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6:27:22

가쓰 가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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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초대 해군경
가쓰 가이슈
勝海舟 | Katsu Kaishu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0px-%E5%8B%9D%E6%B5%B7%E8%88%9F.jpg
<colbgcolor=#b0313f> 출생 1823년 3월 12일
무사시국 에도 혼조
(現 도쿄도 스미다구)
사망 1899년 1월 19일 (향년 75세)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現 도쿄도 미나토구)
묘소 센조쿠이케 공원 (도쿄도 오타구)
재임기간 초대 해군경
1873년 10월 25일 ~ 1875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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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본명 요시쿠니(義邦) → 야스요시(安芳)[1]
통칭 린타로(麟太郎)
아호 가이슈(海舟)
부모 아버지 가쓰 고키치
어머니 노부
형제자매 여동생 준코
배우자 정실 다미 외 5첩
자녀 4남 5녀
친척 매제 사쿠마 쇼잔
작위 백작
위계 정2위(正二位)[2]
군사 경력
임관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1기)
복무 막부해군
1855년 ~ 1868년
막부육군
1868년
일본제국 해군[3]
1872년 ~ 1899년
최종 계급 군함봉행 (막부해군)
군사총재 (막부육군)[4]
참전 보신전쟁 }}}}}}}}}
파일:Kaishu_Katsu_2.jpg
막부 말기의 가쓰 가이슈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의 가쓰 가이슈

[clearfix]

1. 개요

에도 막부 말기(막말)부터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일본 해군의 기초를 마련했다. 막부의 가신으로서 개항파였지만 양이파를 탄압하는 데 반대하고, 해군 조련소 내에 양이파 탈번 무사들을 허용해 새로운 시대의 일본인으로서 살 수 있게 했다. 그 탓에 메이지 유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막부로부터 근신을 명받고 에도에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막부가 망할 때 유혈 사태를 줄이려 노력했으며 신정부 출범 후에는 정치나 정부 관리직을 하지 않고 재야에서 사업 등을 영위했다.

2. 생애

쇼군 직속 가신 하타모토인 가쓰 코키치(勝小吉)의 장남으로 에도 혼조(현 스미다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꽤나 유명한 인물인데, 술도박은 안하지만 여색을 밝히고, 검술 실력이 뛰어나 도장깨기를 하고 다니거나 동네 왈패들을 때려잡고 다녔다는 등 독특한 인물이었다.

행적이 특이해서인지 별다른 업적을 남긴 사람도 아닌데 여러 창작물에서 다뤄지고 있다. 전일본검도연맹 현창자 중 한명이자 막부말의 검성이라 불린 오다니 노부토모가 조카인데, 오다니와 대결하여 세판 다 졌다거나 혹은 오다니를 간단하게 때려눕혔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이게 왜 특이하냐면, 오다니는 세판을 붙어서 첫판은 이기고 두번째판은 일부러 진 뒤 세번째판에서 승부를 내는 연출을 즐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오다니가 전력을 다하느라 그런 연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정도로 코키치가 강했다는 뜻.

어릴적 이름과 통칭은 린타로(麟太郎)이며 본명은 요시쿠니(義邦). 젊은 시절에는 검술 수행에 심취했다. 아버지를 닮아 재능이 있었는지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의 면허개전을 받았다. 검술 스승의 권유로 (禪) 수행을 한 적도 있다. 이후 난학(네덜란드학)과 서양 군사학을 배우고, 이를 다시 가르치면서 사쿠마 쇼잔(카이슈와 처남매부지간)과 함께 유명해졌다.

1853년 페리 제독흑선내항 사건을 계기로 강제개항하게 된 에도 막부가 해군 양성을 위해 해군 조련소를 나가사키에 설립할 때 그의 서양 군사학과 네덜란드어의 소양으로 해군 전습소 전습생 감독을 맡게 되었다. 여기서 네덜란드인들과 접촉하면서 세계 정세에 관한 정보와 시야를 얻게 되었다.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사절단을 이끌고 배의 선장으로 태평양을 횡단해 미국에 갔다 오는 데 성공한다. 미국의 새로운 사회제도를 배우고 돌아왔다. 태평양을 건너간 첫 번째 일본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멕시코로 건너 간 상인 다나카 쇼스케. 일본인이 직접 선박을 몰고 태평양을 횡단한 것은 가이슈가 최초. 다만 배멀미로 드러누워서 선장 역할은 거의 못 했다고 한다. 대신 통역사로 동행한 존 만지로가 선장 역할을 해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일본인만으로 태평양을 횡단 항해했다는 것은 메이지 정부가 퍼트린 거짓말이고, 실은 미국인이 선박을 조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세한 사항은 존 만지로 항목 참고

1862년 12월 29일에 사카모토 료마가 처음엔 그를 암살하러 왔다가 그에게 감복하여 제자를 자청하고 그에게서 항해술을 배웠다는 일화가 있다. 진짜로 암살하려 왔는지는 의문.

1862년에 에도 막부에 제출한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해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서가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인해 인정받아서 1863년, 고베에 해군조련소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지도했다. 이즈음 료마가 남긴 편지에는 카츠 카이슈는 쇼군직을 없애야한다는 말을 했다고 적혀있다. 에도 막부의 가신이면서도 서양의 민주주의 제도에 찬동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카츠 카이슈는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을 주장하면서 서양(미연방합중국)처럼 하나로 통일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와 그동안 소외됐던 다른 번과의 연합정치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는 조슈 번이 폭주해서 일으킨 금문의 변(1863)으로 그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1864년 해군봉행에서 해임되고, 다음해 해군조련소도 폐쇄됐다. 이후 2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1866년에 해군봉행직에 복귀했다.

1867년,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죽었을 때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지만 에도 막부에 대해서는 이젠 끝났다고 생각했다.

1868년 3월 14일, 보신 전쟁에서 사이고 타카모리가 이끄는 천황파 신정부군이 에도 성으로 쳐들어올 때는 육군봉행(막부육군)의 계급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담판을 짓고 무저항으로 에도성을 비워줬다. 이른바 에도 성 무혈입성. 이 일은 내전을 피해서 불필요한 인명 피해와 국고의 손실을 막았다고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사이고한테 3만 량의 돈을 댓가로 받고 막부를 팔아넘겼다는 의심도 사고 있다. 또한 항복 전에 미리 공순 반대파였던 신센구미를 에도에서 떨어진 코슈로 파견하여 일부러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 후로는 저술활동을 하며 지내며 구 막신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하기도 하고 시즈오카녹차 산업을 일으키기도 하며 메이지 정부하에서 고문을 맡기도 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중신 중 유일하게 반대하였다.

말년에 그는 진정 용기있었던 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이었다고 회고하면서 유신 지사들을 우회적으로 디스했다.

3. 기타

게이샤 출신인 타미코를 아내로 두었다. 흑선내항 전에는 난학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괄시를 받아 변변찮은 일거리가 없던 카이슈를 위해 생계를 책임지던 현모양처였고, 카이슈 본인도 주변에 아내를 자랑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문제는 카이슈도 제 아비를 닮았던건지 출세하기 시작하더니 여색을 밝혀, 여기저기서 첩과 서자를 마구 만드는 것도 모자라 이들을 타미코도 있는 본가로 데려와서 함께 살게 했다. 타미코는 카이슈 생전에는 이에 불평하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내심으로는 질릴대로 질렸는지, 카이슈 사후 자기가 죽을 때가 되자 남편 옆에 묻지 말고 먼저 죽은 아들 코로쿠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코로쿠의 데릴사위인 쿠와시가 유언을 어기고 카이슈 옆에 묻었다고 한다.

한중일 3국 연대를 강조하며 메이지 정부의 공격적인 아시아 정책을 비판한 인물답게 조선 정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흥선대원군이 죽자 "대원군이 마침내 죽었구나. 이 인물에 대해서는 갖가지 평가가 있지만 어쨌든 일세의 위인이다. ······ 나는 대원군이 나를 알아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추모했다.[5] 둘은 선물도 자주 교환했고 당시 일본에 있던 영선군이 가쓰를 여러 번 찾았다고.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국화와 칼에 의하면, 어린 시절 개에게 불알을 물려 고자가 될 뻔했다고 한다. 의사가 수술하는 동안 아버지가 칼을 꺼내들고 "한마디라도 우는 소릴 내면 무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널 죽이겠다."(...)고 말했다고.자기 불알 아니라고 정확히는 가쓰 가이슈가 1831년 9살 때 학원에 가는 길에 생긴 일로 사경을 헤매다 대략 70여 일(혹은 50여 일이라고도 한다)이 지나서야 일어나 걸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많이 알려진 일화인지 구글에 카츠 카이슈를 검색하면 자동완성 검색어로 '카츠 카이슈 개(勝海舟 犬)'가 뜰 정도. 유튜브에도 이에 관련된 영상이 올라와 있다.

그의 사위가 일본 최초의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졸업자이며 대한제국화폐정리사업을 단행한 메가타 다네타로이다.

야마오카 텟슈, 다카하시 데이슈와 함께 막말(막부 말기) 3라 불렸다.

4. 대중매체에서의 가쓰 가이슈

파일:勝海舟.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 PK PS판 특전무장으로 등장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왕도의 개에서는 포괄적인 시각을 가진 현인으로 등장한다.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인공이 단순히 김옥균의 경호인을 하기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1974년 방영된 동명의 NHK 대하드라마 <가쓰 가이슈>의 주인공이다.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는 시즈카 카오루의 소설판에서 등장하였고, 이때의 에피소드가 1996년 애니메이션 79~82화로 각색되었다. 성우는 야기 코세이.

그리고 일본의 영 점프에서 연재되었던 괴작 만화 사무라이건에서는 평의회의 수뇌로, 평의회를 가지고 막부를 전복시킨다는 스토리로 나온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슨 순정만화풍으로 온화하게 그려놨는데, 그것도 황당하다. 만화에 의하면 사쿠마 쇼잔의 동료였다고 한다.

일본 드라마 타임슬립 닥터 JIN에서 코히나타 후미요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연기로 호평 받았다. 일본 영화 막부고교생에서는 타마키 히로시가 연기했는데 여기서도 타임슬립한 미래인들과 엮여서 좌충우돌 하는 역이다.

머나먼 시공 속에서 시리즈에서는 5편, 5편 풍화기에서 등장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으로 설정되었는데 상술한 실존인물의 행적 관련 설을 차용한 설정이다. 주인공 일행 앞에 때때로 훌쩍 나타났다 훌쩍 사라지는 인물이다. 호탕한 인품이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여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라 때때로 당황스럽게 하는 행동을 하는데, 스승의 이러한 행동이 료마의 두통거리로 설정되어 있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는 상당히 온건한 사람으로 등장하며 청일전쟁을 유일하게 반대한 인물이라 주인공인 이선 역시 그를 좋게 평가한다. 일본이 청나라에게 승리해도 중국을 모욕했으니 언젠가 중국이 복수하려들것이며 일본은 절대 4억 인구의 중국을 이길수 없다는 예언을 하고 향후 동양의 평화는 조선에게 달려있다는 말을 한다. 자국에 불이익인 삼국 간섭에서도 이 기회에 일본인들이 대륙 진출의 꿈을 접을 것이라고 좋게 평가한다.

[1] 메이지유신 이후 야스요시로 개명하였다.[2] 1899년 사후 추서[3] 해군경 사직 후 계급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나, 간접적으로 해군 발전에 기여하는 등 사실상 해군의 고문 역할을 맡았다.[4] 육군봉행→육군총재→군사총재[5] 히카와세이와(氷川清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