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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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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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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부여군·청양군)
제17대
김학원
제18대
이진삼
제19대
김근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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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대한민국 제10대 체육청소년부장관
이진삼
李鎭三 | Lee Jin-sam
파일:이진삼의원.jpg
출생 1937년 2월 10일 ([age(1937-02-10)]세)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본관 용인 이씨
현직 제13대 충청향우회중앙회 총재
재단법인 충청장학문화재단 이사장[2]
재임 기간 제28대 육군참모총장
1990년 6월 11일 ~ 1991년 12월 5일
제10대 체육청소년부장관
1991년 12월 19일 ~ 1993년 2월 25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배우자 강순정[3]
자녀 1남 2녀, 차녀 이운한[4]
학력 은산국민학교 (졸업)
부여중학교 (졸업)
부여고등학교 (졸업)
육군대학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 / 석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5] / 석사[6])
종교 개신교 (기성)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8
경력 제18대 국회의원
제2대 체육청소년부장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
자유선진당 전당대회 의장
자유선진당 최고위원
자유선진당 윤리위원장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5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9년 ~ 1991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주요 보직 육군 제9공수특전여단
육군 제21보병사단
국군정보사령관
육군 제3군단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
1. 개요2. 생애
2.1. 군인 시절2.2. 정치 경력2.3. 정계은퇴 이후
3. 사건사고 및 논란
3.1. 정치 테러 및 약속 불이행3.2. 천안함 피격 사건 생존장병 자폭 음모론 주장3.3. 군번줄 지적 논란3.4. 그 외 논란
4. 여담5. 소속 정당6. 선거 이력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자 군인. 하나회 출신이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대장.

2. 생애

1937년 2월 10일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화산중석[7]과 구봉광업소[8] 중 1개 광구의 소장을 역임해서 나름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9] 은산국민학교(1949년 졸업), 부여중학교(1952년 졸업)을 거쳐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3학년 때 부여고등학교로 전학해 1955년에 졸업했다. 부여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15기),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국방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1992년 12월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공안행정 전공으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 15기로 입학해[10] 1959년에 육군 소위임관했으며, 병과는 보병이었다. 육사 동기생으로는 고명승, 나중배, 민병돈, 권영해 장군이 있다.[11] 임관자 성적 기준으로 176명 중 120등으로 졸업했다.[12]

본인 발언에 따르면 생도 시절에는 장준하사상계를 읽으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졌었다고 한다.#

2.1. 군인 시절

파일:이진삼 장군.jpg
육군참모총장 시절
첫 보직은 제25보병사단 GP장이었다. 이후 제6군단 하사관학교[13]을 거쳐 25사단 72연대 3대대 11중대장을 지냈는데 중간에 연대장이 바뀌게 된다. 그 연대장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윤필용이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이었던 전두환은 신임 연대장으로 부임한 윤필용에게 중대장이었던 이진삼을 소개시켜 주었다.# 한편 윤필용의 권유로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한편 이 시기 방첩부대 특공대장을 맡게 되는데변영권, 조동화 테러사건으로 조사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참전했다.[14]

1968년 11월, 서산군 무장간첩 섬멸작전에 참여하여 무장간첩 2명을 포복으로 20m까지 가서 수류탄 투척으로 폭살한 바 있다. 1969년에는 8사단 보안부대장으로 전보되는데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의 후의로 옮기게 된 것이었다. 이후 보안사령부 행정처 인사과장직을 맡아 김재규를 상관으로 모셨는데 김재규는 윤필용 라인이었던 이진삼을 좋게 봐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김재규를 좋게 보면서 차지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15]

1972년 중령 진급 후 제8보병사단 21연대 3대대을 맡았다.[16] 윤필용 사건의 여파로 제15보병사단 38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했다.[17] 이 당시 전역을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평소 교분이 있던 육사 선배들인 차규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소장),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 노태우 9공수여단장(준장) 등의 도움으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이동했다가 다시 대령(진) 때 9공수여단 참모장으로 이동하여 노태우를 보좌하였고 1975년에 대령 진급 후 국방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77년, 이진삼 대령은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61보병연대장[18]으로 영전했고[19], 육군 사격지도단장직을 역임했다.[20] 1980년 1월 육사 15기 동기생 중 최초로 준장으로 진급했다.[21] 같은 해 7월 한일수 장군[22](육사 11기)에게 사격지도단장직을 이임하고[23] 제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했다.

준장 시절 특전사 참모장을 지내며 특공무술을 고안한 창시자 중 하나라고 하는데, 정작 특공무술 항목에는 이진삼의 이름이 없다. 특공무술을 고안한 창시자 명단에 장수옥, 박노원, 이원익 밖에 없어서 논란이 있다.

1980년에는 특전사 참모장에서 자리를 옮겨 육군특수전사령부 제9공수특전여단장에 취임했는데, 이는 단순히 운 좋은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이 강하다. 이진삼의 바로 전임 여단장인 윤흥기 준장은 바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진압군 측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흥기 장군은 갑종장교 출신으로 하나회가 아니었다. 윤흥기 장군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특전사 9여단 병력을 데리고 인천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출동했는데, 서울로 가던 도중에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이었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24]이 출동을 취소하고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군끼리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상호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자는 전두환 장군 측의 신사협정 제안을 진압군을 지휘하는 육군본부 측이 받아들이는 바람에 진압군측 총책임자였던 윤성민 장군이 윤흥기 장군에게 회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윤흥기 장군은 반란군 측에 가담하지 않고 진압군의 명령에 따라서 전두환에게 밉보인데다가, 하나회가 유달리 경계한 갑종장교 출신이라서 전두환의 말을 잘 듣는 하나회 인사로 갈아치울 필요가 있었고, 그 하나회 인물이 바로 이진삼이란 얘기이다.[25]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경호실장과 정계진출(11, 12대 총선 출마) 권유를 받았으나 모두 고사하였다.[26]

1982년 12월 소장 진급과 함께 제21보병사단장이 되었고, 이후 육군정보사령관을 지냈다. 하나회 소속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겉돌았는데, 이는 당시 하나회 내에서 전두환 계파가 노태우 계파 인사들을 견제했기 때문이다.[27] 당장 21사단이나 3군단은 육군 내에서 가장 근무환경이 열악한 편에 속한다. 다만,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땅굴 찾는데 미쳐 있어서 일부러 해당 보직으로 보내달라고 싹싹 빌었다고 한다.

1987년 1월 중장 진급과 함께 육군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될 예정이었으나 북한이 파놓은 땅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대통령에게 간청한 결과 제3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28]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던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가서 "총장님 부하들(황원탁, 이재천)은 제가 구제했고 대대장인 아들은 제가 챙기겠습니다."라면서 회유했다고 한다.

이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노태우 라인에 속했던 이진삼이기에 노태우의 후광으로 육군참모차장이 되었고[29], 9개월만에 대장 진급하여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30]

그리고 이진삼은 당시 3군 사령관인 전두환 라인 고명승보다 중장은 1년, 대장은 1년 반이 늦었지만 1990년에는 고명승을 제치고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31][32] 여기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계산도 포함되었는데, 전두환 계파인 이종구국방부장관으로 영전시키면서 자신의 라인인 이진삼을 육참총장으로 올려서 일종의 대결구도로 만든 것.[33] 그러나 국방부장관이종구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었는데[34] 당시 국방개혁 문제가 요인 중 하나였다. 육군참모총장의 권한을 줄이고 국방부장관의 권한을 키우려고 했는데 여기에 이진삼 육군참모총장이 반발했고 전두환 - 노태우 간의 하나회 계파 갈등이 얽히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결국 임기 6개월을 남기고 전두환 라인인 김진영[35]에게 자리를 넘기며 퇴임한다.[36] 이종구 장관도 15일 뒤에 동반 경질되었다. 김진영전두환 라인이었고, 노태우 입장에서는 자신의 대통령 임기도 끝을 바라보고 있고 인망이 넓은 데다가 전두환 라인의 수장격인 김진영을 버리기 부담스러운 것도 있어 임기 말에 일종의 유화책을 쓴 것.[37]

2.2. 정치 경력

파일:이진삼의원.jpg
정치인 시절 프로필 사진

1991년 12월 6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후[38]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14대 총선 출마를 위해 장관직에서 물러난 박철언의 후임으로 체육청소년부장관에 임명, 노태우 정부가 끝날 때까지 재임하였다.[39] 당초 본인은 썩 원하는 자리는 아니었다고 하나 주변의 권유로 수용했다고 한다. 이후 KBO 총재를 이웅희에서 이상훈으로 교체하는데 힘을 썼으며[40]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반YS 진영에 있었다.

1993년 정보사령관 시절의 정치테러로 인해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징역 2년을 구형받았는데 당시 수사검사가 천성관이었다. 이 두 사람은 과거 21사단장과 사단 법무실 소속 군 법무관의 관계였으며 이 당시의 일 때문에 극대노한 이진삼은 자신의 자서전에 천성관에 대해 크게 분노했음을 적어두었다.[41]

집행유예형을 받으면서 피선거권이 박탈되었지만,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피선거권을 회복하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종필의 대항마로 김영삼의 부름을 받아(...) 신한국당 후보로 부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더블 스코어로 낙선했다.[42][43]

김종필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인 2008년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부여군-청양군 선거구에 출마, 당선되어 제18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국회의원 임기 동안 각종 설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논란을 일으켰다.[44] 자유선진당에서는 전당대회 의장(08~10), 최고위원(10~12), 윤리위원장을 역임했다.

결국 76세의 고령이라는 점과 각종 설화로 인한 논란 때문에 19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다.[45]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김근태 후보에게 패하여 재선에 실패했다.[46] 김근태 의원이 1년도 지나지 않아 의원직을 잃으면서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 출마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결국 출마하지 않고 그대로 정계를 은퇴했다.

2.3. 정계은퇴 이후

2015년 1.21 사태 47주년을 기념하여 김신조 목사와 함께 채널A 시사병법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회고하였다.[47] 당시 무장간첩이 계속 출몰하자 병사들의 군 복무 기간이 늘어나 휘하의 상병장들이 죽상으로 다녔다는 회고라던가 이 사건으로 인해 무장간첩 토벌에 꽂혀서 군생활 내내 땅굴에 미쳐있었던 일 등을 흥미롭게 회고했다.

2016년에 『별처럼 또 별처럼』이라는 을 출간했다. 중부대학교 등 충청권 대학교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기도 했다.

2017년에는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해당 기사(뉴스타운) 그리고 누군가가 불법으로 신형 전투복을 입수, 착용한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심지어 비행 점퍼를 착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조종사, 승무원, 기상무장사 등 공중근무자가 아니면 입으면 안 되는 피복이다. 물론 일선 행정직에 있더라도 입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원래 조종 특기거나 승무원, 비행군의관 등 착용이 인가된 사람들이다. 하다못해 항작사령관조차 조종 특기 출신이 아니면 함부로 입지 않는다.

이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2021년에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해 제4땅굴 발견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기도 했다. 사단장 시절에 인민군 무장공비가 사단 위수지역에 침투하여 시찰을 한 후 도주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헬기에 탑승해 항공시찰을 했는데 땅굴의 흔적인 버력(흙더미)을 발견하여 땅굴의 존재를 파악하고 7년간 땅굴 시추작업에 매진하게 된 이야기부터 땅굴 발견 직후 폐광을 활용해 훈련을 하며 토벌작전을 준비한 일화, 군견의 희생으로 땅굴 토벌에 투입된 중대원 전원의 목숨을 구했던 이야기 등을 회고했으며 제4땅굴에 대해서는 서부전선 뿐 아니라 동부전선에도 땅굴을 뚫을 만큼 북한의 굴착기술이 상당히 발전해 있으며 직접적인 징조 없이 항공시찰과 탐사기술로만 고심도 땅굴을 발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김일성 족속이 전방의 모든 부대에 땅굴을 팔 것을 지시했고 수십개의 땅굴이 더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서울 땅굴 음모론 등에 대해서는 땅굴의 목적이 국군 전방부대의 포위 섬멸이고 따라서 장거리 땅굴을 파는 것보다는 휴전선 인근에 크고 작은 땅굴을 최대한 많이 구축하는 것이 저들의 목표이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며 일축했다.[48]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3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2022년 6월에 충청향우회 총재로 추대되어 임기를 시작했다.

사실 문서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야전 군인으로서의 능력 자체는 매우 출중한 편이었다.[49] 다만, 정치인으로서는 본인 특유의 까탈스러운 성격이나 과격하거나 다소 뜬금없는 언행, 하나회 출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다.[50]

3. 사건사고 및 논란

3.1. 정치 테러 및 약속 불이행

육군정보사령관 시절 자신과 이상범 정보사 감찰과장 등이 정치 테러에 가담한 이씨 일행 4명에게 각각 2억원씩 지급하기로 약속하고서는 일을 성사시킨 후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이진삼의 주도로 이뤄진 주요 정치 테러는 다음과 같다.
  • 1985년 11월 15일: 상도동 김영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가택 잠입, 서류 탈취
  • 1985년 12월 24일: 우이동 문익환 목사 가택 잠입, 서류 탈취
  • 1986년 5월: 신대방동 양순직 신한민주당 부총재 가택 잠입, 서류 절취
  • 1986년 6월: 양순직 신한민주당 부총재 린치 사건(신대방동 자택 앞)
  • 1986년 7월: 민주당 김동주 의원 린치 사건(여의도 삼부아파트 앞)

1993년 8월 정보사 민간인 테러사건과 관련, 구속 기소돼 징역 2년이 구형되었고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죄'를 적용,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동생 이진백 역시 1988년에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이던 오홍근 기자에게 테러사건을 일으켜 정보사령관에서 보직해임 되었다가 예편되었다.

3.2. 천안함 피격 사건 생존장병 자폭 음모론 주장

제18대 국회의원 재직 중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국방위원회에서 군 당국의 보고를 받은 후 "우리가 과거 여수·순천 반란사건도 경험했다"고 말한 뒤, '모두 취침하는 동안 이상한 생각을 가진 병사가 TNT(고성능폭약)와 타이머를 이용해 탄약을 폭발시키고 탈출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며 "해군과 기무사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사

4성장군 출신 국회의원이 국방위원회에서 '천안함 탑승 병사들이 자폭했을지도 모른다고 ptsd에 시달리는 천안함 생존장병들을 수사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3.3. 군번줄 지적 논란


제18대 국회의원 재직 중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청문회에서 군기 문제를 들먹이며 각군 참모총장들에게 군번줄 안 차느냐와 경례 태도가 불량하다는 등의 다소 주제에서 벗어난 지적을 하였다. 김태영 당시 국방부장관은 "군번줄은 전시에 필요한 물건이지 평시인 국회 청문회에 차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명하였다. 물론 군인이라면 항상 차고 있어야하는 군번줄을 평시에 차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는 점 등을 들어 김태영 장관이나 군번줄을 안 차고 있었던 참모총장들의 태도도 비판을 받을 점이 많았지만 문제는 '그 시점에서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는가'와 국회에서 질의 내내 반말을 노골적으로 하는 등 지나치게 경우가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지적은 당시 천안함 피격 사건이라는 한시가 급한 중요 주제를 다루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시간낭비성 발언이었다. 무엇보다 이진삼 의원은 질의 내내 하라는 질의는 안하고 본인이 군 시절 겪은 일들을 얘기하며 '라떼는' 으로 질의 시간을 거의 채웠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굳이 반말삿대질까지 하면서 군번줄을 지적하는 것이 경우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후 YTN돌발영상 코너를 통해 이진삼이 육군참모총장 시절에 경례를 불량하게 하는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올려서 그가 기초군기 상습위반자로 후배들 욕할 자격이 없음을 까버리기도 했다.링크 이는 작전보다 군기를 더욱 중요시 하는, 군인으로서는 실격인 행동이다. 군인이라면 이등병부터 대장까지 모두 다 작전이 최우선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고성균육군사관학교장은 해당 이진삼 의원의 질의 영상을 보며 군번줄을 항시 매야한다는 취지에는 동감하나, 상대도 인격체라는 인지가 부족한 것 같다 라며 이진삼 의원이 지나치게 지적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3.4. 그 외 논란

  • 1991년 7월 3일 가칠봉 수영장[51] 개장식에 주한미군사령관 리스카시(Robert William RisCassi) 미 육군 대장[52]이 지각을 하자 그대로 수영장에 입수시켜버리는 결례를 저질렀다. 물론 이후에는 말을 태우고 사과했다는 후문.
  • 국회 국방위에서 해공군 축소론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육군의 기계화병력 감축을 절대 반대하는 등 스스로 구닥다리 쪽수 위주 보방부 마인드에 쩔은 퇴물 똥별임을 또 다시 인증했다.# 이진삼이 육군참모총장을 하던 시절에 이종구 국방부장관과 갈등을 빚던 맥락을 생각해보면 그 때와 똑같은 수준의 행동을 하는 셈이다.
  • 그 이후에도 2011년에는 초대를 받지도 않은 지역 축제에 간답시고 육군 헬리콥터를 사적으로 동원해서 타고 행사장에 착륙해 시민들과 군에 민폐를 끼치는 등[53] 주제 모르는 똥별 마인드에 입각한 행보를 일삼다가, 결국 다음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공천에서 혼자 탈락했다.[54] 그 뒤 무소속으로 나와서 한 자릿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 해군의 수장(장식)제독이라는 명칭에 대해 '알아보기 힘들다', '무슨 뜻이냐'며 계급장을 육군과 동일하게 별로 바꾸고 제독이라는 명칭도 장군으로 바꿔야한다 주장한 적이 있다.# 당연히 해군이라는 조직의 뿌리와 전 세계적으로 향유하는 해군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 극히 '육방부'스러운 발언이라 비판 받았다. 실제로 해군은 과거에 일명 '순자 튜닉'으로 멸칭되는 수장과 육군식 철제 견장을 함께 쓰는 장교 정복을 억지로 도입한 바 있지만 전두환 정부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빠르게 폐지시킨 전례가 있다.

4. 여담

  • 2004년 6월에는 부인상을 당했다. 평소에 위장병을 앓고 있다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고.
  • 아들은 1명이 있으며, 학군장교로 병역을 마쳤다. 현재 도미(渡美)하여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1967년 9~10월에 거쳐 북파되어 개풍 금성천에서 북한군과 세 차례 교전한 것이 2008년 알려졌다.
  • 2000년 5월 15일에 방영된 KBS1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육군 보병학교 편에 출연하였다. 보병학교 시절 구대장으로 근무했었는데 매우 빡세게 굴렸다고 한다. #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1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1 - 1995 입당
잠정 정계 은퇴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7 - 2008 합당[58]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8 탈당[59]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창당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1 - 2012 합당[60]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2 - 탈당[61]
정계 은퇴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3,786 (25.03%) 낙선 (2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청양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8,284 (55.37%) 당선 (1위) 초선[62]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무소속(정치)|
무소속
]]
3,115 (5.92%) 낙선 (4위) [63]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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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유선진당이진삼.jpg
15대 총선 (충남 부여군) 18대 총선 (충남 부여군·청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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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총선 (충남 부여군·청양군) }}}}}}}}}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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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2] 충청향우회중앙회 총재가 당연직으로 겸임한다.[3] 재혼한 아내이다. 본처 유병옥 여사는 2004년 암으로 별세했다.[4] 李雲漢.[5] 공안행정 전공[6] 동국대학교 행정학 석사 학위 논문 : 靑少年非行(청소년비행)의 實態(실태)와 그 對策(대책)에 관한 硏究(연구) : 靑少年(청소년) 育成方案(육성방안)을 中心(중심)으로(1992. 12)[7] 1993년 폐쇄된 청양중석이다.[8] 1971년 폐쇄. 대한민국 자유지구 중 최대의 금광.[9] 1950년대RADO 손목시계를 찰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10] 230명 중 159등[11] 셋은 하나회 소속이고, 권영해는 소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지만 후에 문민정부의 첫 국방부 장관이 되어 하나회를 청산한다.[12] 이 중에서 76명이 다른 병과를 선택하고 100명이 보병을 선택하는데, 이후 열린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 수료 시 이진삼의 성적은 보병 100명 중 2등이었다.[13] 제5공화국 시절에 군 편제를 개편한 이후에는 육군부사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부사관을 양성하지만 이 시절에는 각 군단 단위로 하사관학교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하사관을 선발했다.[14] 당시 수도사단장 방첩대장(안보지원부대장)이 권유했다고 한다.[15] 아이러니한 것은 김재규와 윤필용은 도청까지 하면서 개싸움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심지어 김재규는 도청을 하다 걸려서 보안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었다.[16] 당시 1군사령관은 최세인 대장, 5군단장은 류병현 중장, 사단장은 박노영 준장, 연대장은 노태우 대령이었다. 노태우와 이진삼은 이 시기부터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였다. 당시 3대대장이었던 이진삼은 주한 미군이 버리고 간 시설을 활용하고자 5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복동의 도움을 받아 대대 시설개선을 했다. 당시 8사단 사령부 시설 상태도 열악했었는데 이를 계기로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아예 5군단 전체적으로 확대되었다는 후문. 참고로 21연대 3대대는 8사단이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전환되면서 21기보여단 138기보대대가 되지만 이후 8사단이 26사단과 합쳐지는 과정에서 21여단은 해체되고 138대대는 1기갑여단으로 간다[17] 당시 사단장은 김학순 장군으로 박노영 장군과 동기생이다. 김학순 장군이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발령받으면서 박완식 장군이 신임 사단장으로 부임했다.[18] 당시 직속부하였던 2대대장은 갑종장교 출신의 조영길 중령인데 이후 대장으로 예편하고 국방부 장관까지 오른다.[19] 이 시절 연대장 보직은 대령 2~3차 보직이었다. 지금처럼 바뀐 것은 2010년대의 일.[20] 이 당시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이 대한사격연맹 총재직을 맡고 있었고 서울 태릉에서 국제사격선수권대회를 개최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몹시 진노했다고 한다.[64] 청와대에 불려간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은 후임 사격지도단장을 찾다가 주위의 추천으로 이진삼을 발탁했다.[21] 그러면서 12.12 당시 진압군 쪽이었던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과 전속부관 이재천 소령을 예편시키려는 것을 전두환을 설득해서 막았다고 한다. 이재천은 이진삼이 대대장을 하던 시절에 소대장을 했던 인물이었고 그래서 이진삼이 상당히 아꼈다. 황원탁은 18기 대표화랑이었으니 하나회만 안 했을 뿐이지 어느 정도 검증된 인물이었으며 한미연합사 부참모장을 끝으로 소장 예편하게 된다. 그리고 이재천은 1996년에 준장 진급하였고 2002년에 예편하였다. 이재천의 육사 동기로 김관진, 김병관, 박흥렬이 있다.[22]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제61훈련단장을 맡아 진압군으로 활동했다가 사격지도단장으로 전보되었다.[23] 애초에 이 보직은 준장 보직인데 대령인 이진삼이 보임된 것이다.[24] 참모총장 정승화는 합수부측에 납치되는 바람에 육본 2인자인 참모차장이 진압군 총지휘관이 됐다.[25] 다만 윤흥기 준장은 소장 진급에는 성공했다. 물론 소장 진급에 성공했을 뿐, 비하나회, 비육사였기 때문에 한직을 돌다가 전역하는 신세였다.[26] 그럴 만 한게 이진삼은 준장 1차 진급자였고 군인으로서의 길에 대해 미련이 강하였다. 참고로 이진삼이 고사했던 대통령경호실장 자리에는 이진삼의 1기수 후배인 장세동이 임명되었다.[27] 이진삼은 전형적인 노태우 계파에 속하던 인물이었다. 노태우가 8사단 21연대장을 하던 시절에 대대장을 하던 사람이었고, 9공수여단장을 할 때에는 참모장을 했었기 때문.[28] 이 때 육군특수전사령관 자리는 동기였던 민병돈 장군이 취임하게 된다 이진삼 본인의 자서전에 의하면 자신의 육사 선배인 육완식 장군이 임명되었다고 한다.[29] 1988년 1월, 노태우 당선인은 직접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국군보안사령관직을 제의했으나 두 번 거절하자 군 인사에서 참모차장을 시켜준다. 이 당시 박세환 12사단장의 경질을 막았는데, 당시 박세환 소장은 대대장 시절의 사단장, 국방비서관으로 모시던 前 상관인 백담사에 유배된 전두환 前 대통령에게 문안인사를 갔고 노 대통령이 이 때문에 빡쳐서 자르려던 것을 상황 설명을 하고 경고로 끝내게 해 주었다.[30] 이진삼이 5공시절 한직에 있다보니 야전군사령관 등 군 수뇌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관례였던 육군참모차장을 거치게 한 것이다. 당시 육참총장은 이종구였다.[31] 이진삼 본인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노태우는 1군사령관인 정호근을 합참의장으로 임명시키고 3군사령관 고명승을 6개월만에 경질시켜 전방 야전군사령관을 모두 교체하려고 고민했으나 이진삼 본인이 땅굴 운운하면서 1군사령관으로 가고싶다는 뜻을 밝혀 발령받았다고 한다. 결국 제4땅굴을 기어이 찾아내면서 결실을 맺고 육참총장으로 영전한다. 또한 동기였던 민병돈 육사 교장도 특전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육사교장으로 좌천된 상황이었는데 1989년 3월에 육사 45기 졸업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항명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군문을 나왔고, 마침내 이진삼은 육사 15기의 실세가 되었다.[32] 이 땅굴을 찾기 위해 자비를 들여 유리 겔라를 섭외하여 땅굴 수색을 의뢰했지만 허탕만 쳤다. 이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668화에서 제작진이 유리 겔라와 이진삼 두 사람을 모두 인터뷰했었는데, 유리 겔라는 본인이 큰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돈을 지불한 이진삼은 아무런 도움도 안됐다고 직접 밝혔다.[33] 다만 이종구노태우경북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여서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34] 둘이 싸운 게 나름 유명해서 훗날 이진삼이 기자들한테 '내가 이종구씨랑 사이 안 좋은거 다들 알잖아요?' 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엄격한 군 선후배 지간임에도 OOO씨 운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이가 나빴다.[35] 김진영육사 17기의 선두주자였고 33경비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전두환이 여러모로 총애하던 인물이었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서 한직을 맴돌았다. 노태우김진영도 날리고 싶어했으나 자신의 퇴임 이후 하나회가 분열될 것을 우려했고, 김진영노태우에게 충성맹세를 하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대장을 달아준 다음, 참모총장을 달아주게 된다. 이진삼 본인 회고록에 따르면 본인이 스스로 사표를 제출했고 대통령이 이를 수리한 것이라고 한다. 진실은 저 너머에....[36] 다만 김진영 장군은 전두환계 하나회이긴 해도 육사 생도의 꽃인 대표화랑 출신으로 군 내에서 평판이 좋았던 군인이었다. 군 내에서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신도 모임을 이끌었고 정도로 인간관계도 폭 넓었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진영을 숙청했던 김영삼마저 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이 위기에 몰리자 김진영에게 러브콜을 보낼 정도.[37] 당시 라이벌은 노태우계인 이문석이었는데, 노태우 본인이 이문석을 앉힐 경우 생길 것으로 예상된 전두환계의 반발과 결정적으로 이문석이 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아 건강문제가 생긴 것도 원인이었다. 기무사령관직에 전두환계 서완수(육사 19기), 국방부 장관에 전두환계 최세창(육사 13기)를 임명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여진다.[38] 전역식에는 백선엽, 서종철, 노재현, 이희성, 박희도 前 참모총장들과 리스카시 주한미군사령관이 참석하였다.[39] 이 때 대구직할시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해봉이 차관으로 함께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치적 행보는 달랐고, 같이 한나라당 당적만 가지고 있었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40] 자신이 참모총장 할 때 이웅희 지역구인 용인의 수해복구를 도와주었으니 협력해달라는 말을 했다. 용인은 55사단과 3군사령부가 있는 군사도시이다.[41] 결과적으로 이진삼은 징역형을 살지는 않았고, 끝내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나긴 했으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천성관에게 배신감을 느껴 본인의 자서전에서 천성관을 정치검사, 기회주의자에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며 쌍욕을 퍼부었다. 심지어 2004년 상처를 당했을 때에 아내의 장례식에 조문을 온 천성관에게 배빵까지 날렸다고 하며 2005년에는 아예 서신을 보내 따지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천성관이 검찰총장에서 낙마할 당시 이진삼이 꽤나 통쾌해했다고(...).[42] 확실한 것은 이진삼은 김영삼을 상당히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회고록에 김영삼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썼다.[43] 당시 이진삼이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부여에서 설립되는데 막후에서 힘을 썼다는 후문.[44] 그래도 의원 임기 중에 삽질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 지역구 사업은 그럭저럭 해냈고 똑같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한나라당 김장수 의원과 함께 군가산점의 부활을 추진했으며, 국방대학교 이전, 의정활동 기간 3년간 개인 차량로 낡은 SM5 승용차를 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점이었다. 물론 임기가 끝날 무렵엔 리스한 카니발로 차를 바꿨지만.[45] 자유선진당 공천에서 탈락한 현직 의원은 이진삼 혼자였다. 이회창 전 총재는 심대평 대표와 노선차이 등으로 인해 불출마를 선언했고, 변웅전 전 대표도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자유선진당의 인물난에 힘입어 비례대표 공천을 받게 되었다.[46] 이 때 자유선진당 공천을 받고 출마한 홍표근 후보와 이진삼 의원의 득표율을 합쳐도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47] 김신조 사건을 다루는데 왜 뜬금없이 이진삼이 출연했나 싶지만 이진삼은 같은 해에 서산 무장간첩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수류탄으로 무장공비 2명을 폭사시킨 군공을 세운 바 있다. 프로그램 컨셉 자체도 남파간첩 VS 진압군의 구도의 시사대담이라서 나름 당시의 상황을 꽤나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다.[48] 실제로 국방부와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등에서도 북한 땅굴이 발견된 것 외에도 최소 5개 이상이 더 존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의 전력난이 장기화되고 북한 정권의 군사전략이 전면전에서 핵 전력 구축으로 변화하면서 땅굴을 추가적으로 구축하거나 지속적으로 운용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땅굴을 전쟁용으로 사용하진 않더라도 간첩 침투 등 대남공작이나 전방지역에 대한 정찰 등 북한 측이 존재하는 땅굴을 어떻게든 써먹을 가능성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전방부대에서는 지뢰 탐사작업과 더불어 땅굴 탐사 및 시추 작업 역시 주기적으로 진행한다.[49] 물론 정보사령관 시절의 정치테러 지시나 사조직 가입 같은 부분은 옹호하기에는 부적절하다.[50] 애초에 경상도, TK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하나회에 충청도 출신으로서 합류했다는 것 자체가 군인으로서 상당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인데 실제로 하나회의 최선임 기수인 11기생들이 대부분 공부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라 성적이 콤플렉스가 되었던 모양인지 13기 이후부터는 각 기수별로 대표화랑 출신이나 성적 우수자 등 인망이나 능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만 받았다고 한다. 이진삼 이외에도 월남전에서 군공을 세운 16기 대표주자 장세동이나 17기 대표화랑이자 군 내에서 성경 공부 모임을 이끌며 인망이 두텁고 평판이 좋았던 김진영 등이 이런 식으로 하나회에 합류한 인물들이다.[51] 이진삼 장군이 1989년 1군사령관 재임시 시공하였으며, 1991년 참모총장일때 개장했다. 가칠봉(加七峰)은 대한민국 강원도 양구군과 강원도 인제군에 걸친 해발 1,242m의 산으로, 가칠봉 남방한계선 철책선상 아군 측 OP에 1억 5천만원을 들여 장병용 수영장을 만들었는데, 이게 가칠봉 수영장이다. 수영장 물은 제4땅굴을 발견하기 위해 시추공 작업을 하던 중 수맥을 발견하였고, 이 수맥을 끌어가지고 하루 150톤 수량의 생활용수와 급수시설로 활용하였고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과 더불어 샤워실도 있고, 탈의실도 있다. 탈의실 창밖 너머에 북한이 보이는게 특징이다. 물론 이 수영장은 대북도발 용도로서의 의도가 컸다. 가칠봉 OP는 모든 휴전선에서 아군과 적군간의 거리중 가장 가까운 곳인데, 거리차이가 350m 차이밖에 안나고 아군측에서 김일성 고지가 보일 정도로 가깝다. 때문에 아군 병사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북한 병사들이 부러워하도록 했다. 추운 겨울인 12월, 1월, 2월을 제외하고 봄과 가을에는 보일러를 가동하여 야간에도 수영을 하고 세탁을 하도록 대북도발 용도로 활용하였다. 현재는 폐쇄됐다.[52] 1936년 1월 18일 출생. 제 6대 주한미군사령관이다.[53] 헬기 제공은 국방부라고 쓰고 아첨꾼 후배들이 득시글대던 육방부가 제안하였으며 대책이 없던 이진삼 측은 이 제안을 승낙했을 뿐이긴 하나, 이건 자신이 안 타겠다고 했으면 그만이었다. 얼씨구나 하고 탄 시점에서 이미 똥별이라고 셀프인증을 한 셈이다.[54] 이회창도 안 나왔는데, 이 쪽은 당권을 잡은 심대평과의 갈등을 빚고서 더러워서 안 한다. 자진해서 공천을 반납했다. 대신 서상목이 올라오는데....[55] 과는 2살 터울인 듯 하다. 갑종장교 153기 출신으로, 최종 직책은 육군정보사령관이었으며, 그가 사령관으로 재임할 당시 오홍근 테러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대한중석 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56] 황교안, 박한철 등과 연수원 동기이며 한상대 검찰총장 취임과 함께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57] 다만 이후 윤석열을 지지한 헌정회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걸 보면 그냥 립서비스 차원에서 덕담 한마디 해준 모양이다.[58]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59] 신당 합류[60]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61] 총선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62] 2012년 3월 14일 자유선진당 탈당[63] 이진삼의 육사 후배인 김근태가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