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22:55:38

집강소

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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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구조4. 해산

1. 개요

執綱所
동학 농민 혁명에서 동학농민군이 설치한 자치기구.

2. 배경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한 농민들은 동학 접주 전봉준의 주도로 봉기하였다. 조정은 조병갑을 구금하고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는 등 민심 수습에 나섰지만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자를 체포하는 등 민심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기름에 불을 부어버리자 농민들은 백산이서 다시 봉기하여 황토현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전라 감영군과 경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고 호남의 중심인 전주부성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전라도를 장악한 농민군은 점령지의 통치를 위해 동학의 간부인 접주(接主)나 접사(接司)를 두었는데 이것이 집강소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정신차리고 반격에 나서자 농민군은 완산 전투에서 패배했고 전주성 내에서 꼼짝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고종도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가 톈진 조약으로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진주하여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만다. 결국 최대한 빨리 봉기를 수습해야 한다는 목적이 일치한 양측은 1894년 5월 전주 화약을 맺어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지었다.

전주 화약을 맺은 농민군은 스스로 해산하고 전주성에서 퇴거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기를 놓지 않았고 경군 대부분이 서울로 철수하면서 전라도는 여전히 농민군의 손아귀에 있었다. 여기에 정부가 폐정개혁을 외면하면서 불만에 찬 농민군은 5월 무렵부터 스스로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시작했다.

6월 15일 전봉준과 김개남은 남원에서 대회를 열어 각 고을에게 도소를 설치하고, 농민군 중에 집강을 임명하여 지역을 통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집강소는 더더욱 확산되어 나주 등을 제외한 전라도 53개 고을에 집강소가 들어섰다. 그리고 1894년 7월 6일 신임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 하에 집강소 설치를 합의하면서 집강소는 공인받은 조직이 되었다.

3. 구조

집강소는 동학 농민 운동의 발생지였던 전라도에 주로 설치되었으며,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로 나뉘었다. 전라우도의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라 할 수 있는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전봉준이 통솔했으며 전라좌도에는 남원에 근거지를 두고 김개남이 통솔하였다. 그 이하 전라도 53개 주읍의 관아 내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집행기관, 의사기관, 호위군, 방조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역할 및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 집행기관: 집강소의 행정부라고 부를 수 있는 기관이자 집강소의 핵심이다.
    • 집강(執綱): 집행기관의 수장이자 집강소의 수장. 주로 동학의 접주 중에서 임명되었다.
    • 서기: 집강소의 서류업무를 담당하며 집강의 비서 역할도 수행한다.
    • 성찰(省察),: 치안을 유지하고 기율을 바로잡으며, 탐관오리나 부호, 양반들을 조사하고 체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 집사(執事): 집강소의 행정과 공사를 관리하며 대민업무도 수행한다.
    • 동몽(童蒙): 집강소 사이를 연락하는 전령이자 집강소 간부의 경호업무를 수행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청소년 중에서 뽑혔다.
  • 의사기관: 집강소의 전체 총회. 집강 단독으로 처리하여 민의에 동떨어진 정책을 내놓거나 독재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의사기관에서 토론과 검토를 통해 정책이 결정되었으며, 주로 구두 의결로 결정되었다.
  • 호위군: 집강소의 무력조직.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이 귀향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렇기에 농민군 조직을 집강소의 호위군으로 부릴 수 있었다.
  • 방조기관: 기존에 지방을 통치하던 관아. 집강소 설치 후 각 지역의 관아들은 집강소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했다. 군수나 현감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관아에서 일하던 서리들은 동학에 입교해야 계속 일할 수 있었다.

4. 해산

농민군은 집강소를 기반으로 폐정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동학에 적대적인 양반들은 민보군이라는 이름의 의병을 조직하여 동학에 저항했다. 그 결과 나주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2차 봉기가 발발하자 집강소는 농민군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이용되었다. 하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전봉준이 패배하면서 2차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자연스럽게 집강소 또한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