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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한류 현상을 서술한 문서이다. 대한민국과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 영향으로, 한류의 인기가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 중 하나로 평가되기 때문에 따로 개별문서까지 개설된 사례이다. 일본의 한류는 단순히 외국의 대중문화가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는 걸 넘어서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자국 대중문화 수준으로 많은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실제로 일본 내에서 일본 가수 이상으로 콘서트 동원 숫자를 뽑아내고 차트 기록을 세우며 음반 판매를 할 수 있는 해외 가수는 케이팝이 유일하고, 케이팝이 일본 내에서 1위를 하는 건 신기하지 않은 일로 받아들여진다. 케이팝을 제외한 해외 음악은 일본에서 1위는커녕 차트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 또한 한국 드라마는 로맨스 분야로 한정하면 일본 내에서 일본 드라마보다 더 인기가 많다는 분석도 많다.[1]일본의 한류가 갖는 특징은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가 주된 콘텐츠이고 한류에 빠져있는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이 여성 팬덤이 많다는 것이다. 1차 한류 당시에는 중장년 여성들이 주축이 되었고, 3차 한류부터는 10대 여성과 20대 여성이 주축이 되었다. 1차 한류를 주도했던 한국 드라마에서 2, 3차 한류를 주도한 K-POP으로 한류 열풍이 전이된 이후 보이그룹, 걸그룹 가리지 않고 젊은 여성 팬덤이 많다. 다만 상대적으로 여성 팬덤의 움직임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것이지 남성 팬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K-POP 열풍이 불며 걸그룹 콘서트나 쇼케이스, 하이터치회 등을 찾는 남성들도 많아졌다.
2020년부터는 OTT를 통해 일본에서 공개된 한국드라마들(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도깨비, 오징어게임 등)이 연달아서 매우 크게 흥행했고, 일본의 다른 세대에 비하면 보다 더 케이팝 중심이었던 일본의 10대도 한국 드라마의 주요 소비층이 되었다. 2020년대 일본 내 한류는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의 매우 젊은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는데, 이를 4차 한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3차와의 연속성이 강하기에 구분하는 게 의미 없다는 의견도 많다. 애초에 20~30년 동안 1차, 2차, 3차, 4차까지 이어졌다면 그냥 끊기지 않고 지속된 거라 보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과거부터 10대와 20대 중심이었던 케이팝은 물론이고, OTT 시대가 도래하며 한국 드라마도 핵심 소비층 연령대가 20대로 급격히 어려졌다. 다만 4차 한류부터는 특정 성별과 연령대를 넘어 일본 남녀노소 모두에게 동시다발적으로 한류 열풍이 부는 모습이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일본의 중년들도 한 번쯤 다 들어본 경우가 많으며, 많은 일본의 중년 남성들이 사랑의 불시착을 애청했다.
최근에는 IT, 게임, 음식, 관광 등 각종 콘텐츠를 아우르는 문화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2. 역사
일본의 한류는 21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사회 문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 시작은 영화 쉬리와 드라마 겨울연가였고, 다음으로 대장금, 이산 등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가, 2차 한류 당시 아이돌 붐으로 음악 분야도 큰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2012년부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일왕 사과 논란과 독도 방문, 일본의 혐한 현상 등으로 한동안 냉각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2017년 3차 TWICE, 방탄소년단과 같은 K-POP 아이돌 그룹의 부상으로 인기를 다시금 회복했고, 이후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클라쓰, 오징어 게임 등의 흥행으로 드라마도 다시 그 영향력을 넓히는 중이다.2.1. 1차 한류: 중년 세대의 전유물이었던 초기 한류
일본 한류의 시초는 국민의 정부 시절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그로 인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 등이 이뤄졌던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양국 간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에서는 《러브레터》 같은 일본 영화가, 일본에서는 중장년층을 자극하는 한국산 멜로 드라마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물론 더 이전으로 가면 이성애, 계은숙, 조용필, 김연자, 패티킴, 이박사[2] 등등 같은 사례도 있었으나, 이는 엔카 분야에 한정됐고[3] 무엇보다 한류라는 지속적인 사회 현상과 무관한, 그냥 일본에 진출한 몇몇 개인이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다 수준이고 이들로 인해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나 인기가 가속화되진 못했고 지금의 한류와 비교하는건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일본에서 유의미한 흥행을 달성한 최초의 한국 문화 콘텐츠는 1999년 한국에서 개봉해 일본에서는 2000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쉬리》로, 당시 일본에서 매출 15억 엔을 기록했다. 이후 2001년에는 남북한 소재를 재차 이용한 《공동경비구역 JSA》, 2003년에는 코믹멜로물 《엽기적인 그녀》가 일본에서 개봉하며 어느 정도 흥행을 이어갔다. 한편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현지화 전략으로 진출한 보아가 2002년 한국인 최초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며 국내 지상파 뉴스에서도 이를 보도하게 된다. 일본에서 보아가 출연한 방송을 보고 ‘저 어린 가수가 누구냐’는 문의 전화가 방송국에 폭주했다고 하며 역시 대표곡인 VALENTI의 판매량이 120만 장을 넘는 등 일본 가요계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보아는 1차 한류 시기에 일본으로 진출했고, 한국어 앨범도 발매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한류를 부흥시킨 연예인으로 인정을 받는다.[4]
일본에서 한류라는 '사회 현상'을 처음 일으킨 주역은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배용준과 《겨울연가》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해당 문서 참조. 사실 《겨울연가》 이전에도 상술한 《쉬리》 등의 한국 문화가 일본에서 성과를 거둔 적은 있었지만, 이는 개인이나 개별 작품에 국한됐을 뿐 일본에 한류라는 '사회 현상'이 도래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즉, 인기로 보나 지속성 측면에서 보나 일종의 중박이었던 셈. 반면 2004년 NHK를 통해 방영된[5] 《겨울연가》는 대박도 대박이지만, 일본의 주류 매체를 통해 방영된 최초의 한국 작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원작 그대로 방영된 한국 드라마라는 의미도 가진 작품이었다. 즉, 일본에서 한류를 본격적인 사회 현상으로 끌어올린, 일본 한류의 시초라 칭할 만한 작품은 《겨울연가》가 맞다.[6] 지금은 고인이 된 박용하도 이 드라마로 인해 많은 인기를 누리며 일본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또한 《겨울연가》는 일본 측면에서 평가하기에도, 당시까지 일본 대중매체에서 소외됐던 일본 중년 여성들을 새 소비자층으로 부상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의의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겨울연가》가 일본 중장년층을 겨냥하여 제작된 건 아니었으나, 일본 팬들의 인터뷰를 보면 '일본 연예인들과 달리 한국 연예인들은 우리 같은 중장년층도 살갑게 대해준다'는 말이 많았다. 일본 대중매체가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던 연령대인 중장년 여성층들을 《겨울연가》가 제대로 파고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여성들 다수에게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났고, 이는 《대장금》, 《이산》 등을 비롯한 후속주자들의 흥행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물론 이러다 보니 초기 한류는 '아줌마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도 강했다. 이 시기만 해도 일본의 많은 젊은 세대는 한류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으며, 일각에서는 한류에 열광하는 중년 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비웃는 경향도 있었다. 겨울연가와 배용준 문서에 첨부된 동영상을 봐도 알 수 있듯, 당시 엄마뻘 되는 여성들이 아들뻘 되는 30대 초반 외국인 남배우에게 빠져 헤롱대는 모습은, 젊은 안티층 입장에선(마치 한국에서 트로트 응원부대를 하는) 나이 들고 주책들인 빠순이 아줌마, 할머니 부대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비하 반응조차 인생의 낙이 떨어질 갱년기 이후 시기의 중노년 여성층에게는 도리어 더 열광할 수밖에 없는 요소로 다가왔을 테고, 어찌됐건 이들은 1차 한류 붐의 원동력이 되었다.
2.2. 2차 한류: 10대~20대의 청년 세대가 주축이 되기 시작
2005년, 동방신기의 일본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 아이돌 그룹이 일본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다만 1차 한류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동방신기의 일본 진출은 맨땅에 헤딩에 가까웠는데, 이땐 한류 4대 천왕 같은 '배우'에 대한 팬덤은 일본에서 형성되어 있었지만, K-POP이라는 '음악'에 대해선 극소수의 마니아층만 있었을 뿐 팬덤이라 불릴 만한 규모의 집단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시간이 흘러 2007년, 동방신기는 일본에서 정상급 아이돌 그룹으로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BIGBANG, 카라, 소녀시대를 비롯한 여러 한국 아이돌들이 일본에 진출하며 K-POP 아이돌 그룹은 일본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진출한 카라와 소녀시대는 걸그룹 특유의 대중성을 내세워 현지 뉴스에서도 다룰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얻었고,[7] 한국어 앨범을 출시해 높은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K-POP 가수들은 일본 아이돌 그룹보다 댄스, 가창력, 외모가 뛰어나다는 인식이 일본에서 생겼고, 이는 곧 신한류인 2차 한류 열풍으로 이어졌다.
2.3. 침체기
2010년대 초반부터 일본의 한류는 침체기를 맞는다. 일단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악재가 일본에 닥치면서 일본 국내 사정이 어수선해졌고[8], 특히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등으로 한일관계가 휘청거리자 정치권 차원에서도 말이 나오고 일본의 한류 또한 그 영향을 일부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틀면 나오던 한류 드라마가 이때부터 일본 민방에서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고, 자국의 한류를 못마땅해하고 있던 혐한 성향의 우익들은 이를 기회 삼아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그 결과 카라와 소녀시대 이후 일본에 진출한 f(x), 아이유, 걸스데이, 레인보우, 원더걸스 등은 신통치 못한 성적표를 받게 된다. 심지어 당시 한국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아이유조차 첫 싱글 2만 장 정도의 판매량에 그치고 만다.이런 한국 걸그룹들의 잇단 실패를 두고 냉랭한 한일관계 탓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지만, 한일관계를 떠나 미흡한 현지화 전략과 잘못된 진출 방향을 문제 삼던 분석도 많았다. 한일관계가 본격적으로 나빠지기 전이었던 2011년에도 많은 그룹들이 진출했지만 카라와 소녀시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리 큰 성공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준비 과정을 거쳐 멤버들이 일본어도 어느 정도 가능한 상태에서 진출한 카라, 노하우를 가진 소속사가 뒷받침하던 소녀시대와 달리, 나머지 그룹들은 갑자기 찾아온 일본내 2차 한류 현상에 한국 기획사와 일본 기획사의 돈독 오른 뜬구름 희망이 들어맞아 주먹구구식으로 진출한 측면이 강했기 때문. 그 결과 이들 기획사의 홍보 전략에 의해, 일본 매스컴으로부터 한국 걸그룹을 주기적으로 '소개당하는' 일본의 일반 시청자들은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2012년 이후 일본의 한국 콘텐츠 시장은 쇠퇴의 길을 걸었고, 2015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 여행객이 2백만 명 밑으로 추락할 정도로 한일관계는 냉랭해져만 갔다. 일본 내 한류의 위상이 대중의 영역에서 마니아의 영역으로 다시 떨어진 것이다. 이는 당시 《별에서 온 그대》로 대표되는 중화권 한류의 재점화에 따라 전반적인 한류 산업의 축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기운 것도 한몫했다.
그나마 관련 산업 관계자들에게 위안이었던 건 팬덤층이 이미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소녀시대, SHINee, BIGBANG, 2PM, EXO 등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활동은 나름대로 활발했고, 위성방송이나 DVD 등 한류 관련 콘텐츠를 찾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다. 아이돌 산업의 경우 여전히 일본은 상수였고, 소녀시대는 2014년에도 도쿄 돔 콘서트를 개최할 정도로 활동은 계속되었다. 또 보이그룹 쪽에서는 2010년대 초반부터 SHINee가 동방신기, BIGBANG의 뒤를 이어 큰 인기를 누렸고, 2PM도 일본 현지에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이전처럼 크게 흥행할 조짐을 보이지는 못했다.
2.4. 3차 한류: 10대와 20대가 주축이 되다
이렇게 한풀 꺾였던 일본의 한류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에서 다시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룹 BIGBANG이 2016년 일본 자국 가수를 포함한 콘서트 동원력 순위에서 외국 가수 최초로 1위를 달성하는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2017년쯤부터 일본 청소년~청년층 사이에서 보이그룹 방탄소년단과 걸그룹 TWICE와 블랙핑크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치즈닭갈비, 불닭볶음면, 달고나 커피, 감자 핫도그 등 한국산 먹거리들이 큰 유행을 탔다.# 이들은 소위 '3차 신한류 붐'을 일으키며 일본 내 한류의 중흥기를 이끌어냈다. 특기할 점은, 이것이 한일관계가 외교적으로 여전히 냉각기인 와중임에도 일어난 변화라는 것이다.[9]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한류의 위상을 드높인 방탄소년단은 아시아 가수 중 최초로 빌보드 메인차트인 '빌보드 200' 1위를 찍으면서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다만 2018년 말 멤버 지민의 일명 광복, 원폭 티셔츠 착용 논란이 터지면서 일본 방송 출연이 취소되는 등 난관을 겪기도 했고, 이후 일본 방송에 출연하는 빈도도 많이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방탄소년단의 경우 서구권을 비롯해 활동 범위가 넓은지라 글로벌한 활동을 지속하며 월드투어 일정에 포함된 일본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2019년에는 여전히 오리콘 차트 1위, 방송 출연 재개, 스타디움 투어까지 치르는 등 팬덤층은 더 성장했다. 그리고 2020년 Dynamite로 '빌보드 핫 100' 1위까지 차지하며 다시 일본 방송사에서도 귀빈 대접을 받는다.
한편, TWICE는 의도하지 않았던 일본 내 TT 포즈의 대유행으로 인해, 준비가 덜 되었음에도 일본인 멤버들도 이미 있으니 비교적 차분하고 빠르게 일본 진출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멤버들이 있는 걸그룹이 한국에서 인기 걸그룹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TWICE는 일본에서도 노기자카 46에 비견되는 정상급 걸그룹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2019년에는 한국 걸그룹 최초로 일본 돔 투어에 나서며 그 인기를 다시 한 번 과시했다.
그렇게 두 그룹이 눈에 띄는 신흥주자로 인기를 얻는 사이, 일본에서 그 전부터 꾸준히 활동하던 동방신기, SHINee 등도 탄탄한 팬층을 바탕으로 여전한 입지를 굳혔다. 2018년에는 동방신기가 일본의 자국 가수를 포함한 콘서트 동원력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방탄소년단과 TWICE는 2017년 연말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에 출연했고, 더불어 TWICE는 NHK 홍백가합전까지 출전하면서 3차 신한류 열풍에 못을 박게 된다. 한편 세븐틴, BLACKPINK, iKON 등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K-POP이 일본에서 매우 인기있는 대중문화로 정착되자 JYP엔터테인먼트는 일본에서 한국식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인으로 구성된 K-POP 아이돌을 만드는 Nizi Project를 시행했고, 이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의 모습은 방송 스타일, 구성 아이돌, 요구 실력, 화장법, 의상 등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K-POP 아이돌의 양상을 띠고 있다.
3차 한류부터는 단순히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만 소비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일상적으로 한류가 스며드는 모습이 두드러졌는데 한국풍 뷰티(화장 등), 패션, 인테리어 등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2.5. 4차 한류: OTT 서비스 흥행과 한류의 폭발적인 글로벌 흥행
10대와 20대 여성이 주축이 되었던 3차 한류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아 보다 더 한류를 대중적으로 일상화시킨 시기라고 볼 수 있다. 3차 한류부터 두드러졌던 일상적 '한국풍' 선호 현상이 더 심화된 시기로 SNS에선 10대를 중심으로 '한국인이 되고 싶다', '한국스러움' 같은 해시태그가 크게 유행하고 연간 검색 순위에서는 한류 관련 검색어가 다수 상위권을 차지했다.### 또한 2023년 라쿠텐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여성이 패션에 가장 많이 참고하는 국가는 한국이었고, 특히 10대 여성의 70~80%가 한국 패션을 참고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2016년부터 8년 연속 압도적 1위가 한국이었다.# 일본의 10대 남성도 한국을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참고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의 수입화장품 시장점유율에서도 프랑스를 제치고 한국이 1위가 되었다.# 일본의 여러 조사 결과에서 일본 여중고생이 가장 선호하는 연예인이 한국 연예인인 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고, 일본 여중고생 사이에서의 유행어에 자연스럽게 한국 관련 유행어가 섞여 있고 1위를 하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또한 2023년 12월 28일부터 2024년 1월 4일까지 10~24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유학 가고 싶은 나라를 조사했는데, 한국이 1위였다.# 한국을 뽑은 이유로 한국풍 라이프스타일 혹은 한국 문화를 좋아해서라는 응답이 두드러졌다. 참고로 2위는 미국, 3위는 캐나다, 4위는 프랑스였다.1차-2차, 2차-3차 한류 사이에는 일종의 공백기가 있었다고 보는 반면, 4차 한류는 3차 한류로부터 공백기 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4차 한류와 3차 한류를 구분하는 게 의미없다는 의견도 많고, 이제 n차 한류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애초에 20~30년간 1, 2, 3, 4차까지 이어졌으면 지속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 편. 심지어 2010년대 후반은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인데도 일본의 한류는 꺾이기는커녕 더욱 일본 대중에게 스며들었다.
일본에도 OTT 시대가 도래하며 한국 드라마를 넷플릭스 등을 통해 접하기 쉬워지면서 일본 내 한국 드라마도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특히 2020년 들어 코로나19라는 글로벌 대참사가 터지면서 일본인들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도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OTT 서비스를 통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국 드라마, 영화 등을 접하는 일본인들이 많아졌고, 그 결과 침체기를 벗어나 순항 중이던 일본의 한류는 일본 대중 사이에 더욱 공고히 스며듦과 동시에 '4차 한류'라 할 만한 사회 현상을 촉발시켰다.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 여러 한국 드라마들이 일본 넷플릭스 1~3위를 몇 개월간 독식하면서[10] 일본 방송에서도 자주 보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연예 뉴스 전문 매체인 '모델프레스'는 2020년 올해의 유행어 후보군에 사랑의 불시착, 기생충, NiziU를 올렸을 정도였다.# 8월 11일 야후 뉴스에는 이러한 문화 현상을 '4차 한류 붐'이라 칭했고, 포브스 재팬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도 4차 한류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2020년 2월부터 넷플릭스에 서비스를 실시한, 《사랑의 불시착》은 반 년 뒤인 9월에도 일본 넷플릭스 전체 랭킹에서 1위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11월 기준으로도 상위권을 유지하며 Top 10에서 차트아웃한 적이 없고, 이태원 클라쓰도 롱런하였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 청춘기록 등도 새롭게 스트리밍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홋카이도에서 9월에 랜드로버 새차를 보러 갔더니 딜러가 '사랑의 불시착'에 나왔던 차라면서 자랑하더라는 일화도 있었다. 일본 현지에서 체감한 한류열풍의 파급효과. 참고로 해당 유튜버는 한일부부지만, 딜러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즉, 딜러는 일본인한테 차를 판다고 생각하면서, 한류 드라마를 세일즈 포인트로 내세운 것이다.
2022년 기준 일본 OTT 시장 점유율은 1위 넷플릭스(22.3%), 2위 U-NEXT(12.6%), 3위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11.8%), 4위 DAZN(11.4%), 5위 디즈니+(9.4%), 6위 Hulu(6.8%)였는데, U-NEXT가 다양한 한류 콘텐츠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OTT인 걸 고려하면, 일본 내 OTT 매출은 얼마나 한류 콘텐츠를 잘 제공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 봐도 무방하다.
OTT발 한국 드라마들이 일본 방송에서 사불이 단순히 언급되는 걸 넘어 본격적인 주제로 다뤄지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고, OTT 같은 플랫폼을 다루는데 능숙한 MZ세대는 물론이고, 중년 이상 세대도 넷플릭스에서 흥행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고 있다. 유명 연예인은 당연하고 모테기 도시미쓰, 하시모토 도루 같은 정치인들조차 한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심지어 극단적인 발언을 일삼는 반한 논객으로 유명한 햐쿠타 나오키조차 항복했다.# 중년 이상 남성들도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게 될 정도로 OTT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바꿔 말하면 한류 덕분에 OTT가 일본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 Lemino, U-NEXT 등 여러 일본 내 OTT가 다양한 한류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2021년 9월 중순에는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대흥행을 거두면서 일본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만화 신이 말하는 대로, 도박묵시록 카이지 같은[11] 일본 내 유사 작품들이 거론되기도 했는데, "앞의 두 작품은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참가당해서 해당 캐릭터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오징어 게임은 자발적으로 참가해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깊은지 느껴져 재미있었다", "게임을 하는 세계관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여러 군데에 일상과 이어지는 현실적 요소가 있어서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재밌게 봤다" 등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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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5일 일본 넷플릭스 순위 |
한편 K-POP의 인기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스며드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방탄소년단의 일본 베스트 앨범은 그 해 오리콘 앨범 연간 판매량 1위를 달성했다. 심지어 2021, 2022년 2년 연속 오리콘 차트 가수 연간 매출 1위를 찍었는데, 이는 해외 아티스트로는 최초이며 일본 국내 가수를 포함해도 4팀 뿐이었다.# 방탄소년단의 대표곡인 다이너마이트와 버터는 일본에서 연달아 메가히트를 치며 주간 스트리밍 기준 역사상 최고 기록을 연달아 세웠고, 2021년 일본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아티스트가 되었다.## 방탄소년단이 일본 유튜브에서 2021년 3월부터 2022년 2월까지 재생된 횟수는 약 20억회였는데, 이는 한국 유튜브의 약 7억회보다 거의 3배는 많은 수치였으며 인구 대비로 따져봐도 한국보다 더 많은 재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기에 심지어 트와이스나 니쥬 같은 다른 한류 그룹들도 10위 안에 포진했다.[14]
또 이전 일본의 가요제에 한국 아이돌이 출연할 경우 일본 내 인기가 검증된 인기 아이돌 위주로 번안곡이나 현지화된 곡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4차 한류 시대에 들어서는 젊은 층의 시청률을 잡기 위해 한류 아이돌은 거의 필수적으로 몇 팀이 등장하고, 이는 일부 신인 그룹도 포함된다.[15] 심지어 번안곡이 아닌 한국어 원곡을 부르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2018년 TWICE가 뮤직 스테이션에서 What is Love?의 한국어 원곡을 부른 것이 굉장히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TWICE는 3세대 걸그룹의 막이 내리고 4세대 걸그룹의 시작이 열리면서 한국에선 인기가 예전보다 줄어든 반면 일본에서는 2023 월드투어 도쿄, 오사카 스타디움 공연을 만석시키는, 아직까지도 레전드급 걸그룹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앞서 말한 4세대 걸그룹의 시작인 IVE, LE SSERAFIM[16], NewJeans 등의 활발한 일본활동과 성공을 통해 한류의 인기를 더 강화시키는 추세다.
이렇게 4차 한류가 일본에서 여러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내자 일본 주류 언론사들도 일본의 연예 기획사에 대한 비판 기사들을 내고 있다. 닛케이신문(유료 신문). 재밌게도, 일찍이 일본의 논픽션 작가 다사기 겐타는 일본 드라마가 지난 10년 간 급속하게 시시해진 이유(번역)라는 제목의 글을 써 자국 드라마의 문제점을 비판한 바 있었는데, 이 논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젊은층의 한류붐에 따라 과거 일본의 유행을 이끌었던 하라주쿠에서 코리아타운으로 유명한 신오쿠보로 유행의 발산지가 옮겨가는 모습도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 신오쿠보역은 일본 젊은층의 인기를 끌던 하라주쿠역을 제치고 일본 여중고생들이 좋아하는 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편, 웹툰 또한 국외 진출을 개시하며 일본 시장에도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일본은 만화 및 애니메이션 산업 강국이다 보니[17] 아직은 틈새 시장을 노리는 수준이고 주류화될 만한 눈에 띄는 성과를 얻진 못했다. 하지만 2020년대 초반에《신의 탑》, 《나 혼자만 레벨업》가 괜찮은 반응을 얻었으며, 이후 케이팝을 포함한 한국 컨텐츠를 주제로 삼은 애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대히트를 친다.
한국산 게임인 넥슨게임즈의 블루 아카이브와 시프트업의 승리의 여신: 니케가 App Store와 Google Play에서 매출 상위권에 들거나, 세계 최대 동인 행사인 코믹 마켓에서 많은 작품이 출시되는 등 서브컬처 모바일 게임 분야에서도 흥행을 이어나가고 있다.
2023년, 일본 연예계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누리던 쟈니스의 창업주가 저지른 쟈니 키타가와 연습생 성착취 파문과 같은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 아이돌 업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이 사건은 영국의 BBC2를 통해 해외에도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이사회까지 조사에 나섰을 정도로 국제적인 망신을 일으킨 대형 사건으로서 일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치명타를 불러 일으키고도 남을만한 엄청난 사태임에 틀림없다. 이미 쟈니스 사무소는 인기가 급락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다 SMAP 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아라시가 2019년 활동 중단을 선언함으로서 그렇지 않아도 급락 중이던 쟈니스의 하향세를 더욱 재촉했다. 당시 아라시 외에 쟈니스가 내세웠던 다른 아이돌 그룹이 생각만큼의 인기몰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런 와중에 당시 최장수 인기 그룹의 활동 중단 선언은 일본 연예계에 충격을 가져왔다. 이후 쟈니스의 또다른 그룹이었던 King & Prince의 멤버였던 키시 유타, 히라노 쇼, 그리고 진구지 유타 등이 탈퇴 선언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들은 탈퇴를 선언하게 된 이유에 대해 ‘해외 진출 좌절로 인한 허탈감‘을 이유로 들었는데 이를 통해 세계구급 인기를 누리는 K-POP에 많은 자극과 도전을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쟈니스가 누리고 있던 장기독재체제가 무너질 조짐이 보이며 그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다른 일본내 기획사들이 그 틈새를 노릴 가능성이 생겼고, 더구나 K-POP을 통해 눈높이가 높아진 일본 팬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실력파 아이돌들의 출현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일본 국내에 설립된 한국 기획사들의 일본 지부에도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일본 가요계를 대표하는 NHK 홍백가합전에서 쟈니스 그룹을 대체하여 K-POP 그룹이 초청되면서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3. 영향
3.1. J-POP의 변화
3.1.1. 일본 아이돌 음악계의 변화 흐름
일본에서 K-POP의 영향력으로 인해 2010년대 이후로는 J-POP에서도 K-POP과 비슷한 요소를 차용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다. 사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양상이 아주 새로운 건 아닌데, 고대 한반도에서 전해진 음악들은 일본에 고마가쿠(高麗樂, 고려악)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트로트와 일본 엔카는 알게 모르게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엔카의 시조로 대우받으며 인정하는 코가 마사오는 유년 시절부터 인천, 경성에서 살면서 6/8박자 리듬이나 특유의 멜로디 라인 등 한국 민요의 요소를 일본의 엔카에 도입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이미 2차 한류 시절부터 LDH 계열인 E-girls나 Flower 같은 그룹은 한류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대표적인 변화점은 아이돌들의 안무 동선이다. 본래 J-POP의 안무 동선은 센터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경향을 띠었으나, 근래 일본 아이돌 안무의 동선을 보면 한국처럼 센터를 바꿔가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일본 아이돌 그룹 AKB48의 ‘Teacher Teacher’가 한국인 안무가 박준희를 고용해서 K-POP과 비슷한 춤을 선보인 게 그 예시이며, 해당 앨범은 역대 초동 4위의 판매량을 기록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다만 이와 별개로 국내의 48사단 팬층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저게 무슨 K-POP 스타일이냐?"라면서 별로 좋은 평가는 하지 않았다. 이는 상당수 일본 그룹들이 처해있는 딜레마인데, 안티들에게 잘하면 '한국 컨셉 따라한다'라고 까이고 못하면 '그것도 못하냐'고 까이는 것.
한편, 과거의 일본 음악계에서는 EDM 곡조나 랩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는데 K-POP 붐 이후부턴 점점 한국과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K-POP처럼 유튜브에 뮤직비디오나 안무 연습 영상을 올리는 경우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한류가 가장 융성해진 2020년대에 들어서는 단순한 컨셉의 차용이나 부분적 모방을 뛰어넘어 K-POP 시스템 자체를 일본으로 이식한 뒤 한국의 연습생 시스템 기반으로 만든 그룹이 데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에서 방송했던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일본 현지화 오디션인 PRODUCE 101 JAPAN 시리즈의 데뷔조들인 JO1, INI, ME:I가 있다.
2018년에는 BALLISTIK BOYZ from EXILE TRIBE라는 그룹이 등장해 논란이 되었다. EXILE 사단의 새 보이그룹인 이 팀은 이름의 의미부터가 '탄도학 소년들'이라는 뜻으로 누가 봐도 방탄소년단의 네이밍을 참조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회사 대표인 히로사장은 '총알처럼 멤버 간의 포지션이 바뀌는 모양새를 보고 이름을 지었다' 라고 밝혔는데, 애당초 이런 특징 자체가 K-POP의 시그니처 포인트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K-POP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 EXILE 사단의 가장 큰 특징이 '보컬과 댄서가 구분된 형태의 그룹' 이었는데, 아예 멤버 전원이 래퍼, 보컬, 댄서 포지션이 가능하다는 점은 누가 봐도 K-POP을 의식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정식 데뷔 후에는 일반적인 EXILE 사단 그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잠잠해지긴 했지만, 데뷔 전에는 다소 논란이 있었다.
이처럼 K-POP의 영향을 받으면서 J-POP도 여러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전면적인 개혁에 준하는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개혁을 위해서는 일본 문화계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데 이는 상당한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무리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으로서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한국과 일본은 문화 차이가 있는, 엄연히 다른 나라다. 합숙과 같은 단체생활이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어린 연습생들을 아이돌로 길러내는 한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가혹하다고 여길 일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음악 업계에서도 한국식 아이돌 트레이닝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시스템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면, 일본 문화계가 한국 문화계에 더욱 휘둘릴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아래 문항에 후술된 SKY-HI의 경우,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일본은 K-POP의 하청으로 전락할 수 있다" 라고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3.1.2. 인디 음악 중심으로 음악 시장 재편
이렇게 일본 아이돌 음악이 한국 아이돌 음악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몰락하고 K-POP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를 꾀하려는 한편, 일본 국내의 J-POP 시장에서는 인디 음악 중심으로 시장 재편이 이뤄졌다. 어차피 한국 아이돌 음악을 상대로 더는 경쟁을 할 수 없게 된 일본 아이돌 음악은 그냥 아이돌 오타쿠를 위한 음악으로 내던져버리고, 차라리 한국을 상대로도 경쟁력이 갖추어졌다 판단된 인디 음악을 밀어 주는 쪽으로 시장이 재편된 것이다.원래 일본의 음반계와 방송계는 2010년대 이후로 흔히 48그룹과 쟈니스로 대표되는 아이돌들의 독무대였다. 음악프로도 해당 소속사의 아이돌, 방송 게스트도 아이돌, 리포터와 MC까지 아이돌로 도배되고 악수회와 팬미팅으로 대표되는 상술과 유사연애 시스템으로 사실상 사장되고 있는 수순이였다. 점차 엽색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아이돌 문화에 당연히 대중들의 관심은 멀어졌고 보다 높은 완성도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한국 아이돌이 대중적인 TV방송과 음악프로의 지분을 점차 잡아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Weverse나 FANS 등으로 대표되는 팬들과의 소통과 SNS 홍보도 점차 뒤쳐지기 시작하며 필수적인 팬클럽 가입을 요구하고 멤버들의 SNS나 프라이버시를 극단적으로 차단하는 특유의 문화 때문에 일본의 아이돌 업계는 점차 소통을 중시하는 한국 아이돌한테 상술에서도 점차 밀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틱톡, 쇼츠, 릴스로 대표되는 휘발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문화와 유튜브같은 비디오 플랫폼이 필수로 자리잡으면서 대형 소속사의 자본으로 잠식된 TV방송에서 보지 못하던 프로듀서들과 싱어송라이터들이 대대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들이 국내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내게 되며 자연스럽게 2000년대 이후로 시들어졌던 록 기반의 밴드 문화와 싱어송라이터 문화가 부흥하기 시작한다. 특히나 현재 일본의 정상급 가수들 중에는 과거 니코니코 동화나 보컬로이드를 통해 작사와 작곡을 접해 커버 영상을 인터넷에 투고하거나 라이브 하우스나 언더신에서 공연을 하고 버스킹을 하는 등 서브컬처계에서 유명해진 경우가 많았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접하기 힘들었던 하위 문화가 스마트 시대에 접어들며 시의적절하게 대중에게 전파되어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일본 미디어계는 대형 소속사의 아이돌들이 협찬과 홍보에서도 부진한 성과를 보이고 여러 사건으로 몰락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외에서도 유의미한 성적을 기록하고 음원 차트를 석권한 이러한 인디 밴드들과 싱어송라이터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는 2010년대에 요네즈 켄시가 성과를 거두고 그 뒤를 이어 2020년대부터는 요루시카, YOASOBI, ZUTOMAYO, Ado, Official髭男dism, King Gnu, 후지이 카제, Vaundy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나오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K-POP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하고 음악 시장을 인디 음악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을 통하여 일본 음악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인식은, 일본 내에서 비단 음악업계만이 아니라 서브컬처 업계에서조차도 나타나는 하나의 큰 조류가 되고 있다. 일례로 걸즈 밴드 크라이의 프로듀서 히라야마 타다시의 언급에 따르면 걸즈 밴드 크라이의 장르가 일본에서도 애니메이션화가 그다지 활발한 편은 아니었던 밴드물로 결정된 것은 "이제 일본 아이돌은 K-POP을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밴드를 잘 안 한다. 밴드에 일본 음악의 돌파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일본 음악이 K-POP의 경쟁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K-POP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인 밴드 음악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발상인데, 이는 일본 아이돌 음악이 K-POP의 선봉장인 한국 아이돌 음악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한 이후 J-POP 시장이 K-POP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하기 위해 인디 음악 중심으로 재편을 시도했고 어느정도 성과를 보이긴 했으나, 그것이 해외에 유의미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락밴드 음악은 이미 세계적으로 침체기이고 영미권에서조차 소수의 락밴드만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 뿐이다. 그런 탓인지 케이팝 퍼포먼스를 차용한 듯한 아이돌들이 다시 주목받는 상황이다.
3.2. 한국 데뷔를 바라는 일본인 증가
일본은 한국보다 음악 시장의 규모가 큰 나라임에도[18] 자국의 질 떨어지는 아이돌 시장 현황에 지쳐서인지, 많은 일본인 아이돌 지망생들은 한국에서 스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2021년 일본 TBC 방송에서 취재한 바에 따르면 K-POP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요코하마의 한 댄스 스쿨은 지난 4년 사이에 입학생이 4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2021년 7월 뉴스에서는 신오쿠보역 근처에 있으며 K-POP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댄스 스쿨 K-POP DANCE STUDIO(KPDS)에서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입학생이 무려 5배나 증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실제 사례는 아니지만 일본의 LINE망가에서는 주인공의 K-POP 아이돌 데뷔가 주제인 걸 크러시라는 만화도 연재 중이다.이러한 영향으로, 팝가수를 꿈꾸는 일본의 10대 청소년들 상당수가 한국 연예 기획사에 소속되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오디션 준비를 하고[19] 그렇게 한국 아이돌이 된 일본인 멤버가 일본에서 다시 화제를 모으며 인기를 끌어모으고 있다. 한국에서 데뷔한 자국의 스타를 보면서 더더욱 지원자가 늘어나고 있는 구조이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본인 멤버를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일본은 스트릿댄스 문화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국가이며, 규모도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그렇기에 인재도 많은 것이 당연하며, 아이돌이 메인스트림으로 자리잡았고 인기만 끈다면 해외 진출까지도 순조로운 한국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한국 기획사들도 세계 2위 음악 시장인 일본에서 인기를 끌 수 있게 해주는 일본인 인재들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이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이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원인으로는 일본인 아이돌 지망생들의 K-POP이라는 장르에 대한 동경과 갈라파고스화된 자국의 아이돌 시장에 대한 기피를 들 수 있다. 상술했듯 일본의 아이돌 문화는 실력이 아니라 악수회로 대표되는 상업주의, 그리고 미숙함과 귀여움으로 팬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캐릭터 이미지를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춤과 노래 실력으로 성공하기를 희망하는 아이돌 지망생들에게는 적합한 환경이 아닌 것이다. 본인 스스로 노력해서 두각을 드러내기에도 일본의 아이돌 시장은 독과점이 심각한 수준이다. 남돌은 쟈니스 사무소, 여돌은 아키모토 야스시 사단이 꽉 잡고 있으며 이들의 영향력은 일본의 각종 미디어에도 미치고 있다. 이런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주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이치. 그나마 쟈니스가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보수적인 정책을 조금씩 바꾸고는 있으나, 경직된 아이돌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주기에는 아직 요원해보인다.[20] 그런 반면 한국에서는 실력을 통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많은 K-POP 스타들이 있다. 이들을 롤모델로 삼는 아이돌 지망생들이 이들처럼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 대중음악계는 오래 전부터 해외 진출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그 노력이 K-POP이라는 이름으로 결실을 맺어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미국 빌보드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 세계 유행에 맞게 음악을 작곡, 작사하는 역량, 관련 온라인 콘텐츠 창작 기술, 뮤직비디오 제작 기술, 각종 마케팅 정책 등 세계 진출을 위한 노하우 면에서 한국이 우위에 있다는 것은 대다수의 일본인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즉, 대중가요 음반 시장의 규모는 일본이 한국보다 크지만, 세계 진출을 위한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은 한국이 더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성공한다면 아시아권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충분한 인지도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한국 아이돌 지망생들에게 왜 한국에서 아이돌이 되길 바라느냐고 물어보면 많이 나오는 대답 중 하나가 "지구촌이라는 무대 위에서 본인의 실력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월드스타가 되고 싶다"다.
과거에 일본에서 K-POP은 한국인들에게 특화된, 일본과 전혀 동떨어진 문화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TWICE의 모모, 사나, 미나의 활약을 계기로[21] 일본인 역시 K-POP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면서[22] 많은 일본의 청소년들이 꿈과 도전 정신을 가진 채 K-POP에 지원하기 시작했다.[23] 이들은 한국의 연예 기획사에서 주최하는 오디션에 응하거나 워홀이든 교환학생이든, 심지어 어학연수든 뭐라도 잡아서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건너와 연습생 생활을 거치며 한국어 공부를 병행하는 등, 다국적 K-POP 아이돌 그룹의 일원으로 데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일본 연예계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생겼는데, 본래 AKB48 소속이었던 타카하시 쥬리(로켓펀치)와 혼다 히토미(SAY MY NAME), HKT48 소속이었던 미야와키 사쿠라(LE SSERAFIM)가 대표적이다.[24] 더불어 PRODUCE 101 JAPAN 시리즈의 흥행 후에는 안쥬르므의 카사하라 모모나, Girls²의 이시이 란, CDL ∞의 사카구치 리노처럼 이전 활동 경력을 뒤로 하고 K팝 현지화 아이돌 그룹 결성 오디션에 지원해 한국 활동을 시작하는 멤버들도 증가하는 추세이다.[25]
더 나아가 이제는 일본인 멤버들에게 저마다 개성이 부여될만큼 진화하고 있다. 덜렁이 콘셉트와 건강미로 인기를 높인 모모나, 귀엽고 황당한 백치미 콘셉트로 인기를 모으는 레이, 풍부한 표정 연기로 무대 퍼포먼스에 플러스를 더하는 츠키, 수려한 용모의 발레리나 출신 카즈하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제로 TWICE의 흥행 이후 데뷔한 체리블렛, 로켓펀치, TREASURE 등을 보면 이전에 비해 일본인 멤버가 눈에 띄게 많아진 것을 볼 수 있다. 단순 수치만 봐도 2022년 초 기준, 한국 음악방송 출연 경험이 있고 1년 이상 꾸준히 활동한 그룹 가운데 일본인 멤버의 숫자는 40명을 훌쩍 넘어섰다. 한국 데뷔를 원하는 일본 지망생들과 일본 시장을 노리는 기획사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JYP 엔터테인먼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Nizi Project를 통해 K-POP의 현지화까지 이뤄지고 있는 걸 계기로 K-POP은 더 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게다가 JYP 엔터테인먼트는 CEO 박진영이 보여준 입담 좋고[26] 인간성을 중시하는 인간미 넘치는 이미지 덕에 일본에서 호평받은 것은 물론, 주가도 높아졌다. 박진영 리더십을 분석하거나 그해 게닌들이 성대모사를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크든 작든 일본 아이돌 업계에 어떠한 충격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일본은 아이돌이라는 단어 자체를 고유명사로 만들었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아이돌 문화가 자리잡혔던 나라이고, 마츠다 세이코나 소년대, 모닝구 무스메 같은 아이돌들은 일본 대중음악 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렸을 정도로 대중적 파급력이 컸을 뿐더러, 수많은 아이돌들의 시초가 되었을 정도로 일본의 아이돌문화는 일본음악 메인스트림의 선두주자로 불려왔다. 하지만 질적으로 시대에 따라가지 못했고, 걸그룹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이끄는 AKB48 그룹, 보이그룹은 쟈니 키타가와가 설립한 쟈니스 사무소의 아이돌 시장 독점으로 이미 일본의 아이돌 업계는 밴드 음악 및 인디 음악에게 자리를 뺏겨버렸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결국 오랫동안 정체 상태에 있었던 일본 아이돌 업계가 아시아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 기준으로도 나름대로의 파이를 가져가고 있는 한국 아이돌 업계를 보며 전반적으로 변화할 계기가 될 가능성 역시 크다.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진 일본으로 한국 아이돌들이 진출해 인기를 끄는 상황은 시장 논리 상 당연한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자국의 야망 있고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이 일본 대중음악계를 거부한 채 한국으로 떠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인재 유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때 아시아 제1의 경제대국이자 문화대국이었던 일본으로서는 충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물론 상기했듯 일본에 아이돌 시장만 있는건 아니기에 비아이돌 음악계 사람들은 여전히 절박감을 느끼지 못해 굳이 위험한 변화를 무릅쓰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아이돌 업계에만 한정해 보자면 분명 업계의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발언은 J-POP의 계속된 침체와 인재 유출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의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SKY-HI[27]가 세계 무대에 통용되는 그룹을 만들겠다며 사비 1억 엔[28]을 투자해 론칭한 자사 BMSG의 보이그룹 오디션 프로그램 "The First"[29]의 도입부에서 한 말이다. 방송을 보면 참가자 중에 한국 기획사 연습생이나 K팝 보이그룹 결성 오디션 출신도 있고,[30] 일본의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한국에서 데뷔하는 것에 '분했다(悔しかった)'고 말하기도 하는 등[31] K-POP의 약진이 기획 의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방송 목적부터가 박진영이 기획한 일본 현지화 걸그룹 결성 오디션 니지 프로젝트가 흥행에 성공한 뒤, 다음 오디션 격으로 보이그룹 오디션을 런칭하겠다고 선언하자 미리 선수를 치면서 제작한 보이그룹 육성 프로였다.[32]
3.2.1.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출신 아이돌 명단
- NEXZ: 소건을 제외한 멤버 전원[33]
- NiziU: 멤버 전원[34]
- cosmosy: 멤버 전원
- DXMON: 세이타
- RIIZE: 쇼타로
- LIGHTSUM: 히나
- Lapillus: 샤나
- LE SSERAFIM: 사쿠라, 카즈하
- RESCENE: 미나미
- 다크비: 유쿠
- ME:I: 멤버 전원[35]
- BEWAVE: 레나
- Billlie: 츠키, 하루나
- IVE: 레이
- INI: 쉬펑판을 제외한 멤버 전원[36]
- 아일리원: 하나, 리리카
- &TEAM: 의주, 니콜라스를 제외한 멤버 전원[37]
- aespa: 지젤[한][39]
- eite: 유이사, 레나, 레오
- n.SSign: 카즈타
- NCT: 유타, 리쿠, 유우시, 료, 사쿠야
- ENHYPEN: 니키
- 온앤오프: 유
- ALL(H)OURS: 마사미
- WOOAH: 소라[한]
- 유니코드: 멤버 전원
- EVNNE: 케이타
- IS:SUE: 멤버 전원
- JO1: 멤버 전원
- 첫사랑: 유나
- Candy Shop: 유이나
- Kep1er:
마시로[41], 히카루 - 24K+: 유마, 타케루
- TRI.BE: 미레
- TREASURE: 하루토, 요시[42], 아사히,
마시호[43] - TWICE: 미나, 사나, 모모
- TOZ: 멤버 전원[44]
- KickFlip: 아마루, 케이주
- FANTASY BOYS: 히카리, 히카루
- 퍼플키스: 유키
- 펜타곤: 유토
- P1Harmony: 소울[한]
- PICKUS: 코타로, 유라
- LUN8: 유우마, 타쿠마
- Hi-Fi Un!corn: 후쿠시마 슈토
- tripleS: 마유, 코토네, 카에데, 린
- ILLIT: 모카, 이로하
- UNIS: 나나, 코토코
- BABYMONSTER: 루카, 아사
- ARrC: 앤디[46], 리오토
- MADEIN: 마시로, 미유, 세리나[한][48], 나고미
- MEOVV: 안나
- MIMIIROSE: 안나
- SAY MY NAME: 히토미, 메이
- ODD YOUTH: 마이카
- izna: 마이, 코코
- XLOV: 하루
- NouerA: 미라쿠
- CLOSE YOUR EYES: 켄신
- BE BOYS: 타쿠마
- AHOF: 다이스케
- KIIRAS: 쿠루미
- Baby DONT Cry: 쿠미, 미아
- NAZE: 카이세이, 유야
3.3. 한국 문화 전반의 확산
세련된 패션 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보여주는 한국 아이돌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증가하면서, 일본의 10~20대 청년층은 단순한 음악이나 아이돌을 넘어, 한국의 10~20대 또래층에서 유행하는 패션이나 뷰티, 먹거리 혹은 한국어, 한글 공부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49]현재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한류 스타들의 한국식 화장법(K-뷰티)과 한국산 화장품의 수요량 역시 급증해 일본 도쿄의 패션 중심지로 유명한 하라주쿠도 한국 화장품을 취급하는 전문샵과 패션 가게들이 2017년부터 다시 점포를 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식 화장법'을 이른바 '얼짱 메이크업', '쿨 코리아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 가장 수혜를 입으며 성공한 국내 브랜드 중 하나가 세계적인 화장품 업체 로레알이 지분을 매수한 것으로 유명한 스타일난다가 있다. 일본의 10~20대 여성층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의 상당수 젊은 여성들에게 한국 대중문화는 외국의 흥미로운 문화를 넘어 이제는 일상 문화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한국 요리도 비슷한데, 1~2차 한류 붐 당시 김치, 김뿐 아니라 막걸리, 간장게장, 삼계탕, 갈비, 삼겹살, 홍초 등 여러 가지 한국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일본 사회에서도 이런 음식들이 한국 요리의 대중화를 다지는 계기였다면, 3차 한류 붐 때는 이런 토대 위에서 불닭볶음면, 치즈닭갈비, 치즈 핫도그, 콘도그, 떡볶이 등 한국에서 유행하던 음식들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전파되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어느덧 일본에서도 한류가 정착된 지 수십 년이 지나 2020년대가 되었고, 한국 요리는 한 때의 유행을 지나 이제 평범한 일본인들도 일상적으로 즐기고 있는 중이다. 다만 매운 음식은 매움이 덜해지고 일본 사람 입맛에 맞게 달달해지는 등의 현지화도 거친다. 반찬이 되어버린 기무치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지리도 가깝고 똑같이 자포니카 쌀을 즐기는 몇 안되는 국가다보니 일반적인 음식점뿐더러 나물 등의 반찬도 들여온 것이 눈에 띈다. 김치 나베, 야키니쿠 등의 일본식 한식도 주목해볼만한 부분.
이러한 한국 음식의 선호는 한국 국가의 대한 선호와는 별개로 작동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통계적으로도 그렇다. 한국도 동일한데 한국의 입장에서 중국을 보아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중국집도 대중적으로 많이 영업하고 있는데다 중국 요리도 한국인들의 일상에 녹아있고 제대로 정착되었을 정도로 많이 먹고 있지만[50] 그냥 중국 음식이 맛있으니까 먹는 것이고 그게 딱히 중국을 좋아해서 먹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아무리 중국을 싫어하는 한국인이라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중국에서 유명한 마오타이, 수정방, 오량액, 죽엽청같은 값비싼 고급 술을 선물받아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고 대부분은 좋아하는 것과 같다.관련 영상 이렇게 시간이 흘러 2023년 기준으로 일본에서 한국산 식품을 역으로 벤치마킹해서 판매하는 사례까지 늘어나는 격세지감의 상황까지 왔다.관련 영상
이처럼 2010년대 이후 일본에서 한류가 유행하는 특징은, 한류 붐을 이끌어가는 세대가 이른바 최신 유행을 주도하는 세력의 Z세대로 통칭되는 10~20대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침체기에는 K-POP이나 한류가 일본 젊은층에서 서브컬처 정도로 자리매김했지만, 3차 신한류 붐이 일어난 2017년 들어서는 이른바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인싸' 성향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경향이 많아졌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일본의 많은 댄스 동아리에서 K-POP 그룹의 춤을 커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한국에서 같은 생년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OO라인' 같은 신조어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과거보다 더 발달한 영향력도 있을 것이다. 2010년대 기준 사실상 SNS 유행의 흐름은 한국으로 주도권이 넘어오는 추세다. 패션이나 팝문화 외에도 전통적으로 일본이 강세였던 디저트 분야 역시 한국에서 유행하면 일본으로 퍼져나가는 식으로 방향이 설정된 감이 있다. 실제로 설빙이나 공차를 비롯한 각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최적화 디저트 및 한국식 카페 등이 일본 젊은층 사이에서도 제법 유행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 젊은 층의 인플루언서들이 한국의 멋있는 카페를 방문하고 소감을 남기거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찍어서 업로드하기도 한다.
참고로, 일부 일본 언론에선 3차 한류 붐을 "전에 없던(空前) 현상"이라고 과장해서 쓰고 이런 것을 한국에서 역수입해서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사회 현상의 상당수는 2차 한류 붐 시절부터 있던 것들이었다. 오히려 한류의 대들보인 일본의 중년 여성 팬덤이 2차 한류 붐 이후 양국 관계 문제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10~20대 팬덤이 더 부각되는 측면도 있다. 이는 2차 한류 당시의 방한 일본인 여행객 규모를 3차 한류가 시작된지 약 2년이 지난 2019년에도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 어렴풋이 유추해볼 수 있다. 환율 때문인 점도 있다. 2차 한류 붐 당시엔 엔고 현상이 지속되고 있을 때라 일본인들의 해외 여행도 활발하던 시기였다.
그 덕분에 해외여행을 할 돈이 부족한 일본의 10~20대는 과거 한류의 중심지였던 신오쿠보로 다시 몰려들었고, 이 지역도 10~20대들이 유행을 주도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점들이 많아졌다. 물론 돈을 모아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 젊은이들도 많이 늘어났다. 실제로 2019년 3월 일본에서 한국을 방문한 사람이 약 37만 5천 명에 달해 월별로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방문객 최고치를 경신한 것으로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어 공부 및 학습 열풍도 만만치 않게 불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일본 중고생들 가운데 한국어 교재 판매량이 늘고 있으며[51] 심지어 개인 SNS에 심심찮게 한국어가 올라올 정도로 일본 10대들 사이에서 한국어가 트렌디한 언어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의 주간지 '겐다이 비지니스'에 따르면 일본 엔터테인먼트 프로인 짚{Zip}에서 일본의 10대들을 상대로 2020년 유행할 단어에 대한 설문조사 중 한국어의 '진짜'와 '그래 그렇지'란 의미의 '소레나(それな)'가 합쳐진 '진짜(일본식 발음으론 '친챠')소레나(チンチャそれな)'가 1위를 했다는 기사도 뜰 정도였다. 상대방의 의견에 강한 동조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신조어라고 한다. 아울러 '그랬는데'란 단어의 '~는데'란 말도 쓰인다고 한다. 이는 한국에서 흑역사, 신의 한 수 같은 단어들이 뉴스에서도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52]
현지에서는 이런 언어가 '한본어'라고 불리는데 말 그대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퓨전화되어 쓰이는 신조어이다. 예를 들어 무엇을 부탁하거나 어떤 말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응답을 할 경우 일본어 '와캇다'란 대신 '아라소데스' 즉 한국말의 '알았어(아라소)'와 경어 '~데스'가 합해져서 쓰여진 단어로 응답하는 방식이다. 심지어 ‘대박’, ‘멘붕’, ‘갑통알[53]’같은 한국에서도 신조어격인 단어나 줄임말들도 사용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의미와 사용 실례까지 곁들여서 해석하는 서적이나 앱을 통해 한국 MZ 세대들이 이용하는 언어까지 실시간으로 배운다고 한다.
특히 2020년 6월 일본의 여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재 또래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 Top5 중 무려 3개가 한국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1위가 Nizi Project, 3위에 달고나 커피, 그리고 5위가 사랑의 불시착이었다.[54]
심지어 이제는 한국 교복까지 인기를 얻는 진풍경도 일어나고 있는데, 한국식 교복 대여점이 많이 늘어나서 일본의 한류 팬들이 한국식 교복 차림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유행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일본 교복과 다른 몸매의 곡선이 드러나는 디자인 때문에 인기가 높다고 한다. 평상복과 같은 개념으로 입는 쪽으로도 진화하는 중이며, 이는 아마도 한국의 아이돌이 교복을 입는 모습이 많이 나와서 유행을 타는 것이 아닐까 추측되는데, 일본 내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게다가 코로나의 영향으로 한국으로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급기야 '도한(渡韓)' 놀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도한은 즉 '한국으로 건너감'이란 의미인데 일본 국내 소재 호텔에 1박 2일 정도로 머물면서 한국 과자나 음료, 음식 등을 마련해서 셀피 등을 통해 한국에 여행온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붐이 돼서 실제로 일본내 일부 호텔들이 이를 이용해 수익을 얻는다고 할 정도로 널리 퍼지고 있다.
코로나가 끝나 해외여행에 대한 제약이 풀린 이후로는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관광을 가고 있다. 특히 홍대 상권이나 더현대 서울, 경복궁에서는 심심찮게 일본어를 들을 수 있다.
이렇게 3차/4차 한류를 계기로 한국 문화가 일본 국내에서 최신 유행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2010년대 당시의 일본 국내에서의 대중문화의 변화와도 간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침체되는 경기와 저출산·고령화 그리고 사토리 세대와 초식남으로 대표되는 중장년층에 비해 소비력이 떨어지는 소비 트렌드로 인한 청춘 시장의 축소로 인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 내에서 젊은이들이 문화 주도권을 잃고 일본 대중문화가 중장년층을 주요 소비자로 삼는 방향성으로 옮겨가며 갈라파고스화되자 자연히 젊은이들이 즐길 문화가 없어졌었는데, 이 틈새를 적절하게 한류가 메꾼 것이다. 마침 일본 연예계에서도 이 시기에는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 개척 및 진출에 관심이 없었고 그야말로 집토끼를 지키는 데에만 열심이라서 젊은이들의 변화하는 취향에 대해서는 배려가 전혀 없었다. 악명 높은 쟈니스 사무소의 사례도 그렇고, 아키모토 야스시의 48 사단도 그저 중년층 아이돌 오타쿠를 상대로만 장사하는 것에 몰두해 있어서 평범한 일반 청년층들을 비롯한 대중들에게는 완전히 외면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 기성 연예계가 안일하게 처신했던 결과는 3차/4차 한류의 대두와, 한국 아이돌 음악과의 경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면서 몰락해버린 일본 아이돌 음악을 대신하는 인디 음악 위주로의 J-POP 시장의 재편이었다.
사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특히 종합편성채널)이 중장년층을 주요 소비자로 삼는 방향성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자신들이 즐길 문화가 없어져 버렸다고 느낀 젊은이들은 대거 OTT 서비스와 인터넷 방송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변화시킨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한국의 상황이 일본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었으며 때마침 한류가 그 수혜를 입은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오타쿠들이라면야 일본산 서브컬처라는 또 다른 대안이 있었을거라, 굳이 한류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는 없었겠으나, 정말로 문화 주도권을 중장년층에게 빼앗기고 있었던 비(非)오타쿠 일반인 젊은이들의 입장에선 얘기가 달랐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인싸 성향의 젊은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그때까지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이 절실하게 필요했었던 것이다.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벌어지기 직전의 10~20대의 젊은 세대를 위한 대중음악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당대의 미국 청년층의 상황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일본 사회 내에서의 문화를 둘러 싼 세대 갈등은 서브컬처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라이트 노벨 시장이 축소된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일본식 이세계물이 대세 장르로 떠오른 이래 일본의 라이트 노벨이 대거 중장년층 직장인들을 주요 소비자로 삼는 방향성으로 옮겨가게 되자, 더이상 라이트 노벨에 대해 감정이입을 할 수 없게 된 일본의 젊은 10대~20대 층은 라이트 노벨에 대한 소비를 그만 둬버리고 라이트 노벨에서 파생되어 좀 더 순수문학에 가까운 내용을 추구하는 라이트 문예와 일반인 대상 장르문학 소설, 그리고 전통적인 아동문학 등으로 옮겨서 가버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다만, 이렇게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최신 유행으로 떠오르게 된 문화 요소들을 서브컬처에 노골적으로 반영하게 된다면 일본의 성인 남성 오타쿠들이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기에, 주요 소비층이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남성이고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과대평가된 소수파에 속하는 성인 남성 오타쿠인 서브컬처 시장에서는 아직 일본 사회 내의 세대 갈등 상황이 크게 반영되지는 않고 있다. 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일본의 서브컬쳐 시장이 크면서도 매출도 많이 나오지만 의외로 그들만의 리그 취급을 받고 있어서 대중적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인데, 비덕들도 많아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대중문화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중장년층과 청년층 사이의 세대 갈등 국면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그때까지의 일본 대중문화의 대안으로 선택했던 것이 한국 대중문화였던 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의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른 중장년층과의 세대 갈등 국면 속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OTT 서비스와 인터넷 방송을 대안으로 선택하는 모습으로 비슷하게 나타난 바 있다.
3.4. 서양으로 한류 확대
근본적으로 한국 아이돌과 한국 드라마 등 한류 컨텐츠가 서양에서도 팬을 모으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건 유튜브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발전,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의 발전 덕분이지만, 서양에서 막 한국 문화 콘텐츠가 알려지기 시작한 극초창기인 2000년대 후반, 2010년대 초반에는 일본의 한류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서양에서 한류가 이름을 알리게 된 경우도 있었다.[55]
일본은 G7 국가 중 하나로 서양에서 호감도가 높은 국가이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필두로 하는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서양인들도 많아 이들은 J-POP 등의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와패니즈로 대표되는 서양의 일본 문화 애호가들은 일본의 2차 한류 유행 시기 당시 일본 현지 및 일본 인터넷에 상주하며 일본 관련 정보들을 모으고 공유하던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모인 커뮤니티도 많았다. 그러던 와중 "일본 옆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요즘 일본에서 그 나라에서 온 한류라는게 인기 있다더라."하는 식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 당시 일본에서 유명세가 있던 동방신기[56]와 BIGBANG 등이 와패니즈들에게도 알려져 와패니즈들 일부가 이들의 팬이 되며 서양권에서도 한류 팬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한국 아이돌 음악이 J-POP 아류 정도로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일본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거나 일본 문화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충족시키며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 문화보다 오히려 더 낫다는 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유명한 한류 컨텐츠가 서양에서도 공유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일본 문화 향유층과 겹치던 팬층이[57] 시간이 지날수록 분화되어 독자적인 팬덤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4. 유행 원인
일본에서 부는 한류 열풍의 원인을 명확하게 꼬집어 규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국내외에서 이 주제를 두고 여러 담론이 오가고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일단 가장 먼저 짚어볼 점은, 대중문화로서 다양한 이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한류의 경쟁력과 이에 상반되는 일본 아이돌, 드라마, 영화 업계의 경쟁력 상실이다. 어떤 문화가 유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 문화만의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한류가 근본적인 경쟁력이 없었다면 넷 우익들의 왜곡처럼 아무리 한국 정부에서 밀어줘도 일본에서 한류는 뜨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아예 필요치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문화의 흐름을 바꾸기는 명백히 부족하며, 쿨 재팬의 실패가 이를 잘 알려주고 있다.
두 번째는 일본 및 한국 아이돌 시장의 차이점이다. 일본 아이돌 업계는 내수시장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데, 일본의 거대한 내수시장 덕분에 한국만큼 해외 시장이 절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외의 최신 트렌드를 연구해서 세계 유행을 선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투표권이나 악수권을 넣어서 앨범 판매량에만 열중하는 상술만 발달하고 있다. 게다가 걸 크러시라는 신조어에서 나타나듯 같은 여자들이 봐도 빠져들 만한 콘셉트를 추구하는 한국과 다르게 일본 아이돌들은 음악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방송 활동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여자 아이돌은 '카와이 스타일' 같은, 실력보다 캐릭터 팔이에 치중하는 방향성이 주류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니 팬들도 실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21세기에 들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발달에 따라 일본에서도 한국의 생활 양식 전반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라 문화 전파 속도가 과거보다 훨씬 빨라졌다는 것이다. SNS 시대의 조류에 빠르게 올라탄 한국과 달리 일본은 IT 대중화가 늦어, 정보화 시대로 일컬어지는 오늘날에도 종이 신문, 잡지, 텔레비전 방송과 같은 레거시 미디어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본에서도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각종 온라인 미디어와 SNS가 보편화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과거에는 정치, 외교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한국 연예인들을 방송에 출연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류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유튜브, SNS를 통해 일본 대중이 한류 콘텐츠를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문화 현상에 대한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 점은 한일관계가 외교적으로 매우 좋지 않음에도 한류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편 '성공한 아이돌'이라는 노력 스토리가 일본 대중에게 먹혔다는 평가도 있다. 기존 일본에서는 큰 노력을 하지 않은 아이돌들이 대형 소속사의 보조를 받아 방송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거나, 만화 같은 극적인 캐릭터성을 통해 대중에게 어필하는 식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청춘을 불살라 고된 연습과 훈련을 통해 실력을 완성한 끝에 아이돌로 데뷔하거나 성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성공을 쟁취하는, 고전적인 서사 자체가 일본의 젊은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일본의 K-POP 팬들이 이를 통해 '힘을 얻었다', 혹은 '격려를 받았다' 하고 말하는 걸 이런 맥락에서도 볼 수 있다.
K-POP 그룹의 멤버가 되고 싶다는 포부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품고 있던 것이었지만 일본인 멤버가 없다는 이유로 주저하거나 포기하거나 했던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걸그룹 TWICE의 모모, 사나, 미나의 등장과 이들이 선택되기까지의 과정이 일본의 방송에서 공개되면서 다시 한 번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켰고 이외에도 일본인 멤버들이 있는 여타 K-POP 그룹들의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이 소개되면서 자신들 역시 그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열정에 불을 지폈다.[58]
2000년대 초중반 1차 한류 열풍의 주역이었던 일본 성인 여성층의 자녀 세대들이 이후 그대로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물려받았다는 것도 거론된다. 예를 들면, 부모 세대가 배용준, SUPER JUNIOR나 소녀시대를 좋아했다면 그 영향을 받은 자식 세대는 방탄소년단이나 TWICE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어를 배워 일본 버라이어티에 출연했고, J-POP 음반을 내거나 일본의 과거 인기 곡들을 커버하는 등 친밀감을 쌓는데도 주력한 것도 일본 내에서 한류가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데에 한 몫을 했다. 상대적으로 학습이 쉽다는 언어적 특징과 지역적인 가까움 등으로 전파가 훨씬 용이했던 것. 거기에 당시 일본 아티스트들의 악명 높은 신비주의에 비해 한국 아티스트들은 팬 서비스도 좋고 초상권도 자유롭다는 인식이 강했다. 일본에서도 AKB48이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의 컨셉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을 보면 일본에서 이런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한류에서 특징적인 점은 아이돌 시장이 한국 기획사와 일본 기획사가 서로 손잡고 산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다. 이를 통해 초창기 그룹을 제외하곤 이후 K-POP 아이돌들은 큰 무리없이 현지 기획사를 통해 일본의 주류 방송계로 직행할 수 있었고[59], 이런 공급과 수요의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며 수입이 생기자 현지 기획사나 일본 방송가에서도 한류는 큰 마찰없이 정착될 수 있었다. 대만에서 2000년대 한류가 유행할 당시 반한류를 주도한 층이 수입이 끊길 것을 우려한 연예인 등 방송계 사람들이었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60]
5. 부작용
5.1. 반한류
일본에서 한류가 장기적으로 인기를 끌자, 빠가 까를 만든다고 일본의 혐한 넷 우익들과 일본 극우인사들은 세계적인 한류 열풍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불만을 갖게 된다. 대표적으로 아이돌들이 흔히 쓰는 부자연스러운 컬러렌즈, 진한 메이크업이 인조인간 같다고 하거나, 왕자병/공주병 걸린거 같은 분위기, 무대 복장이나 애교 등이 과하다며 싫어하기도 한다. 이런 부분들이 Cringe하다(오글거리다)거나 심하면 몇몇 사람들은 게이 같다며 질색하는 반응. 특히 K-pop 남자 아이돌의 멸칭 Gay-pop은 완전히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이들은 한류 유행 이전부터 한국 까는데 일가견이 있던 부류다.(...) 그 소스에 반한류를 추가시킨 것일뿐이다.그런데, 웃기는 사실이 있는데 정작 한국의 남자 아이돌은 스스로 게이라고 커밍아웃한 경우가 단 한 명도 없으며 성인이 되고 신체가 건강하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하며 훈련소에서 군복을 입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된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여기서 해외 악성 K-POP 안티들은 남자 아이돌을 멋대로 게이같다면서 깔보고 비하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군 복무 경력은 개뿔도 없고 기초군사훈련이라도 이수한 경우마저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당장에 K-POP 남자 아이돌은 얼굴 화장도 열심히 하고 탄탄한 근육을 키울 정도로 몸매 관리에도 철저한 편이고, 아무리 예쁘고 곱상한 외모로 유명해졌다고 해도 보기에는 여리여리한 성격처럼 보여도 대외적으로는 스스로 카리스마있고 의젓한 남성상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이 쯤 되면, 누가 정말로 남자답지 못한지를 따져볼 일이다.#
그리고 2ch나 블로그 같은 일본 웹을 통해 한류는 한국 국가 예산을 통한 국책 사업이라는 음모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국가브랜드위원회, VANK를 근거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한국 정부 기관,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한류를 유포하고 있으며 일본의 덴츠가 거기에 동조하고 있고, 방송국에 있는 재일 한국인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편성하고 있다는 게 일본 반한류주의자들이 주장한다. 심지어 일본 항공자위대 고위급 인물까지, "한류는 한국의 정보 전략이니 어서 한류 관련 콘텐츠들을 몰아내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는데 (#)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국책으로만 만들어진다는 음모론이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은 이미 한류와 관련된 다른 문서에서도 충분히 서술됐으니 참고하자.
저렇게 혐한들의 논리대로 한류가 유행하는 이유를 분석하자면 "한류가 돈을 쏟아부어서 유행시킨 것이 사실이었다면, 일본은 돈이 없는 가난한 국가라서 쿨 재팬이 실패했고 한국은 돈이 많은 부자 국가라서 한류가 성공한다." 같은 소리처럼 뭔가 어색하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결론이 나와야 된다. 애초부터 문화 현상이라는 것을 돈으로만 부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면, 한류의 부흥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다른 부유한 국가들에게 밀려서 실패했을 확률이 더 높았어야 했다. 당연하지만, 소프트파워의 전파는 문화의 부흥은 그저 국가정책으로 밀어붙이면서 막대하게 돈을 써서 만들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른바 G7을 비롯한 선진국같은 부국들이 돈으로 밀어붙여 전 세계 국가들의 모든 소프트파워를 통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드라마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문화는 무작정 돈만 쏟아붓는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라 제작자들의 뛰어난 역량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음모론들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혼란하던 2010년대 초중반에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고, 그 후 정정이 되지 않은 채 일본 사회의 한 켠에 어느새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K-POP으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은 한국 정부의 국책사업으로 세금을 퍼부은 정보 공작, 국가 이미지 개선 대책이라는 이미지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책 이미지와 정치적인 한일 갈등 때문에 한류에 대한 반감은, 2011년 초반을 기점으로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본 배우 타카오카 소스케가 "8[61]은 지금은 진짜로 보지 않는다. 한국 TV 방송국인가 싶을정도다. 일본인은 일본 전통의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라는 트윗을 통해 한류 방송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었고, 이런 트윗은 일본 내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통쾌하다는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과 함께 저러다가 연예계에서 퇴출당하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을 펼쳤다. 그러다가 정말로 소속사와 계약 해지가 되면서(#) 일본 방송계가 정말로 한국에 점령되었다는 정서가 퍼지게 되었고 시위를 통해 한류를 몰아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기획되기 시작한다.
후지 테레비가 한국 드라마를 많이 틀었다는 이유와 배우 타카오카 소스케의 트위터 영향으로 반한류 시위의 표적이 되었으며 적극적인 시위 홍보 덕에 방송사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 이렇게 이러난 시위는 후지TV 방송국 광고 수입에 타격을 줄만큼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으며, 결국 후지 테레비 아침 방송으로 고정 출연하는 출연자의 출연료를 줄일 만큼 방송국 재정 상황에 악영향을 끼쳤다. # 하지만, 정작 타카오카 소스케는 야쿠자와 연관되어있다는 파문이 일어나면서 불명예스럽게 연예계를 은퇴한다. 진짜 적폐 취급을 받는 나쁜 인간은 본인이었다는 것.
시위가 잘 일어나지 않는 일본 내에서 이런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놀란 일본 방송 업계는 이후 한국 드라마 방영도 주춤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기름을 퍼부은 사태가 바로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과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사건이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일본의 한류가 위기를 겪고 한류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정착하게 된다. 이후 아베 신조 2차 내각이 들어서고, 한류를 문제로 삼던 자유민주당이 선거에서 대승리를 하면서 정권의 눈치를 본 일본 방송국들은 한류 컨텐츠를 편성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민방, 즉 한국으로 치면 지상파 방송에서 한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으며, 한국 가수들도 일본 예능과 음악 프로그램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그 대신 일본 대단해같은 국뽕 위주의 프로그램들이 방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착된 국책 이미지는 현재도 유효하다. 그래서, 일본의 한 프로그램에 나온 전직 일본 넷우익 출신 패널이나[62], 아키모토 야스시나 층쿠같은 일본에서 꽤 큰 영향력이 있는 프로듀서까지 K-POP은 일종의 국책이라고 인터뷰에서 평가할 정도다. 사실, 아키모토 야스시는 혐한이 아니며, 한때는 그의 실제 정치 성향이 좌파라는 근거없는 소문까지 나왔을 만큼, 필요 이상으로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까지 K-POP 산업이 대한민국의 국책 사업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일반적인 일본인들도 역시 K-POP을 국가정책이라고 멋대로 오해하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에서 K-POP만 집중 투자를 하는 것이 한류가 아니었다는 점을 잘 생각해 보면 일본의 미디어에서 원인을 크게 잘못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원인을 제대로 알고 있더라도, 일본의 언론에서 일부러 왜곡하여 프로파간다식으로 발표한다는 것도 문제점이다.
2018년 10월 강제징용 관련한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다시 악화되면서, 2019년 들어 다시 일본 방송에서 가뭄에 콩 나듯 그마저 있던 한국 관련 콘텐츠가 줄어들었다. 물론, 2019년 NHK의 아사이치에서 한류에 관한 특집 방송을 하기는 했지만, 방송이 끝난 이후 우익들이 비난 트윗을 보내는 등 시끄럽기 때문인지(#) 이제는 방송에서는 아예 언급이 없다. 한류가 유행하고 있다는 짧은 발언 하나에도 비난 여론을 받는 형국이여서, 일본 연예인들도 한국을 비난할 때 말고는 한국에 대해 언급하기 꺼리는 분위기이다. # 그리고 제대로 된 내용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이제 한류 연예인들의 주 매개체가 TV 방송보다는 유튜브나 SNS 같은 것 위주로 트렌드가 변했고 일본 방송국들도 시청률을 이유로 더 이상 일본 음악 방송을 많이 편성하지 않다 보니[63] 한국 가수들에게 일본 방송 출연 여부는 이제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2021년, 코로나19로 인해 일본 방송에서 한국 연예인을 보기는 힘들지만 지속적인 한국 문화의 유행과 세계적인 성과로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한국 문화를 언급하거나 매일 아침 뉴스에서도 K-POP 코너가 나올 만큼 다소 험악하던 몇 년 전보다는 어느 정도 누그러진 상황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K-POP을 좋아하는 연령층이 점점 어려지고 있다는 것도 역시 특징인데, 이제는 초등학생들까지도 가세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닛폰 테레비에서는 K-POP 아이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하는 등, 한국이 새로운 콘텐츠의 활로라고 다소 인정하는 분위기로 점점 바뀌고 있다. 이는 예전엔 한국을 욕하는 것으로 호응을 얻었던 마츠코 디럭스같은 일본의 국민 MC들의 태도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방탄소년단과 BLACKPINK 같은 명품 아이돌 그룹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연예 기획사들은 정신차리라고 일갈했을 정도. 다만 여전히 쟈니스처럼 한국을 씹는 것으로 호응을 얻어내는 부류도 있으며, 일본의 미디어가 한국에서 흥행하면 그것 또한 대서특필을 하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귀멸의 칼날이 한국에서도 흥행했다는 사실이 일본 신문에 나기도 했다. 결국, 사실상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현재 일본 미디어는 "반한류를 포기하고 시청률과 대세를 따라 교류하며 실리를 취하자" 라는 노선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아무도 한류랑 관련된 걸 안 사는데 도대체 어디서 흥행하고 있단 거냐?" 같은 멍청한 소리를 하는 패널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소리를 하면 "남들은 다 사는데 너만 안 사는 거다"라며 눈치 없는 새끼 취급하는 반응이 돌아오는 상황이다. 당장에 일본에서 저런 반응이 나오기도 한참 전에(카라가 일본에서 전성기를 유지하던 2010년대에) 일본의 거물급 프로듀서 층쿠도 오래 전부터 K-POP이 부흥하는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은 체내의 리듬감 자체가 다르다." 라고 극찬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64]
결국 과거에 유행했던 혐한이나 한국 때리기에 일본 젊은이들이 점차 호응을 별로 안 해주게 되자, 일본 미디어에서도 그에 맞는 식으로 노선을 바꾸었고 그 덕분에 혐한 방송은 점점 주류 방송에서 퇴출되어 케이블이나 인터넷 방송같은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제는 K-POP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출신 가수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은 싫지만 한국 드라마같은 한류 콘텐츠들은 좋다' 라는 식의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 결국, 싫어하는 나라의 콘텐츠마저 즐기게 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 나라의 문화에 물들게 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자 소프트 파워의 매력이다. 당장에 한국에서도 일본을 싫어한다면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은 좋아하는 이들을 비꼬는 반일씹덕 멸칭과 중국을 혐오한다면서 리그 오브 레전드같은 중국 게임은 좋아하는 이들을 비꼬는 반중롤깨 멸칭이 있고, 이미 중국집도 한국에서 영업 잘만 하고 있고 중국 음식도 잘 먹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이 현상은 마찬가지라서, 반미감정이 있는 중동, 러시아, 중국에서도 헐리우드 영화는 매우 인기가 많다. 게다가, 일본에서 대중문화계의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이 특정 인종, 문화를 향해 공개적으로 혐오 발언을 하고도 지탄을 받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다. 그래서,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일본에서는 인종차별이나 하는 인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을 하냐?" 라고 오해하기 쉽다.
반한과 별개로 한류로 인해 한국의 영향력이 일본에서 강하게 뿌리내리는 것을 두고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한 사례로 대만의 '동학래료'(同學來了)라는 예능 프로에서는 이 사례가 실질적으로 나온 일이 있는데 해당 프로에 출연하는 한 일본인 패널이 현재 일본에서 나타나는 일이라며 소개한 증언에 따르면, 일본 초등학생들 가운데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써 명찰로 만들거나, 한국어의 뜻은 모르더라도 한글은 읽을 줄 아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이 현상은 일본 문부성에도 알려져서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어의 기본이 되는 한자보다 외국 문자인 한글을[65] 먼저 습득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다.[66] 다만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상대 언어 자체는 대도시 교통 시설에서 이미 함께 송출되고 있으므로[67] 일본 미디어에서 너무 과잉반응을 한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5.1.1. 한류 비판에 대한 담론
일각에서는 일본이 굳이 해외 진출에 신경쓰지 않아도 내수시장이 크고 오히려 한국 문화 콘텐츠보다 공급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해외 진출에 신경을 안 쓴다는 의견도 있으나 자세히 따져보면 정신승리에 가까운 주장이다. 일본 현지에서 한류를 폄하하기 위해 제법 많이 사용되는 논리이나 실상을 따져보면 논리가 빈약함을 알 수 있다.먼저 방송콘텐츠 수출액은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이 일본보다 1.5배 더 많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총무성에서 발표했던 자료다.(출처) 단, 방송 콘텐츠가 문화 공급의 전부는 아니므로 일본이 방송 콘텐츠 수출 규모가 한국보다 더 크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한국의 방송 콘텐츠는 위의 자료에서 알 수 있듯 드라마에 심히 편중되어있는 반면, 일본은 아니메와 드라마 등의 비중이 한국보다 나뉘어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이 일본으로 수출한 대중문화 산업은 1조 9천 억 원이고, 그 반대로 일본이 한국으로 수출한 금액은 2천 3백 억 원으로 한국이 일본보다 8배 이상의 이득을 보고 있다.[68]
그럼 왜 일본 대중 문화는 한국에 먹히지 않을까? 간단하다. 그냥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어서다. 과거 1990년대 시절만 해도 몇몇 일본 내 유명 가수들은 한국에서도 마니아층이 제법 존재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을 만큼 경쟁력이 있는 가수들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 콘텐츠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먹혔던 이유는 일본 정부의 홍보나 진출 혹은 한국인들이 친일 성향이 있다거나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아서도 아니고, 그냥 노래가 듣기 좋았거나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느끼는 '신기함'[69]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뿐이다.
일본 영화는 러브레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제외하면 고지라나 가메라 시리즈 같은 특촬물, 링이나 주온 시리즈 등으로 대표되는 공포물이 간혹 인기를 끌었고 일본 드라마 중 여왕의 교실은 한국에서 리메이크판까지 나올 정도였다. 리갈 하이, 노다메 칸타빌레도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떠나서 작품이 좋으면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이외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작품들의 경우는 마니아층들의 호응이 있었지만, 대중적 공감대를 얻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의 드라마나 아이돌이 다른 곳에서 먹히는 것은 정부의 홍보나 정부 차원에서 진출을 독려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팔릴 만하니까 외국의 방송국에서 한국의 콘텐츠를 수입하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출판 만화, 게임이 한국에서 팔리는 건, 한국에 열심히 진출하고 홍보해서 팔리는 게 아니라 한국의 방송사나 출판사, 퍼블리셔가 알아서 수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70]
실제로 아직까지 애니메이션 산업은 일본이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경쟁력이 있다. 만일 일본의 드라마나 음악, 영화가 한국에서 돈이 될 것 같으면 만화나 애니메이션처럼 한국 업체들이 진작에 알아서 수입한다. 수입하지 않는 것은 그냥 한국에서 안 팔리는 이유가 크다. 일본이 진출을 안 해서 안 팔린다고 말하는 것도 억지인 것이, 초난강 등이 한국 연예계에 진출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 반대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일 수출 실적이 없다시피[71]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다.
K-POP 이외에도 한국 영화나 한국 드라마를 비롯해서 예능 콘텐츠에서도 한국산 콘텐츠가 일본산 콘텐츠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였다. 별에서 온 그대뿐만 아니라 영화 써니, 수상한 그녀를 비롯한 몇몇 히트 작품들은 이미 아시아권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리메이크를 비롯한 현지 판권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굿 닥터 역시 미국과 일본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한류 열풍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는 인도에서조차도 아저씨, 세븐 데이즈 같은 작품들이 리메이크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일본은 노다메 칸타빌레 이후로 대중적인 신드롬과 인기를 불러온 작품은 아직 전무하다. 그나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가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된 사례는 있지만, 이것도 역시 오래된 고전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일 뿐으로 최신 일본 문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능 쪽으로도 런닝맨, 프로듀스 101 시리즈를 중국에서 정식으로 판권을 구입했으며[72], 미국까지도 꽃보다 할배,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판권을 정식으로 구매하면서 다방면으로 한국 문화의 질적인 위상이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복면가왕은 미국 특유의 천조국스러운(?) 무대 의상으로 엄청나게 관심을 끌고 있으며 연출력도 뛰어난 편이다.[73] 일본 문화의 최전성기 시절로 평가받는 1990년대 일본의 예능 포맷을 당시 상당수 외국에서 정식으로 구매한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상황은 격세지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SASUKE[74],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의 포맷 중 하나인 '브레인 월'[75] 등을 정식으로 외국에서 구매했었는데 2010년대 들어선 한국의 컨텐츠가 이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은 해외 진출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내수시장만 바라보면 된다!'는 의견도 있으나, 사실 일본도 해외 진출에 신경을 쓰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웹사이트에서는 심심하면 '일본 가수 누구누구가 해외 진출하면 인기가 많을까?'라는 떡밥이 제기되곤 한다. Perfume이나 BABYMETAL 같은 가수들이 해당 장르 팬층 위주로만 어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어디서 공연한다는 이유로 월드스타급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재 일본 음악의 실상이다. 장르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점이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점이겠지만, 엄연히 해외에서의 실적을 '언플'을 통해서 부풀리고 있는 것이 명확한 상황에서 단순히 일본의 자국 내수시장만으로 충분하다고 정신승리하는 변명은 당연히 틀린 것이고 온당치 못하다. 만일 내수만으로 만족한다면 왜 아키모토 야스시는 허구한 날 48사단의 해외 분점을 만들면서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것에 온갖 공을 들이고 있고, 모닝구 무스메를 비롯한 헬로! 프로젝트 계열 아이돌들은 단순히 소규모로 해외 공연을 진행했을 뿐인데도 왜 그렇게 언론을 통해서 전국적인 보도를 했었겠는가? 당연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논리들은 전형적인 일본 언론들의 정신승리로 보는 것이 맞다고 봐야 한다.
일본의 언론들이 한류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자국 아티스트들이 미국을 비롯한 해외진출에 실패했던 탓이 가장 크다.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오래 전부터 '탈아입구'를 주장할 정도로 서구권 국가들의 시선을 엄청 신경써왔던 데다가, 이미 자신들의 문화 양식들이 서구권으로 전파되면서 고급 문화로 널리 퍼진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한류를 의식하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일본의 J-POP은 줄곧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방탄소년단이 성공적으로 해외진출에 성공하게 되자, 일본 넷 우익들은 과거 사카모토 큐의 사례를 들면서 정신승리나 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물론 사카모토 큐도 대단한건 맞지만, 애초에 엔카 쪽이라 장르부터가 다른데다가 빌보드 메인 차트인 빌보드 200과 빌보드 핫 100을 Dynamite, Butter 등으로 모두 석권한 2020년대 시점에서 보면, 원 히트 원더 성격이 강한 사카모토 큐는 BTS보다 대중적 성공 면에서 높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비교하는게 더 맞는데, 사실 이것도 강남스타일이 선정 기준 문제로[76] 1위만 못했을 뿐(7주 연속 2위) 글로벌 파급력은 훨씬 셌다.
게다가 방탄소년단뿐만 아니라 BLACKPINK, TWICE, NewJeans, NCT, 몬스타엑스 등 다른 K-POP 아이돌 그룹들도 빌보드 차트에서 유의미한 순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면서 넷 우익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더더욱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특히나 자신들이 미국 진출에 성공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던 우타다 히카루가 두 차례나 미국 시장을 두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실패해버렸고, 오히려 외국 가수인 '채리스 펨핀코'[77]나 '코코 리' 같은 가수들이 현지에서 나름 중박에 준하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일본 음악은 세계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좌절감에 부딪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78]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맞물려 결과적으로 "일본 음악 시장은 갈라파고스"라는 인식을 일본인들 스스로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다 보니 2000년대 후반부터 서구권 대중음악의 대세는 힙합과 R&B, EDM 등이 주류가 되었고, 이런 세계적인 음악의 트렌드를 빠르게 읽으면서 시대가 흐를 때마다 유행을 바꿔나가는 한국 가요계와 비교해보면[79] 일본 시장이 잠식당하는 사태에까지 온 것이다.
특히나 일본에서는 아무로 나미에를 비롯한 해외에서 주목을 받던 아티스트들조차 하나둘씩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실력파 가수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자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중이다. 결국 일본 언론들의 주된 레퍼토리인 '기계같이 찍어내고 훈련하는 한국 가수 vs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의 일본 가수' 같은 논쟁 좀 그만 하고, 이제는 제발 한국의 실력주의를 배워왔으면 좋겠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는 중이다. 2020년대가 된 지금은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도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의 무대에서 활동하는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의 연예 기획사로 직접 찾아와서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사례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럴만도 한게, 이미 한국의 연예 기획사에서는 연습생들을 강압적인 군대식 훈련처럼 억압하는 것도 아닌데다, 애지중지 공을 들여서 재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내는데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심지어, SIXTEEN처럼 연습생들을 치열하게 선발하여 팀을 만드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애초부터 연습생들 사이에서 경쟁을 하는 부분은 개개인의 능력치를 스스로 상승시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고 연예 기획사에서는 그에 필요한 강사를 비롯한 인력들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다.[80] 굳이 연예 기획사가 돈을 들여서 키우는 연습생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것은 없다. 서로 주고 받는 것이고, 대우가 영 아니다 싶으면 그냥 계약 해지로 내보내거나 다른 연예 기획사로 나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6. 여담
- 한국 오타쿠 입장에서는 일본 문화 중에서도 한류의 영향이 비교적 늦게 미친[81] 서브컬처를 주로 즐기기 때문에 일본 주류 문화에서 퍼지는 한류의 영향을 느끼기 어려웠는데, 일본 서브컬처와 한류의 접점이 성우와 버추얼 유튜버 분야에서 나타나면서 인식 변화의 계기가 되고 있다. 성우계와 버튜버 쪽에 계속 유입되는 젊은 여성들 상당수가 한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 오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지식이나 호감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진 것이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한국에 호의를 드러내는 인플루언서가 한국 오타쿠들의 주목을 받고, 보다 자연스럽게 팬덤으로 유입되는 선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정작 이들이 언급하는 K-POP 노래들을 전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구미권 와패니즈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과거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 제국에서 강압적인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면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강제로 동화시키려고 하였고 한국 문화를 멋대로 없애려고 시도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 위안부, 강제징용, 생체실험, 독립운동 탄압 등 잔인한 전쟁범죄들을 자행하여 수 많은 한국인들을 죽였던 과거사와 대조해보면 현재 일본의 한류 열풍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정반대로 일본 제국처럼 강압적이지 않은 방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 게다가 이게 일본인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찾아나서서 생겨난 결과란 점도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류의 시발점이었던 겨울연가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접한 일본인들이 또다른 한국 드라마를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신오쿠보의 한국 비디오 대여점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과 동방신기, 카라, 소녀시대로 시작된 K-POP 붐은 또다른 K-POP 그룹을 향한 관심과 수요로 이어졌으며 이는 마침내 TWICE를 통해 일본인 자신들 역시도 K-POP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국의 연예 기획사나 이들이 주최하는 오디션에 참가하는 동기를 만든 것과 같은 현상을 이뤄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가 답보 상태에 빠졌거나 새로운 전환기가 필요하다고 여긴 일본 연기자들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을때 적극적으로 수락하여 그들의 연기력을 통해 작품성에 힘을 보탰고 일본 아이돌 출신들 역시 졸업을 통해 자신의 연예 경력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란 새로운 무대를 통해 제2의 연예 커리어를 이어가는 등 선택지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아이돌 그룹의 외국인 멤버 중에도 일본인이 제일 많고, 현지화 아이돌 그룹이 일본에 제일 많은 것 또한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다.
7. 관련 문서
[1] 한국 드라마도 일본에서 시장 점유율 1위 OTT 넷플릭스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갖고 있고, 다른 해외 드라마는 전혀 존재감이 없다. 일본 여러 매체에서도 일본 여성들이 한국 드라마만 보는 현상을 분석할 정도.[2] 언급된 인물 가운데 이박사를 제외하면 모두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3] 조용필도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인기를 끌어 엔카 가수 이미지가 강했다.[4] 그래서 일본 연예계 내에서도 동방신기, 보아는 대선배 대접을 받는다. 실제로 이 둘을 보고 가수의 길을 꿈꾸고,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일본인들도 많을 정도이고, 이들이 앞장서서 길을 개척해준 덕에 빅뱅, 소녀시대를 필두로 한 한국 가수들이 일본에서 수월하게 활동하고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5] 정확하겐 2002년 겨울연가가 한국에서 방영된 이후, 2003년 NHK 위성채널을 통해 방영하다 매니아층 사이로 인기를 끌자 2004년 NHK 종합채널에서 재방영한 것.[6] 실제 겨울연가 흥행 이후 2010년대 초반까지 일본 TV에선 과장 좀 보태 한류 드라마가 거의 매일 방영되었다. 시간대 자체는 골든 시간대 외 주부들을 노린 낮 시간대 등도 많았지만, 그만큼 방송국 입장에서도 일드 제작하면 드는 비용보다 싼 가격에 한류 드라마 수입해서 적당히 중년 세대 팬덤층까지 확보하면 이윤이 남으니 열심히 수입해 방영했다.[7] 현지 인기의 척도인 콘서트에서도 도쿄 돔 매진을 이루는 등 나름의 성과를 보였으나, 사실 팬덤력에서는 동방신기나 빅뱅같은 보이그룹의 그것에 따라가진 못했다.[8] 때문에 당시 일본 방송 스케줄까지 잡아놓고 진출을 본격화하려던 2NE1은 대지진 여파로 방송 취소가 겹치며 사실상 일본 진출을 포기한다.[9] 물론 일본 내부적으로는, 2012년 아베 정권 집권 이후 재특회 등 혐한 단체의 헤이트 스피치 현상이 몇 년간 두드러지며 안티파들의 성장에서 보이듯 혐한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긴 했다. 즉, 일종의 까가 빠를 만든 측면도 있는 것.[10] 물론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넷플릭스 외에도 여러 OTT 사이트들이 있긴 하다. 2022년 기준 일본 OTT 시장 순위는 1위 넷플릭스(22.3%), 2위 U-NEXT(12.6%), 3위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11.8%), 4위 DAZN(11.4%), 5위 디즈니+(9.4%), 6위 Hulu(6.8%)였다.[11] 실제 황동혁 감독은 카이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다만 장르적 클리셰를 따온 것일뿐 세부적인 내용은 보면 알듯 차별성이 확실하다고 선을 그었다. 참고로 오징어게임은 구상 자체는 2008년, 시나리오 집필도 2009년부터 시작한 작품으로, 신이 말하는 대로는 애초에 발매되기도 전이었다.[12] 심지어 일본의 지방 방송사에서도 다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13] 1. 소년심판 2. 서른, 아홉 4. 사랑의 불시착 5.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 6. 지금 우리 학교는 7. 사내맞선 8. 이태원 클라쓰 9. 스물다섯 스물하나.[14] 참고로 2021년 일본 유튜브 재생 순위는 1위 방탄소년단(20억 5000만), 2위 요아소비(9억 1400만), 3위 트와이스(7억 9900만), 5위 니쥬(5억 7200만)였다.[15] 단적인 예로 2022년도 NHK 홍백가합전은 전년도의 최저시청률에 충격을 받고 출연진 개편을 단행했는데, 해당 회차에 한국 걸그룹 3팀 (IVE, LE SSERAFIM, TWICE), 일본 현지화 그룹 2팀 (NiziU, JO1)이 출전했다. K-POP과 직간접적으로 관계있는 팀이 5팀이나 되었고, 당시 IVE는 일본 데뷔 2개월차에 LE SSERAFIM은 일본 데뷔 전이라 현지에서 형평성 논란이 일었지만, 그만큼 1020 세대의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결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인 2023년도 방송은 일본어곡조차 낸 적이 없는 NewJeans를 포함해 총 7팀이 출연하여 오히려 더 늘어났다.[16] 한국 아이돌중 유일한 오리콘 더블 프래티넘인증을 받았다.[17]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커지다 못해 이제 일본 영화 시장에서 일본의 실사 영화 시장보다도 규모가 커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웹툰은 과거 잡지 만화 시장보다 커졌다곤 해도 아직 한국 영화에 비견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물론 웹툰 원작을 소재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경우는 꽤 많긴 하다.[18] 그런데 요즘은 한국 음악 시장이 일본보다 아주 작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한국 음악 시장은 IFPI 발표 2020년 기준 전세계 6위로 절대 작은 규모가 아니다(1위 미국, 2위 일본, 3위 영국, 4위 독일, 5위 프랑스, 7위 중국, 8위 캐나다, 9위 오스트레일리아, 10위 네덜란드). K-POP의 경우 해외 진출이 활발하다 보니, 한국+일본+북미권 등 기타 나라들의 해외 음반 시장까지 노려볼 가능성은 일본 시장보다 크다. 또 일부 일본인 연습생들은(물론 성공했을 경우) 자국의 팬들만이 아닌 전 세계의 팬들과 소통하고 싶어 한국으로 넘어왔다는 인터뷰도 하는데, 여기에 답이 있을 것이다.[19] 일본 트위터에서 일본 아이돌 업계에서 데뷔하는 것은 NPB, 한국 대형 기획사 소속으로 데뷔하는 것은 메이저리그라는 말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정도로 한국 엔터 업계는 현재 아이돌 지망 일본 10대 청소년들에게 꿈의 무대가 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가장 먼저 한국 기획사 오디션을 준비하고, 한계가 보이면 일본 기획사 오디션을 준비하는 사례가 매우 증가한 것이다. 자국에서 먼저 데뷔하는 것이 정석이 아닌 2~3옵션으로 전락했을 정도로 아이돌을 꿈꾸는 인재들이 한국행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거의 없는 K-POP 아이돌 데뷔 전문 컨설팅 업체가 많이 생긴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20] 그리고 쟈니스는 2023년에 발생한 초유의 사태로 인해 소속사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위상이 급락했으며, 결국 쟈니스라는 간판을 완전히 내리고 후신인 스타토 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함으로써 대격변이 진행 중이다.[21] 이게 크게 다가왔던 건 당시 한일관계가 냉각기였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여전히 서먹하던 시절에 TWICE의 TT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관심을 얻었고, 일본인 입장에서 봐도 한국에서 인기있는 그룹이 더욱이 멤버로서 자국인 출신이 한 명도 아닌 세 명씩이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22] 이 세 멤버들은 순전히 자신들의 실력과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라 일본인들도 K-POP 멤버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선례를 남겼다. 따지고 보면 현재 K-POP 걸그룹 및 심지어 보이그룹도 이들이 아니었다면 현재와 같은 일본인 멤버들의 증가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 현지 K-POP 댄스 학원을 통해 다수의 지망생을 이끌어 들이는 촉매제 역할까지 했다.[23] 이는 태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블랙핑크의 리사가 태국인으로 걸그룹 아이돌 스타덤에 오른 이후, K-POP 걸그룹에 도전하는 태국 소녀들이 증가했다. 남자의 경우 닉쿤으로 인해 남자 아이돌을 노리는 태국 남성들은 있었지만 여성의 경우는 많지 않았다.[24] 이들 중 타카하시 쥬리와 미야와키 사쿠라의 경우,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진취적인 성격이 강한 이유도 있었으며, 혼다 히토미의 경우, 존재감이 별로 없었던데다 좀처럼 중앙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잡기 힘들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주어진 기회를 잡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업그레이드 할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25] 모모나와 란은 데뷔조 ME:I, 리노는 파생 그룹 IS:SUE의 멤버가 되어 한일 양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26] 한국인이 처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게, 일본인들 역시 박진영의 댄스, 노래, 작사, 작곡, 외국어 능력 다 되는 화려한 개인적 능력은 놀라며 인정할 정도였다. 니쥬의 오디션 곡으로 나온 박진영의 '스윙 베이비'가 뜨면서, 원곡을 들으러 찾아온 일본인 댓글이 풍성했을 정도.[27] 일본의 혼성 아이돌 그룹 AAA의 멤버이자 메인래퍼이며, 연예 기획사 BMSG의 대표이사이기도 하다.[28] 오디션 방송 시점인 2021년 5월 시점 엔화로 환산하면 약 10억원 상당.[29] 한국 J팝 팬들도 의식했는지 유튜브에서 한국어 자막도 지원 중이다.[30] 전자는 칸슈지 타모츠라는 참가자로 모닝구 무스메로 활동했던 고토 마키의 조카이며, YG엔터테인먼트의 일본 지사인 YG 재팬에서 5년간 연습생으로 있었다고 한다. 후자는 PRODUCE 101 JAPAN 출신인 토코나미 시온이라는 참가자로 당시 최종회까지 진출했으나 데뷔조 JO1에는 포함되지 못하면서 최종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31] 한국어 '분하다(忿하다)와 같은 말이지만, 일본어의 悔しい와 뉘앙스가 좀 다르다. 한국에서는 주로 "화난다, 억울, 원통하다"는 의미지만 일본에서는 통상 "아쉽다, 속상하다"는 의미로 쓴다. 사실 한국에서도 사전상 정의는 1.노엽다 2.서운하다 라고 기재하고 있다.[32] 다만, 니지 프로젝트는 보이그룹 오디션이었던 시즌 2도 성황리에 마쳤고, &AUDITION-The Howling, NCT Universe : LASTART 등 한국 기획사에서 진행한 다른 일본 현지화 보이그룹 오디션도 다수 있는지라 결과적으로는 경쟁자가 더 늘어난 셈이 되었다.[33] 소건은 유일한 한국인 멤버이며, 한국 국적의 재일 한국-조선인이다.[34] 멤버 중 니나는 일본과 미국의 혼혈이다.[35] 멤버 중 카토 코코로는 한국에서 체리블렛으로 활동하다가 탈퇴 후 재데뷔했으며, 시미즈 케이코는 일본과 한국의 혼혈인 한국계 일본인이다.[36] 쉬펑판은 유일한 중국인 멤버이다.[37] 의주는 한국인, 니콜라스는 대만인이다. 또 일본인 멤버들 중 마키는 일본과 독일의 혼혈이다.[한] 일본과 한국의 혼혈인 한국계 일본인이다.[39] 태어난 곳은 한국이지만 아주 어린 시절에 일본으로 이민을 갔다.[한] [41] 2024년 7월 15일 활동 종료.[42]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이다.[43] 2022년 11월 8일 탈퇴.[44] 멤버 중 안토니는 일본과 필리핀의 혼혈이다.[한] [46] 미국에서 태어나 일본계 미국인이기도 하다.[한] [48] 대부분의 혼혈들이 하프인 것과 달리 세리나는 한국계 쿼터로, 조모가 한국인이다.[49] 기사에서 소개된 Orchan이란 카메라 앱은 한국의 신조어 얼짱에서 이름을 따온 앱으로, 얼짱은 201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사실상 사어이지만 일본에서는 한국 스타일 메이크업을 일컫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50] 실제로 한국에서는 이사를 갈 때, 이삿짐을 모두 정리하고 난 뒤에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비롯한 중국 요리를 시켜먹는 문화도 있다.[51] 후술할 일본 주간지 '겐다이 비지니스' 기사에 따르면 2019년 한해 외국어 학습지 매출에서 영어를 제외한 매출액 1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어의 2배 정도였다고 한다.[52] 다만 아직 한국은 일본 문화에 대한 반감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츤데레, 짱 같이 일본어 색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공공 방송에서 피하는 면이 있다. 그나마 츤데레는 대체 단어의 부재로 종종 쓰이긴 하는 편.[53] '갑자기 통장 보니 알바해야 될 것 같다'의 준말. 사실 이 단어는 대박, 멘붕과 달리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신조어다.[54] 2위는 동물의 숲, 4위는 귀멸의 칼날.[55] 물론 일본과 상관없이 재한 외국인이 한류 컨텐츠에 매료된 후 그런 재한 외국인 지인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를 접하거나, 혹은 정말 우연하게 한류를 발견해 팬이 되는(다만 이런 케이스는 이 당시보단 유튜브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발전 이후 늘어난 경우가 많다) 서양인도 있었다. 또 일본 이전 중화권이나 동남아에 먼저 퍼진 한류였던만큼 전세계에 있는 화교 사회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있었다.[56] 때문에 이런 서양인들 중에서는 동방신기를 동방신기의 일본어 명칭대로 'TOHOSHINKI'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57] 지금도 겹쳐있는 팬들이 일부 있긴 한데, 이런 팬들의 리액션 영상을 보면 방에 한국 아이돌이나 배우 사진과 일본 애니 캐릭터 사진들이 함께 도배되어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58] 일본에서는 꿈만 가지고 성공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 해도 프로듀서의 취향, 또는 매니지멘트 회사의 영향력과 같은 외부적인 요소 없이는 불가능하고, 특히 총선거란 투표를 통한 인기력 측정도가 약하다면 메인 무대에 서는 것도 언감생심이다. 괜히 지하 아이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의 걸그룹 아이돌 멤버들이 총선거 결과를 받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다. 혼다 히토미의 경우를 봐도 듣보잡 지방 아이돌이라는 신분으로 중앙무대와 거리가 있었고 결국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프로듀스 48에서 뽑힌 후, 대성공으로 금의환향해 메인 멤버는 물론, 중심 축으로서 부상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았고 이를 통해 더욱 연마하여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은 순전하게 자신의 노력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 한국이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59] 어떤 측면에선 일본 신인 그룹보다 더 나은 기회로 출발하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일본 방송가에서 쟈니스 사무소의 보이그룹 견제는 유명했다.[60] 사실 배우에게는 지금도 중화권 시장이 일본보다 더 매력적인 편이다. 언어 문제에서 메리트가 크기 때문이다. 중화권은 지역간 사투리의 차이가 극심해서 거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외국어 수준이라, 덕분에 더빙이 일상화되어있다. 때문에 중화권에서 뜬 한류 연예인들을 보면 가수도 안재욱, 장나라, 강타, 이정현 등처럼 배우를 겸비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다만, 이것도 THAAD 논란 이후 퍼진 한한령 이후로는 지장이 생긴 측면이 있다.[61] 아침 TV 프로그램.[62] 후루야 쓰네히라(古谷経衡). 다만 이 사람은 지금 넷 우익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등, 사실상 전향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상에서도 보이지만 쿨 재팬은 실패했다고 까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63] 한국 방송사들마다 음악 방송이 있고, 매주 음악방송이 꾸준하게 편성하는 것과 달리 일본 방송국들은 정규 방송이 아니다. 어쩌다 한 번, 한국으로 치면 MAMA AWARDS같은 특집 방송만 1년에 한두 번 편성하고 있다. 유일하게 유지되고 있는 게 뮤직 스테이션이나 최근 들어와서는 시청률 때문인지 결방 횟수가 매우 잦다. 다만 이런 추세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점점 음악 방송이 방송사들의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음악방송은 애국가 시청률을 찍는 프로들일 뿐이다.# 음악 방송을 비롯한 가요 순위 프로그램이 줄어든 원인은 다매체 시대의 도래로 과거에 지상파의 독점적인 지위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절대적이던 과거 음악프로의 연예계 권력도 점점 사라져가는 추세이다. 다만 한국은 한류 때문에 유튜브 / 네이버에 클립 영상을 올리면 해외의 한류 팬들까지 시청을 하고 광고 수입이 수지타산이 맞다보니까 어쩌다보니 음악 방송이 계속 남아있게 된 것이다.[64] 물론 층쿠가 호평한 것과 별개로 개개인의 능력 차이가 날 뿐이지, 딱히 무슨 민족마다 체내 리듬감이 다른 것이 아니고, 연습생에 이르기까지 노력한데 따른 산물이자 스스로 재능을 키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 것 뿐이다. 그래도 한국 특유의 열정적인 떼창이라거나 하는 부분을 언급한 것이라면 완전히 틀린 소리도 아니긴 하지만, 애당초 떼창 또한 한국인들의 전유물도 아니므로 한국인들이 어떤 리듬감이 특별하다기 보다는, 그냥 열정적으로 대중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 필연적으로 시장이 확대된 것뿐이다.[65] 여담으로, 한글은 일본에서 로마자 다음으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외국 문자 중 하나이긴 하다. 한국 지하철 일부 역에서 가나가 병기되어있듯 일본에서도 한국인이 많이 찾는 대도시에서는 제법 한글 병기가 많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관광객 대상 표기와 별개로 일본에는 재일 한국-조선인이라는 2~3대에 걸친 한국인 집단이 상당수 거주해 왔기에 애초 와닿는 정도가 다르다. 오사카부 출신이면 중년의 순수 일본인이라도 단순한 한국어 어휘 일부는 알음알음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66] 당연한 것이, 어느 나라건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과 별개로 자국의 아동들에게 자국의 공용어를 우선적으로 습득시키는 것이 필수이다. 비슷하게 2000년대 초중반에 상류층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영어 조기교육 및 영미권 국가로의 조기유학 붐이 일어났을 때, 한국 내 교육전문가들이 이런 경우에는 아이들의 한국어 습득 능력이 크게 떨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른 걸 떠나서 이 문제는 일본 정부가 절대 과민반응을 하는 게 아니다.[67] 지하철, 공항 등에서는 병기와 함께 음성도 함께 나온다. 병기 분포를 보면 일본에서 한국어를 병기하는 곳이 좀 더 많은 편이다. 일례로 벳푸 같은 곳은 인구 10만 명의 소도시인데도 버스에서 한국어 음성 안내가 나오지만 한국의 소도시에서 일본어 안내 방송이 나오는 곳은 거의 없다. 이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상대적으로 일본의 다양한 곳을 여행하는 반면 아직 일본인 관광객은 서울, 부산 등 한국의 대도시를 주로 관광하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 정도 되는 대도시도 일본인 유튜브 채널에 "일본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광주" 식으로 언급될 정도이다.#[68] 출처. 2017년 통계인 만큼 지금은 차이가 더 벌어졌을 것이다.[69] 2020년대에 대만이나 동남아시아, 기타 제3세계 문물에 호기심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70] 당장 스즈메의 문단속이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현재 대한민국 극장가에서 흥행 성공을 달리고 있다. 여기에 일본에서도 인기를 끈 우마무스메같은 게임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71] 물론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기파이터 태랑, 반지의 비밀일기, 신비아파트 시리즈 등 일부 작품이 수출되기도 했다. 이는 마치 일본에서 현대차가 잘 팔리지 않은 이유와 비슷한데, 일본 소비자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 현대차 브랜드는 일본에서 팔리는 수입차 브랜드 중 가장 인지도가 낮은 수입차 브랜드의 하나였던 점(대략 한국에서 보는 중국차 정도였다 보면 된다)이 크다. 즉 일본 소비자 입장에서는 한국 애니메이션 역시 'one of them', 즉 여럿 수입 애니메이션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72] 다만 프로듀스 시리즈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문제를 지적받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73] 복면가왕의 인기에 고무된 일부 미국 언론에서는 혹시 미국에서 판권을 사오면 대박이 터질 한국산 예능 프로가 더 없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너의 목소리가 보여가 미국에서 판권을 사들였다.[74] 일반인들이 도전하는 '출발! 드림팀'으로 생각하면 된다. 미국에서는 Ninja Warrior라 부른다. 물론 장애물의 난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이다.[75] 벽에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맞춰서 벽을 통과하는 그 게임이다. 미국에서는 Hole in the Wall이라고 부른다.[76] 이런 문제 제기 때문에 이후 빌보드 선정 기준이 바뀌어 유튜브 영상 조회수도 이전보다 많이 반영되게 되었다.[77] 필리핀 솔로 여가수. 한국 예능인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나온 적도 있다.[78] 실제로 우타다 히카루는 일본인들이 해외진출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장 많았던 아티스트였다. 영어 실력도 완벽한 데다가 음악 스타일이나 창법 역시 미국 현지에서 어필할 수 있는 스타일이었기에 무조건 뜰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허구한 날 올라오는 '해외에서 먹힐 만한 아티스트?' 같은 주제에서 항상 거론되어 왔었기 때문에 더더욱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79] 그래서인지 K-POP에서 유행한 스타일의 계보를 살펴보면, 시대가 원하는 음악의 장르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 모습들을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80]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가짜 기획사다.[81] 일본 인터넷 오타쿠 분야에는 혐한이 일본 주류 문화보다도 더 비율이 높았다. 한때는 만화 좀 보다 보면 작가가 혐한인 경우가 적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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