대부분의 사단장을 교체하는 대규모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 이때 부임한 것이 1사단장 백선엽(5사단장), 2사단장 이형근, 3사단장 유승렬(1사단장), 5사단장 이응준 등이며 미국 유학 명령이 난 정일권 육본 작전참모부장 후임으로 김백일(3사단장)을 임명하였다. 또한 이형근이 2사단장으로, 김종오가 6사단장으로, 유재흥이 7사단장으로, 이성가가 8사단장으로, 이종찬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신상철이 육본 인사국장으로, 장창국이 육본 작전교육장으로, 이준식이 육사교장으로, 김홍일이 참모학교장으로 부임했다.한편 1950년 3월, 육본 병기감실은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중고 공용화기 및 차기를 수리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지시는 채병덕의 총장 부임 직후 실행에 옮겨졌다. 당시 국군이 보유한 차량은 수요의 20%에 불과한 1,566대였는데 이중 500대가 부평으로 후송되어 부평병기창에서 수리되고 있었고 1,000대는 각 지구에서 수리되고 있었다. 노후화된 장비를 수리, 점검한다는 계획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타이밍이 정말로 더러웠고 유사시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지 않은 대량 수리라서 춘천에 장비를 집결시켰던 6사단 정도를 제외하면 차량이 부족하여 각 사단이 대단한 애로를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채병덕 간첩설까지도 진지하게 나왔다.
그의 취임 직후부터 주한미군 철수와 맞물려 정부와 군에서는 대대적인 북벌론이 대두되었는데 채병덕도 동조하여 군사기밀이라 자세한 수단을 언급할 수는 없으나 백선 승산이 있으니 38선이 터지는 그날만 두고 보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다니며 미군이 철수한다고 북한이 남침한다고 믿는 사람의 머리를 180도 회전시켜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이를 두고 김석원 등도 지지하였으며 손원일 등 해군도 동조하였다. 물론 국군에게 북침은 커녕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강화된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는 것조차 벅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승만 이하 정부 각료들과 군부의 허풍 때문에 미국은 남한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남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실시하지 않게 되었다. 채병덕은 이 시기 미국에 탱크나 중포 등 중화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한국 지형상 쓸모없으며 북한군이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묵살했다. 하지만 채병덕은 이를 대체하기 위하여 대전차 전투를 연구한다거나 대전차호 구축이나 진지 강화, 방어 등의 준비를 갖추지 않고 손을 놓아버리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한편 채병덕은 취임 초기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정보를 접하였다. 그 중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을 채병덕에게 보고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 당시 그는 남로당 군사책임자임이 밝혀져 체포,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가 프락치 고발과 만주군 인맥의 보증을 통해 형집행정지 처분은 받았으되 결국 군에서는 파면당해 일반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미 1949년 12월 육군 정보국은 조만간 북한이 전면적인 남침을 할 것이라 상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1950년 3월 25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38호를 하달하여 <육군방어계획>을 발령했다.
또한 국회에 38도선 축성공사비를 계상한 긴급건의서를 제출하고 의정부 지역에서 학생들을 동원해 교통호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군사예산은 대부분 삭감되었으며 교통호 건설도 경무대에서 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1950년에는 5월 위기설, 6월 위기설 등이 대두되었고 채병덕은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전군 대기태세를, 다시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전군 경계태세, 다시 5월 3일까지 대기태세를 유지했으며 5월 9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군 대기태세, 6월 2일까지 전군 경계태세를 유지하여 총 25일 간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이어 6월 11일에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 여겨 전군 비상경계령을 하달했지만 모두 별 일이 없었다. 여기에 미국에서 한국에서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하자 채병덕은 6월 23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병사들의 휴가와 외박을 허용했다. 이로 인하여 6월 24일부터 전군의 30%가 외출, 외박, 휴가를 나가게 되었는데 불과 다음날...
한편 육본 정보상황실은 6월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던 중 오전에 의정부의 7사단으로부터 북한 군관들이 지형정찰을 실시하는 것같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이에 김종필, 엄용승, 함덕윤, 서정순, 이영근 등 정보상황실 남북한반은 북한의 전면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하고 6월 24일 당일이나 6월 25일에 공격이 개시될지도 모른다고 결론내렸다. 오후 3시, 김종필 중위와 이영근 중위가 채병덕이 소집한 긴급회합에서 이러한 보고를 올리며 북의 평화통일제안은 남침을 숨기기 위한 기만술책일 수 있다고 보고하며 비상경계령 발령과 휴가와 외출의 중지, 이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병력을 영내에 대기토록하여 전방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수개월간 비상경계령을 유지했지만 아무 일이 없었던 상태에서 채병덕은 다시 비상경계령을 내리길 꺼렸고 첩보대를 포천, 동두천, 개성에 파견하여 적정을 살피고 6월 25일 오전 8시까지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2.8. 6.25 전쟁의 발발
6월 24일 저녁 7시, 장교구락부에서 장교구락부 건물 준공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이 파티에는 육군의 고급장교들과 미국 군사고문단 장교들 및 그 부인과 애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장기간의 비상경계령의 해제로 이날 파티 분위기는 매우 들떠 있었다. 채병덕의 경우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서 10시 쯤에 1차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 해밀턴 중위와 2차를 갔다는 말도 있긴 한데 채병덕은 술이 센 타입이 아니라서 그다지 많이 마시지 않은 상태로 자정~새벽 2시 사이에 귀가한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새벽 4시에 전 전선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채병덕에게도 전화로 보고가 갔다. 자택으로 상황장교를 불러서 보고를 받은 후 경악한 채병덕은 새벽 5시에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12] 각 국장들을 비상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육본으로 출근했다. 이때 출근한 장교는 이치업, 장도영 등 채병덕까지 합쳐서 3명에 불과했다.오전 5시 30분, 김종필 중위가 육본으로 돌아와 이치업 대령의 명의로 오전 6시에 명령 83호를 발령하여 전 장병을 긴급소집하고 전군이 비상사태에 돌입함을 하달했다. 이로 인하여 6시에서 7시 사이에 전군에 비상령이 내려지고 각 부대 장병들이 비상소집되었다. 채병덕은 이어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공관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성모의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을 불러 국방장관의 위치를 물었고 신동우는 명언을 남겼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어이를 상실한 채병덕은 신동우 중령을 자신의 관사로 불러서 그에게 길안내를 맡겨 직접 신성모의 관사로 찾아갔다. 오전 7시, 잠을 자다가 깨어나 가운 차림의 신성모가 당황하여 채병덕을 맞자 채병덕은 신성모의 자택 응접실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상황을 설명했다. 보고를 마친 채병덕은 신성모의 허가를 받아 바로 육군본부로 직행해 정훈국장 겸 육본 정훈감 이선근 대령에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장병들을 소집하라는 구두 명령을 하달하고 담화문을 발표하여 시민들의 협조를 호소했다.
9시까지 참담한 보고가 각지에서 밀려들었고 10시가 되어서야 장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채병덕은 이 시점까지도 평소대로의 국지적 충돌일 것이라 생각하고 미 군사고문단장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13]를 대동한 채 1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1사단의 전방상황과 예비대인 11연대 출동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의정부의 7사단을 방문하여 사단장 유재흥의 브리핑을 받았다. 이때 유재흥은 북한군의 탱크를 도저히 격파할 수도 없으며 예비대도 없다고 보고했다. 이에 채병덕은 육탄공격으로라도 저지하라고 지시하며 증원병력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 이 시점에서 채병덕은 북한군이 의정부로 향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전면적인 남침임을 실감하였다.
육본으로 돌아온 채병덕은 참모학교, 보병학교 고급반 등 각 교육기관 학생들의 원대복귀를 지시하고 서울의 3연대를 의정부로 급파하여 육본 직할 전투부대 구성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 직후 4~5만명의 북한군이 49대의 탱크를 동반하고 남침했으며 군이 격퇴 중이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육본과 국방부 요원들이 전원 출근하였으며 부대원의 80~90% 정도가 소집되었다. 채병덕은 이승만이 소집한 긴급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북한의 공격은 공비 지휘관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남부의 3개 사단을 소집해 격퇴하겠다고 보고했다. 채병덕의 낙관적인 보고를 바탕으로 각의는 비상시국에 대한 긴급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6월 25일 오후 4시, 채병덕은 다시 작명을 하달하고 전방사단 증원을 위해 1사단, 6사단, 7사단, 8사단에 기갑연대와 포병학교가 보유한 장갑차와 대전차포를 증원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유해준의 임시연대를 문산에 급파하여 1사단을 증원하게 하고 옹진의 17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LST 3척을 파견했다. 이 명령으로 인하여 6월 26일 아침, 백인엽 대령 이하 2개 대대 1750명은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채병덕은 서울 부근의 전부대를 1사단과 7사단에 축차투입하여 적의 전진을 저지하는 한편 남부에서 증원된 부대를 주축으로 반격한다는 계획을 짜고 귀대한 병사들을 임시중대, 임시대대로 편성하여 전선에 축차투입했다. 하지만 병력의 집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지휘관과 부대가 분리되고 통신선마저 차단되어 채병덕이 직접 전선을 자동차로 오가며 지휘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이 때문에 육본 각 참모부는 참모부장 김백일이 사실상 대리했다.
6월 25일 채병덕은 육사 및 보병학교의 교도대대로 혼성연대를 편성하여 1사단에 배속하였으며 적의 일부가 김화, 만세교, 포천가도를 따라 남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 작전명령 90호를 하달해 태릉에 있던 육사 생도 1,2기 생들로 육사대대를 편성해 포천, 퇴계원 방면에 투입했다. 그리고 이형근과 유재흥에게 26일 새벽 포천가도와 동두천간도를 연하여 반격하라고 지시, 홍천으로 이동 중인 수도경비사령부 8연대 예하 1개대로 가평을 확보하게 하고 주력은 서울로 급진하라고 지시하는 등 전체적으로 서울의 방어선을 공고화하여 후방의 지원군을 데려올 시간을 벌려 했다. 하지만 25일 밤에 이르러 육본과 의정부 방면의 유선통신이 완전히 두절되는 등 악재가 겹쳤다.
6월 26일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함께 국회에 출석한 채병덕은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허위 보고를 한다. 여기에 신성모는 한술 더 떠서 "국군이 걱정없이 물리친다. 해주를 접수하고 3~5일이면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며 거짓 보고를 한다.
2.9. 서울의 함락
서울 사수에 대한 주요 인사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이름 | 출신경력 | 직책 | 주장 |
채병덕 | 일본 육군 | 총참모장 | 결전 |
신성모 | 영국 상선 선장 | 국방장관 | 결전 |
김홍일 | 국민혁명군 | 육군사관학교 교장 | 지연전 |
유동열 | 한국광복군 | 결전 | |
지청천 | 한국광복군 | 국회의원 | 지연전 |
이범석 | 한국광복군 | 국무총리 | 지연전 |
김석원 | 일본 육군 | 1보병사단장 | 지연전 |
이종찬 | 일본 육군 | 수도경비사령관 | 결전 |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특별시가 함락되는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앞서 언급한 문제와 함께 6월 28일 오전 2시 30분에 실시한 한강대교(당시 유일한 인도교)와 한강철교, 그리고 광진교 폭파 문제로 인해 엄청난 비판을 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피난민이 다리 위를 지나고 있는 중에 경고도 없이 폭파시킨 것이었다[14] 다만 이걸로 인한 인사조치는 폭파를 직접 지시, 이행한 당시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총살[15]시킨 게 전부였지 다른 사람(신성모 국방부 장관, 장경근 국방부 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참모부장 등)에 대한 인사조치는 없었다.
그리고 김홍일 장군이 자원으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한다.[16] 그리하여 김홍일 장군은 한강 방어선 전투를 치르면서 7일이나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한다.
채병덕이 해임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서울이 함락된 직후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려고 방문한 미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그의 부하인 육군 소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채병덕에게 "이제 방어를 어떻게 할 거냐? 참모총장으로서 지휘계획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이 자리에는 단둘이 독대면을 한게 아니고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도 같이 있었다. 그러자 채병덕은 "200만 남한 청년들을 모조리 징집해서 훈련시키면 침략을 알아서 격퇴해 준다."고 말했다.[17] 한마디로 말해서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채병덕은 영어를 거의 못했고 곁에서 가뜩이나 형편없는 보고가 통역을 위해 자꾸만 끊어졌다. 그러다보니 맥아더는 채병덕의 첫인상부터 살찐 미련곰탱이라는 인상을 받아 껄끄러워하던 차였는데 이와 같은 문제가 하나둘 겹치면서 크게 실망하여 알몬드에게 "저 인간 구제불능이군."이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어쨌거나 맥아더 장군은 정치력을 발휘해서 이 자리에서는 채병덕 장군을 아주 크게 칭찬한 반면 그 날 저녁 이승만에게 독대면을 요구해서, 이승만과 단 둘이 독대면을 하게 되자 채병덕은 최악이라고 비난하며 채병덕을 보직해임시키라고 요구했다. 채병덕은 이렇게 맥아더로부터 무능하다고 찍혀서 해임된 것이지, 책임을 지고 사임한 것이 절대 아니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에게도 상당 부분 있는 6·25 전쟁의 개전 시 한국군이 패배를 거듭한 책임을 덜어내는 동시에 이제부터 미군이 주축이 된 UN군의 지원을 제대로 받아야 할 입장에서 UN군 총사령관이 될 가능성이 100%인 맥아더의 이 요구를 즉각 이행했다. 사실 이승만은 친미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동안 한국군의 상황과는 동떨어지게 허장성세인 북진통일 주장을 펼치는 등 미국에게 밉보인 상태라서 이번 기회에 자신도 미국의 말을 제대로 따른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다음날 아침부로 이승만은 기상하자마자 제일 먼저 채병덕부터 직접 보직해임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그날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맥아더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채병덕을 해임한 이후 그 후임으로 미국에서 교육 중에 급히 귀국한 정일권을 육군총참모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해임 통보서를 정일권에게 들려보냈다. 정일권이 채병덕을 찾아갔는데 채병덕은 자신이 해임된 것은 알았지만, 후임이 누군지는 모르던 판국이었고 친하게 지내던 정일권이 오자 몹시 반가워했다. 그래서 정일권이 "제가 장군님의 후임입니다. 장군님을 도우러 왔는데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채병덕은 오히려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다가 정일권의 손을 잡고 말을 높이며 "총장 각하, 이제 제가 보좌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10. 좌천과 전사
결국 채병덕은 보직해임 당한 뒤 국방장관 신성모가 보낸 "서울을 잃은 귀관의 책임은 막대하다. 죽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에게 속죄해야 한다. 선두에 서서 병력을 통솔하라"는 내용의 힐문장을 받고 영남편선관구사령부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해당 직책은 허울만 좋은 직책이었고, 말이 사령관이지 실제 휘하병력도 마산과 부산을 돌아다니며 겨우 모은 100여명[18]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채병덕만이 이런 허울좋은 편선관구사령관 직에 임명된 것은 아니고 이응준, 신태영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도 비슷한 직위에 임명되어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채병덕은 책임을 만회하겠다고 100여명 밖에 되지 않는 병력을 인솔하여 도로 전선에 나갔다. 이는 위에 언급한 신성모의 편지 내용을 전선에 나가 전사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보인다. 아무튼 장관의 힐책에 큰 책임감을 느낀 채병덕은 휘하의 병력을 7월 24일, 오덕준 대령에게 맡겨 진주로 보낸 후 자신은 송도에 있던 아내 백경화와 갓 태어난 아들을 만나 아들의 이름을 영웅의 영과 북진의 진을 따서 영진으로 지으라고 하고는 전선으로 나갔다. 여담으로 채씨 일가가 서울에서 피난가는데 실패해서 채병덕의 부관 나최강 소위가 인민군에게 총장 관사가 포위당하자, 총장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헛소문이 퍼져서 참전수기에 실리기도 했지만, 채씨 일가는 위에서 적힌 대로 피난에 성공했고, 백경화 여사는 이후 6·25 전쟁사의 중요한 1차 사료 제공자로 개전 당시의 정황에 관련된 여러 증언을 남겼다.7월 25일 오후 4시, 육본은 작전명령 70호를 하달하여 채병덕에게 이응준과 민기식의 부대를 통합하여 호남을 통해 영남으로 몰려오는 북한군을 포착 섬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때 이응준의 부대는 순천에서 여수로 철수 중이었고 민기식의 부대는 운봉에서 함양으로 철수하는 중이었으나 통신 수단이 없다보니 이들과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먼저 진주로 보낸 오덕준의 부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채병덕은 가만있을수없어 신편 5사단 예하 15연대의 소수 병력만을 지휘하여 하동에 투입되었다. 이날 오후 11시, 육본에서 작전명령 72호가 하달되어 장갑차를 앞세워 하동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1개 대대를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채병덕은 이를 위해 휘하 병력을 이끌고 무어 대령이 지휘하는 미군 19연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다가 7월 27일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 원인은 당시 한국군의 군복과 장비를 착용해서 위장한 북한군을 탐색하기 위해 미군이 채병덕을 파견하였는데, 채병덕과 그의 전속부관 이상국, 미 육군 장교가 접근하여 그가 상대 병력에게 "적인가 아군인가?" 라며 소속을 묻자 매복해 있던 북한군들은 즉각 길 양옆으로 흩어지면서 총을 갈겨댔다. 그래서 채병덕은 직접 총을 빼들고 싸우다가 북한군의 총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고 만다. 그의 죽음에 관해선 2가지 얘기가 전해지는데, 국방부의 채병덕 평전에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하며 존 톨랜드의 책에서는 온 몸에 총상을 입은 채병덕은 이상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고, 유언으로 "(신성모) 장관님께 내가 죄송해 하더라고 전해주게."라고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채병덕의 죽음은 전사로 인정되어 정부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채병덕 장군 전사비. (출처 : http://parizal.egloos.com/3702003)
원래 해당 비석은 채병덕이 전사한 위치에 건립되었으나, 그 지역의 도로가 새로 뚫리면서 기존의 도로가 폐도되어 비석을 보러 오기 힘들어지자 위치를 이전한 것이다.
3. 평가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 개전 초반의 패배를 불러온 총책임자로 평가된다.임진왜란 당시 신립과 비교하여 두 인물의 직위와 함께 초반 전황을 매우 위급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능력에 비하여 위급한 시기에 과도하게 중요한 자리에 앉아서 전황을 심히 위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3.1. 옹호
그러나 일단 자세히 뜯어보면 옹호해줄 측면은 있다. 문제는 전쟁은 일단 결과가 우선인지라 최종적인 책임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만...- 총참모장에 임명된 날짜가 1950년 4월 10일이었다. 아무리 총참모장을 이전에 2번 역임했다고 한들 6개월간 일을 안했으며, 다시 임명된 지 2개월 만에 전쟁이 터졌다.
- 채병덕의 업무 부담이 과도했다. 당시에는 합참의장이라는 직책부터가 없었고, 육군총참모장이 육군뿐 아니라 해군, 공군까지 지휘해야 했으며, 그뿐 아니라 전쟁 발발 후 국무회의 비상회의, 비상국회, 군 원로회의, 군 수뇌회의, 국방수뇌회의 등 정부, 국회, 국방부회의 참석, 전황을 파악하기 위한 전선 지도방문 그리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8개 사단에 대한 직접 지휘 등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그 임무가 너무 많고 부담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총참모장은 자신의 고유임무인 전선 산황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지휘 결심을 하여 전선의 각 부대에 지시해야 될 적시적절한 지휘 조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 계급에 비해 실전경험이 거의 없었다. 일본군 시절 병과가 포병이긴 한데 대부분의 보직을 병기와 생산에 관련된 보직을 돌았고 광복 직전까지 병기창에서 일했기 때문에 병기 병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하지만 병기창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그 당시 창군과정이었던 한국군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자원이었다. 최소한 누군가 1명 이상은 높은 곳에서 서류를 만지고 물자와 장비를 관리하는 등 군 내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 당시 관련 실무에 능통한 인물은 채병덕밖에 없었다. 창군기의 군 간부들은 대부분 전투 병과 출신이어서 명망이나 지휘 능력과는 별도로 이런 행정 실무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군대 역시 '행정조직'이기 때문에 행정측면에서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보급도 스스로 해결하던 반쯤 군벌상태에 사단 단위 조직도 경험하기 힘들었던 광복군/중국 국부군 출신이나, 전술단위까지 일본 고문단의 지휘를 받던 만주군 출신에 비해 행정직을 꾸준하게 거쳐온 채병덕의 경력은 분명하게 차별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나름 원로 취급받았던 송호성이나 김석원, 유동열 항목을 보면 알지만 송호성은 지도조차도 못 보던 사람이고, 김석원은 기본적인 군사적 능력은 있었지만 시대에는 뒤쳐진 작전을 즐겨하던 사람, 유동열은 양반 아니면 아예 사람 취급을 안했던 조선시대적 사고를 가졌기에 그나마 젊고 기본적인 행정업무 소양이 우수했던 채병덕이 자연스레 앉는게 당연한 일이었다.[19]
- 6·25 전쟁 개전 직전 한국군의 상황은 참담 그 자체였다. 북한의 준동 대비와 빨치산 토벌을 위해 인원은 급격히 늘렸는데, 미국은 이승만과의 불화 문제도 있어서 예전에 약속했던 수준의 장비와 물자만 지급했으므로 결국 만성적인 장비 및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게다가 북한과의 소규모 충돌이나 빨치산과의 전투로 인해 그나마 보유했던 장비와 물자가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일부는 파손되어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군의 훈련 수준은 그렇게 좋지 않았고, 수리시설도 조병창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려면 장비를 대량으로 조병창에 입고시켜 검수하고 정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만약 이런 파손된 장비를 방치했다면 그것대로 '파손된 장비와 보급도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사령관'으로 비난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 6·25 전쟁 개전 직전의 연이은 비상경계태세는 장병들의 피로를 극대화시켰을 뿐 아니라 군량의 고갈을 불러왔으며(대신 건빵만 잔뜩 쌓여있었다고 한다), 농촌에서는 일손이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에 군량고갈을 막기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하고 농촌 출신이 다수인 장병들을 고향 일손 돕게 할 겸 대규모로 외박을 보내야 했다. 그 시절에 이것은 만만하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남한에서 식량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여년 후에 통일벼 등이 보급되며 겨우 이루어진 것이고, 시간이 조금 지난 80년대에조차도 보급 트러블은 수도 없이 터졌다.[20]
- 채병덕 스스로도 언젠가는 북한과의 충돌이 대규모로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될수록 전투에 능한 인물로 38선을 지키는 사단의 주요 지휘관을 교체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의 특성상 빨리 대규모로 하지 않으면 부임한 지휘관이 부대를 장악할 시간이 없게 된다. 그래서 대규모 인사이동을 감행한 것에 대한 근거가 되고, 이는 행정조직의 특성상 당연한 부분인데, 교체되는 단위의 전임지휘관들이 전부 전역할 것이 아니라면 기존 지휘관과 신임 지휘관이 짝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핀포인트로 찝어서 교체하기는 어렵다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21] 실제로 이러한 전훈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을 국군조차 현재 인사발령은 집단으로 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인사발령의 시기까지 누구나(북한조차도) 예측할 수 있게(소위, 인사철) 정해놓은 것을 보면 채병덕의 대규모 인사이동은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
- 미군이 비록 그가 관리하던 일제의 조병창을 부수기는 했지만 그의 주도하에 결국 어느정도 복구하기는 했는데 여기서 초기의 시험적인 한국제 국산총기들이 생산되었다. 대한식 소총을 필두로 스프링필드와 같은 노리쇠 방식의 볼트액션식 소총이나 반자동 소총의 시제품까지 생산하였으며 동시에 50만발 이상의 99식 소총의 탄환도 생산했는데 미국은 이를 채병덕의 공로로 보고 있었다.# 상술되었듯 채병덕은 일제의 조병창이 국군의 창군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잘 관리해왔는데 아무래도 국산 무기 개발 등의 조병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지형도/상황도조차 구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채명덕의 무능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데, 토목공학에서 측량실습을 해 봤다면 지형정보의 습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절에 GPS는 당연히 없었고, 지형정보를 생산하는 측량기사 양성 또한 지금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이자 위상이었던 경성제국대 공대와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소수로 배출되는 부분으로서 상당히 고급인력과 고급정보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단적으로, 국군에서도 2002년에야 독자적으로 지리/공간정보의 생산이 가능한 지형정보단의 전신이 창설되었다는 점, 정보사령부/정보본부 편제에서도 이러한 지형정보부문은 다른 HUMINT, SIGNIT 등과 동등하게 독립된 전문성 있는 부문인 점, 심지어 언제나 TO가 딸려서 기행병과 수장들도 돌려가면서 장성을 배출하는 현실인 공군조차 영상/지형정보 수집을 위해 글로벌 호크 등을 운용하는 항공정보단의 수장 자리에는 언제나 준장을 앉힐 정도로 중시하고 있는 점을 보면 개판 5분전이었던 당시 국군에서 이러한 고급정보를 생산하지 못했다고 국군의 전체수장이 비난받는 것은 이러한 고급정보의 가치를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하는' 일반 정보로서 다루기 어렵다는 부분에서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심지어 선진적이었던 미군의 경우에도, 명장으로 인정받는 맥아더조차 뉴기니 전역의 초반부(코코다 트랙 전투)에 지형정보 파악 미숙을 실패하여 작전에 실패한 것을 본다면, 이를 이유로 과도한 비난을 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다.
- 옹진반도의 17연대 퇴각을 알아채지 못한 것 역시, 국군이 사단수준의 C4I 구축을 끝마친 것은 00년대 후반이라는 부분에서, 군 수뇌부의 전장상황 파악이 어려웠다는 점은 시대적 측면으로 봐야 할 것이다.
- 채병덕 최대의 실책으로 기록된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조기 폭파의 경우, 한강교 폭파 계획은 채병덕이 수립한 것이 맞으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채병덕이 결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당 상황의 경우 서울 함락은 시간문제였으니 폭파 계획 자체를 수립한 것은 정당하며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굳이 실책을 따지자면 폭파를 담당할 부대의 지휘관에게 누구의 명령을 받고 어떤 시점에서 폭파할지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생도대대의 투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당시 혼란스러웠던 국군의 상황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순사건 등 숙군작업의 한창 속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충성심 강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전방부대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일어난 강/표 사건 등 고급지휘관급의 월북이 일어난 상황이고, 이 경우 군 지휘부가 충성심 측면에서 믿을만 한건 자신들이 직접 장악하고 있는 수도부대 혹은 직할부대밖에 없으며(그 예시로서 백선엽 장군의 회고를 보면 직할대인 군악대나 공병대의 투입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실제 그 장교자원의 자질과 장교자원이 육성된 기간을 살펴보더라도, 이 당시 단지 '관상'만으로도 교육기간 중 20명 가까이 교육과정에서 탈락시키던 교육수준의 문제(심지어 이는 베테랑 오브 베테랑인 광복군 출신 유동열이 하던 일이다), 1년제 중 소집된 지 약 20일 밖에 되지 않은 생도들의 매몰비용이 낮았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념적, 이상적 측면에서 장교자원의 투입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나, 당시 현실에서 실질적 측면에서 이러한 것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채병덕의 명령은 대부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전쟁이 아닌 사무와 행정, 보급 능력 때문에 장군으로 임명받은 사람이라는 것과 전면전을 준비하기 위한 지시들이 타이밍이 안맞아 병크가 난 것, 즉 불운이 좀 있었다. 어떤 면에서, 공교롭게도 출신 병과가 같은 포병인 미 육군중장 레슬리 맥네어 장군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3.2. 비판
하지만 문제는 경계 해제와 지휘관 교체 등의 명령이 하필이면 '6·25전쟁 개전 직전에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 육군은 개전 초반 물질적인 열세보다 더 심한 열세에 빠졌다. 당장 38선을 지키는 사단의 병력이 심하면 절반 정도까지 외박을 나가서 전방에서 전투할 사람이 줄었으며, 장비 역시 정비한다고 대량으로 조병창에 보내버리는 바람에 장비도 부족하고 화력지원도 약해졌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지휘관은 현지부대 장악은 커녕 담당구역 파악도 안된 상태였고, 제7보병사단 같은 일부 사단의 경우 새로 배속된 부대는 아직 기존 주둔지에 있는데 자신의 부대만 새로 배속된 곳으로 보내버려서 병력이 더욱 줄어드는 기괴한 상황에 놓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요한 시기에 훼방을 놓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만 실책을 저질렀다면 '운수 없는 사람' 정도로 평가받았을 것이나 이후에도 본격적인 훼방을 놓았기에 처참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채병덕은 전쟁 발발 2일차인 6월 26일의 보고에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와중에 서울 사수를 자신했고 명령만 있으면 4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으며 육군 제17연대[22]가 배편으로 부랴부랴 인천으로 철수하고 있는 와중에 해주로 진격하여 반격할 것이라는 둥 헛소리를 해댔다.
- 개전 후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23] 전면전시 사용할 작전 계획도 거의 수립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나마 있는 계획조차 현실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개전 후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군대 지휘 경험이 있는 군 원로들을 급히 소집해서 만든 가칭 원로회의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이 회의에 참석한 멤버들은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 이범석, 김정렬 등으로, 국민당군 및 광복군, 만주국 육군, 일본 육군 등에서 야전 지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이 채병덕의 삽질을 보고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때문에 "당신은 지금 분대장처럼 보고하고 있소!"라는 비판 뿐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대책을 조언이라고 읽고 강요까지 받는 처지에 몰린다.
- 평소 한국군의 실상을 감안하지 않고 1 대 10 필승론이나 200만 한국 장정 훈련같은 호언장담을 했다.[24] 물론 이런 짓은 이승만 등 다른 정치인들도 했지만, 문제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떠벌리고 다닌 능력을 보여줘라!는 압박을 받았다...는 말이 있으나 국방부 발간 6·25 전쟁사에서 이야기하기를 그렇게 정치인들이 결의서를 채택하여 이를 행정부인 이승만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이승만은 각료들의 건의로 피난을 간 후였고 결국 입법부도 같이 피난갔기에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최악의 실책인 '동두천 반격 작전'은 채병덕의 판단으로 시행되었다는게 밝혀졌다.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정부 문서에서 이렇게 서술할 정도로 채병덕의 실책은 너무나 컸다. 게다가 해당 반격 작전 및 뒷수습을 위해 후방에 있던 3개 사단의 병력을 쪼개서 축차 투입하는 바람에 사단장 등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물론(?) 채병덕과 대한민국 육군본부도 투입한 부대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이렇게 축차투입한 병력은 당연히 축차 소모 신세. 더 암담한 건 어디로 가서 방어하라는 지시만 있었지 마구잡이식으로 보낸 부대를 누가 통합해서 지휘할지 정한다던가 육본과 부대간 그리고 부대와 부대간의 연락망을 확립한다던가 부상병을 후송하고 탄약과 식량을 추징해 보낸다던가 하는 조치가 일절 없었다. 이 때문에 많은 부대가 원래의 전투력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여기에 더해 마땅히 후방으로 대피시킨 후 빨리 장교로 임관시켜서 부대를 이끌어야 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생도대대란 이름으로 전선에 보병으로 축차투입시키기도 했다.[25] 앞의 200만 장정 훈련 운운과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정말 삽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군사관생도는 미래의 장교들이다. 전쟁이 터진 지금 상황에서 미래의 장교들을 1회용 총알받이로 내보낸 것이다.[26] 그것도 축차 소모 & 마구잡이 투입이었다. 200만의 장정을 어찌어찌 모아서 훈련시켜 소총을 쥐어주었다 한들 그들을 이끌 장교가 없다면 전투를 치를 수가 없다. 반면 대한민국 해군은 비록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렀을 때에만 일시적으로 생도들을 해군 육전대로 편성해 육전을 시킨 적은 있으나, 전선이 안정되자 도로 복학시켰고 종전시까지 해군사관학교는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시켜 임관시켰다.
- 즉결처분권에 대한 비판도 있다. 6·25 전쟁 초기에 탈영병이 많으니까 채병덕 총장이 사살령을 내렸으며 이후 이를 알아챈 미군 측이 즉결처분이 전쟁범죄라고 강력하게 항의해서 6개월 뒤에 중단 명령이 내려갔는데 이게 제대로 하달이 안 됐다고 한다.#
- 서울을 사수할 생각은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한 것이 없었다. 병력만 마구잡이 식으로 보냈지, 보낸 병력과 통신망을 확립한다거나 보낸 병력이 누구 지휘를 받아 싸울지 정한다거나, 막상 소모한 탄약을 보충해준다거나 하는 작전 통제 및 군수지원이 전무했다. 덕분에 서울과 부평에 집중된 장비와 물자를 전방에 뿌리거나 후방으로 이송하지 않고 당장의 전투지휘에만 매달리다가 결국 의정부 방면이 돌파되니 당황해서 물자와 장비를 그대로 방기하고 심지어는 병력 철수나 피난민 통과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당시 정부에서도 제대로 서울을 포기하는 계획을 짜지 못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피신만 간신히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꼴이니 정부 기밀 문서나 한국은행 금괴같은 사소한 것들에 신경쓸 리 만무했다. 다행히 이는 당시 대한민국 국회 부의장이었던 조봉암과 한국은행 구용서 총재의 노력으로 폭파 직전에 대피가 가능했다.[27] 하지만 민간인이 주축이 된 정부와는 달리 전쟁을 염두에 둔 군인이 비상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것은 욕을 먹어 마땅한 일이다. 덕분에 서울 시민들과 피난민이 한강 북쪽에 갇혀 버렸으며, 서울 북방에서 싸우던 병력들이 일제히 붕괴되었다. 당시 동두천-의정부시 축선에서 이미 붕괴되기 직전인 부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산-파주 축선을 간신히 지키고 있던 1사단 병력도 거의 모든 중장비를 버리고 간신히 장병들만 한강을 건너서 후퇴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후퇴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했다. 따라서 서울을 함락당한 개전 후 3일 시점에서 육군본부가 장악한 병력은 개전전 9만 8천명에서 2만 3천명으로 엄청나게 축소되고 만다. 한마디로 말해 3일만에 전체 육군 병력의 76.6%을 날린 셈이다.
위와 같은 수많은 행적들로 인해 채병덕은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와 함께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전쟁당시 그의 행적들을 보면 수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개전 당시 2사단장을 맡았던 이형근 장군 등은 전후 채병덕의 행적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3.3. 결론
종합하자면 평시엔 유능하나 전시엔 무능한 사람, 가장 위급한 시기에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분야에서 터무니 없는 중책을 맡아야 했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채병덕 본인도 평시에 필요한 능력인 꼼꼼한 사무처리나 신중한 판단을 잘했다. 앞서 언급한 일제강점기의 행적을 봐도 적극적인 친일부역자는 아니었고 북한과 내통한 증거도 전혀 없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결과를 가지고 따지는 것이며 과정은 참고할 수준에 불과하다는 문제도 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고의는 아니었으나 부적절한 명령을 내렸고, 개전 후에는 당황해서 추가적인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에서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채병덕 본인도 그 일로 인해 육군의 최고 위치에서 거의 강제로 끌려나와 소장 계급의 인물이 맡기에 어울리지 않는[28] 미군 부대의 통역 겸 안내인을 맡아서 호위병도 없이 단독으로 전선에 복귀했다가 전사했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이다.문제는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것으로, 채병덕은 일본 육군에서 복무할 시절에는 병참과장이라든가 조병창장 등 전투지원 분야에서만 일했을 뿐이지 실제 전투부대에서는 채병덕 자신의 계급에 걸맞은 지휘관은 커녕 소총분대장조차 해본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때문에 전시에 필요한 능력인 임기응변이나 빠른 판단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한 상황에 이런 인물을 육군 전투부대 최고의 지휘관 자리인 육군총참모장의 자리에 앉힌 건 채병덕의 병크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런데 이 사달의 근본을 따져보면 일본 육군 장교의 교육훈련체계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실제 일본 육군의 장교훈련이라는게 철저하게 자신이 담당하는 병과만 훈련시키는 방식이어서 장교로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시키는 건 전투병과 장교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자연히 비전투병과의 장교는 최소한의 군사교육이나 지휘경험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받은 훈련이 없으니 뭘 보여줄 수 있겠나? 이런 문제점을 일본 육군도 스스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정식지휘관의 유고시 지휘대행을 맡는 게 남은 자들중 가장 높은 계급의 상급자가 아니라 전투병과중, 그것도 전투병과끼리라면 보병중 가장 상급자였다고 한다. 즉, 극단적으로 말해 비전투병과의 대령(대좌)이 전투병과의 소위 지휘를 따라야 했다는 뻘짓을 하게 만들었다. 당장 이렇게 할 경우 지휘 경험같은 문제점은 약간 해결되지만, 장교간 계급체제가 붕괴되는 등의 큰 부작용이 초래된다.
결론적으로 육군총참모장 직위보다는 교육사령관이나 군수사령관을 맡았으면 지금보다는 나은 평가를 받았으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채병덕의 전례로 인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인사체계가 크게 달라졌는데 비육사출신 + 특전사 또는 기행병과가 아닌 이상 소위로 임관하면 무조건 소대장이라는 불문율을 만들어냈다. 즉 육군사관학교는 졸업하면 무조건 소대장이고 비육사라도 특전사로 빠지거나 군종, 의무, 간호, 의정, 인사, 재정, 정훈같은 병과가 아니라면 무조건 소위 임관과 동시에 소대장으로 임명한다. 또한 모든 장교과정에서는 임관할 때 기행병과로 배정받더라도 지휘통솔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은 먼저 병과를 정하고 해당 병과에 필요한 훈련만 시키는 일본 육군과는 달리 병과없이 훈련 먼저 시키고 나서 소위 임관 일보직전에 병과를 배정하는 체계를 도입하게 되었다. 덕분에 대한민국 육군은 기행병과 소위라 해도 보병소대장으로서의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
4. 여담
-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인물인데다가 고의성과 관계없이 6.25 전쟁 초기의 참패를 불러왔기 때문에 정식으로 다룬 전기가 드물다. 1990년대 이후 나온 여러 서적에서는 노골적으로 흑막으로 다루어지기도 했고 육군사관학교 8기생 회고록에서 거의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다만, 흑막설의 증거라는게 평양 출신이라는 것과 그 주변의 전속 부관이 나갈 때 '항상 정보를 갈망하는 눈초리였다'가 전부. 육군사관학교 8기 회고록에서의 묘사는 6.25 전쟁 당시 소모품 소위였던 8기생들의 분노라고 보면 된다. 유일하게 중립적으로 나온 책이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나온 《채병덕 장군과 6.25》인데 박경석 장군[29] 같은 경우는 이 책을 불쏘시개로 간주하지만 의외로 개념서이다. 채병덕에 대한 변명과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를 제기한 이형근 장군의 전략적 실책[30]과 채병덕과의 불화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채병덕이 이형근과 불화가 생긴 원인은 채병덕이 '군번 00001'을 그렇게나 받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그 00001번의 군번이 이형근에게 갔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형근이 이응준의 사위였다는 점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다. 실제로 미국 군사 고문단의 이형근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정치적 혹은 친분에 의해서 계급이 오른 사람'이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고 중대하다면 중대할 수도 있는 이 원인으로 채병덕과 이형근은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었다. 물론 채병덕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경력이나 기타 여러 사항을 봐서는 분명히 채병덕이 앞번호를 따야 하고 이형근은 5번대라는 것이 정설.[31] 이형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번을 딴 것은 군사영어학교 성적 때문이라는데 사실 당시 군번을 정할 정도의 평가 시험은 없었다는게 정설이다. 나중에 6.25 전쟁이 터지고 서울 함락 위기가 오자 이형근에게 채병덕이 "휘하 부대를 즉각 전선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는데 이형근이 "지금 전열도 못 갖췄는데 북한군 밥될 일 있소?" 하면서 거부했고 격노한 채병덕이 이형근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는 등 상황이 아주 긴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 서류상 병과는 포병 출신인데 사실상 병기 병과 장교의 업무를 수행했던지라 실제로 현역 병기 병과 장교들 중 전사(戰史)에 관심있는 장교들은 거의 흑역사 내지는 X맨 취급하거나 그 사람 포병이라고 발끈하면서 애써 무시한다. 실제로 2009년도 병기 병과 초군반 훈련 중 보병 전술 훈련 교육 시간에 교관인 보병병과 대위가 앞에 병기 병과 교육생 소위들을 깔아놓고 전시 적접 지역에서 수하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채병덕을 '교보재'로 사용한 전례도 있다.
- 미 육군 군사 고문단장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가 아니었으면 권총으로 자살했을 수도 있었다. 조선인민군에 의한 함락 직전 서울에서 있었던 마지막 회의 이후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가 채병덕 장군을 두고 나왔는데 지프를 타고 이동하던 중 채병덕이 권총을 자기 앞에 두고 노려보고 있던 것이 생각나서 경악하여 다시 돌아와 보니 아직까지 그 자세 그대로 권총만 노려보고 있기에 데리고 나왔다 한다.
- 군인으로서는 매우 부적합한 신체 스펙인 키 작고 뚱뚱한 체형이다. 저 당시에는 일본군 경력 덕분에 고위 장교에 오르기까지 했으나 21세기 현역병 병역판정검사 기준으로 보면 과체중 면제 판정을 받는 체형이다. 특히 비만도가 매우 높으며 채병덕보다 키가 21cm나 큰 유민상과 몸무게가 거의 비슷한데 그런 유민상도 비만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채병덕은 정말 엄청난 뚱보이다.
5. 대중매체에서
- 1985년작 KBS 광복 40주년 대하드라마 <새벽>에서는 배우 유종근이 연기했다.
- 1990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서는 배우 심양홍이 연기했다.
- 2002년작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남영진이 연기했다. 6.25 전쟁 초반에 신성모와 세트로 나오는 편이며 84화에서 사망한다. 적은 수지만 가끔씩 야인시대/합성물에도 등장하는 편이다. 근데 채병덕은 6.25 당시 35세였고 배우 남영진이 52세 였던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김두한을 뛰어넘는 노안이다. 자세한 건 채병덕(야인시대) 항목 참조.
6. 참고 문헌
- 6.25 전쟁사 1,2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6.25 전쟁과 채병덕 장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6.25 전쟁과 대한민국 정부의 전쟁지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존 톨랜드의 6.25 전쟁 1권, 존 톨랜드, 바움.
[1] 창씨개명하면서 쓴 일본식 이름은 오시마 헤이도쿠(大島秉徳).[2] 27세 병(秉) 주(柱) 항렬[3] 성은 大島이고 헤이토쿠는 병덕(秉德)의 일본식 독음이다.[4] 일설에 따르면 성질을 참지 못하고 일본인 조병창장을 두들겨팼다고 한다.[5] 참고로 독립운동가 이용상이 보성전문에 다니다가 부평조병창으로 징용되자 왜놈 무기는 만들지 않겠다고 탈출했다가 걸려서 퇴학당하고 바로 징병당했다.[6] 그는 1960년에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미군들의 이삿짐을 실어주는 군납 운송업체를 차려 돈을 많이 벌었지만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흉계로 회사를 빼앗기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진 채 해외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임선하는 김형욱이 투숙했던 호텔 방에 찾아가 침대를 발길질할 정도로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이후 미국에서 사업가로 정착했다.[7] 평소 정일권의 경험과 실력을 높이 샀던 채병덕은, 1년 후 국방부 참모총장이 된 후, 정일권을 육군참모차장으로 불러 다시 중앙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정일권을 다시 중용할 무렵에는 "정일권이 언제 오나?"며, 조속히 중책을 수행할 것을 독촉했다.[8] 1공 시기에 잠시 있던 임시직으로 명목상 육참총장과 해참총장을 모두 지시할 수 있는 군의 최선임 장교를 뜻한다.[9] 채병덕은 일본군 출신이었으나 비전투병과였다보니 일본군 출신자들의 친일행위에 껄끄러움을 느낀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에게 차악으로 인식되었다.[10] 다만 이는 두 대대장만 밀약한 것이고, 예하 병력들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아 몇몇 중대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남쪽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이 때 강태무 대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중이던 정승화도 작전에 참가하겠다고 자청했지만 강태무가 "다 나가면 부대는 누가 지키나? 자네는 남아있으라"며 거절하였다. 덕분에 그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계속 복무하며 육군참모총장까지 임명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12.12 군사반란에 휘말려 이등병으로 불명예 전역하는 치욕을 겪었지만...[11] 1946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 협의에 따라 1949년 3월까지 남북교역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남측에서는 통제기구도 없이 의약품, 전기제품을 비롯한 군수물자가 북으로 보내졌으며, 북측에서는 교역통제기구를 만들어 명태, 오징어 등 식료품만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1949년 1월 육군 제1사단장에 취임한 김석원 준장은 이에 분개하여 남북 교역장에서의 교역을 중단시킨다. 그러던 4월 중순 어느 날 김석원 준장은 이북에서 토성 쪽으로 넘어오는 명태가 실린 트럭 20여 대를 압류한다. 이를 보고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압류물자를 화주에게 돌려주라는 명령을 수차례에 걸쳐 하달하나, 김석원 준장은 이에 불복종하였다. 오히려 명태를 팔아 음료수, 과일, 사탕 등 장병들의 부식을 구매해 설악산 전투에 투입되었던 병사와 노무자들에게 배급했는데, 이는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남북교역을 잘 단속하라는 분부도 받은 데다가, 일본 육사 한참 후배인 49기 출신 채병덕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사람의 싸움은 경무대로 옮겨진다. 그러나 채병덕 총참모장 역시 군 작전상 첩보 수집활동을 명목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부 교역 수행의 허가를 받은 상태였으므로, 이 대통령은 김석원 준장과 채병덕 총참모장을 모두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 후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되는데, 초기부터 정부의 무리한 사수 명령을 그대로 받들려는 채병덕과, 서류만 있고 제 위치에 편제되어 있지 않은 사단들을 갖고 뭘 하려나며 현실을 지적하는 김홍일 이하 숙장들이 충돌하였던데다, 실패를 거듭한 채병덕과 달리 이들 노장들은 혁혁한 전공까지 세웠기 때문이다.[12] 이 때 "뎐군에 비상하라우"라고 명했다는 후문이 있다. 위에 인용한 발언들에 나오듯이 채병덕의 말투는 평안도 사투리가 짙게 묻어나왔다.[13] 일명 짐 하우스먼, 혹은 하우스만. 하우스먼은 여순사건 진압, 남로당 숙군 등 한국이 강력한 반공체제를 수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사형선고를 받았던 박정희를 구원하고 이승만에게 정일권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추천하는 등 한국군 상층부 인사를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무려 35년간 한국에 거주하면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로 막후에서 한미관계를 조율했다. 1995년도에 회고록이 나왔는데, 제목이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14] 실제 북한군의 탱크가 한강대교 북단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였고 6.25 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마가렛 히긴스에 따르면 "교량 폭파는 서울이 남한의 수중에 있고 단지 북한군 탱크 3대가 서울로 진격하는 시점에 일어났다."고 한다.[15] 모든 책임을 최창식 대령에게 떠넘기고 군법회의를 거쳐 사형에 처했다. 참고로 1962년 최창식 대령의 부인이 사건을 재심 신청 후 사형 판결이 무효를 받으며 1964년 최종으로 무죄 선고를 받는다. 추가로 한강대교 폭파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아내와 돌도 되지 않은 아들 역시 강북에 있었다.[16] 사실 채병덕은 실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전황에 맞는 작전계획을 세우지 못했다.[17] 100만 명이란 말도 있다.[18] 이는 대대도 아닌 딱 중대의 병력규모에 불과하다. 즉, 말이 좋아 사령관이지 중대장 취급을 받은 것.[19] 병 출신들에게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일상' 업무에 대해서, 부상 등으로 옮겨온 특전부사관 출신의 상사 행보관과 일반부대에서 행정관련 업무를 해온 행보관이 있다면, 누구 밑에서 부대가 더 원활하게 돌아가겠는가? 이는 어느 한쪽을 비하하는 것이 아닌 '필요성' 측면에서 행정업무에 대해서도 인적전문성이 효율로서 발휘되는 것을 든 예시이다.[20]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피처폰/삐삐가 얼마나 먼 세월인지 생각해보자.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개선이 시작된 것이다.[21] 그리고 핀포인트로 찝어서 교체하면 지휘관 둘이 보직 맞바꾸는 수준을 못 벗어난다. 결국 지휘관을 재배치하려면 집단으로 인사발령 내는 건 피할 수 없는 것.[22] 해당 연대는 옹진반도에 주둔중이었는데, 38선이 육로를 막아버린 탓에 뱃길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23] 제대로 된 상황도(狀況圖) 하나조차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24] 정작 200만 장정 훈련 소리를 들은 맥아더는 채병덕이 매우 무능한 인물이라고 여겨 이승만한테 채병덕을 해임시키라고 강력히 요구했다.[25] 당시 육군은 9회에 걸쳐 일본군/독립군 출신들을 잠깐씩 교육 받고 임관시켰다. 그러나 미육군사관학교처럼 젊은 인재들은 4년간 교육시켜서 장교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여 시범삼아 1년 과정으로 교육 중이었고(육사 10기) 4년제로 모집한 333명의 젊은이들이 입교 25일째 교육중이었다. 채병덕을 이들 육사 10기 생도와 입교 25일째인 생도들을 고기방패로 투입시킨 것이다.[26] 심지어 구 일본군의 경우에도 본토가 본격적으로 위협을 받기 시작한 1944년 말 이후, 군사훈련을 받은 생도들을 예비대대로 편성하여 전장에 투입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망하더라도 국가의 미래를 해칠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당한 적 있다. 물론 그 일본군은 카미카제 따위를 정식 전술로 채택한 만큼 국군보다 나을 건 없다.[27] 하지만 경무대(청와대)의 일부 기밀문서들은 적에게 노획당했다. 또한 다수의 국회의원이나 김규식 같은 고위급 인사들이 납북당했다.[28] 지금을 기준으로 해도 그러한데 당시에는 국군이 창군 과정에 있었으므로 소장 계급을 단 사람이 겨우 네다섯명 뿐이였다. (채병덕, 김홍일, 이응준, 정일권 등) 조금 더 와닿게 말 하자면 지금 대장 계급이 당시의 소장 계급 비슷했다고 생각하면 된다.[29] 박경석 장군은 사격훈련조차 받지 못한 신입생도로 채병덕에 의해 최전선에 투입됐고 살아남고도 다시 소위로 최일선 소대장으로 나서서 전체 기수의 반이 죽은 생도 2기생(첫 4년제 육사 입학 기수)이다. 당연히 채병덕을 옹호하는 것에는 반발이 있을 수 밖에 없다.[30] 개전 시간은 4시, 국방부에서 후방 부대 지휘관들에게 전방으로 귀환하라고 구두 명령을 내린건 8시, 이형근의 주장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올라간건 오후 2시이다. 재밌는건 이형근의 군사 고문관은 2시 이전에 명령을 들었다는 것으로 고의 혹은 실수로 늦게 올라간 것이다.[31] 채병덕은 일본육군사관학교 49기 출신 소좌, 이형근은 일본육군사관학교 56기 출신의 대위였다.[32] 용의 눈물에서 유만수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