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00:55:20

호복

아시아 전통의상
한국
한복
한족
한푸
일본
기모노
인도·방글라데시·네팔
사리
몽골
태국
쑤타이
미얀마
론지
북방 유목민
호복
유대인·이스라엘
키파
파일:Xiongnu Leather Robe, Han period, Henan Provincial Museum, Zhengzhou.jpg
한나라 시기 흉노족 가죽 상의
1. 개요2. 특징3. 기타4. 관련 문서


1. 개요

'오랑캐[1] 옷'이라고 하여 한나라 한족한푸와 대비시키는 뜻을 지닌 단어.

중국에서 다른 주변 국가들의 복식을 가리키던 말로, 초기 '호(胡)'라는 개념은 농경민족인 한족이 유목민족, 기마민족인 이민족들을 가리키는 뜻이었다. 처음에 胡는 흉노를 뜻하는 말이었기에 흉노족의 복식을 호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점차 흉노가 세력을 확장시키자 자연스럽게 북방 및 서방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어 호복 역시 이민족들의 복식 전반을 뜻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 《자치통감》 3권 <주기> ]
||(상략)
與肥義謀胡服騎射以教百姓曰(여비의모호복기사이교백성왈)
비의(肥義)와 더불어 호족(胡族)들의 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쏘는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칠 것을 도모하며 말하였다.
愚者所笑(우자소소) 賢者察焉(현자찰언)
"어리석은 사람이 웃는 바는, 현명한 사람이 잘 살펴 본다.
雖驅世以笑我(수구세이소아)
비록 세상을 몰아 붙여서 나를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胡地中山(호지중산) 吾必有之(오필유지)
호(胡) 땅의 중산(中山)은, 내가 반드시 이를 소유할 것이다"
遂胡服(수호복)
마침내 오랑캐 복장인 호복(胡服)을 하였는데,
國人皆不欲(국인개불욕)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하지 않자,
公子成稱疾不朝(공자성칭질부조)
공자(公子) 조성(趙成)은 병을 핑계대고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王使人請之曰(왕사인청지왈)
왕이 사람을 시켜서 그를 청하면서 말하였다.
(중략)
先君丑之(선군축지)
먼저 가신 주군께서 이를 부끄럽게 여겼으니,
故寡人變服騎射(고과인변복기사)
그러므로 과인이 호복으로 바꾸고 말을 타고 활쏘기에 좋게 하여,
欲以備四境之難(욕이비사경지난)
사방의 경계선에서의 어려움을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며,
報中山之怨(보중산지원)
중산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하는 것입니다.
而叔順中國之俗(이숙순중국지속)
숙부께서는 중국의 풍속에 순응하시고,
惡變服之名(악변복지명)
복장을 바꾼다는 명분을 싫어하여서,
以忘鄗事之丑(이망호사지축)
호(鄗)에서 일어났던 부끄러움을 잊는 것이니,
非寡人之所望也(비과인지소망야)
이것은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公子成聽命(공자성청명) 乃賜胡服(내사호복)
공자 조성이 이 명을 들으니, 이에 오랑캐 복장인 호복을 하사하였고,
明日服而朝(명일복이조)
다음 날 입고서 조회에 나왔다.
於是始出胡服令(어시시출호복령)
에 비로소 ‘호복령(胡服令)’을 내리고,
而招騎射焉(이초기사언)
말을 타며 활쏘는 사람을 초대하였다.||

역사적으로 '호복'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사례는 《자치통감》에서 조무령왕이 기원전 307년, 오랑캐의 '바지'를 중국에 도입하도록 호복령을 내린 것이다. 원래 한푸는 남방계 복식이라 치마만 입었었다. 조무령왕의 호복령에서 명칭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무령왕의 호복령

호복은 크게 스키타이, 훈족, 아바르, 흉노, 선비족, 몽골족, 돌궐, 강족, 퉁구스 등을 위시한 서북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유목민족 옷을 칭한다. 기준을 더 넓게 잡을 경우 한복기모노 역시 호복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특히 한복같은 경우는 애초에 처음부터 북방계 호복이 근간인데, 대표적으로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예맥족삼국시대 복식이 그렇다. 한복이 한푸의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는 기본 한복과 별개 카테고리에서 공존해 온 '관복'들 위주로 해당하는 사항이며[2], 저고리+바지(치마) 구성인 '기본 한복'은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큰 겉고름이 생겼다는 점 외엔 초기의 고유한 호복 형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기모노의 경우 고대에는 백제 옷을 입었다는 기록과 함께 다카마쓰 고분 벽화 등으로 한복의 영향을 받아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구조였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에도 막부 시대 이후부터의 복식은 원피스 형태로 입는 진(秦)나라~한(漢)나라 시대 한푸와 닮은 구조가 되었고 고온다습한 일본열도의 기후에 맞게 변형되면서 하카마처럼 바지의 통이 넓어지거나 소매와 겨드랑이 부분에 트임이 생기는 등 남방계 복식과 더 가까운 형태를 띄게 되었다.

나무위키에서 한복이나 기모노의 근간으로 호복을 설명할 때는 알타이계 호복을 뜻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2. 특징

파일:external/photo.hanyu.iciba.com/bk_45093469903e4d25a914b8950a2f2b1e_TcTrUH.jpg

가장 큰 특징은 '바지'와 '저고리'를 함께 입는 상유하고(上襦下袴)형 복식이라는 것으로 아래에 '치마'를 두르는 상의하상(上衣下裳)인 한푸와 구분되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을 주로 타고 다니는 기마민족 특성상 바지가 발달한 것에서 기인한다. 호복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중국 복식과 한반도에서 한복 등으로 대표되는 호복 계열 복식이 건너가기 전 일본 복식은 전형적인 '상의하상' 형태인 복식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한푸, 기모노 문서 참고. 남방계의 영향이 짙은 제주도 지역 역시 바지가 없이 상의만 입는 복식이 전해진다. '문명 대 야만'이라는 차별적인 구도에서 근거한 비교이긴 하나, 옛 유럽의 복식 역시 토가로 대표되는 로마인들의 복식과 바지와 같은 갈리아족 등의 복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3]. 또한 소매가 좁은 착수형 복식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이 역시 서늘한 기후적인 요소와 활동성[4]을 중시했기 때문에 생긴 특징으로 소매가 넓은 한푸의 활수형 복식과 구분되는 요소이다.

또한 옷섶 앞자락을 y자로 여미는 직령 교임 형태인 복식을 입을 때 착용자의 입장에서 오른쪽 옷깃이 위로 올라가는 좌임(左衽)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좌임'을 '미개하다'는 뜻의 멸칭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앞에 나왔듯이 중국의 한푸도 기원전 3세기부터 호복 요소들을 전 시대에 걸쳐 받아들였다. 대표적으로 한·중·일, 베트남 4개국에서 공통 관복으로 널리 사용한 단령 역시 호복에서 비롯한 옷이다. 호복과 상호 영향이 있었거나 또는 호복 그 자체인 고구려의 한복 역시 '좌임'이 기본이었다. 좌임으로 여미는 호복이 미개하다는 발상은 그저 중국(한족)의 주관적인 시각일 뿐이고, 한푸가 받은 호복의 영향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중국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중화사상의 일부이니 이런 억지 주장에 동조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우임'을 하도록 만드는 지금의 한복이나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수의용 기모노만 '좌임'을 하는 일본[5]같은 경우도 있으니 이런 부분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호복과 좌임에 대한 불필요한 편견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 오히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좌임은 남방계 주류인 중국, 일본 복식과 달리 북방계 주류인 한국 복식을 독자적으로 차별화할 수 있는 디자인 요소로서 재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 거기다 고구려 복식의 전통을 되살림은 덤이다.


학계에서 한반도 복식을 연구할 때, 대체로 스키타이 계열 호복이 중앙아시아를 지나서 동아시아로 건너와 고대 한복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을 가장 유력한 학설로 여기고 있다. 한복의 저고리 형태가 스키타이의 '카프탄'과 여밈이 같은 형태이며, 바지의 재단 형태 역시 스키타이의 바지 유물과 맞닿았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 복식의 원류에 관한 연구 : 스키타이계 복식문화를 중심으로
스키타이 복식 유형 및 형태에 관한 연구-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pdf)

3. 기타

호복의 존재를 모르는 몇몇 무지한 네티즌들이 한복과 기모노의 근간을 한푸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많이 나오는 주장인데, 조선시대 한복의 근간을 명나라 복식이라고 주장하고, 삼국시대의 한복과 기모노의 근간을 당나라 복식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분명 한복의 근간은 호복이고, 명나라 한푸는 원나라에서 유행한 고려양의 영향이며, 원나라가 멸망한 뒤 명나라로 와서는 수도를 바꾸고 고려양을 자기네 한족의 고유 풍습이 아니라고 금지시켰다. 기모노는 4~5세기 경 백제가야를 위시한 한반도 고대 국가에서 호복 형태의 복식이 넘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日 기모노연구가 "기모노의 원류는 백제" 이후 기모노가 직거포(直裾袍) 등 중국 복식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은 사실이고, 한복과 기모노 모두 중국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한푸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자국 풍토에 맞게 변화시켰지만 문화 요소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전파되거나 전파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도 나왔듯이 중국에서도 조무령왕의 호복령으로 중국 복식에 상유하고(바지저고리) 형태의 복식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렇게 명나라 한푸가 조선 한복의 근간이라는 거짓말은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근근히 들려오다가 기어코 2020년에 몰지각한 중국 네티즌들이 한복을 중국의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주장하고, 중국산 모바일게임이 중국측 관계자의 적반하장식 태도와 함께 일방적으로 서비스가 종료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중국의 한복 왜곡 논란, 샤이닝니키 한복 사태 문서 참고.
  • 참고 논문: 당(唐)시대의 호복(胡服)에 관한 연구
    ("국문초록 : 본 논문은 한족(漢族) 우월주의에 젖어있는 중국인들이 호복(胡服)을 수용하여 보여주는 복식(服飾)의 양식(樣式) 변천 과정을 호(胡)의 개념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당(唐)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연구 목적은 당(唐) 이전에 착용했던 호복(胡服)이 어떠한 방식으로 융합되어 당대(唐代)에 착용되었는지 규명하며, 횡적인 전파와 교류를 통하여 국제성을 띠었던 당대(唐代) 호복(胡服)의 원류를 밝히고, 동아시아의 복식(服飾)을 대표하던 당대(唐代) 호복(胡服)의 양식 변천 과정을 규명하는데 있다. 이를 통하여 한족(漢族)의 관점에서만 피력되어온 동양 복식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고, 나아가서 한족의 영향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던 한국 복식의 계보를 밝히는데 의의가 있다.")

근대 서구의 복식인 프록 코트연미복 또한 원래 서쪽으로 이동한 투르크인들의 카프탄풍 복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17세기 사이에 서유럽으로 전파하여 쥐스토코르(justaucorps)로 변해 유럽의 중·상류층 남성들의 정장으로 착용하다가 18세기 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분화되었기에 호복에서 기원한 복식이라 할 수 있다.

4. 관련 문서

  • 바지 - 가장 대표적인 호복 요소
  • 단령 - 호복 가운데 바지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오래 착용한 복식


[1] 우량카이(Урианхай) 뿐 아니라 이민족 전반을 가리켜 멸칭하는 뜻을 지닌 '오랑캐'.[2] 그러나 단령같은 대표적인 관복 역시 엄밀히 말하면 서역에서 유래한 호복의 한 종류이다.[3] 로마의 문인 키케로는 갈리아인들이 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실을 연설에서 거론하며 그들이 야만족이라고 멸시했다.[4] 을 쏘기 편하도록 고려한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5]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임)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