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9:59:49

윤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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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尹必鏞 | Yoon Phil-yong
파일:윤필용.jpg
본관 파평 윤씨
출생 1927년 3월 10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1]#
사망 2010년 7월 24일 (향년 83세)
학력 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9년 ~ 1973년
최종 계급 육군 소장[2]
최종 보직 수도경비사령관
주요 보직 제5보병사단 군수참모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 직무대행
육군 방첩대장
제20보병사단 사단장
수도사단 사단장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 군인. 종교불교. 본관파평(坡平).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친위대하나회를 관리하고 군 인사 문제를 박정희와 상의하는 등 군부 실세로 군림했지만, 말 한번 잘못했다가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당했다.[3]

2. 생애

1927년 3월 10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였고 5사단장 박정희 준장 휘하에서 군수참모로 있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를 지냈으며 1965년 육군 방첩대장(현재의 국군방첩사령부 사령관)에 보임되자마자 원충연 반혁명 사건을 파악하고 사전에 모조리 제압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샀다. 1968년 1.21사태 때 방첩대에서 김신조를 수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신조의 "내레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디요"라는 발언을 여과없이 방송에 내보냈다가 경질되었다.[4] 그 후 20사단장, 베트남 파병 맹호부대장을 지내고 1970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보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손영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인 하나회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71년 8월 육군보안사령관 김재규 중장의 지시로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 요원들이 자신의 전화를 도청한 사실을 적발하고 보안반 요원들을 내쫓았다. 이때 모 4성 장군이 그의 집에 세배를 할 정도의 위세를 누렸으나... 결국 청와대에 찍혀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육군보안사령관 강창성 소장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된다.

이후락을 내세우려다 숙청되었다는 설이 많다. 1973년 4월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신라 김춘추고구려를 갔다 와서 이 되었듯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북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왔잖소. 각하께서 연로하시니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이후락 형님은 중앙정보부장이 어울리지 않는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영감혁명할 때 나이가 몇이었지"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김형욱의 증언에 따르면 1972년 10월부터 윤필용은 이후락에게 "각하를 잠시 쉬게 하자"라며 아부를 했다고 한다. 유신이 눈 앞인데 헛물을 켜고 있었던 셈. 그러나 윤필용은 그런 말은 한 적 없으며, 그저 국회의원에 군 출신을 많이 뽑아달라고 청탁했다고 한다.[5]

윤필용 본인의 증언은 조금 다르다. 박정희는 윤필용과 육사8기생들을 겁내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너희가 윤필용 동기생이냐. 김대중보다 겁난다" 했을 정도. 그에 따르면 그가 숙청된 원인은 신범식 당시 서울신문 사장이 박 대통령, 박종규 경호실장 앞에서 "후계자를 키울 때가 됐다"라고 했는데 박정희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화가 나서, 박종규를 시켜 총을 들고 누가 한 말이냐고 추궁했을 때 윤필용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문제의 신범식은 윤필용 파로 이후락과 적대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박정희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적대하고 있었고, 윤필용 발언이라면 선처 될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는게 윤필용의 주장. 박정희가 오히려 겁내는 건 윤필용이었고, 사실 윤필용 스스로도 알고 있어서 후계는 생각지도 않았다는 것이다.[6]

윤필용과 친분이 깊었던 당시 삼성의 장남 이맹희에 따르면 박정희가 윤필용을 미워하게 된 계기가 나일롱 백 위장 수출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당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나일론 원사를 수출용 제품을 만든다고 수입을 한 후 몰래 국내 시장에 팔아치우고 대신 마치 수출을 한 양, 가짜 수출품 꾸러미를 만들어 인천세관으로 통과시킨 다음 그걸 전부 인천 앞바다에 버린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윤필용이 박종규와 손을 잡고 김형욱을 공격하기 위해 박정희에게 알렸으나 박정희는 '알았다.'고만 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맹희는 겉으로는 김형욱이 했지만 박정희가 관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 역시 그 사건을 처음부터 알고있었으며 나아가서는 김형욱 부장을 통해서 처음부터 개입했었던 걸로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윤필용 장군이 이 일을 먼저 알아서 수사를 했고 결국 박종규와 더불어 김형욱을 공격하는 자료로 썼던 걸로 믿고 있다. 한가지 더 밝히자면 그 과정에서 윤 장군은 박대통령에게 미움을 샀다고 알고 있다.

이후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재판에서 쿠데타 모의 혐의는 입증되지 못했지만, 업무상 횡령,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군무이탈 등 8개 죄목이 적용되어 징역 15년형(...)과 벌금·추징금 약 2,600만원을 선고받았다.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을 포함한 장군 3명과 장교 10명에게도 징역형이 내려졌으며 이로 인해 그와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무더기로 군복을 벗었다. 한국 현대사의 권력 스캔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사건은 윤필용 사건이라고 불리는데,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쪽에선 박종규이후락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 윤필용은 수감된지 2년 뒤인 1975년 석방되었다.

1980년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가 집권하자 전두환의 도움으로 한국도로공사 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10년 7월 24일 사망 직후에 아들인 미주제강 회장 윤해관이 재심을 청구하였고, 보안사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실세라도 한번 잘못 놀렸다간 어떻게 몰락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인물이다.[7] 특히 이후락과의 술자리에서 '각하께서 물러나시면 형님(이후락)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취중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대한민국이 독재 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 발언의 의도가 어쨌건 쿠데타 모의 혐의로 뒤집어씌우기엔 부족할 것 없는 발언이었다. 더군다나 윤필용은 당시 세간으로부터 '필동 육본', '청와대 밖의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박정희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꼴이 되니 대노한 것은 당연했다.[8] 어찌됐든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숙청되었고, 이후락도 윤필용 사건 이후로 윤필용과 공모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역을 꾀한 역적 아니냐는 낙인이 찍혀버려 언제 중앙정보부장에서 쫓겨날지 모를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훗날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과하게 입증하기 위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획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물론 과정이 들켜버려 국내외적으로 독재 정권이란 쐐기를 박고 개망신을 초래하지만 말이다.
  • 2005년, 국적과 관련된 병역기피 문제와 관련한 국적법 개정으로 국적포기가 잇따르는 것과 관련한 PD수첩의 취재가 있었는데, 이때 PD수첩이 윤필용에게 찾아가 손자의 국적포기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 15분 40초 이후의 인터뷰.) 이 인터뷰에서 윤필용은 "모르겠어, 공부하려고 그러겠지", "세상이 이렇게 좁아졌는데 국적포기 하면 어떻고 안하면 어때" 라고 말하면서, 530GP 사건에 대해서는 "미친 X이 저지른 단순한 사고인데 왜 위문하러 가냐"고 말했다.

[1] 파평 윤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윤구용(尹九鏞)과 윤병림(尹炳林)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소장으로 복무 중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는데, 당시 법에서는 현역 또는 예비역이 실형을 선고 받으면 보충역 이등병으로 자동 강등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윤필용 본인도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되었으나 1988년 계급 회복 제도가 도입되면서 원래의 계급(육군 소장)을 회복했고, 1994년 보충역 이등병 강등 제도가 폐지됐다.[3]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아닌 수도방위사령관이 군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는 나중에 하나회 등 불법 사조직 발생을 막기 위해 장성급 인사 추천권은 민간인 출신인 안보수석이나 국가안보실장에게 위임하는 사례의 근거 중 하나가 된다. 사실 이런 이상한 군 인사 처리는 근본적으로 5.16 군사정변 자체가 육군사관학교 8기생 주축으로 이루어졌고 1961년 당시에 8기생들 대부분이 중령이었기 때문이다.[4] 후임 방첩부대장이 바로 제6군관구사령관이었던 김재규 소장이다.[5] 김형욱은 3선 개헌 직후에 숙청되어 권력 최일선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6] 예컨데 박정희 말기의 김재규/차지철/전두환 구도와 같은 것이 유신 초기엔 이후락/박종규/윤필용 구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락과 윤필용은 협력과 경쟁을 반복하는 구도였으나 오히려 박정희는 이들의 연합에 따른 차기 옹립을 제일 경계했다.[7] 사실 입을 함부로 안 놀려도 박정희 자체가 2인자 견제에 거의 강박증까지 느끼고 있던 인물이었던지라, 박정희하고 친인척인 김종필만 해도 가택수사까지 당하는 등 지독한 견제에 시달려 결국엔 정계은퇴 수준으로 밀려나긴 했다. 그나마 김종필이 윤필용보단 노련한 면이 있어서, 견제 당하면서도 직접적인 처벌까진 받지 않았다는 차이는 있다.[8]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도 "아니 윤 장군이 어째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윤필용을 힐난할 정도였으니 당시 청와대의 분노가 얼만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윤필용의 경우에는 박정희가 군인인 시절부터 발탁되어 수십 년간 박정희를 보좌했으며, 군 인사 문제를 다른 사람도 아닌 윤필용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만 봐도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