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1:23:22

기벌포 전투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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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전투
伎伐浦 戰鬪
파일:external/www.newssc.co.kr/31852_20449_4836.jpg
<colbgcolor=#4a2d5b,#0e0f37><colcolor=#fbe673> 시기 676년 (문무왕 16년) 음력 11월
장소

기벌포 일대 (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
원인 당의 한반도 철수 작전과 신라의 반격.
교전국 <rowcolor=black> 신라
(공세)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시득
지휘관

파일:tang_fel2.jpg 설인귀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전사자: 4,000명 ↑
결과 신라의 대승
- 당나라 한반도 철수
영향 나당전쟁의 종식
- 통일 신라 시대 개막.

1. 개요2. 전개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676년 음력 11월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벌어진 통일신라당(唐)해전. 나당전쟁 최후의 전투이다.

1년 전인 675년에 당은 설인귀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이 각각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배했고, 676년 3월부터 당나라는 대륙 반대편 서역에서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더 이상 양면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 판단해 이 즈음에 신라와의 전쟁을 사실상 포기하고 옛 백제 영토의 거점 웅진도독부에서도 철수를 결정한다.[1] 676년 7월 도림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육상에서의 전쟁이 끝났고, 676년 11월 당군은 황해 해로를 통한 철군을 위해 당의 명장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금강[2] 하구의 기벌포에서 신라의 측면을 공격했다.

기벌포는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인근을 일컫는 말로, 한국의 4대강 중 하나인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하구이다. 서천군/역사 문서의 2번 항목 참조.

2. 전개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이끄는 신라 수군이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과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다. 첫 번째 전투에서 신라군이 패했으나, 시득은 다시 진군해서 반격을 했고 신라군은 크고 작은 22번에 걸친 싸움에서 연달아 승리하고[3] 당군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때 당나라가 이전에 백제고구려를 칠 때 대선단을 동원해서 병력 수송과 물자 보급으로 큰 재미를 본 만큼 당나라 수군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설인귀 또한 당에서 최정상급 네임드 장군이었다. 그럼에도 신라군은 뛰어난 수군 운용 능력과[4] 보급이 쉽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수급을 4천 개 취하는 대승을 거두었다.[5]

3. 기타

나당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의의가 있는 전투인데 매소성 전투에 비해 주목되지 못하는 경향이 크나 알고보면 큰 의미를 가진 대승을 거둔 전투다. 유인궤의 철군 이후 당군의 주력은 설인귀가 이끌었기에 이를 격파한 천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의 의의가 큰데 매소성 전투의 20만이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매체마다 매소성 전투만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크다. 당장에 매소성 전투에서 패한 이근행이 여전히 건재해 토번 공략에서 맹활약한 반면 천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패한 설인귀는 유배를 당한것만 봐도 당에서 어느 전투에 무게를 뒀는지 명확하다.

백제의 마지막 충신으로 평가 받는 성충육로로 오는 적은 탄현에서, 수로로 오는 적은 기벌포에서 방어를 해야한다고 했고 흥수도 당군은 군율이 엄격한 대군이라 벌판에서 싸우면 불리하니 무조건 백강에 들이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바다에서 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한다고 조정에 올린 이순신의 모습도 떠올려지는 부분으로, 이 둘의 의견은 결국 기벌포 전투로 증명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대왕의 꿈에서는 나레이션과 함께 매우 짧게 묘사되는데, 해전이 아닌 육전으로 등장해 난전이 벌어져 설인귀가 신라군의 병사를 죽이거나 예원이 당군의 병사를 죽이는 모습과 함께 전투가 끝난 후에 시체가 널린 전장만 보여준다.

소정방 휘하의 장수 두 명이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는데, 김원술이 말갈족 출신의 소정방 휘하의 장수를 죽이는 모습이 나오고 당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자 함성을 외치는 것으로 나온다.

HQTeam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신라군 최종 미션으로 등장한다. 후방 바다에서 적 전선과 수송선이 끊임없이 리젠되기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방어선을 배치하거나, 아예 먼 바다에 전선을 배치하여 격파해야 한다.

[1] 웅진 도독부는 이후 간판만 옛 고구려 땅인 요동으로 옮긴다.[2] 금강 외에 동진강 설도 있다.[3] 한 번 져서 적을 방심시킨 뒤 더 크게 승리했다는 점에서 각종 매체에서는 이 전투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처럼 의도된 유인 후 섬멸하는 전개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4] 당나라나 일본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배는 매우 견고하며 빠르다고 자주 언급된다.[5] 함포가 주로 활용되기 이전까지의 해전은 대부분 화공이나 충각 이후 선상 백병전이 벌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전투가 벌어지거나 배가 산산조각나고 불타는 와중이나 해전이 끝나고 나서 시체를 건져내어 목을 벤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