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이 BIFAN인 대한민국의 영화제에 대한 내용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비판(批判, Criticism)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행위를 의미한다.2. 조건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혀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
표준국어대사전
- 논리적 구조를 갖추어야 하며 논리적 오류에 빠져선 안 된다.[1]
- 비판하고자 하는 바에만 한정해서 비판한다.
- 이를테면 욕설을 잘하는 사람이 도둑질로 재판을 받을 때, 그 사람의 도둑질에 대해서만 비판해야 하고, 욕설하는 점을 끼워 넣어서 비판하면 안 된다.
- 이태원 클럽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의 경우, 클럽에서 코로나 방역 수칙을 어기고 행동하여 확진 판정을 받은 성소수자가 있을 때, 그 사람이 방역 수칙을 어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비판해야 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개인의 (대개는 부정적인) 가치관을 투영하여 비난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비난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더더욱 음지로 숨어 들어가 코로나 검사를 기피하게 되고, 코로나 소강, 그리고 더 나아가 종식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방역 당국의 노력에 대한 걸림돌이 되어, 사태가 장기화되고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의 피로가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충분히 대며 그 증거는 믿을 만한 출처를 가져야 한다.
- 비판하려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신념 등의 문제와 기록, 과학, 수학 같은 사실의 문제를 서로 구분한다.
2.1. 사실비판과 논리비판
비판을 하는 방법에는 사실비판과 논리비판이 있다. 사실비판은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들어서 비판하는 것이고, 논리비판은 상대방의 논리적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이는 방법이다. 통상적으로 둘 중 좀 더 확실한 비판은 논리비판이다.먼저 사실관계 파악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거나, 새로운 근거가 제시되거나, 본인의 근거도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웬만한 수준 이상의 논증에서 사실관계는 신빙성이 어느 정도 충분히 확보된 경우가 많다. 반면 논리가 잘못되었을 때는 상대방의 주장이 틀렸음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으므로 어떤 사안에서 사실비판과 논리비판 모두를 비판할 수 있다면 통상적으로는 논리비판 쪽이 반박 논리를 구성하기가 더 편하다.
다만 논리비판이라도 논증 방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정신승리로 이어지기 쉬우니 주의. 사실관계 자체가 거짓인 경우에는 그보다 더 진실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간단히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논리를 구성해야 하는 논리비판보다 훨씬 더 쉽게 비판을 할 수 있다.
3. 예의를 갖춘 비판
다음은 비판의 조건은 아니지만 건전한[2] 목적을 가진 비판이 효과를 거두기 위한, 혹은 대화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예의들이다.- 올바른 의미의 낱말을 사용해야 하며 다의어의 경우 의미를 명확히 한다.
- 맞춤법을 지킨다. 다만 맞춤법만 가지고 비판할 경우 문법 나치로 몰릴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자.
- 자신이 비판을 받으면 일단은 인정하고, 자신이 지적받은 점을 일단은 개선해 본다. 잘못된 점은 근거를 대서 반박한다.
- OOO이 나쁘다는 점은 봐줄만해요 하지만 XXX는 좀 아닌 것 같네요. 등으로 반박할 것.
- 주변 상황과 상대방의 감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직설적으로, 객관적으로 말할지, 또는 간접적으로 말할지 발언 방식을 잘 고른다. 현실에서 이게 제일 힘들다. 완벽하게 감정을 고려하여 상처를 전혀 주지 않으려면 대부분 비판 자체를 안 해야 되기 때문. 결국 무엇을 하든 완벽한 길은 없다.
참고로 비판자는 비판을 당하는 사람에게 기분 좋게 비판을 들을 것을 강요하면 안 된다. 그건 오지랖일 뿐이다. 비판을 수용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이며 수용자가 인정 안하고 버틴다고 해서 말로 누르는 것도 오지랖이다. 면전에 대고 당장 고치라고 명령하는 것도 옳지 않다. 누구라도 약점을 들추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3]
4. 유사 개념
4.1. 비난, 비방과의 비교
비판, 비난, 비방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비판: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 일.(다른 뜻: 비평)
비난: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함. (다른 뜻: 비방)
비방: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함.
출처: 국립국어원
셋을 완전히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다. 비난과 비판의 교집합은 크고, 아주 단순화하면 비난이 비난성 비판과 비방으로 양분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비판으로써의 가치가 있는 지적 소산도 욕이 좀 섞이면 비방이 되고, 그렇다고 비판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비판은 객관성을, 비난/비방은 헐뜯음을 내재해야 하는데 비판으로 헐뜯으면 비난/비방도 되고 이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비난/비방이 전부다 객관적이면 비판도 된다. 욕이 섞인 비난/비방을 읽을 때 차분히 욕을 무시하면 객관적 사실, 비판이 등장하기도 한다. 객관적 사실이 전혀 없으면 그건 순수한 욕이다.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 일.(다른 뜻: 비평)
비난: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함. (다른 뜻: 비방)
비방: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함.
출처: 국립국어원
비판이 비난/비방에 속할 수 있고 비난/비방이 비판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비판과 비난/비방을 무조건 구분지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사실관계에서 벗어나 논쟁을 진영논리로 빠뜨릴 수 있다. 헐뜯으며 욕이나 혐오표현을 섞는 악질적인 태도는 배척과 적대적 공생을 부르는 위험한 태도이므로 지양되어야 하지만 비판과 비난을 구분해 비난을 악마화하는 사고방식은 내 진영은 비판, 상대 진영은 비난이라는 반지성적 이분법을 부름과 동시에 자신에게 비난이 닥쳐올 때 그 사실관계를 스스로 따져 보는 반성의 기회를 앗아간다.
그렇다고 뜻의 차이를 섣불리 무시하고 두 개념을 완전히 동일시해도 안 된다. 비난/비방은 특정 대상의 결점을 근거로 나쁘게 말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인신공격, 조롱, 비속어로 헐뜯기 등의 방법을 동반할 수 있다. 비판(비평)은 이성적으로/논리적으로 분석해 따져 사실관계나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으로 의미가 다르다. 이런데도 비판과 비난을 동일시하는 것은 비판 의견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거나 모든 비난을 '건전한 비판'으로 포장하려는 악의적인 왜곡일 수 있다. 인터넷상에서는 두 개념을 헷갈려 비난을 비판이라고 표현하며 비판자들을 매도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못 하게 틀어막거나, 비판을 한답시고 비난, 비방을 하는 모습이 많다. 가령 악플러들이 자신들이 쓴 악플에 죄책감을 못 느끼는 이유로는 익명 뒤에 숨어 책임을 안 지는 것도 있지만 말 그대로 정당한 비판을 했다고 착각을 하는 것도 없지 않으며 상대가 객관적으로 문제가 많은 대상이니까 공격당해도 마땅하다[4]는 심리가 있다. 이런 경향이 자칫 심해질 경우 폭력[5], 명예훼손, 살인, 테러, 정치극단적 행위 같은 해서는 안 될 범죄행위마저 정당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비난성 비판의 경계가 모호하다지만 그래도 비판다운 비판을 하려면 객관적인 문제사항만 언급하되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비판 대상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많다한들 저속한 표현을 남용하는 것, 근거없는 음해질이나 싸잡아서 폄하 및 조롱하며 공격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그저 비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공격적 어휘가 가능한 거세된 비판(비평)을 단순히 받아들이기에 기분이 나쁘다고 그저 공격적이고 무가치한 비난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르다.
안쓰럽게도 익명화되어 감정 쓰레기통의 쓰임새가 강한 인터넷상에서 대부분의 비판이 비난에 속하는 게 현실이다. 현상에 불만을 가진 이들에게 비판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나무위키에서도 비판 문서가 사실상 조리 있는 비난의 장으로 쓰이고 있다.
4.2. 반박과의 차이점
'반박'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개념이다. 반박의 정의는 "어떤 의견, 주장, 논설 따위에 반대하여 말함"으로, 상대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거나 해명하는 말로 쓰인다. 비슷한 말로 반론이 있다.당연하지만 반박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재반박을 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이렇게 계속 반박을 또 다시 반박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돠면 서로 상대방의 주장은 무시하고 말꼬리만 잡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명시켜야하는 토론은 "넌 무조건 틀리다" 의 감정섞인 방향으로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자신의 의견과 반박하는 대상 및 이유를 명확하게 하고 잘못된 점에 대한 비판은 수긍하고 받아들여 발전에 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
5. 성경 관련
Μὴ κρίνετε, ἵνα μὴ κριθῆτε: ἐν ᾧ γὰρ κρίματι κρίνετε κριθήσεσθε, καὶ ἐν ᾧ μέτρῳ μετρεῖτε μετρηθήσεται ὑμῖν.
(라틴어: nolite iudicare ut non iudicemini. in quo enim iudicio iudicaveritis iudicabimini et in qua mensura mensi fueritis metietur vobis.)
- 마태오 복음서 7:1-2
성경의 위 구절을 '비판하지 말라'로 번역한 것은 개역개정 성경의 오역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구절에서 쓰인 그리스어 동사 '크리노'는 '정죄하다', '심판하다',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이 강한 단어라는 것라는 것이다. 오히려 'κατηγορέω'(책잡다, 고소하다)가 '비판하다'에 해당하는 어휘라고 볼 수 있다.(라틴어: nolite iudicare ut non iudicemini. in quo enim iudicio iudicaveritis iudicabimini et in qua mensura mensi fueritis metietur vobis.)
- 마태오 복음서 7:1-2
아래에 인용된 라틴어의 'iudicare' 역시 심판하다라는 뜻이며 NIV 영어 성경에서도 'Do not judge'라고 번역했지 'Do not criticize'라고 번역하지 않았다. '크리노'의 기본 의미가 '분간하다'(separate, put asunder, distinguish)이므로, 해당 부분은 '판단(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평가'를 막는 구절이라기보다는 '단죄'를 막는 구절에 가까우므로 '심판'이 더 무난할 것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성서는 '판단'으로 번역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에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번역했고, 개신교 새번역 성경에서도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일선 개신교 교회에서는 '비판하지 말라'라는 번역이 담긴 개역개정 성경이 더 많이 쓰이는 현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주교회의 성경의 주석판, 그러니까 주석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며 '심판'과 '비판'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재판관으로서 하느님만이 지니시는 권위를 침해하면서(시편 50,6 참조) 남을 단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재판으로 유죄가 확정된 살인범을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사적으로 살해하지는 말라는 게 그 예일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재판과 형벌을 부정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우리에게 남의 종을 판단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가 서거나 넘어지거나, 그것은 그의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는 그를 서 있게 하실 힘이 있으시니 그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번역성서 로마서 14,4
공동번역성서 로마서 14,4
사도 바울로 역시 비슷한 가르침을 말했다.
다만 비난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정당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는 비판은 비난에 해당한다. 성경에 따르면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전부 죄이므로, 엄밀하게 보자면 청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하지 않는 비판은 전부 그럴듯한 동기로 포장해 놓은 비난에 해당하며,[6] 불신자는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7] 자기 나름대로는 상대방을 위하여 훈계를 한다고 해도, 은연중에 자신은 상대방보다 낫다는 마음을 품은 채로 훈계를 하게 되면 그것은 교만함에서 나오는 비판이 되어버리며, 그 마음이 그대로 말의 뉘앙스에 섞여 들어가게 되어 상대방의 반발심만 사거나, 상대방의 행동이 교정되더라도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그 행동을 한 게 아니라 사람 눈치 보느라 그 행동을 한 것이 되어버려 훈계를 한 사람의 교만함만 강화시킨다.[8]
6. 나무위키 문서
자세한 내용은 분류:비판 문서 참고하십시오.나무위키의 문서들은 비판, 논란, 의혹, 문제점, 부정적 평가 또는 단점이 옹호, 긍정적 평가, 장점보다 매우 많다. 이러한 경향은 나무위키라는 사이트의 특성에 기인한다. 위키의 사이트 컨셉트가 정보이지만 그 단어 아래에 뒷담화를 나누기 좋고 포털 사이트의 한국어 검색 결과들로 잘 뜬다. 일부 문서에서는 유익한 이야기들도 다루지만 비판이나 문제점보다 내용이 길지 않다. 굵직한 비판들은 대부분 하나의 문서로 모이지만 장점은 개요, 특징, 또는 여담을 다루는 문단들로 분산된다.
독립되지 않은 문서로서 목차를 만들어 비판하거나 문서명/문제점 문서나 문서명/논란 문서 또는 문서명/평가 문서에서 비판하는 문서들도 많다. 예를 들어 문서명/문제점 문서의 사례는 문제점 문서나 분류:문제점을 참고하거나 검색창에 문제점이라고 검색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술하는 위키 특성상 각 문서에 비판이 아닌 비난도 공존한다. 비판 문서들은 드물게 비평이나 여담이라는 제목이 걸린 채 작성되기도 한다.
2017년 초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부터 문서 내에서 비판에 대한 문단들이 필요 이상으로 대거 생성되기도 한다. 부정적인 평가나 의견을 단순히 비판 단락이라 주장하며 문단 생성을 남발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적절히 쓰일 문단명이 있지만 단락 분리하고 비판으로 서술한다.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논란이나 단순한 단점을 비판으로 부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거나 유익하지 않거나 정보량도 많지 않은 걸 무작정 분리할 경우 확증편향이 발생한다. 문장이 한 개나 두 개만 서술되기도 한다.
기여자가 비판이나 비난을 서로 바꾸기도 한다. 예를 들면 기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기여자가 비판하면 비난으로 바꾸거나 기여자가 혐오하는 것을 다른 기여자가 모욕하는 것을 비판으로 바꾼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서 내에서 비난은 대거 추가되지만 옹호는 잘 추가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비난에 대해서 반박하는 옹호도 함께 가끔 서술되기도 한다. 토론 합의를 통해 문서에 MPOV나 NPOV를 적용하기로 정하거나 비판 문단을 별도 문서로 분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유저 간 합의를 거쳐 옹호를 추가하려고 하거나 문서의 내용을 정리하려 하는 움직임에 반발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MPOV의 적용을 통한 옹호의 추가나 NPOV의 적용을 통한 비판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문서의 내용을 비판에 대한 사실상의 변호로 바꾸어 마치 옹호가 옳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POV 서술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즉, 문서 내 비판 서술에 MPOV나 NPOV를 적용하는 것을 MPOV나 NPOV를 가장한 사실상의 POV로 보기에 꺼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독성 개선이나 편향적인 서술을 지양하기 위한 서술 방향의 중립화 등으로 문서의 서술을 정리할 때에도 옹호 서술에 대한 정리는 반발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 편이지만 비판 서술에 대한 정리는 POV로 오해받아 반발을 받는다.
6.1. 관련 문서
7. 비디오 판독의 약어
프로야구 등의 스포츠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만이 있을 때 요청하는 '비디오 판독'의 첫 글자를 따서 '비판'이라고 한다.[9]8. 관련 문서
[1] 허나 나무위키의 상당수 비판은 논리적 구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2] 여기서는 편의상 상대를 파멸시키려는 목적이 아닌 비판을 건전한 비판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치적 공격이 비판의 목적이라면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 한 예의를 차릴 이유가 없고 이 문단에 해당되지 않는다. 눈치 없이 냉철한 비판은 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에 건전한지는 내용을 평가하기 나름이다.[3] 이렇기 때문에 심리상담과 사회복지에서는 비판이 엄격하게 금지되는 편이며 하더라도 질문기법의 형태로 매우 간접적으로 표현을 하는 게 원칙이다.[4] 이는 우월주의와도 관련이 있다.[5] 특히 학교폭력.[6]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함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지 않는 진심어린 태도까지 갖춰진 것을 말하며, 믿음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7] 다만 비난의 감정이 섞인 정도가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주관적 기준에 의해 비난의 감정이 약간 섞인 비판이 비난이 아니라고 판단될 수 있다. 또한 정당한 비판인데도 개인의 주관적 기준에 의해 비난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 역시 많다.[8] 시도 때도 없이 죄의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외줄타기 수준의 난이도다보니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거룩함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9] 비디오 판독 오심이 있을 경우 비판(비디오 판독)으로 인해 1번 항목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