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8 11:02:06

고쿠다카

1. 개요2. 상세3. 석(石)

1. 개요

石高.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에서 시행된, 행정구역의 경제력을 모두 쌀 생산량으로 환산한 제도.

고쿠다카는 일본에서 정해진 땅의 넓이를 가리키는 옛 단위이다. 쌀 1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 면적을 1고쿠다카라고 하였다.

石을 세키가 아닌 코쿠로 읽는 것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단어에서 한자가 다르게 읽힌 것으로 斛(휘 곡, 괵)이라는 글자의 대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휘란 '곡식 양을 측정하는 그릇', 또는 '말 들이'(부피의 최댓값)을 의미한다. 또한 한자로 돌 석자에는 1섬(10말)이라는 뜻도 있다.

2. 상세

고쿠다카는 일본 센고쿠 시대 직후 토지조사에 의해 정해진 단위이다. 구체적인 단위는 성인 남성이 1년간 먹는 쌀을 생산하는 만큼의 농토를 기준으로 이를 1고쿠다카라 했다. 이 단위는 각 영주들의 세력을 나타내는 데에 중요한 지표로서 활용되었으며 보통 100고쿠다카 당 병력 2.5명으로 계산했다. 이 말은 100석을 생산하여 거기서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고, 그 세금의 일부를 군비로 이용하여 2~3명을 징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고쿠다카가 1만 석이 넘으면 다이묘(大名)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 단위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지조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의 tv 프로그램 '결착! 역사 미스테리'에 따르면 전국시대 당시 2천 석 영지는 현재 가치로 2억 엔쯤이라고 하였다.[1] 위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전국시대 총 생산량은 약 1700만 석으로, 훗카이도를 제외한 당시 일본 열도의 땅값의 현가치 1조 7천억 엔이다.

고쿠다카는 쌀 생산량으로 그 단위를 정하기 때문에 땅의 실제 면적과는 상관없었고, 해당면적에서 생산되는 쌀의 생산량만큼이 고쿠다카의 단위가 되었다. 일례로 경우 센다이 62만 석짜리 영지를 통치했던 다테 마사무네는 다른 가문과 땅 넓이는 같았지만 토지를 개발하여 1년 생산량을 62만 석에서 100만 석으로 만들었다. 또한 모리 가문의 조슈 번은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연 36~37만 석을 생산했으나 메이지 유신 당시 연 100만 석에 가깝게 생산하였다.

홋카이도 남부에 있었던 마츠마에 번은 당시 기술로 벼농사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쿠다카가 없었지만, 에조(아이누)와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냈기 때문에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인정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쓰시마 섬 역시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땅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다름아닌 조선과의 무역이 매우 활발했으므르 쓰시마 도주 역시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1만 석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병사 약 200~300명을 징발할 수 있다. 적으면 200명, 많으면 300명이고 웬만하면 250명 정도 징발하였다.

1만 석당 병사 200~300명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간단히 짚어보자. 일단 성인 남자 1명이 1년간 먹고사는 데 필요한 쌀이 1석이므로(아래 설명 참조) 1석당 인구 1명 부양이 가능하다. 보통 성인 남자보다 적게 먹는다고 여겨지는 여성이나 어린이, 노약자들도 있고, 또 생산된 쌀이 100% 먹는 데 소모된다고 단정할 수 없기는 하지만... 어쨌건 사회의 인구는 인구 부양능력-식량 생산능력에 의해 결정되므로 일단 1석당 인구 1명이 부양 가능하다고 보도록 하자. 쌀 자체가 주된 식량작물이니 설령 농민이 세금이나 기타 지불수단으로 쌀을 지불한다 해도 그 쌀을 누군가 먹기는 할 테니 크게 틀린 계산은 아닐 것이고, 아주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대강 감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보면 1만 석당 병사 200~300명이란 곧 인구 1만 명당 병사 200~300명, 따라서 총 인구의 2.5% 전후까지 징집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총 인구대비 2.5% 정도라면 객관적으로 볼 때 위험할 정도로 병력비가 높다. 인구의 절반은 병사로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이고, 나머지 절반의 남성 중에서도 낮게 잡아 1/3, 높게 잡으면 1/2 정도는 병사로 부적절한 어린이나 소년, 노인, 병약자나 장애인 등이므로 총 인구 중 건강한 성인 남성의 비율은 25~30% 수준이기 때문. 즉, 총 인구의 2~3%가 병력이라는 것은 건강한 성인 남성 10명 중 1명꼴로 병사라는 소리이다.

그러나 이런 병력비는 상비군 즉, 대한민국 현역병처럼 생산활동에 전혀 기여하지 않고 상시 유지하는 병력의 경우를 말한다. 아시가루는 상비군이 아니라 평소에는 농사짓다가 전쟁으로 소집할 때만 모이는 병사, 즉 예비군에 가깝다. 병농분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 이후, 정착한 것은 에도 막부시절의 일이다. 아시가루의 활동 시기는 전국시대라 현대의 예비군보다는 물론 자주 소집되기는 했지만 전국시대라고 해서 사시사철 항상 전쟁만 하는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예비군+정규군을 합치면 350만으로 총 인구대비 7%다. 그래도 아무 문제없이 사회가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적용할 수 없다.

3. 석(石)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e34792b9-s.gif
1석(섬) = 10두(말) = 100되 = 1000홉 (1홉은 180.39 ml. 우리가 아는 그 자판기 커피 종이컵으로 가득 채워서 한 컵)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을 참고.

일본의 1석의 기준은 1669년에도 막부가 정했다. 일본에서 1석은 SI 단위로 환산하면 약 180.39리터였으나, 근대화 이후에는 180리터로 하였다. '고쿠다카' 단위의 기준이 되는 석 단위는 이쪽이다.

일반 성인 한 명이 하루 생쌀 한 컵으로 밥을 지어서 두 끼씩 먹으면 1년을 생활할 수 있다는 기준으로 1석으로 정했다. 일본인이 하루 세 끼씩 먹기 시작한 때는 겐로쿠 시대부터였다. 농지를 개간하여 쌀 생산량이 증가하고 세 끼씩 먹을 수 있게 됨은 좋았지만, 쌀이 남아 돌아 불경기를 초래하여 쌀 쇼군이라고 불리게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 덕분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파일:external/www.komenet.jp/ip_q01.jpg
지금처럼 쌀을 무게로 재는 대용량 계량기(저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무로 만든 측량기를 사용하여 부피로 쟀는데, 현대의 기준으로 1홉은 무게로 치면 150 g이었고 따라서 1석은 천 배인 150 kg 정도다. 쌀겨를 벗겨내고 도정한 하얀 생쌀 1석의 무게는 135 kg 정도였다. 통상적으로 1석을 당시의 일본인 성인 남성 1명이 하루에 두 끼씩 현미로 밥을 지어 먹는다고 가정하고 1년간 먹을 수 있는 무게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설명이 아니니, 1년 365일간 남자 1명이 쌀 한 홉씩 두 끼를 매일 먹는다고 해도 730홉일 뿐 1000홉이 되기엔 부족하다. 오히려 하루에 세 끼를 먹는다고 가정해야 1000홉에 더 가깝다. 날수를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연간 1인당 평균 쌀 소비량은 80 kg(=1석)이지만 이는 이건 다른 종류의 부식에서 열량을 섭취하기 때문이고, 전근대처럼 거의 순수하게 쌀로만 필요한 열량을 충당하려면 80 kg보다는 쌀이 훠어어얼씬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160 kg 정도를 1석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도량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쌀 한 석(섬)은 80 kg이 아니라 160 kg이다. 쌀 80 kg은 보통 '한 석(섬)'이 아니라 '한 가마니' 라고 불리며, 두 가마니=한 석(섬)이다. 이 역시 정확히 말하면, 1000홉=100되=10두(말)=1석(섬)의 10진 단위 체계에서 1석(섬)은 160 kg 정도라 실용적인 판매나 운송에는 너무 큰 단위였고 그렇다고 1두(말) 단위로 포장하자니 실용적인 단위로는 너무 작았다. 이 때문에 1석(섬)을 둘로 나눠 가마니에 담은 단위가 한 가마니였던 것이다. 그러나 쌀 생산량이 인구 부양력과 경제력, 세력의 단위로 의미를 크게 잃은 현대에는 '성인 남성 1인의 한 해 식량'인 1석(섬) 단위의 사용례가 크게 줄어들어 한 가마니(80 kg)가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최대 단위가 되면서 1석=1가마니라는 오해가 생겼다.


[1] 1석을 생산하는 땅의 가치는 10만 엔이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