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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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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연산군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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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부인
단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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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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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태황후 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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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colcolor=#B22222>
조선 고종의 왕비
대한제국 고종의 황후
명성태황후 | 明成太皇后
파일:명성황후 어진(운현궁).jpg
출생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現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사망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향년 43세)
한성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능묘 홍릉 (洪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866년 3월 21일 ~ 1895년 1월 12일
대조선국 왕후
1895년 1월 12일 ~ 1895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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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colcolor=#B22222> 본관 여흥 민씨[1]
자영(玆暎) 혹은 아영[2]
부모 부친 여성부원군 민치록
(驪城府院君 閔致祿, 1799 ~ 1858)
모친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韓昌府夫人 韓山 李氏, 1818 ~ 1874)[3]
형제자매 2남 3녀 중 3녀
배우자 고종 태황제
자녀 1남 (4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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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원자(1871 ~ 1871) 요절[4]
장녀 - 공주(1873 ~ 1873) 요절
차남 - 순종(純宗, 1874 ~ 1926)
3남 - 대군(1875 ~ 1875) 요절
4남 - 대군(1878 ~ 1878) 요절
종교 무속
신장 163cm[5]
전호 경효전(景孝殿)
존호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
휘호 제휘열목(齊徽烈穆)
시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
1. 개요2. 생애3. 호칭4. 책봉5. 사치설6. 초상화와 사진7. 평가8. 가계
8.1. 친가(여흥 민씨)8.2. 외가(한산 이씨)8.3. 시가(전주 이씨)
8.3.1. 배우자 / 자녀
9. 대중매체에서10. 기타11. 참고 문서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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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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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48
토론 - 합의사항49
토론 - 합의사항50
||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정실이며 2대 황제 순종의 친모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사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각각 하위 문서들 참고.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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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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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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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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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초상화와 사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초상화와 사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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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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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계

8.1. 친가(여흥 민씨)

  • 6대조부: 증 의정부 영의정 여양부원군 문정공(贈 議政府 領議政 驪陽府院君 文貞公) 민유중(閔維重)[6]
  • 5대조부: 숭록대부 의정부 좌참찬 충문공(崇祿大夫 議政府 左參贊 忠文公) 민진후(閔鎭厚)
    • 고조부: 민익수(閔翼洙)
    • 증조부: 민백분(閔百奮)
    • 조부: 예조참판(禮曹參判) 민기현(閔耆顯)
  • 아버지: 증 의정부 영의정 여성부원군 순간공(贈 議政府 領議政 驪城府院君 純簡公) 민치록(閔致祿)
  •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韓昌府夫人 李氏)
    • 양오빠: 병조판서 충정공(兵曹判書 忠正公) 민승호(閔升鎬)
      • 올케: 광산 김씨(金氏, 김재정金在廷의 딸)
      • 올케: 연안 김씨(金氏, 김정수金鼎秀의 딸)
      • 올케 : 덕수 이씨(李氏, 이민성李敏星의 딸)
        • 양조카 : 예조판서 한성판윤(禮曹判書 漢城判尹) 민영익(閔泳翊)

8.2. 외가(한산 이씨)

  • 외조부 : 이규년(李圭年)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김씨(贈 貞敬夫人 金氏)

8.3. 시가(전주 이씨)

8.3.1. 배우자 / 자녀

9. 대중매체에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대중매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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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

  • 비숍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미국식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흡연에 남녀는 물론 미성년자 구분도 두지 않았고 궁녀들이 애연가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예 이상할 건 없다.
  • 남편인 고종과 초반에만 데면데면 했을 뿐 금슬이 좋았으나 정작 후손은 순종 말고 없었다. 실제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고 순종만 장성해서 살아남았다.[10] 이 때문인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왕비든 그럴 수 있기는 하나[11]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 조선시대왕실 법도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남편 고종보다 더한 권력을 가진 여인으로서 남편 고종의 다른 아들들인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의 생모들을 궁궐에서 내쫓았다.[12] 본래 이 죽기 전에 후궁이 그것도 왕의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 나가 사는 일은 조선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명성황후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13]
  • 가족에게 친필 편지도 많이 썼는데 조선의 왕실뿐 아니라 사대부가를 포함하여 개인의 편지로는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2020년대까지 파악된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는 180여 통인데, 그중에서 146통이 친필 한글 편지이다. 명성황후의 친필 한글 편지는 136통이 조카 민영소(閔泳韶, 1852~1917)에게 보낸 것이고, 민응식(閔應植, 1844~1903)에게 보낸 것이 5통, 민응식의 아들 민병승(閔丙承, 1865~1946)에게 보낸 것이 5통이다. 민응식과 민병승에게 보낸 편지는 청일전쟁이 전개되는 기간에 보낸 것이라 주목할 만한데, 민응식은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숨겨주며 출세의 길이 열렸지만 개화파 내각과 대치하다 물의를 일으켜 유배를 당했었다. 이후 민응식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민병승에게 편지를 보내어 “네 아버지는 유배가 풀리니 너무 다행이다.”라며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고 한다.
  •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명성황후의 외모를 이렇게 기록했다. ‘키는 별반 크지 않았고 살도 찌지 않았다. 오히려 날씬한 편이며 얼굴은 갸름하였다. 눈은 가늘고 눈끝이 위로 치솟아 언뜻 보기에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험한 얼굴은 아니다. 조선 부인 치고는 표정이 풍부하여 예쁜 축에 들었다.’#
  • 사진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사진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명성황후는 자신의 특집 기사를 쓰러 외국 특파원이 방문했을 때 사진이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1번째로 암살 위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벽 5시까지 잠들지 않았으며[14] 침실이 여러 개 있었고 침실에도 비밀문이 있어 비상시 빨리 피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외모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린 것. 하지만 세자가 사진을 찍자 해맑게 기뻐했다는 기록, 이사벨라 비숍 여사에 따르면 사진찍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사진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15]
  • 일본 측의 훼손설도 있는데 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사진을 찾기도 했으며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없는 사진을 찾으려고 거액을 현상금을 걸리도 없으니 을미사변 직후 일본제국 측에서 을미사변의 흔적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사진을 고의로 없앴을 수도 있다. 일본제국의 사후 대응은 뻔뻔스러운 발뺌과 시치미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사주한 국내 권력 다툼으로 인한 정변으로 꾸미려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우라 공사를 주축으로 한 낭인들과 일본군 장교에게 시해되었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데 한밤 중에 목격자도 없는 후미진 곳에서 조용히 암살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 복장을 입은 인원 다수가 전투를 벌이며 일국의 궁전에 쳐들어가 낭인들에게 둘러싸인 왕비를 공개적으로 살해했고 그 때는 해가 솟아오른 여명의 아침이었다. 수많은 궁인들과 군인들, 심지어 서양인까지도 목격하는데서 일을 크게 벌였으니 일본제국은 최대한 은폐를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며 그 중 한 방법으로 그날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없애거나 훼손시키고 궁녀로 둔갑시키는 한편 일본인은 조선의 왕비를 죽인 적이 없다고 시치미 뚝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증거 인멸을 목적으로 살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에 주한 일본공사의 명령으로 궁궐 안에서 시체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고종도 못 찾을 정도였으니 확실하고 명확한 사진이 없는건 그렿다쳐도 명성황후를 직접 모셔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상궁 등 궁인들이 광복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는데 위 3개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다는건 이상하기는 하다. 명성황후 사진 논란 관련 내용은 다음의 기사들을 참조하면 좋다.기사1 기사2기사3기사4기사5

11. 참고 문서

12.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wiki style="margin:-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3ba62><tablebgcolor=#e3ba62> 파일:대한제국 국장.svg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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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방파 27세 ○鎬(호)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고, 양오빠 민승호 (閔升鎬)가 항렬자를 사용했다.[2] 이 이름이 사실이 맞는지는 논란이 있다. '자영'은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과 정비석이 쓴《소설 민비》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적었다고 했다.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으로, 학술자료의 기본이 되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변경된 것으로 본다며 '자영'을 미는 중이다. 그 외에 아명은 당시 항렬을 따른 정호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는 많지만, 정식 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인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쪽의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이다. 사실 조선시대엔 여성은 족보에도 이름이 적히지 않았기에 추정이 어렵다. 그나마 소설이 출처인 '자영'이라는 이름도 아명으로 전해진다.[3]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는 아버지 민치록의 둘째 부인이었다. 첫째 부인이었던 해주 오씨는 자식 없이 1833년(순조 33년), 별세했다.[4] 항문 폐쇄증(쇄항증)으로 사망.[5] 명성황후를 직접 본 서양인의 말에 따르면 "조선인 여성보다는 키가 컸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본 사람은 그녀의 키가 좀 작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6] 그의 딸이 바로 숙종계비 인현왕후이다.[7] 혈연상 시조부는 남연군이다.[8] 혈연상 시아버지는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9] 항문이 막힌 기형아로 태어났다. 쇄항증(항문폐쇄증)으로 의심되는데 얼마 안가서 죽었다.[10] 이에 살아 생전 순종을 위한 제사 등에 아낌 없이 재물을 써서 사치했다는 말이 있다.[11] 조선시대에는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 중 하나로 여길 만큼 금기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해도 문제삼는 것도 있다. 혜경궁 홍씨효정옹주도 남편들의 후궁이나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질투를 안 하냐고 질책받기도 했다.[12] 고종이 후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승은을 입은 궁녀가 있으면 그 다음날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는 야사도 있다. 순헌황귀비는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이후에야 다시 들어왔다.[13] 근데 사실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서 사는 경우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태종후궁 효빈 김씨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단적으로 그 예시를 보여준다.[14] 조선 궁궐의 아침 일과가 보통 새벽 5~6시쯤 시작되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밤을 샜다는 이야기가 된다.[15] 비슷한 예로 이토 히로부미도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조선에서는 자신의 사진이 나돌지 못하도록 조치해서, 원태우 의사나 안중근 의사도 목표를 특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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