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5:01:32

하타모토

1. 개요2. 가격(家格)과 봉록(俸禄)3. 군역(軍役)4. 각종 매체에서의 하타모토

1. 개요

旗本
본래는 다이묘의 진영인 본진의 깃발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어원 그대로 주군의 본진을 수비하는 친위대의 대장 역할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임진왜란사나다 노부시게가 하타모토의 벼슬로 히젠 나고야성의 산노마루를 지키는 친위대 역할을 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쇼군을 만날 수 있으며, 영지(지행지) 규모가 1만 석 아래[1][2]사무라이를 의미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고쿠다카 200석 정도에서 하타모토와 더 아래 신분인 고케닌을 나누지만 공식적으로는 고쿠다카의 하한선이 아니라 쇼군 알현 가능 여부로 신분을 나눴다. 실제로 석고가 수십석에 불과한 하타모토들 또한 존재한 바 있다. 엄연히 쇼군이 임명한 (명목상에 가까운 경우가 많지만) 독립 영주인 하타모토와 달리 고케닌은 개별 영주라기 보다는 대대로 쇼군가에서 자잘한 일을 하는 개념에 가깝다.

에도 시대 쇼군의 영지는 700만석인데 이중에서 400만석을 하타모토 영지로 하였는데 하타모토와 코케닌을 합쳐 1만 7천명이었으며.[3] 그들이 거느린 부하들이 5만이다. 이를 합쳐서 이른바 '쇼군 직속무사 8만기'라고 한다.[4] 그러나 다이묘의 경우 지행지에서 세금 걷으며 왕처럼 살지만, 대부분의 하타모토들은 고쿠다카에 해당하는 현물을 받을 뿐이지 실제로 지행지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거주지도 에도에서 사는 것이 원칙이지만, 참근교대 하는 유력 가문은 지행지를 받아 그곳에서 산다.

에도 말기 하타모토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가쓰 가이슈도 관직 녹봉을 뺀 지행지 규모는 41석에 불과했지만 쇼군 알현이 가능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하타모토이다. 하타모토가 되면 쇼군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도노사마(殿樣)'라는 칭호로 불렸다.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1000석 이상인 하타모토는 다이묘와 동급으로 보았다. 대신 에도 시대에 약 5천 석을 받는 하타모토 집안에서 유력 하타모토가(33가)는 다이묘처럼 참근교대를 했다.

하타모토로 5000석 이상자는 참근교대자를 포함하여 약 100 명, 3000석 이상은 약 300명이고, 하타모토의 90%는 500석 이하였다.

개별 다이묘의 가신들 중에서도 간혹 석고가 1만 석이 넘는 사무라이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하타모토가 아무리 이들보다 석고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하더라도 쇼군으로부터 직접 영지의 통치권을 받은 직속 신하였기 때문에 개별 다이묘의 가신들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가이에키[改易]를 당한 다이묘들이 하타모토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아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유력 다이묘였지만, 그 아들은 영지 몰수를 당한 후 3천 석 하타모토가 되었는데, 마사노리의 증손자인 타다마사(忠正)가 쇼군의 친위대가 되어 가문을 재흥하였다. 하타모토로서 5천 석을 하사받았는데, 어마어마한 자리이다. 현재 가치로 연봉 5억 엔에 해당된다.

평민이 갑자기 직참 하타모토 벼슬을 받은 경우도 있는데, 에도 막부 말기 존 만지로는 일개 농민 겸 어부였던 촌뜨기가 벼락 출세한 경우다. 하지만 이유없이 하타모토가 된 것은 아니고, 능통한 영어 구사 능력과 서양 문물에 대한 풍부한 지식 등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같은 농민 출신이었던 신선조의 국장 곤도 이사미도 그 활약을 인정받아 쇼군의 직참(직속 신하) 하타모토의 벼슬을 받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또한 농민 출신에서 하타모토가 되었다. 에도 막부 초기에 영국인인 윌리엄 애덤스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우라 안진이라는 이름과 영지를 하사받고 하타모토가 되었다.

직참은 크게 하타모토와 고케닌으로 나누며, 하타모토의 아래 계급인 고케닌(御家人)은 실무직으로 쇼군을 알현할 수는 없었다. 일본 경찰의 전신(前身)으로 에도의 치안을 담당했던 마와리가타 도우신(廻り方同心)은 고케닌 신분이었다.

가격(家格)은 다이묘보단 아래이지만 엄밀히는 상하관계의 아래가 아니라 의전 서열이 밀리는 동등한 관계라고 봐야 한다. 다이묘들끼리 아무리 석고 차이가 크더라도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였던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석고가 다이묘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하타모토라고 하더라도 '도노사마'라 불리고 극존칭으로 존대받았고, 다이묘들과도 최소한 서로 도노라고 존칭하며 존대하는 관계였다. 예를 들자면 하타모토는 본사 간부들, 다이묘는 지사장 정도.

2. 가격(家格)과 봉록(俸禄)

가문의 지위를 가격이라고 하고, 하타모토들이 받는 고쿠다카를 봉록이라고 하는데 가록(家禄)이라고도 부른다.

기본적으로 하타모토는 1만석 이하에 쇼군을 알현할 자격이 있는 오메미(御目見) 신분인 자로 11대 쇼군 때는 약 5300명이며 그 배신들은 약 67500명이다.

하타모토들은 기본적으로 쿠라마이토리[蔵米取]라고 하여 녹봉을 직접 받거나 지교(知行)를 배당받은 후 막부의 대관에게 맡겨 간접적으로 수취하였다. 한 등급 낮은 고케닌들은 모두 쿠라마이토리였으며, 지교토리(知行取)는 하타모토 중에서도 500석급 이상이다. 그리고 3000석 이상의 하타모토들은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아예 지교에 관청인 진야(陣屋)를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며 연공미를 거두었다. 다만 배정된 고쿠다카 전부가 하타모토의 것이 아니라 4공6민이라 하여 40%만 수취한다. 예를 들어 2000석급 하타모토라고 하면 그중 40%인 800석을 받아 가신들에게 봉록도 주고, 사용인[7]도 부리며 남는 걸로 먹고살았다. 러프하게 설명하자면 500석 이하의 하타모토/고케닌들은 녹봉을 직접 받고, 500석 ~ 3000석까지는 지교를 대관에게 맡기며, 그 이상은 직접 지교를 경영하여 세금을 받아내는 것이다.

18세기 후반 하타모토 중에서 쿠라마이토리는 2030명으로 석고의 합계는 45만석이고, 지교토리는 2908명으로 석고의 합계는 275만석이다. 그리고 직접 지교를 경영하는 하타모토는 250가문.

참고로 100석의 토지에는 대충 6~7가구 정도의 농민이 살았으며, 소작농이나 농민 아닌 자를 포함하면 10채 전후의 백성이 존재했다.

그리고 같은 하타모토라도 가격이 나뉘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석고의 높낮이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변수가 워낙 많다.

코부싱(小普請)
하타모토/고케닌 중 관직이 없는(無役) 3000석 이하의 자를 일컫는다. 200석 이상 3000석 이하는 小普請組支配라는 조직에 속해 통제를 받았는데, 1753년부터는 석고의 하한선 없이 모두 코부싱.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충 5~12개의 코부싱조가 있어 조장(코부싱쿠미가시라, 小普請組頭)의 지휘를 받았으며, 조장의 석고는 200석. 워낙 경제적으로 곤궁하다 보니 군역으로 100석당 창 하나에 와카토(若党) 1명을 배정받았는데, 그보다 석고가 적으면 몇 사람이 합쳐서 역을 부담했었다.

하타모토 아이세키(旗本寄合席) 또는 요리아이(寄合)
대체로 3천석 이상의 하타모토를 가리키는데 일반 하타모토 보다 가격이 높았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교를 받아 직접 경영하였으며 약 180가문(고타이요리아이 포함)이 있다.

코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
대체로 3천석 이상이며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참근교대(交代寄合)를 하는 33가문이다. 게다가 5만석 이하의 무성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지교에 진야(陣屋)를 설치하였으니 그냥 1만석 이하의 다이묘였다. 다만 남조의 후예인 이와마츠야(岩松家)는 겨우 120석이었고, 최대 가록은 혼도시(本堂氏)와 이코마시(生駒氏)의 8000석으로 차이가 크다. 두 가문 다 유신 후 남작 작위를 받는다.

고케(高家)
대체로 4천석 이상이며 막부의 의식전례를 담당한다. 직책을 칭할 때는 '고케직'이라고 한다. 엔포 연간(1673년~1681년)에는 9명, 안세이 5년(1858년)에는 17명이다. 다만 고케 가문은 고케직 외 다른 막부의 역직을 담당할 수 없었다. 추신구라 때 살해당한 하타모토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의 가록이 4200석으로 고케를 담당하며 일을 보다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칼 맞은 5만 3천 석 다이묘 아사노 나가노리의 관위는 종5위였으나, 하타모토인 키라 요시히사는 종4위라 이쪽의 가격이 더 높았다.

즉 코부싱 -> 요리아이 -> 코타이요리아이·코케 순으로 가격이 높았다. 같은 하타모토 안에서도 3등분 된 것이다.

유신 직후에는 약간 다르게 3등분 하여 1천 석 이하는 죠시(上士), 1천 석 이상은 시모타이후(下大夫), 고케와 고타이요리아이는 나카타이후(中大夫)로 구분하였다. 그러다가 화족령에 의해 하타모토 중에서도 공훈을 세운자는 화족에 편입되고, 메이지 유신 당시 기준 실측석고 1만석 이상의 하타모토들은 모두 남작 작위를 받았다. [8] 나머지는 사족이 되어 국공채 방식의 연금을 받게 된다.

3. 군역(軍役)

아래 자료는 에도시대 케이안(慶安) 2년(1649년)의 군역을 기준으로 한 사시마 요시히코(笹間良彦)의 『江戸幕府役職集成』(1999년작)를 기초 텍스트로 하여 적당히 섞었다. 책마다 수치나 용어에 대한 해석이 다르니 "이런 자료도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하면 된다.

용어 번역은 원어를 존중하나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다 보니 국한일문 혼용체가 되었다. 군역을 쉽게 계산하자면 하타모토 본인을 빼고 200석당 4~5명씩 동원할 수 있다고 보면 얼추 맞는다. 그러나 '몇 석 급은 몇 명 동원'이라고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이 공식이 대입되지는 않는다.

들어가기 앞서 언급 순서대로 용어정리부터 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병(槍) - 야리. 창을 사용하는 전투병. 주인의 창을 들어주는 종자로 보는 견해도 있음.
츄겐(中間) - 평시에는 잡일을 하고 전투에도 동원되는 인력.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의 일종.
도보무사(徒步侍) - 카치 사무라이. 걸어 다니는 무사.
갑주종자(甲冑持) - 캇츄모치. 주인의 갑옷과 투구를 들어주는 종자.
말구종(馬の口取) - 바노쿠츠케. 고삐잡이로 번역하기도 한다.
짐말꾼(小荷駄) - 코니다. 원칙적으로는 짐말을 이용해야 하지만 말 부족으로 그냥 등짐을 졌다.
조리담당(草履取) - 조리토리. 주인의 신발(짚신)[9]을 들어준다.
의복종자(挟箱持) - 하사미바코모치. 의복을 들어있는 상자를 운반한다.
활운반(立弓) - 타테유미. 주인의 활을 운반한다.
철포병(鉄砲) - 텟포. 총을 사용하는 전투병.
와리지종자(沓箱持) - 쿠츠바코모치. 와리지는 조리와 달리 발목까지 묶는 신발로 장거리 보행에 필수품.
아시가루 감독(押足軽) - 오사에 아시가루. 각종 모치, 짐꾼들을 감독한다.
장도(長刀) - 나기나타. 주인의 창자루에 칼날을 단 병기를 운반한다.
우비종자(雨具持) -아마구모치. 주인의 우비를 들어주는 종자.
예비/교대 인원(手明 또는 手替) - 테아키. 빈손이라는 뜻으로 손 수(手)자가 들어가면 예비/교대 인원이다.
기마무사(馬上侍) - 바죠 사무라이. 말을 타는 신분의 무사. 통상 100~200석급.
궁병(弓) - 유미. 활을 사용하는 전투병.
본진 표식(馬印) - 우마지루시. 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깃발을 들고 있다.
와카토(若党) - 사무라이 견습생이라는 견해도 있고, 그냥 하인으로 치기도 한다.
구소쿠종자(具足持) - 무사용 갑주인 구소쿠를 운반한다.
화살통(箭箱) - 야바코. 화살이 든 상자를 운반한다.
탄약통(玉箱) - 타마바코. 탄약이 든 상자를 운반한다.
하인(小者) - 코모노 또는 코샤. 주인을 도우며 물건을 운반한다.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의 일종.
차도시락(茶弁当) - 챠벤토. 주인이 마실 차와 벤토를 운반한다.
종군승(坊主) - 보즈. 왜승을 뜻한다.
궤짝(長持一棹) - 나가모치이치사키. 옷 등을 넣어 보관하는 뚜겅 있는 직사각형의 큰 상자.
단총(手筒) - 데즈츠. 주인이 사용하는 짧은 단총을 운반한다.
등꽂이깃발(旗指) - 하타사시. 전장에서 가문을 표시하는 사시모노(指物)라는 깃발을 등에 꽂고 있다.

100석급
군역은 창 한 자루를 드는 것이며, 등성시에는 창병(槍) 1명, 츄겐(中間) 1명을 대동해야 한다.
창병(槍)의 경우 사시마 요시히코(笹間良彦) 선생은 '야리모치(槍持)'라고 하여 주인의 창을 들어주는 종자로 해석했는데 이 견해에 따를 경우 가장 기본이 되고 수가 많은 창병이 하타모토에게 한 명도 없게 된다. 반대로 다른 책에선 창병으로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사무라이에게 필수적으로 딸린 야리모치가 없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짐. 그래서 일단 이 문서에선 창병으로 분류했는데, 야리모치일 수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해 주기 바람.
츄겐(中間)은 무가봉공인의 일종으로 평시는 잡일을 하다가 전투에도 동원되는 인력을 뜻한다.
대부분의 경우 200석급 이상은 하타모토, 이하는 고케닌(御家人)급이지만 예외도 있어, 200석 이하의 하타모토와 이상의 고케닌도 존재하였다. 포인트는 하타모토와 고케닌의 구분이 봉록의 높낮이가 아니라 쇼군의 알현 여부라는 것이다. 즉, 100석급이라도 쇼군을 알현할 수 있으면 오메미(御目見) 신분의 하타모토인 것이고, 반대로 200석~400석급의 예외적인 고케닌들의 경우 하타모토 보다 봉록이 높을지라도 쇼군을 알현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는 하남(下男), 하녀(下女) 고용이 가능했으나, 이 모두를 갖추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실제로는 츄겐 한명, 하녀 1명이나 겨우 고용했다고 한다.

2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徒步侍) 1명, 창병 1명, 갑주종자(甲冑持) 1명, 말구종(馬の口取) 1명, 짐말꾼(小荷駄) 1명에 말 한 필이다.
여기서 도보무사(徒步侍)는 이름 그대로 보병이며, 3000석급 이상은 예하에 기마 사무라이까지 두게 된다. 도보무사는 엄연한 하급 사무라이에 해당하며, 나머지 보직은 아시가루나 무가봉공인이다.
갑주종자(甲冑持)는 주인의 갑옷과 투구를 운반한다. 앞으로도 무슨 무슨 모치(持)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할 텐데 사장 비서나 정치인 보좌관을 속되게 부르는 말인 '가방 모찌'와 같은 어원이다. 자료에 따라 토리(取), 가츠키, 가츠쿠 등등이 나오는데 전부 '무엇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구종(馬の口取)은 당시 시스템이 말 한 필에 고삐잡이가 한 명씩 붙는 게 필수적인지라 존재하는 자리이다. 하타모토의 신분이 올라가면 승용마와 전투마가 구분이 되어 말이 두필이 되는데 그럴 때는 말구종도 2명이 된다.
짐말꾼(小荷駄)은 원칙적으로 말을 이용한 짐꾼이긴 한데, 200석급이면 주인도 말이 없어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인지라, 짐말을 구하는 것은 비용상 언감생심이어서 그냥 등짐을 지었다.
군역 T/O 자체는 이렇게 되어있으나 하타모토에게 200석은 무척 가난한 것이라 5명의 사용인(使用人)을 전부 두는 사람은 드물었고 심지어 말 한필 조차 없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말을 키우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데 여기엔 말구종 급료까지 포함이어서 부담이 배가된다. 서양 기사는 단어의 어원 자체가 말 타는 무사이지만, 일본의 사무라이는 말의 유무로 구분하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창 한 자루가 최저 조건이다. 물론 기마무사가 도보무사보다는 높은 신분.
사실상 하타모토의 하한선이며 생활이 극히 힘들어 빚으로 생활한다. 염두에 둬야 할 점은 현대는 인건비가 비싸고, 물자가 싸지만 과거에는 그 반대였다. 예를 들어 현대의 말 값은 비싸지만 인건비는 더 비싸다. 그런데 과거는 반대라 말 키우는 비용이 더 들지, 말구종 봉록은 싸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신이나 하인을 몇 사람이나 둔 사무라이가 극빈층이라는 개념이 가능하다. 과거의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이점이 자주 간과됨.

3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1명, 창병 1명, 갑주종자 1명, 말구종 1명, 짐말꾼 1명, 조리담당(草履取) 1명으로 총 6명이다. 자료에 따라 이것은 250석급으로 계산하고, 300석은 의복모치 1명을 추가해 7명으로 나오기도 한다.
여기서 조리(짚신) 담당(草履取)이라는 보직이 처음 나오는데, 하인 시절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추울 때 따뜻하라고 품속에 품고 있다가 그의 눈에 들어 출세를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유명한 일화. 이때의 히데요시 보직이 조리담당인 것이다.
여기까지도 최빈층의 무사로 결혼조차 하기 힘들었고, 빚을 지며 생활하였다. 300석을 4공6민으로 계산하면 무사의 수입은 40%인 120석이다. 그리고 이걸 1가마니에 3말 5되들이 가마니로 다시 계산하면 340가마니고, 화폐로 환산하면 10 가마니 당 3냥이니 약 100냥이다. 즉, 300석급 무사는 약 100냥의 수입이 있는데 지출로 가족과 종자의 식비가 25냥, 의류비 30냥, 봉공인에게 지급되는 급료가 30냥, 온갖 잡비가 25냥 하면 총 110냥으로 10냥이 적자이다. 막부 규정에 따라 300석급 무사는 평상시에도 6~7명의 종자와 봉공인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4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2명, 창병 1명, 갑주종자 1명, 말구종 1명, 짐말꾼 1명, 조리담당1명, 의복종자(挟箱持) 1명, 활운반(立弓) 1명으로 총 9명이다.
의복 종자(挟箱持)는 의복이 들어 있는 상자를 운반하는 담당이며, 활운반(立弓)의 경우 궁병이 아니라 주인의 활을 운반하는 보직으로, 전투병으로서 궁병은 3000석급 이상에만 있다.
여기까지 읽으면 죄다 무슨 00종자(모치)나 짐꾼만 있냐며 전투는 누가 하는지 의문이 생길텐데, 당시 일본의 전투 방식은 주인인 사무라이가 최대의 전투력을 낼 수 있게 지원하는 개념이라 이런 보조 병력이 많이 필요했다. 400석급은 하타모토 본인까지 포함하면 총 10명인데 그중 전투병은 4명(하타모토, 도보무사 2명, 창병)으로 40%밖에 안되며, 가록이 올라가는 몇천 석의 하타모토 군역도 대략 이 정도의 전투병 비율을 유지한다. 그래도 나머지 인원은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주인 곁에서 창과 활을 들고 따르는 등 반쯤 전투병 역할을 하며, 순수하게 백성(부마루)들을 동원하여 식량을 운반하는 경우 아예 정원외이다. 또한 전투도구는 각종 모치와 짐꾼들이, 식량은 부마루가 운반하는 것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5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2명, 창병 1명, 갑주종자 1명, 말구종 2명, 짐말꾼 2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1명, 활운반 1명으로 총 11명에 말 2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말 한필 정도나 겨우 구비했고, 심지어 말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평시 등성은 사무라이 2명, 창병, 조리담당, 말구종, 의복모치, 츄겐 등 7명 정도이다. 집안에는 용인(用人), 문지기(門番), 와카토[若党], 취사부(炊飯下男)와 하녀 4~5명 정도는 갖춰야 500석 격으로 불릴 수 있었다.
500석부터는 조미토리(蔵米取)가 아니라 지행지(知行所)를 배정받았는데, 그렇게 되면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사용인들의 업무 분담이 있었고 그럼으로 쉽게 줄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행지를 직접 다스리는 것은 아니고 막부의 대관에게 맡기고 연공만 징수하였다.
그리고 500석부터 하타모토의 중견에 해당되며 좋은 직책을 받을 수 있었다. 막부 시대에는 가록 보다 높은 직책에 임명되면 그에 맞추어 직책수당을 줘야 하기 때문에, 500석 무사부터는 이것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6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3명, 창병 1명, 철포병(鉄砲) 1명, 갑주종자 1명, 말구종 2명, 짐말꾼 2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1명, 활운반 1명 등 총 13명이다.
무슨 무슨 야리가 아니라 순수한 전투병인 '철포병(鉄砲)'이 등장하는데, 신분은 아시가루이다. 그렇다면 600석급에서 사무라이는 주인 포함하여 4명, 전투병은 사무라이들을 포함하여 6명이 된다.
이 정도로 가신들이 많아지면 가로(家老) 개념이 등장하는 데 주인을 대신하여 집안과 영지를 단속한다. 하인들도 많아져 문지기 2~4명, 집 일꾼 2명, 하녀 3명(부엌, 세탁, 청소), 취사부 1명 정도가 있다.

7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4명, 창병 2명, 철포병 1명, 갑주종자 1명, 말구종 2명, 짐말꾼 2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1명, 활운반 1명 등 총 15명이다.
평시 등성은 사무라이 3~4명, 의복모치, 츄겐, 조리담당, 말구종, 야리모치 1~2명으로 총 10명 정도이다.
저택 내에는 용인, 사무라이, 말구종, 문지기, 하녀, 취사부등 16~17명 정도를 부린다. 당시는 4공6민[11]이 기본이므로 지행지가 700석인 하타모토는 그중에서 280석을 받게 되는데 이 정도면 하인들을 부리며 매일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이다. 500석 이하는 생활에 쪼들리고, 1000석 이상은 군역이 과중하여 6~700석이 가장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8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4명, 창병 2명, 철포병 1명, 갑주종자 1명, 말구종 2명, 짐말꾼 2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1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沓箱持) 1명 등 총 17명.
조리토리를 '신발담당'으로 번역 안한 것은 바로 이 와라지종자(沓箱持) 때문이다. 둘 다 짚신의 일종이지만 조리는 편히 신는 쓰레빠, 와라지는 발목까지 묶어주어 좀 더 발에 밀착하는 신발로 장거리 여행 때 필수품이다. 그리고 원 보직명은 쿠츠바코모치(沓箱持)인데 여기서 쿠츠바코는 와라지를 담은 상자를 뜻한다. 학자에 따라 이 보직을 말의 발굽싸개 담당으로 해석하기도 함.
그리고 조리토리나 쿠츠바코모치, 둘 다 주인의 신발 담당인데 왜 한쪽은 '토리', 다른 쪽은 '모치'가 들고 다닌다고 하는지는 미스터리. 자료에 따라 조리토리도 그냥 '조리모치'라고 나와 있기는 하다.
이 정도 석고이면 영지가 2개 마을 이상이어서 사용인들이 늘어나고 츄겐만 10명 가까이 된다.

9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5명, 창병 2명, 철포병 1명, 갑주종자 2명, 말구종 2명, 짐말꾼 2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2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 1명 등 총 19명이다.
등성은 사무라이 4명, 야리모치 2명, 말구종, 의복종자 2명, 조리담당, 츄겐 등 11명을 동반한다.

10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5명, 창병 2명, 철포병 1명, 갑주종자 2명, 말구종 2명, 짐말꾼 2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2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 1명, 아시가루 감독(押足軽) 1명 등 총 20명이다. 말은 주인용 2필 외에도 짐꾼용 2필이 필요하지만 기껏해야 주인용 2필이 보통이었다.
여기서 첫 등장하는 아시가루 감독(押足軽)은 각종 종자(모치)나 짐꾼들이 무가봉공인의 일종이며 이들을 감독하는 보직이라는 뜻이다. 즉, 이름과 달리 아시가루 계급인 창병과 철포병을 감독하는 보직이 아닌 것이다.
1000석을 4공6민으로 하면 400석 수입인데 사용인들에게 53석을 준다고 추정하면 347석이 남아 생활이 안정되었다.
이 계급은 막부의 요직인 메츠키(目付)[12]나 쓰카이반(使番)[13]을 맡게 된다.

11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5명, 창병 2명, 철포병 1명, 갑주종자 2명, 말구종 2명, 짐말꾼 2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2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 1명, 아시가루 감독 1명, 장도 1명(長刀), 우비종자 1명(雨具持) 등 총 23명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보직으로 주인의 창자루에 칼날을 단 형태의 병기인 장도(長刀)를 들어주는 인원과, 역시 주인의 우비를 들어주는 우비종자(雨具持)가 있다. 둘 다 주인의 물품을 들어주는데 한쪽은 물품명만 있고, 다른 쪽에만 모치(持)라는 접미사가 있는데 자료에 따라 양쪽 다 모치(持)가 붙어 있기도 하다.
이하 1200석급 부터 1900석급까지는 주인을 제외한 총인원만 적으면 1200석급 25명, 1300석급 27명, 1400석급 28명, 1500석급 30명, 1600석급 31명, 1700석급 33명, 1800석급 35명, 1900석급 36명이다. 1000석~1900석급은 에도에 700평의 토지를 제공받아서 생활 하였다.

2000석급
군역은 도보무사 8명, 창병 5+1명, 철포병 2명, 갑주종자 2+1명, 말구종 4명, 짐말꾼 4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2+1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 2명, 아시가루 감독 2명, 장도 1명, 우비종자 1명 등 총 38명이다.
+1명은 원문에는 빈손을 뜻하는 테아키(手明 또는 手替) 1명으로 되어 있는데 교대/예비 인력이다. 당시 일본군의 특징인데 온갖 보직에 이러한 교대/예비병력이 포함된다.
이 정도의 하타모토 부터는 숫자가 급격히 적어지며 보통 어떠한 직책을 맡고 있다.

3000석급
군역은 기마무사(馬上侍) 2명(+와카토(若党) 2명, 창병 2명, 구소쿠종자(具足持) 2명, 말구종 2명), 도보무사 8명, 창병 5+1명, 철포병 3명, 궁병(数弓) 2명, 갑주종자 2+1명, 말구종 4명, 짐말꾼 4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2+1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 2명, 아시가루 감독 3명, 장도 1명, 우비종자 1명, 본진표식(馬印) 2명, 화살통(箭箱) 1명, 탄환통(玉箱) 1명, 도합 56명.
말은 신분의 상징이라 하타모토급의 필수품인데, 3000석급 하타모토는 예하에 기마 무사를 2명 두고 있다. 바죠(馬上) 사무라이, 바죠슈(馬上衆), 키바(騎馬) 사무라이, 키시(騎士)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전부 기마무사를 뜻한다. 기마무사라는 신분상 200석급 무사는 돼야 하지만 100석급이 보통. 그래도 기마무사의 군역을 200석급으로 계산하여 각자 창병 1명[14], 구소쿠종자 1명, 말구종1명, 와카토 1명이 붙는 등 200석급 하타모토와 거의 동일하다. 참고로 도보무사들은 각자 대충 50석으로 계산된다.
와카토(若党)는 자료마다 정의가 틀린데 단순히 무가봉공인의 일종으로 하인이라는 견해도 있고, 사무라이 견습생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하타모토의 도보무사격인 듯.
구소쿠종자(具足持)도 갑옷 운반자인데, 주인의 갑주를 운반하는 갑주종자(캇츄모치)와 달리 한 단계 낮은 기마 무사용 갑옷인 구소쿠(具足)를 운반하는 종자이다.
궁병(数弓)은 그냥 활을 사용하는 전투병이다.
본진 표식(馬印)은 대장의 위치를 표시하는 '우마지루시'를 들고 있는다. 우마지루시는 깃발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갖은 모양의 상징물인 경우도 많다.
화살통(箭箱), 탄환통(玉箱)은 이름 그대로 화살이 들어간 상자와 탄환이 들어간 상자를 운반하는 보직. 자료에 따라 화살통과 탄환통 뒤에 종자를 뜻하는 '모치()'가 표기된 경우도 있다.
하타모토가 이 정도 신분이면 사실상 작은 다이묘급으로 지행지를 받아 직접 경영하는데, 약 250가문이 있었다. 거주하는 곳도 진야(陣屋)라고 불리는 저택 겸 관공서이다[15] .기마무사는 그 아래에서 정무를 보는 가로급에 해당하며, 저택 안에 무사들이 살기 위한 '나가야(長屋)'라는 건물이 있다.

4000석급
군역은 기마무사 3명(+와카토 3명, 창병 3명, 구소쿠종자 3명, 말구종 3명, 하인(小者) 3명), 도보무사 9명, 갑주종자 4명, 창병 5+2명, 철포병 3명, 궁병 2명, 말구종 4명, 짐말꾼 5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4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 2명, 아시가루 감독 4명, 장도 1명, 우비종자 1명, 본진표식 3명, 화살통 2명, 탄환통 2명, 차도시락(茶弁当) 1명, 종군승(坊主) 1명, 궤짝 4명(長持一棹) 등 합계 79명이며 말은 10필이다.[16]
등성시에는 4인이 지는 가마(駕籠)를 타며 사무라이 7명, 아시가루감독 1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1명, 우천시 우비종자 1명, 창병 1~2명, 와카토 2~3명을 대동한다.
하인(小者)은 무가봉공인의 일종으로 물건 등을 운반한다. 하타모토의 짐말꾼과 비슷한 역할.
차도시락(茶弁当)은 주인이 마실 차와 벤토를 운반하며 종군승(坊主)은 군을 따라다니는 왜승이다. 임진왜란고니시 유키나가의 종군승이자 서정일기의 저자 덴케이(天行)가 유명하다.
궤짝(長持一棹)에서 '長持'는 옷 등을 넣어 보관하는 뚜껑 있는 직사각형의 큰 상자를 가리키는데 '一棹'는 기다란 작대기로 꿰서 어깨에 맨다는 뜻.
저택의 크기는 2000평 정도이며 지행지가 약 8개 마을에 달한다.
아코 사건(赤穂事件)이라고 불리는 추신구라는 에도 막부에서 의전을 담당하는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가 다이묘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칼부림을 당하며 시작되었다. 이때 키라 집안의 고쿠다카가 4200석! 그리고 아사노 가문의 사무라이 46명이 복수하기 위해 키라 집안으로 가서 가로부터 하녀까지 몽땅 죽였는데 이때 자리에 없던 인원까지 합쳐 89명이라고 한다. 즉, 4천석 하타모토라면 평시에도 부하들과 하인들이 이 정도 되는 것이다. 또한 키라 가문은 고케(高家, 고가)라고 하여 막부의 의식전례를 담당했는데 이러한 고케 가문은 다른 하타모토 보다 가록이 높았다.

5000석급
군역은 기마무사 5명(+와카토 5명, 창병 5명, 구소쿠종자 5명, 말구종 5명, 하인 5명), 도보무사 9명, 창병 10+2명, 철포병 5명, 궁병 3명, 갑주종자 4명, 말구종 4명, 짐말꾼 5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4명, 활운반 1명, 와라지종자 2명, 아시가루 감독 4명, 장도 1명, 우비종자 1명, 본진표식 3명, 화살통 2명, 탄환통 2명, 차도시락 1명, 종군승 1명, 궤짝 4명, 단총(手筒) 1명, 등꽂이깃발(旗指) 6명 등 합계 103명이다.
단총(手筒)은 테즈츠라고 불리는 주인이 사용하는 짧은 단총을 운반한다.
등꽂이깃발(旗指)은 전장에서 주인의 가문을 표시하는 사시모노(指物)라는 깃발을 등에 꽂고 있는다.
등성 때는 4명이 지는 가마를 타며 30명 정도를 동반하여 작은 다이묘 행렬에 진배없다. 5000석에 해당하는 직책이 없다 보니 할 일이 없었다. 산하의 기마무사는 200석을 받았다.
5000석 이상의 하타모토는 약 100명인데 그중에서 유력한 33가문은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참근교대를 하였다. 이렇게 참근교대 하는 가문과 고케 가문은 같은 하타모토 중에서 가록이 높았다.
이하 6000석~8000석급은 생략하는데 총인원만 따지면 하타모토 본인을 제외하고 6천석 127명, 7천석 148명, 8천석 171명이다. 8천석급 부터는 에도의 저택과 지행소의 진야 말고도, 다이묘처럼 교외지역의 별저인 시모야시키(下屋敷)가 있었다. 부하들의 봉급도 다른 하타모토 보다 더 준다. 에도의 저택 부지로 5천~7천석급은 1,800평, 8천~9천석급은 2,300평을 제공 받았다.

9천석급
군역은 기마무사 8+3명(+창병 8명, 와카토 8명, 구소쿠종자 8명, 말구종 8명, 하인 8명), 도보무사 14명, 갑주종자 4명, 창병 20+3명, 철포병 15명, 궁병 10명, 말구종 6명, 짐말꾼 9명, 조리담당 1명, 의복종자 4명, 활운반 2+2명, 와라지종자 3+1명, 아시가루 감독 5명, 장도 2명, 우비종자 1명, 본진표식 3명, 화살통 2명, 탄환통 2명, 차도시락 1명, 종군승 1명, 궤짝종자 4명, 단총 2+1명, 깃발담당 6명, 화물감독 1명(宰領) 등 합계 193명이다.
1만석 이상은 다이묘임으로 하타모토의 한계선이다. 이 정도 고쿠다타는 9500석의 요코타(横田) 가문 하나뿐이며 군역 규모 등 모든 분야에서 다이묘와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1만석 다이묘부터는 참근교대 과정에 잡다한 격식이 있으므로 오히려 9천석 하타모토가 여러모로 편했다.

4. 각종 매체에서의 하타모토



[1] 물론 휘하 무사들 봉급도 줘야 하고 농민들도 먹고 살아야 하고 기타 필요경비도 들어가고 쇼군에게 세금도 내야 하니 실제 손에 쥐는 돈이 많지는 않았다.[2] 키츠레가와 번(喜連川)은 5천석에 불과하였지만, 무로마치 쇼군에 대한 예우로 다이묘로 인정해주었다. 다만 마지막 쇼군 요시아키의 직계 후손은 아니고, 칸토 쿠보에서 갈라져 나온 오유미 쿠보(小弓公方)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 쇼군 요시아키와는 한자가 다르다)를 시조로 하는 키츠레카와씨의 직계이다.[3] 하타모토는 5천, 고케닌만 1만 7천이라는 말도 있다.[4]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 보면 보신전쟁 당시에 쇼군인 요시노부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처럼 역적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전쟁을 쉽게 포기하려 하자 막부군 인사들이 관동에 직신들이 8만이나 있는데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하려 하냐며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이 나온다.[改易] 영지 및 재산몰수[蔵米取] 蔵米는 막부의 미곡창고이며, 뒤에 '取'가 붙으면 그것을 받고 사는 사람을 뜻한다.[7] 하남, 하녀, 취사부 등 집안에서 부리는 사람[8] 다만 이 과정에서 실제로는 다소 모자란 경우에도 어찌저찌 충족한 것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9] 우리가 '쪼리' 또는 '쓰레빠'라고 부르는 그것[若党] 사무라이 견습생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이 자료에 따르면 그냥 하인[11] 영주가 4할을 같고, 영민을 6민을 취함[12] 에도막부 시대 정무 전반을 감찰함. 정원 10명에 석고는 천석이었다.(800석급 하타모토가 임명되면 추가로 200석의 직책 수당을 주어야 한다.)[13] 전국시대에는 전령, 에도시대는 감찰 담당이었다. 에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관리에 대한 감찰을 한다. 석고는 1천 석이며 정원은 에도 초기 25~28명, 중기 50명 후반, 말기에는 무려 112명.[14] 이때는 창을 들어주는 종자(야리모치)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15] 다이묘들은 성에서 거주하였는데 성이 없는 3만석 이하의 다이묘에서부터 3천석 이상의 하타모토는 진야에서 거주한다.[16] 실제로는 3~4필 정도[17] 타 RPG 게임의 그 크리티컬이 아니다. 위저드리의 크리티컬은 설정상 적의 목을 참수해 즉사시키는 능력이다.[18] 이름값을 하는 듯,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섬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