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3:43:12

삼정의 문란



1. 개요2. 배경
2.1. 조세의 전세화2.2. 조세의 중앙집권화2.3. 도결(都結)의 발생
3. 삼정의 종류
3.1. 전정(田政)3.2. 군정(軍政)3.3. 환곡(還穀)
4. 이후5. 타국의 경우


三政의 紊亂

1. 개요

군정(軍政)·적정(糴政)[1]·전정(田政)의 3정(三政)은 국가에 있어서의 대정(大政)인데, 현재 3정(三政)이 모두 병들어서 민생(民生)이 고달프고 초췌해졌다.
철종실록 4권, 철종 3년 10월 22일
19세기 조선 왕조에는 국가 재정 수입의 3대 요소로 전(田政)·군(軍政)·환(還政)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삼정이라고 하고 삼정의 문란이란 바로 이 제도가 문란해져 올바르게 운용되지 않았던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상술한 환정, 즉 환곡(還穀)은 조세 제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였던 데다 환곡의 부정부패도 전정, 군정의 부정부패와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당대부터 삼정의 문란이라고 묶여서 불렸다.

2. 배경

2.1. 조세의 전세화

세도정치 시기에 발생한 문제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맥락을 따져보면 조선 중기부터 있었던 정치 변동과도 큰 관련이 있다.

첫째로 세금이 전세로 통합, 일원화되는 경향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 세금은 당나라 시대의 세법인 조용조(租庸調)가 원칙이라 조(租)에 해당하는 전세, 용(庸)에 해당하는 역, 조(調)에 해당하는 공납이 핵심이었다. 전세는 말 그대로 토지에 할당된 세금이고 역은 요역과 군역이며, 공납은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현물세였다.

조선 전기의 전세에 대한 법률은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으로,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눠 전세를 걷는 것으로 일종의 정률제 세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정이 매해 농사 풍흉을 조사하기 번거로워서 조사관 파견을 관두고 지방에 알아서 신고하게 했는데 무조건 하중하, 즉 농사 상태가 최악이라고 보고하는 일이 생긴다. 중앙 역시 나름대로 비축곡이 유지되는 정도의 재정수입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인데, 제대로 걷으려고 해봤자 조창도 부실하고 규모가 부족했고, 국영 조운 제도가 나날히 쇠락하는 상황이라서 나를 수도 없는지라 그에 만족했다. 15세기 후반 성종 시기부터 이것이 관습으로 만연했고, 중앙에서 필요에 따라 풍흉 등급을 상향 조정하는 것이 일반화된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로 그냥 하중하로 고정하는 영정법이 시행되었다. 이걸 보완하기 위해 훈련도감의 운영경비 명목으로 거두던 삼수미를 상설 세금화하였다.

그리고 용(庸)인 역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번상병이라고 하여 실제로 군복무를 하는 농민 출신 징집병 정병(正兵) 1명이 2개월 동안 근무하는 것을 8교대로 하고 그 동안 생계를 보인(保人)이 납부하는 군포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계를 위해 보인이 군포를 대준다지만 사실 농사는 2개월 빠지면 망하기 십상이고 복무하기 위해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결국 정병들도 그냥 자기가 받은 군포를 다른 사람에게 지불하고 자기 역도 빠지고 한명이 여러명 분량의 복무를 해서 직업군인처럼 복무하는게 흔한 일이 되었다. 이것을 알아챈 실무자들이 그냥 백성들에게 군포를 받아 재정을 채우고 그 돈으로 병사를 고용하는 방군수포제가 실무에서의 관습으로 자리잡았고, 조선 후기에는 아예 공식화되어 군역은 군포를 의미하게 된다.

또한 공납은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베 아니면 쌀, 그것도 아니면 돈으로 납부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결국 백성들이 나라에 내는 세금 수단은 쌀, 포, 돈 3가지가 된 셈이다.

2.2. 조세의 중앙집권화

둘째로는 조세의 중앙집권화였다. 조세가 미곡으로 통합되자 비총법이 시행되었다. 비총법은 세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각 지방에 할당하는 세법이다.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공납과 부역이 전세에 통합되자 세수를 정확히 액수화해서 운용하는 제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한 혁신처럼 들리고, 이전 시대에 비해서는 혁신이 맞지만 사실 실제 시행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은 조선시대 내내 유지된 지방분권적 재정구조였다. 현대인들은 중앙 정부에서 세금을 걷고 그 예산을 중앙 정부에서 결정하고 그 돈을 각 국가기관에 분급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운송수단과 통신수단의 한계로 인해 지방 관아가 각자 세금을 걷어서 중앙 정부에 보냈고, 지방 관아는 관아에 딸린 토지나 중앙 정부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일부 잡세를 토대로 알아서 예산을 마련하는, 수조권을 각 관아에 지급하는 분권적인 구조였다. 어찌보면 영주가 아니라 관아가 존재하는 봉건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이 독특한 구조 때문에 어떤 학자는 '조세가 봉건적인 중앙집권 관료제' 라고 평하기도 한다.

지방 관아는 수령의 녹봉을 충당하는 용도였던 아록전, 지방으로 파견가는 관원들의 판공비 재원인 공수전, 지방 관아의 경비를 책임지는 관둔전이라는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주진, 거진, 제진같은 군사조직 관아, 즉 군문은 관둔전만 지급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면세지였으며 관아에 딸린 관노비를 부려 경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근처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거나 백성들에게 부역의 일환으로 경작시키게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나마 백성들의 반발로 백성들에게 토지를 빌려줘서 병작, 즉 반반으로 나눠 가지곤 했다. 이러한 관둔전은 수령, 군문의 지휘관들이 사유화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이후 전란으로 줄어든 관청 재원 조달 목적과 오군영같은 군영의 신설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중앙 관아와 여러 지방 관아들은 관둔전과 군적을 가지고 경쟁(...)하게 되었고, 아예 관둔전과 군적을 늘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금을 내리는 괴이한 상황도 연출된다. 이게 또 백성에게 혜택으로 적용되냐하면 그것도 아닌게, 중앙 조정이 딱히 세율을 안 정하고 필요에 따라 걷는 공납과 부역이 존재했기 때문에 전세와 군포에서 빵꾸난 재정은 그냥 공납과 부역으로 중앙이 충당해서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되었다. 공납과 부역 자체가 현물과 노동이다보니 일정한 액수를 측정하기 어렵긴 한데 연구에 따라서는 명종 시기 쯤엔 중앙 재정의 60% 정도를 공납으로 때운 것으로 본다.

이러한 공납은 폐해가 심해 결국 임진왜란 이후 공납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한다. 대동법을 통해 조세가 전세로 통합되자 행정 소모도 줄이고 재정도 일정하게 확보하려는 취지에서 왕권이 강력했던 숙종이 비총법을 시행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관둔전이나 궁방전같은 면세전이 늘어나고, 지주와 이서층의 반발로 양전 사업이 오래동안 진행되지 않아 황무지가 되거나 부정과 불법으로 조세부과 대상에서 누락되는 토지가 늘어났다. 이로 인해 재정에 문제가 생기자 숙종이 비총법을 실시하여 중앙에서 세수 총액을 미리 정하고 각 지방에서 신고된 결수에 따라 각 지방에 비례 할당을 하는 방식으로 바꾼다. 이러면 각 지방 관아들이 비례 할당한대로 그대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실무에서는 기존의 각 관아가 관둔전이나 군포로 얻은 '적법한' 세액 중 상당수가 그대로 중앙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관아들이 돈이 어디서 튀어나와서 지방 행정을 굴릴 수 있는건 아니라, 어디서라도 벌충해야 했다. 그 결과 지방 관아들은 각종 잡세를 신설해서 백성들에게 전가했다.

2.3. 도결(都結)의 발생

이렇듯 조선의 재정 구조는 초기의 지방분권적인 것이 점점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결국 마지막까지도 조세와 재정의 중앙집권이 완료되지 않은 어중간한 상태였으며, 중앙집권이 계속되어도 중앙은 지방에 예산을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못했고, 지방은 중앙에게 납부하고 나면 도저히 남는게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것과, 흔적처럼 남은 지방 관아의 재량권이었다. 한마디로 중앙에 다 뜯겨서 돈이 없던 지방 관아들이 '재량권'을 발휘해서 백성들을 삥뜯기 시작했다는 것.

이 재량권 역시 조선 후기에 발생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렸다. 위에서 말한대로 조세가 전부 전세로 통합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자 지방관아들은 '그럼 그냥 토지에 돈으로 세금을 물리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발상으로 지방관아들이 수조 실무에서 시행한 관습이 도결(都結)이다.

결 단위로 동전을 납부하게 한 도결은 초기에는 농민들에게도 환영받았다. 편리하기도 했거니와 땅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 조세 부담이 크고, 땅이 없는 소작농들은 보통은 도시에 작물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는것 자체가 불가능해서 지주들에게 조세 부담이 가서 매우 공정한 세금으로 보였다.

지방관아 역시 이득이었는데, 현대인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지만 돈과 곡물은 원래, 특히 전근대에는 계절마다 서로의 가격변동이 어마어마했다. 도시와 농촌의 곡가도 수송비용이나 구매력의 차이 때문에 가격차가 상당했다. 관아들은 이 가격차를 이용해서 돈으로 받은 세금을 쌀 값이 싼 곳에서 싼 때에 사서 중앙에 납부하면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철종 시기에는 이미 전세라는 말이 곧 도결을 뜻할 정도로 정착해 있었다. 기존의 현물 납세 제도에서 금납 조세로 변경된 것이고, 실제로 현대 사학에서도 어떤면에서는 조세 금납화가 진전되어 화폐경제 수준이 심화되었고 재정의 근대성 요소가 늘어났다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식화되지 않은 제도이다보니 또 폐단이 발생했다.

가장 단순한 원인은 각 지역마다 결 당 납부하는 도결가가 크게 차이났으며, 갈수록 그 도결가가 올랐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7∼8냥 정도의 도결가가 20여 냥 혹은 그 이상이 되었다. 쌀의 가격차를 이용한 차익 남기기도 심화되었다. 농촌보다 도시의 쌀값이 비싼걸 이용해 도시의 쌀값으로 도결가를 책정했다. 또 도결의 목적이 '돈으로 받은 다음 그 돈으로 쌀 사서 중앙에 보내기' 였던 만큼, 흉년이 들면 쌀 값이 오르는 것을 이용하여 그 오른 쌀값으로 도결가를 책정하여 더욱 비싸게 받았다. 흉년에 더 세부담이 커지는 괴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비총법은 군현에서도 동리, 즉 마을 단위로 할당하여 거뒀기 때문에, 백성이 토지에서 이탈하거나 사망하는 일이 있어도 과세가 소멸하지 않고 주변인들에게 이중 삼중의 과세로 들러붙었다. 한 농민이 도망치면 인근 네 가구(오가 작통법)에게 징세하고, 이를 버티지 못한 농민들이 이탈해서 결국 다섯 가구 내의 인원이 다 이탈하면 친척을 찾아가고, 그 친척도 못 견디고 이탈하고, 다시 그 이웃으로 번지는 식의 도미노가 반복되었다.

3. 삼정의 종류

3.1. 전정(田政)

전세, 즉 농사짓는 땅에 매기는 토지세를 말한다.

대개의 경우 전세를 말한다면 토지 1결당 매기는 세금 20.2두[2]를 칭한다.

엄밀히 말하여 토지세는 농민의 부담이 아니고 지주의 부담이다. 현대 사회에서처럼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자기 세금을 전가하는 문제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으나 원칙적으로 전세의 부과 대상은 지주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나는 시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부동산 세제에서 세입자에게 세액이 전가되는 현상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행정 실무는 세액을 동리별로 할당한 뒤 아전과 향리들이 징세 실무를 담당하는 구조라 향리 아전들은 당연히 강약약강의 처세로 지역의 권세가들에게서는 전세를 걷지 않고 농민들에게서는 수취하는 행태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조선의 대응은 면세 토지를 줄이고, 토지 조사를 통해 실제 경작 토지(起田, 기전)과 황폐화 된 토지(陳田, 진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반복했을 뿐으로, 일견 현대인들에게도 합리적으로 보이고 조선인들이 당대에 알던 지식 범위에서는 유일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기했듯이 납세 실무 관행인 비총법과 도결이 존재하여, 국가 필요에 따라 세율이 날뛰기 하는 상황과 중간 납세 실무진들이 차익을 얻는 등 구조적 문제가 있는 한 양전을 해봤자 백성들의 세부담을 줄이고 공정히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양전조차도 지주와 이서층의 반발로 인해 1720년 숙종의 마지막 양전 이후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제대로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 이후 한반도의 전국적인 첫 토지조사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였다.
  • 백지징세(白地徵稅): 토지가 없는데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여 세금을 걷거나 세(稅)를 부과할 수 없는 황폐한 진전(陳田)에 대해서 과세하는 것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진결(陳結): 백지징세의 일종. 진결의 '진'은 황무지를 뜻하는 것인데 말 그대로 황무지에다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경작하지 않고 놀고 있는 땅에 세금을 걷는 것도 역시 진결에 해당한다.
  • 은결(隱結): 양안(量案: 토지 대장)에 양전(量田)을 실시할 때 비옥한 전답의 일부를 원장부에서 누락시켜 그 조세를 빼돌리는 것이고, 비슷한 것으로 여결(餘結)이란 것이 있는데 그냥 합쳐서 은결이라고 불렀다.

3.2. 군정(軍政)

군역을 지지 않는 16세 ~ 60세의 남성들이 내는 군포(조세 제도)(軍布)를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군역은 실제 군복무를 하는 사람(번상병番上兵)의 급여를, 실제 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보인保人)에게서 포를 수취하여 지급하는 것으로 나눠져 있었다. 하지만 초기부터 다들 실제 군복무는 정말 하기 싫어했는데 그도 그럴게 여진이나 왜구가 쳐들어오는 최전방을 빼면 군인을 거의 대부분 수령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노동력 취급해서 부역과 노역에 동원하는 데만 썼기 때문이다. 군역이 사실상의 노역화 된 수준이었다. 현대 한국군도 작업이 태반이라고 하지만 진지공사나 장비점검 등 전투랑 관련이 있는 작업인데 조선은 그런 것도 없이 무기가 녹슬고 갑옷의 찰을 빼돌려 팔아먹는 지경이었다. 이런 기강 문란은 조선군의 약체화에도 동시에 기여했다. 조선보다 2천년 전에 쓰인 손자병법에도 병졸을 노역에 쓰지 말라고 하는데...하여간 이 때문에 번상병조차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 그 사람에게 포를 주고 대신 복무를 시키는 관습(대립,代立)이 퍼진다. 그리고 이 대립조차 한명이 투잡 쓰리잡을 뛰면서 조선 중기 무렵부터 장부 상의 군인만 많고 실제 병력은 대립을 서는 소수만 남아버리자, 국가가 아예 대립을 제도화하여 대역납포제를 시행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거치고 영조 무렵에 5군영이 설치되어 병사들은 실질적으로 거의 다 이러한 직업군인으로 변했고, 대부분의 백성들의 군역은 군포 납부로 변한다. 이러한 군포는 군영마다 달랐으나 숙종 때 보인 1명 당 2필로 고정되었다. 이것도 영조 시기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어 기존 1년에 2필의 군포를 걷던 것을 1년에 1필, 즉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왕실[3], 지주[4], 상류층[5]이 보충하는 형태로 바꾸는 동시에, 결작이라고 하여 밭에 결 당 2말을 징수하는 것으로 바꾼다.

이렇게 군역이 대체가 되었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군복무는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드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보니 다양한 수단으로 군역을 피해서 군역에 대한 대체 세금도 피하려고 했다. 향교에 등록하는 방법, 서원에 원생으로 들어가는 것, 향직(鄕職)을 맡는 것, 향안(鄕案)에 올라 면역하는 방법, 아전들의 계방촌(契房村)에 등록하는 법 등 다양했다.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궁방전이나 관둔전에 투탁하기도 했고, 지방의 아문도 군포가 필요하다며 자기들 앞에 군적을 돌려놓고는 했는데 이런 지방 아문들이 군포를 더 싸게 할당했기 때문에 지방 아문 앞으로 군적을 등록하기도 했다.

그래도 상놈이 서원 앞에 학생으로 등록하긴 쉽지 않을테니 이런 꼼수로 인한 조세회피는 적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서원은 그 회피된 군포를 자기들 앞에 대신 내라고 주장하는게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에 서원이 직접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기들 앞의 학생으로 등록해놨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조선 후기에 양반의 수가 인구의 70% 에 달했다고 서술한 글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제 양반 수가 아니라 이러한 꼼수로 유학호로 등록된 수를 다 양반으로 쳐서 나온 집계다. 즉, 조선의 느슨한 인구 집계로조차 30% 가 군역을 부담하고 70% 는 군역을 빠졌다. 군역을 지고 군포를 내는게 병신이었던 수준이다. 이렇게하여 군적에 등록 된 인구 수는 조선 후기 장부상 700만 인구 중 100만에 불과했고[6] 실제 병사 수는 2만 5천에 불과했다.

이렇게 세금으로 대체된 군역들 역시 비총법이 적용되어 징세되었다. 또 위에 말했듯 숙종 이후로 비총법을 통한 수취에서 더 이상 장부 상의 세수를 줄이지 않기로 결의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농민의 도망이나 탈세로 인해 걷을 대상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징세 대상자들에게 없는 군필을 걷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수령들은 장부 상의 조세를 걷지 못하면 평가가 깎였기 때문에 별 희한한 방법을 통해서 군포를 걷어야 했다. 결국 이런 폐단은 순조 이후 세도정치 시기에 극에 달하게 된다. 군정에서 나타난 폐단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백골징포(白骨徵布): 백골이란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을 뜻한다. 죽은 사람은 당연히 군역을 질 수가 없지만 사망자의 호적에서 사망 사실을 고의로 누락하고 계속 산 사람처럼 꾸며서 군포를 징수했다.
  • 황구첨정(黃口簽丁): 황구(黃口)는 어린이를 말하는데[7][8] 앞서 말했듯이 군역을 지는 대상은 정(丁) 즉, 16~60세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16세가 안 된 어린이의 나이를 허위로 올려서 16세 이상의 정으로 만들어 군포를 징수하였다.
  • 강년채(降年債): 위에서 언급한 황구첨정과는 반대 개념이다. 군역을 지는 대상은 16~60세 남성들이므로 60세를 초과한 노인들 역시 군역 대상이 아니므로 군포 징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60세를 초과한 노인들의 나이를 억지로 내려서 60세 이하의 정으로 만들어 군포를 징수하였다.
  • 족징(族徵): 만약 납세자가 이것을 못 버티고 도망칠 경우 연좌제를 적용하여 친척이 대신 내도록 하는 것이다. 친족이 대신 납부하도록 했다고 하여 족징이라고 부른다.
  • 인징(隣徵): 당시 조선 사회는 5가구를 묶어서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는데 만약 한 가구가 도망칠 경우 다른 4가구에게 감시를 똑바로 못한 책임을 물어서 그 도망자 가정의 과세분까지 몽땅 떠넘겨 대신 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웃이 대신 납부하도록 하였다 하여 인징이라고 부른다.
  • 이 외에도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정약용목민심서에서는 딸을 아들로 서류를 위조해서 징수하거나,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곡식을 찧는 절구를 사람이름으로 올려서 징수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내용이 정약용의 주작이 아니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폐단들은 당시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부담이자 고통이 되었다. 농민들은 한겨울에 집안에 불을 때지도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한 채로 서로가 부둥켜 안으며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9], 당시의 군포 부담을 견디지 못한 가장이 자신의 그것자르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에 묘사되어 있다.

3.3. 환곡(還穀)

환곡이 흔히 구휼제도라고 말은 하고 실제로 그런 목적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목적은 곡식(穀)을 갈이(還)하는 것이다. 관아들이 군량미 건 재정 목적이건 쌓아두고 있는 쌀을 계속 내버려두면 썩기만 하니 오래된 쌀을 갈이할겸 백성들에게 뿌리고 새로 채워넣으면 구휼 겸 쌀 관리가 된다. 이런 목적 상 초기부터 토지를 보유해서 쌀을 갚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백성들에게만 환곡을 줬는데다가 풍흉이랑 관계 없이 오래된 쌀이면 안 받겠다는 사람들에게도 강제 할당해서 방출했기 때문에 구휼이 온전히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환곡은 조선 초기부터 지방 재정 상의 이득을 위해 운용된 면들이 여럿 있다. 세종 시절부터 쌀로 갚기 어려우면 베, 구리 등으로 납부하게 했고, 나중에는 그걸 선불로 내야 환곡을 지급했다. 한마디로 세종 시절부터 이미 그냥 쌀을 파는 행위(...)로 변해 있던 것. 또 세조 시절에는 빌려준 환곡에 이자를 붙여 받는 취모법이 시행된다.

이러다가 16세기 중엽 명종 때 중앙재정이 파토가 나자 각 지방 관아에서 운영하던 환곡에서 취식한 10분의 1을 호조에 회록(會錄: 국가 회계에 편입시키는 것)하는 일분모회록 제도가 제정되었다. 이게 좋게 말하면 위에서 말한 지방 재정의 중앙 편입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돈이 없어서 지방 관아 재정을 삥 뜯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왜란과 호란을 치르면서 재정이 극도로 어렵게 된 17, 18세기에 이르러 더욱 확산되어갔고, 결국 환곡은 세금에 준하게 된다.

또 부세화되어가자, 해마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서 강제로 대여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환곡의 운영은 정약용이 “국가 재용의 절반은 부세에 의존하고, 나머지 절반은 환자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로 구빈·구휼보다는 세입에 치중하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관아에 실제로 보관된 쌀은 하나도 없고 전부 대출상태로 돌려 장부상으로만 쌀이 존재하는 상태가 만성적이게 된다.

또 환곡의 이익이 점점 국가 재정으로 뺏기는데 중앙은 지방관아로 예산을 따로 분급하지 않았던 조선의 재정구조 상, 지방 관아들은 자체 운영비 조달을 위해 환곡을 더욱 강력하게 돌리게 된다. 환곡의 문란은 이런 점에서 생겨난다. 환곡에서 나타난 폐단은 세 문란 중 가장 심각했는데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늑대(勒貸): 환곡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곡식을 빌려주는 것을 뜻한다. 형편이 어느 정도 나아서 안 빌리려는 경우 혹은 '차라리 그냥 굶어죽을란다.' 하는 마음으로 안 빌리려는 경우 이런 것들 모두 막론하고 그냥 강제로 곡식을 떠넘기거나 빌릴 때까지 죄인으로 몰아 고문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놓고 받아낼 건 다 받아챙겼다. 몇몇 기록에선 험한 꼴 안볼려고 그냥 이자에 해당하는 곡식을 세금처럼 내는 경우도 있었다.
  • 장리(長利): 사실 본래 환곡은 곤궁한 농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시행된 복지제도였기 때문에 처음엔 이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상평창에서 담당하면서 이자를 조금씩 받기 시작하였다. 환곡을 되받을 때 붙이는 모곡은, 처음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에 2할(20%, 연리 40%)였고, 조선 후기에는 6개월에 1할(10%, 연리 20%)였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점점 조선 사회가 부패해지면서 탐관오리들은 제멋대로 이율을 올려버렸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1/5, 1/3로 올리다가 급기야 말기에 가면 이자를 6개월에 5할(50%, 연리 100%) 이상으로 걷어가기까지 했는데 이 경우를 장리라고 불렀다. 환곡의 폐단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부류이다.
  • 분석(分石): 빌려주는 곡식에다 쌀겨, 모래, 등을 섞어서 주거나 물로 불려서 양을 속이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농민 A가 환곡으로 쌀 1섬을 대출받았다고 치면 실제 포대 안에 들어가 있는 쌀 양은 반 섬밖에 안 되고 나머지 반 섬은 쌀겨, 모래, 돌 등이었다는 식이다. 사실 이건 환곡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횡령의 방법 중 하나인데 이 분석의 행태가 제대로 터진게 조선후기 왕조몰락의 시발점인 임오군란이다. 그 때에도 13개월 치 봉급을 체불한 후에 겨우 1달 치 봉급을 주었는데 그 봉급으로 나온 쌀에 모래와 쌀겨 등이 잔뜩 섞여 있었다.
  • 번작(反作)[10]: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역시 분식회계의 일종인데 분식회계 사실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실물과 맞아야 하는 법이므로 역시 그 차액분을 농민들에게 억지로 징수하였다. 그리하여 그 농민이 곡식을 안 꾸어먹었는데도 곡식을 꾸어먹은 것으로 날조하여 걷어내기도 했고 빌린 양을 날조하여 걷어내기도 하였다. 이 형태를 번작이라고 부른다.
  • 허류(虛留): 전임(前任) 관리나 지방의 아전이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 착복하고 장부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기재하여 후임 관리에게 인계하는 것을 말한다. 국법에는 이러한 경우 엄격히 처벌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허위 문서의 작성자와 인수자가 서로 공모하여 은폐시켜서 환곡의 폐단은 국가 재정의 궁핍화를 가속화시켰다. 위의 반작과 차이점은 반작의 경우는 장부 조작이긴 한데 그건 '환곡 출납 대장'을 조작한 것이고 이것은 창고 내 보관 중인 장부를 조작한 것을 말한다.

4. 이후

파일:철종-고종기 농민 봉기.png
철종~고종기의 농민 봉기를 나타낸 지도.

결국 삼정의 문란을 참지 못한 백성들은 폭발하여 농민 봉기에 가담하거나 도적의 무리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어영부영 계속 방치된 삼정의 문란은 조선 후기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홍경래의 난과 진주 민란으로 대표되는 임술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어서 조선은 급속히 막장으로 달리게 된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철종 대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 만들어져 환곡을 전정으로 대체하여 걷자는 결론을 냈다. 하지만 당시 관례상 환곡에서 나는 이득은 지방관아의 아전과 수령이 성과급으로 나눠먹는 구조였고, 각 지방 관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민란이 대충 가라앉자 결국 현상유지를 내세웠다. 삼정이정청 자체가 임시 관청으로 만든거라 3개월만 운영되고 폐지된 탓에 해결이 될리가 없었으며 진주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지속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와서야 겨우 적극적인 시정이 이루어졌는데, 양전사업으로 은결(隱結)[11]을 색출하면서 전정을, 호포제(戶布制)[12]를 실시하면서 군정을, 마을 단위로 주민이 관리하는 사창제(社倉制)[13]로 되돌리면서 환곡을 해결하여 그나마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당백전으로 전부 개박살이 나 조선의 재정은 그 뒤로 망할 때까지 정상화되지 않았다. 결국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부터는 수령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처단하기 시작한다. 조선 정부 또한 주동자를 처형하고 대충 정리했던 이전과 달리 대량학살을 감수하고 양반들의 무차별적인 보복을 묵인하는 등 무자비한 진압을 벌였으나 결국 떠나간 민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 삼정의 문란이 정말로 끝난 것은 조선이 근대적 개혁을 시작한 갑오개혁이 되어서야의 일로, 모든 세금을 금납화하고 조세법정주의가 시행되었으며 환곡은 그냥 폐지하고 전세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전결의 파악은 여전히 미진하였으며, 개혁의 성과가 다 나타나기도 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휩쓸린 조선은 일본에 병탄되어 멸망한다.

5. 타국의 경우

삼정의 문란은 조세 제도가 구조적 한계를 마주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폐단을 보여준다. 세계 어느 나라나 이러한 조세 제도의 한계가 존재했는데, 비슷한 시기 일본프랑스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특정 계급과도한 조세 부담에 시달렸다.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근대국가의 틀을 만들고 19세기 동안 군림한 주요 열강 국가이며, 일본은 19세기에 비서양 국가 중 유일하게 산업화를 달성한 국가로써 조선과 비교하여 근대 국가의 조건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좋은 대상이 될 것이다.

저 두 국가는 19세기 조선과 달리 열강의 반열에 들었던 역사적 사실 때문에 자체적인 내부 구조 덕에 그런 문제를 극복...한건 아니고, 극복 못해서 나라가 터졌다. 외국에게 침공 당해서 망한 조선과 달리 자국민에게 망해서 티가 덜 나는 것 뿐이다. 자체적인 개혁으로 근대적 재정 구조에 도달한 것은 영국 뿐이며, 그 외의 모든 나라들은 영국의 제도를 벤치마킹함으로써 근대적 재정 체제에 도달할 수 있었다.[14]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 내내 조선이 선녀로 보일정도로 높은 세율을 매기는 것을 국가의 공식 정책으로 삼을 정도로 가혹한 수취를 단행했다. 덕분에 마비키 같은 악습이 발생하거나 에도 시대 동안 공식적으로만 수천 회에 달하는 봉기(잇키)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에도 시대에 들어서 개간이 활발해져 이 때의 개간 열풍을 따로 부르는 용어인 신전 개발이라는 단어도 있을 정도로 에도 막부 하의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나,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가난했고 막부 역시 끝없는 재정 문제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백성들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쥐어짰으면 정부라도 부유해야하지 않나 싶지만,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막부가 주 세금인 연공을 쌀 현물로 받는데 상공업과 도시는 갈수록 발전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공업이 발전할수록 GDP 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어 쌀의 상대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큰 예시로, 통칭 '쌀 쇼군' 이라고 불릴 정도로 쌀 값 안정에 신경 쓴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단행한 교호 개혁의 경우, 개간을 장려하여 쌀이 늘어나자 일본 전체에서 쌀 공급이 폭증, 수요에 비해 과다 공급 상태가 되어 가격이 폭락하는 결과로 이어져서 쌀로 연공을 받는 사무라이들이 우르르 파산하게 되었다. 막부 자체가 사치를 억제하고 관료를 줄이는 등의 세출 축소를 단행하고 이전에는 4공 6민이던 세율을 5공 5민으로 증세하여 일단 수치상의 재정은 흑자가 되었으나, 80년이 채 되지 않아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어 도쿠가와 이에나리 시대에 간세이 개혁, 덴포 개혁 등 재개혁을 단행했으나 텐포 대기근, 텐메이 대기근 등의 기근이 터지는 등 전혀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되려 저런 대기근 동안에 제일 큰 피해를 본 것은 쌀 위주로 농사를 짓던 농민들과 쌀 농사 중시 정책을 펼처 석고가 백만에 달하던 센다이 번이었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던 농민들과 상업을 중시한 번들이 살아남았다. '전근대 국가는 그냥 농사 잘 지으면 백성들 잘 먹고 정부 세입도 부유해지는거 아님?' 이라는 농본주의적 경제학은 현실에서는 반대로 나타났다. 수확량은 느는데 막부도 가난해지고 백성들도 굶주리는 이 이상한 상황에서 농본주의적 경제학을 신봉하는 유교를 주로 배운 일본의 학자와 관료들은 대응할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고, 교호 개혁을 기본 모티브로 한 전통적인 재개혁만 반복되었고 성과는 없었다.

그 상황에서 터진 것이 쿠로후네 사건으로, 미국에게 개항을 하자 미국인들은 일본의 금은 교환비가 1:5 정도로 금이 저평가되어 있고 은이 고평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금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며, 중간액 화폐 역할을 하던 은이 갑자기 늘어나 일본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된다.# ##[15]

개판이 된 재정과 경제 상태를 극복할 저력이 에도 막부에게는 없었고,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다. 일본이 이 개판이 된 재정상태를 극복한 것은 메이지 유신 동안 무쓰 무네미쓰가 주도한 지조 개정으로 영국식 조세 제도를 도입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에게서 뜯어낸 막대한 전쟁배상금 덕분이었다. 현물로 세를 받던 연공 제도를 화폐로 세를 받는 지조로 개정한 뒤 메이지 정부의 재정은 안정되었으나, 농민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는데, 화폐로 세를 내게 되자 수확물의 가격 변동으로 인한 부담이 농민들에게 전가되었는데 법적인 세율[16]은 오히려 전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이르는 근대 내내 잦은 농민 봉기가 발생했으며, 자유민권운동 등의 반정부 운동 역시 이런 고세율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로도 근대화가 계속되며 영국의 조세제도를 모티브로 하여 각종 상품세가 신설되었다. 특히 독특한 것은 근대 내내 에 대한 상품세인 주세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인데, 1899년에는 주세가 세수에서 제일 큰 비중(28%)을 차지했다. 그 외 상품에 부과되는 간접세가 1907년에는 세입의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특별히 큰 비중을 차지했던건 다름아닌 간장, 설탕이었다.#

프랑스도 혁명으로 딱히 재정이 갑자기 나아진건 아니고, 혁명정부는 귀족들과 징세청부업자들을 쳐죽이고 교회를 불태워서 압류한 재산을 마구마구 매각해서 어떻게든 때워보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1797년 총재 정부는 채무불이행 선언을 해야했다. 프랑스 재정에 대한 신용도는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기에 이르는 수십년 내내 바닥이었고, 이는 나폴레옹이 그 전쟁 비용을 90% 이상을 세입에 의존하고 나머지 10% 가량도 현지 약탈과 괴뢰국들의 상납금에 의존하는 원인이었다.#

물론 프랑스 혁명으로 조세 개혁이 아무 성과가 없던건 아니고, 이전의 징세청부업자들은 사라지고 조세 법정주의가 도입되었으며 복잡한 잡세는 전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의 직접세는 토지세, 주택세, 특허권[17], 창문세 등 봉건시대에 사용하던 세제 종류들이 이름만 바뀌고, 현물이 아니라 현금으로 납세하며, 징세하는 사람들이 청부업자가 아니라 공무원이 된 것을 제외하면, 세율이나 과세 대상 등의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되려 현대 관점에서 보면 혁명 이후 세제 측면에서 퇴보한 면도 있는데, 소득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혁명 이전부터 있던 dixieme 라는 소득세는 화폐로 얻는 소득들에 부과되는 소득세였는데, 농민들에게 전가되는 토지세와 달리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과 도시민들에게 부담이 크기 때문에 공정한 세금으로 여겨졌으나, 부르주아들이 집권한 혁명 이후에는 스리슬쩍 사라졌다. 1848년 혁명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 주장하여 혁명파가 잠깐 소득세를 재도입했으나 2월 혁명이 망하면서 다시 사라졌다. 19세기 내내 프랑스의 조세 제도에서는 GDP 의 10% 가량만을 징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꼽을 변화는 영국을 벤치마킹하여 상품에 과세하는 간접세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

혁명 이후 세금 때문에 왕 목도 자르고 나라도 뒤집어본 경험을 한 나라이다보니 19세기 내내 조세 저항은 강력했고 프랑스 제국은 세금을 올리는데 매우 소극적이어서, 이는 19세기 프랑스가 식민제국주의를 하면서도 외국 식민지에서는 영국한테 지고, 유럽 내에서는 독일한테 지는 묘하게 호구스러운 열강으로 남는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가 소득세나 VAT 등의 현대적인 조세를 정비하게 되는 것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였다.#

이 두 국가의 근대 조세 개혁의 모티프가 된 것은 영국으로, 영국은 1670년부터 이미 징세청부업자를 폐지하기 시작하며 급격한 세제 제도의 변화가 시작되어 백 수십년 간에 걸친 변화의 결과로 근대적 조세 행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이 특히 의존했던 것은 상품의 유통에 매기는 간접세였다. 1688년부터 1789년까지 영국 정부가 거둬들인 세금의 90% 이상을 주로 관세, 물품세, 그리고 토지세가 차지했다. 특히 물품세는 영국이 중국에서는 관료를 시험을 봐서 실력주의에 따라 뽑는다는 풍문을 듣고서 시험을 통한 실력주의로 실무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매우 효율적인 징세가 가능해졌다. 물론 당시의 중국과 조선의 과거제는 실무자를 뽑기 위한 시험도 아니었고 과거제도로 뽑는게 과거용 글만 달달 외운 바보들이라는 논란이 내부에 있었으나 영국이 그런 것까지 알거나 참고할 수는 없었고 되려 당시 서양의 인재등용 방식 중에서는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세금별 징수 상황은 각 세금의 징수 실적에 그대로 나타났다. 1688년부터 1710년까지 토지세는 전체 세수입 가운데 40%에 육박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후 급격히 줄어들어서 세기 내내 20%대에 머물렀고, 1770년대 들어서는 17-19%를 오르내렸다. 물품세는 그 반대이다. 1713년 전까지만 해도 물품세 총액이 세입의 30%를 넘기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1720년부터 비중이 40%를 훌쩍 뛰어넘더니, 7년 전쟁 때까지 가파른 증가세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50%에 육박했다. 그후 약간 떨어지기는 했지만 대체로 45% 수준을 유지했다. 반면, 관세 수입은 20-30% 구간에서 등락을 거듭하면서 25% 정도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18]

이렇게 급증한 영국의 조세역량은 1790년 영국이 영국 내 GDP 의 최대 25% 가량을 징세할 수 있게 했고, 이것은 18세기 동시대 프랑스의 조세 역량이 GDP 의 10~17% 정도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두배 이상 강력한 것이었다. 간접세 위주의 조세는 매우 높은 조세부담에도 불구하고 조세 부담이 국민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데 성공했으며, 7년 전쟁으로 날린 돈 덕에 나라가 폭발한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 정도를 제외하면 강력한 조세 저항에 부딪히지는 않았다.[19] 무엇보다 식민지 확장이나 국제 무역, 상공업 발전, 인구 증가 등으로 인한 경제 성장으로 생기는 과실이 국고로 들어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식민지가 지도의 색칠된 영토만 크고 실제 거주 인구는 수십만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식민지 경영에 무관심했던 프랑스와 달리 동시대 영국의 식민지는 인구가 수백만에 달할 정도로 내실이 충실했다.

이런 간접세 위주의 조세 정책은 다른 나라들이 벤치마킹하는 대상이 되었고, 상기한 프랑스와 일본 역시 19세기~20세기 초 동안 발생하는 재정적자를 간접세 신설과 확장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1] 환곡을 말한다.[2] 영정법의 기본적인 전세 4두+균역법의 2두(결작)+삼수미(훈련도감)세의 2.2두+대동미(대동법)의 12두[3] 어염, 선박세[4] 결작, 토지 1결당 2두[5] 선무군관. 1필. 여기서 말하는 상류층은 경제적인 지위를 뜻한다. 봉건제적 신분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제적 상류층에 양반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예외도 존재한다.[6] 1729년 기준으로, 실제 인구는 1700만~1800만 정도로 추산된다.[7] 당나라 개원지(開元志)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이를 황(黃), 4살을 소(小), 16살을 정(丁), 60살을 노(老)라 한다고 적혀있다. 구(口)는 인구, 호구에서 쓰는 용법과 같이 사람을 셀 때 쓰는 단위다. 통감절요 주석에 의하면 황은 어린아이의 머리카락이 누런 것에서 왔다고 한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참새의 새끼가 부리가 노란 것에서 따왔거나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은 음식을 먹고 입을 잘 닦지 못해 누런 입(黃口)으로 보여서 그렇게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8] 이 황구첨정, 백골징포는 이미 숙종때 호포제 실시 논의에서 윤휴가 언급할 정도로 오래되었다.[9] 정약용도 유배 생활 중 이를 보고 '큰아들 5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2살 된 둘째 아들도 군적에 올라 있어 세금이 지나치니 가족 모두가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 옷이 다 무엇이랴' 라고 묘사하였다.[10] '번질'이라고 읽어야 한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0705&cid=40942&categoryId=33383[11] 등록을 하지 않고 숨긴 토지[12] 쉽게 말해서 유학호(儒學戶: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한다는 제도. 1명당 2냥씩 징수했다.[13] 요즘으로 치면 국가가 관리하는 생활안정자금대출이 하도 엉망으로 운영되어 민폐만 끼치자, 차라리 그 동네 사람들과 거래를 많이 튼 착한개미저축은행에서 돈을 꿔주는 걸로 전환시켰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창제를 실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은 결국 그 지역에 계속 살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인 경우가 많았고 지나친 이득을 보려다 인심을 크게 잃는걸 몇년 하다 가버릴 관리보다는 껄끄러워했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사창제를 했다가 폐단이 너무 심해서 폐지했던 적이 있다.[14] 윤은주. (2011). 근대국가의 재정혁명-조세제도를 통해 본 영국과 프랑스의 재정 비교-. 프랑스사 연구, 24, 5-32.[15] 이러한 문제는 청나라가 영국에게 개항한 이후에도 똑같이 터졌으며, 개항 이후 청의 재정과 경제가 파탄난 원인 중 하나였다.[16] 법상의 세율은 3% 로 낮아보이지만, 사실 이 3%는 '이전 20년간 수확량을 현금화 했을 때 액수'를 토지 공시 지가로 설정하고 그 지가의 3%를 매년 납부하는 것이었다. 결국 수확량의 60% 의 이론상 가격을 매년 돈으로 납부해야했다.[17] 현대적 특허가 아니라 특정 길드나 기업에 사업을 하는 것을 허가하는 대신 받는 세금이다.[18] 윤은주. (2011). 근대국가의 재정혁명-조세제도를 통해 본 영국과 프랑스의 재정 비교-. 프랑스사 연구, 24, 5-32.[19] 13개 식민지에서의 조세 저항도 영국이 시행하던 간접세 징수 방식이 아닌 인지조례로 대표되는 직접세 징수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