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石高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에서 시행된, 행정구역의 경제력을 모두 쌀 생산량으로 환산한 제도.
石을 세키가 아닌 코쿠로 읽는 것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단어에서 한자가 다르게 읽힌 것으로 斛(휘 곡, 괵)이라는 글자의 대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휘란 '곡식 양을 측정하는 그릇', 또는 '말 들이'(부피의 최댓값)를 의미하며 돌 석자에는 1섬(10말)이라는 뜻도 있다.
2. 상세
고쿠다카는 센고쿠 시대 직후 토지조사에 의해 정해졌으며 성인 남성이 1년간 먹는 쌀을 생산하는 만큼의 농토를 기준으로 이를 1석(石: 코쿠)이라고 했다. 이 단위는 각 영주들의 세력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지표로서 활용되었으며 고쿠다카가 1만 석이 넘으면 다이묘(大名)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 단위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지조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용되었다.일본의 TV 프로그램 '결착! 역사 미스테리'에 따르면 전국시대 당시 2천 석 영지는 현재 가치로 2억 엔쯤이라고 하였으니 1석을 생산하는 땅의 가치는 10만 엔이라고 보면 된다. 전국시대 총 생산량은 약 1700만 석으로, 홋카이도를 제외한[1] 당시 일본 열도의 땅값의 가치는 대략 1조 7천억 엔이다.
고쿠다카는 쌀 생산량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땅의 실제 면적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2] 일례로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는 땅의 크기 자체는 크지 않은 편이나 굉장히 비옥한 땅이어서 고쿠다카가 약 57만 석으로 무츠, 오미, 무사시 다음 가는 규모였고, 센다이를 통치했던 다테 마사무네는 다른 대다이묘 가문과 땅 넓이는 비슷했지만 토지를 개발하여 고쿠다카를 62만 석에서 100만 석으로 늘렸다. 주고쿠의 패자였던 모리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지휘관으로 도쿠가와에 대항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나가토와 스오를 뺀 모든 영지를 막부에게 빼앗기며 120만 석에 달하던 석고 규모가 30만 석 밑으로 깎여나갔으나 불과 10년 만에 60만 석으로 불리더니 메이지 유신 즈음에는 100만 석에 가깝게 늘어났다. 원칙적으로는 쌀만 반영하지만 나중에는 쌀 이외의 작물도 환산해서 반영했고, 상업소득 등은 직접 환산한다기보다는 실제 석고와 다르게 격을 인정해줄 때 감안하는 식으로 처리되었다. 소 요시토시의 쓰시마 후추 번은 섬 바깥의 월경지까지 다 합쳐야 간신히 1만 석이 나왔으나 조선과의 외교 담당이라는 것이 고려되어 초기에는 3만 석 격으로, 마지막에는 10만 석 격까지 인정되었다.
또한 고쿠다카는 계급장 용도로도 사용되었는데 1만 석 이상은 다이묘라는 계급이 부여되었다. 1만 석 이하는 하타모토라는 계급이 부여되었다. 이 다이묘는 전쟁에서는 장군의 역할을 하는 고급 지휘관이 된다. 군대 계급에 비유하자면 1만 석 이상부터 장군인데 1천석 이하는 부사관, 1천 석 ~ 1만 석 사이는 중하급 장교에 비견된다. 특히 이 중에서도 100만 석 이상이면 거대 다이묘로 분류되어 한 나라의 국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렸다.
토지 소속 | 석고량 |
조정 | 14만 1151석 |
막부 직할령 | 421만 3171석 |
하타모토·고케닌 | 260만 6545석 |
신판·후다이 | 932만 5300석 |
도자마 | 983만 4700석 |
신사 및 사찰 | 31만 6230석 |
합계 | 2643만 7097 석 |
이당시 조정은 여느 일반적인 다이묘들보다 적은 수준으로 천황은 3만 석, 유력 공경은 3천 석 정도였다. 천황의 석고는 거의 최하위권 다이묘 수준으로, 200석마다 5명씩 징발되니 3만 석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어림잡아 750명 정도가 전부였다. 비슷한 시기 막부는 직할령만 420만 석, 1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으니 조정의 영향력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오닌의 난 이후 수도인 교토가 파괴되어 조정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3] 밥벌이조차 막막하여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고, 이를 딱히 여긴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에게 5천 석, 공경에게 5천 석, 합쳐서 1만 석을 바친 이후 에도 막부의 쇼군들이 조금씩 더 줘서 이만큼 석고가 불어났다.
반면 막부의 영지는 광활하였다. 막부 직할령 420만 석에 직속부대라고 할 수 있는 하타모토 5000명과 고케닌 1만 7000명의 석고 260만 석을 합치면 약 700만 석으로 어떤 다이묘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였다. 다만 하타모토와 고케닌들에겐 직접 봉지가 분배된 것이 아니라 해당 봉지에서 소출된 석고를 연봉식으로 재분배해주기 때문에 봉지에 대한 영향력은 다이묘와 전혀 달랐다. 이는 막말에 자신의 봉지를 직접 배분받았기에 지키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던 도자마번과 달리 전투의지가 높지 않아 막부 직속부대가 졸전을 치르는 원인이 되었다.[4]
또한 막부 직할령은 쪼개져 있었는데 일부는 전국 각지에 조금씩 분포되어 도자마번을 감시하는 거점이 되었다. 사무라이층은 기본적으로 다이묘의 거성에서 집단거주하였기 때문에, 막부 직할령은 역설적으로 사무라이 계층이 없는 곳이며 비교적 관대한 조건의 세금을 낸다는 이유로 쇼군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다.[5] 막말의 신센구미들은 이러한 막부 직할령의 농민 출신 칼잡이들이 쇼군에 대한 절대 충성으로 모인 조직이다.
일본의 다이묘들은 시기적으로 다르지만 대략 260~270명 정도였는데, 이중에서 신판 다이묘(親藩大名)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들로, 도쿠가와 성을 허락받은 주요 분가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성인 마쓰다이라 성을 받은 마쓰다이라 가문들이다. 각자 봉지를 큼지막하게 받았지만 정치 관여는 금지 되었다. 가장 핵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들이 분가한 세 가문인 고산케로 오와리 번이 62만 석, 기이 번 55만 석, 미토 번 35만 석이다. 반면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는 이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던 집안들로 영지는 비교적 소규모로 받았지만 로주(老中) 등 막부의 요직들은 이들이 전담하였다. 마쓰다이라 가문들 중 이에야스 이전에 갈라진 방계들도 후다이에 속했다.
평시에는 친족에게 세력은 허락하되 정치관여는 금지시키고, 가문 밖 인물들은 정치는 할 수 있되 세력이 작도록 만드는 나름의 균형을 살렸을 수 있으나, 막말이 되어 정치가 혼란해지자 실제 업무를 맡은 후다이 다이묘들의 석고가 작다보니 급박한 상황에서 강한 발언권으로 정무를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힘으로 처리하자니 병력도 돗원할 수 없어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이이 나오마사의 후손으로서 후다이 최고 명문가인 히코네 이이 가문은 고쿠다카 30만석, 다이묘의 대우로는 35만석 격에 이르렀을 정도로 힘이 있는 집안이라 로주는 맡지 않는 가문이었으나 상황이 안 좋을 때 로주 위의 임시 최고직인 '다이로'직을 맡아 나서고는 했다. 하지만 막말 다이로를 역임하던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뒤 이이 가문 또한 막부 권력의 중심과는 멀어지게 되면서 막부는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다.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편에 가담했던 가문들과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와 동맹했던 가문들이다. 카가의 마에다씨와 같이 도쿠가와 편에 선 경우에는 100만 석이 넘는 자기 영지를 지켰지만, 적대적이었던 경우 멸문지화만 면하고 영지가 대폭 감봉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전봉 되었다. 그래도 원래부터 영지가 워낙 크다 보니 신판이나 후다이보다 큰 가문들이 어느정도 있었다. 막부 요직에서는 배제되어 있었지만 거대한 영지를 기반으로 자체적으로 큰 경제력을 운용하기도 했다.
그중 규모가 컸던 사쓰마와 조슈는 막말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막부에 대한 의무의 기준이 되는 공식 고쿠다카는 오모테다카(表高)라고 하였다. 실제로 백성에게 세금을 걷는 기준은 우치다카(内高) 또는 지츠다카(実高)로 칭했는데, 둘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었다. 오모테다카는 에도시대 초기에 정해져 있던 것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에서는 경작지 개간 등에 의해 우치다카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예컨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참전하여 감봉된 도자마 다이묘들의 오모테다카를 보면, 시마즈 씨의 사쓰마는 77만 석, 모리 씨의 조슈는 36만 9,411석이지만, 막부 말기의 우치다카는 둘 다 90~100만 석에 달하게 된다.
일본의 다이묘 대우는 영지의 고쿠다카가 기준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홋카이도 남부에 있었던 마츠마에 번의 경우 홋카이도가 당시 농업기술로 벼농사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쿠다카가 없었지만, 에조(아이누)와의 무역을 독점해서 이익을 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나중에는 러시아 제국의 세력 확장으로 요충지가 되자 3만석 격으로 지위를 승격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쓰시마 섬 역시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땅이 얼마 되지 않아서 원칙적으로는 급이 더 낮아야 했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어 조선과의 무역, 외교 창구 역할을 했으므로 쓰시마 도주 역시 10만 석 격의 국주급 다이묘로 대우받았다. 다만, 쓰시마 후추 번의 경우 쓰시마 섬 내부의 실제 소출과 오늘날 가라쓰시 동부 등 일본 내륙에 소유한 월경지의 소출을 합치면 다이묘의 최소 기준인 쌀 1만 석은 넘겼기 때문에, 마츠마에 번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또한 키츠레카와 번은 석고가 5000석에 불과하였으나 방계로나마 무로마치 막부의 후손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특별히 다이묘로 인정되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막부에서 쌀 이외에도 해산물, 고구마, 감자 등의 다른 식량자원의 생산량도 고쿠다카에 같이 반영했기 때문에 이전 시기 보다 계산법이 복잡해진다.
고쿠다카를 군사력으로 환산할 시 보통 40석당 병사 1명, 100석당 병사 2.5명으로 계산했다. 이는 100석을 생산하여 거기서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고, 그 세금의 일부를 군비로 이용하면 2~3명을 징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센코쿠 시대 이래 일본 농민의 세율은 7공3민 원칙에 따라 2/3 정도(67%)로 조선시대 농민의 세율이 공물이나 부역을 합해도 25% 정도인 것에 비하면 대단히 높았다. 그로인해 일본 농민들은 서양 장원의 농노 수준으로 지위가 낮았고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6]
이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계산해보면 일단 성인 남자 1명이 1년간 먹고사는 데 필요한 쌀이 1석이므로(아래 설명 참조) 1석당 인구 1명을 부양할 수 있다. 보통 성인 남자보다 적게 먹는 여성이나 어린이, 노약자들도 있고, 또 생산된 쌀이 100% 먹는 데 소모된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부양자 수는 대략 이 정도로 가늠할 수 있다. 사회의 인구는 인구 부양능력-식량 생산능력에 의해 결정되므로, 일단 1석당 인구 1명이 부양 가능하다고 간주 할 시, 아주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대략적인 수치는 잡을 수 있을 것이다.[7]
이 기준에 따르면 100석당 병사 2.5명이란 곧 총 인구의 2.5% 전후까지 징집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만큼의 인구가 현대의 전업 군인처럼 생산활동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상시 유지 병력(상비군)이라면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다이묘들의 휘하 병력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아시가루는 상비군이 아니다.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으로 소집할 때만 모이는 병사, 즉 예비군에 가깝다. 아시가루의 활동 시기는 전란이 빈번한 전국시대였기 때문에 현대의 예비군보다 자주 소집되고 전투를 치렀지만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3. 석(石)
1석(섬) = 10두(말) = 100되 = 1000홉 (1홉은 180.39 ml. 우리가 아는 그 자판기 커피 종이컵으로 가득 채워서 한 컵) 보다 자세한 내용은 석을 참고.
일본의 1석의 기준은 1669년에 에도 막부가 정했다. 일본에서 1석은 SI 단위로 환산하면 약 180.39리터였으나, 근대화 이후에는 180리터로 하였다. '고쿠다카' 단위의 기준이 되는 석 단위는 이쪽이다.
일반 성인 한 명이 하루 생쌀 한 컵으로 밥을 지어서 두 끼씩 먹으면 1년을 생활할 수 있다는 기준으로 1석으로 정했다. 일본인이 하루 세 끼씩 먹기 시작한 때는 겐로쿠 시대부터였다. 농지를 개간하여 쌀 생산량이 증가하고 세 끼씩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지만, 이로 인해 쌀이 남아돌아 불경기를 초래하여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쌀 쇼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지금처럼 쌀을 무게로 재는 대용량 계량기(저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무로 만든 측량기를 사용하여 부피로 쟀는데, 현대의 기준으로 1홉은 무게로 치면 150 g이었고 따라서 1석은 천 배인 150 kg 정도다. 쌀겨를 벗겨내고 도정한 하얀 생쌀 1석의 무게는 135 kg 정도였다. 통상적으로 1석을 당시의 일본인 성인 남성 1명이 하루에 두 끼씩 현미로 밥을 지어 먹는다고 가정하고 1년간 먹을 수 있는 무게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설명이 아니니, 1년 365일간 남자 1명이 쌀 한 홉씩 두 끼를 매일 먹는다고 해도 730홉일 뿐 1000홉이 되기엔 부족하다. 오히려 하루에 세 끼를 먹는다고 가정해야 1000홉에 더 가깝다. 날수를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사회의 쌀 유통 과정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최대 단위인 '한 가마니=80kg'을 '한 석(한 섬)'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여 "여러 가지 부식에서 열량을 섭취할 수 있는 현대와는 달리 거의 순수하게 쌀로만 필요한 열량을 섭취했던 전근대에는 160kg을 한 석으로 정했던 것이다" 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도량형에 대한 오해이다. 전근대이건 현대이건 한 석(한 섬)은 부피로 약 180리터, 쌀의 경우 무게로 약 160kg에 해당하는 양이다. 즉 전근대에는 160kg이던 쌀 한 석이 현대에는 80kg이 된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쌀 소비량이 연간 반 석 정도로 감소한 것이다.
그리고 '가마', 또는 '가마니'란 본래 짚 따위를 돗자리 치듯 엮어 만든 자루(현대에는 비닐이나 종이로 만든 자루), 또는 그 자루에 쌀 따위를 담았을 때 자루의 갯수에 따라 양을 세는 단위로써 본래는 특정한 양이 정해진 도량형이라고 보기 어렵다. (큰 가마니도 있지만 작은 가마니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 가미니'가 80kg을 의미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은 곧 80kg(약 90리터)가 들어가는 가마니가 그만큼 흔하게 쓰였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1000홉=100되=10두(말)=1석(섬)의 10진 곡식 단위 체계에서 쌀 1석(한 섬)은 성인 남성 1인의 1년분 식량에 해당하는 개념적 양으로써 실용적인 유통 및 운송에는 너무 큰 단위였고 그렇다고 1두(한 말)은 너무 작은 단위였기 때문이다.[8] 따라서 5두, 또는 1/2석 단위로 포장된 '가마니' 가 실용적인 유통과 운송의 단위로 널리 사용되던 것이 현 시대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양이 하필 절반 정도로 감소한 현대 한국/일본인의 연간 쌀 소비량과 비슷하여 '한 석'의 양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기 쉽게 된 것이지만, 이는 단지 우연의 일치이다.
물론 이런 오해가 있었다고 해서 오해한 이를 크게 탓할 문제가 아니기는 하다. 급속한 근대화/산업화, 특히 SI 단위계의 도입으로 인한 전통 단위계와 SI 단위계의 혼용, 게다가 식생활의 급속한 변화로 인한 쌀 소비량의 급격한 감소등이 겹친 한국의 현대사가 저러한 오해가 나타나기 쉬운 토양을 제공한 것이다. 당장 이 블로그의 글을 보자. (일개인의 블로그 글이긴 하지만 상당히 자세하게 정리된 글이다.) 이러한 오해를 하는 이가 나무위키 이용자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드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 넓지도 않은 한국에서 각종 도량형을 각 지역마다 다르게 정의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도 약간씩의 오차가 나는 것도 아니고, 딱 2배씩 오차가 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 즉 한 석(섬)의 양을 오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1/10 단위에 대해서도 같은 오해를 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이 아닌 조선에서는 1석=1섬이 맞고, 1인당 1년에 2섬을 먹는 것으로 계산한다. 즉 조선의 2섬은 일본의 1석이다." 와 같은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또 다른 오해, 또는 비약이다. 일단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의 답변내용을 보면 '석'과 '섬'이 단위(도량형)로써는 차이가 없이 같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해당 답변의 내용 및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석과 섬, 가마와 가마니에 대한 설명 역시 해당 내용의 설명을 뒷받침한다. 즉, '섬'은 명사로 사용되면 곡식등을 담는 용기(=부대자루)를 의미하지만 의존명사로 사용될 경우 도량형의 단위로써 '석'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 단위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하여 동아시아의 전통 단위로 정착된 것이므로 당연히 국가와 지역마다 구체적인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그 개념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에도 막부가 정립한 일본의 도량형, 즉 <1석(섬)=약 180l=10두(말)=100되=1000홉=1000x약 180.39ml> 개념을 조선에 적용하려 들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것이 된다. 왜냐하면 조선은 1홉은 일본 홉의 약 1/3정도이고, 100홉=10되=1두(말)이지만 15두(말)을 소곡, 20두(말)을 대곡으로 하는 조선 고유의 도량형 체계를 썼기 때문이다. (곡(斛)은 석(石)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표준 도량형기가 소실되었고, 전후 복원을 시도하였으나 자의 크기 자체가 약간 커졌던데다가 이후 조선 말기 국정의 혼란을 겪으면서 도량형도 함께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을 거친 끝에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일본식 도량형 체계가 도입되었으며, 이후 쭉 이를 사용해오다가 현대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현대 한국에서 말하는 '쌀 한 석'은 일본과 같은 약 160kg이 맞지만 조선시대의 한 석(한 곡)이 얼마냐고 하면 그건 말하기 애매한 문제가 된다. 기준 단위 자체가 혼란이 있었던 데다 대곡이냐, 아니면 소곡이냐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 당시 교정된 영조척(營造尺)이 30.8cm라는 가설에 따라 보면 소곡 한 섬은 약 85.9리터라고 하므로 "조선의 두 섬(석)이 일본의 한 섬(석)" 이라는 위의 주장도 나름 계산은 맞는 주장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이 정말 '쌀로 소곡 두 섬은 성인 남자 한 사람의 일년분 식량이다' 라는 인식을 가졌는지는 이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만약 그랬다는 근거가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근거 제시를 부탁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또 기준이 대곡이 된다면, 이건 아예 계산부터 틀린 주장이 된다. 따라서 위 주장은 저런 구체적인 설명과 근거들을 너무 많이 빼먹은 비약이거나, 아니면 '섬'과 '석' 개념을 부정확하게 이해한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1] 홋카이도 개간은 19세기 말에 다다라서야 시작되었고 그 전까지는 고쿠다카가 0이었다.[2]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인식이 있었다. 가령 조선 세종은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을 도입하였는데 여기서 전분6등법이 토지의 질(산출량)을 근거로 경작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조세의 기준으로 삼은 제도다. 조선 이전인 고려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분육등법' 출처.[3] 조정의 재정이 열악하다보니 장례나 즉위식조차 미뤄졌고, 자금을 기부받아 겨우 치를 수 있었다.[4] 참고로 하타모토는 쇼군의 친위대, 고케닌은 쇼군의 직속 신하를 말한다.신판은 쇼군의 친척들이고 후다이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이미 도쿠가와를 주군으로 모시던 다이묘들, 도지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쿠가와에 항복한 다이묘들을 말한다.[5] 명목상으로는 4할의 세금이 책정되었으나 현실은 6~7할 가량이었고 농민이 손에 쥐는 것은 2할 이하였다. 반면 직할령은 보통 5할 선에서 끝났기 때문에 농민이 4할을 쥘 수 있었다. 수입이 2배 가량 차이 나는 것이다. 이는 막부가 규모 자체가 거대한 만큼 이런 관용을 베풀 여유가 있는 반면 각 다이묘들은 영지 규모도 막부에 비해 영세하고 막부가 다이묘를 감시, 견제를 위해 참근교대를 명해 상당한 지출을 하도록 만드는 등 재정적으로 관용을 베풀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 센코쿠 시대 간토 일대를 다스린 후호조씨가 농민들에게서 거둔 세금의 세율이 4공6민이었는데 이 정도만으로도 농민들로부터 엄청난 선정으로 칭송받았다.[7] 설령 농민이 세금이나 기타 지불수단으로 쌀을 쓴다고 해도 그 쌀을 식량으로 쓰일테니 크게 틀린 계산은 아닐 것이다.[8] 160kg의 짐을 실제로 짊어져보면 그것을 나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80kg을 나르는 것도 비숙련자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160kg은 정말 힘들다. 반면 16kg은 쌀 소비량이 크게 감소한 현대의 1인 가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므로, 전근대의 대가족 집안에서는 한동안 먹을 식량이라는 기분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양이라고 여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