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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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 |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875년 9월 20일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 |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 |
1884년 12월 4일 | 갑신정변 |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 |
1885년 4월 18일 |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 |
1894년 7월 23일 | 갑오사변 |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 |
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 |
1895년 4월 17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 |
1895년 4월 23일 | 삼국간섭 |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 |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 |
1896년 5월 14일 | 베베르-고무라 각서 |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 |
1896년 6월 9일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 |
1897년 10월 12일 | 대한제국 선포 |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 |
1898년 4월 25일 | 니시-로젠 협정 |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 |
1902년 1월 30일 | 1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4년 1월 21일 | 대한제국 중립선언 |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 |
1904년 2월 8일 | 러일전쟁 |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및 경운궁 점령 | |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 |
1904년 5월 31일 | 대한시설강령 발표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 |
1904년 8월 22일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 |
1905년 4월 1일 | 한일통신기관협정서 |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 |
1905년 4월 16일 | 대한제국군 감축 |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와 진위대 감축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2일 | 2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3일 |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화 을사의병 발발 | |
1907년 7월 20일 | 고종 황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 |
1907년 7월 24일 |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 |
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군 해산 |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
1909년 7월 12일 | 기유각서 |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화 | |
1909년 9월 1일 | 남한대토벌 |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 |
1909년 9월 4일 | 간도협약 |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 |
1910년 6월 24일 | 한일약정각서 |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 |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운요호 사건 운양호 사건 | 雲揚號事件 강화도 사건 | 江華島事件 Ganghwa Island incident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 ||
시기 | 양력: 1875년 (고종 12년) 9월 20일 (음력: 1875년 8월 21일) | |
장소 | 강화도 초지진 | |
원인 | 운요호의 불법 측량으로 인한 조선과의 충돌 | |
교전국 | <rowcolor=black> 일본 제국 (공세) 승 | 조선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노우에 요시카 | 지휘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민덕[1] |
전력 | 해군 육전대: 22명 슬루프[2]: 1척 | 조선군: 400여 명 해안포 |
피해 | 2명 부상[3] | 35명 전사 16명 포로 |
결과 | 일본 제국의 승리 | |
영향 | 강화도 조약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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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5년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 '운요(雲揚, 한국 한자음으로 운양)'가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 등의 공격을 행한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졌다.2. 배경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자국을 봉건적 막부 체제에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시키며, 그 일환으로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내자 일본으로도 서구 열강을 따라 제국주의가 자연스레 스며들었고, 구시대적 사농공상 신분제가 철폐되며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잃은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이 활약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나길 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을 재침공하자는 정한론도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 소득을 얻고, 필요하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는 여론이 강해졌다.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1854년에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조선에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운운하며 상호 통상을 요구했지만, 당시 조선의 실권자는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했던 흥선대원군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청나라가 아닌 국가들과의 교류를 엄격히 금지했고, 이와 반대되는 행보를 보인 일본에게 적개심과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게다가 1869년에 메이지 정부의 서계(국서)를 받은 조선 정부는 일본이 천황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제의 용어를 쓴 것, 그리고 예전에 조선이 준 도서(圖署)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에 심히 불쾌해하며 서계를 접수하지 않고 반환해버렸다. 그렇게 조일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간 건 물론 일본의 정한론에도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1873년 일본에서는 정한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정한론 강경파가 실각하고 온건파가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정한론을 잠재우고자 1874년에 대만으로 소규모 원정을 보내기도 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의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통상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1874년 8월 청나라로부터 "일본이 대만 원정에 준비했던 5천 명 가량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할 수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조선이 미리 미국과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내용의 비밀 문서를 받았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결국 일본과의 교섭이 결정됐다.
1875년 2월 조선은 일본의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4]가 가져온 새로운 서계를 받아보았다. 조선의 요구대로 서계에서 '천황' 같은 단어는 빠졌지만 조선 조정을 자극할 만한 '대일본' 같은 용어가 사용됐음에도, 개항에 대한 고종의 의지가 강했기에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이 이를 극렬히 반대했으며, 동래 부사는 일본 사신이 대례복(메이지 정부의 공식 관복으로 서양식 의복)을 입고 성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그렇게 교섭에 난항을 겪자 모리야마는 일본 정부에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군함 파견을 요청했고, 일본 내부의 강경파는 외무경 이와쿠라 도모미,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 등의 동의를 얻어[5] 1875년 5월에 운요호를 포함한 두 척의 군선(軍船)을 부산으로 파견했다. 부산에서의 도발과 무력 시위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같은 해 9월 운요호는 단독으로 강화도에 무단 침입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고 한다.
3. 전개
3.1. 일본 제국 해군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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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
일본은 조선이 무력 시위에 굴복하거나 도발에 넘어가 먼저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한데, 조선은 일본의 의도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일본과 문제될 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던 부산의 관리들은 일본 함선에 선공을 가할 의사가 없었고, 조선 조정은 무력 시위 이후에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이후에도 협박이 있을 때마다 양보해야 할 것이라며 일본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교섭을 결렬시켰다. 사실 일본의 판단과는 다르게 타국의 영토를 무단으로 측량하는 것은 서양의 국제법에서도 불법이기 때문에, 만약 조선이 공격했어도 나중에 조선이 외교적으로 불리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강화도에서 2차 도발을 할 때는 수법을 바꾸어 식수를 얻으러 왔다고 둘러댔는데, 이것조차도 후술된 것처럼 일본의 조작으로 판명됐다.
부산에서의 1차 무력 시위를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간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는 해군성에 조선 침공을 건의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운요호를 일본 열도의 최북단인 홋카이도로 배치하려 했다. 홋카이도로 가는 도중 해군에 탄원한 이노우에는 결국 해군대보 가와무라 스미요시로부터 운요호의 목적지를 청나라의 잉커우[7]로 변경한다는 허락을 얻어낸다.
9월 20일, 운요호는 잉커우로 가는 길에 굳이 현재의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도달했다. 이노우에를 포함한 일부 승조원들이 단정을 타고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접근했는데, 때마침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 수군이 일본군 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단정을 향해 돌아가라고 명령함과 동시에 경고 포격을 가했고 단정은 이에 맞서 소총으로 응사한 후 운요호로 돌아갔다.
운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전말을 알기 어려우나, 일본의 역사가들은 마치 노구교 사건에서의 무타구치 렌야처럼 해군의 일부 강경파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본다. 반면 한국의 학자들은 행간의 맥락을 추정해 메이지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사건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8]
3.2. 교전
다음 날인 9월 21일, 운요호 모함(母艦)은 강화도에 접근하여 함포를 발사하며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였고 초지진은 파괴됐다. 그러나 운요호는 승조원이 수십 명 단위인 작은 배라서 이들만으로 강화도를 점령하기는 어려웠기에, 방어가 다소 허술한 영종도를 노려 공격했다. 승조원들 및 해병대원들로 편성된 일본의 해군 육전대가 영종도에 기습 상륙했고, 이들은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성(城)을 점령해 조선군의 대포 35문과 기타 무기를 노획하고 성에 불을 지른 뒤 도망갔다.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 35명, 포로 16명이었다. 일본 해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인데, 그마저도 교전으로 인한 부상이 아니라 해병 2명이 상륙 중 조수간만이 큰 뻘을 지나다가 발을 삔 것이었다. 9월 24일 운요호는 일본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4. 결과
9월 28일에 나가사키로 귀항한 함장 이노우에 소좌는 사건의 경위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고, 10월 8일 해군성은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운요호는 급수를 목적으로 우발적으로 강화도에 정박했고, 교전 당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으며, 모든 전투는 9월 20일 하루 동안 발생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앞뒤가 안 맞는 게 많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고, 이후 이노우에가 나가사키에 귀항한 다음 날인 9월 29일에 작성한 최초의 보고서가 2002년에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실에서 발견되면서 조작으로 판명됐다. 이 최초 보고서에 기록된 진실은 운요호는 의도적으로 강화도에 접근했으며, 물이 아닌 해안 측량과 조선 관리와의 면담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첫날인 9월 20일에는 일본 국기를 게양하지도 않았고, 모든 전투는 하루가 아닌 3일 동안 벌어졌다.이노우에가 보고서를 이렇게 날조한 이유는 운요호의 행동이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걸 뒤늦게 알아서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 주도의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위신을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했기에, 운요호의 군사 행위가 국제법상 용납될 수 없는 도발로 간주되는 건 곤란했다. 당시 국제법에 의하면 운요호가 한 것처럼 무단으로 타국의 해안을 측량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식수가 떨어졌을 때는 당사국의 허가 없이도 아무 항구나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또한 군함이 타국 영해에서 3일이나 있는 것은 일본이 먼저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3일도 하루로 줄였다. 한국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보고서 제출 후 발표 전에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먼저 읽어보고 조작에 대한 자문을 한 것은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와 이토 히로부미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온건파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조작된 보고서로 인해 운요호 사건의 전말이 "조선이 국제법을 준수하던 운요호를 의도적으로 먼저 공격했다"라고 왜곡되면서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게다가 정한론에 반대하던 온건파도 국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조선 출병 자체는 긍정적이었는데, 이들은 조선이 아니라 그 뒷배인 청나라,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면 이에 눈독을 들일 서구 열강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단 조선과 청에 외교 사절을 보내서 문제를 따져보고 외교적 해결에 실패할 경우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일본은 부산에 3척의 군함을 보내 무력 시위를 했으며, 이어서 1876년 2월에는 강화도로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함선을 보내 조선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지기를 요구했다.
4.1. 근대적 불평등 조약 강제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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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과 운요호 사건 |
본래 국제 조약은 상호 간에 이익이 되도록 체결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강화도 조약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약 자체가 일본에게 조선 연해의 측량권, 무관세, 일본인의 불체포 특권 등을 주어 조선의 자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요호 사건에서 강화도 조약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본 내부의 문제도 일정 부분 해결해주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잃고 잉여 인간이 되어버린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반란이 우후죽순처럼 터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내부의 불만을 해외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킴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을 위한 배후 시장을 어느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9][10]
혹자는 당시 일본에게 있어서 아시아 국가와의 평등 관계 수립은 국운이 걸린 외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보다 약한 나라를 짓누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국운이 걸린 문제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외교의 최고 과제는 막부 시절에 성립된 서양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고 어차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쪽과 남쪽에 광활한 바다를 접한 일본의 지정학적 상황에서는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 수 있는 국가가 조선, 청나라, 아니면 멀리 남쪽의 필리핀 정도 밖에 없었는데, 청나라는 너무 크고, 필리핀은 이미 서양 열강이 꿀꺽했거나 침을 발라놓은 상황이었기에 조선 밖에 남은 국가가 없었기는 했다. 당시 조선은 적극적인 쇄국으로 인해 서양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손길이 조선까지 닿기 전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5. 영향
운요호 사건은 일본 제국이 조선과의 상호 통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조선 침탈에 눈독을 들인 결과 훗날 을사조약(1905)과 경술국치(1910)를 예고·예견하고 있었던 사건이기도 하며,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미 문호 개방을 했던 일본과 불평등한 강제적 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쇄국 정책(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배제하였던 '문호 개방'을 완전히 하게 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결국 조선과 대륙 침공의 발판을 만들려고 했던 일본 제국이 만든 작품이자 정략적인 제국주의적 책략이었다.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1882년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서구열강과도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6. 논의
6.1. 패배의 원인
의문스러운 것은 왜 조선은 이보다 더 규모도 크고 무장도 잘 된 프랑스 해군(군함 7척을 끌고 왔다)과 미 해군(3천 톤 짜리를 기함으로 끌고 왔다)을 상대로 비록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는데, 왜 일본 해군의 운요호 한 척(250톤 슬루프. 참고로 판옥선이 200톤이다)에게 허무하게 털렸는가이다. #간단히 말하면 병인양요와 4년 전의 신미양요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미양요는 역사책에 흔히 "강화도의 5개 요새를 함락당했다" 정도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다. 이때 빼앗긴 대포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대포라고 할 수 있는 불랑기포를 대략 500문 가량, 총기는 무려 20,000정 가까이 나포되어 잃었다. 심지어 미군은 후퇴하면서 이것들을 물에 빠트리거나 불에 태웠기 때문에[11] 당연히 녹슬거나 녹아버린 대포들은 그대로 손망실해버렸다. 이 어마어마한 손실을 고작 4년만에 복구한다는 것은 산업혁명으로 자동공장이 있던 것도 아닌 조선으로서는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12] 게다가 요새의 성벽은 무너지고 화약과 식량, 군복 등이 대포와 마찬가지로 손망실 처리됐다.[13]
더욱이 문제는 이때 조선 조정에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증건과 당백전 발행으로 경제를 휘청이게 했던 것도 있지만, 당시 고종 10년(1873년) 11월 대원군이 축출된 이후다 보니[14] 이전의 실책을 바로 잡는데만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실제로 고종(대한제국)/생애 문서의 친정 목차를 보자. 인플레이션의 원흉이자 악화(惡貨) 자체인 청전을 폐지해야 하는데 당시 조선 왕실의 창고에는 청전 밖에 없었다. 심지어 고종실록 11년(1874년)[15] 3월 26일 기사를 보면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영에서 관할하는 오른쪽 연해 각진(各鎭)에 포대를 설치하는 공사를 지금 막 시작하였으니, 비용으로 쓸 돈으로 3만 냥에 한하여 지급해 주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무기 등의 물품도 지급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포대의 설치를 시작하는 것은 긴급한 일로서 해당 장수가 오늘날에 이르러 옮겨다 쌓는 데는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일 것이니, 본 영에서 잘 처리할 것입니다. 비용에 있어서는 경각사(京各司)의 저축이 바닥났으니, 실로 손쓸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 포세(包稅)의 원획(元劃) 중 1만 냥을 이미 실어 보냈으니, 우선 이것을 배정하여 쓰고, 나머지 비용은 사역원(司譯院)에 신칙해서 기일에 맞추어 모두 수송하도록 하며, 무기는 신의 부(府)에서 적절히 헤아려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나온다. 즉 포대 설치 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요새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는데, 그걸 설치하라고 줄 돈도 시간도 없었던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운요호가 쳐들어오니 일단 맞아주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방금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영에서 관할하는 오른쪽 연해 각진(各鎭)에 포대를 설치하는 공사를 지금 막 시작하였으니, 비용으로 쓸 돈으로 3만 냥에 한하여 지급해 주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무기 등의 물품도 지급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포대의 설치를 시작하는 것은 긴급한 일로서 해당 장수가 오늘날에 이르러 옮겨다 쌓는 데는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일 것이니, 본 영에서 잘 처리할 것입니다. 비용에 있어서는 경각사(京各司)의 저축이 바닥났으니, 실로 손쓸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 포세(包稅)의 원획(元劃) 중 1만 냥을 이미 실어 보냈으니, 우선 이것을 배정하여 쓰고, 나머지 비용은 사역원(司譯院)에 신칙해서 기일에 맞추어 모두 수송하도록 하며, 무기는 신의 부(府)에서 적절히 헤아려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고 조선이 아주 방비 강화에 손을 놓았던 것도 아니다. 조선의 방비는 철저하게 두 양요로 초토화된 강화도의 방비 복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요호는 탑재한 암스트롱 포로 초치진과 포격전을 펼쳐 제압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강화도에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하지 않았다. 운요호라는 자그마한 배 한 척과 그 안의 소수 병력으로 조선에서 집중적으로 복구에 주력한 강화도를 친다는 전면적인 군사활동보다는 전력 및 장비가 차출된 강화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영종도를 강습해 공격하고# 무력시위로 조선을 압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국정의 난맥으로 국력을 전부 소진한 상태였고 회복되기도 전에 운요호가 와서 툭 친 것에 허무하게 참패를 당한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운요호 사건이 벌어진 19세기 후반이 서양과 서양을 제외한 세계 사이의 군사력 격차가 엄청난 속력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이다.
19세기 중반에 발명된 미니에 탄은 소총의 유효 사거리를 5배 가량 증대시켜서,[16] 크림 전쟁 당시 미니에 탄을 도입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강력한 러시아군을 혼쭐내준 배경이 되었으며,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도 북군과 남군 모두에게 엄청난 사상자를 안기며 인간도살자의 면모를 보여준 바가 있었다. 조선군이 숫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각각 프랑스군과 미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던 것도 미니에 탄이 가진 압도적 사거리 우위 때문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미니에 탄이 등장하고 1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연사력이 비약적으로 발전된 후미장전식 소총이 개발되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포구장전식 소총을 순식간에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당시 서양의 무기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군이 쓰던 구식 조총으로는 사거리와 연사력에서 서양의 신식 소총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다. 한편 일본은 이미 1860년대에 메이지 유신을 이루기 위한 내전 과정에서 막부 뿐만 아니라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등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수천정씩의 신식 소총을 수입하여 사용했을 정도로 군대가 근대화되어 있었다.[17]
총 뿐만이 아니라 대포의 기술 격차도 심각하게 벌어져서, 조선이 서양에서 수백년 전에 개발한 불랑기포를 여전히 애지중지하며 썼던 반면, 영국은 1850년대에 사거리, 연사력, 위력 모두에서 불랑기포를 압도하는 암스트롱 포를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암스트롱 포의 화력이 장갑함의 장갑을 뚫기에 부족하다는 이유로 곧 퇴출시키고 일본 등의 해외 국가에 싸게 넘기며 다른 대포를 사용할 정도였다.[18]
결국 당시 사거리, 연사력, 위력 모두에서 후진적인 무기를 장비한 조선군은 숫자가 많다고 해서 서양의 신식 무기를 장비한 군대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기술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군은 메이지 유신 전후로 내전을 겪으며 실전 경험도 제법 많이 쌓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혹시 조선군 다수가 매복을 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 기습하여 숫적인 우위를 이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서로 진형을 갖추고 싸우는 형태의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군사 기술 격차를 고려하더라도 당시 조선군의 방비 태새가 너무 빈약했다는 점이다. 옆나라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전 막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사쓰마, 조슈, 도사 번 등이 영국으로부터 신식 소총을 수천정씩 구입하고 증기선 등도 해외에서 도입하여 무장했는데, 비록 이들 번이 재정이 풍족한 영지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본에 300개 가량 있던 번 중에 하나가 수천정의 신식 소총을 구입한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정부 차원에서 강화도 일대의 무장을 강화한다고 한 것이 고작 250톤 전투함과 수십명의 수병에게 털릴 수준에 불과했다.
상술했듯이 국가 경제를 망가뜨린 흥선대원군 시절을 겪으며 조선의 경제력이 많이 약화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에도 명성왕후는 궁궐에서 거듭 굿판을 벌이느라 많은 국세를 낭비했고 민씨 외척 세력은 국세를 착복하는데 혈안이 되어 국가 재정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다. 세금이 부족하더라도 국가의 존망이 달린 국방은 격동의 시대에서 다른 사안보다 높은 우선 순위를 가져야 하는데, 운요호 사건이 이후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진 과정을 잘 알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당시 조선의 빈약한 안보 의식에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다.[19]
6.2. 국제법 준수 여부
6.2.1. 일본 측의 주장 및 한국 측 반박
일본에서는 국기를 게양한 군함에 사격한 것이 주권 침해라고 하지만, 이 역시 주객전도에 불과하다. 국제법상으로 조선의 영해를 침범한 일본이 조선의 영토 주권을 침해한 것이고,[20] 조선은 이에 대해 침략으로 해석하여 교전[21]을 벌인 것으로 조선의 행위는 국제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으며 운요호 사건 역시 통상 상호수교를 빙자한 일본의 조선침공의 저의가 깔려있다고 본다.일본 측은 운요호 측이 깃발로 미리 접근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어 국제법을 준수한 상황에서 경고 포격을 당했다고 하는데,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등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척화비의 영향으로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일절 거부해 왔으며, 당연히 서구가 주축이 되어 형성한 국제법의 질서에 편입은 커녕 국제법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조선의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에 근거한 행위로 통보한 일본의 책임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미리 접근하겠다고 신호했다 한들, 영해 진입을 허가하는 답신 없이 들어오면 그 신호는 딱히 의미가 없다. 백주대낮에 타국의 군함이 불법으로 조선의 영해를 침범해서 조선 땅에 불법 상륙까지 한 것도 모자라 조선의 군사 시설을 명분 없이 공격해서 조선 수군 초지진 수비대의 사상자까지 발생시킨 것으로 명백한 침공 행위였다.
더해서 일본 측 기록, 운요호 항해 일지에는 국기 계양 여부에 대해 영종도 포대 동문 앞 산봉우리 정상에 국기를 계양했다는 언급 외엔 국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전무하다. 후에, 운요호 사건에 대해 도쿄 주재 영국, 프랑스 공사관 측에서 일본 외무성에 진상 브리핑을 요청하자 그제서야 급히 만들어진, 운요호 함장이 작성한 시말서에 국기에 대한 언급이 추가적으로 삽입됐을 뿐이다. #
그리고 조선 측 기록, 조선왕조실록 고종 13년 1월 19일 신해 1번째 기사에서도 운요호가 황색 깃발을 내거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조선은 일장기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언급된다. #
7. 운요호의 제원
자세한 내용은 운요호 문서 참고하십시오.운요호의 제원 | |
종류 | 프로펠러 슬루프(스쿠류 슬루프)[22] |
건조국 / 제작사 | 영국 애버딘/Alexander Hall and Sons[23] |
진수 | 1869년 3월 27일 |
취역 | 1869년 8월 11일 |
전장 | 35m |
배수량 | 249톤 |
무장 | 6.3인치(160mm) 포 × 1문 |
5.5인치(140mm) 포 × 1문 | |
추진 기관 | 1 샤프트 석탄 연소 증기기관 / 60 ihp (45 kW) |
승조원 | 65명 |
동형함 | 호쇼[24] |
8. 여담
- 사건 현장인 영종진 터에는 2001년 '김찬삼세계여행문화원'이 들어섰다가 2013년 철거 후 2018년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 운요호는 1876년 조슈 번에서 반란(하기의 난)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귀환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선체에 큰 손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상자를 냈고, 결국 폐선됐다.
9. 관련 링크
(위키 백과 - 한국어) 운요호 사건(위키백과 - 영어) Ganghwa Island incident
(위키백과 - 일본어) 江華島事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
10. 관련 동영상
EBS(사회 탐구)한국사 - 강화도 조약의 원인과 과정은? | 다듣사 10강 - 운요호 프로젝트와 강화도 FTA |
(김흥수 공군사관학교 인문학부 교수) "일본 운요호 사건 관련 여론 동향에 민감했다" |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 - 통상 수교 거부 사건, 운요호 사건 (한국사 근현대사 인강) |
11. 같이 보기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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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영종첨사로 영종도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2] 정확히는 브릭 (brig)이지만 당시 영국이 작은 전투함은 전부 슬루프형 전투함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많은 기록에서 슬루프라고 나온다.[3] 나중에 1명이 치료 중 사망했는데 경상이었던지라 의료사고로 보는 견해가 많다.[4] 1842년생.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외무성이 생긴 1869년부터 외교관이 되어 주로 대조선 외교 업무를 담당했고,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이 끝난 뒤인 1877년에 외교관 업무에서 은퇴했다. 운요호 사건 이전에도 조선과의 교섭에 난항을 겪을 때마다 본국에 조선 출병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5] 이와쿠라는 2년전의 정한론 논쟁에서 정한론을 반대했었고, 산조는 양쪽 파벌 사이에 끼어 있다가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누워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6] 1845년 생. 메이지 유신을 이루기 위한 내전 과정에서 막부의 해군과 여러 차례 해전을 경험했던 나름 전쟁통이었다. 본래 정한파의 거두이자 같이 사쓰마 번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파벌로 여겨졌지만, 운요호 사건에서 2년 후에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켜 발생한 세이난 전쟁에서는 메이지 정부군의 편을 들었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최종 계급이 해군 원수까지 도달하였다. 1894~1895년의 청일전쟁이나 1904~1905년의 러일전쟁과 같은 굵직굵직한 전쟁에서는 직접 지휘관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1929년에 사망했다.[7] 요동 반도에 있는 국제항.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청이 서양에 개항하게 된 항구 중 하나였다.[8] 예를 들어 '오쿠보 도시미치가 운요효 사건 이전에 해군대보를 여러번 만났었다 (논의 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음)' → 오쿠보가 해군에 운요호 사건을 지시했다,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자 기도 다카요시가 국가에 큰 일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급진개혁파+수구파 연합이 요구하던 정부 구조 개편을 취소시켰고, 이에 분개한 기도의 반대 세력이 사직했다' → 기도가 국정 장악을 목표로 운요호 사건을 계획했다, 등등. 당시 일본 정부의 명목상 최고 직위에 있던 인물은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오쿠보와 기도가 쥐고 있었다.[9] 1870년 기준으로 청나라의 1인당 GDP는 일본보다 더 높았고, 조선의 1인당 GDP는 일본의 40% 수준 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10] 1854년의 개항 이후 일본의 근대 산업 투자가 1870년대까지는 그 효과가 올라오지 않았기에, 1인당 생산성의 향상은 아직 미미했다. 그래서 이 때까지 일본의 국력 상승은 빠른 인구 성장에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 생산력의 향상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식량의 가격이 상승했고 해외로부터 쌀을 수입해올 필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집중 투자한 분야 중에 하나가 면방직 산업이었는데, 후발 주자로 국제 산업 경제에 참여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본 내수 시장보다 훨씬 작은 조선이라도 있으면 힘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개항 이후 일본의 침투는 조선에 면직물을 수출하고 쌀을 수입해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11] 조선의 총과 대포는 근대적 무기를 갖춘 미군에게는 쓸모 없었다.[12] 대포 자체가 무슨 틀에 넣고 대량생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1~2년의 자연시효를 거치고 열처리와 연마가공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13] 조선은 미군을 그나마 유리한 광성보로 유인하기 위해서 성을 버리면서 지구전을 펼쳤는데 이때 미군은 무혈입성한 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14] 즉, 이 사이에 고종이 친정을 하여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정권이 집권했던 시기는 고작 2년, 달수로 치면 2년조차 되지 않아서 아직 이들로 당장 조선의 방어태세가 망쳐지지는 않았다.[15] 심지어 신미양요 직후도 아니고 운요호가 들어오기 1년 전이다.[16] 참고로 미니에 탄은 탄환의 종류이며, 미니에 탄을 발사하는 총의 기본 구조 자체는 기존의 라이플 소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17] 참고로 원래 영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소총류를 비롯한 무기를 해외에 판매하는데 열성적이었다. 서양은 타 대륙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향신료, 염료, 흑인 노예, 면직물, 차 등을 수입해야 했는데, 18세기까지 서양의 주요 생산품인 모직물, 유리 가공품 등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수요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수출품은 별로 없는 상황에서 많은 수입품을 사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서양이 다른 지역보다 우수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던 또 다른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금속 제련과 금속 가공, 특히 무기 제작 기술이었다. 그래서 서양인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그냥 금이나 은을 들고 오거나 아니면 마약을 팔거나 이러한 귀금속의 유출을 막기 위해 갑옷, 총, 화약류를 가져와야 했다. 예를 들어 대항해시대 때 유명한 삼각무역이 무기류(유럽) - 흑인 노예(아프리카 서안) - 설탕(신대륙 서인도 제도)이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영국 정부는 해상 패권의 기반이 되는 대형 주력 전함의 기술을 제외하고는 무기류의 수출에 큰 제약을 걸지 않았다.[18] 참고로 운요호에는 암스트롱 포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운요호의 제원에서 나오는 대포들의 구경이 암스트롱 포의 구경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 오히려 운요호는 당시 영국 소형 전투함과 마찬가지로 연안 포격을 위한 대구경 박격포를 주력으로 사용하고, 여기에 최소한의 함대함 전투를 위한 소구경 직사포 몇문을 부포로 탑재한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9] 전제군주제나 독재정권의 안위는 군부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고종정권은 군부 특히 중앙군 병력에게 갈 월급마저 착복하게 이른다. 이는 세도정치시기보다 퇴보된 모습으로 그 세도가 정권조차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의 기반으로 활용했다.[20] 이것에 대해서 정정하자면 영해를 침범했다고 무조건 불법은 아니다. 국제법상 무해통항권에 따라 어업 행위, 레이더 작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3일 전에 통보할 시 군함 또한 외국영해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허나 이에 대해 국가간 대응은 다르다. 예를 들어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인 USS 요크타운이 1988년 2월 12일 흑해 해상에서 소련 해군의 크리박급 호위함 Bezzavetnyy에게 들이받히는 사고가 있었는데, 소련은 영해 진입을 거부했고 미국은 무해통항권에 따른 항해를 강행하다 벌어진 일인데, 이 사건에 따르면 영해침범에 대한 국가간 대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 침공으로 해석해서 사격을 했어도 정당방위에 해당한다.[22] #[23]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