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5:41:21

김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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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82e59><colcolor=#fff> 전두환 정부 초대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
金在益 | Kim Jae-ik
파일:external/blog.joinsmsn.com/4a207335b52ab.jpg
출생 1938년 11월 26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83년 10월 9일 (향년 44세)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랑군 아웅산 묘소
(現 미얀마 양곤 관구 아웅산 국립묘지)[1]
본관 상락 김씨[2]
본적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소정리
(現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소정리)
재임기간 전두환 정부 초대 경제수석비서관
1980년 9월 3일 ~ 1983년 10월 9일
부모 아버지 김응묵, 어머니 강병주
형제자매 6남 3녀 중 6남
배우자 이순자[3][4]
자녀 아들 김한회[5], 김승회
학력 경기고등학교 (2학년 수료)
고졸검정고시 (합격)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 / 석사)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
약력 한국은행 조사역[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경제기획원장관 비서실장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전두환 정부)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경제개혁에서의 높은 성과
3.1. 실수한 정책들
4. 기타5.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한국정치학경제학자이자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던 경제관료.

전두환 정부의 가장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 중 하나로, 전두환 집권 초기 전두환의 신임을 받아 경제 정책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진행한 인물이다.[7]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 대통령[8]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전두환에게 경제 정책 설계와 실행의 거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치솟던 물가를 안정시키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나 결국 염원하던 금융실명제 추진은 당시 많은 정치인들의 반발에 떠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다가 이후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2. 생애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김응묵과 어머니 강병주 슬하 6남 3녀[9]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10] 그의 아버지 김응묵은 6.25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했다. 또 김재익의 형 3명이 북한군에 끌려간 후 실종되어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 김재익 가족이 6.25 때 북한에게 당한 비극을 계기로 김재익의 아들 김한회는 훗날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어 북한의 인권문제와 국군포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김재익은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53회)에 입학했다가 검정고시로 대입자격을 취득한 뒤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외교학 전공으로 입학하여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11]를 졸업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사회에 진출했고, 1968~1973년에 걸쳐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한국의 천재'로 불리며 중동과 북유럽 국가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학위취득 이후, 귀국한 김재익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일했지만[12], 그가 주장한 안정노선은 당시 정부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그렇게 1979년에 경제기획원을 사직하고 한국개발연구원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전두환12.12 군사반란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거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 상임위원장,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분과위원장이 되어 권력의 핵심에 선 뒤,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그의 경제 과외 선생 역할을 했다. 경제학은 커녕 경제 자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하는 김재익의 능력에 감탄한 전두환이 집권 직전 김재익을 불러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를 제의하자 자신이 단지 정권의 얼굴마담격으로만 이용될 것을 우려한 김재익은 조건을 달았다.
김재익.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하겠습니다. 다만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저한테 일절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생각한 정책은 앞으로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각하께서 그걸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전두환. 여러 말 필요 없어. 경제는 자네가 대통령이야!
김재익은 경제수석을 맡기 이전부터 해외의 대기업에서도 러브콜을 받던 인물이었고 청렴한 성격이라 학계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군사정권 밑에서 경제수석으로 일한다는 소식에 김재익을 알고 있던 지인들이나 교수들도 김재익을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전두환의 전폭적인 지지와 물가 안정과 부가세 등 경제를 개선시켰고 만약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아니었다면 선진국 기반을 더 튼실히 만들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는 이유다.

금융실명제를 1년간 유예기간을 주고 시행하는 개혁을 추진했으나, 금융실명제를 하면 당시 '정치 후원금' 즉 정치자금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 군부들이 반발하였고 전두환도 결국 이를 제지하였다. 이 일로 인해 김재익에 대한 입지가 흔들렸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닐 수 있다.[13] 결국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터지면서 5공때 경제를 이끌었던 김재익은 44세라는 나이라는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3. 경제개혁에서의 높은 성과

실제 전두환 정부 출범 후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김재익에게 많은 권한을 줘서 일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하며, 이 시점에서 1980년대 경제개혁이 막을 올렸다. 특히 물가 안정화 분야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14], 1980년에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였던 것을 1982년7%로 줄여버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아예 3.5%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를 유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8.15 해방 이래 40여 년간 지속된 "高 인플레이션" 시대를 마감한다. 경제성장률 역시 1980년에 -1.6% 였던 것을 1981년에 7.2%, 1983년에 13.4%로 올린 것을 기점으로, 이후 평균 10%대의 성장률을 기록한다.[15]

그 외 수입자유화 조치도 시작하고, 실제론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이뤄지긴 하지만 OECD 가입이나 금융실명제 추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흔히 정보화산업은 1990년대 이후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긴 하지만[16] 김재익이 이때부터 국내 전화 교환기 형식을 기존의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전면 교체해 훗날 전화망을 이용한 인터넷 회선 구축을 용이하게 하는 등 알게 모르게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17]

또 이 시기 그가 한 특별한 일 중에 하나가 부가가치세 도입이다. 이 도입과 관련하여 김종인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직접 서독을 답사하고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연이 되어, 당시 노총각이던 김종인 교수에게 중매를 서 주기도 했다.

허나 금융실명제처럼 지하경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정책을 시도하다가 전두환의 측근들한테 단단히 찍히는 아이러니를 초래하기도 한다.[18] 덕분에 전두환이 최종 승인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치인들의 비자금 조성에 크게 방해가 되자 측근들이 난리를 쳤고, 결국 측근들의 반발에 못 이긴 전두환이 생각을 바꾸면서 시행에는 실패했다. 물론 전두환이 최종 승인할 당시에도 진지한 고민을 했다기보단 당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하여 여론이 악화되고, 정권이 불안해지자 금융사기를 방지할 방법 중 하나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려했을 뿐이긴 했다. 그러다가 측근들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정치자금을 주고받지 못 하게 된다"는 식으로 설득하자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포기한 것. 그나마 시행 직전까지 간 것도 실은 전두환을 설득했던 측근들이 당시 전두환에게 밉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고집을 부린 면이 있었다.

3.1. 실수한 정책들

사실 그도 인간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경제라는 것이 모두를 만족시키거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실수나 잘못 역시 존재한다. 그의 실수가 될 뻔한 정책을 몇 가지 들자면, 중화학산업의 포기와 농업지원 정책 포기이다. 중화학공업 포기의 경우는 해당 물품들을 외국에서 싸게 수입하면 된다는 것이 논지였다. 그런데 이건 원유가 마구 나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소비 위주의 기축통화국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로, 외국에서 수입하려면 우리도 다른 쪽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대안이 없으면 시행되기 힘든 정책이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효자산업인 자동차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뻔 했고[19] 농업지원정책은 우리나라 농업은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20] 지금은 타국과 FTA 맺을 때 조금이라도 식량 부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금 기준에선 실책처럼 보이지만, 김재익의 당시 주장에 대해 변호하는 의견도 있다. 일단 박정희 시절에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워서 그 쪽 산업 의존도가 당시 기준에서는 쓸데없이 높아져 1차, 2차 오일 쇼크 크리를 맞고 개발도상국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으로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그 당시에 중화학공업은 적자덩어리였으며, 이때의 경제성장 악화로 인한 실업사태가 부마항쟁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체제안정과 국민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한 경제정책 수정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1970년대 경제발전은 중화학공업에 의한 밑바탕이 컸으며,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과연 쓸데없는 것이며 경제위기는 오일 쇼크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절대적이며, 오늘날 한국경제의 중공업에 대한 비중, 그리고 70년대 이후에 추진했다면 원자재 등 가격이 더욱 비싸져 투자비용이 더욱 급등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중공업에 대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는 재반론도 있다.

물론 그럼 중화학 포기하고 경공업만 해야 되냐는 소리도 나올 순 있는데, 어차피 자원대국이 아닌 중화학공업 자립도가 높을 수는 없고, 정보산업이나 첨단가공 등 다른 쪽에 집중투자하여 그 의존도를 상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반도체가 대표적. 다만 이 경우는 중기적인 실업률 증가는 각오해야 한다.

농업지원정책 포기에 대해서도 수매제도 등의 지원정책이 이농현상 등의 농촌 붕괴를 상당히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덕분에 생산물의 다양화와 시장성 개척에 실패한 것 아니냐며 농업 지원정책의 효과가 별로 훌륭치 않다는 의견이 있다. 만 미친 듯이 생산하는 탓에 다른 농산물의 수입의존도가 높아졌으며, 새삼 명품 농산물을 만들어 차별화를 하려 해도 이게 하루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 기간 만성적 쌀 부족에 시달려 분식장려책을 펴야 했고, 전두환 집권 초 이상 저온으로 쌀 부족 사태를 겪은 것을 생각하면 쌀생산에 주력에 대한 비판은 후세대이기에 가능한 비판인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자포니카 품종은 세계적으로 생산지가 제한적이므로 국내 생산 기반이 없을 경우 가격 변동에 매우 취약하기도 하다.

한편, 2010년대 들어서서 두드러지는 조선업계의 불황,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중공업 분야 대기업들의 노동자 비 유연성, 그리고 중국의 업종 내 성장 등을 근거로 김재익의 중화학공업 포기 주장이 옳았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조선업계 등의 중화학공업이 김재익의 주장이 나왔던 때 이후에도 약 30년 가까이 한국의 주력 산업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화학공업을 넘어서는 신종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 육성이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가 선택해야 할 길임은 분명하지만, 그 당시의 중화학공업은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에 김재익이 활동했던 1980년대에 당장 할 일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한국이 자동차, 철강, 조선, 석유화학, 정유 등의 중화학공업에만 매달렸던 것도 아니다. 반도체, IT 기기 부문에서 한국이 투자 및 달성한 것을 생각해 봐도, 이 점은 충분히 설명이 된다.

4. 기타

  • 김재익이 5공 인물들 중 유달리 유명해진 이유를 크게 2가지 들자면, 경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전두환을 보필해 80년대에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이룩했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그 뜻을 다 펴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2번째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전두환이 급브레이크를 걸어서 실수가 될 뻔한 정책 몇 가지가 멈춘 것도 있으나 실책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편이다.
  • 전두환이 정치적인 이유로 막은 정책도 있지만서도, 동시에 김재익이 저렇게 정책을 펼 수 있었던 이유는 전두환이 그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순수한 경제학자가 당시 무소불위의 독재자를 조종해서[21] 자신의 경제적 이상을 관철시켰다는 것 때문에 경제학계나 테크노크라트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것도 그가 오늘날까지 종종 회자되는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22]
  • 김재익은 학창시절 수학을 굉장히 잘하고 좋아했으며 장래희망도 엔지니어였지만 색약이던 탓에 공대 시험은 치지 못하고 대신 외교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남덕우가 그를 중용한 이유도 유학 시절 남덕우가 어려워했던 수학 문제들을 도와준 것이 계기였다. 그래도 웬만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고장은 스스로 고칠 정도로 기계나 기술에 관심도 많고 능숙했다. 그래서인지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 자신의 경기고등학교 후배 오명 체신부장관이 주도하던 전자식 전화 교환기 개발 등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통신분야 개혁정책을 적극 밀어주고 지원해 주었다.
  • 재임하고 있던 당시에도 상당히 청렴한 편이었으며,[23] 인사청탁이 들어와도 절대 받아들이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인사청탁을 부탁하는 편지가 들어오면 그냥 알아서 장롱 속에 넣어뒀다고 한다. 어머니가 별세하고 나서 가족들이 짐을 정리할 때 이력서가 수북히 나왔다고 한다.
  • 전두환의 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준 리버럴한 인물이었다. 김재익의 아들 김한회는 당시 독재정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아버지는 독재자를 돕고 있어요!"라며 항의한 적이 있다는데, 거기에 김재익 왈 "경제의 국제화는 독재정치를 어렵게 하고, 내가 시장경제를 도입하면 정치의 민주화는 당연히 따라온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24] 또 친구들이 그를 "김일성 밑에서도 일할 친구다."라고 비유하며 전두환의 하수인으로 일하는 것을 비판하자 "만약에 내가 김일성의 밑으로 일하면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김재익이 얼마나 대범한 성품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와 두 형이 인민군에게 끌려가 죽었는데, 저 말은 아버지와 형들의 원수 밑에서도 일할 사람이라는 엄청난 수위의 말이었지만 그냥 넘어가는 걸로도 모자라 우문현답으로 응수까지 했다는 것이다.[25]
  • 김재익이 수석비서관일 때 그의 밑에서 과장급으로 실무를 하며 나름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 강만수였다. 이 시기의 성과를 인정받아, 미국이 달러화를 조정해 일본에 진 빚을 절반으로 줄여버린 플라자 합의(1985년) 즈음에는 정부 지원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정도다. 그리고 뉴욕에서 환율을 통해 자국 경제를 보호하려 하는 강대국들의 모습을 실감한 강만수는 "이때 환율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소감을 밝혔으며, 훗날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전권을 행사할 때, "나는 환율 주권론자"라 말하며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한다. 하지만 MB 정부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시장 이면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환율 조율 방법론 측면에서 조급한 언행으로 곧잘 구설수에 올라, 좋은 정책 취지에도 불구하고, 의도했던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후유증은 예상보다 커지는 한계가 있었다.
  • 경제학자이지만 본전공이 정치외교학답게, 권력 게임에도 제법 능했다고 한다. 신군부의 주역인 허화평허삼수를 청와대에서 축출한 것도 '전두환의 신임을 제대로 갖고 온 그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당시 두 허씨가 전두환 몰래 하나회 모임을 소집하고 '대통령 친인척의 공직 사퇴' 등을 결의했기에, 이들은 이미 일종의 '반역자'로 전두환에게 찍힌 상태였다. 여기에 김재익의 건의로 도입하려던 금융실명제도 이들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전두환이 '니들이 뭔데 나서냐'며 역정을 냈고, 직접적으로는 이들에게 물을 먹은 이원조가 전두환에게 이들의 사퇴를 건의하면서 결국 청와대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 이 때 김재익은 허화평과 허삼수의 견제와 핍박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질 정도였고, 이 사실을 안 전두환이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얘기를 해야할거 아니냐. 미련한 친구"라며 김재익을 나무랐다고 한다.
  • 서석준은 김재익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동기생[26]이었다. 안정론자이자 이상론자인 김재익과 성장 위주의 현실론을 따르던 서석준의 경제관은 하늘과 땅 차이였는지라 경제기획원에서 한 솥밥을 먹던 시절부터 사사건건 충돌이 잦았지만 사적으로는 돈독한 친우였다고 한다. 1983년 7월, 부총리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내각에 돌아온 서석준은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김재익과 경제 정책에 대해 한바탕 신경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김재익과 함께 버마에서 폭탄 테러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김종인의 중매를 할 정도로 사적으로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정책적으론 서로 대립 관계였다. 특히 금융실명제는 김재익이 배석한 가운데 김종인이 조목조목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전두환을 설득했다.
  • 드라마 제 5공화국에서는 배우 정선일이 맡아서 연기하였다. 나름대로 준수한 싱크로율을 보여줬으며, 실제 인물에게 어울릴만한 특유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캐릭터를 잘 표현해냈다.
  • 깔끔하게 메모를 하여 정리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글씨를 예쁘고 반듯하게 잘 쓰는 명필이었다. 재직할 당시에 정리해놓은 문서들을 보면 그 많은 것들을 바쁘게 기록하는 와중에도 읽기 좋을 뿐만 아니라 인쇄한 글씨 못지 않을 정도로 잘 쓴 것을 볼 수 있다.

5. 가족관계

김재익 본인은 젊은 나이에 북한이 일으킨 아웅산 묘소 폭발 테러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으나, 그의 가족들 역시 상당수 한반도에 발생한 이념 갈등으로 인하여 처형당하거나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는 9남매 중 막내아들로, 맏형 김재룡은 1947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유급조교로 있다가 1949년 전임강사로 승진하면서 서울대 유일의 서양사 전임교원으로 재직했는데, 좌익 활동 혐의로 6.25 전쟁 직전 체포되었다가 전쟁 발발 직후 불법적으로 한강변에서 처형됐다. 아버지는 대전시에 있다가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도주할 때 반동이라면서 살해당했고, 위의 두 형은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이념 갈등이라 할 수 있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죽었다.

부인의 이름이 이순자이다. 대학 재학 시절에 만나서 결혼했으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서울대에 전 재산인 20억 원을 기증했다고도 알려져있다. 사별 이후에도 자주 남편의 묘소를 찾고 있으며, 30년 넘도록 그가 묻힌 현충원이 보이는 곳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부부 간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넥슨 창업주로 유명한 김정주가 그의 처조카이다. 김정주의 아버지 변호사인 김교창과는 손윗동서이다. 그리고, 학과 후배이자 손아랫동서 한승주는 유명한 정치학자로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에는 외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에는 주미 대사를 역임하였다.

누나 김재순과 김재숙은 가톨릭 성심수녀회 수녀이다. 김재순 수녀는 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에 이어, 성심여자대학교 화학과 교수 및 총장을 지냈다.[27] 여담으로 김재숙 수녀는 박근혜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이다.


[1]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으로 순직.[2] 24세손 在O 항렬.[3] 공교롭게도 당시 대통령이였던 전두환의 아내도 이순자였다. 다만, 본관과 한자가 다르다. 전두환의 처 성주 이씨 이순자는 李子인데, 김재익의 처 한산 이씨 이순자는 李子이다.[4] 한산 이씨 이홍직(李弘稙)의 첫째 딸이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이홍직 자녀 족보.png[5] 변호사[6]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7] 물론 정확하겐 김재익이 혼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건 아니고, 항상 전두환에게 "이러이러한 정책이 어떻겠냐"고 물어서 승인을 얻는 식으로 절차를 반드시 갖췄다고 한다. 전두환은 김재익 외에도 여러 명의 경제관료에게 조언을 받았기 때문에 김재익이 임의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8] 유신 정권기 이후로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위상은 단순히 한 국가의 지도자를 넘어서 거의 제왕에 가까울 정도로 그 위상이 막대했다. 이 당시 초등학생들의 미래 희망 직업이 거의 대부분 대통령이었을 정도.[9] 9남매 중 무려 6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10] 본관은 안동 김씨이며, 본적은 선친의 고향인 충청남도 연기군이다.[11] 의외로 경제학과 출신이 아니며 석박사는 경제학으로 취득했다. 1955년 정치학과 내에 외교학 전공이 신설되어 1959년 외교학과로 분리되었다. 55학번은 분과 전에 졸업했기 때문에 외교학과로 졸업한 것은 56학번이 최초이다.[12] 스탠포드대학에 초청교수로 와있던 남덕우가 김재익에게서 수학적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의 스마트함을 눈여겨 봤다가 귀국 후 경제부총리 자리에 있을 때 그를 특별히 발탁했다. 근데 정작 남덕우는 성장론자고 김재익은 안정화론자라 빛을 보지 못했던게 함정. 하여튼 70년대 당시에는 경제기획원에서 강경식 등과 함께 경제자율화 론을 고수하며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강경식은 이후 전두환 정부 초기에 재무부 장관으로 5공 경제의 밑그림을 그렸지만 1997년 부총리 겸 재경경제원장관으로 IMF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았다.[13] 전두환은 자기를 위협하는 인물이라면 재능이 있건 말건 좌천시켜버렸다. 특히 김재익은 긍정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며 어느정도 입지도 탄탄했고 금융실명제가 하나회 인사들과 신군부에 의해 막히긴 했지만 그 일이 있었음에도 곁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14] 3저호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평도 있지만, 김재익이 물가를 안정시킨 시기는 1982~83년으로 3저호황이 오기 전이다.[15] 세계 경제에 상당히 민감한 한국/경제 특성상 김재익 개인의 성과라고만 보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은 맞다. 게다가 초창기에는 세계 경제가 오히려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16] 당장 오늘날의 유명 IT 기업들도 90년대 중반 이후에나 대거 생겨난다.[17] 다만 전자식 교환기 도입은 당시 오명 체신부 장관의 의지로 시작된 사업이다.[18] 특히 5공의 핵심 인사인 허화평, 허삼수에게 단단히 찍혔다. 정작 이 일 이후 허화평과 허삼수가 오히려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 이 둘이 대통령 친인척 공직자 금지 결의를 강하게 내세운 바람에 전두환에게 단단히 찍힌 때였기 때문.[19] 실제로도 5공때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20] 사실 이런 주장은 요즘에도 간간히 나온다.[21] 물론 전두환은 다른 관료들도 있었기에 무조건 김재익이 말하는 대로 따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김재익의 정책에 반대한 관료들은 죄다 끝이 좋지 못했다. 허삼수, 허화평이 대표적.[22] 조종이 아닌 아예 직접 집권한 사례로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있다. 다만 경제학자나 테크노크라트가 일반적으로 리더보다는 참모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판타지를 더 자극하는건 김재익 쪽에 가깝다. 꼭 독재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선거로 집권한 대통령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상을 실현하는건 현재도 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있기도 하다.[23] 드라마 제 5공화국을 보면 상술했듯이 허화평, 허삼수와 갈등을 빚으면서 그들이 김재익의 뒷조사를 통해 비리를 잡아내어 곤란한 입장에 처하도록 공격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털어도 나오는 게 없어서 되려 그들이 너무 깨끗하다며 난처해하는 장면이 나온다.[24] 민주주의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등장한다는 김재익의 사상은 S.M.립셋, 새뮤얼 헌팅턴 등 근대화론자들의 입장이다. 특히나 당시까지 국가주도의 계획개발경제이던 군사정권시절 대한민국에서 김재익이 주창한 경제적 자유주의와 민간 주도의 자유시장경제를 통한 발전과 민주주의 유도는 당시까지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이론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중국, 러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등 경제와 반비례하면서 오히려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사례들도 많이 보이기 때문에 상당히 힘을 잃은 이론이다. 쉽게 말해 민주주의는 피로 쟁취해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가 발전한 덕에 일반 국민들이 조금이나마 정치에 신경을 쓸 여유가 생긴 덕에 민주주의의 쟁취 속도가 가속화된 면도 있다. 다만 이런 사례는 극단적으로 드문 사례다. 바로 그 극단적으로 드문 사례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라서 그렇지. 그리고 상술한 싱가포르 역시 특유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경제가 발전하고 제1세계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음에 따라 서서히 민주화가 되고 있으며, 김재익이 이야기한 것은 계획경제가 아닌 민간 주도의 경제 성장으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니,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체제인 중국과는 정반대 사례라고 할 수 있다.[25] 여담으로 이런 식의 행동은 도가(노자)식 정치 스타일과도 비슷하다. 유가가 첨부터 그들 기준 입바른 소리하는 스타일이라면, 도가는 암군과 일단 친해진 후 서서히 그의 사상을 변화시킨다는 식이었다.[26] 게다가 둘 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쳐서 일찍 대학에 들어갔다는 공통점도 있다.[27]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김 수녀님'이 바로 김재순 수녀다. 함께 언급되는 '주 수녀님'은 중국인 주매분 수녀로, 성심여중고 초창기 교장이자 기업인 조안 리의 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