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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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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왜 전쟁
,(신라의 일본침공사례),
,364 ~ 404
(291 ~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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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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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멸망전
伽倻滅亡戰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562년 7월 ~ 9월
장소
반파국 일대(현재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
원인 백제의 약화로 인한 가야의 외교적 고립과 신라의 팽창.
교전 세력 <rowcolor=#C00D45,white> 가야·백제·왜
(방어)
신라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도설지왕 (반파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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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틀:깃발|
깃발 명칭
불명
]][[백제|]]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이사부|]]
(병부령)
참가자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불명
[[틀:깃발|
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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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김사다함|]] (귀당비장)
전력 규모 불명 25,000명 이상[7]
피해 백제: 1,000여 명 전사
가야, 왜: 규모 불명
규모 불명
결과 가야의 소멸. 남부지방의 백제·왜 세력 축출
영향 신라 전성기 구도의 완성, 삼국시대 후반기 구도 정립
1. 개요2. 전개
2.1. 서부 7국과 동부 3국의 멸망2.2. 신라의 서진, 소가야 멸망2.3. 풍전등화의 가야, 아라가야 멸망2.4. 대가야의 멸망, 가야 시대의 종언
3. 정세와 《일본서기》
3.1. 가야의 부흥?
4. 후일담5. 기록

[clearfix]

1. 개요

562년, 신라진흥왕이 장군 이사부, 사다함에게 명령해 가야를 공격, 반파국을 정복하여 최종적으로 가야를 멸망시킨 전쟁. 이때 백제도 지원군을 파병했으나 신라군이 전부 무찔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전신인 변한으로부터 수백년간 한국 고대사의 일원이었던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한반도에는 오직 고구려•백제•신라만이 남아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어지는 삼국시대 후반부 판도로 재편되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관산성 전투와 함께 전성기를 맞은 6세기 신라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한때 가야 연맹의 최강국이었고, 거의 가장 마지막에 멸망한 반파국(대가야)의 멸망 과정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교적 자세하지만 그 외 나머지 가야의 멸망 과정은 여러 사료를 찾아봐도 명확하지 않다.[8]

562년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모든 가야 연맹국들이 멸망당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신라에게 멸망한 나라가 10개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신라는 555년 과거 비화가야가 있었던 지금의 창녕군을 장악하고, 행정구역을 설치했으며, 556년에는 거창 등 가야 서부로 가는 길목이자 백제 지원군까지 대비해 추풍령을 틀어막을 수 있는 감문(김천)에 하주의 주치를 옮기는 등 신라군 병력이 주둔하는 거점들을 설치했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 척경비에서 진흥왕을 보좌한 장수 명단을 보면 멀게는 한성까지 당시 신라 전국의 사방군주(四方軍主)가 본인의 관할지역을 뒤로 하고 창녕에 집결한 것이 나오는데 이를 인접한 고령에 있는 대가야로의 총공격 준비와 관련시키기도 한다.

2. 전개

파일:gukjungbak_24.jpg
국립중앙박물관 지도의 가야 세력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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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가야삼국시대 전반부에는 이웃한 백제, 신라와 한때 경쟁하기도 하며 존재감을 나타내왔다. 심지어 4세기 중반까지는 신라보다 강했다고 볼 수도 있으며,[9] 5세기 후반에는 한성백제의 쇠퇴를 기회삼아 전라도남원시, 순천시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10]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 백제신라가 이미 수도를 중심으로 넓은 영역을 체계적으로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한 와중에도 여전히 하나의 통일된 정치 단위를 이루지 못한채 여러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6세기 초반부터는 나제동맹이라는 미묘한 견제구도 사이에 끼어있는 덕분에 독립하고 있었을 뿐, 가야의 작은 나라들은 더 이상 백제와 신라의 국력에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2.1. 서부 7국[11]과 동부 3국[12]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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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513년 백제가 모루, 대사, 사타,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 등의 서부 가야 일곱 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정확한 위치는 기문 항목에서도 나오듯 낙동강 유역이라는 설과 섬진강 유역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으나, 문헌적 자료로든 지리적 위치로든 고고학적 실증으로든 섬진강이라고 비정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가야에 위협을 가하자 대가야의 제9대 이뇌왕은 반백제로 외교 노선을 바꾸게 된다. 522년, 이뇌왕은 신라 공주와 혼인하여 백제의 세력 확산에 대항을 시도했으나 동부 지역에 위치한 탁순국은 대가야의 친신라 정책에 크게 반발했다. 결국 529년, 신라는 혼인동맹을 깨뜨리고 가장 동쪽에 위치한 가야, 탁기탄을 멸망시켰다.

이후 대가야는 후기가야 맹주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맹주의 자리는 안라국(아라가야)에게 넘어갔다. 아라가야는 안라회의(529. 3)를 개최하여 신라와 백제에게 중립을 선언하고 가야의 재발전을 기획했다. 그러나 회의 이후 백제는 아라가야를 공격해 걸탁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이에 질세라 532년 금관가야를, 538년 탁순국을 멸망시켰다.[13]

이후 541년과 544년에 각각 사비회의가 열려 백제와 가야가 협상을 시도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2.2. 신라의 서진, 소가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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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513년 백제가 대사국(하동)을 멸망시키자, 소가야(고성)와 바로 옆의 사물국(사천)이 위협을 느꼈다. 위치비정이 맞다면, 이 때에 이미 백제는 섬진강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 서부 가야들의 해상교역로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안라회의 이후 백제는 기존 가야의 중요한 영역이었던 남해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또한 섬진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백제의 가야 침탈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갔다.

이에 소가야는 2차 사비회의(544)에 참석해 입지를 늘리고자 했다. 하지만 독성산성 전투(548)에서 안라국이 참패를 당하고, 이어서 삼국시대 후반의 판도를 결정지었던 관산성 전투(554)에서 백제가 대패하고 대가야의 후견인이 소멸하며 소가야는 거의 고립되었다.

이후 소가야가 얼마나 버텼는가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지 않지만 관산성 전투 이후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소가야의 당시 정치적 입지를 고려할 경우, 신라는 소가야를 본격적인 가야멸망전이 시작되기 전에 정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가야는 엄연히 후기 가야 연맹에서 독자적인 파벌을 거느린 집단이었으나 일본서기에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한 다른 집단인 안라국과 반파국과는 다르게 일체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2.3. 풍전등화의 가야, 아라가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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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년 독성산성 전투 이후, 아라가야는 백제의 식민지격으로 전락했다.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의 영향으로 아라가야는 신라의 부용국으로 편입되었다. 신라는 이듬해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고, 사이기국산반하국을 편입하여 아라가야의 바로 옆 도시인 밀양을 차지하며 아라가야를 압박했다. 3~4년을 더 거치며 신라는 임례, 자타, 걸손, 졸마의 4개국을 멸망시켰고, 의령, 진주, 산청, 함양을 차지하면서 대가야가 아라가야를 도와주는 길목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연이어 신라는 그해 12월 아라가야를 공격했다. 아라가야는 금사에서 버티며 왜에 도움을 요청했다. 신라는 561년 1월, 아라파사산에 성산산성을 쌓아 왜의 침입에 대비하며 아라가야의 정복을 시도했다. 저항하던 아라가야는 끝내 2월에 멸망했으며, 신라 진흥왕은 즉시 그곳을 순행하여 창녕에 척경비를 두었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남은 세 가야 중 아라가야가 사라지고, 다라국(합천)과 대가야국(고령)만이 남게 되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사부가 빼앗았다는 가라국을 다라국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아마 다라국은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2.4. 대가야의 멸망, 가야 시대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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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년 가을 7월, 진흥왕은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아 기병 5,000명을 주어 대가야를 공격하게 했다. 사다함이 대가야로 쳐들어가 전단문에 들어서 흰 깃발을 꽃으니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쩔줄을 몰랐다고 한다. 대가야가 조금 저항하며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 백제는 도와줄 여건이 되지 않았다.

9월, 대가야가 계속해서 버티자 진흥왕은 대장군 이사부에게 20,000명의 병력을 주어 토벌하게 했다. 이에 맞서 일본은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와 카와베노 오미니에를 위시한 다수의 장수를 앞세워 원병을 파병하였다. 이 때까지의 일본서기에서 이 정도로 상세한 장수의 편성과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이때가 거의 유일하며[15], 다시 말해서 이전까지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파견이었을 수 있다.

왜군 수뇌부는 가야인을 아내로 맞은 장수 코모츠메베노 오비토 토미(薦集部首 登弭)에게 명령해 백제군 진영에 군사계책을 가지고 가게 했다. 문제는 이 자가 처가집에 들리다 군사기밀을 봉인한 서신과 화살을 길바닥에 실수로 떨어뜨리는 사고를 쳤고, 그걸 신라군이 손에 넣어 전략을 파악하자 신라가 군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16]

대가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일단 왜군은 신라군을 상대로 한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특히 부장군 니에의 무용이 뛰어나 많은 신라군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차례 승리한 후 대장군인 오마로노 스쿠네가 동맹인 백제군 군영에 들어가서 일장연설을 했는데, 써있는 연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승리한 장군이 하는 대사라기에는 약간 부자연스럽다. 《일본서기》 특유의 허술한 윤색일 뿐 실제로는 패배했거나, 간신히 신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백제군과 합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를 보면 초반에 소규모 전투는 몇 차례 승리했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 그러자 신라군은 왜군에게 거짓 항복 계략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 측 기록에서도 등장했던 백기가 여기서도 등장한다. 가야군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 사용했던 백기를 다시 들고 나와 무기를 버리면서 왜군에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군사병법에 밝지 못했던 부장군 니에는 진짜 항복하려고 한다고 속아넘어가 방심했고,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도 응답의 의미로 백기를 들고 신라군에 접근했다. 이에 신라군이 역습을 가해 백제군과 왜군들을 1,000여 명 가까이 죽였다. 이때 지휘관급 인물 중에는 야마토노 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彥)만이 빠른 말을 타고 있어서 간신히 달아났고[17] 나머지 왜군 장수는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부장군 니에와 그 부하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사로잡은 한 신라 장군[18]이 니에의 아내인 우마시히메(甘美媛)를 보고 니에에게 "네 목숨이 중요한가? 아내가 중요한가?"라고 묻자, 니에는 당연히 목숨이 소중하다며 아내와 여자들을 바쳤다. 그러자 신라 장군은 니에는 풀어주고 옥외에서 우마시히메를 강간했다. 우마시히메는 나중에 풀려나서 니에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니에가 그녀에게 말을 붙이려 하자 "날 팔아치우고 살아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말을 거냐"며 일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라 장군은 포로가 된 장군인 츠키노 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에게 칼을 대고 하카마를 벗긴 후 엉덩이를 왜국 방향으로 돌리게 한 다음 "왜국의 장군은 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외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이키나는 끝까지 "신라의 왕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반대로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화가 난 신라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19] 그의 어린 아들인 오지코(舅子)도 같이 죽었는데 아버지의 유해를 안은 채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자체가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일본에 좋은 쪽으로 과장한 서술이 많은데, 유독 이 대목에서는 왜군 장군들이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처참하게 모욕당하는 자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내용이 많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기재된 이유는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함이거나 혹은 그만큼 백제-가야-왜 동맹에게 있어서 가야의 멸망이 뼈아프고 충격적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각설하고, 일본과 백제가 어떻게든 완충지대이자 핵심 교역로였던 가야를 온전시키기 위해 무리하면서 대병을 파병하여 몸부림을 치고 악전고투를 했지만, 욱일승천하는 신라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결국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도설지왕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로서 신라는 지난 수백 년간 신라의 숙적으로 지내던 가야를 멸망시켰고, 한때 남방 무역을 주름잡으며 일본, 백제, 중국을 잇는 동북아시아 최대의 무역지역이던 가야는 500년 역사의 문을 닫고 사라졌다. 신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최대 규모의 전역이었던 가야멸망전은 진흥왕 최대의 업적 중 하나로서, 이후 백제는 철 부족과 전선의 불리 속에 빠져 한동안 침체하게 된다. 반면 한반도에 존재하던 마지막 군소세력을 집어 삼킨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게 대등 그 이상으로 겨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는 모든 원시국가~고대 연맹국가들이 멸망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세 개의 세력이 서로 비등하게 천하를 놓고 겨루게 되었다. 진정한 삼국시대의 시작이었다.

3. 정세와 《일본서기》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전에서 백제와 왜도 대가야를 지원하기 위해 즉시 지원군을 파병했다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의 내용은 왜군이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왜곡이 많이 섞여있어 전체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562년 가야 멸망을 막으려 지원군을 보낸 부분은 '신라군이 왜군에게 크게 이겼다'는 내용을 의외로 왜곡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 측 사서 내용과 비교하여 큰 모순이 존재하지 않으며, 큰 틀에서 같은 사건을 더 세세하게 전하고 있어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일본서기》 자체가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일본에 좋은 쪽으로 과장한 서술이 많은데, 유독 이 대목에서는 왜군 장군들이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처참하게 모욕당하는 자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내용이 많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기재된 이유는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함이거나 혹은 그만큼 백제-가야-왜 동맹에게 있어서 가야의 멸망이 뼈아프고 충격적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3.1. 가야의 부흥?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대가야)가 여러 차례에 걸쳐 부흥했다고 되어 있다.

571년, 천황이 임나의 부흥을 유언으로 남겼다. 584년, 백제와 일본이 임나의 재건을 계획했다. 591년 8월, 임나를 재건하고 사신을 뽑았으나 11월 신라가 임나를 다시 멸망시켰다. 594년, 임나가 일본의 도움으로 두번째로 다시 세워졌다. 600년, 신라와 임나가 크게 싸웠으며 이에 왜가 친히 도왔다. 임나가 승리하여 가라(고령), 남가라(김해), 안라(함안), 다라(합천), 비자발(창녕), 탁순(창원), 고자(고성)를 회복했다. 607년 임나와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608년 가라사국(아라가야)[20]이 수나라와 교류했다.

623년, 신라가 세번째로 임나를 멸망시켰다. 이에 천황이 분노하여 군사를 보내니 신라가 항복하여 다시 임나를 재건했다. 643년, 이 해에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함께 조공했다.[21]

646년 2월, 신라에 의해 임나가 네번째로 멸망했다. 그러나 백제와 천황의 힘이 부족해 더 이상 재건되지 못하고, 그 해 9월 조서를 없애니 임나가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한국 쪽 기록에서 일체 전하지 않으며 교차검증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국 사학계 전반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4. 후일담

진흥왕은 가야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화랑 사다함에게 포상으로 가야인 300명과 토지를 하사했다. 하지만 그가 받지 않자, 왕이 강권해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불모지를 받았다고 한다. 사다함은 상당한 군사적 재능이 있었던 인재였던 듯 하지만, 17세가 되던 해 친구 무관랑이 죽자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따라 죽었다고 한다.

가야가 멸망한 고령 땅에는 대가야군(大加耶郡)을 행정구역으로 설치했으며, 마지막 왕 도설지왕은 학계의 연구상 월광태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월광태자설이 맞다면 거덕사(擧德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월광사(月光寺)에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져오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대가야인의 일부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 지역으로 사민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2] 반파국이 멸망하던 때의 절절함은 반파국인이었던 우륵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가 신라인들이 5곡으로 줄이자(즉 대가야에서 우호 국가로 생각했던 가야 7개국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화를 냈다가 어쩔 도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곡이 좋다'고 칭찬한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왜국에서는 571년 4월 15일 긴메이 덴노가 몸져누웠을 때 유언격으로 신라를 치고, 이미 멸망한 임나(가야)를 복원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패배의 미련이 많이 남았던 듯 하다. 패배한 장군 오마로노 스쿠네, 니에 등은 모두 파직당하고, 품계가 깎이는 처벌을 받았으며, 천황에게 충절을 지킨 이키나의 남은 가족들은 포상을 받았다.

진흥왕은 합병한 가야 지역을 대상으로 신라 본토와 같은 율령제에 기반한 통치를 개시했고, 이는 가야 각국으로 나뉘어있던 시절보다 훨씬 체계적인 통치였다. 함안 성산산성에서 합병 직후 6세기 중반 시점에 공문서로 사용되었던 목간대량 출토되어 밝혀졌다. 대야성 전투죽죽과 같이 현지인들은 신라에 빠르게 동화되어, 삼국 통일 후 9주 5소경을 구분할 때에도 옛 고구려 지역 3주 및 옛 백제 지역 3주와 함께 신라+옛 가야 지역을 합쳐 원신라 지역 3주로 간주할 정도로 가야인은 신라에 빠르게 융화되었다. 이 가야 지역과 유민들은 훗날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고, 무왕대의 아막성 전투부터 시작해 신라에 맹공을 펼칠 때, 이를 막아내 신라가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로 남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만 완전히 동화되진 않았는지 후삼국시대가 되자 가야 지역 호족인 차윤웅이나 왕봉규 등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가야가 멸망한 이후 백제는 중요한 철 산지를 잃어버린 상황이 되었고, 한성백제 상실 이래 고질병이었던 철 부족이 심화되어 금속 갑옷보다 가죽 갑옷을 더 많이 쓰게 된다. 금휴개라고 하는 백제 특유의 옻칠한 가죽갑옷이 대량 출토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5. 기록

5.1.삼국사기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加羅)[23]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15, 6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元帥)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24]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사다함 열전>

8년(서기 561) 가을 7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죽은 자가 1,000여 명이었다.
《삼국사기》<위덕왕 본기>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25]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 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삼국사기》<지리지> 강주

5.2.일본서기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미마나(任那) 미야케(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미마나(任那)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미마나(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카라국(加羅國), 아라국(安羅國), 니시키국(斯二岐國), 타라국(多羅國), 소츠마국(卒麻國), 코사국(古嵯國), 코타국(子他國), 산한게국(散半下國), 코츠산국(乞湌國), 니무레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562년 1월

이달 대장군(大將軍) 키노 오마로노스쿠네(紀 男麻呂宿禰)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타리(哆唎)에서 출동하고, 부장군(副將軍)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코소무레(居曾山)로부터 출발하도록 하여 신라가 미마나(任那)를 공격한 상황에 대하여 문책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미마나(任那)에 도착하여 코모츠메베노오비토 토미(薦集部首登弭)를 백제에 보내어 군사계책을 약속케 했다. 토미(登弭)는 처가에 묵었는데, 봉인한 서신과 활과 화살을 길에 떨어뜨렸다. 신라가 군사계획을 모두 알고 갑자기 군사를 크게 일으켰으나 얼마 후에 패하였으므로 항복하여 귀부(歸附)하기를 빌었다. 키노 오마로노스쿠네(紀 男麻呂宿禰)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군사를 돌려 백제의 군영에 돌아갔다. 군중(軍中)에 명을 내려 “무릇 이겨도 패하는 것을 잊지 말고 편안할 때도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지금 처해 있는 땅은 들개와 이리와 같이 사나운 무리들과 이웃해 있으니 가볍고 소홀히 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으랴. 하물며 또 태평한 시대에도 칼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법이니, 무릇 군자가 무기를 갖추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깊이 경계하고 이 명령을 받드는 데 힘쓰라”라고 하였다. 병졸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홀로 나아가 이곳 저곳에서 싸워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신라가 문득 흰 깃발을 들고 무기를 던져버리고 항복했는데,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원래 군사(軍事)에 밝지 못하여 마주 대하여 흰 기를 들고 헛되이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신라 장군이 “장군 카와베노오미(河邊臣)가 지금 항복하려고 한다.”고 하고는 진군하여 역습하여 싸웠다. 매우 날쌔고 빠르게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맨 앞선 부대는 패한 바가 매우 많았다.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彦)가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해자까지 뒤쫒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테히코(手彦)는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쿠스니지리(久須尼自利)!”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카와베노오미(河邊臣)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와 들에 급히 군영을 만들었다. 이 때 병졸들은 모두 서로 속이고 업신여기며 우러러 따르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카와베노오미(河邊臣)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라고 묻자 “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그 여자를 간음하였다. 여자가 후에 돌아가니, 카와베노오미(河邊臣)가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사카모토노오미(坂本臣)의 딸인데 이름을 우마시히메(甘美媛)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는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하카마(褌)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야마토(日本)로 향하게 하고 “야마토(日本) 이쿠사노키미(將)는 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叫)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 코니키시(王)는 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오지코(舅子)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이키나(伊企儺)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빼앗기 어려운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특히 여러 장수들이 가슴 아파하는 바가 되었다. 그의 아내 오바코(大葉子)도 역시 잡혔는데 비통하게 노래하기를 “카라쿠니(韓國)의 (城) 위에 서서 오바코(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며 야마토(日本)로 향하네.”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화답(和答)하기를 “카라쿠니(韓國)의 키(城) 위에 서서 오바코(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어 보이며 나니와(難波)로 향하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19 <긴메이 덴노> 562년 7월

[1] 紀臣 男麻呂宿禰.[2] 河邊臣 瓊缶.[3] 薦集部首 登弭[4] 倭國造 手彦.[5] 調吉士 伊企儺[6] 調吉士 舅子.[7] 이사부에게 준 20,000의 병력, 그리고 사다함에게 준 5,000기의 기병.[8] 그나마 멸망 과정이라도 있는 나라는 대가야를 제외하면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안라국)가 끝이다.[9]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요동 철맥을 점유하여 당대 동아시아 최강 수준의 철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서는 가야의 뛰어난 철기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는 가야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고는 있었지만, 무자비하게 밟아버려 철기 공급원 자체가 막혀버리는 무식한 정책을 벌이진 않는다. 게임에서야 철맥이 있는 곳을 점령하면 철이 쏙쏙 나오지만, 이때까지는 아직 면 단위가 아닌 점과 선 단위의 지배가 이루어지던 시대이므로 무리해서 해당 지역 행정을 붕괴시키면 광부와 대장장이들에게 생계수단이 끊겨 굶어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0] 하지만 이 영역 강화 역시 백제가 장수왕의 한강 침공으로 인해 국왕인 개로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사형당하고 그 뒤를 이은 문주왕이 웅진 천도 후 내부 정쟁으로 암살당하는 등 내홍이 심하여 남쪽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는 걸 이용해 벌인 것이었다. 실제로 백제가 다시 힘을 회복한 무령왕 대에는 이 지역은 물론 원래 강역이었던 섬진강 하류의 하동군 지역까지 빼앗기며 교역로까지 차단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11] 모루(순천), 대사(하동), 사타(광양), 상기문(임실), 하기문(남원), 상다리(여수), 하다리(돌산)으로 비정한다. 기문 항목에서도 보이듯이 위치 비정은 불확실하다. 이하의 서술에서는 "기문"을 섬진강 유역으로 보는 의견을 차용하며, 위치 비정을 달리하거나 사서의 해석에 차이를 둠에 따라 전황의 해석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12] 탁기탄(양산), 금관가야(김해), 탁순(창원)[13] 변한과 진한 시절부터 700년 가까이 나뉘어져 있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이는 가야연맹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주의] 해당 이미지는 소가야가 554년 관산성 직후에 멸망했다는 출처 불명의 설을 따르고 있으나 소가야의 멸망 시점은 불확실하다.[15] 이보다 더 규모가 거대할 것이 확실한 백강 전투에 파병한 병력의 지휘부도 이렇게 상세하게 적혀 있지는 않다.[16] 비슷한 일화로 미국 남북 전쟁앤티텀 전투에서도 남군의 장교가 군사기밀을 길에다 떨어뜨린 것을 북군이 주운 덕분에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침공에서도 황색 작전 계획서를 휴대하고 있었던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가 타고가던 비행기가 벨기에 상공에서 추락해 계획서가 탈취되는 바람에 급히 작전을 변경해야 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고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타고가던 비행기가 다바오 상공에서 추락, 동석했던 참모장이 휴대하고 있던 Z작전 계획서를 압수당한 전적이 있다.[17] 신라 장수들에게 맹렬하게 쫒기다가 성의 해자를 말 탄 채로 뛰어넘자 신라 장수가 쫒아오지 못하고 "쿠스니지리(久須尼自利, 구수니자리)!"라고 외치며 탄식했다고 한다. '쿠스니지리'가 무슨 뜻인지는 일본 측 기록에도 알 수 없다고 적었다. 당시 한국어 표현으로 추정되지만 이것도 일본인이 들리는 대로 쓴 것이라 몬더그린일 수도 있어서, 실제 발음이 그대로 전해졌는지도 의문이다.[18] 한국 측 기록까지 감안하면 이 신라 장군은 당시 신라군을 지휘했던 이사부사다함일 수도 있겠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19] '왜국 장군'의 대응어가 '신라 왕'인 것으로 보아 원래는 천황을 조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저자가 감히 천황을 조롱하는 표현을 그대로 써넣을 수가 없어 장군으로 바꿨을 가능성이 있다. 엉덩이라는 표현도 원문에서 한자 '먹을 담(㗖)' 자를 쓴 것을 감안하면 원래 이었지만 엉덩이로 순화시켰을 수도 있다.[20] 이 때문에 아라가야도 재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1] 물론 걸러듣기는 해야하는게 일본서기는 그 자체가 위작수준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책이다. 애시당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인 책이니...다만 고대사에 대한 한국의 고대사 기록이 적고 사건을 기록하는 정도의 기여를 하는 책이니 완전히 허황되었다 말하기는 어렵다.[22] 이형기(2002), 《멸망 이후 대가야 유민의 향방: 동해시 추암동고분군 출토품을 중심으로》, '한국상고사학보' 38, 97-117.[23] 가야(加耶)라고도 한다.[24] 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梁)이라 한다.[25]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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