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6 18:48:43

장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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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00 대한민국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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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도 표기 없을 시 소장·중장 예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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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張泰玩)
1931년 ~ 2010년
복무대한민국 육군
기간1950년 ~ 1980년
임관육군종합학교 11기
최종계급소장
최종보직수도경비사령관
1. 개요2. 군인 장태완3. 12.12 군사반란 당시
3.1. 각종 매체에서 그려진 모습
4. 군사반란 이후5. 별세, 그리고...6.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1931년 9월 13일 ~ 2010년 7월 26일(총 28807일.) 예비역 육군 소장. 새천년민주당 소속 전직 국회의원. 종교가톨릭으로 세례명은 다미아노.

1931년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현 칠곡군 석적읍)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했다. 이 당시 장태완은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갑종으로 분류되어 장교로 임관하였으나, 같이 갔던 인원 중 중학교 중퇴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을종으로 분류되어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물론, 군복무를 하는 기간 동안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서 졸업을 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이 대졸인 것은 맞다.

그는 전쟁 당시 거의 총알받이 취급이었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살아남았다. 1973년 윤필용 사건이 터진 이후, 준장 계급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이 때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고 갑종장교 출신인 자신을 깔보고 항명하던 김상구 방공포대대장을 영창에 보냈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
1976년 6월 어느 날, 부임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 진지 공사 현장에 순시를 나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별판을 보고 놀란 위병은 뒤늦게야 신호 버튼은 눌렀다. 그래서였는지 장 참모장이 한참 공사판을 걸어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거의 막사 앞에 이르렀을 때야 방공포 대대장 김상구[2] 중령이 나와 경례를 했다.

김 중령은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더욱이 그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나회의 보스 전두환 당시 1공수여단장과 동서 사이로 중견장교 중 실세였다.

김 중령을 앞세워 벌컨포 설치 공사 현장에 가본 장 준장은 울화가 치밀었다. 전방 부대 장병들이 순전히 손발로 하는 일을 중장비로 편하게 하면서 진지의 은폐ㆍ엄폐를 위한 잔손질은 적당히 얼버무린 태만한 공사로 보였다. 괄괄한 장 준장은 김 중령의 면전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자존심이 확 상했다.

"저도 4년제 육사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을 취소하십시오."

김상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었다. 장태완은 어이가 없었다. 애송이 중령이 감히 상급부대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려니 생각하니 더욱 괘씸했다. 더 거친 언사가 장 장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놈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

그러나 김상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개 영관이 장군에게 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3]

화를 풀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사령관 진종채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고 '겁 없는 하나회 장교'를 징계위에 회부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진종채는 영남 군맥의 후배인 김상구를 징계할 생각이 없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장태완을 달랬다.

"내일 내가 불러서 기합을 줄 테니 그만 참아 주시오."

하지만 장태완은 강경했다. 화를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이런 군기 문란한 장교들을 그대로 두고선 함께 못 있습니다. 저를 내보내든지 김상구를 구속시키든지 택일하십시오."

결국 김상구는 이 일로 영창에 들어갔다가 전역하고 만다.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출처출처 2

이 일로 김상구의 손윗동서인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79년 11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에게 수도경비사령관 직위로 보직이동을 명받았다.
파일:attachment/10120703115115.jpg
10.26 사건 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맨 오른쪽 하얀 컵을 들고 있는 사람)이 부임 나흘만인 79년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제33경비단을 초도순시,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현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이 촬영되고 3주 후, 브리핑을 하던 김 대령이 브리핑을 받던 장 소장을 배신한다.

2. 군인 장태완

갑종 출신인데도 수도경비사령관(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 특전사령관과 마찬가지로 군단장급 직책이며 2017년 시점에서는 중장 직책이다.)에 올라갔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누가 보기에도 非육사 출신 육군참모총장에 적합한 인물었다는 평이 많았지만,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정권을 잡아버린 바람에 장태완의 승진 기회는 영원히 올 수 없었다.

"군인 장태완"은 부하들 체력단련에 매우 신경을 썼다. 힘들고 빡센 훈련을 많이 시켰으나, 훈련 성적이 좋고 체력이 우수한 병사에게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둑한 포상들[4]과 포상휴가, 자력표에 유리한 평점을 많이 줬다. 반대로 체력이 부족한 병사들에겐 엄한 벌을 내려 어떻게든 체력을 끌어올려냈다. 겨울철에는 소대 전원이 웃통을 벗고 뛰어다녔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태완 본인도 병사들과 함께 직접 웃통을 벗고 뛰었기 때문이다.

"인간 장태완"은 그 반대로 매우 자상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장태완이 육군 소장인데도, 일개 병장의 풀어진 전투화끈을 몸소 묶어주며 격려하는 모습이 나왔다.#[5]

장태완이 부임한 이후, 휘하 병력에게 나오는 식단도 매우 좋아졌다. 쇠고기, 계란찜, 깻잎 무침[6]등을 비롯한 당시로서는 중산층 이상이나 먹을 고급 반찬이 특식으로 많이 나왔다. 지금이야 흔해빠진 반찬일지라도 불과 몇십년 전 똥국으로 대표되는 부실한 짬밥이 넘치던 그 때는 상당히 고급 반찬이었다. 그만큼 장태완이 휘하 병력에게 돌아가는 식단을 눈여겨봤다는 얘기다. 게다가 종종 예고도 없이 불시에 병사 식당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급양관이 요령을 피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장태완은 조금이라도 사병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높이려고 매우 노력했다. 장태완의 휘하에서 군 생활을 했던 사람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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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부하들에게 엄격한 만큼 본인에게 엄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70세가 훨씬 넘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현역 군인 못지않은 근육질 몸매를 유지할 정도였다. 진짜 주먹으로도 그놈들 머리 통을 다 날려버릴 수 있었을 듯

2019년 6월, 휘하 장병들의 체력향상이라는 미명 하에 사실상의 비전투손실과 인권침해 및 가혹행위를 조장한 제7군단장 윤의철 중장의 보직해임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오고 28사단장 재직 시절부터 이어진 수많은 증언들이 온/오프라인 상에서 줄을 잇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체력증진을 중요시 했지만 윤의철과는 대조적으로 체력향상에 수반되는 파격적인 포상과 더불어 스스로도 병사들과 함께 알통구보를 하던 장태완 장군의 일화가 재조명받으며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3. 12.12 군사반란 당시


월간조선 1995년 9월호 부록으로 실린 육성테이프 녹음본 (10분 8초부터 장태완의 육성이 나온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정권의 12.12 쿠데타 당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그리고 김진기 육군헌병감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다.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몇 잔 기울이던 중,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불법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경비사령부로 급히 달려간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반란군에 의해 상황은 순식간에 태반이 넘게 기울어 가던 중이었다. 기선을 잡고 득의양양하여 자신마저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 측에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반란군에게 전화통화로 한 말이며 절대 후대의 윤색이 아니다.[7]물론 말만 저렇게 늘어놓지 않았고, 실제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육본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고, 휘하 전차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8] 또 장태완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시간이 촉박하니 9공수라도 빨리 보안사를 공격해야된다라고 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진압군의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였던 9공수에게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보안사는 당황했다. 왜냐면 1공수, 3공수등 반란 공수부대보다 9공수가 더 서울에 가까이 있어서 이를 가만히 둘 시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병대와 연락해서 보안사에 포을 겨누고 명령이 오면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진압군 수뇌부의 일명 신사협정 체결때문에 상황은 역전된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부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1공수로 하여금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 그리고 3공수로 하여금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게 체포당했다.[9] 김오랑 소령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마지막 남은 건 수경사 뿐이였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그리고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누가 어디에서 배신할지, 특히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 하나회의 도청, 적수가 너무 많음, 그리고 반란군에게 항복한 국방장관 노재헌이 그만 싸우라고 해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포기하고 자기 사령관실로 들어가고 곧 체포된다.

12·12 당시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

이걸 가지고 장태완 장군을 패장이라 폄하하는 몰상식한 이도 있는데 당시 상황을 안다면 이보다 무식한 소리가 없다. 일단 당시 수경사 내부 통화는 보안사령부에 의해 감청되고 있었다. 게다가 수경사 헌병단과 핵심 전투병력인 30, 33경비단을 맡은 장세동과 김진영이 쿠데타의 주축이었다.[10] 수경사 내에서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비전투부대인 포병단과 방공포병단 뿐이었다.[11] 인근에 유사시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휘하로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가장 먼저 찾았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준비명령은 받았으나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공작에 넘어가 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12][13]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로 출동하여 부천 IC까지 다다랐던 제9공수특전여단[14]은 전두환 측의 신사협정 제안에 속은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의 회군 명령에 의해 주둔지로 원대복귀당했다.[15] 그 외 1, 3, 5공수여단은 쿠데타군의 주축이었고 제9보병사단제20기계화보병사단도 사단장이 노태우와 박준병이니 말 할 필요도 없다.[16] 제2기갑여단은 여단장 이상규[17]가 이건영 3군사령관의 병력출동 금지 지시를 무시하고 예하 16대대를 출동시켜 쿠데타에 합류했다. 제11기계화보병사단은 국방장관 명령이 없어 출동하지 못했으며 제30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非 하나회 박희모가 보안사에 협력하여 행주대교를 차단하고 구파발 검문소의 병력을 증강하여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라는 육군본부 정식 명령을 무시하고 길을 열어줬을 뿐 아니라 90연대를 쿠데타에 합류시키는 등, 한 마디로 사면초가였다.[18]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지 겨우 24일째였던 장태완 장군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던 야포단을 도강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제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장악하여 여의치 않게되자[19] 사령부 행정병, 취사병들까지 긁어모아 맞서보려 했다. 그러나 취사병, 행정병 다 합쳐도 100여명이었고 김진영이 수경사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이 보낸 33경비단의 전차 1개 중대를 도로 회군시켜버려 사령부내에 있던 전차 4대가 기갑전력의 전부였다. 즉, 방법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만약 거기서 싸우기로 했다면 보안사에 의해 수경사 통화가 모두 감청당하는 상태에서 9사단 29연대, 30연대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1, 3, 5 공수여단, 2 기갑여단 16대대, 수경사 30, 33 경비단을 비전투병력 100여명으로 상대하는 그림이 나오는데 이게 가능할 것 같은가?[20] 이때나 그 후에나 국민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쿠데타 세력과 달리 장태완 장군은 서울 시민들의 안전도 신경써야 해서 몇 안되는 중화기 사용까지 제한받았다.[21] 설사 9공수여단 병력이 중도에 복귀하지 않았어도 힘들었던 상황이었다.[22]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군인의 의무를 저버린 하나회 장교들과 한남동 공관 근처에서 총소리 들리자 인근의 단국대 캠퍼스[23]로 달아나 숨어 버리고 겨우 육본 B-2 벙커로 끌고왔더니 충정부대 출동명령을 내리기는커녕 어떻게든 싸워보려던 장태완 소장에게 말로 하라며 윽박지르던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이다. 노재현이 도망가는 대신 신속하게 수기사, 26사단, 9공수여단, 11사단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으면 그 사달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24]

3.1. 각종 매체에서 그려진 모습

각종 매체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우국충정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등장작품마다 맡은 배우들이 극강의 연기력을 발휘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제5공화국에서의 김기현이지만, 비장함에 있어서는 코리아게이트에서 열연한 김동현의 연기도 수준급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본 인물의 인격에 감화되었는지 '리턴 1979'라는 소설에서는, 10.26 이후 국군 측 2인자(1인자는 정승화 대장)로 주역 3인방(주인공과 최규하, 정승화)의 보좌역으로 국가 개혁(당연히 12.12 사태 같은 일은 없었다)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3.1.1. 제4공화국



1995년에 MBC에서 방영된 제4공화국에서 이영후가, 비슷한 시기에 SBS에서 방영된 코리아게이트에서는 김동현이 연기했다. 이영후는 특히 장태완 장군 특유의 가래 끓는 목소리를 잘 재현했다는 평. 단 위압감은 코리아게이트의 김동현이나 제5공화국의 김기현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위에 링크된 영상의 26분 8초부터.
79년 12월 12일 10시 김포.

(장세동이 전두환 등 장성들에게 위스키 잔을 돌리고, 잔을 비우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온다.)

장세동 : (전화를 받으며) 여보세요.

장태완 : 장 대령, 지금 자네 뭐하고 있는 거꼬? 자네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냔 말이야!

장세동 : 장군님, 죄송합니다. 먼 훗날, 무릎 꿇고 사죄하겠습니다.[25]

장태완 : 봐라! 봐라!

유학성 : (전화를 건네 받고) 아, 나 유학성이야.

장태완 : 어, 선배님, 선배님은 왜 남의 부대에 와 계십니까? 30경비단은 제 부댑니다.

유학성 : 아, 이 사람이 중요한 시국에 내 부대, 남의 부대가 어딨어? 아, 좋아. 말이 나왔으니까 얘긴데, 그럼 여기 자네 부대니까 자네가 이리 좀 와 줘야겠어.

장태완 : 선배님, 거 거 다 모여있는 거 내 잘 압니다! 그 분은요, 계엄사령관 아닙니까? 퍼뜩 원상복귀 시키라 이 말입니다! 거 거 전두화이도 있습니까?

유학성 : 어허, 이 장 장군,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이리 와. 응? 이리 와서 우리하고 얘기 좀 하자고.

장태완 : 얘기? 얘기는 무슨 놈의 얘기를 하란 말이고?! 역적 놈들캉![26] 오냐, 좋다! 거기 딱 기다리고 있거래이! 내 탱크를 몰고 가가 마 싹 쓸어 뭉개뿌고 말끼라! (수화기를 집어던지듯 끊는다)

유학성 : 장태완이가 가만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전차부대를 출동시킨다는 거야. 이거 어떡하지?

하지만 출격 직전 부대원들을 앞에 두고 훈시하는 장면은 누구보다도 호소력이 쩐다(58분 4초부터). 이영후는 김기현이나 김동현처럼 '위압스러운 연기'가 아니라서, 오히려 효과를 발휘한 장면.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장면은 동지들을 잃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부분(2분 59초부터)인데, 특히 가장 마지막으로 전두환 일당에게 포섭된 헌병부단장 신윤희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지르고 자신을 쏘라고 하는 장면(5분 25초부터)이 백미이다.
장태완: 너그 이노무 짜슥들, 무슨 짓들이고? 어이? 어데다 총질이야?

신윤희: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장태완: 도대체 어케 된 놈이, 누구 부하고? 니, 소속 부대가 어데고?

신윤희: 저는 사령관님의 부하이며, 수경사 소속입니다.

장태완: 그런데...!

신윤희: 하지만 지금은, 전두환 합수본부장님의 명령에 따르고 있습니다.

장태완: 세상에... 네같은 군인이 어데 있노? 전두환이 글마가 , 글마 명령에 따라서 상관 가슴에 총구를 들이댄단 말이고?

신윤희: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장태완: 뭣이 우째!? 내가 누고? (신윤희에게 다가간다) 니, 똑똑히 함 봐봐라. 느그 사령관 장태와이란 말이다. 장태와이이!! (신윤희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신윤희: ...죄송합니다.

장태완: 군에서 상관이라 카믄 느그 애비란 말이야 이노무 짜슥아! (잡았던 신윤희의 멱살을 놓는다) 긔래... 자슥같은 놈한테 끌려가는 수치를 당하느니보다 (뒤로 되돌아가다가 신윤희를 바라보며) 차라리 여다 쏴삐라.

신윤희: 사령관님.

장태완: 쏘란 말이야아아아!!! 아아으끄흐흑...

(카메라가 신윤희가 쥐고 있는 권총을 비춘다. 장태완이 흐느끼길 멈추고 신윤희를 노려보자 신윤희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신윤희: (고개를 돌리며)뭣들 하고 있어! 사령관님 모시라고!

(장태완이 헌병들에게 붙들려 간다. 문을 나오면서 장태완이 한번 더 신윤희를 노려보고, 신윤희는 미안하다는 듯이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떨군다.)

3.1.2. 제5공화국

파일:R8I6mz9.jpg


하단의 대화내용은 3:02부터.
유학성: (책상을 쾅 치며) 에이씨! 장관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전두환: 형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장관이 없으니 장관 없이 대통령 재가를 받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문제는 대통령정 총장 연행조사를 합수부 독단적인 판단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이제부터는 여기 계신 분들께서 저하고 함께 대통령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황영시: 자 그럼, 나하고 같이 대통령한테 가 보자고.

백운택: 나도 가겠습니다.

(유학성이 세 번째로 일어설 때 전화가 걸려온다.)

장세동: (전화를 받으며) 여보세요.

장태완: 야, 장세동이 바꿔. (대답이 없자)
야!! 장세동이 바꾸라니까!!![27]

장세동: 저...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십니다.

장세동한테 전화 걸어서 장세동이 받았는데 장세동한테 장세동 바꾸라고 하니 장세동이 다른 사람 바꿔줌

(잠시 침묵이 흐른다.)

황영시: 이리 줘, 내가 받을 테니까. (전화를 건네 받고) 어, 장 장군이야? 어, 나 황영시야. 저, 이리 와서 나하고 얘기 좀 하자고.

장태완: 아니, 선배님은 왜 남의 부대에 와 계십니까? 장세동이하고 김진영이는 내 직속 부하들인데, 지금 거기서 그놈의 자식들하고 무슨 작당을 하고 있습니까! 내 들어보이, 그 짝에서 총장님을 납치했다 카는데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어떻게 총장님을 그럴 수가 있습니까!

황영시: 아니 장태완이 너 왜 이래, 다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 아니야?!

장태완: 뭐가 통합니까? 지금 당장 총장님을 원상복귀 시키세요!

황영시: (시선을 돌리며) 아니 이거, 너무 흥분해서 말이 잘 안 통하는데...

유학성: 아, 이리 줘 봐요. (헛기침을 한다.)

장태완: (유학성이 전화 받기 직전에) 여보세요?! 야!!!!!!!

유학성: 장 장군? 나 유학성이야. 왜 흥분부터 하고 그래? 우리 얘기를 들어 보면은, 장 장군이 충분히 이해할 거야.

장태완: 아니, 형님은 또 왜 거기서 그라고 계십니까? 거긴 내 부댑니다! 형님이 거기서 나오십시오! 그라고, 형님이 나더러 총장님을 잘 모시라고 했잖습니까. 그런 형님이! (전화기를 던지듯이 내려놓는다)[28] 총장님을 납치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더 말할 거 없습니다. 지금 당장 총장님을 원상복귀 시키세요!

유학성: 장 장군!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야.

장태완: 정말 이러깁니까?

유학성: 이봐! 정 총장을 수사해 보고, 혐의가 없으면 풀어주면 될 거 아이가!

장태완: 야이 반란군놈의 새끼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니놈들의 머리통다 날려버리겠어! (수화기를 전화기에 아무렇게나 처박고) 역적 놈의 새끼들!!

유학성: (전화를 끊으며) 장태완이가 전차로 우릴 날려버리겠다는데 어쩌지?

전두환: 미친 놈…

2005년 5월 14일에 방송된 드라마 제5공화국 제7화에서 김기현이 연기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12.12 반란군을 꾸짖는 장면. 급하면 2분 58초부터 보면 된다. 조금 더 긴 버전(영어 자막 있음) 위 영상에 해당하는 내용은 3분 49초부터, 하이라이트는 6분부터. 장태완 장군이 그려진 매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영상이다. 김기현이 매우 강렬한 포스를 보였기 때문에, 인터넷을 즐기는 젊은이들까지 단박에 매료(?)시킨 것. 이후 여러 합성에 등장하며 '장포스'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얼굴 또한 역대 배우들 중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편. 배우가 성우를 겸하고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 연기가 상당히 쩌렁쩌렁하다. 더구나 실제로 김기현 성우 본인이 젊은 시절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조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어서 더욱 몰입감 있는 연기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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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가끔 쓰이기도 하나 주로 성우 개그로 쓰이는 빈도가 높은 편. 그리고 이 대사가 나온 직후의 유학성과 전두환의 반응에서 착안해 "OOO이 XX로 우릴 날려버리겠다는데 어쩌지?" / "미친 놈..." 이라는 드립이 연달아 나오기도 한다.

여기서의 장태완 장군의 일갈은 위에 링크된 장태완 장군의 육필 수기를 참고한 대사다. 제5공화국은 물론 제4공화국과 코라아게이트에도 나온 "전차를 몰고 가서 박살내버리겠다"는 일갈은 모두 이 수기가 근거. 장태완의 육필 수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야, 이 똥뙤놈 같은 놈아!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 인격자, 배신자인 더러운 놈아! 너희놈들 거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 내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의 대가리부터 깔아뭉갤 것이다!"

그 외에도 제5화 59분쯤에서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할때 육군본부를 찾아갔더니 정문 근무를 서는 헌병 병장의 전투화 끈이 풀어지자 고쳐매주며 수고하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장면인데… 물론 그만큼 장태완 장군의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는 장면이겠지만, 현역이나 예비역의 눈에는 본인의 의도치 않은 헬게이트 개방의 순간일지도. 다만 이 때가 똥군기 가득하던 1979년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별 일 없었을 수도 있다. 이 세대의 군대는 복무기간이 33~36개월로, 무려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구타 및 가혹행위를 견뎌내야 병장이 될 수 있었으므로, 병장이 소위나 하사를 폭행하며 군기를 잡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다. 거짓말 같으면 당시 군 생활을 했던 분에게 육군 병장이 어느 정도의 권력이 있었는지 직접 여쭤보면 된다. 이들의 복무기간음 짬중위 내지 중소위 최소복무기간만 채운 대위급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에 어지간한 능력은 신참 소위나 신참 하사보다 나았고 높으신 분들도 이를 알았기 때문에 실무적인 처리사항은 죄다 병장에게 떠넘기기도 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병장의 권력은 수직 상승하여, 오히려 신임 소위나 하사는 병장이나 심지어 일부 상병들에게까지도 이리저리 치였다. 심지어 선임 장교들이 신입 소위를 신고식이랍시고 골탕먹이는 방법으로 부대 내 군기를 잡아야 한다며 일부러 병장과 시비를 붙게 해서 물먹이는 사례가 있기도. (...) 이런 부조리로 인해 터진 사건이 바로 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이다. 다만 소위나 하사가 어디 빽이라도 있다거나 혹은 성격 자체가 다혈질일 경우에는 병장들을 찍어누르는게 가능했다.[35]

물론 장군이 직접 전투화 끈을 매만져 준 것이 특이사항이기는 하지만 당시 병장의 위세를 생각해보면 직속상관인 중대장(대위)쯤 되는 장교에게 쓴소리 좀 듣고 경고만 받는 정도로 끝날 것이다. 단, 이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단순한 야전 부대가 아니라 별들을 위시한 간부들 천지인 육군본부란 점, 그리고 헌병의 경우에는 간부들의 파워가 다른 병과보다 센 데다 수가 적은 헌병 특성상 T.O가 적어 승진 가능성이 낮아 타 병과나 같은 병과의 경쟁자들보다 처신을 잘 해하는 판에 이런 사단이 났으니 그들이 장태완 장군이 안 보는 사이에 강도 높은 내리갈굼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생각보다 병장이 피곤한 나날(.....)을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3.1.3. 코리아게이트


한편, 코리아게이트김동현씨는 김기현씨와 거의 맞먹는 포스를 보여주었다.[36] 장태완의 불 같은 성격과 경상도 사투리[37]도 잘 재현했지만, 무엇보다도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는 제5공화국의 김기현 씨마저 압도한다. 특히 마지막에 50명 남짓 남은 자신의 부하 장교들을 모아놓고 훈시하는 장면, 국방장관 노재현의 "상황 종료하라."는 명령을 받고 복명복창하는 장면이 백미. 12.12 사태를 다루는 회차의 마지막 컷은 항상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리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전화로 외친 대사는 흔히 알려진 대사(드라마 제5공화국 기준)와 거의 유사하지만, 비슷한 대사를 두 번 연타로 날린다.
장태완: (군복으로 갈아입고 초조한 듯 지휘봉을 쥐락펴락하며 맴돌고 있다) 아니 그 장세동이하고 김진영이하고 이, 조홍이 아직도 안 나타났는데, 그것들 지금 어디 처박혀있단 말이야, 이거!?

김기택: 사령관님, 그 세 놈은 30경비단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장태완: 아니, 사령관이 비상소집한 지가 언젠데 아직 거 처박혀있단 말이야?

김기택: 사령관님, 거기 지금, 30경비단장실은 그들 세 사람만이 아닙니다.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노태우, 제1·제3·제5공수여단장, 71방위사단장 등이 모여있습니다.

장태완: (김기택 참모장의 이야기에 놀라며) 아니 그럼 그놈들이 작당을 해갖고 정 총장을...?

김기택: 그렇게 보시는 것이... 옳을 것 입니다.

장태완: (분노하며 지휘봉으로 책상을 친다) 내 이노무 쉐끼들 말이야 단벤에 마 다 기냥 때려즥이야 되는데! (참모진을 향해) 야, 30경비단 대!

(장면이 30경비단장실로 바뀐다. 전화기가 울리자 황영시가 받으려는 걸 노태우가 먼저 받는다.)

노태우: 여보세요.

장태완: 거 장세동 대령 좀 바꿔주쇼! (노태우가 화들짝 놀란다)

노태우: 장 대령을 찾는데?

유학성: 누구요?

노태우: 수경사 사령관인 것 같습니다.

유학성: 내가 받지. (노태우로부터 수화기를 넘겨받고) 아, 장 장군이오? 나 유학성이오.

장태완: 아 선배님, 남의 부대에 와가지고 여러 명 모아놓고 무슨 작당하는 거요? 예? 그리고 총장님한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잠시 유학성의 이야기를 듣다 짜증을 내며) 거, 총장님 납치해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냔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 말 하지 말고! 빨리 저, 총장님 저, 원위치로 돌려보내 주시오.

유학성: 어이, 장 장군.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일루 와~ 일루 와서 우리하고 얘기 좀 하자구.

장태완: 야 이 반란군 놈의 XX야, 니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내가 말야, 전차 끌고 가가지고 내 니들 싹 쓸어버릴 거야! 이놈의 XX!

유학성: (당황해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한참을 어안이 벙벙한 채로) ...엥?

황영시: 놔 봐. (유학성으로부터 수화기를 넘겨받고) 장태완이! 거 왜 이래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 아니야?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아 그러지 말고, 30경비단으로 와. 와서, 우리하고 같이 일 하자고.

장태완: 아 형님, 정 총장을 잘 모시라고 처음 그래준 사람이 누굽니까. 정 총장이(랑) 제일 친한 사람이 형님 아이요? 아 그런 사람이 납치극 연출할 수 있어요? ...거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정 총장 저, 저, 빨리 저, 원위치로, 복귀시켜 주시오. 그러며는 내 요번 일 아무 일도 엄섰던 것으로 처리하겠십니다.

황영시: 그럴 수가 없어! 이건...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야.

장태완: 그래 좋아, 이놈들아! 니들 말야,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내가 포 끌고 가 가지고 느그들 다 아주 그냥 싹 쓸어버릴 기야, 이놈의 XX야!!

(장태완이 전화기를 부술 듯 처박고 한숨을 쉬며 한 바퀴를 돈다. 이 때의 시각은 21시.)

참고로 장태완 장군이 유학성, 황영시와 통화하는 장면은 이 버전이 실제 장태완 장군의 증언과 가장 가깝다고 한다. 또한 통화하는 순서의 고증도 잘 맞는다. 제5공화국에서는 먼저 황영시 → 유학성 순서로 나오지만, 장태완 장군의 전화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실제 순서와 대사 내용은 그 반대.[38]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실제 순서대로 잘 지켰다. 황영시는 차규헌에게도 전화를 바꿔주려 했지만 장태완 장군은 듣지 않고 끊어서 차규헌은 현장에 있던 중장들 중 유일하게 장태완과 대화를 못한 중장이 되었다.

이때 김동현 버전의 연기 덕에 장태완이라는 이름이 일반인에게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군사반란 이후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간의 조사를 받은 뒤, 5년 후배인 전두환[39] 때문에 강제로 쫓겨났다. 그리고 여섯 달이나 집에서 갇혀 지낼 만큼 힘들었다. 12.12 군사반란 직후에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수도경비사령관이 된지 고작 1개월 내외만에 터진 일이었다. 후임자는 최전방 병력을 빼돌려 반란에 참가시킨 9사단장 노태우였다. 노태우는 이후 보안사령관을 찍고 대장으로 예편했다.

장태완 장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었다. 친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올바르고 소신있는 일을 하다가 패하여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분개와 통탄을 하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였다,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태완 장군은 자신의 불효를 탓하고 부친의 한 많은 삶을 마감한 부친의 눈에 슬픔이 가득하여 "아버님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이놈을 용서해주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신 어머님과 영생복락을 누리십시오."라고 통곡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0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고등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대에 들어갔고, 그 해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한 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40]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41] 아들의 묘비명은 장태완이 직접 썼는데, 내용은 이렇다.
故 장성호의 묘.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을 유랑했고,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장태완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가끔 '하나라도 더 낳았으면' 하는 후회도 했다고 한다. 부인이 무남독녀 외동딸인지라 되도록이면 많이 낳고 싶어했는데 박정희의 출산정책에 지극히 따른 장태완이 말렸다고 한다.[42] 그런데 그런 아들이 죽었으니. 심지어는 전두환꼴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던지 장태완을 공기업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였고, 장태완은 묵묵히 사장직을 수락하였다. 198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추대됐다가 1995년부터는 훗날 직원학대와 사기분양 사건으로 유명해진 르메이에르로 영전돼 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43] 물론 르메이에르의 각종 병크가 터진 것과 장태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1993년에 <12.12 쿠데타와 나>라는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현재 절판[44]되었기에 국회 전자도서관에서 원문보기가 가능하다. 읽고 내용 추가바람.

이후 1994년에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으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5·6공화국 정권 비리 및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때 증언을 마친 후 두 사람을 향해서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물론 두 사람은 데꿀멍.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때 장태완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386세대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라고 하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집권여당 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2002년 6월 북한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북한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기는 했지만 노무현 후보와는 껄끄러운 관계였고 한때는 후단협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었다. 어찌 보면 숨겨진 흑역사. 이로 인해 한미 FTA 등에서 기존 친노와는 거리가 있는 입장을 보였는데 이것 때문에 오늘의유머나 서프라이즈 등의 사이트들에서 당시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과 엮여 나라 팔아먹은 의원이라고 느닷없이 욕을 먹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잘 찾아보면 2000년대 당시 그쪽 성향 사이트들에서 까는 의원들 목록 짤방에 장태완 의원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시 물론 지금 진보계열에서는 시대상 그랬다면서 그냥 넘어가는 모습이고, 기본적으로 강직한 군인이었다고 장태완을 칭송하는 게 우세하다.

이후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새천년민주당 6,780,625 (35.9%) 당선 (3번)

5. 별세, 그리고...

2008년에는 폐암으로 폐를 3분의 1이나 잘라냈다. 당시 수술은 잘 되었으며 이후 <12.12 군사 반란>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2010년 7월 26일숙환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

그런데 장례식장에 장세동이 방문했다.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장세동은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서, 장태완 소장의 직속 부하였다. 장태완 장군이 비록 수경사령관에 취임한지 1달 여밖에 안되었다고는 하나, 직속 상관과 부하 사이에는 대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는 것이[45] 한국군이다.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직속 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체포를 그토록 망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를 두고 신군부 인사, 故 장태완 前의원에 '화해의 손길'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났는데, 이에 대한 판단은 위키러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2011년에 또 논란이 되었다. 6월에 숨진 안현태 前 청와대 경호실장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기 때문이다. 안현태는 육군사관학교 제17기로, 하나회 회원이었다. 참고로 허삼수, 허화평, 김진영도 안현태와 육사 동기다. 또한 안현태는 전두환에게 충정을 다한 인물이라서, 현충원 안장이 거론될 때부터 말이 많았다. 전두환의 비자금을 조성한 죄로 구속되면서 군 형법상 반란수괴 혐의 등으로 먼저 구속된 전두환을 지칭하며 "이제 각하를 옆에서 모시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런 인물이 현충원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란 자체도 벌어졌고, 5.18 구속부상자회가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46] 앞에서 안현태 전 경호실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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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태 전 경호실장의 묘는 하필이면 장태완 장군의 묘와 가까이 있다. 사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 먼저 세상을 떠난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 묘 옆에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유학성 前 국방부 군수차관보의 묘가 있다. 물론 유학성이 1997년에 사망했고, 정승화 장군이 2002년에 작고했으니, 정승화 장군의 묘 자리를 잘못 쓴 쪽에 가깝다.

그나마 장태완 장군처럼 신군부에게 맞섰던 강창성[47]전 보안사령관은 아예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했으니,[48] 장태완 장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2012년 1월 17일에는 장태완의 부인 이병호 여사가, 강남구 대치동의 아파트 화단에서 쓰러져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집 안에서 유서가 발견된 것을 보아 자살로 추정되었다. 관련 기사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이 날에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던 신윤희(육군사관학교 21기, 하나회) 당시 수경사 헌병부단장이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하고, 장태완을 비난하는 책을 냈다.# 말이 필요도 없을 만큼 내용도 형편없다.

현재 장태완의 후손은 그의 외동딸, 사위 그리고 외손녀 단 3명 뿐이며 그저 단촐하기 짝이 없다. 후손이 남아 넘치는 어느 군사반란의 주동자인 라이벌과 그 동료[49]와는 대조된다.

김대령장태완 장군은 김재규의 부하이며 12.12 군사반란을 장태완 장군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말도 안되는 발언을 했다.[50]

6. 관련 문서


[1] 11기 이후의 육사 출신들은 4년제 정규과정을 모두 밟은 자신들이 진짜 육사 1기라는 자존심만 센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하나회가 이런 흐름이 강했다. 육군종합학교, 학군단, 육사 1~10기를 깔봤다고 한다. 1985년을 끝으로 하나회 기준에서 껄끄럽던 육종장군들은 모두 예편되었다.[2] 전두환 정부에서 호주 대사, 12, 14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상주) 지냄[3] 계급과 경력을 떠나 전쟁 후에 사관학교에 입학했던 김상구와 달리 장태완은 6.25전쟁에 전쟁터에서 목숨걸고 싸운 참전용사였다. 해당 발언은 미국같은 나라였으면 계급 낮은 부사관이나 병사에게 말했어도 군생활이 아니라 사회생활 자체가 파탄날 발언이다.[4] 무려 70년대에 막걸리에 돼지고기, 느슨한 저녁점호까지![5] 실제 상황이라면 엄청난 갈굼이 예상되는 일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려 스타가 병장 한명을 챙겨준다는 그의 인성이 제대로 드러난 부분이기도 하다.[6] 깻잎의 경우는 좀 특이한 게 장태완 본인이 생전에 굉장히 좋아했던 음식이기 때문에 지휘관 재량으로 추가시킨 음식이었다. 물론 그 당시 병사들은 언제나 배고팠기 때문에 아무리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깻잎 무침도 매우 잘 먹었다고 한다.[7] 밑에 보면 알겠지만 신군부 측을 가리켜 반란군 놈의 새끼라고 말하며 전차몰고 날려버리겠다는 것도 수기에 있는 내용에서 조금 자극적으로 바꾼것 뿐이다.[8] 하필이면 주력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수경사 30, 33경비단장이 장세동, 김진영으로 당시 모두 반란에 가담해 있었다.[9] 정병주 사령관은 전두환이 1공수 여단장할 때에도 특전사령관이였던 분이였던 분이며, 1공수 여단장 박희도는 78년 1공수 위수지역에 무장공비가 돌아다니다가 귀환한 사건으로 보직해임 될 뻔 한 것을 육군참모총장에게 정병주 사령관이 빌어서 자리 보전했음에도 이때 무참하게 체포하였다.[10] 사실 30, 33경비단은 수경사 배속이였으나, 청와대 인근을 방위하였기에 경호실장이였던 차지철이 오랜기간 자신의 직속라인으로 지휘하고 있었다.전두환은 한때 차지철 밑에서 경호차장보를 했었고, 뒤를 이은 것이 노태우였다. 따라서 12.12시기에 장태완 사령관이 이 주력부대들을 장악하지 못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였다.[11] 황동환 수경사 방공포병단장과 구명회 수경사 야포단장은 모두 비 육사출신이다. 역시 쿠데타군에 맞선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이나 33경비단 작전주임 김달연 소령도 마찬가지. 실제 포병단에서는 하나회 장성들이 모여있던 수경사 30경비단으로 포를 조준한채,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발사할 준비태세를 갖췄다고 한다. 다만, 30경비단이 경복궁에 위치해 있어 문화재 훼손 우려가 있었으며, 청와대, 총리공관 및 효자동 등 주택 밀집지역 인근이라 실제 명령을 실행 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당시 하나회는 자신들의 세력인 30, 33경비단을 통하여서 최규화 대통령대행을 잡고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모르고, 그 위에 국방장관은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사라져 있을 때는 그래도 막을 수 있었으나, 정작 나타나서는 항복이나 종용했다.) 국군통수권 대행자가 있는 곳에 포격을 시행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 또한 30경비단내의 초급장교,부사관,사병 등 죄없는 직속 부하들의 피해도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2]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포병연대장 김도수는 쿠데타에 적극 가담해 경춘국도 다리목에 바리케이드를 세워놓고 있었기에 출동했으면 같은 사단 병력들끼리 싸울 판이었다. 더불어 사단장 손길남이 출동명령을 내리면 바로 사살하기 위해 사단장실 앞에 장교들이 권총에 장전을 하고 대기했다고 한다.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배정도가 제26기계화보병사단 담당 보안부대장 김현과 술 마시다 퍼질러 자고 있었다.[13] 그런데 사실 수기사와 26사가 수경사에 배속하였다고 하더라 당장에 반란군과 진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수여단은 시가전 특화부대들로 이들을 상대로 보병사단이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고, 또 서울 도심에서 싸울 수는 없다.(도심에서 싸우면 북한의 혹부리 영감만 좋아할 일) 이부대들로 방어용으로 사용하고, 반란군에 통제를 받지 않는 9공수를 통하여서 보안사나 30경비단을 터는 것만이 거의 방법이였다. 실제로도 반란군들이 가장 두려워 하던것은 오직 9공수의 서울이동이였다.[14]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은 갑종(35기) 출신으로 그 다음 해인 1980년 5월 전투교육사령관 겸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으로 전두환의 광주 진압 요구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밀려난 윤흥정 장군의 동생이다.[15] 당시 상황에서 진압군의 거의 유일한 정예병력으로 이들을 통하여서 보안사를 타격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반전 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계엄상황이였기에 반드시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를 듣지 않는다면 무조건 반란군으로 즉결처분 대상이다.[16]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는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에 발맞춰 제9보병사단 29, 30연대에게 서울로 진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나회 소속인 참모장 구창회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는데 30연대를 맡고 있던 비하나회 김봉규 대령은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29연대장 이필섭은 군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결국 29연대와 30연대 1개 대대 병력이 휴전선을 버리고 쿠데타에 동원된다.[17] 육사 12기 하나회[18] 여기에 서울을 방위하는 수도경비사령부 인근에 수도권 중 서북부(고양~파주 일대)의 방위를 담당하고, 상비사단만 3~4개(1, 9, 25, 30사단)를 가지고 있는 1군단에 군단장이 12.12때 경복궁에 있던 황영시였고, 서남부(인천 및 일대 도서지역 포함)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장이 함께 있던 차규헌이였다.[19] 먼저 제1한강교로 향했으나 막혀서 행주대교로 갔지만,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 열어준 길로 들어온 제1공수여단에게 장악된 뒤였다.[20] 경기 서남부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 내에 부대들은 따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군단장이 경복궁에가서 하나회 후배들 옆에 앉아 있었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수도군단도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였다.(9사단을 보라)[21] 장태완 소장이 동원할 수 있던 화력이 전차 4대와 토우 중대, 3.5인치 로켓포, 106미리 무반동총인데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장애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사용할 경우 유도선이 끊어져 엉뚱한 곳에 떨어질 수 있다며 토우 중대 투입을 반대했다. 박 대령은 그 대신 야포단을 동원해 쿠데타 수뇌부가 모인 경복궁을 타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야포병단장 구명회 대령은 타격을 위해선 관측사격을 실시해야 하는데 그럼 시가지가 쑥대밭이 된다며 반대하고 조명탄만 꺼내두었다. 그나마도 조명탄 추진체가 민가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꺼내놓기만 하고 장전을 못 했다.[22] 9공수로 보안사를 타격해서 부대 도/감청을 막고, 납치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만 한다면 반란군들도 방법이 없다. 아무리 최규화 대통령대행을 잡고 있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하나회편을 들어도, 계엄상황에서 모든 부대는 계엄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를 방해할 보안사 본부가 타격을 받고, 계엄사령관이 하나회가 아닌 부대들에 명령을 내린다면 반란군들도 도심에서 유혈사태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물론 그런것을 생각하고 저지른 인간들이 아니기는 하다.[23] 2007년 용인 죽전으로 이전. 현재의 한남 더 힐 아파트.[24] 이제 지난 이야기이지만 채명신 장군이 중장에서 끝나지 않고, 대장 진급 후 육참총장,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장관이 됐다면, 12.12 자체가 안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은 하나회 출신 장교가 베트남 전쟁에서 벌인 추태를 다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25] 장태완 사후, 장세동은 장태완의 빈소에 가서 조문을 가기는 했다.[26] ~랑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27] 유달리 저 '야' 부분에서 엄청난 사자후를 시전하신다.[28] 오른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왼손으로 본체를 들고 있다가 본체를 내려놓았다[29] 영어 원문은 "You rebel scum!" 의미상으로는 완벽히 일치한다.[30] 역시 김기현이 성우로 출연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제라툴이 반란군은 저그로, 전차는 거신으로 바꿔서 패러디하였다. 하필 패러디 대사가 추가된 것이 2014년 12월 12일이었던 것은 덤.[31] 설정오류가 있는데 당시 피닉스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이 당시 프로토스는 UED가 아니라 배반자 저그를 무찌르기 위해 케리건과 협력했다.[32] 예시들 중에 이 상황과 조건에 엄청나게 들어맞는다. 장태완이나 양 웬리나 쿠데타 진압 입장에 있었고 신군부나 구국군사회의나 쿠데타를 일으킨 측이었기 때문[33] 아들을 되찾고 싶다면 1000만원을 달라고? 내 아들은 그렇게 싸지 않다! 1억으로 올려!그 전에 아들 몸에 상처 하나 냈다면 머리통 날려버리겠다고 하는게 패러디에 적합하지 않나? 후술하겠지만 사실 장태완 장군 본인도 아들을 정말로 사랑한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34] 야인시대의 김기현 방영분[35] 전자의 경우에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고, 후자의 경우엔 계급을 내세우면 아무리 병장이라도 할말이 없기 때문. 당장 내무 부조리가 지금보다 쎄고 쎘던 시기인만큼 소위나 하사가 자기한테 대드는 병장을 두들겨 패는건 일도 아니었고, 더 나아가 하극상으로 처리해버리면 병장이 오히려 곤란해질게 뻔한 일이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에 일병에서 부사관으로 임관한 하사는 소속부대로 복귀하자마자 상병/병장들한테 견제(?)를 당했는데, 이에 "야 이 XX야, 내가 네 친구야? 어디 감히 상병장 나부랭이들이 하사한테 맞먹으려 들어!"라는 말로 세게 나가자 더 이상 안 개겼다는 일화가 있다. (.....) 현재는 원사로 진급했다고.....[36] 인지도가 낮다는 오해가 있지만 실제로는 방영 당시 10.26에서 전두환 집권까지의 전반부는 MBC의 제4공화국 못지 않은 화제성을 불러오며 두 프로그램이 시청률 경쟁을 벌였다. 자신을 회유하는 전두환 세력과 답답한 군수뇌부에 시원하게 일갈하는 김동현의 연기는 큰 화제가 되었으며, 실제 장태완 장군이 12.12 에피소드 방영후 김동현에게 양아들 삼고 싶다고 연락할 정도였다. 김동현 또한 이를 감사히 받아들였다고 한다.[37] 장태완의 고향경북 칠곡군이다.[38] 대사 내용과 순서는 동일한데 전화받는 순서만 정확히 반대로 바뀌었다. 정리하면, 유학성이 맨 처음 전화를 받아서 장태완에게 왜 남의 부대에 들어와 있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황영시가 받았을때 장태완에게 총장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 형님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39] 참고로 둘은 선후배 관계이지만 나이는 1931년생으로 동갑이다.[40] 공교롭게도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 근처였다.[41] 시신은 꽁꽁 얼어 눈, 코, 입 외의 모든 구멍에 얼음이 들어차 있었다고 하며, 아들의시신을 수습해 서울로 가는 동안 장태완 장군은 아들의 코와 입에 있던 얼음을 혀로 녹였다고 한다. 차마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끊는 부정이 느껴지는 부분.[42] 1960년대 당시에는 출산율이 4~5명대였다.[43] 르메이에르의 역사 등을 볼 때 직접적으로 경영했다기보다는 잠시 얼굴마담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44] 참고로 장태완의 고향인 칠곡군에 있는 공공 도서관과 군립 도서관 모두 없으나 순심 고등학교 도서관에는 2009년 기준으로 한 권이 남아있었다. 발견 당시 고서적들 사이에서 방치되어 있어서 별 다른 훼손없이 읽을 수 있었다.[45] 영관급 위로 올라갔을 경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 계급에서는 무한한 쪼인트와 싸닥션으로…[46] 현재는 세종시로 이전하였다.[47]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약한 예로 신군부로부터 탄압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도 동일. 꼬마민주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지역구 선거에도 출마했었다. 그런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통합민주당(꼬마 민주당 2기)이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3김 정치로의 회귀에 반대하면서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을 선언, 덩달아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공천되며 재선 의원이 되었다.[48] 사실 이는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 때문이다. 사면은 받았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으려는 취지에서 비롯된 법안이었는데 19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강창성 사령관도 여기에 해당되었던 것. 그런데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면서 법안 적용방식이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49] 그래도 노태우는 그 당시 자녀수가 적은 2명 뿐이지만 둘 다 셋씩 낳아 손자 손녀는 총 6명이라 그리 단촐하지는 않다.[50] 장태완은 신군부의 반란에 맞서고 정승화 총장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사람으로 절대 반란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