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5 12:22:58

윤치호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윤치호(동명이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경술국치
이전
작위
수여자
후작백작
박영효 윤택영 이재각 이재완 이해승 이해창 민영린 이완용 이지용
자작
고영희 권중현 김윤식 김성근 민병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박제순
송병준 윤덕영 이근명 이근택 이기용 이병무 이용직 * 이완용 이재곤
이하영 임선준 조민희 조중응
남작
** 김가진 김병익 김사준 김사철 김석진 김영철 김종한 김춘희 김학진
남정철 민상호 민영기 민종묵 민형식 박기양 박용대 박제빈 성기운
유길준 윤웅렬 윤용구 이건하 이근상 이근호 이달용 이봉의 이용원
이용태 이윤용 이재극 이정로 이종건 이주영 장석주 정낙용 정한조
조정구 조동윤 조동희 조희연 최석민 한규설 한창수 홍순형
경술국치
이후
작위
수여자

계승자
후작백작
박찬범 윤의섭 이달용 이덕룡 이완용 고희경 송병준 이영주
자작
김호규 민병삼 민충식 민형식 민홍기 박부양 윤강로 이규원 이창훈
이택주 이충세 이해국 이홍묵 임낙호 조대호 조중수
남작
김교신 김덕한 김세현 김석기 김영수 김정록 남장희 민건식 민영욱
민철훈 민태곤 민태윤 박경원 박서양 박승원 성주경 윤치호 이규환
이기원 이능세 이동훈 이범팔 이병옥 이원호 이인용 이장훈 이중환
이풍한 이항구 장인원 정주영 정천모 조중구 조중헌 최정원 한상기
-2 ※ [[오등작]] 중 [[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거절 및 반납한 사람을 뜻하고, __밑줄 표시__는 작위를 반납하려 했는데 일제의 거절으로 반납하지 못한 사람을 뜻함.
※ *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이완용(李完用)]]과 다른 사람임.
※ ** [[김가진]]은 독립운동가였지만 공식적으로 박탈된 것은 아님.
}}}}}}||

파일:mvqwgt8.jpg 파일:bK31i4Y.png 파일:4GhLuSD.png
에모리 대학교 유학시
27세 ~ 29세 사이
40대 초반 1910년대 후반
파일:attachment/00500300012004041201515318.jpg 파일:vEV2aS2.jpg파일:external/photohs.co.kr/PIC195.jpg
1930년대 후반 194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교회 소재 초상화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생애 초기
3.1.1. 집안 배경3.1.2. 유학
3.2. 청년기
3.2.1. 귀국3.2.2. 갑신정변 실패와 유학3.2.3. 귀국과 민권 계몽운동, 좌절3.2.4. 관직 생활
3.3. 일제 시대
3.3.1. 수감과 출옥3.3.2. 종교 및 교육 활동3.3.3. 감시와 미행, 도청에 대한 충격3.3.4. 중일 전쟁 전후3.3.5. 전향과 친일 협력3.3.6. 백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
3.4. 최후3.5. 논란
3.5.1. 피습3.5.2.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군 지지3.5.3. 친일 협력에 대한 논란
4. 저서
4.1. 번역서
5. 윤치호 일기6. 어록
6.1. 조선 사회에 대해서6.2. 유교에 대해서6.3. 식민지 상태의 조선에 대해서6.4. 범세계적인 사회 및 민족에 대해서6.5. 조선 인종과 사회에 대한 비난6.6. 조선인에 대한 폄하, 일본인에 대한 찬양
7. 사상적 측면
7.1. 인종론7.2. 조선 사회의 문제 제기7.3. 합리주의7.4. 사상적 배경
8. 모순과 비판9. 주변 관계10. 기타
10.1. 애국가의 작사자인가?
10.1.1.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맞다.10.1.2.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아니다.
10.2. 박중양, 이규완과의 차이점

1. 개요

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23일[1] ~ 1945년 12월 9일)는 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정치가, 시민 운동가, 번역가, 친일반민족행위자, 기독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이다.

2. 상세

자(字)는 성흠(聖欽), 성흠(成欽), 호는 좌옹(佐翁)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었다.

초기 시민 단체라고 볼 수 있는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 신민회, 청년 학우회의 창립 주역이자 중요한 일원이었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 협회, 만민 공동회를 통해 계몽 운동, 민권 운동, 의회 설립 운동을 벌였으나 황제에게 불충하는 역적 취급을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되자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본의 미행과 내사 등을 계기로 결국은 친일로 전향하였고, 이것이 죽음에도 영향을 줬다.

필립 제이슨, 안창호, 유길준 등의 계몽론자와 맥을 같이하였으나 한국의 무질서와 감성주의, 사농공상, 문존무비 사상에 염증을 느껴 서서히 계몽 운동을 포기하게 된다. 193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중추원 참의 자리를 회피하거나 사양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비슷한 인물로 박중양이 지목되지만 한국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박중양과는 다소 다른 케이스. 한국(조선)의 구습을 혐오하고 자기식 '합리주의'를 유지하면서 비이성적인 일반 백성들을 비웃으면서도 동정하고, 비도덕적이고 부패한 한국 식자층을 혐오하면서도 친분을 쌓았다. 그러면서 정작 윤치호 본인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경멸했던 한국(조선)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미국의 힘을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백인 혐오에 눈이 멀어서, 합리적인 판단에 실패해 일본이 전쟁에 지고, 한국이 광복을 맞이 하리라는 것조차 예상하지 못 했다. 타인 눈의 티끌에는 비판적이였으면서도 본인 눈의 들보는 외면하고 고치는 것 자체를 거부했으며, 시대(일제 강점기)에 냉소적이였으면서도 자기의 보신을 위해서 그 시대의 흐름에 소극적으로 협력하거나 방관한 나약하고 입만 산 일제 시대 지식인이였다.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는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윤치호 작사설에는 여러 문헌적 근거가 있지만서도, 윤치호 본인의 친일 행적과 그 자신이 쓴 방대한 양의 일기 중 단 한 번도 애국가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의문점이 있다. 반대로 안창호가 작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안창호 스스로가 애국가 보급에 힘썼다는 점은 있으나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없고, 안창호 설은 비교적 후대에나 나왔다는 문제가 있다. 만일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면, 애국가의 작사가와 작곡가(안익태) 모두가 친일이라는 점에서 정통성 논란이 따라다니는 것에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제 치하의 포지션은 '식민지 지도자'이다. 즉 영국 치하 아메리카 대륙의 친영 성향의 식민주 지도자들과 유사한 처신을 보이고 있다. 역대 조선 총독들과도 친해 자주 총독부에 자문을 하러 들락날락 했으며, 또한 조선 민중 계몽 활동에도 매진해 민족 운동가 및 독립 운동가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민중 계몽에 실패한 후로 민중에 대한 냉소, 회의적인 시선을 보였다.

번역가로도 활동했는데,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본[2]1908년 걸리버 여행기, 아이소포스이솝 우화한국어로 번역하여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소개하였다.

3. 생애

3.1. 생애 초기

3.1.1. 집안 배경

해평 윤씨 출신으로, 구한말의 병조·형조판서, 군부 대신을 지낸 윤웅렬전주 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한양양반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고조부 때에 수원에서 천안으로 이사했고, 고조부의 넷째 아들인 증조 할아버지 윤득실은 천안에서 분가해서 아산 둔포면으로 내려왔다. [3]이후 그의 집안은 충남 아산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한다.

그에겐 14세 아래인 서모[4]가 있었는데 그에게서 30살 이상 나이 차이 나는 이복 동생 윤치왕과 윤치창이 태어났다.

사촌 동생으로 윤치성, 윤치영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의 4대 대통령인 윤보선은 5촌 조카이다.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자 해부학자이며 서울대학교 5대 부총장, 6대 총장을 지낸 윤일선 역시 그의 5촌 조카가 된다. 이외에도 그의 일가 친척들은 일제시대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어마어마한 세력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해평 윤씨 문서 참고.

명문 집안으로 오음 윤두수와 월정 윤근수라는 형제 정승을 9대조 조상으로 두었지만 그의 집안은 방계에서도 한참 방계였고, 윤치호의 고조부 윤발의 대에는 관직을 얻지도 못했다.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 벼슬에 올랐지만 술을 좋아해서 일찍 병사했다. 고아가 된 할아버지 윤취동이 자수성가 하여 아산군 둔포면에 대규모의 땅을 마련, 둔포면의 대지주가 되면서 겨우 집안을 일으켜세웠다.

아버지 윤웅렬은 본부인 전의 이씨에게서 딸 한명만 두고, 첩인 전주 이씨에게서 친누나 윤경희와 윤치호를 두었다. 아버지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데다가, 윤웅렬 자신이 서출인데다가 차별받은 점 등의 이유로 윤치호를 적자로 올려주려 노력했다. 아버지 윤웅렬은 윤치호를 개화파 정치인 어윤중의 서당에 보내 문하생으로 만들어 주었다. 또한 윤치호가 일본에 유학하게 될 때, 서자, 중인들은 기술 학교에 보내고 양반들은 인문학 과정을 배우게 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간청하는 한편 유학 담당자들에게도 부탁을 하여 아들을 도진샤로 들어가도록 주선한다.

장남 윤치호가 자신처럼 서자였던 것과 서자 꼬리표가 달리는 게 마음에 걸렸던 윤웅렬은 1907년 본부인 전의 이씨가 죽자 마자, 재혼하지 않고[5] 첩인 이정무를 본부인으로 올려주어 윤치호를 적장자로 만들었다.

3.1.2. 유학

아버지 윤웅렬의 출세에 이어 삼촌 윤영렬이 동학 농민 운동을 토벌하는 데 기여하고 안성군에 동학을 사칭하는 도적마저 토벌하여 명성을 날리면서 그의 집안은 다시 일어났다.[6] 아버지와 삼촌이 승승장구 출세할 무렵에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 윤웅렬은 그의 기억력이 좋은 것을 보고, 아들 교육에 무던히 신경 썼다.

윤웅렬은 승진 내내 서자라는 이유로 갖은 핍박을 받았고 이는 똑똑한 아들 치호에게도 분명해 보였다. 결국 고민한 끝에 윤웅렬은 친구이자 당시 개화파였던 어윤중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이후 윤치호는 어윤중의 제자가 되어 그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881년 한국 나이로 17살 때 신사 유람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윤웅렬은 자기 아들이 기술 학교로 보내질까봐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여러번 간청하고, 신사 유람단 파견 담당자들에게도 부탁하여 아들이 동인 학당으로 가도록 주선해주었다. 아버지 윤웅렬도 서출인데다가 윤치호도 아직 서자였으므로, 그대로라면 기술 학교 연수 확정이었다.

그는 양반집 자제인 유길준이나 김옥균등과 함께 동인학당[7] 에 들어가 서구의 과학, 의학, 종교 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후로 그는 중국과 조선의 유교 사상을 혐오하였으며 비인간적인 속박 체제로 보고 개혁을 결심하게 된다.[8] 당시 동문수학하던 김옥균의 조언에 따라 일본어영어를 공부한다. 1883년 1월~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주일본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에게 영어를 배웠다. 이후 미국에 견학을 가기도 하였다.

3.2. 청년기

3.2.1. 귀국

이후 한국으로 되돌아와 고작 4개월을 배운 영어로 조선 공사관 총영사로 파견된 푸트 장군의 통역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관직에 나가 통역관과 외무 아문의 주사로 활동하게 되면서도 틈틈히 미국인들을 찾아가 서투른 영어를 고쳐배웠고 그러면서 김옥균을 만나 감화받고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당과 친분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실패를 예언할 정도로 비관적으로 보았고 또 그 예언이 적중했다는데, 이건 예언이고 뭐고 아니었다.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이끌었던 군대가 당시 개화당의 주력 병력이었는데 정변 직전 낌새를 눈치 챈 온건개화파 측에서 윤웅렬의 군대를 북방으로 보내버린다. 윤웅렬은 이를 알고 정변이 실패로 끝날 것이라 예측하여 개화당의 병력 동원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개화당의 정변이 성공할 가능성에 대비해 온건개화파가 장악한 조정에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는다. 즉 줄타기를 한 셈. 이 집안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는 부분.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만주로 도피했다가 귀국한 이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3.2.2. 갑신정변 실패와 유학

책을 보고 소일하다. 저녁 7시반 알렉 선생 댁에 가서 저녁먹고 놀다가 10시에 돌아오다. 타국 사람이 청하여 대접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내 나라 지체가 너무 더러우니 타국 사람에게 부끄럽기 한량없다. 이런 청을 받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우환이 되니 불쌍하도다. 조선 사람이여, 언제 타국인과 어울려 마음편히 놀 때가 올런지
- 1888년 6월 2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상단에 언급된 것처럼, 윤웅렬과 윤치호는 원래 급진개화에 발을 걸치고 있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해서 발을 빼고 만주로 도망갔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자신들이 절대로 급진개화파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 용서를 받았고, 이 상황에서도 불안했던 윤치호는 다시 도피성 유학을 하게 된다.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공부 목적으로 유학을 한 그는 배편으로 일본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중서 서원에서 공부한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유학생이 된다. 밴더빌트 칼리지에서 수학한 뒤, 그는 4년제 대학인 에모리 대학교로 진학하여 신학을 전공한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는 여행을 다니며 견문도 익히고 미국의 인종차별 및 실력 양성, 국제 사회의 냉엄한 현실 등을 절절히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유교, 그리고 중화사상에 빠진 조선에 대한 비판은 절정에 달했고 그는 귀국 후 민권 사상과 기독교 식 합리주의로 민중을 깨우치겠다고 결심한다. 그 뒤 모교인 중서 서원에서 교사로 생활하다가 귀국한다.

한때 미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고, 미국 체류 중 미국인이 된 필립 제이슨(서재필)과 만나기도 했다. 미국 유학 중 그는 남감리 교회의 목사로부터 감리회 교인으로 세례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이 시기의 윤치호가 제국주의적 시각과 일본에 경도되었다는 것이다. 열차에서 3등 칸으로 밀려나거나 백인 승객에게 폭행,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아프리카에 선교를 하자는 사람이 흑인을 박멸하거나 아프리카로 추방해야 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윤치호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윤치호의 친일파적 사고의 기원을 이 시기까지 거슬러 잡는 것이 이 때문이고, 윤치호가 객관적 전력이 앞서던 미국이 아니라 그래도 일본이 이길 수도 있다고 주장한 근거가 된다.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 1890년 5월 18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인종 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정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1893년 11월 1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춘생문 사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임최수 ±이도철 이재순 이범진 이윤용
이완용 윤웅렬 윤치호 김홍륙 헐버트
다이 베베르 안경수 이진호
-2 ※ --취소선 표시--는 거사 때 [[배신]]한 인물
※  __밑줄 표시__는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는 인물
※ ±표시는 거사 실패 후 사형당한 인물
※ [[윤웅렬]]은 친일 논란이 있고 작위를 받았지만 별다른 친일 행위를 하지 않음
}}}


유학 후 귀국한 윤치호는 부친 윤웅렬과 함께 춘생문 사건에 가담하게 되고, 이는 윤웅렬의 존재와 함께 윤치호에게 이후 관직생활의 길을 터주게 된다.

3.2.3. 귀국과 민권 계몽운동, 좌절

189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을 따라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갔고 민영환을 따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윤치호는 이후 자신의 재능을 살려 교육, 및 실력 양성 부분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만민공동회 강연활동을 통해 민권 사상, 민주주의 사상, 만인의 평등론을 설파한다.

이때 그가 관여한 것이 독립협회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에 대해 황제 고종은 그들의 뒤에 일본이 있다고 판단했고, 반역 의도로 인식했다. 독립협회가 해체 당하고 민중이 독립협회를 버리자, 윤치호는 더이상 조선에 대한 발전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독립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를 주장했고, 민권사상과 민중의 참정권을 설파하며 순회계몽강연을 다녔으며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필립 제이슨이 추방되면서부터는 윤치호가 독립신문사를 맡아 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필립 제이슨은 미국으로 추방되면서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 등에 팔아버리려고 했으나, 이걸 만류한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이어받는다. 필립이 추방될 때, 윤치호는 이상재, 유길준 등과 함께 필립을 인천항까지 배웅하였다.

민권사상과 참정권 외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부르짖었음에도 민중에게 외면당하고, 되려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것에 대한 반발감, 거부감, 황제에게 불충하는 자 정도로 낙인찍히자 그는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것만큼 민중에 대한 경멸과 증오감을 품게 된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실패 보다 민중들의 맹목적인 보수성과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윤치호에게 민중에 대한 쓰라린 배신감과 경멸감,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사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초기의 성세에 비해서 결속력이 없었다. 거품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윤치호를 포함한 독립협회 임원들 만큼이나 당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지지한 인물들도 혹시나 잘하면 수준으로 활동하였고, 고종이 무장개입을 발표한 그 순간 참여임원이 급감한다. 다시 말하지만 진짜 무장해산명령은 떨어지기도 전이고, 황국협회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보다 먼저 해산된 상황이었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때에도 민중들이 '갑신정변 이후로 개화라고 하면 외국인들 끌어들여서 반역질한 것으로 인식한다'라고 윤치호 일기에 기록하였는데, 이게 이제는 자신들을 향하게 된 것에 분개했다.

동시에 민권사상을 외쳤음에도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민중들을 경멸하여, 윤치호의 가치관은 개인주의합리주의로 기운다.

여기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가 공화정을 선포하고, 박영효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 영선군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등의 음모론이 퍼지고, 그 음모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윤치호의 실망감은 극대화된다.

3.2.4. 관직 생활

함경도 원산에 가서는 씻지 않고 게으르고 지저분한 서민들의 생활을 보고 한국인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확신으로 굳히게 된다. 이후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훈련)의 대상으로 민중관을 바꾸게 된다. 천안 군수로 있을 때는 천주교 신부가 백성들의 사소한 실수를 엄하게 처벌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영어 실력으로 훈계 입 배틀로 발라버리고. 해서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처음 조선 조정은 윤웅렬이 고관이었다는 것 외에도 윤치호의 급진적 활동을 감시하고자 그에게 계속 관직을 내렸다. 그뒤 그는 관직 생활에 꾸준히 투신, 덕원 부윤 겸 감리사, 군수 등의 변방의 지방 수령직과 한성부 판윤, 외무부 협판, 학무부 협판 등의 관직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1905년에는 외무부 협판(차관)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06년에는 대한 자강회라는 계몽 구국 단체의 회장이 되기도 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가 단행되자 벼슬을 모두 버리고 경기도 개성으로 일단 내려간다.

1907년 아버지 윤웅렬의 본부인 전의 이씨 부인이 사망했다. 윤치호는 1898년 6월 9일자 일기에 자신의 적모, Greatmother에 대해 기록해 두었다. 윤웅렬은 바로 첩이었던 전의 이씨 이정무를 본부인으로 올려주었다. 아버지 윤웅렬에게는 당시 다옥이라는 기생 출신 첩과 김정순이라는 첩도 있었다.

3.3. 일제 시대

3.3.1. 수감과 출옥

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 일으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 된다.
- 3.1 운동 이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중에서

1911년 9월에 부친 윤웅렬[9]이 사망하자 12월에 남작 작위를 습작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1912년 2월,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 기소됨으로써 조선 귀족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10] 같은해 10월,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 선고받고 항고하여 1913년 3월 2심(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6년형 선고, 다시 항고하여 1913년 10월에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6년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옥고를 치르면서 고문과 회유를 받은 끝에 2년만에 독립 운동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조건[11]으로 1915년 '일본 천황의 특사'로 경성 형무소에 출소해 석방됐다. 이후 YMCA 총무 겸 연희전문학교 이사를 지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최남선이 찾아가 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공동 서명을 부탁하였지만, 그는 민족 대표자 33명의 부탁을 거절해 버린다. 신익희가 찾아와서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송진우도 찾아와서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송진우에게는 열강이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한다.

한편으로 독립 운동 과정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파와 이승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기호파 간 서로 비난이 끊이지 않자 이런 것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며 일갈했는데, 실제로 기존 한국의 지역 감정이 서북파 vs 기호파가 심했다는 사실은 맞지만, 위의 내용은 신빙성에 의문이 많다.[12] 특이한 점은 기호 지역 출신이면서도 서북파와 가깝게 지낸 조병옥, 윤보선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3.3.2. 종교 및 교육 활동

일제하에서 윤치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교육, 계몽 사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YMCA의 설립 및 지원이라든지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을 맡는 등의 행동은 꾸준히 전개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참여 요청은 모두 거절한다.

대표적으로 1919년 3월에 3.1 만세 운동에 민족 대표자로 서명하는 것도 거절했고, 송진우 등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인 대표로 가줄 것을 요청하자 헛된 일이라며 거부했다. 신익희최남선 등의 거듭된 참여 요구도 거절하였다. 그는 최남선을 촉망받는 학자라며 존경했지만 1936년 이후 최남선이 노골적으로 친일 성향을 보이자, 그와 교류를 끊게 된다.

그밖에 미국 군축 회의의 한국인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했고, 이승만 등이 주장하는 국제 사회의 협조 하에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외교 독립론 역시 부질없는 짓으로 치부하고 외면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임시 정부가 허황된 주장을 한다고 디스했다. 한편 3.1 운동 직후 체포당하는 학생들에 대해 민족 대표자들이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두고 어린 학생들을 제물로 삼았다며 극도로 분개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극심한 한국 내부의 파벌 싸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움직이는 한국인의 습성, 유교적 도덕 강박증에 걸린 것을 예로 들며 그는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독립하는건 거의 어려울 것이라 내다봤다.

그 기간 중 그는 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며, 연희전문학교 교장, 한영 서원 원장, 이화여자전문학교, 캐롤라이나 학당, 근화여학교의 재단이사 겸 후원인 등을 지냈다. 캐롤라이나 학당은 윤치호가 지은 새 이름인 배화학당으로 교명을 바꾸었는데, '배화(培花)'란 '꽃(花)을 기른다(培)'는 뜻이다.

윤치호는 당대에도 약간 별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다만 그의 집안이 아버지와 삼촌 대에 출세하여 고위직이었던 점, 할아버지 때에 아산군 둔포면 일대에 많은 땅을 마련하여 그것을 발판으로 경성부와 온양, 강원도 철원, 전라북도 일대에도 많은 땅과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 때문에 그의 집안의 영향력, 그리고 집안과는 별개로 윤치호 본인이 초기 미국 유학생이라는 점과 지적인 면모,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당대의 명사들은 그를 내심 경원시하였다.

3.3.3. 감시와 미행, 도청에 대한 충격

1938년까지 윤치호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어떠한 행사나 천황, 황후, 황태자의 생일, 사망일, 기념 행사에 대부분 불참했다. 대정친목회 등의 관변 단체도 일부에만 참여했고, 명의만 집어넣었지 행사들에 소극적으로 참가한다.

1938년 4월 28일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야마가타 데이사부로(山縣悌三郞)가 조선 총독부가 사람을 시켜서 윤치호의 주변을 미행, 도청한다, 내사한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좋든 싫든 억지로라도 참여하라"고 권고하였다. 1940년 5월 초 윤치호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밟았다. 총독부에서 조직적으로 자신의 뒤를 캐고 내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윤치호는 충격받게 된다.

3.3.4. 중일 전쟁 전후

일본인들은 25년 만에 조선 반도를 철도와 도로망으로 뒤덮었고, 조선 반도에 항만 시설과 농업과 공업을 향상시켰으며, 조선 반도에 교육과 일본 문화를 보급해 확산시켰다. 이것만 해도 장한 일인데, 그들은 조선의 7배 ~ 8배나 되는 만주를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꿀꺽 집어삼키고는 5년 만에 예전에 누릴 수 없었던 질서와 평화를 정착시켰다. 활력이 넘치는 일본 민족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만리장성을 뛰어넘어 10개월 만에 칭기즈칸이나 누루하치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을 정복했다
- 1938년 4월 20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마하트마 간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간디를 위대하게끔 만들었다는데서 영국은 위대하다. 만일 스페인, 독일, 심지어 프랑스가 지배자였다면 그를 30년 전에 죽였을 것이다. 왜 일본은 영국처럼 넓은 마음으로 조선을 그렇게 다스리지 못하는가?
- 1939년 4월 1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13]

1934년 조선 총독부가 그에게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회유책이라 생각한 그는 거절한다. 그 이후 1938년 수양동우회 사건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안재홍 등 국내 독립 운동가, 학자들이 줄줄이 구속 수감되거나 취조받자 그는 신원 보증을 서주고 이들을 석방시킨다. [14]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일제가 국내외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적극적 압박을 시작했으나 아직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까지는 사회가 미쳐돌아가고 있다면서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내용을 글로 적는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과 같은 여러 친일 협력 관변 단체에서 연락이 왔으나 거절하였고 일본 황실의 주요한 행사나 일정에서도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안창호의 석방을 주도했으나 거절당했고 안창호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직접 돈을 지불하여 보석시키고 병원에 입원시켜 막대한 비용의 지불하여 치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간의 고된 옥중 생활과 고문, 간질환 등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않아 사망하였다.[15] 오랜 기간 함께했던 동지가 죽었다는 상실감에 1주일에 거쳐 대성통곡하여 가족들이 겨우 진정시켰으며, 그는 자신의 일기에 안창호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목을 적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계몽 활동, 농촌 발전 운동 등에 참여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 인원들을 보호하려고 애썼으며 여러번 조선 총독부로 불려가기도 하였다. 일제는 참의원 자리 제안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윤치호를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윤치호는 그때마다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며 1930년대까지는 적극적인 협력이 드물었다..

3.3.5. 전향과 친일 협력

1940년에 이르자 윤치호는 창씨개명을 한다. 비록 윤치호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가문 사람들이 회의를 통해 창씨 개명을 해서 자신도 개명하였다고 말했고, 자녀들이 총독부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였으나 조카 윤보선 등 가문의 몇몇은 창씨 개명을 거부한 것을 생각해보면 변명조에 가까워 보인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이전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친일 행위(학도병 강연, 징병 권유 글 작성 등)을 하게 된다. YMCA와 감리회의 '일본화' 작업을 주도했고,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조선 지원병 후원회, 조선 임전 보국단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핵심 인물로도 참여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의 패권이 오래 유지될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지만, 그의 현실 인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소극적으로 저항하던 윤치호가 협력에 나선 것은 그가 합리주의를 잣대로 삼은 것에 비추어 볼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각이 있다. 미국의 저력을 어느 사람보다 잘 알고 있을 윤치호가 태평양 전쟁 중에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저지른 것은 일본 제국주의 체제와 공범 의식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면 과연 무엇이냐는 것. 이에 대해 태평양 전쟁 초기에 미국이 유럽 전선에서 독일과도 싸워야 하는 양면전쟁의 부담이 있어 일본이 미국에 한번 더 타격을 가하면 일본과의 평화 협상을 받아들여 전쟁을 일찍 끝낼 거라는 당시 일본 고위층의 인식을 공유한 때문에 윤치호가 협력을 선택했던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는 백인들에게 겪은 수모와 모멸감에 대한 분노 또는 전체주의의 영향이라는 시각도 있다. 애시당초 일본도 미국과 전쟁하면 이길 것이라 믿고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니었고 독일도 처음부터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 믿고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건 아니다. 그리고 전체주의 자체가 인간을 거부 없이 철저하게 명령대로 따르는 도구로 만들기 위해 인간의 사고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윤치호의 식민지 시기 일기를 보면 윤치호의 사상이 전체주의와 점차 유사해지는 동시에 사고 능력도 점점 떨어진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대명사인 히틀러스탈린, 마오쩌둥은 비난하였다. 그 이유는, 전체주의의 해악을 잘 알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유주의 성향이었던 윤치호에게 히틀러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히틀러는 지나치게 막 나가는데다 윤치호가 원래 친영파 출신이라 영국과 대립하는 독일을 예전부터 좋아하지 않았던 점도 있다. 스탈린, 마오쩌뚱의 경우 윤치호 본인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고.

식민지 시기의 윤치호 일기는 윤치호가 일본에게 기대는 감정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잘 드러난다. 윤치호는 일본이 '과거 조선 왕조보다도 더 끔찍한 지배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선 왕조 역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별로 좋지 않은 왕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래도 조선은 독립하기엔 나약하니까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게 더 낫다' 그래도 아직은 일본 제국이죠. 는 돈을 잃고도 계속 콜을 외치는 도박꾼과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일본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잘 되면 조선도 탄압을 덜 받게 될 것이고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도 상승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일본의 지배를 지지했다. 게다가 그의 생각에는 같은 인종인 황인종의 지배가 다른 인종인 백인종의 지배보다는 자비로울 것이라는 인종주의적인 사고가 머리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16]

미국과의 다가오는 전쟁 분위기와 그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는 일기 중간중간에 일본과 조선의 뉴스를 인용한 글들을 통해 나오며 본인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미 사상적으로 '자신의 머릿속의 이상적인 일본 제국'에 취한 윤치호는 눈 앞에 잔인한 현실이 다가오자 (윤치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석은 조선인'처럼 현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지배 내내 이런 식으로 셀프 희망 고문하며. 지냈으나 결국 그가 생각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3.6. 백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

당시대 대부분의 한중일 미국 유학 출신자들의 공통점이지만 친미파인 윤치호도, 미국 유학파 출신인 친미파 이토 히로부미무츠 무네미츠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입지와는 전혀 달리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앵글로색슨족을 깊이 증오했다. 당연히 유학 과정에 받은 황인종에 대한 많은 백인들의 인종 차별이 근원이었다.

윤치호 일기에는 그가 상하이의 공원 입구에서 봤던 푯말 '중국인(황인종)과 개는 출입 금지'의 기억이 자주 거론되며, 유학 시절에 겪은 백인 남성의 발차기 등 신체적 폭력의 경험이 암시된다. 그래서 그의 일기 전반에는 백인들에 대한 깊은 분노가 자주 표출된다. 그리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때는 전폭적 지지를 보내며, 일본의 '우리식 아시아주의'인 대동아 공영권을 찬양한다.(예 : 영미는 앵글로색슨의 저주받은 식민 통치 기구들을 가지고 지옥으로나 떨어져라. 일본에게 신의 축복을!)

그의 일기는 일본에 대한 증오와 멸시, 그리고 일본에 대한 동경, 또한 일본의 한국인들에 대한 정책적 차별에 대한 분노(예 : 만주 군관 학교의 합격자률이 일본인 70% 조선인 30%였는데, 만주인 입학생이 늘어나자 일본인 입학 상한선은 그대로 놔두고 조선인 합격선을 20%로 줄였다. 치졸한 섬 야만족들이여), 마지막으로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 공영권 추앙 등 다양한 감정이 교차한다.

이처럼 그의 의식에 모순이 많은 이유는 순전히 그의 백인들에 의한 차별 대우, 멸시에 대한 원한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그의 젊은 시기의 통찰력 있던 의식 구조는 백인종에 대한 트라우마와 노환에 의해 이미 무너져버렸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본이 이길 것이기에 일본을 지지한다'가 아닌, '백인에게 이겼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에 눈이 멀어 일본(황인종)을 지지했다'가 맞은 표현일 것이다. 물론 지도자급인 본인은 다른 한국인 민초들과 달리 일본인 고관들에게 존중받고 사니까 그런 발상이 가능했겠지만....

3.4. 최후

그뒤 중추원 참의직을 수락하고 1945년 1월에는 일본 제국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된다. 2월부터 4월에는 조선인 참정권 허용에 대한 감사 사절단을 꾸려서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그해 8월 일본이 항복한 후 친일파로 규탄받게 되자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 존 하지[17]에게 편지를 보내 어쩔 수 없이 국내에 남아서 협력해야 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조선의 독립은 독립 운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여기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독립 운동가들은 한 것도 없으면서 거들먹거리는 위선자라고 비난을 퍼부었는데 사실 임시 정부가 내분으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점은 사실이긴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독립 운동가들이 하나둘 귀국하는 시점이라 소신 발언이었다면 시기상 적절치 못했고 본인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평이다.

1945년 8월 19일 그가 살던 경기도 개성시 송도면 고려정 집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18]

윤치호의 독립 운동이 독립에 무의미하다 평가는 결과적으로 근시안적인 평가였다. 윤치호는 3.1 운동에 대하여 "조선인은 바보같이 만세만 부르면 독립한다고 믿는다"고 말하기도 하였지만 본인의 일기에서도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라고 발언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자기 나름대로는 무의미한 행동에 목숨이 희생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답답해하는 모습이긴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3.1 운동은 한민족의 해방에 대한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 3.1 운동이 한국의 광복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그 뒤에 3.1 운동으로 인한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그에 따른 타 국가들의 평가를 고려하면, 결론적으로 윤치호의 평가는 근시안적이고 편협됬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만약에 독립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어도 연합국이 조선의 독립을 논의했으리라고 보는 학자는 없다. 실제로 똑같이 일제 식민지가 되었던 류큐 왕국은 독립 운동이 조선처럼 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합국이 그대로 일본의 영토로 남겨두기로 결정해 독립하지 못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계속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반례가 있다.

결국 윤치호는 합리주의를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눈이 멀어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이라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한국은 독립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민족과 일본이 더욱 친해져야 일본에게 대우 받을 수 있고 그게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국은 광복을 맞았고, 그릇된 현실 판단 때문에 저질렀던 친일 행적 그리고 독립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때문에 비판에 직면한 윤치호는 1945년을 넘기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유언은 "모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는 삼가라."[19]

사후 1960년대에 독립유공자를 포상할 때 그 역시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일제 시대 후기에 친일파로 타협한 것으로 모자라 중추원 의원과 귀족원 칙선 의원이라는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3.5. 논란

3.5.1. 피습

1897년 ~ 1898년에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지도했고 서재필이 추방된 뒤에도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이끌었다.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의 요구 사항은 국회 개설, 백성의 참정권이었지만 시중에는 윤치호가 대통령이 되려 한다,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삼고 윤치호는 부통령이 되려 한다,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만 돌았다. 결국 1898년 11월 그는 민씨 척신인 민영기의 측근 최인환(崔寅煥)의 피습을 당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9일에는 개성 송도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20] 그러나 윤치호는 극적으로 죽지 않았고 괴한은 도주했다.

3.5.2.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군 지지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김옥균, 서재필의 급진성을 비판하면서도 갑신정변에는 긍정적이었던 윤치호는 상하이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된다. 원래는 갑신정변 세력과 한통속이었던 윤웅렬이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상하고 첫째로 국왕과 관료, 고위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둘째로 민중들의 호응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정변군에 동원할 6백여 명의 함경남도 병영 소속 병사들을 이끌고 내려오다가 부관을 시켜서 중도에 함흥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으로 대응한다. 김옥균, 박영효에 실망하여 갑신정변 이후 실컷 까면서도 정변에 내심 호응했던 윤치호와 윤웅렬은 모두 절대로 갑신정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윤웅렬이 고종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이 점이 받아들여지고, 윤치호는 유학을 청해서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상하이로 간 윤치호는 홍영식 등의 죽음에 충격받아 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기방에 출입하며 방탕하게 생활한다. 그를 죽이려고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도 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는데, 윤웅렬의 당시 위치로 봐서 신뢰하기 어렵다.

상하이 망명 중에 동학 농민 운동이 벌어져서 삼남(전라, 충청, 경상) 지방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동학 농민 운동을 지지한다. 윤치호는 조선 정부가 상당히 썩고 부패하였으며, 부패하지 않아도 무사안일만을 꿈꾸는 비양심적 관료들이 가득하다며 헤라클레스의 12과업에 나오는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치우듯이 한번에 청소해버려야 한다고 했다. 윤치호가 동학 농민 운동을 지지하면서 삼촌 윤영렬과 사촌 동생 윤치소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당시 윤영렬은 토포사로, 사촌 동생 윤치소는 당시 현직 사헌부 감찰이자, 아산군에서 일으킨 동학군 토벌 의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3.5.3. 친일 협력에 대한 논란

일제 식민지 시기 초기의 소극적 회피나 거절했던 행보에 비하여 1938년 이후, 늦어도 1940년 이후 윤치호는 총독부 자문으로 일제 통치에 소극적이지만 협력적이었으며 부일 협력 등으로 친일 행적이 있지만, 단순한 형태의 친일 매국노로 보기가 애매한 구석이 많다. 결과적으로는 부일 협력과 식민 통치에 소극적이지만 협조적이었던 것은 맞다.

부일 협력을 하면서도 윤치호는 일제 시대가 끝날 때까지 내선일체론을 인정치 않았다. 그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별도의 민족으로 인정하면서 다민족 국가로 거듭날 수 없느냐고 지적했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조선인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박중양 등과도 입장이 일치된다. 또한 1933년 예종석과 동아 민족 문화 협회에서 펼친 내선일체 성격의 대아세아 운동에도 반대 입장을 내비췄고, 최남선이 일선 동조론을 펼쳤을 때도 일본 국수주의를 따르고 있다며 일기를 통해서 비판한 바 있다. [21] 총독부 정책에도 매번 협력적인 것이 아니라 1934년 총독부가 한글 철자 표기법(이른비 언문 철자법)을 개정하자, 최남선ㆍ지석영 등 112인과 함께 '정음(正音)지' 제5호에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http://news.donga.com/3/all/20110511/37125008/1

총독부가 윤치호로부터 부일 협력을 이끌어 내는 과정 역시 정말 부단했다. 윤치호는 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의직을 여러차례 권유받았으나 죄에 거절하였다, 1932년 중개인을 통해 참의직을 권유하였으나 거절, 1935년 10월에 다시 총독부가 직접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치 않는다는 명목으로 의원직을 제안하였으나 '내가 취임하는 동시에 그대들이 원하는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며 거절, 1939년 2월에 다시 중추원 참의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 비록 1941년 5월 12일에 드디어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서를 제출해버렸다. 다시 1944년 5월 12일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일본 패망 이후인 1945년 9월 중추원이 해체되어 파면되었다. 총독부는 4번에 걸친 중추원 의원직 권유 끝에 윤치호를 고문에 앉혔다가 3개월만에 그만두고, 5번째에 걸친 구애(?) 끝에서야 겨우 중추원 고문직에 윤치호를 앉혀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되려 윤치호는 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 대상이 되었는데 이유는 1910년 이후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 · 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1938년 5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당해 1938년 4월 29일 총독부에서 주관한 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당하였다. 그러고서 동년 6월에 경성에서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대회에 불참하고 1930년대 후반에는 당시 경무 국장인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에게 불려가 협박당한 일도 있다.

1940년 5월에는 창씨개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총독인 미나미 지로를 상대로 창씨개명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면서 창씨 개명 실시 기일을 연기할 것을 조언하여 1941년 1월에 대대적으로 창씨 개명이 실시된다. 그는 총독의 앞에서는 창씨 개명의 정당성을 인정했으나, 정작 일기에서는 "내선일체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조선인들에게 창씨 개명을 하라고 격려하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 민족을 일본의 근간이 되는 민족으로 틀어쥐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윤치호의 창씨 개명도 처음에 윤치호 본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문중 회의로 결정된 사항을 윤치호가 수락한 것이고 그나마도 "창씨 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난 차마 우리 아이들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만들 수는 없다"[22] 는 이유였다.

더불어 신사 참배를 한번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 정확하게는 기독교 감리회 신자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 신사 참배 강요를 번번히 회피하였다. 1935년 12월에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해야 한다며 일제로부터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고, 1936년 2월에는 모친상과 신앙을 이유로 총독부로부터의 신사 참배를 또한번 거부하였다.

3.1운동 당시에도 현실성이 없다며 참여를 거부하고 냉철히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며 비판하면서도 일기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23]

윤치호의 1919년 3월 2일자의 일기에서는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 3ㆍ1 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일제 경찰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1919년 5월 31일 7명, 8명의 젊은이가 종각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은 사건이 있었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였다고 서술하였다.[24]

정리하자면, 후반기의 친일 협력 행적이 있는것은 분명하나, 총독부가 윤치호로부터 친일 협력을 이끄는 과정은 대단히 부단하고 장기적이었으며, 그 기간동안에도 민족주의적 성향을 짙게 보여주었다. 처음부터 총독 정치에 협력적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특히나 몇몇 정책, 예컨대 신사 참배에 관해서는 일제 통치가 종결될 때까지 한번도 참여한 일이 없었다. 독립운동 인사들과 교류가 잦았고 임시 정부의 존재도 알았으나 일제 패망 전까지 이를 누설한 적도 없었으나 결정적으로는 이들의 독립 운동은 거의 거절했다. 속으로는 총독부 정책에 대단히 비관적이였지만 어쨌든 수동적으로 현 시세에 맞게 소극적이였던 적극적이였던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자기식 합리주의에 빠져 행동하는 남들은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자신은 시대의 흐름에 맞겨 수동적으로 살아간 그 시대의 지식인이였다.

물론, 식민지민에 대한 차별에 대해 개탄하기는 했어도 개인적인 자비심에서 그쳤을 뿐이고, 윤치호가 내선일체 등 일제의 지배 사상을 인정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행적은 분명 일본에 협조하여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동유럽의 체트니크와 같이 세계사적으로 윤치호와 유사한 신념형 협력파들이 자기들만의 신념으로 조국을 점령한 추축국에 협조한 사례가 여럿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추축국의 협력자들'이듯이 윤치호의 친일 행적 역시 개인의 영달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친일 협력을 했음은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위의 창씨개명과 연관되는 자식 문제도 크게 보면 결국 윤치호 본인의 신변과 연관되는 일이고 윤치호 본인도 일기에서 자신과 자신 주변 사람들의 신변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윤치호가 신변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는 기록을 남긴 적이 있다. 그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력을 얻기 위한 행보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의 친일 행보에는 이런 신변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긴 했던 것은 분명하며 윤치호는 일제에게 어느 정도 소극적인 저항을 했어도 이런 식으로 일제가 강압적으로 윽박지르면 곧바로 자신과 주변인들의 안전을 이유로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념을 따르는 사상가라기에는 이렇게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걱정하는 모습은 당대에도 주변인들에게 지탄받았던 문제였던지라 윤치호는 부귀영달을 누리려 했던 다른 친일파와는 다르다고 옹호받을 여지도 사실 많지 않다. 물론 이것 자체만으로는 지금 기준으로도 욕 먹을 일은 아니다. 그걸로 다른 잘못까지도 정당화하려고 했던 태도가 문제다.

특히 웃기게도, 윤치호의 이런 모습과 가장 비슷하게 저항했던 인물은 다름아닌, 윤치호가 그렇게 지옥같다고 했던 고종이다. 고종은 자신에 대한 위협에 움츠러들면서도 일정 부분은 계속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종에 대한 회유 협박은 윤치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더 많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었던 고종은 독살설까지 나오게 하면서 먼저 죽었고, 더 젊은 윤치호는 결국 명백한 친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인물 연혁에도 존재하지만, 윤치호의 거부는 일제 시대 초기로 가면 갈수록 강해지고, 후기로 갈수록 약해지며, 일제가 가장 극성으로 날뛰었고 패망의 기색이 뚜렷해지던 1940년대 중순으로 갈수록 반발이 오히려 줄어든다. 실제로 일제가 1940년대에 극성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고, 이 시기에 친일로 넘어간 인사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게 변명이 될 수 있는가? 선친일 후항일은 친일이 아니지만, 선항일 후친일은 친일로 보는게 현재 입장이고, 이 기준에서 봐도 윤치호는 얄짤없는 친일이 맞다.

4. 저서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중 1905년 1월 1일부터 1912년까지의 일기는 105인 사건으로 조선 총독부에 압수된 뒤 실전되었다.
  • 《우스운 소리》[25]
  • 《영어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 영어 문법 사전
  •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 《유학자취》(幼學字聚)

4.1. 번역서

그는 1908년 번역서로 처음 이솝 우화의 첫 한글 번역판과 걸리버 여행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찬송가를 한글로 번역하여 찬미가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다.
  • 《찬미가》(讚美歌)
  • 《의회통화규칙》 (라버츠 저)
  • 《이솝 우화》(한글 번역본) (1908년)
  • 《걸리버 여행기》(한글 번역본) (1908년)

5. 윤치호 일기

윤치호는 처음에는 일기를 한문으로 쓰다가, 영어를 배운 직후에는 영어 실력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일기를 영어로 썼다. 워낙에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사람이라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영어 일기를 썼다고 한다(당연한 얘기지만 영어를 abcd부터 배운 사람이 영어 일기를 무리없이 쓰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이후에는 한국어로 영어를 번역해 봤자 비슷한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계속 영어로 일기를 썼다.[26]

죽기 직전까지의 그의 일기는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인간 됨됨이가 어찌되었던 간에 윤치호의 일기는 매우 꼼꼼하고 정확하다. 문제는 그의 일기가 죄다 영어 아니면 한자라는 것. 거기다가 영어로 저술한 부분은 필기체로 날려썼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그의 일기를 수월하게 읽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번역상의 난해함, 그리고 분량 덕분에 윤치호의 일기는 아직도 국내에 완역이 되지 않았다. 승정원일기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는 미국 유학 시절(1892년)까지의 일기가 번역 및 출판되어 있다. 여하간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일기를 썼는데 중간중간 수감 생활이라든지, 국내외에서 터진 대형 사건들로 인해 글을 쓸 정황이 아니었던지에 대한 이유로 일기가 끊긴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 시사 이슈, 정치적 사건에 대한 윤치호 본인의 정보 수집 및 의견이 담겨 있어 시대사 연구에 유용하게 쓰인다. 또한 미국 유학시에 쓴 일기는 19세기 말 서양에 건너간 한국인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읽어도 재미있다. 또한 문학 사상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기 일기 중 중요 대목을 발췌 번역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책이 나와 있다.

6. 어록

아래의 어록들에서 윤치호가 갖고 있던 조선 사회에 만개하던 병폐에 대한 비판의식, 조선 독립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6.1. 조선 사회에 대해서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천만의 생령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나라,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사장되며 포부가 실현되지 못하며 애국심이 표현되지 못하는 나라, 지옥같은 전제정치가 수세대의 굴종과 빈곤과 무지를 낳는 나라, 삶 속에서 죽어가고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 도덕적 물질적 부패와 더러움이 해마다 수천의 생명을 앗아가는 나라, 이것이 조선의 현실이다. 이같은 정치적 지옥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내정을 닦지 않으면 외교는 무익한 것이다.
진실과 정의의 원리에 기초한 평화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의 압제와 피지배자의 노예 상태에 의하여 유지되는 평화는..... 조선을 진정한 지옥으로 만든 악덕이다.
수치스러운 조선 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정부 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케 된다. 정부는 500여년 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결국 부패한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 소수의 독재 정치로부터 조선 국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 정부와 낡은 체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다. 철저히 썩은 정부를 미봉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강력하고 철저한 혁명은 이 나라 전체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외세의 간섭은 그러한 혁명을 방해하거나 이것을 이 반도의 폴란드화를 위한 적절한 기회로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그러한 폴란드화도 온 국가가 지금 서있는, 아니 잠자고 있는 악취 풍기는 침체보다 더 나을 것이며 적어도 더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에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로부터 조선의 지독한 독재 정치에 이르는 여러 형태의 정치 체제가 존재한다.

6.2. 유교에 대해서

유교의 교훈은 꽤 아름답다. 그러나 유교가 우리 사회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신봉자로 하여금 그 교훈을 실천케끔 하지 못하는 유교라는 종교 체계는 어차피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는 미사여구에 가득 찬 중국 조정의 칙령처럼 똑같이 나쁜 것이다. 실천하려는 자들이 없으면 교훈이 무용지물이 된다. 유교의 기초가 효도 이상으로 되지 않은 고로 유교가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이다.
그 도덕에 신이 존재하지 않고, 그 정치 체제가 민중을 외면하는 유교는 어느 민족이든지 자만스럽고 이기적이며 노예 근성에 빠지게 할 만큼 충분히 야비하다.
유교의 남존여비, 왕명에의 절대 복종 강요, 그리고 그 영원한 복고주의는 유교 부패의 씨앗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유교의 현실주의는 사람을 속물로 만든다. ... (이하 중략)... 유교에서는 젊은이들이 효도의 규율만 잘 지키면 도덕군자가 된다고 생각들 한다. 극히 진부한 효도의 원칙을 최고의 도덕으로 만들어놓고 (효도에 따르는) 모든 죄악 즉 방종, 복수심, 거짓말, 증오심, 대단한 위선 등을 덮어둔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 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든다.

6.3. 식민지 상태의 조선에 대해서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
현재와 같은 정부라면 독립은 국가에 구원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한편 더 좋은 정부, 즉 인민의 복지에 애국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익을 가져다줄 정부를 가진다면 종속도 진정한 불행은 아니다. 더욱이 건실하고 번영한 민족은 어느 때엔가는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그런데 빈약하고 무식하며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인 정부에 의하여 가난하고 무식하며 연약하게 된 국민, 그러한 국민에게 독립이 뭐 나을 것이 있겠는가?
오후에 집에 있었다. 3시 20분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며 조선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 가버렸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식민지인 조선 문제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 중 어느 나라도 조선 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어떠한 학교의 설립을 원한다면, 그것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노동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과, 조선의 장래는 노동에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노동이 무엇인지를 산 진라로 배울 수 있는 실업학교여야 한다.
흑인이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기에 앞서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야 했듯이, 조선인도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기에 앞서 경제적 평등에 도달해야 한다.

6.4. 범세계적인 사회 및 민족에 대해서

고도의 저항력을 가진 민족은 결코 열등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높은 의미의 투쟁 정신이다.
우리는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보다 도덕 및 종교와 정치에서 거의 항상 더 낫거나 덜 부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다소의 예외는 있겠지만 정의는 인종간에 있어서도 힘이다.
펜과 칼은 각기 정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배제할 정도로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양자는 인간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며, 결코 인간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하나의 민족이 하나, 단 하나만을 숭상해야 한다면 그것은 칼이어야 한다. 왜냐면 칼은 투쟁정신 또는 저항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역적이라 하니 제손으로 뽑았던 의원을 역적이라고 믿는다. 그런 바보 국민이라면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선 상공업을 발달시켜야 한다. 세상만사가 돈 없이 되는 일이 없고, 먼저 육체의 생활을 유지 못하면 도덕도 지킬 수 없으니 상공업을 진흥시켜 실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교육 없이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으며, 더 많은 교육은 더 많은 독립을 가져온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하고 있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국가적 수치와 굴욕을 생각할 때,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 행로에서 국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모습과 언행을 생각할 때, 인생이 지겹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이나 앞으로도 죽음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당장 내앞에 자연스럽게 찾아온다면 강한 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나 냉담한 이 세상과 하직하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를 실제로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가 아니고 힘이다. 힘은 정의라는 것이 이 세계의 신이다.

6.5. 조선 인종과 사회에 대한 비난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본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그런 성명서를 발표하면 시위가 진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역효과를 낼 것이다.
조선인들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척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조선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고집부리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체면, 자존심이 선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조선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듣자니 조선 사람들이 민주 정부 출범에 관해 거론한다는데 내겐 마치 6세 어린이가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을 거론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 못하는 자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 일으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이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 된다.

6.6. 조선인에 대한 폄하, 일본인에 대한 찬양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서는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는 조선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
무능하고 가렴주구를 행하는 조선인 정부와 유능한 일본인 정부 중에서 택하라면, 나는 일본인 정부를 택할 것이다.

7. 사상적 측면

7.1. 인종론

그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대전을 백인종 대 황인종의 인종 전쟁으로 봤고, 황인종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보다도 미국이나 유럽 유학을 다녀온 친미파나 친유럽파를 더 혐오스럽게 보았다. 좀 더 자세히는 이 사람이 한 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인종관이 형성된 것은 미국 유학 시절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지역인 조지아 주에서 수학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그의 일기를 보면 미국을 인정은 하고 있으나 백인들에게만 좋은 나라라며 미국의 인종 차별을 까는 내용이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론은 윤치호 생애의 최대 병크인 부일 협력을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7.2. 조선 사회의 문제 제기

윤치호는 노론 벽파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도 다산 정약용을 혐오하여, 정약용의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또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서북파, 기호파 파벌을 나누거나 출신 신분을 두고 갈등하는 것을 비판하며, 지역 감정 하나만 봐도 독립할 자격도 없다고 비판했다.

중국을 다녀온 지인을 통해 들은 상하이 내 7개의 파벌이 있다는 것을 두고도 독립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된다.

조선인의 결혼식, 장례식에 사치를 부리는 것도 윤치호의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1920년대, 1930년대 당시 결혼 비용과 장례식 비용으로 파산하거나, 이혼하거나, 가정 파탄이 나는 집안들을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대차게 깠다. 그는 조선의 관혼상제의 특징으로 슬픔없는 눈물과 허례허식을 지적했고, 사촌들의 사치스러운 결혼식, 고모 장례식에서의 허례허식 역시 비판하였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이 애국심, 개혁을 말하다가 관직에 올라서는 자리 보존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디스했다. 그는 당시 조정의 양반, 고관들이 글도 못읽는 무식한 사람들이 많다고 비판했다. 양심이 없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글을 모르는 무식한 고위직에 대한 비판에서는 자기 삼촌인 윤영렬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몸이 뚱뚱하면서도 걷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 이준용은 양돼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 디스했다.

나혜석의 이혼과 박인덕의 이혼을 옹호했다. 남자가 이혼하고, 아내를 내보내고, 첩을 여러 명 두거나 하면서 여자가 이혼하는 것을 비난하는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나혜석, 박인덕의 이혼을 계속 옹호했지만, 박인덕이 신흥우와 가깝게 지내면서 박인덕에 대한 옹호는 거뒀다. 그는 첩을 두지 않아도,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인이 가난하여 굶고 있는데도, 동창생 구영숙이 자기 부인이 모피코트를 사주는 것을 야속하게 생각했다. 구영숙을 야속하게 생각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가난과 기근으로 고생하는데도, 구영숙의 부인이 모피코트를 선물받은 것을 보고 부러워한 셋째 후처 백매려 때문. 윤치호는 백매려가 하녀들, 하인들을 괴롭히고 구박하는 것, 자기는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하녀에게 팔다리 주무르게 하거나, 일하다 조는 하녀를 소년 하인들을 시켜서 꼬집게 하는 것을 비판했다. 결국 윤치호는 셋째 후처 백매려에 대해 "내 자식들을 낳아 준 여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산다"는 하소연을 일기장에 남기게 된다.

시부모가 며느리 괴롭히는 것, 남편이 아내 괴롭히는 것, 어머니가 자녀들 괴롭히는 것, 주인이 머슴들, 하인들, 노예들 괴롭히는 것도 그대로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결론적으로 윤치호는 "남자, 여자, 노인, 청년, 인종을 떠나 모든 인간은 사악하다. 다만 힘과 돈과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된 윤치호는 1930년대에 가서는 심각한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외로움과 허탈감에 빠진 윤치호는 독서에 탐닉했고, 불면증을 그는 독서로 달랬다. 1930년대 이후 커피가 시중에 보편화되면서 그의 독서량은 더욱 늘었다.

7.3. 합리주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이 깨우쳐 일제를 몰아내는 것 자체를 허황된 공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갑신정변은 둘째치고, 독립협회나 만민 공동회에서 민중 참정권을 주장한 것과, 유럽의 의회제를 도입, 의회를 설치하자는 견해를 고종, 순종에게 불충하는 역적 행위로 매도당한데 대한 실망과, 민중의 맹목적인 보수성에 대한 결론이었다.

비록 개인적 양심으로 독립 운동에 대한 소극적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나 그것 역시 자신에게 해를 부르지 않는 한도였고 적극적인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신에게 독립 자금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 한답시고 외국에 나가 편하게 운동하면서 국내에 있는 자기한테 돈 빌려 달라고 하는건 상당히 무책임한 처사라고 일갈한 사람이 윤치호였다. 윤치호의 이런 행동은 그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예리한 관측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실례로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제일 먼저 예측했던 사람도 윤치호였고 예상이 맞은 것도 윤치호였다. 대다수 독립 운동가들은 순진하게도 저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또한 윤치호는 사람들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27] 윤치호의 이같은 행동은 식민지 조선의 장래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 뒤엉켜져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다가 나중에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합리주의도 점점 마비되어 갔는데 당장 적백 내전 이후 험악해져 가는 미국과 일본의 구도에서 일본 측을 부당한 피해자 운운한 것[28]은 물론 한국의 독립 가능성을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았고 미국의 국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커다란 우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어리석다고 비웃던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 번진 전쟁에서 일본은 지고 조선은 독립한다는 유언비어가 전쟁이 끝난 이후 현실화가 된 것과 더욱 대비된다.

게다가 그의 '합리주의'는 '이상적인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론상의 국가를 억지로 현실에 끼어맞춘 것이라 그나마 일본이 겉으로나마 합리적인 행세를 하던 문화 통치기 초반까지야 합리적으로 돌아가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파시즘이 대두하고 추축국과 연합국의 대결 구도로 돌아가면서 그가 주장한 국제 질서 모델은 완전히 붕괴했음에도 여전히 과거 모델에 집착해 일기에서 "왜 일본같은 훌륭한 나라가 히틀러 같은 건달이랑 손을 잡는 거지?", "무솔리니 대단한 지도자라 생각했는데 히틀러 같은 건달에게 나라를 내주다니 실망이다."라는 뻘글을 쓰기에 이른다.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초반부에는 제국주의나 일부 일본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40년대 이후 부터는 자신이 비난하던 제국주의와 자신이 찬양하던 일본의 모습을 결합시키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그가 백인종에게 가지고 있던 깊은 원한과 세상에 대한 회의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보여진다.

7.4. 사상적 배경

윤치호의 합리주의와 인종주의가 이상하게 뒤틀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윤치호의 사상이 자신이 독자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치호의 사상은 그가 일본 유학시기에 신학문을 배웠던 인물인 동시에 흑화된 제국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김옥균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아시아주의자이자 일본 극우파의 사상적 배경인 도야마 미츠루의 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한 것이다. 문제는 저 두 사람부터가 모순이 넘쳐흐르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는 사람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느냐를 잘 보여준 인물인 동시에 윤치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우민멸시, 일본에 대한 긍정적 모습, 인종주의, 애매한 합리주의 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윤치호는 서구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 체제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유림들의 권위 의식을 비판했으나 정작 윤치호는 독립 운동가나 지식인, 학생들 중 자신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거나 어긋나는 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비웃는 꼰대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일기에서 윤치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한 조선인이라고 기준을 두고 만사를 평가했고 그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이들은 어리석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자뻑 쩌네. 정작 그가 비판한 '나약하고 어리석은 조선인' 관은 윤치호 본인의 행적에 빗대어 보면 윤치호 자신과 일본 제국도 그 '나약하고 어리석은 조선인'에 불과했다. 원래 제 눈의 들보가 잘 안 보인다.

게다가 그가 서구에서 배워 온 인종론은 시대상으로 보아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로 직행하기 딱 좋은 사상이었고 윤치호도 정도가 약할 정도일 뿐이지 전체주의자처럼 변해 갔다. 게다가 윤치호는 과학과 기술을 배워 오고 기독교를 전도하는 것을 권장하기는 했으나 정치학, 철학, 경제학 같은 사회 과학이나 인문학 쪽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싸움만 일삼게 만드는 학문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일기에는 수많은 일제 시기 당시를 추측할 수 있는 여러 정황자료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조선의 문제점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이전에 조선인의 게으름, 편협성, 배타성, 나약하고 어리석은 민족성을 먼저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 보았다. 이 점에서는 안창호와 거의 비슷한 시국관을 지니고 있었다. 웃기게도 이런 모습은 서구의 철학과 행정, 사상을 도입하는 데 등한시해 양무 운동을 실패했던 청나라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비난한 청나라보다도 더 판단력이 없는 윤치호.

종교적으로는 원래는 유자였으나 청나라 망명 생활 중 개신교를 접해 개종한다. 그는 민중들에 대한 실망과 계속된 좌절로 방탕해지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때 개신교의 구원론과 성악설[29]이 그에게 큰 충격을 줘 개신교로 전향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계에서는독실한 기독교인' 윤치호를 띄워주고 있는데 사실 윤치호의 종교관은 개종했음에도 유교적인 사상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기독교 계열 종교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후 심판 등의 요소가 빠져 있는 상태라서 신앙심이 깊었다고는 하나 그가 개신교 교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8. 모순과 비판

한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당시 한국 대부분의 학자들보다) 잘 알았던 윤치호가 조선의 문제점은 그렇게 잘 알면서 일본의 문제점은 왜 찾으려 들지 않는가? 이는 윤치호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운 부분이다.

중국인들을 혐오했지만 중국인 아내 마애방은 끔찍이 아꼈다. 1905년 마애방과 사별한 후에도 '사랑하는 부인이여'라는 시를 읊을 정도.

조선 특유의 가부장적인 풍습을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혐오했으나, 자기 가문이 득세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해평 윤씨 문중회에도 참석하고 여러모로 가문의 힘을 쌓는데 힘을 쏟았다. 단, 가문이 부계 승계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으나, 가부장적 풍습과 가문은 동치가 아니다.

특히 윤치호는 자기 자신의 일기에서 조선인들의 구습과 어리석음, 이기심을 비난했지만 정작 그의 일기에는 그 자신이 묘사한 '조선인의 잘못된 인습에 기반한' 행위를 본인 스스로가 매우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었고, 그것마저도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기 보다는 대의를 위해 와신상담하는 모습이라고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윤치호의 조선 민족 비판은 자기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투영해 조선 민족을 바라본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9. 주변 관계

그는 이완용을 혐오하였는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함께 민권 운동을. 하던 이완용[30]은 다른 을사오적과 함께 한일 합방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그는 이완용을 혐오하다 못해 경멸했다.

윤치호는 그밖에 유길준, 필립 제이슨, 안창호, 이상재, 이승만 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나 유길준과 이상재는 일찍 사망했고, 필립 제이슨과 안창호, 이승만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려 그는 일제 시대의 조선에 혼자 남게 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그는 유길준의 초대를 받아 파티장에 가서 만찬을 했다. 그러나 유길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뒤에 윤치호는 명성 황후 암살의 배후에 조선인 협력자가 있음을 폭로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 중 거물급 인사로 자신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유길준을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명성 황후가 암살당하던 날 유길준이 자신을 초대했던건 명성 황후를 암살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움직이지 못하도록 일부러 자신을 만찬에 초대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자뻑이다. 김구가 죽인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죽인 낭인들 중 하나였다라는 것과 다름없는 이다.

고종 독살설도 처음에는 불신하였으나 먼 친척이기도 한 윤덕영의 양심없는 행동들[31]을 보면서 고종 독살설에 윤덕영의 가담 여부를 다소 모호하게 기록, 그러나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그는 나혜석과 박인덕의 이혼을 공개적으로 변호할만큼 초기에는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성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딸과 주변 여성들의 행실을 보고 여자에게 교육이 필요한가 하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도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윤치호 이복 동생 윤치창이 미국으로 가는 것도 손원일 전 국방 장관 여동생이자 제수인 손진실이 꼬신 것으로 파악했다.

10. 기타

파일:yoon_tree.jpg
그의 일가는 고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평 윤씨 문서 참고.

윤치호 본인도 3처 2첩[32]을 두었으며 자녀가 많아서 6남 9녀를 뒀다. 그리고 이걸 보면 가계도가 굉장히 복잡하게 나온다.
  • 장남 영선 : 일제 시기에는 사업을 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민씨 척족인 민유식의 딸과 결혼했다. 장남이 윤영구로 국방부 관리와 대한 통운 이사 등을 지냈는데, 이 윤영구의 맏딸과 결혼한 사람이 조선일보 사주인 방상훈이다.
  • 차남 봉선 : 일찍이 요절했다.
  • 3남 광선 : 독립 운동가 남궁억의 딸 남궁자경과 결혼했다. 일제 시기에는 낙농업과 체육계에서 일했고,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통역일을 하다가 피랍되어서 북한에서 지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딸인 윤자희와 결혼한 사위 김명호가 개성시 인민 위원장을 역임했으므로 북한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4남 장선 : 외교부에서 일했으며 윤치호 기념 사업회를 총괄했다.
  • 5남 기선 : 음악 쪽에서 일해서,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음대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미국에서 죽었다.
  • 6남 정선 : 역시 미국에서 거주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 내지는 소극적 협력자로 껄끄럽게 취급되다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와 2009년 대한민국 친일 진상 규명위에서 그를 '전시 체제기(일제 강점기 3기) 때 적극 협락한 친일파' 분류로 선정했다. 일부(주로 뉴라이트 세력)에서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는 민족 문제 연구소 뿐만 아닌 대한민국 정부 기관인 '친일 진상 규명위'에서도 윤치호는 명백한 친일파로 규정짓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직을 지냈다는 점과 제국 의회 칙선 의원에 있었다는 것이 있으니깐. 참고로, 대한민국 법원에서도 중추원 참의직에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친일 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이밖에도 매일 신문, 경성 일보 등에 윤치호가 기고한 글들과 담화문 발표한 기사글이 1편 ~ 2편의 글 정도가 아닌 수백여건이 곳곳에서 흔히 기사에 나와있다. 특히 1943년을 전후로 해서 이러한 기사글들 가운데 윤치호하고 연관된 것이 상당히 많다. 김승학이 펴낸 '친일파 군상'에 따르면, 윤치호는 '친일과 전쟁 협력이 옳지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임을 알고도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자'로 분류되어 있다.# 2008년 무렵부터 뉴라이트 계열을 중심으로 한 수꼴 세력에서 재평가 라고 쓰고 발악이라고 읽는다.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 임화[33]에서는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해방 후 윤치호의 친일 행위에 격분한 어떤 조직에서 암살했는데 가문에서 그걸 숨기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작품 자체가 임화의 미군정 스파이설을 주장해서 논란이 된 작품이니[34]

2014년 문창극이 국무 총리 후보가 되면서 새삼스럽게 윤치호가 주목받게 되었다. 문창극이 윤치호를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문창극의 다른 발언 속에 있는 식민지 시혜론의 흔적을 보면 뉴라이트들의 고평가와 연결되어 있는것 같기도 하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적 관점과 연관되어 있는데, 문제는 윤치호의 친일 전력이 대동아공영권론에 엮여있는 골때린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창극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올 수록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오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윤치호가 골 때린 인물이라는 인식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상황. 한 마디로 일본 덕분에 잘 살게 됐다는 식민지 시혜론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것이니, 총리는 커녕 이런 사람이 정치판에 근처에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이후 보수우파들 사이에서 저 위의 윤치호 어록이 새삼 화제가 되면서 재평가를 받는중이다. 보수우파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약자는 과연 선량한가?' 라는 언더도그마를 까는 한마디때문에 선구자 취급받는중인데, 윤치호가 저 말을 한 것은 민중들이 자신이 속한 독립협회에 대한 지지를 거뒀다는 것 때문이었다. 문제는 독립협회가 교과서에서나 다루는 정도로 좋은 단체가 아니라는 것.

10.1. 애국가의 작사자인가?

윤치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골때리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애국가의 작사자 논란이다. 이전부터 작자 미상으로 분류되던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10.1.1.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맞다.

1908년 발간된 찬미가[35]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뿐만 아니라 여러 증거가 있다. 일정 시기 소위 무궁화 곡[36]이 수록된 창가집에서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으며 총독부에 제출된 보고서에도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발견된 무궁화 노래집을 보면, 무궁화 곡의 작사자는 윤치호로 되어 있다.[37]

애국가 창작 열풍도 대한제국 시기 독립신문을 시작으로 있었고, 이 결과물로 1902년 나온 것이 대한제국 애국가이다. 실제로 널리 퍼진 것은 대한 제국 애국가 이전 창작된 곡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애국가는 그렇게 불린 곡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곡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유명했던 1880년대 배제 대학교 버젼 무궁화가 등은 황제나 황실을 찬양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것이 공화주의를 천명한 임시 정부 등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가 상해 임시 정부에서 정식으로 선택된다. 즉, 3.1 운동 당시 윤치호의 행적에 대한 부분은 현재의 애국가 위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온 과대해석이다.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윤치호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도, 면죄부를 줄 이유가 될 수도 없다. 윤치호는 변절하여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전쟁 최후 막바지인 1945년까지 정신 못 차리고 일본 제국 귀족원 의원직까지 받은 확실한 친일파다. 단지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만을 가려 내자는 주장이다.

이와는 별도로 만약 정말로 윤치호가 쓴 것이라면 작곡을 한 안익태 역시 명백히 친일파로 분류된 인물이기 때문에 즉 애국가라는 노래 자체가 친일파가 만든 노래가 되버리는 상황이니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작사자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일단 광복 후 1955년 국사 편찬 위원회는 애국가 작사 조사 위원회를 발족하여 사실상 윤치호라는 걸 확인했으나, "미상"이라 결론 짓고 급히 조사를 마친바 있다.[38] 60년 넘게 쓴 애국가를 바꾸는 문제는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이기 때문. 윤치호는 정부가 인정한 친일파인데 윤치호의 작사를 정부가 인정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애국가 교체 논란이 불거질수밖에 없다.[39] 김구는 임정 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논란에 3.1 운동이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시작했으니 작사자는 문제될 것 없다고 피력했다.] 그래서 정부는 애국가의 작사자 "미상"으로 남겨둔채 조용히 넘어가려는 것.

10.1.2.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아니다.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가 맞다는 주장의 대표적인 증거로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보유한 윤치호 친필 애국가 가사와 1908년 발행한 찬미가라는 책이 제시된다. 친필 애국가 가사에는 1907년 작사했다고 나오며, 본인이 쓴 것은 확실하지만 문제는 작성 연도가 1945년 9월이라는 점이다. 이시점은 윤치호가 친일파로 극딜을 당하던 시점이라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악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친일파 극딜에 대해서 난 사실 애국가 작사자임. 그런 내가 왜 친일파임둥?이란 구실을 삼기위해 애국가 가사를 친필로 썼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오는 상황. 또한 찬미가는 직접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역술한 것으로 명기되어있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 작사자설을 지지하는 측은 역술도 폭넓게 저작자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주장하나 다른 학자들에 의하면 그당시에도 본인의 순수한 창작이 아닌것을 역술로 표기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즉, 찬미가에 수록된 노래 가사들은 대부분 의역한 미국 찬송가들이 수록되어 있는만큼 애국가 작사자라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약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면 그 방대한 윤치호 일기 속에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것도 상당히 수상한 대목이다. 윤치호 자신이 친필로 적은 시점으로 주장한 1907년은 물론이고 어느 시점에서도 애국가에 대한 언급을 찾을수 없다. 심지어 3.1 운동에 대해서 윤치호는 철없는 것들이 독립 운동한다고 난리친다고만 적었을뿐 정작 그 당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것에는 전혀 언급도 없다. 과연 자기가 작사한 노래라면 아무 감흥이 없을수가 있을까? 하다못해 내가 왜 저런 노래 가사를 써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선동당하게 만들었나라는 식으로 태클이라도 넣어야 정상적일텐데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찬성 측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말도 못꺼낸 것이라 반박할수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제에 협력적이던 윤치호의 일기까지 검열할 정도는 아니었다.

찬성 측에서는 미주 지역에서 애국가에 대해 윤치호가 작사하고 안창호가 크게 개선했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였다라는 자료를 제시하고 또한 1950년대 정부에서 발간한 자료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명기하고 있는 자료를 제시하기도 하나 이것 역시 의문의 대상이 된다. 애국가의 정확한 작사자를 알지 못해서 가장 인지하기 쉬운 윤치호를 작사자로 생각했을수도 있으며 정부가 윤치호 작사로 명기한 자료가 있긴 하나 수십년동안 작자 미상으로 정부가 공식 입장을 정한걸 생각해보면 근거가 되긴 어렵다는 지적도 만만치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윤치호 작사설이 나오게된 배경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 보급 운동에 참여했던게 와전된게 아니냐는 추정을 하고 있다. 윤치호가 말한 1907년이란 시점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교육 활동을 하던 시점인데 안창호는 학교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교육을 장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윤치호가 1908년에 발간된 찬미가에 애국가를 수록한 것도 해명이 될 수 있다.

10.2. 박중양, 이규완과의 차이점

비슷한 시대의 흑화한 계몽론자였던 박중양, 이규완과도 다소 달랐다.

그와 성향 비슷한 인물로 박중양이 지목되지만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했다. 다만 윤치호는 교육 사업과 자선 사업, 언론 계몽 활동 등으로 민도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규완은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고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이규완의 실력 양성론과는 유사했지만 조선인 스스로 참정권과 자치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1] 음력 1864년 12월 26일[2] 찬송가의 처음 번역된 이름은 찬미가였다.[3] 둔포면 출신이다.[4] 아버지 윤웅렬의 첩으로 14년 연하이다[5] 영조가 66세에 15세인 정순왕후와 재혼하는 것, 인조가 44세에 15세의 장렬왕후와 재혼하는 것, 선조가 51세에 19세인 인목왕후와 재혼하는 것 외에도, 당시의 족보들을 보면 양반 사대부 가문은 30세 ~ 40세나 어린 재취 부인을 들이는 일이 빈번하였다.[6] 그런데 윤치호 본인은 동학 농민군을 지지해서 삼촌 윤영렬과 사촌 동생 윤치소를 당황하게 만든다.[7] 이 때 윤치호는 일본의 신식 학교에서 연수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서자라는 이유로 유길준이나 김옥균 등과 달리 농업 학교 연수가 예정되었다. 윤웅렬은 이 얘기를 듣고 뇌물을 써 자신의 서자 윤치호를 상급 인문 학교로 진학시킨다. 바로 그 학교의 선생이 후쿠자와 유키치였다.[8] 일본 유학 전에 박규수 문하에 출입하면서도 여성을 인간 이하로 보는 '당시의' 유교적 성관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9] 이 사람은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었으나, 경술국치 때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다.[10] 비록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치르나 그가 105인 사건을 주동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실은 105인 사건 실체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11] 이 당시 윤치호의 전향서 '우리 조선 민족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 이후에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해서 양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나 동화에 대한 계획에 참여해 힘이 미치는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12] 1933년 10월 4일자 윤치호의 일기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으며 여운형, 신흥우 등은 자신에게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 결사를 자신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윤치호는 "서북파가 오랜 세월의 억압 속에서 기독교와 근대 교육을 받아들여 지도자들로 부상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서북인들은 일본인들보다 기호인들을 더 증오하기에 일본인들에 아첨해 기호파에 대한 비열한 계략을 동원’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기호인들의 결사는 응집력이 없기에 불가능할 것’이니 ‘허심탄회하게 교류하고 신사적으로 대하자는는 태도를 보인다."고 했다고 한다. 안창호에 대한 지역 감정 의혹은 1920년대부터 일기에 기술되어있었고 실제로 독립 운동 와중에서의 기호파와 서북파 출신 간 갈등도 상당히 첨예한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이 시기 신흥우는 미국에 유학했던 상태였고, 여운형은 1920년대 활동때 기호파 vs 서북파 논쟁에서 서북파 쪽 입장에 있었던데다(출신은 기호파였지만), 국민대표회의 때 창조파 vs 개조파 논쟁 때도 개조파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봤을때, 윤치호의 일기에 나온 1933년 10월 4일 일기에 대채 언제 만나서 그런얘기를 했는지 의문이 따른다. 그리고, 1933년 10월에 일기가 쓰여질 무렵 안창호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윤치호를 만날 일도 없던 시기였다. 실제로 윤치호와 만나게 되는건 그가 출옥하고 난 뒤 병약했을 때 모습이었다. 참조 자료.[13] 그러나 이 일기를 쓰고 얼마 안되서 그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다.[14] 아닌게 아니라 이 사건에 윤치호의 사위인 정광현이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15] 윤치호 일기에선 당시 석방을 위해 움직이던 윤치호를 보고 김활란이 분노하였단 기록이 남아있다.[16] 반론이 있는데, 윤치호 일기에서 일본의 지배에 대해서 매우 강압적이라고 비판한다. 간디의 예시를 들면서 인도가 일제 치하에 놓여있다면 일본인들이 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라 적고 있다.[17] 미 군정 장관이자 초대 주한 미군 사령관.[18] 坪江仙二, 《改正增補朝鮮民族獨立運動史》 (高麗書林, 1986년) 410쪽[19] 자기 변명적인 유언이자, 자기 자신을 까는 유언이다.[20] 坪江仙二, 《改正增補朝鮮民族獨立運動史》 (高麗書林, 1986년) 410쪽[21]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년 ~ 1943년》 (역사 비평사, 2001년), p.39[22]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년 ~ 1943년》 (역사 비평사, 2001년), p.463[23]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3/05/2004030555329.html[24] 윤치호 일기 1919년 5월 31일[25] 원 명칭은 우순 소리이다.[26] 윤치호는 영어 사전까지 만들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 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1911년에 저술한 적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고 한다.[27] 독립 운동가 간의 분열을 정확히 예측했다. #을 참고하자. 그런데 해당 기사 자료는 시기나 앞뒤 정황이 맞지가 않다. 이 사료는 1933년 10월 4일자 윤치호 일기에 있는 내용인데, 당시 안창호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여운형은 신문사 사장에 있을 때였다. 실제로 둘 다 윤치호에게 찾아가 상의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윤치호가 보는 '지역 감정' 부분은 맞는 얘기...[28] 태평양 전쟁 발발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뻔뻔하게 군 것은 일본이다.[29] 특히 성악설은 인종론과 결합해 그가 사상적으로 우승열패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적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미친다.[30] 이완용은 민권 운동을 한 적이 없다. 이완용이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이고, 만민 공동회 역시 관민 공동회에 관원의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다. 애초에 독립 협회도 정부의 영향이 강하던 시기, 고종과 대립하던 시기 등을 쪼개서 봐야하며 그 배경 역시 좀 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31] 순종황제의 아내인 순정효황후 윤씨는 한일 합방 도장을 찍지 못하게 하려고 옥새를 치마에 숨겼는데, 이걸 삼촌인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갔다. 그 뒤로 윤덕영은 시종원경과 귀족원 의원을 지내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32] 본처인 전주 강씨, 청나라 출신인 마애방, 백매려. 첩 2명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참고로 아들의 출생 순서를 고려할 때, 재혼, 그런거 없다. 윤치호 결혼사를 보면 애석한 것이 많은데, 어렸을때 정략 결혼한 본처 전주 강씨가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여 그 충격에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한동안 사창을 드나들락 거리다가 중국인 마애방을 만나고서야 정착하게 된다.[33] 원제는 북의 시인이다. 번역본 제목이 북의 시인 임화[34] 참고로 이런 이유때문에 이어령은 이 작품을 쓰레기로 몰았는데, 전향자의 논리와 전향의 비극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작품이다. 고증을 씹어먹는 걸 제외한다면. 윤치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게 신빙성이 있는 건 아니다.[35] 총 15곡이 수록됐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다수가 번역곡이들이였으나 애국가와 가사가 거의 동일한 무궁화 곡 및 애국가 계열 3곡만 고유 명사가 사용된 번역곡이 아니였다.[36] 가사가 현 애국가와 거의 같다[37] 참고로 그 노래집에는 안창호의 '한반도가' 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38] 당시 신문을 보면, 정부에서는 친일파인 윤치호 작사로 결론 짓느니 차라리 미상으로 놔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 참고로 당시에는 작사자로 안창호, 최병헌 등은 자세한 언급조차 없었다.[39]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광복한 직후 1950년대부터 나오던 논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