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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패션의 역사와 변천
2.1. 고대, 중세의 패션
제작시 고려할 점이 많은 바지보다 허리에 두르기만 하면 되는 치마의 등장이 인류사에서 먼저였다.
바지의 형태는 주로 승마를 많이 하는 유목민에게서 정주민으로 전파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중국에는 바지가 도입된 계기가 조무령왕의 이른바 "호복기사(胡服騎射)" 즉 "북방 이민족처럼 바지를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쏜다."라는 사자성어의 사례를 통해 전해내려오며, 인도의 경우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쿠샨 왕조에 의해 승마에 적합한 바지 및 단추 달린 외투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유럽에서도 다르지 않아서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입던 바지가 켈트족에게로 전파된 것을 계기로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공화정 시기까지는 켈트인들이 바지를 입는다고 상당히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이후 원로원에서 "이제 바지를 입은 원로원 의원이 나오는 거 아닌가?"하는 농담이 나온다던지 등등. 그러나 고대 말 전쟁수행능력의 중심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이동한 것은 물론 바지를 입는 풍습이 있던 게르만족들이 서로마 제국 쇠퇴와 멸망을 계기로 유럽 각지에 정착하면서, 오늘날 유럽의 일상적인 복장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토가를 입는 로마 원로원의 권위는 어느정도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중세 초 완전 몰락하고 대신 유럽에서 봉건 기사들이 소영주로 장원을 다스리는 봉건제가 자리잡으면서 바지가 더 빠른 속도로 보편화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는데, 고대 유럽이 기독교화하기 이전에는 남성의 나체 노출에 대해서 금기가 적었기 때문에 바지 대신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말을 타거나 의자에 앉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지만, 신체 노출의 보다 엄격한 기독교가 보급되면서 게르만족의 대량 이주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동로마 제국 등에서도 아래에 바지를 먼저 입고 위에 전통적인 로마식 튜닉을 입는 식으로 복장이 변화하게 된다. 다만 바지의 기원 때문에 바지가 용감한 남성이 입는다는 고정관념은 바지가 본래 기마민족의 복장이었다는 사실이 일반에 잊혀진 오늘날에도 어느정도 남아있다.
- 추수하는 농민들을 묘사한 11세기 동로마 제국의 성경필사본 삽화[1] 중세가 되면서 바지가 일반인들에게도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지와 치마의 차이 외에도 남성은 단발 여성은 장발을 기르는 문화가 보편화된 것 역시 전쟁 때문이었다. 시민군이 중심이 되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른 상태에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면 전투 중 땀이 눈 속으로 들어가는데, 창과 방패를 든 상태에서 땀을 훔치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고 이를 계기로 서구 남성의 보편적인 헤어스타일은 단발로 굳어진다.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튀르크인 등등의 변발 역시 전투 과정에서 편의를 위해 고안된 헤어스타일이다. 다만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완전히 머리를 변발처럼 빡빡 밀지 않은 이유는 햇빛이 강한 지중해 기후상 머리를 밀고 투구를 쓰면 두피에 자연스럽게 화상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고대 그리스-로마의 헤어스타일은 당시 투구 디자인에 맞추어 이마부터 목 윗부분까지 덮고 그 아래까지는 깎는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고대 로마 남성들이 입던 튜닉은 오늘날 중동의 전통 의상 카미수랑 상당히 흡사한 편으로 긴 티셔츠에 허리띠를 조르는 형태에 가까웠다. 과장이 아니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XXL 사이즈의 티셔츠를 입고 거기에 허리띠를 조이면 고대 로마인들이 입던 튜닉이 된다. 고대 로마인들은 집 안에서나 잠잘 때나 똑같은 튜닉을 입되 부유층들의 경우 외출할 때는 튜닉 위에 토가를 걸쳤다. 토가는 오늘날의 재킷이나 넥타이에 상응하는 옷이었다. 튜닉의 소재는 모직물이었는데, 염색하지 않은 모직물은 짙은 베이지색으로 얼룩이나 먼지를 가리기 적당한 색상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에는 이집트에서 생산된 아마천이 보급되었다. 아마천으로 만든 튜닉은 여름 의상으로 애용되었다.
고대 로마 여성들은 스톨라(Stola)라고 부르는 튜닉과 유사하되 발 바로 위까지 덮을 정도로 더 긴 옷을 입었다. 이 옷은 고대 그리스 여성들이 입던 옷인 키톤 및 중동 지역 여성들이 입던 옷과도 유사한 형태였다. 스톨라가 중동의 여성 옷과 다른 점이 있다면, 허리띠를 두 개를 사용하여 허리 이외에 가슴 바로 아래의 흉부도 감싸면서 몸매를 강조하는데 있었다. 로마의 부유층 남성들이 토가를 입은 것과 같은 맥락에서 부유층 여성들은 외출할 때 따로 팔라(Pala)라는 숄을 우아하게 주름이 지도록 해서 둘러 입었다.[2] 로마시대에도 역시 여성용 희복은 훨씬 더 색상이 다양하고 대개는 그 위에 수를 놓았다.
로마 제국 초창기에는 귀부인들이 대개 조각상이나 동전에 나온 황후들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하는 문화가 있었다. 특히 트라야누스 제위 시절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의 헤어스타일은 제국 전역에서 머리를 다듬을 시간이 있는 부유층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고 한다. 다른 나라같으면 일개 시민이 함부로 황후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하면 큰일날 일이었겠지만 서기 3세기 이전까지는 권위주의가 비교적 약한 편이었기[3] 때문에 가능했다. 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일반 신민들이 황실의 의복을 모방하는 것이 극형으로 다스려지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콘스탄티우스 2세 제위 시절부터이다.
이렇듯 고대에는 각기 지역의 생활습관과 환경을 반영한 패션이 대부분이었으나, 권력층들 사이에서는 부와 권위를 시도할 목적으로 다양한 의복들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대부터 중세까지 일반인 기준으로는 기초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일례로 우리나라만 해도 화폐가 민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에는 삼베나 무명 옷감을 화폐 대용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는 옷감으로 활용할 목화나 삼베를 재배하는 것도 일이지만 목화나 삼베를 손으로 가공해서 옷감으로 만드는 일에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관료제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관등을 중심으로 복식에 대한 규칙이나 제한사항이 까다롭게 규정되었다. 고대에도 패션 산업이 돈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소재 면에서는 고대뿐 아니라 중세까지 천연직물이나 가죽만을 이용했기에 특히 비단과 모피는 동서를 막론하고 귀한 취급을 받았다. 견직물은 나일론이 보급되기 이전까지 동서고금 고급 의류의 대명사로 통했다.
색깔에 있어서 특기할 사항은 금색과 보라색이 고귀함을 나타내게 된게 이때부터다. 금색은 당연히 황금때문이었고 보라색 천은 보라색의 염료가 매우 귀했기에 그랬다.
2.2. 서양 패션의 역사와 변천
서양 패션은 20세기 이전까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여성은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에 풍성한 치마가 일관된 옷의 형태였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등장한 게 바로 파팅게일과 코르셋. 허나 이 코르셋이 귀족 여성들의 허리를 인정사정없이 조여댔기 때문에 당시 귀족 여성들의 허리는 죽어 나갔다고 한다.(...) 실제로 이 코르셋 때문에 갈비뼈가 부러지는데 그 갈비뼈가 폐에 박혀서 그대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리고 이 풍성한 치마 때문에 사소한 불씨에도 옷이 불타 결국 화상으로 죽는다든지, 혹은 치맛자락이 마차 바퀴에 끼게 되어 마차에 치여 죽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남성의 패션도 한때 여성 패션처럼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근현대 전쟁에서 전열보병의 시대가 지나고 은엄폐가 중요해지면서 군복이 간소화된 것을 계기로 전반적인 간소화가 이루어졌다.
허리는 잘록, 치마는 풍성이었던 서양 여성 의복이 변화하게 된 전환점은 제1차 세계 대전이다. 긴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전장에 끌려나가 남성 노동인구가 부족하게 되자 그 자리를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메웠고, 기존의 여성복은 일하기 불편했기 때문에 의복이 변화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전시경제 과정에서 고급 옷감에 대한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비교적 저렴한 옷감으로 이를 대체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나일론 등 인조 섬유가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면서 이후 여성 패션은 심미성과 활동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의 오트쿠튀르를 중심으로 발전하던 하이패션 필드는 2차대전 종료 이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전후 이탈리아 경제와 산업이 급속이 성장하던 과정에서 밀라노의 패션 산업이 비교적 저렴한 노동비와 칼 라거펠트 같은 유능한 디자이너들을 영입한 것을 바탕으로 파리를 치고 올라가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세계 패션업계의 중심이 바르셀로나, 베를린, 런던 등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미국 같이 거대한 내수규모를 지닌 나라에서도 의복문화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캐주얼 의상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면서 과거 저급하게 여겨졌던 프레타포르테를 하이패션 업계에서도 다루기 시작했다. 또한 60년대의 히피 운동이나 록큰롤 팬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거나 유행한 미니스커트나 톱리스 모노키니, 유럽에서의 68운동 당시 등장한 노브라는 오늘날의 의복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브 생로랑이나 가브리엘 샤넬, 장 폴 고티에 같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 60년대 이후로는 유니섹스 패션도 대중화되어, 남성과 여성의 복장 구분이 전보다 모호하게 되었다.
사실 유니섹스 패션은 서유럽과 미국의 영향보다는 소련이 2차대전 이후 동구권 등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이후 전세계적으로 더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이런 사회주의 국가들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많은 여성 당원과 여군을 운용한 것은 물론, 당원이나 군인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충분히 해줄 만한 상황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군인이나 당원들의 제복 디자인에 상당히 공을 들였었다. 서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남녀 복식의 구분이 어느정도 허물어진 대에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하겠다.
2.3. 한국 패션의 역사와 변천
2.3.1. 개화기 이전
개화기 이전의 패션은 한복/역사 참고.고대부터 근세 조선시대까지 한국사는 서양사와 비슷하게 왕조 체제였기에 의복도 눈에 띄는 파격적인 변화는 잘 나타나지 않는 편이었다. 신분제 계급 사회에서 패션의 멋을 추구한다는 것은 주로 귀족과 왕, 내려가도 부유한 서민까지의 일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분제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고위층의 반발로 다양한 패션을 추구하는 일이 억압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소한 패션 유행은 있어서, 여성 한복 저고리의 길이 변화라던지 하는 변화는 있었다. 그리고 백의민족이란 말마따나 흰색 의류를 꽤나 좋아했는데, 오죽하면 흰색 옷 좀 입지 말라는 임금의 금지령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을 정도였다. 또 한국의 전통의복은 북방 의복인 호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2.3.2. 개화기 ~ 일제강점기
강화도 조약 체결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갑오개혁으로 신분에 따른 복식 제한이 철폐되면서, 조선의 패션에도 일대 변화가 불었다. 1881년 개화파 서광범은 외국에서 양복을 구매한 후 최초로 입은 조선인이 되었고, 다른 개화파 관료들에게도 양복 착용을 권하면서 유행을 일으켜 1900년에는 관리들의 관복도 양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반인에게도 양복 착용을 인정하면서 양복 보급이 확산되었다.그러던 중 1910년 한일합병에 대한 반발감으로 다시 한복으로 돌아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근대적 경찰복, 교복, 간호사복은 오히려 이때 많이 보급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학생들의 교복이 한복차림에서 양복차림으로 변경되기 시작했고 양복 보급이 더욱 확산하면서 한국 내에서 양복 기술사 양성 조직, 실습소, 연구회, 조합이 등장하였다. 1930년대는 유행하는 양복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수선실이 많이 개업하였다. 1940년대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총동원 정책으로 인해 남성은 국민복, 여성은 몸뻬라는 복장을 입을 것을 강요당하였다.
2.3.3. 광복 이후 현재
1945년 이후 미 군정기를 거치며 서양 문물이 대거 유입되었고, 일제가 남긴 군복 물자와 6.25 전쟁을 치르면서 군복을 변형하거나 비슷하게 차려입는 이른바 밀리터리룩이 유행하기도 했다. 1960년대는 정권 차원에서 옷차림을 간소화하자는 운동을 벌여 작업복 차림의 복식이 등장했고 남녀 모두 몸에 붙은 복장을 선호하였다. 특히 60년대 후반에는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등장하여 한국 패션계에 충격을 일으킨 이후 윤여정 등 다른 연예인들도 착용하면서 젊은 여성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1970년대는 청바지의 보급으로 청바지와 티셔츠가 젊은이들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유신 독재의 영향으로 장발 단속과 더불어, 지금같으면 성추행으로 구속당했겠지만 경찰들이 자까지 들고 다니며 미니스커트를 풍기문란이라 하여 단속하였다. 허나 재미있게도 그렇게 단속한다는 자체가 미니스커트가 그만큼 유행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4] 이렇게 근현대 시기에는 개성을 허용치 않는 약간 전체주의적인 사회 풍조가 남아있었기에 무난하고 튀지 않는 기성복이나 전통적인 감성의 옷이 선호되었다.
1980년대는 교복 자율화와 컬러 TV의 보급으로 패션에 개성화, 다양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5]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영향으로 스포츠 웨어를 많이 착용하였다. 다만 집단주의, 권위주의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어 젊은 세대의 패션에도 영향을 주었고[6] 정보화가 이뤄지지 못한 시대적 한계로 인해 지금 와서 보면 꽤나 촌스러운 복장도 많았다.
1990년대는 개인주의 바람과 함께 이른바 X세대 담론이 형성되면서 패션에도 일대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오히려 이땐 초창기고 인터넷이 대중화된 시기도 아니다 보니 지금처럼 대중적 수렴을 거친 것도 아닌 온갖 독특한 패션
2000년대 이후로는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의상을 판매하여 이윤을 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과거와 같이 패션을 단속하려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든 편이다. 학교에서도 복장 제한을 간소화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했으며[8], 직장에서도 이른바 간소화된 비즈니스 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최소한의 지켜야 할 선은 남아 있어서, 사회 통념상 영 받아들여지지 않는 패션을 할 경우 주위의 눈총을 받을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2010년대부터는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면서 단정하고 단순한 패션을 추구하게 되었다. 개성을 추구해도 옷의 색깔을 변경하거나 약간의 액서서리만을 착용하여 포인트를 주는 정도로 심플해졌다. 또한 몸매를 부각시키는 옷보다 가려주고 보완해주는 옷이 선호되면서 오버핏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유행 지난 패션이 시간이 흘러 다시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패션은 결국 돌고 돈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 패션 그대로 유행하는게 아닌, 복고풍 느낌만 따와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정반합된 패션이 유행하는 것이긴 하다.
3. 패션 이론
3.1. 패션의 구성요소
- 선
- 선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킨다.
- 선에 의해 공간이 분할된다.
- 선의 방형, 두께, 배열의 규칙성, 길이에 따라 다른 자극을 준다.
- 실루엣: 인체가 착용한 옷의 표면이 외부의 공간과 접촉하여 만들어지는 전체 형태. A형, H형, O형, X형 등으로 분류한다.
- 컬러
- 색상에 따라 온도감, 무게감, 팽창과 수축, 대비 효과 등을 연출할 수 있다.
- 재료의 질감 Texture: 시각으로 어떤 재질을 보았을때 연상되는 촉감, 그리고 실제 만져보았을 때 느껴지는 촉감.
- 시각적 촉감: 표면외관(울퉁불퉁함, 밋밋함), 표면마찰(까칠까칠함, 부드러움, 매끄러움), 온도감, 투명성, 광택
- 실제 촉감: 유연성(뻣뻣함), 압축성(단단함, 부드러움), 신축성, 탄력성, 밀도(치밀함, 촘촘함)
- 무늬 pattern: 모티프라고 하는 기본 문양을 반복적으로 배열하는 것.
3.2. 패션의 원리
- 변화의 조화: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요소가 통일감을 가질 때, 그것을 조화라 부른다.
- 유사 조화: 서로 같지 않지만 비슷한 요소를 나열한다.
- 대비/대립 조화: 서로 완전히 다른 요소를 나열한다.
- 통일
- 변화의 리듬감
- 근접: 분리된 물건을 가까이 둠으로서 연결된 느낌을 준다.
- 반복: 같은 요소를 일정한 규칙대로 나열한다. 차분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 교대: 둘 이상의 요소를 일정한 규칙대로 나열한다. 나열되는 대상의 색 조합, 크기 조합, 너비 조합 등을 통해 다양한 느낌을 전달한다.
- 연속: 디자인 요소를 나열하며 특정한 선이나 형태를 형성한다.
- 방사적 리듬
- 점진적 변화의 리듬감
- 크기, 비례, 규모: 서로 다른 크기의 요소를 일정한 규칙대로 배열하여 비례감을 연출한다.
- 시각적 무게, 시각적 균형: 시각적 무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하여 균형감을 준다.
- 대칭 균형: 중앙의 수직축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일한 형태, 동일한 수, 동일한 위치에 배열한다.
- 비대칭 균형: 중앙의 수직축을 중심으로, 양쪽에 다른 형태, 다른 수, 다른 위치에 배열한다.
- 방사형 균형: 중앙의 점에서 밖으로 확장되는 형태.
- 색채감에 의한 무게 균형: 밝고 연한 색은 가벼운 느낌을 주며, 진한 색은 무거운 느낌을 준다. 밝은 색을 크게 배치하고, 진한 색을 작게 배치하여 균형감을 준다.
- 모양에 의한 무게 균형: 검을수록 더 무거워 보인다. 검을수록 작게 배치하고, 밝을수록 크게 배치하여 균형감을 준다.
- 질감에 의한 무게 균형: 거친 질감일수록 무거워 보인다. 거칠수록 작게 배치하고, 부드러울수록 크게 배치하여 균형감을 준다.
- 강조: 한가지를 돋보이게 하고, 나머지의 존재감을 죽이는 것.
4. 패션 관련 산업
흔히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패션 산업 강국으로 일컬어지며, 파리와 밀라노의 이미지도 패션의 도시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 실제로 이쪽 브랜드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소위하지만 최근들어 아시아시장이 돈이 된다는걸 확인한 대부분의 명품브랜드가 아시아 전용 광고를 포함 아시아인 광고모델
이 분야에서 뛰는 디자이너들은 정기적으로 패션쇼를 열어서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고 세일즈한다. 2010년대 이후로는 점차 사회공헌적인 패션쇼도 늘어나고 있으며, 예를 들어 소아암 환아들을 위한 기부를 한다거나, 다운 증후군 환자나 불구가 된 장애인들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과거에는 좀 비현실적인 8등신 인간만이 밟아볼 수 있는(?) 무대였지만, 점차 좀 더 "현실적인" 몸매의 모델들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 그리고 패션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로 상당수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는 그야말로 괴악한 미학을 뽐내기도 한다.(...)[9]
흔히 세계 4대 패션 위크(Fashion Week)로는 런던, 파리, 밀라노, 뉴욕을 꼽는 경우가 많지만, 런던의 경우 나머지 세 컬렉션에 비해 명성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명성이란게 으레 그렇듯 다른 나라, 다른 도시 제품들과 질적으로 떨어진단 소린 아니다. 애초에 이들 도시의 패션 위크도 네임밸류가 높다는거지 다른 나라나 도시의 패션쇼들도 얼마든지 수준높은 경우는 볼 수 있으며, 다 떠나 의류란게 진짜 저렴한 공산품 사는거 아닌 딴에야 소재가 정해져있기에 질 차이가 크게 날 수가 없다.
5. 패션업계의 성비와 동성애자
패션 업계는 대표적인 여초 산업이다. 해외든 한국이든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특히 디자이너는 대부분 여성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명 패션 디자이너는 남자의 비중이 높다. 그래서 남자 디자이너 같은 경우는 실력이 모 아니면 도인 경우가 많지만, 여자 디자이너는 그래도 중간은 가는 경우가 많다는 의견도 있다. 여초현상이 말해주듯 여성 디자이너들이 사실상 패션산업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산업에 비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들이 많은 편이다. 연예계, 예술계와 비슷하게 전위적인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인듯. 실제 주변에서도 커밍아웃해도 크게 신경 안쓴다. 다만 한국 패션계의 경우엔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매우 드문 편이다.
6. 패션 관련 직업
7. 패션 교육
대학교에서 패션전공을 하던지, 패션학원에서 배울 수 있다. 학교와 학원은 차이점이 있는데, 대학에서는 조형원리부터 시작한다든지 컬렉션을 구성하다든지 등 패션을 크게 배운다면, 학원은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게 실무중심으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대학교육의 문제점으로는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한다하더라도 취업하게 되면 도식화 한장 제대로 못 그려서, 마치 새로운 분야에 입문한 것처럼 처음부터 실무중심으로 공부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미대출신 4년제 패션전공 학생들은 미술도 최소 2~3년 공부하고 패션도 4년을 공부하고 사회에 나온 건데, 실무중심으로 배워온 학원출신보다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경력이 생기고 지위가 올라가고, 혹은 자신의 브랜드를 전개하게 되면 무조건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이때부터는 미술을 하고 대학에서 크게크게 구성하면서 배워온 것들이 매우 쓸모있게 된다. 패션에 대한 깊은 생각이라든지, 미적감각, 철학적 접근, 패션과 예술의 차이, 카피에 대한 고민, 컬렉션의 효율적 구성 등 이런 것들은 시간이 많은 대학생들이 아니면 사실 고민할 시간도 토론할 시간도 없다. 그러니 사회에 처음 들어오면 몇 년은 구른다 생각하고 인고의 시간을 갖고 참다보면 자신이 공부해온 것이 쓸모없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고, 빛을 발휘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학원교육같은 경우 실무중심에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현업에 종사하거나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경우가 많아서 회사업무를 잘 이해하고 있으니, 학생들은 학원교육만 잘 받아도, 실무에 대한 감을 어느정도 잡고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취업을 해서 시장경험까지 더해져 일은 어느 정도 하게 되지만, 문제는 한계점이 생각보다 빨리 온다는 것에 있다. 즉 밑천이 드러난 것인데, 그때서야 부랴부랴 미술사나 복식사도 찾아보겠지만, 몇 페이지 보다가 덮을 확률이 높고, 원래 하던데로 패턴데로 똑같이 맴돌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경우 몇 년의 긴 시간의 계획을 잡고 공부를 하지 않는 이상 발전은 없는데, 나이도 30살 이상이 된 경우가 많기에 공부도 잘 안 된다는 문제가 있지만, 어렵더라도 시간을 만들어 기초적인 것부터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단순 학원이 아닌 미국의 파슨스 영국의 센마틴 프랑스의 IFM, ESMOD 이탈리아의 마랑고니같이 전문화되었으며 역사가 길고 여러 명품브랜드와 산학연계 프로그램이 성사되는, 이른바 명문 패션스쿨들을 재학하게 된다면 두가지 모두 얻을 수 있다. 물론 학비가 일반 학교와 일반 학원에 비해 비싸고 아무나 입학할 수는 없지만 갈수록 패션업계에 입문자들이 줄어들고 있어 유학생들의 경우 학교재정을 고려해 많이 합격하는 편이다.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자신의 환경(인맥)과 실력, 운에 달렸다. 세계적인 패션스쿨을 나와도 망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으며 아예 비전공자이지만 성공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 심지어는 인맥 하나 없이 학교도 자퇴했지만 인스타 마케팅만으로 성공한 자크뮈스같은 디자이너들을 보면 결국 운과 실력만 있다면 이 업계에서 학력따위는 중요치 않다.
8. 패션의 문화별 차이
문화마다 허용되는 패션과 금기시되는 패션은 서로 다를 수 있다.아시아권 국가에서 타이츠는 반 속옷에 가깝게 여겨지지만, 러시아와 동 · 북유럽 일부 국가들에서 타이츠는 청소년들의 유니섹슈얼한 겨울나기 복식이며, 영미권 여성들에게 타이츠는 바지 대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같은 복장이라도 문화마다 그 맥락과 의미가 다를 수도 있다.
한편 기후 풍토에 의해 패션이 반강제로(?) 정해지기도 하는데, 풍문에 따르면 제국주의 시대 때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와 남미 오지에서 현지인들에게 강제로 서양식 복식을 입히려고 시도했다가 피부병이 돌고 거하게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습기가 높고 젖기 쉬운 환경 때문에, 피부병이 발생했다는 이야기. 또한 옷이 생경하기 때문에 세탁에 민감하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케이스에서는 옷이라는 개념 대신 피부에 물감 등으로 치장을 하거나 문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민족적 표지(ethnic marker)라고 부르는데, 옷을 입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내부인과 외부인을 식별하기 위한 용도다.
종교나 인습에 의해서 패션이 고정될 수도 있다. 일례로 중동 지역에서는 차도르, 부르카, 니캅 등 여성의 신체를 가급적 보여주지 않은 채 검은 천으로 온몸을 휘감는다. 이런 패션은 이슬람권 국가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10] 과거 청교도들도 금욕을 위해 온몸에 걸칠 옷들을 전부 회색으로 통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문화별 패션 차이는 많이 완화되고 있는 편이다.
매우 보수적인 나라로 여겨지는 이란에서도 패션에 대한 인식은 점점 바뀌고 있다. 서양의 문물을 문란하게 여겼던 이란의 기성세대와 달리, 서양으로 유학을 갔다 온 이란의 부유층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란의 전통적 문화에 반하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그들의 럭셔리한 라이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일부 한정.[11]
9. 왜 런웨이에 나오는 옷들은 기괴한가
패션업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패션 업계 특유의 전위적이고 기괴한 패션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패션업계와 패션업계 밖 스타일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로 런웨이에 선 옷들은 디자이너의 예술관을 업계 종사자들에게 선보이고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다. 일상생활을 테마로 만든 옷이 아니라면 작가주의적인 자세에서 관람해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 패션 디자이너는 이미 유행하고 있는 옷들을 만들지 않는다. 패션 디자이너는 미래에 유행할 패션을 예측하고 선도하는 직업이다. 이미 유행이 지나거나 대중적으로 퍼진 옷들은 의류 유통기업에서 판매된다. 다만 2020년 이후로 패션 트렌드 변화가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몇달전에 런웨이에서 본 기괴한 디자인이 지금 유행하고 있기도 하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런웨이에 올랐던 옷이 몇주 뒤에 팔릴지도 모를 일이다.
- 부차적인 이유지만 유명 패션 런웨이에 나오는 옷들은 하이패션 혹은 오트쿠튀르로 불리는 분야로, 대중보단 패션에 관심이 많은 특정층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이다. 대중에게 전파시키려면 거액을 들여 생산공장과 유통망을 구축하고 대량생산을 해야하는데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모델, 인플루언서 등 패션 트렌드에 민감한 극소수의 유명인들이 소량 생산된 하이패션을 먼저 접하고 광고판 역할을 하면서 대중에게 소개한다. 이중 일부가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 비로서 대중 패션 혹은 프레타포르테라 불리는 패션이 유행하고 대량으로 생산/유통된다. 단, 상술한 디자이너의 취향과 예술관 때문에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서도 기과한 옷이 런웨이에 오르긴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다.
공학으로 치자면 목업, 프로토타입인 셈이다. 자동차 전시회에서 특이한 디자인의 차량을 보고 도로교통법에 맞지 않다고 비판하지 않듯이 런웨이에서 특이한 옷을 보고 일상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 기타
- 스코틀랜드인 남성들이 입는 킬트는 16세기에서 비슷한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본래 지금의 위상이나 형태가 아니었다. 이후에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관광산업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보편적 전통의상으로 만든 것.
- 개개인의 옷빨에 따라 같은 패션이라해도 크게 차이가 난다.다리길이와 얼굴의 크기,전체적으로는 체격에 따라 어울리는 옷이 구분되는 편.
11. 패션 관련 문서
[1] 당시 사람들이 성경시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구체적으로 뭘 입었는지 알 턱이 없으므로 당시 평상복을 그려넣는 경우가 많았다.[2] 자세히 보면 예수가 탄생한 마구간에서부터 예수의 생애를 보여주는 거의 모든 영화나 그림에서 마리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여인들은 팔라와 흡사한 숄로 머리카락을 가리고 있다.[3] 로마 제국 황제는 서기 1~2세기에는 프린켑스(제1시민) 같은 칭호로 불리다가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이후 도미누스(주군님)라고 지칭되기 시작했다.[4] 주로 연예인 따라하는 대도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러니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으로 더 크기 전에 아예 불순분자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였을듯.[5] 일반인들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도긴개긴 독재 정권 취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만 봐도 사실 사회적 자유도 측면에선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만주군 출신이기도 한 박정희가 일제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사회의 군대화를 추구한 측면이 강했다면, 전두환 정권은 5.18 학살이란 원죄에 정치 탄압이나 고문, 교련 수업, 해외 여행 불가 등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행태는 남아있었지만 이런 부분에선 또 부분적 자유화가 일어났다. 특히 교복 자율화는 지금보다도 오히려 더 나간 것이었는데, 사실 성장기 아이들의 의복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과도 연동이 되는 부분이라 결국 다시 교복 착용이 대세가 된다.[6] 여성복만 하더라도 이시기 심지어 1990년대 중반까지도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수영장을 가도 여성들 수영복은 원피스 수영복이 대세였지 비키니 입은 여성은 매우 드물었다.[7] 인터넷에서 1990년대 후반 광고들이나 음악 프로그램 사진들을 검색해 보면 쏟아져나온다.[8] 두발 규제 철폐나 여름철 반바지, 여학생의 바지 허용 등.[9] 이에 대해 혹자는 과거 상류층 패션인 오트쿠튀르 이미지가 패션쇼에 있기 때문이라며, 사실 기성복 패션쇼인 프레타포르테 패션쇼는 단정하고 입을만한 옷들이 많이 나온다는 주장도 있는데, 물론 괜찮은 옷도 많지만 일반인들이 보는 요상한 옷들이 나오는 패션쇼 중 프레타포르테 패션쇼도 많다.(...) 고로 그것보단 그냥 디자이너 선구안이나 취향이 들어간 좀 더 앞서나간 실험용 의상이 많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더 맞을 것이다. 아님 의상쇼 무대는 채워야되는데 도저히 영감이 안떠올라서 진짜 막 만들었거나[10] 이것을 무조건적으로 비판만 해도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실한 신자들이 금욕하는 것과 같은 맥락. 다만 이러한 것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다.[11] 사실 의외로 이란의 특히 테헤란에서의 이런 모습은 1970년대까지는 크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세속주의를 추구했기 때문. 허나 팔레비 왕조가 물러나고 이슬람(종교를 떠나 전통적인 권위, 한국식으로 비유하자면 유교 문화.)을 중시하는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의 사회상도 변화했다. 그래도 세속화의 기운이 어느정도는 유지되었는지 오늘날 이란은 주변의 절대왕정국가보단 상대적으로 세속화된 편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