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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발생일 | 1959년 6월 30일 |
유형 | 엔진 정비 불량 |
발생 위치 | 미국령 오키나와 이시카와시 상공 |
기종 | F-100D-25-NA |
운영주체 | 주일 미 공군 |
기체 등록번호 | 55-3633 |
출발지 | 가데나 공군기지 |
탑승 인원 | 조종사 1명 |
사망자 | 초등학생: 11명 |
주민 6명 | |
부상자 | 210명 |
생존자 | 승무원 1명 전원 생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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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森小学校米軍機墜落事故
宮森小米軍ジェット機墜落事故
1959 Okinawa F-100 crash
Miyamori Elementary School crash
1. 개요
1959년 6월 30일 오전 10시 40분경 미합중국 공군의 F-100D 전투기가 미군정 오키나와 이시카와시(石川市, 현 우루마시)의 미야모리 초등학교(宮森小学校)에 추락해 17명이 사망하고 212명이 부상당한 참사이자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미군기 사고.
2. 경위
사고기는 미공군의 초음속 제트 전투기인 F-100D 기종이며 앞서 대만에서 정비를 받은 후 오키나와 카데나(嘉手納) 기지로 옮겨졌다. F-100이라는 기종 자체가 크고 작은 고장이 많아서 손실된 기체들이 상당했는데 이 기체도 재정비를 마치고 시험비행을 하던 와중에 엔진 불량으로 조종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조종사는 일단 기체의 방향을 근처 언덕으로 돌려 놓고 탈출하였다. 그런데...기체가 멋대로 오른쪽으로 돌더니 시가지 쪽으로 날아갔다. 민가를 35채씩이나 쓰러뜨리고도 멈추지 않던 제트기는 미야모리 소학교의 함석 지붕을 들이박고 콘크리트 건물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추었다. 당시는 소학교에서 우유 급식이 이루어지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학생과 교직원의 대부분은 학교 건물에 있었고 때문에 학생들의 인명피해가 컸다.
사망자는 학생 11명을 포함한 17명[1], 부상자는 학생 156명, 교직원 2명, 주민 54명으로 총 212명이었다. 또 여러 민가들과 교실 그리고 공민관(公民館,마을회관)이 불길에 휩싸였다. 검은 연기가 어머어마하게 피어올랐고 놀란 사람들이 피난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워낙 대규모 사고였기 때문에 피해자 치료를 위해 오키나와 섬 중부의 의사란 의사는 거의 다 동원되었다고 한다.
3. 사고 이후
사고 다음날인 7월 1일 미군은 "카데나기지 소속 제트기가 훈련비행중 돌연 폭발, 조종사는 무사 탈출했으나 기체가 방향을 잃고 시내에 떨어졌다."고 발표했고 그 다음날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의 속을 긁어놓았다.개회 중이었던 류큐정부 입법원은 긴급히 교섭위원회를 열고 미군에 대한 엄중한 항의를 담은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사건특별위원회도 꾸려졌다. 7월 6일에는 오키나와의 각종 시민단체들이 <이시카와시 제트기 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자들을 위한 성금을 모금하였다. 또 일본 본토에서도 일본교직원조합 등의 단체들이 성금을 보내 왔다.
그러나 미군 측은 보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3년에 걸친 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유족들과 피해자들은 원래 요구했던 금액의 10% 정도밖에 보상받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키나와는 미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오키나와에 기지를 건설할 때부터 미군은 총검과 불도저를 동원하여 땅을 빼앗거나 헐값에 팔도록 강요했다. 이에 맞서서 1953년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闘争)이라는 운동이 일어났고 미군측은 땅값을 올려서 보상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키나와 사람등은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더 활발히 전개시켜 나갔다. 또 일본 본토로 오키나와가 복귀하게 되면 평화헌법을 통해 미군기지를 몰아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본토 복귀 운동이 대두하였다. 특히 1960년에 <오키나와조국복귀협의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된 후에도 미군기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사고기가 추락 직전에 바다에 100lb짜리 폭탄을 버렸다는 사실이 1999년에야 밝혀졌다.
2009년 6월 30일에는 사고 50주년을 맞아 사고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며 추도식이 이루어졌다. '사이좋은 지장보살'(仲よし地蔵) 앞에 천마리 종이학이 올려지고 평화의 종(平和の鐘)이 울리자 참석자들은 묵념을 올렸다. 미야모리 소학교에 있는 '평화자료실 630관'과 '우루마시립 이시카와 역사민속자료관'에서 관련 내용들을 볼 수 있다.
2013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해바라기-오키나와는 잊지 않는다, 그날의 하늘을(ひまわり〜沖縄は忘れない あの日の空を〜)>이 개봉되었다.
[1] 어떤 학생은 몸에 불이 붙은 채 음수대로 뛰어가다가 채 도달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