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호마루 사건 大邦丸事件 Daihoumaru Ship Incident | |
선박 이름 | 제1다이호마루(第一大邦丸) 제2다이호마루(第二大邦丸) |
발생 날짜 | 1953년 2월 4일 07시 |
발생 위치 | 해군 주장: 제주 한림 기준 09마일[1] 어선 주장: 제주 한림 기준 30마일[2] 타협 위치: 13마일 부근[3] |
선종 | 57톤급 어선 |
유형 | 해군의 민간어선 무력 나포 |
좌표 | 확인 불가 |
총 인원 | 22명 |
사망자 | 1명 |
생존자 | 21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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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1월 22일, 제주도 서남쪽 알 수 없는 위치에서 한국 해군이 일본 민간 어선 2척을 향해 발포하여 일본인 어민 1명이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2. 전개
1953년 1월 22일 '제1다이호마루'와 '제2다이호마루'가 후쿠오카를 출항했고 2월 4일 오전 7시경 해당 장소에 도착하여 조업을 시작하였다. 그때 한국 어선(창운호/昌運号) 두 척이 다이호마루 선단에 일본어로 “물고기는 잡힙니까?(魚は獲れますか)”라고 물으며 접근한 뒤 부근에서 조업행위를 시작했다.그런데 잠시 뒤 제1다이호마루가 그물을 끌어올리자 근처에서 조업하던 한국 어선에서 제1다이호마루를 향해 총격을 시작했다. 직후 다이호마루 선단은 달아났지만 제2다이호마루가 나포되었고 제1다이호마루의 한 어민이 총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어 결국 두 선박 다[4] 나포되었다.
해군의 명령으로 다이호마루 선단은 한림읍으로 이동해 같은 날 11시 30분 한림항에 입항뒤 제주 경찰과 헌병에 의해 선원들은 구속되었으며 어선과 어획물은 압류되었다.
당시 총상을 입은 부상자 1명은 상태가 위급했는데 한림 인근의 병원에서는 설비와 약품의 부족으로 링거를 주입하는 간단한 진료만 가능했기 때문에 부상자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결국 일본인 어민들의 요청으로 그들을 담당했던 헌병장이 제98육군병원으로 이송을 준비했으나 병원은 이미 전쟁으로 부상병들이 넘쳐났고 약품과 인력도 부족한 열악한 상태라 구급차 한 대 보내는 것도 불가능해 부상자는 1953년 2월 6일 23시 사망하였다.
다음날인 7일, 그의 시신은 부검 후 인근에 매장될 예정이었으나 일본인 어민들이 화장을 요구하여 8일 화장되었다.
2월 12일 전반적인 조사를 끝마치고 어민들은 제주로 넘어가 본격적인 조사를 받았다.
3. 결론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이승만 라인의 모호함과 해군과 헌병, 그리고 경찰조사의 허점이 너무나도 많았고[5] 가장 큰 문제는 경고 한 번 없이 군이 민간 선박에 총격을 가하는 행위로 민간인 선원 1명이 사망해 아무리 전쟁 중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미국이 봤을 때에도 문제가 되어서 당시 한국과 일본은 미수교국이었음에도 한국 정부는 그들은 바로 조건 없이 인도주의적으로 석방하였다.그렇게 1953년 2월 17일 미군 군함의 도움으로 해당 어선과 어민들이 일본으로 출발했고, 2월 22일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사실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 정부에 당장 항의하는 게 맞았지만 당시 한국은 북한과 전쟁 중이었고, 일본은 패전국인 데다 미군정에 의해 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힘이 없었고, 미국도 한·일이 수교가 안 되어 중간에서 중재는 했지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그나마 산 사람만이라도 돌려받는 게 최선이었다.
4. 기타
일본 측의 기록에 의하면 제주의 어느 관청에서 일본인 어민들에게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미안하다. 지금 한국은 전시상황이라서 너희에게 식량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으니. 내지로 돌아가더라도 우리를 욕하지 말아달라."[6]라고 비공식적으로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5. 외부 링크
- 제15회 국회 참의원 수산·법무·외무연합위원회 제1호 쇼와28년 2월 23일 - 국회 회의록 검색 시스템 (국립국회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