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5:52:48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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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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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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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colbgcolor=#94153e> 농민군 전봉준 · 김개남 · 손화중 · 최시형 · 손병희 · 김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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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사발통문 · 파랑새 · 갑오군정실기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경복궁점령사건 | 景福宮占領事件
갑오왜란 | 甲午倭亂
갑오사변 | 甲午事變
Battle of Gyeongbokgung Palace
파일:일본 경복궁.jpg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묘사한 우키요에 판화.
우측의 백마를 탄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날짜
1894년 7월 23일 오전 0시 30분 ~ 오후 2시경[1]
장소
한성부 경복궁 일대
원인
일본 제국의 청일전쟁 이전 조선 수뇌부 장악 의도
교전국
파일:조선 국기(1893).svg 조선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조선 국기(1893).svg 고종 (국왕)
파일:조선 국기(1893).svg 홍계훈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토리 게이스케[2]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오시마 요시마사[3]
병력
장위영 2천, 통위영 2천, 평양기영 5백, 경리청 5백, 도합 5,000여명 오시마 혼성 여단 8,000명[4]
결과
조선군의 무장해제, 일본군경복궁 장악
영향
흥선대원군김홍집 친일 내각 하의 갑오개혁 실시, 조일동맹조약 체결[5], 청일전쟁 개전
피해 규모
30여명 사상 10여명 사상



파일:일본군 경복궁 습격.jpg

일본군의 경복궁 공격 전개 출처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영추문 전투3.2. 건춘문 전투3.3. 위조된 칙령과 무장해제3.4. 대원군의 귀환
4. 영향5. 그 후6. 명칭 문제7. 일본의 은폐 왜곡8. 대중 매체9. 참고 자료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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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KBS 다큐1에서 재구성한 갑오사변[6]
한자 景福宮占領事件 / 甲午倭亂 / 甲午事變 [국역]
영어 Japanese Occupation of Gyeongbokgung Palace / Battle of Gyeongbokgung Palace

1894년 7월, 청일전쟁을 앞두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과정에서 있었던 조선군과의 전투. 갑오년에 벌어진 변고라 하여 당시에는 갑오사변 혹은 갑오왜란 등으로 통칭되었다. 조선 역사상 4번째이자[8] 병자호란 이후 약 250여년 만에 왕궁이 외적에게 점령당한 대사건이었으나, 이듬해의 을미사변(그 역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수반되었다)의 여파에 의해 상대적으로 대중의 인식에 덜 각인이 된 상태로 남아있다.[9]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은 일본은 김홍집 내각을 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하였고, 조선 내에서 일본군의 자유로운 이동을 확보하며 전쟁을 준비하였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은 고종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 지도부가 친러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2. 배경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생한다. 농민 운동의 기세가 거세져 지방 감영군은 물론 중앙에서 파견한 경군마저 격파하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아산만을 통해 2,800명의 병력을 파병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 사실을 알렸으며, 일본은 일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 조약 조항에 의거하여 8,000명의 병력을 인천으로 파병했다.

정작 양국의 파병 명분으로 쓰였던 동학 농민 혁명은 외국군대가 진주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정과 농민군이 전주 화약을 맺어 평화롭게 사태를 매듭지었다. 농민군이 해산했으니 원칙대로면 청나라와 일본 양측 군대 모두 그대로 철군해야 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동학농민운동은 이제 다 끝났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으나 6월 12일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10],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000명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격해 일부는 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를 진군하였다.

3. 전개

파일:일본군 경복궁.jpg

당시 조선군 경군(京軍)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터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11]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는터라 일본군이 고종을 사로잡을 즈음에서야 경복궁 주변 지역에 전개된 상태였다.[12]

경복궁 기습 점령에 대해 당시 일본은 '경복궁과 그 주변에 있던 조선 군대가 먼저 발포하여' 일본군이 할 수 없이 응전하고 왕궁에 진입했다며 조선 책임설을 주장하였다. 침략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해당 주장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공식 입장이다. # 하지만 딱 한세기 후인 1994년 일본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에서 발견된 일청전사 (日淸戰史)[13]에 의하면 당시 청일전쟁의 구실을 찾던 일본은 조선 정부에 청군 축출을 지시하라며 압박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응하지 않자, 주한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7월 20일 용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에게 경복궁 포위를 제안하였고, 그의 주도로 23일 경복궁 습격이 추진되었다. 정리해보면, 갑오사변은 조선군의 자극으로 벌어진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치밀하게 짜여진 일본의 조선 수뇌부 장악 계획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은 8천 원정군의 절반인 4천 명이었고, 이 중 1천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

3.1. 영추문 전투

7월 23일 0시30분, 전날부터 용산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오토리 케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면서 경복궁 점령 작전이 실행된다.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14], 일본군 공병대가 영추문 폭파에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箕營兵)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첩보에 의하면 한양의 조선군은 대부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어 경복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장위영 및 평양에서 온 기영병 군사들이 궁내에서 일부 야영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서울 각지에 주둔해 있었다.

3.2. 건춘문 전투

같은 시간 반대편인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장위영(壯衛營)이 지키는 광화문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사이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도끼로 부수고[15] 궐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고 만다. 이 때 첩자를 투입해 조선군을 속이는 등 공작을 통해 진입한 일본군 병력이 경복궁 안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조선군이 겁을 먹어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 조선군은 경복궁 안팎에서 아침까지 만만찮게 저항했다.[16] 격전 끝에 오전 7식 경,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3.3. 위조된 칙령과 무장해제

고종이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질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려고 했다. 이에 김가진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면서 조선군의 격렬했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군복을 찢을 정도였다.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부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회선포 8정을 압수했다.

3.4. 대원군의 귀환

경복궁에서 전투가 이어지던 23일 새벽 2시, 일단의 일본군이 운현궁으로 몰려들었다. 그중 일본 공사관의 오카모토와 흥선대원군의 심복 정운봉은 7년여간 은둔하던 대원군에게 '구국'에 나설 것을 청하였다. 고민하던 대원군은 구면인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에게 오토리 공사를 대신하여 조선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낸 후, 재집권에 동의하였다.

날이 밝고, 총성이 잦아들자 대원군은 일본군의 호위 하에 경복궁에 입궁하였다. 하지만 약 20여년 만에 재집권한 대원군은 일본이 민심을 통제하기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하였고, 그를 국정에서 배제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청군과 동학농민군에 밀서를 보내어 항일 연대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다시 실각하였다.[17]

4. 영향

우리는 총소리에 잠이 깼다. 그리고 대궐이 일본군에 점령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들, 조선 사람들 모두 크게 흥분했다. (중략) 신분의 높낮이를 가릴 것 없이 조선 사람들은 엄청난 공포에 빠졌다. 많은 양반들이 자기 집에서 도망쳐 나와 온갖 구실을 붙여 외국 공사관이나 시골로 피난을 떠났다. 평민들은 ‘떼를 지어서 시골로’ 떠났다. 가게란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고, 도시는 마치 돌림병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잔뜩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 여자와 가마, 조랑말의 무거운 행렬이 중앙통을 지나 성문 밖으로 끊임 없이 흘러 나갔다. 어린애들의 애처러운 모습도 숱하게 보였다. 부모들이 매정하게 버렸거나 사람들 속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혼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ㅡ 당시 서울에 있던 릴리어스 호튼 (Lillias Horton)[18]의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 中 [출처]

언더우드 부인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한양은 충격과 공포에 휩쌓였고, 유사 전쟁 분위기 그 자체였다.

5. 그 후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파일:청일전쟁 일본군 성환 전투.jpg
사건 얼마 후 중국에서 발간된 삽화. 고종[20]을 사로잡는 일본군과 성환 전투
일본군은 효창원 일대(효창공원)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둔 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하라는 등 갑오개혁을 하도록 요구하였다.[21] 그리고 8월 26일 조선의 김홍집 내각을 통하여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게 된다. 이는 조선 내 일본군의 활동이 매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한다.

한편 조선군은 무장해제 당하기 전 (일본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일부 무기를 스스로 파괴하였고, 일본군은 압수한 조선군 무기는 연못에 던져버려 고장나게 하였다. 이후 경복궁 수비를 맡게 된 시위대는 이 총기를 건져다가 다시 무장했는데, 이 때문에 다음해 을미사변 때 또 경복궁에 처들어온 일본군과 전투할 때 궁궐을 호위하던 상당수의 시위대의 무기가 격발이 안되는 등 전투력 저하의 원인이 된다.

전투 이후 일본군은 '병력을 진입시켜 궁궐 내에서 함성을 질렀더니 이에 겁을 먹은 조선군이 항복했다.'나 '우리 군이 왕궁에서 조선군을 쫒아냈다' 같은 식의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다. 이 프로파간다는 상당히 잘 먹혔는지 상단의 청나라에서 그려진 삽화도 단지 도망치는 고종과 관리들만이 표현되어 있고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일절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현대 한국의 교과서에도 해당 사건이 고작 '청일전쟁 직전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정도로 언급되어 있는 것의 원인으로도 보인다.

1888년에 설치되었던 일종의 사관학교인 연무공원이 일제의 경복궁 점령 때 총기를 폐기당하여 사실상 폐지되었다.

일본군의 침략은 전라도 각지에서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에 몰두하던 동학 농민군을 자극했고,[22] 동학 농민 혁명 2차 봉기의 발단이 되었다.

6. 명칭 문제

이 사건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을미사변이나 다른 것들과 달리 분명한 명칭이 없어서 "경복궁 전투", "경복궁 쿠데타"나 "경복궁의 변"과 같은 불명확한 용어를 쓰고 있다. 민영환은 1900년에 세운 장충단비에 '갑오사변'(甲午事變)이라 하였고,# 1983년 김경창은 '甲午倭亂 : 甲午,こ未,こ巳,경성의 궁중왜란'이란 책에서 '갑오왜란'(甲午倭亂)을 #[23] 1988년 김상기는 〈甲午義兵의 歷史的 展開와 性格〉이란 논문에서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 칭하였다.# 황태연은 2017년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갑오왜란'이 벌어졌고 이에 반발해 일어난 2차 동학농민운동도 포함한 항일운동이라 저술하였다.# 중앙일보는 2017년 기사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갑오왜란'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왜란이라는 명칭이 중립성이 결여되어 있는 명칭이다 보니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들은 갑오사변, 경복궁 전투등의 명칭을 병행하기도 한다.[24][25]

7. 일본의 은폐 왜곡

위키백과에서 해당 사건이 문서화 되어있는 버전은 영어판 밖에 없으며 한국어판에서는 청일전쟁 문서에 잠깐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워낙 당시 일본군의 선전으로 왜곡된 사건이기도 하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워낙 알려지지 않는 사건이다. 보니 어느 매체에서나 그냥 전투가 있었다는 언급도 없이 그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정도만 언급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일본학자 나카스카 아키라는 1997년에 낸 책 ‘역사의 위조를 밝힌다'에서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작성한 일청전사 초안을 발굴하였고, 경복궁 점령 작전을 은폐할 목적으로 일본이 명치이십칠팔년일청전사를 왜곡하여 편찬했다고 폭로하였다.[26]

그 동안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에 따라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하였다.

8. 대중 매체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인데다 뚜렷한 명칭도 만들어지지 않은 사건이다 보니,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다루는 매체는 많지 않다. 다만 사극으로 다루기에 매우 좋은 소재이기에, 향후 직접적으로 다루어질 여지가 많다.

가장 최근 매체로는 동학 농민 혁명을 다루는 드라마인 녹두꽃이 있는데 생소한 사건을 다룬 것과는 별개로 지나친 조선군 띄어주기로 보이는 실망스러운 연출이 몇 있다. 싸우는 도중에 정말 뜬금없이 주걱몽둥이를 들고 전투에 난입하는 궁녀들과 신하들, 그리고 낫과 농기구를 들고 궐 안으로 들어온 백성들 등 고증과 현실성이 아닌 조선인들이 용감하다는 것을 억지로 어필하는 식으로만 연출했다는 비판이 있다.[27] 다만 그 외의 연출과 처절하게 싸우는 조선군의 모습은 잘 표현했고 무엇보다 해당 사건을 다룬 몇 안되는 사극이기에 더욱 주목받았다.#1, #2, #3, #4

대체역사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시작 시점이 딱 이 시점이며 여기선 원역사보다 조선군이 잘 버텨서 일본군의 피해가 커졌으며 그로 인해 화포까지 동원해야 했을 정도였고 그걸 또 일본인 종군기자가 사진을 찍은 뒤 조선측에 사진을 넘겨주면서 조선측에서 이를 약점으로 잡아 군사개혁에 딴지를 못걸게 만든다.

9. 참고 자료

  • 저서
    • <1894년,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박맹수 역, 2002)
  • 논문
    • <1894년 일본군의 조선왕궁(경복궁) 점령에 대한 재검토> (조재곤, 2016)
  • 기고문

10. 관련 문서




[1] 궁내 전투는 7시경까지, 궁외 전투는 오후 2시까지[2] 주조선 일본 공사[3]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고조부[4] 그중 직접 전투에 동원된 이는 1천여명[5] 속방지위를 폐기하고 청일전쟁 시에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동맹 협정. 조선은 기존에 청나라의 속방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주선으로 각국과 수교를 맺었으나 동맹을 맺을 수는 없었다.[6] 영상의 1분 8초에서 내레이션이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을 '후쿠오카 현립 도서관'으로 잘못 말하는 오류가 있다. 영상에 등장하는 도서관은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이 맞다.[국역] 경복궁점령사건 / 갑오왜란 / 갑오사변[8]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어 4번째[9] 교과서에서도 언급이 돼 봤자 그냥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는 사건이 있었다.'정도만 언급되어 있지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10] 제9 혼성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으로 아베 신조일본 총리의 외고조부다.[11] 장위영(壯衛營)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중앙군이였던 친군영 중 전영과 좌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의 방위를 맡았고, 통위영(統衛營)은 친군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 및 수도권을 위수지역으로 하였으며, 경리청(經理廳)은 통위영에서 구 총융청 병력이 분리되어 창설된 부대로 북한산성 일대에 주둔하였다. 기영(箕營)은 평안감영을 지칭하는 것인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경군이 이동하자 정예인 평양 군대가 임시로 한양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12] 결국 경리청(經理廳) 병사들은 일본군과 교전도 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한다.[13] 당시 일본군 육군참모부 제작[14] 정문인 광화문에서 진입이 시도되었다면 경복궁의 배치도상 약간 북쪽에 위치하는 침전의 왕이 도망갈 시간을 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15] 혹은 폭파시키고[16] 애초에 일본 쪽 기록에서 조선군을 그냥 쫓아냈다고 기록된 문서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 측에서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거짓 기록한 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7] 그후 이듬해 을미사변 때에 대원군은 재차 일본군의 얼굴마담으로써 형식적으로 재집권했으나 역시나 곧 밀려났고, 이것이 그의 4번째이자 마지막 집권이었다.[18]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의 부인[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08[20] 좌측 하단에 묘사됨[21]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을 자신들의 속방으로 규정했다. 이는 나중에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나온 조선의 독립국 문제에 대한 명시에서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독립을 한 이유도 조선에서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많은 수의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 말에 속아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을 응원했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22] 1차 봉기 당시 남접에 적대적이었던 북접마저 2차 봉기에서는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했다.[23] "こ未,こ巳"는 아마도 "乙未(을미), 乙巳(을사)"가 OCR 과정에서 잘못 인식되어 등재된 제목으로 보인다.[24] 반대로, 역사를 중립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 (극단적, 궁극적인 면에서) '반민족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무분별한 중립성이 도리어 당대의 시각 및 시대정신을 해칠 수 있는데 같은 논리라면 병자호란은 '2차 조청전쟁' 정도가 되어야 겠으나 이 부분은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멸의 이순신 때는 자막이나 내레이션으로 모두 '임진왜란' 대신 '조일전쟁'이라는 명칭을 써, 여론이 불탄 바 있다. 충분한 논의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 올바름으로 제호(題號)를 바꾸는 것은 오히려 반감을 키울 수 있다는 반증인 셈.[25] 다만 '임진왜란'이라는 명칭은 '타국에 대한 존중'이란 인식이 크게 없었던 전근대에 작명된 명칭인데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고정적인 명칭으로 인식되어서 그런 논란이 있는 것이지만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아직은 학계에서 정해진 명칭이 없으며,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사관 역시 자국중심주의적 해석으로 타 국가를 폄하한다는 비판을 받기에 해당 사건이 학계에서 집중적으로 주목을 받고 학계에서 인정받는 공식적인 명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26] 9쪽 #[27] 또한 작중에서 백성들이 일본군에게 항의하거나 통곡하는 장면과 그대로 의병을 일으켜서 전투에 난입하는 장면도 현실성 제로, 상술한 미 선교사 아내의 증언 부분에도 나와있듯이 당시 한양 전체가 전시 상황급이였으므로 한성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일본군에게 항의는 커녕 짐싸들고 지방으로 피난떠나기 바빴다. 즉 앞서 말한 주걱과 몽둥이들 들고 난입하는 궁녀와 관리들 처럼 '일제에 맞서는 용감한 조선 백성들'을 보여주기 위한 애국주의성 왜곡 연출이다. 다만 이러한 '일제에게 항의하는 민중' 연출은 타 사극 매체에서도 출기차게 써온 연출이라 그나마 쉴드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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