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동성동본(同姓同本)은 '성(姓)과 본관(本貫)이 모두 같음'이다.동성동본의 '본'은 본적(本籍)[1]이 아니라 각 성씨의 본관을 말한다. 참고로 성씨가 같으면 '동성', 본관이 같으면 '동본'이라고 한다.
2. 동성동본 결혼금지
'동성동본 금혼'이란 성씨와 본관이 모두 같은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다. 성씨가 같은데 본관이 다르거나 본관이 같은데 성씨가 다르면 동성동본이 아니므로 결혼할 수 있다.유교 사상에서 내려온 잘못된 풍습으로 이성 간의 교제 및 결혼할 권리(헌법에 따른 행복추구권)를 침해한 악법이었다.
특히나 조선말과 구한말까지 성씨를 사거나 갑오개혁이후 노비가 주인의성을따르는 경우가 많았던 한국의특성상 실제로 혈족일 가능성이낮았다.
2.1. 역사
신라[2], 고려[3]까지는 동성동본 결혼금지는 일부 있었다.[4]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동성혼(同姓婚)을 엄금한 대명률을 준용하여 같은 성씨 간의 혼인을 법으로 금하였다.[5] 그러나 성씨의 종류가 많지 않은 대신 본관이 세분화된 조선의 현실에서 중국과는 다르게 동성금혼이 아닌 동성동본금혼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예컨대 이덕형의 아내는 이덕형과 성은 같으나 본관이 달랐는데 명나라 장군 이여송에게는 이것도 근친혼으로 보여서 이덕형을 금수만도 못하다며 욕했다. 17세기 이후에는 이 같은 동성이본혼(同姓異本婚)까지 규제하려는 시도[6]가 나타나 속대전, 대전회통 등의 법전에서 본관이 다르더라도 성씨가 같으면 혼인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당시 호적대장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동성이본 간에는 혼인이 빈번하게 나타나 규범과 관행에 차이가 있었으며 동성금혼이 아닌 동성동본금혼 관념이 정착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1912년 제정된 조선민사령에서는 "친족상속에 관한 사항은 관습에 의거한다"고 하여 관습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조선 관습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사하여 간행한 '관습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동성동본금혼을 관습으로 규정하였다. 1923년 개정 민사령에서는 혼인신고를 해야 효력이 발생하는 법률혼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이때 혈족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가 요구되어 동성동본금혼의 관습은 효력이 더 강화되었다. 성씨에 따라서는 동성동본이라고 하더라도 시조가 다른 경우 통혼하는 관행도 많았는데 혈족이 다르다는 것을 재판소에 신청해 입증해야 했으므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었고 반대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처럼 동성동본이 아님에도 혼인하지 않던 관습은 인정되지 않아서 결혼에 문제가 되지 않는 등 금혼과 허혼의 범위가 '동성동본'이라는 하나의 원칙으로 통일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사실혼 및 사생아 발생이라는 법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1920년대부터 동성동본금혼제의 변경을 추진하였으나 '혈족결혼이 열성자손을 낳는다'는 우생학적 믿음, '혈족결혼은 일본적 관습이며 동성동본금혼이야말로 조선의 미풍양속이자 민족적 전통'이라는 인식 때문에 반대에 부딪혔다. 1939년 민사령 개정시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관철시키는 대신 '조선의 미풍양속을 존중한다'는 제스쳐를 보이면서 동성동본금혼제는 존치했다.
8.15 광복 후 1958년에 제정하여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대한민국 민법 제809조에 동성동본금혼이 규정되었다. 제정 당시에도 시대착오적이라는 반론이 있었지만 유림계의 반발이 워낙 심해서 그대로 묻혔다. 민법 제809조 동성혼등의 금지(영어 위키백과)는 외국 학계에도 널리 알려지고 관련 논문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현대 국가의 성문법상 가장 광범위한 근친혼 금지법인 데다 인류문화학적으로로도 흥미로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는 이 시대착오적이고 비과학적인 제도를 폐지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성균관을 포함한 유림 등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20세기 말엽까지 어찌어찌 존속되었다.
2.2. 타당성
동성동본 금혼제도는 우생학적 이유, 유교상의 가족의 범위 등에 관한 이유가 있으나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그 어떤 과학적인 근거도, 효과도 없었다.- 1. 성씨라는 게 일반적으로 모계 쪽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밀양 박씨, 할머니가 김해 김씨인 박씨 성의 남성이 김해 김씨 여성과 결혼한다든가 하는 사례가 버젓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조선 왕조의 대표 가문인 왕가조차 이런 부작용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극단적인 사례로 고종의 경우 할머니(남연군의 부인), 어머니(흥선대원군의 부인), 자신의 부인 명성황후 민씨, 며느리(순종의 부인) 4대가 연속으로 여흥 민씨와 결혼했다. 그렇다고 모계 쪽 성씨까지 다 따져가며 결혼 여부를 판단하려고 한다면 결혼할 이성의 목록이 죄다 소거법에 의해 사라질 것이다.
- 2. 조선 중후기부터는 족보를 위조하거나 사들여서 가문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같은 뿌리를 가진 이들끼리의 결혼을 막는다는 목적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실제로 현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민자가 아닌 이상 족보가 없는 사람이 없는데 조선 중후기 이전까지만 해도 족보 없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 3. 그마저도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라는 혼란기를 거치고 결정타로 6.25 전쟁이 터지면서 행정문서들이 싸그리 불타 사라지고 국민들이 혼란을 통해 이리 섞이고 저리 섞여버렸다.
한마디로 그 어떠한 과학적, 역사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는 제도였다. 어차피 인류는 한 조상에서 갈려 나온 종이니 3~8촌 이내 근친만 아니라면[7] 이런 괴상한 뻘짓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생물학적으로도 8촌이 넘어가면 유전자가 매우 달라서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고 현재는 사회적으로도 동성동본이라도 8촌이 넘어가면 남으로 본다. 문제는 이런 바보 같은 법 때문에 6만여 명이 혼인신고를 못 올리게 되고 자녀들이 의료보험 등 혜택을 못 받고 학교도 못 가게 되는 등 부작용이 있었던 데다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는 건 예사고 이를 비관해 동반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큰 사회 문제가 됐다. #
2.3. 금혼 범위의 확장
법적인 금지는 아니었으나 같은 시조에서 나뉘었다고 여겨진 본관(이성동본, 이성동원) 간에도 통혼이 금기시됐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인천 이씨를 비롯한 가락종씨 간이나 박씨끼리 등이다. 문화 류씨와 연안 차씨는 시조가 같다는 이유로[8], "경주(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는 예적 혼인관계로 결혼을 금기시했다. 선우씨 기씨 한씨도 그 예. 극단적인 사례로 창녕 성씨와 초계 변씨가 중국 주나라 문왕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2.4. 폐지
대한민국에서는 1978년, 1988년, 1996년에 각각 1년 동안 특례법(혼인에관한특례법)을 시행하여 사실혼 부부가 혼인신고를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구제했고 1997년 7월 16일 민법 제809조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9]으로 국회가 1998년까지 개정하라고 했는데도 시한을 넘기게 되어 효력이 상실되었다.[10] 공식적인 법률의 개정은 2005년에야 겨우 이루어졌다.2005년 3월 31일 민법으로 제809조가 개정되어 남녀평등과 혼인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동성동본금혼제도를 폐지하고 근친혼금지제도로 전환하되 근친혼제한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도록 하였다. 이로서 동성동본의 금혼제도는 폐지되었고 8촌 이내의 혈족(친양자의 입양 전의 혈족을 포함)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하도록 하고 6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의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와, 6촌 이내의 양부모계(養父母系)의 혈족이었던 자와 4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자 사이의 근친혼만 금지되었다.
개정 전의 제809조 (동성혼등의 금지) ①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②남계혈족의 배우자, 부의 혈족 및 기타 8촌 이내의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②남계혈족의 배우자, 부의 혈족 및 기타 8촌 이내의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개정 후의 제809조(근친혼 등의 금지) ① 8촌 이내의 혈족(친양자의 입양 전의 혈족을 포함한다)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②6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의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③6촌 이내의 양부모계(養父母系)의 혈족이었던 자와 4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전문개정 2005.3.31)
②6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의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③6촌 이내의 양부모계(養父母系)의 혈족이었던 자와 4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전문개정 2005.3.31)
이렇게 개정되어 혼인금지의 범위가 넓어졌다. 당장 과거엔 같은 문중끼리만 결혼이 불가능했던 거지만 현재 기준으로는 팔고조도상 8촌 이내는 싸그리 근친혼으로 묶인다. 사실 친족의 범위를 양가 8촌이라고 잡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례가 없을 정도로 넓은 범위다. 그 조선시대조차도 8촌을 친척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계뿐이었으며 외가를 3번 건너면 남으로 취급하는 등 현재보다 친족의 범위가 좁았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대개 법적으로 친족의 범위를 양가 4촌으로 잡으며 사실상 근친혼의 마지노선격인 사촌간 혼인을 법적으로 허가하는 국가나 지역들도 적지 않다.[11]
물론 현실적으로 팔고조도를 싸그리 꺼내기는 어려운 관계로 실무적으로는 부모의 본관이 겹치는 경우만 추가로 부계 혹은 모계의 족보사본[12]을 제출하는 정도다.
2019년엔 이 개정 후 조항도 너무 넓다면서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헌법소원심판이 헌법재판소에 올라갔다. 그러나 2022년 10월 27일 헌법재판소는 8촌 이내 혼인 금지를 규정한 민법 규정에 대해 혼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며 합헌이라고 판단하였다. 단, 이를 위반하여 혼인한 경우에 무조건 소급하여 무효로 하는 것은 당사자와 자녀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결과를 초래하므로 이는 과잉금지원칙 위반에 해당된다고 보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혼인무효 조항은 2024년 12월 31일까지 대체 입법을 해야 한다.#
2.5. 타 국가의 사례
앞서 언급한 대로 중국에는 동성(同姓) 간의 금혼 제도가 전근대에는 있었으나 이미 국민정부 시절인 1931년에 없어졌고 북한에서도 정권 수립 직후인 1948년에 동성동본금혼제도가 없어졌다.중국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에도 레 왕조 시기 법률인 『국조형률(國朝刑律)』에 동성결혼(同姓結婚) 금지 조항이 규정되어 있었지만 베트남인들은 전란 같은 일이 생겨 다른 고을로 이주할 때 원래 쓰던 성씨를 다른 성씨로 바꿔 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8세기 후기 찐(Trịnh, 鄭)씨와 응우옌(Nguyễn, 阮)씨의 남북분립기 당시에 봉기를 일으킨 베트남 떠이 썬 삼형제가 남부 응우옌 정권 쪽으로 끌려와서 원래 성인 호씨를 버리고 어머니의 성인 응우옌으로 바꾼 사례를 들 수 있다.[13]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자신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13촌 당숙, 조카사이이다, 이것은 굳이 촌수를 따져 그런것인데 같은가문인 루스벨트 가문에서 정략결혼형태의 혼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미국의 동성동본 사례일것이다.
일본처럼 부부동성을 따르는 국가는 부부동성이 폐지되지 않는 한 500년 후에 모든 성씨가 하나로 통일될 예정이라, 그 후에 발생하는 결혼은 동성동본이 된다.
3. 현실의 동성동본 부부
4. 여담
- DJ DOC의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에 '내가 맘에 들어 하는 여자들은 꼭 내 친구 여자 친구이거나 우리형 애인, 형 친구 애인, 아니면 꼭 동성동본'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노래가 나온 1995년은 동성동본 금혼 규제가 유효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개그 콘서트 슈퍼스타 KBS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동성동본' 부분이 '독신자'로 바뀌었다.
- N.EX.T의 3집 'WORLD'에 수록된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는 동성동본 금혼법을 비판한 노래이며 신해철이 동성동본 때문에 힘들어하던 연인들을 응원하는 노래임을 밝힌 적이 있다.
- 2015~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동성동본 커플이었던 성선우와 성보라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결혼을 언급한 시점은 여전히 금혼 조항이 법으로 유효하던 1994년이었는데 이 대목에서 성보라가 법조인답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성동본 금혼 조항의 부당성과 폐지 가능성을 조목조목 언급했고 결국 1년 뒤인 1995년에 결혼했다.
-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 37화에서도 나왔다. 극중 김용림과 임현식이 사귀게 되었는데 결혼 얘기까지 나오자 양가 집안이 회동하였는데 임현식의 둘째아들 백치[15]가 안동 제일의 양반가 안동 김씨라고 거론하자 김용림은 놀라워 하고 임현식도 안동 김씨로 밝혀지면서 둘의 결혼이 파토나면서 임현식은 충격에 드러누웠고 김용림도 드러누운 에피소드 이다.[16]
[1]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등록기준지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2] 민법 제809조 제1항 위헌제청에 대한 반대의견으로는 단군 건국 초기부터 관습화되어 전해 내려오던 전통문화라는 주장도 있다.[3] 동성동본불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상류층에서는 역으로 근친혼이 성행했다. 가령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했고(다만 김유신과 문희는 가야계 김씨고 김춘추는 신라계 김씨였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이 김유신과 결혼했다. 고려의 경우 고려/역대 왕비 문서와 조선/역대 왕비 문서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된다. 고려 왕실에서는 너무 대놓고 왕씨끼리 결혼하는 모습을 가리기 위해 여자 왕족에게 외가의 성을 따르게 하는 관행도 있었다. 가령 태조 왕건의 친손녀 천추태후는 황보씨다.[5] 주나라 예법에 따라 동성(同姓)일 경우는 '아무리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혼인하지 않는다(雖百世而昏姻不通)'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이 대원칙이다.[6] 대표적으로 현종 때 우암 송시열의 주청.[7] 이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다.[8] 둘 다 고려 건국공신 류차달을 시조로 한다. 원래는 차달이었는데 신라 말 성씨가 보다 보편화되는 과정에서 류씨 성을 얻었다는 설이 있으며 연안 차씨는 차씨 성을 유지한 류차달의 맏아들인 차효전에게서 내려왔고 문화 류씨는 류씨 성을 이은 차남 류호금에게서 갈라져 내려온다는 말이 있다. 연안 차씨 측에서는 이 기록을 인정하지만 문화 류씨는 인정하지 않는데 류/차 논란 문서 참조.[9] 95헌가6내지13(병합) 1997.7.16[10] 그래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대법원이 당해 규정은 효력을 상실하였다는 이유로 동성동본 간 혼인에 대하여도 일선 관청이 혼인신고를 받게 하였다.[11] 물론 이러한 지역에서도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가능은 하다'이지, 사회적으로는 금기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2] 통상적으로 5대조까지만 받는다. 혼인금지인 8촌상으로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삼종형제 및 삼종조 or 삼종고모할머니이기에 6대조 이상을 볼 이유가 없다.[13] 출처: 유인선, 『근세 베트남의 법과 가족』, 위더스북, 2014[14] 해당 작품의 첫 방영은 1996년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기 딱 1년 전이었다.[15] 극중 김현철이 맡았다.[16] 이 에피소드는 1996년 12월에 방송되었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기 7개월 전이었다. 극중 송승헌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안타까워하였고 이제니는 결혼하면 어떻냐고 하지만 홍경인은 요즘 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옛날 어른들은 절대 반대했다고 당시 동성동본의 현실을 반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