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0:55:38

허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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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부 제2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허화평
許和平 | Heo Hwa-pyeong
파일:허화평 프로필.jpg
<colbgcolor=#082e59><colcolor=#ffffff> 출생 1937년 10월 15일 ([age(1937-10-15)]세)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 계원리
(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리)[6]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본관 김해 허씨
봉우(鳳宇)
우민(佑民)
재임기간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1981년 12월 24일 ~ 1982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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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82e59><colcolor=#ffffff> 배우자 김경희
자녀 1남 2녀
학력 포항국민학교 (졸업)
포항중학교 (졸업)
포항고등학교 (졸업)
육군기갑학교 (졸업)
미국 육군야전포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필립보)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4, 15[7]
경력 대통령비서실 보좌관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미국 해리테지연구소 수석연구원
제14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 무소속)
제15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북구 / 무소속)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위원
현대사회연구소 소장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7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1년 3월 ~ 1980년 9월
최종 계급 준장 (대한민국 육군)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여담5. 소속 정당6. 선거 이력7. 저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前) 군인, 관료, 정치인이자 현(現)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전두환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그의 비서실장으로 지냈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전두환의 최측근으로서 청와대실세로 지냈다. 전두환 정부 초기에는 허삼수, 허문도 등과 함께 쓰리 허라 불리며,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결국엔 전두환의 눈 밖에 나면서 좌천되었다.[8]

2. 생애

1937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 계원리[9]에서 태어났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중학교, 포항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7기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진영, 허삼수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으며 허삼수와는 단짝이었다.

1961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제15보병사단 수색중대 소대장, 제1군단 작전처 교육장교, 제1공수특전단 게릴라전 교관을 역임했다. 중위 당시 소령이었던 전두환을 처음으로 알게 됐으며 이후 제9보병사단 대대장, 제9보병사단 작전참모를 거쳐 국군보안사령부로 전속한다.[10]

1979년 10.26 사태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비서실장이었다.[11] 말하자면 제5공화국개국공신인 셈으로 1980년 9월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였다.
파일:external/blog.joins.com/%ED%97%88%ED%99%94%ED%8F%892(1).jpg

1980년 9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통령비서실비서실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책은 없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없던 직제를 일부러 만들어 허화평을 임명한 것이다. 전두환 정부 초기 허화평의 위상과 권력이 얼마큼 컸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청와대의 다른 보좌진들은 별도의 건물에서 지내는데, 허화평은 청와대 본관에서 전두환과 함께 근무했다.[12][13]

한 마디로 혼자서 실질적인 청와대 핵심 기획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직급만 차관급이었지, 실질적으로는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급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의 허화평은 사실상 전두환 정권의 2인자나 다름없었으며, 정변의 실무자로서 박정희를 보좌하여 2인자가 된 김종필과 비슷하다. 허삼수,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리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허화평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이 대두되자 1981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 좌천되었다.[14]
파일:PG-총리+일반%2FPG-1982%2F칼라%2FPG-1982-0139%2F2400dpi%2FPG-1982-0139-021.jpg
파일:PG-총리+일반%2FPG-1982%2F칼라%2FPG-1982-0139%2F2400dpi%2FPG-1982-0139-034.jpg
수석비서관 시절 간담회에서의 모습.[15]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쓰리 허가 너무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하던 전두환의 눈 밖으로 완전히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82년 5월 대구직할시장으로 가있으라는 사실상의 좌천성 인사를 받게 되지만 허화평은 이를 거부하였고, 전두환은 그럼 국세청장을 맡으라고 했지만 이 역시 거부하고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 때 공백이 된[16] 대구직할시장 자리에는 이상희[17], 국세청장 자리에는 하나회 출신 안무혁이 앉게 된다. 대구시장은 지자체장이라 한 시의 최고 책임자[18]고 국세청장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요직이지만[19] 허화평은 청와대 밖으로 나가 외직을 맡는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듯 하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재단의 연구원으로 있다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국책 연구소인 (재)현대사회연구소 소장에 부임했다. 이후 2005년부터 '미래한국재단'으로 바꾸고 2007년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2년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으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 처리 조치로 구속기소되었다. 이에 신한국당을 탈당,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20] 약 2년간 징역 살이를 하다가 사면되는데, 출소할 당시 교도관을 대하는 태도가 뒤늦게 공개 되면서 옥생활을 한 게 하니라 황제 생활을 하다 나온 것 같아 죄값을 치뤘다고는 할 수 없어 보인다.관련 영상

이후 사면된 뒤 정계 복귀를 노리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8년 KBS가 제작한 서울 올림픽 개최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다큐멘터리 88/18에 출연해 올림픽 유치 배경 등을 술회했는데 이 때 했던 말이 잠깐 화제가 됐다.
"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 놓고 뭐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 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

3. 대중매체에서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배우 이성용이 연기했다.
파일:HeoHP-5.jpg
뒤쪽은 차광수가 연기한 허삼수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이진우가 연기했다. 제5공화국 내 개혁가 컨셉[21]으로 나와서 그런지 본인이 "실제 자신보다 더 멋지게 나왔다"면서 극찬했다고 하며 이것과는 별개로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22] 사실 멋지게 그려졌다고는 하나 제작진이 허화평을 평가하는 관점은 '독재자의 하수인인 주제에 몇 가지 혁신적인 주장을 했다고 개혁가로 포장되다니 어이가 없다'에 가깝다. 제21화에서 내레이션으로 '그들만의 개혁'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비판했다. 그 외에도 허화평이 금융실명제에 반대하자 민정수석 이학봉이 경제수석 김재익에게 "우습네요. 그렇게 개혁 개혁 노래 부르더니."라고 말하는 장면[23]이 있고 이에 김재익도 "그게 인간본성 아닙니까. 권력에 따라 줏대없이 바뀌는 사람."이라며 깐다. 처음에는 전두환은 허화평과 허삼수를 중용했지만 군사반란 성공 이후 개혁이랍시고 사사건건 전두환에게 조언이랍시고 가르치려 들면서 전두환의 심기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면서 노여움을 산데다가 자기 의견이 안 먹히니 유학성이나 노태우 선배뻘 인사들에게 총대 매서 자기 의견을 대신 전해달라. 라는 태도로 일관하다 2인자 노태우도 극대노하며 거부하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결국 전두환은 허화평과 허삼수가 자신을 조종하려 든다고 생각할 정도로 경계하여 본관에 들어올때 사전에 약속잡고 오라는 저격성 조치를 했고 마지막으로 밑에서 배우고 다시 오라며 허삼수를 대구시장으로 허화평을 철도청장에서 일하라고 사실상 좌천인사에 원하신다면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말에 전두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사실상 아웃이 된다. 결정적으로 허화평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24]에 나오는 김영삼상도동계 측근들과의 대화 씬에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허화평을 평가하는데 이는 제작진이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에는 청와대에서 완전히 나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이원조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는데 "당신을 잊지 않겠소, 영원히"라고 영어로 전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이원조가 전두환에게 허화평 숙청을 건의했기 때문이다.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문일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박훈이 연기했다.[25]

4. 여담

  • 동생인 허화남은 남파간첩으로 알려져 있다. 1967년 일본으로 밀항한 동생은 8월에 북한으로 잠입했다. 그곳에서 밀봉교육을 받은 뒤 1967년 11월 경북 영일군 장자면으로 남파됐다 붙잡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5공이 들어서자 전두환의 배려로 석방된 후 포스코, 삼성그룹 등에서 근무했으며 2017년 병사했다. 1993년 동생인 허화남의 간첩 전과가 누락되고 포스코에 특채된 사실이 공개되었는데, 경향신문 계열 뉴스메이커(현 주간경향)에서는 "허화평 씨의 압력으로 허화남 씨의 간첩 기록이 삭제되었다"라고 보도하였다.[26] 실제로 박철언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허화남의 간첩 기록에 대해 언급하였다.
  • 군사 정권의 인사답게 민주화 운동에 시종일관 부정적인 논조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월간조선》은 2012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허화평과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 허화평은 "5.18 민주화운동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 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암호 지령이 급증한게 사실이라 해도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당연히 북한 간첩을 통해 남한 상황을 체크해 볼 것이 아니겠는가? 만에 하나 북한 개입이 사실이라면 왜 본인이 재판받을 때는 말하지 않다가 한참 지난 2012년이 되어서야 발설한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고려해보면 회고의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단적으로 말해 북한이 개입했다는 실질적 증거는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국내 문서뿐만 아니라 미국 CIA 기밀문서에서도 드러난 사실.
  •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요동치던 당시 허화평은 TV조선의 단독 인터뷰에 응했다. 이 자리에서 허화평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의 정신적 포로라고 증언하면서 이 같은 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적 후진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이전 정권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놔뒀다는 식으로 발언했다. 전두환 정부의 첫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음에도#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 청산하지 않고 놔둔 셈. 허화평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다. 허나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이 수십년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잘못된 판단을 한 셈이 되었다.
  • 달변가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구속 기소되었을 때도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법정에서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는 와중에도 허화평만은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보수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종편 채널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데 말빨이 기가 막혀서 진보 성향 PD나 패널들이 애를 먹는다고 하는데 앞서 언급했던 88/18 다큐멘터리에서도 1988년 국회에서 열린 언론통폐합 청문회 당시의 당당한 태도라든가, 팔순이 훌쩍 넘은 2018년 시점에서의 유머 섞인 자기 소신을 보여주는걸 보면 명불허전이다.
  • 보안사 출신답게 보안 유지에 철저하여 허화평의 가족사, 가족관계, 거주지 등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28] 다만 특유의 달변가 기질 덕인지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을 가리지 않고 인터뷰에는 곧잘 응해주는 편이고 5공과 관련된 질문에는 상세하게 답변해주는 편이다. 도리어 5공인사들 중에는 장세동과 더불어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도 압도적으로 높고 인지도도 꽤나 높은 편이다.
  • 신현돈 대장이 휴게소에서 민간인과 시비가 붙었다가 전역당한 사례를 보면서 '그 정도의 일은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을 찾아가 '제가 대신 책임을 지겠으니 선처해달라'는 말을 할 정도로 배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0 - 1987 정계 입문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7 - 1990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0 - 1992 탈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2 - 1995 입당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6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6 - 2000 탈당


파일:희망의한국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0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0 탈당


[[민주국민당(2000년)|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글씨.svg
]]
2000 - 2002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2 - 탈당
2004년 낙선 후 정계 은퇴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무소속(정치)|
무소속
]]
69,395 (46.33%) 당선 (1위) 초선[29]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북 48,251 (44.23%) 재선[30][31]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국민당(2000년)|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글씨.svg
]]
32,261 (30.48%)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무소속(정치)|
무소속
]]
17,628 (16.09%)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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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파일:허화평 14.jpg
파일:허화평 15.jpg
14대 총선 (경북 포항시) 15대 총선 (경북 포항시 북구)
파일:허화평 16.jpg
파일:허화평 17.jpg
16대 총선 (경북 포항시 북구) 17대 총선 (경북 포항시 북구) }}}}}}}}}

7. 저서

  • 지도력의 위기(전 2권) - 새로운사람들. 2002.
  • 이념은 날개가 아니다: 허화평의 이데올로기 백서 - 출판사 동일. 2007.
  •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허화평의 이념청원론 - 인간사랑. 2011.
  • 경제 민주화를 비판하다: 임현진, 김종인, 백낙청, 송호근 주장의 허구 - 기파랑. 2014.
  • 사상의 빈곤: 사상이 빈곤하면 역사가 표류한다 - 새로운사람들. 2016.
  • 사상의 빈곤이 가져온 우리 시대 모순과 상식 - 출판사 동일. 2017.
  • 나의 생각, 나의 답변 - 출판사 동일. 2020.
  • 고독하지만 - 출판사 동일. 2021.

8. 둘러보기

12.12 군사반란 가담자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ff
파일:attachment/hnh.jpg
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소장 박준병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대령 김택수
준장 이상규 · 준장 최세창 · 준장 박희도 · 소장 노태우 · 소장 전두환 · 중장 차규헌 · 중장 유학성 · 중장 황영시 · 소장 김윤호 · 소장 정호용 · 준장 김기택
※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folding [ 각주 보기 ]
}}}}}}}}}}}}}}} ||

[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파일:옛 경상북도 도기.svg 경상북도 제14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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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이상두 박정수 김길홍 박세직
영주·영풍 영천 상주 달성·고령
금진호 박헌기 김상구 이승무 공석
군위·선산 의성 영양·봉화
김윤환 김동권 류돈우 김찬우 강신조
영일·울릉 경주군 경산·청도 성주·칠곡 예천
이상득 황윤기 이영창 장영철 반형식
울진
이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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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북 포항시 북구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B] 경북 포항시 남구·울릉군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C] 경북 포항시 선거구의 제14대 국회의원이다.[D] 경북 영일군·울릉군 선거구의 제14대 국회의원이다.[5] 피선거권 상실로 인한 의원직 상실.[6] 선영은 포항시 북구 기계면있다.[7] 1997년 12.12 군사반란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아 의원직 상실[8] 박정희 정부와 비교해보면 쿠데타공신으로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하다가 토사구팽당한 김형욱과 비슷한 사례. 다만 허화평은 김형욱과 달리 공직에서는 몰라도 사적으로는 전두환과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는 점에는 차이가 있다.[9] 현(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리[10] 허삼수, 이학봉은 허화평과 다르게 보안사에서만 주로 근무해온 수사통이다.[11] 이 당시 그의 계급은 대령이었다.[12] 원래 대통령의 집무실은 청와대 본관에 있었고 비서실장, 수석비서관 등 참모들은 '여민관'이라는 건물을 사용했었는데, 5공 초기에는 허화평의 집무실이 대통령 집무실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사실상의 비서실장, 실세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민주화 이후에는 대통령과 보좌진, 청와대 출입 기자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청와대 본관의 집무실보다 여민관 건물에 별도의 대통령 집무실을 만들어 사용했었고,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한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13] 원활한 소통을 위해 여민관 건물에 별도의 대통령 집무실을 만들었던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참모들과 같이 있으면서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책도 구상하고 토론도 하는 것을 즐겨했는데, 대통령 집무실이 본관에 떨어져 있어서 불편해했다고 한다.[14] 이후로 대통령비서실장은 1982년 1월부터 이범석이 새로 도맡기도 하였다.[15] 첫번째 사진 허화평 오른쪽에 위치한 인물이 6공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인데 청와대 비서관으로 재직했다.[16] 미리 초대 대구직할시장인 정채진경상북도지사로 발령낸 뒤였다.[17] 이상희가 신천대로 건설, 두류공원 정비 등 대구의 도시 인프라 확충에 꽤 기여한 것을 고려하면 대구 입장에서는 결과론적으로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18] 지자체장의 경우는 성공적으로 능력을 입증한다면 대통령 자리도 바라볼 수 있다. 거기다 관선제 시절에는 대구직할시장을 거쳐 내무부장관으로 간 사람만 3명일 정도로 지금보다 위상이 높았고, 현재도 낙선했으나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는 홍준표가 시장직을 맡고 있다.[19] 국세청장은 지금의 검찰총장에 비교해도 만만하디 않을 정도로 중앙부처 최고 요직 중의 요직이다. 당시에는 국세청이 경제 안기부라는 별칭이 있었을 정도였고 시대상을 감안하면 안기부장에 못지않고 검찰총장보다 요직이던 시절이었다. 박정희도 국세청장 자리에 최측근인 이낙선을 임명했다.[20] 여담이지만 허화평의 의원직 상실 이후 재보궐선거를 통해 해당 지역구에 입성한 사람은 다름아닌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이다.[21] 말이 개혁가이지 정치에 대해 무지한 군인들이 정계에 나오려면 기존 정치인들과의 타협이 불가피하고 국제경제나 이론에 한계가 있음에도 이를 반대하는 건 물론 기존 하나회 회원들로 국정을 꾸려나가자는 등 점차 자기들 입맛대로 전두환을 조종해 개혁을 종용하는 태도로 바뀌고 전두환의 인사조치에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등 심기를 건드리고 만다.[22] 마지막 화가 끝나고 나오는 정정보도에서 허화평과 허삼수의 지분은 압도적으로 많다.[23] 이학봉은 장영자 사건 당시 민정수석이었는데 안기부로부터 장영자는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냅뒀다. 그런데 허화평&허삼수가 사직하라는 등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척을 진다.[24] 허삼수와 허화평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을때 전두환은 철저하게 무시한다.[25] 예고편에 진압군 측 통화를 도청하는 장면이 나오며, 진압군 측의 장성을 상대로 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농락을 하는 부분이 압권.[26] 이는 허화평이 정권 실세일 뿐만 아니라 포항지역의 유력가였던 점도 동생의 포스코 특채에 영행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27] 당시 정무수석이던 조윤선이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자 "정무수석쯤 되면 대통령이 안 만나 주더라도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된다."고 일갈했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앞장서서 이 정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친박'이니 '비박'이니 싸우기만 하면 안 된다."며 비판했다.[28] 언론 취재를 통해 본인의 자택이나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미래한국재단 등이 등장한 적은 있지만 가족관계, 재산목록 등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고 미래한국재단 역시 진행하고 있는 대출사업 몇건 정도를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없다.[29] 1992년 민주자유당 입당
1996년 신한국당 탈당
[30] 1997.4.17 의원직 상실 (12.12 군사반란 재판 유죄판결)[31]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황에서 옥중 출마를 강행해 당선되었으나 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어 당선 약 1년만에 의원직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