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1:55:00

남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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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국무총리
남덕우
南悳祐 | Nam Duck-woo
파일:남덕우 공식 사진.jpg
출생 1924년 4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삼리
(現 경기도 광주시 삼동)
사망 2013년 5월 18일 (향년 89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강남세브란스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3유공자묘역 8번
본관 의령 남씨[1]
지암(芝巖)
재임기간 제24대 재무부장관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9월 18일
제12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8년 12월 22일
제14대 국무총리[2]
1980년 9월 22일 ~ 1982년 1월 3일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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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부모 아버지 남상현
학력 국민대학 (정치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
종교 기독교 (개신교)
약력 국민대학 교수
서강대학 경제학과 교수
제24대 재무부장관 (박정희 정부)
제12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박정희 정부)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박정희 정부)
제14대 국무총리 (전두환 정부)
국정자문회의 위원
외무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제18-20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제1·2대 재경회 회장
동아대학교 이사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 위원장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이사장[3]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학창 시절2.3. 대학 교수2.4. 재무부장관-경제부총리2.5. 국무총리2.6. 국무총리 퇴임 후2.7. 사망
3. 사후4. 기타5. 둘러보기6. 상훈 내역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4대 국무총리.

2. 생애

2.1. 유년기

1924년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삼리 출생.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세곡동)에서 살았고 부친은 경안면장을 지낸 남상현(南相顯)이다.[4] 4년제 보통학교 졸업 후 집이 가난해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단신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일본인 상점에 취직하였다.

2.2. 학창 시절

사환 노릇을 하면서 전문학교 입학 검정시험을 치러 5과목에 합격하였으나, 추가로 5과목을 더 합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징병되는 바람에 일본 아오모리현의 부대로 배속되어 병참병으로 근무하였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1946년 국민대학관 정경학과(야간)에 입학하였다. 1948년 야간이던 국민대학관이 주간 정규대학인 국민대학으로 승격되고, 정경학부는 정치학과와 경제학과로 분리됨에 따라, 1950년 국민대학 정치학과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5]

국민대학 재학 시절에 미군정이 본래 국민대학 캠퍼스로 적산 건물을 내주기로 약속했는데 이를 갑작스럽게 미군정에서 철회해 학교가 존립 위기에 처했다. 이에 남덕우는 학생대표로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 중장과 만나 담판을 지어 다른 건물을 받아내었다.

195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 들어갔으나 전쟁통에 거의 책으로 독학하였다고 한다. 1956년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의 Smith Mundt Program에 선발이 되어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에 배속이 되어 경제학 박사 과정을 3년만에 마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3. 대학 교수

1952년부터 1954년까지는 한국은행에서 근무했고[6], 이후 국민대학에서 3년간 전임강사를 했다. 1963년에는 국민대학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고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서강대학 경제학과 교수를 지내며 일명 서강학파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후에도 남덕우에 이어 여러 서강학파 출신 교수들이 정/관계에 진출하여 70~80년대의 경제성장에 공헌하게 되었다.[7] 현재 서강대에는 남덕우 총리를 기리는 지암남덕우경제원이 존재하며 김광두 前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가 연구원장으로 지내고 있다. 더불어 최근에 신축한 경제관의 이름을 GN관(게페르트[8] 남덕우 경제관)으로 지으며 서강학파의 창립자로서 예우를 다하고 있다.

2.4. 재무부장관-경제부총리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30520125130103011.jpg

경제학 교수를 지내는동안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편성 평가단에 속하면서 각종 정부정책 관련 회의에 참석해 비판적인 발언을 많이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목을받아 1969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관료 경력을 시작하였는데 임명장을 받고 나가는 그에게 대통령이 한마디 던졌다.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 훗날 회고하기를 자기 딴에는 정부 시책에 온건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라고 느껴졌다. 어쨌든 그 후 14년 동안 정부 관료의 쓴맛, 단맛을 톡톡히 봤다”고 돌아보았다고 한다.

1969년 재무부장관에 임명되어 관료 경력을 시작하였다. 1974년 9월 개각에서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임명되어 이후 4년간 재직했다. 말하자면 1970년대 한국 경제정책의 실질적인 관료 수장이었던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겠다는 구상을 전격 발표했다. 재원 마련은 남덕우 재무부장관의 몫이었다. 그는 금융시장을 왜곡하지 않는 정책자금 조달 방안을 고심한 끝에 국민투자기금을 만든다. 이 기금을 통해 23조원의 자금이 중화학공업에 투입됐다. 부총리로서는 해외 순방하면서 112억원의 외자를 조달해 경제개발을 뒷받침했다.

1974년 9월 개각에서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임명되어 이후 4년간 재직했다. 재임시엔 원유 도입값이 3배 이상 폭등하여 한국경제는 부도직전에 내몰렸던 오일쇼크 극복과 중화학공업 육성 , 수출 100억달러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하였으며 최장수 재무장관(4년11개월), 최장수 경제부총리(4년3개월) 타이틀을 지녔다. 그러나 1978년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해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부가세 철폐를 내세운 신민당에 득표율이 1.1% 뒤쳐지는 결과로 나타나 이에 충격을 받은 공화당은 부가세도입을 주도한 경제관료들에 대한 책임론을 들고나와 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12월 개각으로 경질되었고, 후임 경제부총리에는 신현확이 임명되었다. 1979년 1월 대통령 경제특보로 임명되었다가 10.26 사태이후 12월에 물러났다.

경제부총리로서 1970년대경제 정책을 주도한 행적으로 그는 1960년대 초기의 장기영, 1960년대 말~70년대 초기의 김학렬과 더불어 박정희 시대 한국의 경제건설기를 대표하는 경제관료로 평가받는다.

이 당시 시사 만화가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에서 경제부총리 남덕우를 이렇게 풍자했다.
남: 남의 돈을
덕: 떡 주무르듯
우: 우롱하는[9] 사람이 아닌지...?

2.5. 국무총리

1980년 9월 전두환국무총리로 임명했고, 1982년 1월까지 재직하였다. 국무총리 재직 중인 1980년에는 공공기관 실내 냉방 온도 기준을 총리 지시사항을 통해 28도로 맞추기도 하였으며, 1981년에는 재정상의 이유를 들어[10] 올림픽 유치에 반대하였으나 먹히진 않았다.[11]

결국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었고 남덕우는 이듬해인 82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뚜렷한 사임의 이유는 나오진 않았으나, 세간에선 올림픽에 끝까지 부정적이던 남덕우를 교체하여 올림픽 준비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책 의지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2.6. 국무총리 퇴임 후

1983년 한국무역협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삼성동에 무역센터를 만들었다.

자신의 모교인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해공 신익희의 동상을 교내 법학관 앞에 건립하는 데 참여했으며, 해공신익희추모사업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2003년 국민대학교 도서관에 개인 소장 도서 1,445권을 기증했다.

2.7. 사망

2013년 5월 18일 오후 9시 55분,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9세.

3. 사후

타계 이틀만인 2013년 5월 20일 박근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국민대학교는 남덕우의 호인 지암(芝巖)을 딴 '지암 이노베이터스 스튜디오'[12]를 2015년 7월 개관했다.

서강대학교는 새로 지은 경제학부 건물을 '게페르트 남덕우 경제관'으로 명명했다. 2017년 9월 6일 준공식을 개최하였다.

4. 기타

  • 많은 경제도서를 집필 하였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회고록인 <경제개발의 길목에서>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한국의 경제개발을 논할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해당 책에 흥미로운 회고가 실려있다.박대통령 “집권 20년되는 해에 하야하고 떠나야겠다” 동 시대에 활동했던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저서와 남덕우에 비판적인 같은 서강대학교 교수 출신인 김종인 저서와 함께 읽으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
  • 김종인의 저서를 보면 같은 서강학파로 분류되는 김종인과 꽤 껄끄러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만한 것이, 남덕우를 비롯한 서강대 교수 출신의 경제 관료들은 성장 우선론자였던 반면, 김종인은 '경제 민주화'로 대표되는 분배정의, 안정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13][14]
  • 평소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말년에 트레이드타워에 사무실을 내어 장학사업 등을 펼쳤는데 그 곳에서 업무를 보며 식사는 주로 코엑스 내 직원 구내식당에서 4천원 정도 하는 백반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이맹희 역시 자서전에서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의 관료들은 죄다 부패해 돈만 밝히는 이들이었는데, 남덕우 총리는 달랐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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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상훈 내역

  • 자랑스런 국민인의 상 (1986)
  •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2013)


[1] 25세 ○우(祐) 항렬.[2] 1980년 9월 2일부터 9월 21일까지 국무총리 서리 수행.[3] 신익희는 남덕우의 모교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 이사장이다.[4] 1919년부터 1928년까지 광주군 경안면장을 지냈다.#[5] 본인이 집필한 회고록인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 보면, 1945년 해방 후 을지로에서 프린트사를 경영하다가 1946년 9월 야간대학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정경학과에 입학하였다고 말하였다.[6] 입행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7] 대표적 사례로 1980년대 후반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김만제, 1990년대 초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을 각각 역임했던 이승윤, 김종인이 있다.[8] 서강대학교 창립자[9] 이상하게 이 부분은 우물주물로 알려져 있다.[10] 올림픽 개최에 최소 10억달러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남덕우는 차라리 이 돈을 경제발전에 쓰는게 낫지 않겠는가라는 입장이었던것.[11] 이 당시 정무수석이였던 허화평의 회고에 따르면 남덕우 총리를 비롯해 김재익 경제수석 등 경제 전문가들은 죄다 올림픽 유치를 반대했었다고 한다. 남 총리가 내각을 대표해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각하 경제가 많이 어렵습니다"라며 반대 의사를 내비쳤고 박영수 당시 서울시장과 10대 기업 총수들도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하여 "각하 되겠습니까?"라며 반대했다고 심지어 허화평 본인마저 당시로서는 택도없는 소리였다고 회고할 정도이니 정부 내에서조차 올림픽 유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2] 벤처창업을 위한 전용 공간에서 청년 창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직 기구. 국민대학교 북악관 16층에 위치해있다.[13] 흔히 같은 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에 중용되었기 때문에 서강학파라고 분류하지만, 김종인은 다른 사람들과 애초부터 배경이나 성향이 완연히 달랐다. 남덕우, 김만제, 이승윤 등의 서강학파 1세대들은 모두 성장제일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통화팽창(인플레이션)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이런 태도가 오일 쇼크 및 장기집권의 후유증과 겹치면서 인플레이션으로 박정희 정권 말기에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것은 이들이 오일쇼크 이전까지는 100년이 넘게 물가가 안정되어 있어서 인플레이션을 경험해보지 못한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김종인이 공부했던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무너지면서 나치가 집권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2차대전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 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사회안정에 두고 물가안정과 복지확대에 주력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했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로 물가안정, 통화량 관리에 광적으로 집착했는데 이런 분위기가 김종인한테 영향을 준 것이다. 이렇듯 같은 주류경제학을 공부했더라도 애초에 경제를 보는 관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라서 단순히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같은 학파라고 묶는 건 상당히 부적절하다.[14]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오히려 디플레이션 때문에 고통받았던 국가이고, 그 뒤에도 1970년대 오일쇼크 이전 까지는 장기간 물가가 안정된 상태였다. 대공황 이후 정부가 과감한 재정지출을 통해서 경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케인즈학파가 장기간 득세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고, 서강학파 1세대들은 1950년대 미국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오일쇼크로 초인플레이션이 닥치자, 1980년대에는 반대로 감세, 재정지출 삭감, 정부축소, 민영화를 주장하는 레이거노믹스가 득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이런 분위기의 미국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21세기 한국에서 들고 나왔던게 "줄푸세", "비지니스 프렌들리"류의 구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