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0:31:16

황산덕

황산덕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정부상징.svg
파일:부총리 겸.svg
파일:교육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문교부장관 (1948~1990)
초대
안호상
2대
백낙준
3대
김법린
4대
이선근
5대
최규남
장도영 내각
6대
최재유
7대
이병도
8대
오천석
9대
윤택중
10대
문희석
송요찬 내각
김현철 내각
11대
김상협
12대
박일경
13대
이종우
14대
고광만
15대
윤천주
16대
권오병
17대
문홍주
18대
권오병
19대
홍종철
20대
민관식
21대
유기춘
22대
황산덕
23대
박찬현
24대
김옥길
25대
이규호
26대
권이혁
27대
손제석
28대
서명원
29대
김영식
30대
정원식
}}}
{{{#!wiki style="margin: -33px -1px -11px"
교육부장관 (1990~2001)
31대
윤형섭
32대
조완규
33대
오병문
34대
김숙희
35대
박영식
36대
안병영
37대
이명현
38대
이해찬
39대
김덕중
40대
문용린
41대
송자
42대
이돈희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2001~2008)
43대
한완상
44대
이상주
45대
윤덕홍
46대
안병영
47대
이기준
48대
김진표
49대
김병준
50대
김신일
}}}
{{{#!wiki style="margin: -33px -1px -11px"
교육과학기술부장관 (2008~2013) 교육부장관 (2013~2014)
51대
김도연
52대
안병만
53대
이주호
54-55대
서남수
}}}
{{{#!wiki style="margin: -33px -1px -11px"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2014~현재)
56대
황우여
57대
이준식
58대
김상곤
59대
유은혜
60대
박순애
61대
이주호
임시정부 학무부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e4e3f, #2e4e3f, #2e4e3f, #2e4e3f, #0e4e3f);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김창숙 이훈구 이선근 변희용 조광하
<rowcolor=#fff>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서두수 이정규 권오익 박동묘 황산덕
<rowcolor=#fff>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현승종 김경수 조좌호 김용훈 장을병
<rowcolor=#fff>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정범진 심윤종 서정돈 김준영 정규상
<rowcolor=#fff> 제21대 제22대
신동렬 유지범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현재 회원
인문사회 분과 자연 분과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철학, 윤리학, 논리학, 미학, 종교학, 교육학, 심리학
2분과: 언어학, 문학
3분과: 사학, 고고학, 민속학, 지리학, 문화인류학
4분과: 법학
5분과: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6분과: 경제학, 경영학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대기과학
2분과: 생물학, 지질과학, 스포츠과학, 영양학, 가정학
3분과: 건축공학, 금속공학, 기계공학, 섬유공학, 자원공학, 전기공학, 전자공학, 정보공학, 조선공학, 토목공학, 항공공학
4분과: 의학, 치의학, 한의학, 약학, 수의학
5분과: 농학, 임학, 축산학, 수산학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6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정진홍 장석진 차하순 고상룡 임희섭 이현재 안세희 이상만 김상주 이상섭 홍성각
차재호 조동일 이기석 김남진 강신택 곽수일 노재식 김수진 박중현 문국진 이병일
이돈희 홍재성 이기동 정동윤 안병준 정기준 박세희 이정우 김상용 김낙두 김현욱
소광희 김학주 김영한 박병호 김경동 김기영 권숙일 박상대 노오현 김병수 황병국
윤사순 이정민 이성규 김상용 김용구 유장희 기우항 맹원재 윤덕용 이순형 류순호
이한구 김수용 이태진 김효전 진덕규 이학용 김용해 임번장 현병구 김영중 장동석
박종현 조주관 한상복 임종률 백완기 이지순 이은 장호완 나정웅 고재승 이홍석
정찬섭 장경렬 최병현 권오승 이정복 조장옥 조성호 김상구 한송엽 심희섭 김윤수
- 남기심 임돈희 최병조 김홍우 한인구 이호인 정진하 최항순 이영순 박승우
- 김인환 박용운 신동운 신용하 - 김도한 조완규 이장무 이승규 최양도
- 이종호 김호동 - 임현진 - 박성현 이기화 이병기 이종호 홍성윤
- - 김영식 - 신명순 - 김진의 안진흥 황규영 박성회 김수일
- - 고동환 최진호 임정빈 유정열 이명식 고희종
- 박종욱 - 고규영 김용균
- 우경식 - 송진원 한재용
작고 회원
인문사회 분과 자연 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6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고형곤 권중휘 이병도 최태영 신기석 고승제 안동혁 손치무 이균상 한구동 정문기
안호상 이숭녕 김상기 유진오 이상백 최호진 김동일 강영선 원태상 윤일선 조백현
박종홍 이희승 신석호 고병국 신도성 신태환 이태규 정태현 최경열 이제구 현신규
김두헌 최현배 이선근 이근칠 민병태 유진순 전풍진 박동길 이종일 이종륜 우장춘
김기석 양주동 조의설 윤세창 김성희 조기준 최규남 김호직 이채호 박영진 김호식
김활란 이양하 김재원 이종극 고황경 김순식 권영대 이민재 최방진 이재춘 송재철
김계숙 이병기 류홍렬 김병노 김상협 김효록 최윤식 조복성 윤일중 이진기 이근태
이종우 김윤경 이홍직 이항녕 최문환 육지수 박철재 이병위 민한식 박호풍 박승만
이상은 손우성 홍이섭 박원선 정인흥 김준보 박하욱 김옥준 김기덕 김두종 심종섭
이인기 정인승 고병익 정광현 이만갑 이상구 조광화 최례석 최호영 이세규 지영인
김동화 조윤제 한우근 유기천 윤천주 권오익 이원철 김준민 김재근 김명선 이춘녕
김준섭 김형규 전해종 이한기 박동서 정수영 장기원 김창환 김종석 기용숙 박병희
오천석 차상원 이기백 이희봉 이용희 임원택 성좌경 김삼순 최형섭 한심석 윤상원
류승국 차주환 이광린 문홍주 김대환 박기혁 박정기 홍순우 김문상 우린근 이창구
이희철 여석기 김원용 서돈각 김운태 김옥근 박봉열 김봉균 신영기 나세진 김성원
서명원 조성식 김철준 손주찬 홍승직 오상락 최상업 윤석규 이량 이우주 이은웅
임한영 김동욱 이두현 남흥우 차기벽 정병휴 조순탁 주진순 장석윤 이문호 정후섭
최재희 정병욱 민석홍 황산덕 구영록 김동기 김치영 이대성 윤동석 김용관 강제원
김규영 강두식 이찬 김증한 박광순 이상수 정영호 한만춘 서병설 백운하
유형진 이기문 윤무병 김치선 조순 김정수 김훈수 강명순 이영소 김문협
백낙준 이능우 이우성 박일경 변형윤 최규원 이영록 윤장섭 권이혁 고재군
조요한 동완 황수영 김기두 윤기중 심정섭 김오중 오현위 이장락 최병희
김성태 장덕순 양병우 정영석 박을룡 김준호 최계근 김기홍 박영호
김태길 이가원 민영규 김현태 윤세원 하두봉 이승원 박수선 전세규
윤명로 김현창 김용섭 김정균 김태린 박희인 김재극 장신요 조재영
김종철 김용직 이성무 김홍규 박태원 정창희 우형주 이기영 오봉국
정양은 정명환 황적인 윤갑병 이택식 김주환
박영식 이경식 심헌섭 윤능민 황종흘 김용일
김충렬 김완진 김철수 이익춘 이만영 김정룡
조명한 김종원 송희성 조선휘 이호왕
오병남 이형국 고윤석 이리형
정범모 장세헌 이충웅
조대경
길희성
이성진
명예 회원
노요리 료지 얀 린드스텐 위르겐 코카 얀 아헨바흐 크리스티안 스타크
피터 드루스 시오노 히로시 로저 비치 해럴드 푸어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DAA520; border-right: 10px solid #DAA520; text-align: center; margin: -0px -11px; margin-top: -12.5px; margin-bottom: -6px"
{{{#!wiki style="margin-left:10px; margin-right:-17px;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bgcolor=#ffffff,#1f2024> 파일:정부상징(1949-2016).svg }}}{{{#!wiki style="padding: 0px; display: inline-table;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f2024>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DAA520; border-right: 10px solid #DAA520;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181818,#e5e5e5
직위 명단
경제기획원장관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DAA520> 태완선남덕우신현확
국토통일원장관 김영선김용식신도성유상근이용희
외무부장관 김용식김동조박동진
내무부장관 김현옥홍성철박경원김치열구자춘
재무부장관 남덕우김용환김원기
법무부장관 신직수이봉성황산덕이선중김치열
국방부장관 유재흥서종철노재현
문교부장관 민관식유기춘황산덕박찬현
농수산부장관 김보현정소영최각규장덕진이희일
상공부장관 이낙선장예준최각규
건설부장관 장예준이낙선김재규신형식고재일
보건사회부장관 이경호고재필신현확홍성철
교통부장관 김신최경록민병권황인성
체신부장관 신상철문형태장승태박원근이재설
문화공보부장관 윤주영이원경김성진
총무처장관 서일교심흥선심의환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최종완 }}}}}}
}}}}}}}}}

대한민국 제24·25대 법무부장관
황산덕
黃山德 | Hwang San-deok
파일:Hwang Sandeok.jpg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17년 6월 18일
평안남도 양덕군
사망 1989년 10월 19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63-2번지
본관 해주 황씨[1][2]
석우(石隅)·취현(翠玄)
재임기간 제24·25대 법무부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3일
제22대 문교부장관
1976년 12월 4일 ~ 1977년 12월 19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황경환, 어머니 배현도
배우자 황이선[3]
자녀 슬하 4남 2녀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4] / 박사[5])
종교 불교
약력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사법과 합격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부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동아일보 논설위원
성균관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원장
성균관대학교 총장
제24·25대 법무부장관
제22대 문교부장관
단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
1. 개요2. 생애
2.1. 초년 시절2.2. 대학 교수 시절2.3. 관료 시절2.4. 말년 시절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24-25대 법무부장관, 제22대 문교부장관.

손녀사위가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인 정지선이다.

한국 형법학의 대가로 지금도 꼽힌다. 학자 시절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에다 해직까지 겪으며 존경을 받았으나, 유신정권 시절 돌연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재직 중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인혁당 사건의 주역이라는 오명도 얻었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1917년 6월 18일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아버지 황경환(黃慶煥)과 어머니 배현도(裵現道)[6]의 아들로 태어났다. 산덕(山德)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황경환이 황산덕의 출생지인 양덕군의 덕(德)과 양덕군 옆에 있는 다른 행정구역인 맹산군의 산(山)을 각각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아버지 황경환은 16세 때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주문해 독학했다. 이후 양덕군의 금융조합 입사시험에 합격해 서기로 근무하던 시절 어머니 배현도를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 배현도는 일찍이 상경해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1916년 결혼하면서 중퇴했다. 이후 황경환은 성천군 금융조합 이사로 승진했다.

3살 되던 1919년 아버지가 성천군에서 전개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평양형무소에 투옥되면서[7] 어머니를 따라 평양부로 와서 조부 황준식(黃俊植, 1861 ~ 1939)과 조모 청송 심씨(1864 ~ 1945) 아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1920년 히로히토구니노미야 나가코의 결혼을 기념하는 특별사면으로 2개월 일찍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베(神戶)상회에서 점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사상범 전과자라는 이유로 얼마 안 가 해고되었고, 등짐장사로 생계를 이었다. 이 시기 황산덕은 평양부 이문리교회의 유치원에 입학해 졸업했고, 5세 되던 1922년 아버지가 훗날 초대 국회부의장이 되는 김동원이 경영하는 평안고무공업사에 채용되자, 가족들은 평양부 상수구리 77번지로 이사했고, 이때 광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평양부 창전리 50번지를 거쳐 1927년 평양부 상수구리 130번지로 이주해 이곳에 본적을 두었는데, 이곳이 원적지가 된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본래는 여순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지원했으나, 경성제국대학 미아케 교수 사건으로 조선인 출신을 배제한다는 정책에 따라 불합격했다. 이후, 1935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갑류(文科甲類)에 전체 4등으로 입학했다. 예과 재학 당시 처음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유물론에 빠져 들었으나,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을 읽고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 소련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공산주의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불문학에 심취하게 되면서 본과에서는 문학이나 미학 전공을 희망했으나, 부친의 간곡한 만류로 법학과 진학을 희망하게 된다. 1938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법학과 재학 당시 황이선과 결혼했는데, 결혼생활로 인해 학부 학점은 과락을 겨우 면할 정도였다.

1939년, 아버지는 김동원과 결별하고, 젊은 부자 박승엽과 제휴하기 시작해 결국 박승엽이 상속받은 세창고무공업사의 공동 경영주에 취임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즈음 어머니는 신경쇠약을 얻어 상수구리 집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신양리를 거쳐 기림리에 집을 새로 지어 아버지와 별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1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1류(사법 전공)를 졸업하고, 법학사를 받았다. 1943년 6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동시 합격하여 동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채용됐고, 경상북도청으로 발령받아 영천군에 근무하였다. 1944년 청송군으로 전보되었고, 1945년 경북도청 내무부 원호과로 전근됨에 따라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주하기도 했다.

1945년 3월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23번지에 있던 집[8]을 구입했고, 8.15 광복 직후 상경했다. 아버지는 친구 장진섭(張震燮)과 합작해 35만원에 반도호텔을 구입했고, 미군정이 들어와 호텔을 빌려 쓰게 되자, 1945년 9월부터 임대료를 받으며 호텔 사무실에서 관리사무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1946년 2월 미군정 법령이 공포되어 반도호텔이 정부 귀속재산으로 강제 편입되었고, 대신에 영등포구 도림정(現 도림동)에 있던 조선타이어공장(現 한국타이어)의 관리인이 되었다.

황산덕은 1945년 10월에 서울시 성북구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미군정에 맞서 충돌했다가 1개월만에 파면당했다. 동년 12월에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법제국장에 취임했다. 1946년 1월초, 미군정청 조선인 직원 일동의 명의로 발표된 신탁통치 반대성명서를 기초한 뒤 공직을 버리고 집에서 요양하며 책을 탐독했다. 황산덕 연보

2.2. 대학 교수 시절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자신의 경성제대 후배들을 교원으로 영입하던 유진오에게 불려가서 1948년에 고려대학교에서 부교수로 교편을 잡게 된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 당시 부산의 전시연합대학 체제하에서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1966년까지 14년 동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형법과 법철학을 강의하였다.

서울법대 교수 시절 동료 교수인 유기천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9] 사실 유기천과의 충돌은 양자의 개인 성정 차이보다도,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벌어지던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동대파(東大派)와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성대파(城大派) 사이의 파벌 싸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서울법대100년사(2004)에 따르면 해방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장 고병국을 정점으로 유기천(형법)-이한기(국제법)의 동대파 라인과 보성전문학교 법과과장 유진오를 좌장으로 황산덕(형법)-박재섭(국제법) 등의 성대파가 갈렸고, 기존에 동대파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경성법전과 그 후신인 서울법대에서는 당시 학장에 재취임한 고병국 교수가 동경제대 후배인 유기천을 한국인 최초의 법학박사로 만들기 위해 황산덕이 제출한 박사논문 심사를 이유없이 미루었을 정도라고 한다(출처). 이 갈등은 결국 후일 유기천 서울대 총장이 황산덕 교수를 파면하는 데 이르게 된다(참조).

1954년 3월 1일에는 대학신문 지면에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의 내용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게재하여 주목을 받았다. 대학 교수의 부인 오선영 여사가 삶의 권태를 이기지 못해 대학생과 춤바람이 나는 등 탈선한다는 소설내용에 대해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 정비석은 "작품을 다 읽지도 않고 작품을 중단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문학가를 모욕하는 탈선적 폭력이며, 그러한 허무맹랑한 원성에 결코 개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반박하였으며, 황산덕 개인에 대해서는 "대학 교수답지 않게 흥분한다."고 비꼬았다. 그 후로 황산덕과 정비석은 격렬한 논쟁의 글을 주고 받았으나, 결국은 화해하여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60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최신자연과학의 발달이 법철학에 미치는 영향’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박사학위논문은 법철학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처럼 형법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법철학에 조예가 깊었다. 물론 그 결과로 국내 형법학 이론이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하고 애매모호한 방향으로 전개되게끔 조장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국내 형법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일은 1960년대 초반에 독일의 형법학자 한스 벨첼의 '목적적 행위론'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일본 형법학의 인과적 행위론이 마땅한 적수도 없이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는데, 황산덕이 수입한 목적적 행위론은 국내 형법학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형법상의 행위개념에 관하여 새로운 학설들을 제기하였다. 마치 조선시대 이황, 이이의 이기론(理氣論)과 관련하여 수천 명의 학자들이 이기논쟁에 가담했던 것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지금도 많은 법학자들은 "법학의 한 이론이 이처럼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게 믿을 수 없는 일이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우리 법학계에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형법상 행위론은 이토록 우리나라에서 한때 최고의 각광을 받았지만, 정작 독일 법과대학에서는 그에 대해 강의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1962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역임하면서 헌법개정에 관하여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하였다가(7.17. 2회, 7. 23. 1회, 7.28. 1회) 허위사실유포죄로 구속된 바 있다 (8. 2. 구속, 12. 7. 출감).

1965년 9월에는 한·일 협정반대시위와 관련하여 학생들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이른바 '정치교수'라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법대 교수직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66년 성균관대학교에 다시 법학교수로 임용되어 1974년까지 교수로 활동했고 같은 해 8월에 성균관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으나, 9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한 달 만에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직 후임자는 그의 평양고보-경성제대 법대 2년 후배인 현승종이었다.

2.3. 관료 시절

그 후 1976년 12월까지 약 2년 3개월 동안 박정희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그가 박정희 정권의 법무부장관 제의를 수락한 데 대해 “교수님은 그렇게도 자신을 미워하던 정권이 들어섰고 혁명세력의 칼날이 아직도 시퍼런 데다가 혁명세력인 젊은 김종필 국무총리 밑에서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기분이 어떠냐”고 제자들이 물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자네는 잘 모른다네. 국가에서 부르는 확률이 0.03정도밖에 안 되고,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국민 된 도리로 못 할 짓이지! 나같이 월남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왔다고 해도 거절하면 그것이 마지막이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당시 시골 지청장으로서 동기들 가운데 가장 뒤쳐져 있던 유아무개 검사를 대검 부장검사로 발탁하여 오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측근들이 안 된다고 펄펄 뛰자 이렇게 대꾸하였다. “죽은 사람을 살리라는 것도 아니고, 지청장을 대검 OO부장에 임명하라는 것일 뿐이야.” 나중에는 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들이댔고, 결국 유아무개 검사는 대검 부장검사로 임명되었다. 알고 봤더니 유 검사는 옛날 황산덕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담당검사로서 교도소에서 그를 위해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던 사람이었고, 황산덕은 그 은혜를 갚고 싶었던 것. 다행히 유 검사는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만 수행할 뿐,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무부 장관 시절에는 대한민국 사법부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인혁당 사건에 1급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인혁당 재건위가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직접 발표했고, 인혁당 재건위 연루자들에 대해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하재완 같은 경우는 혹독한 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혁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고 외쳤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구!"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그 후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자,[10] 그 선고 바로 다음 날, 그러니까 형이 확정된 지 겨우 20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이례적으로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의 사형을 집행해버렸다. 게다가 사형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았으며,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해버리고 화장시켜 버렸다. 이때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시신을 옮기려 했으나,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시켜 버렸다. 물론 이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인혁당 가족이 진상 공개를 요구하였지만, 법무부 장관 황산덕은 "인혁당 사건에서 고문은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앞으로 인혁당 사건과 관련, 조작설을 퍼뜨리거나 '민주 인사', '애국 인사'로 지칭하여 석방을 요구하는 등의 언동에 대해서는 반공법을 적용해 엄중히 단속하겠다"고 공포하였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사법살인에 관여한 사람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그 당시 사형집행을 전혀 결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데다 학문적으로도 사형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나?[11] 실제로 황산덕이 법무부 장관에 취임한 1974년 이전에는 연간 20여 명 내외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황산덕 재임기간에는 영부인이던 육영수를 살해한 문세광사법살인인민혁명당 사건 피해자들을 제외하고는 사형이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문세광의 사형은 후에 황산덕 본인이 자신이 제주도로 출장 중이었을 때에 김종경 법무부 차관이 대결하였다고 밝혔으며,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명령서에 최종 결재를 한 사람도 황산덕이 아닌 서종철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다.

이렇듯 온갖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후 1976년 12월 법무부 장관 자리에서 문교부 장관 자리로 직책을 바꾸었다. 그리고 1977년 12월까지 문교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2.4. 말년 시절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단국대학교 대학원의 교수로 있었다. 1985년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과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1] 규(圭)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식(植), 환(煥) 항렬로 항렬자를 따랐다. 원래 호적에는 제안 황씨(齊安 黃氏)로 되어 있었으나, 결혼 전에 부인 황이선이 제안 황씨로 당시 동성동본이었던 관계로 부친이 해주 황씨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본인 회고록 참조https://naver.me/FAQkiW5E.[2] 황산덕의 회고에 따르면, 해주 황씨는 장수 황씨(長水 黃氏)에서 파생된 본관으로, 황희 정승의 후손 중 누군가가 황해도 해주목(現 황해남도 해주시)으로 이주하면서 본관을 해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산덕의 선대는 이후 임진왜란 이전에 평안도 강서현(現 남포시 강서구역)으로 이주했고, 영조평양부 성 밖으로 재차 이주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평양부 사람들은 황산덕의 집안을 오성(외성) 황씨라고 했다고 한다.[3] 제안 황씨(齊安 黃氏) 황학표의 딸이다.[4] 법철학 전공[5] 박사학위 논문 : 最新(최신) 自然科學(자연과학)의 發達(발달)이 法哲學(법철학)에 미치는 影響(영향)(1960).[6] 감리회 목사 배정일(裵貞一, ? ~ 1950)의 4남 1녀 중 장녀이다.[7] 이후 공소하여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다소 감형된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상고했으나 1919년 8월 28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었다. 한편, 판결문에 기재된 황경환의 주소지는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 신창리.[8] 원래 전라북도 익산군의 갑부 백인기(白仁基)의 별장이었다. 현재 이 주소지에는 길상사라는 절이 있다.[9] 이시윤, 민사소송법입문, 제2개정판, 139~141면.[10] 당시 대법원장은 민복기였다.[11] 황산덕의 말로는,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이 꺼림칙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