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9:37:23

미일수호통상조약

에도 막부 말기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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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00> 1853년 7월 8일 쿠로후네 사건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 체결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1858년 ~ 1859년 안세이 대옥
1860년 3월 24일 사쿠라다 문 밖의 변
1862년 2월 13일 사카시타문 밖의 변 (坂下門外の變)
1862년 5월 21일 사쓰마 번 지사 숙청 사건 (薩摩藩志士肅淸事件)
1862년 8월 21일 나마무기 사건
1863년 8월 15일 ~ 1863년 8월 17일 사쓰에이 전쟁
1863년 9월 30일 8월 18일의 정변 (八月十八日の政變)
1863년 ~ 1864년 시모노세키 전쟁
1864년 7월 8일 이케다야 사건
1864년 8월 20일 금문의 변
1864년 8월 24일 ~ 1865년 1월 24일 제1차 조슈 정벌
1866년 3월 7일 삿초 동맹
1866년 7월 18일 ~ 1866년 10월 8일 제2차 조슈 정벌
1867년 11월 9일 대정봉환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 (王政復古)
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보신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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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국기(1858-1859).svg 파일:에도 막부 국기.svg
미합중국 에도 막부
미일수호통상조약 | 美日修好通商條約
언어별 공식 명칭
영어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United States and Japan
일본어 [ruby(日米修好通商条約, ruby=にちべいしゅうこうつうしょうじょうやく)]

1. 개요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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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양 국가들은 증기 통신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The nations of the West hope that by means of steam communications all the world will become as one family.
타운센드 해리스, 홋타 마사요시와의 대담, 1857년 12월 12일[1]
1858년 7월 29일 일본 에도 막부가 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 쿠로후네 사건으로 맺은 불평등 조약이며, 안세이(안정) 5조약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으로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여 근대화를 시작했다. 이후 일본도 한반도로 들어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운요호 사건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과정과 유사하다.

2. 내용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막부 로주수좌 아베 마사히로와 그 뒤를 이은 홋타 마사요시는 막부 내부 및 여러 지방 번주들과의 논의를 거친 끝에 조약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조정 평공가 세력이 막부와 인척관계를 맺어 막부를 지지한 고셋케 세력을 누르고 고메이 덴노를 설득, 덴노는 칙허 불허 입장을 밝혔다. 홋타 마사요시가 천황의 칙허를 받기 위해 교토로 상경해 조정을 설득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사이 이이 나오스케가 이끄는 대 조정 강경파인 난키파가 막부 권력을 장악, 조정을 무시하고 조약을 승인했다.

이 조약을 맺음은 존왕양이 사상을 내건 막부 타도 운동으로 이어졌다. 안세이의 대옥사, 사쿠라다문밖의 변 등을 거쳐 막부로부터 조정 및 웅번들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 결국 막부가 몰락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899년 7월 17일 미일통상항해조약이 시행되며 효력을 잃었다.

일본 교과서에서도 불평등 조약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실상은 계약 자체는 당시 세계 정세에서도 딱히 불평등한 요소는 없었다. 불평등해지는 것은 조약을 체결하고 8년 후인 1866년에 관세 비율의 조항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부터 인데, 그 원인은 시모노세키 전쟁처럼 존황양이파 세력이 벌인 양이 운동으로 외국 선박을 공격하고 외국인에 대한 테러 때문에 막부가 그 책임을 지고, 미국에게 유리하게 관세 비율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금과 은의 시세차이로 일본의 금이 해외로 대량 빠져나가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 해당 인용구는 문명 5/기술에서 증기기관 기술의 인용구로 쓰이기도 하였다.[2] 이를 통해 무역의 전면 자유화를 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