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7 19:14:26

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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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인물 역사 왕사
백제부흥운동 백제와 후백제
백제부흥운동
百濟復興運動
존속기간 660년 ~ 663년
정치체제 부흥운동(군주제)
성 탈환 수 약 200
주요 인물 지수신
흑치상지
부여풍
귀실복신
주요 사건 660년 백제 멸망, 부흥 시도
10일 안에 성 200개 탈환
663년 소멸
멸망 이전 백제
소멸 이후 통일신라

1. 개요2. 백제부흥운동3. 부흥운동 소멸 후4. 후백제와 백제 부흥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5. 후백제6. 이연년 형제의 난7. 왕사8. 관련 항목

1. 개요

660년 백제 왕조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한 다음 의자왕이 사비성을 탈출하여 도망가자 사비성에선 부여태가 왕을 자칭한 다음 사비성을 보호하였으나 함락되었고 며칠 후 웅진성까지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신라와의 약조를 깨고 백제의 영토를 단독으로 차지하고,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 도독부를 설치하여 피정복지 백성인 백제 유민들에게 무자비한 폭압 정치를 행했다. 이에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백제의 부흥을 시도하게 된다. 복신도침 등은 백제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고 에 있던 백제의 왕족 을 왕으로 추대하여 당나라와 맞서 싸웠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역은 백제 후기의 중심 지역이었던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북부 지역이었다. 반면 신라쪽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나, 6세기 중반 백제에 완전 통합된 후 100여년간 백제에 의해 남만으로 차별받아온 전라도 남부 지역은 백제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적다.

부흥운동의 1차적 대상은 백제 유민을 직접 다스리며 폭정을 행했던 당나라였다. 신라는 당나라가 약조를 깨고 백제에 5도독부를 설치하자 내부적으로 분개했으나 당나라와 일대일로 맞서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했으므로 일단 당나라의 백제부흥운동 진압을 위한 출병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군과 직접 연합 작전을 펼치기를 꺼리고 주로 변경 지대에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펼치며 해당 지역을 신라 직할 영토로 삼으며 실리를 챙겼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백제부흥운동 막판에 가서야 연합하여 본거지인 임존성 함락전을 펼치고 백강 전투를 치룬다.

2. 백제부흥운동

백제부흥군은 초반에는 꽤 희망적으로 진행되었다. 약 10일만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였고 고구려, 왜와 힘을 합쳐 웅진도독부의 아성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성을 포위하여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고 당나라 군대가 철수를 고려하기까지 했던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곧이어 당나라 본토에서 토벌군이 순차적으로 파견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한다. 당나라의 증원군은 육로가 아닌 수군으로 주로 파견되어 신속하게 백제 땅에 도착했다. 의자왕의 맏아들이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도 당나라군의 지휘관이 되어 돌아와 유인궤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토벌하는 당나라군을 이끌었다.(...)

한편 부흥군 내에서 복신도침의 내분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복신이 도침을 살해해 버렸으며, 이어 복신도 풍왕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돼서 풍왕이 복신을 처형한 다음[1], 백강 전투에서 왜의 구원군과 함께 궤멸하여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그 결과로 부흥군은 성까지 다시 빼앗겨 버렸고 부흥군도 서로 갈라져 흑치상지당나라로 망명하였으며 지수신은 홀로 부흥운동을 진행하다 고구려로 망명하여 부흥운동도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일단 이 시점에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남은 백제의 잔존세력은 왜나 고구려로 도주하거나 신라나 친당세력인 당의 괴뢰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에 붙어 나당전쟁에서 서로 싸우게 된다.

3. 부흥운동 소멸 후

나당전쟁 종결로 패배한 웅진도독부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일단 백제 왕실이 주도하는 백제 부흥운동은 끝나게 된다.[2]

신라는 백제인에게 신라 관등을 주고 신라 지방 지배층의 일부로 편입시켰다.[3] 문무왕 13년인 673년 백제인에게 서울과 지방[內外]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을 백제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었다. 경관(京官)인 신라의 대나마(大奈麻)는 본국(백제)의 달솔(達率)이었으므로 대나마에 임명하였다.

흔히 백제 유민에게 주어진 최고 관등이 5두품이라는 점에서 진골까지 준 고구려계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이 많지만, 사서에 언급되었듯이 고구려계, 백제계 모두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벼슬은 준 것이다. 당나라는 혹시 있을지 모를 부흥운동의 씨앗을 차단하기 위해 백제 왕족들은 모조리 당나라로 압송했고, 나머지 왕족들은 모두 왜로 도피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본토에 있는 왕족이 없어 일본에 있던 부여풍을 대려왔던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고위 귀족들도 대거 왜로 집단 이주했는데, 그 규모는 수십만명을 헤아리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때문에 백제 유민이 받은 최고 관등 5두품이었던 것은 진골, 6두품에 해당하는 고위 귀족이 국내에 남아 있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고구려계의 경우 왕족인 안승이 진골을 하사받았고, 최고위 장수들은 6두품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원래 고구려에서 그들의 신분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은 해석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선 백제 출신으로 신라에 투항하여 장군으로 맹활약한 상영(常永), 충상(忠常), 자간(自簡) 같은 백제인들은 과거 백제 16관등 중 1순위인 좌평이나 2순위인 달솔의 벼슬을 가지고 있었던 고위 귀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항 후 비교적 낮은 아찬이나 일길찬의 관등에 지나지 않았다. 고안승(高安勝), 고연무(高延武)를 따라 신라에 합류한 고구려 유민들도 신분을 막론하고 신라계가 아니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높은 관등을 제수받는 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직 가락국의 왕족인 김해 김씨들이 거리낌없이 신라 지배층에 사실상 수용된 이례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애초에 항해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고 정세가 혼란했던 당대의 상황을 감안하면 고위 귀족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백제 유민이 중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신라를 피해 대한해협을 건너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위에 제시된 수치는 터무니없다. 당장 백강 전투만 봐도 왜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선 천 척과 함께 투입한 병력의 최대 추정치는 4만, 최소 추정치는 2만 7천을 왔다갔다하고 있다.

4. 후백제와 백제 부흥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그러나 이걸 두고 통일신라는 다른 국가에선 유례없는 민족 융화 정책을 실시하였으니 후백제는 백제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저 신라인들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더 생각해볼 내용이다. 그건 제대로 된 역사 해석이 아니며, 그러한 조치가 다른 국가에서 유례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세계사적인 사례로 봤을 때는 틀린 얘기다.
어느 나라나 타국을 지배해서 완전히 영역으로 삼고 싶으면 본래부터의 기득권층의 반발은 잠깐 억누르거나 설득하면서 해당 국가의 지배층에게 상당한 특권과 이득을 보장한다. 페르시아도 로마도, 헬레니즘 제국은 물론이고 그 불가리아 제국도 부활에 성공한 직후 그리스계에게 딱히 축출과 보복을 단행하는 바는 없었다. 일본 제국도 조선의 왕족과 기득권층에겐 일단 병탄에 성공한 후 대우는 어떠했는가? 그러니 "다른 국가에선 유례없다"는 틀린 얘기다.

또한 그것만 가지고 신라가 백제인들을 신라와 동등하게 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왕족은 그렇다치더라도 모든 지배층이 타국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는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으며, 당나라보다 더 악독하게 현지 지배층의 소멸에 열을 올린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의 경우도 이스라엘 왕국이나 유다 왕국에서 옮길 수 있었던 비율은 겨우 20%에 불과했고 상류층이나 지방 지배층도 상당 부분 세력을 유지했던 게 고고학적, 문헌적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와중인데 신라에서 6두품 정도는 줄 수 있었던 백제 귀족층이 아예 없었다고 단정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견해며, 게다가 그나마도 저러한 조치들은 죄다 문무왕 때 일인 건 생각해보면서 사료를 해석해야 한다. 그러한 조치와 기조가 통일신라 내내 지속이 되었는가? 김유신 계열마저도 결국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는데 이후 옛 백제나 옛 고구려 지역에서 성장하는 호족 세력이 신라라는 국가의 향방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는 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후백제가 생기고 태봉이 일어났던 것이며 다름아닌 중앙 정계에서 밀린 신라의 옛 김씨, 박씨 왕족들마저 신라를 저버리고 망한 나라들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했는데 이렇게 지방에 이식된 옛 왕족마저 본국을 버리는 경우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드문 케이스다. 역사의 섵부른 해석이 때문에 이렇게 위험하다.[4]

5. 후백제

이렇듯 신라는 백제 유민들을 체제의 한계 탓에 온전히 신라인으로 포섭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결국 백제는 망한지 약 230년 만에 다름아닌 신라 장수의 손으로 부활하게 된다. 견훤의 후백제는 단순히 편의상으로 붙이는 명칭이며, 당대의 정식 국호는 그냥 백제였다. 역사에 익숙하지 못해 한반도 국가들이 본디부터 하나였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일쑤인 현대 한국인들은 이러한 망한 나라의 재등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정체성이 완전히 죽지 않으면 망한 나라는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다시 등장하며 오히려 이런 경우가 흔한 사례에 속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다름아닌 신라도 망한지 백수십 년 후에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물론 진성여왕때 작은 도적때들의 반란조차 재대로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신라의 전국토에 걸치는 세력은 약화되어서 견훤의 후백제 건국이 가능했던 건 맞지만, 그러한 중앙 정권에 대한 도전이 왜 망한 나라의 이름을 붙여서 일어났어야 했는가? 그때까지도 유민 의식이 불식되지 못했으니 설득력이 있어서 다름아닌 조상 때부터 신라인인 견훤이 야심을 그러한 식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백제유민들의 부흥 운동과는 '전혀 시대적으로 다른 것'이란 견해는 망한 나라를 부활시키려면 모름지기 망한지 시간이 얼마 안 지나야 한다는 대단히 자의적인 전제를 깔고 하는 주장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신라 정부에 크게 대항한다면 구태여 백제의 이름을 차용하지 않고도 방법은 많았는데 굳이 그걸 택하는 것 자체가 백제인, 고구려인 등이 완전히 신라에 통합되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물론 국적이나 소속만으로 보면 후백제의 구성원은 전부 통일신라인, 후고구려의 구성원은 전부 통일신라인이었던 건 맞지만,[6] 그런 식이면 해방 직후 온전한 '조선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다 국적이 일본 제국인 사람들이었다. 동로마 제국에게서 이백 년만에 나라를 찾은 불가리아는? 현상적인 국적만으로 보면 주모자는 그리스계였던 데다 주민은 얼마 전까지 동로마군에 복무하기도 했던 불가리아계 동로마인들이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어디까지나 원나라 사람이었으며 주원장 자신도 스스로가 원나라 황실에게 나름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으나, 그렇다고 한족 중흥을 포기하진 않았다. 역사는 한 번 주역이 플레이에 실패하면 끝나는 오락실 게임 같은 게 아니고, 후세 누군가의 괴이한 국적 관념으로 재단될 수 있지도 않다.

6. 이연년 형제의 난

후백제가 멸망하고 300년이 지난 후, 여몽전쟁이 한창이던 고려 1236년에 전라도 담양[7]에서 이연년 형제가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경손의 고려 관군에게 진압되었고, 이를 마지막으로 백제부흥운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최씨 무신정권의 수탈이었으나, 그 명분이 백제 부흥으로 나타났다는 건 여전히 백제 유민 의식이 남아있었음을 나타낸다. 물론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지방 세력을 나름대로 인정하였으며 오히려 신라보다도 삼한일통의 대의에 충실했기에 이 백제 부흥운동은 그 전에 일어난 두 시기의 백제 부흥운동과 비교하면 성공과 호응도가 확실히 처져 단발로 끝나버렸지만 그걸 이유로 부흥운동이 아니라곤 할 수 없다. 어차피 모든 부흥운동은 지배국의 학정이나 정당하지 못한 통치 행위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7. 왕사

대수 왕호 재위기간 비고
32대 풍왕(豐王) 660년 ~ 663년 벡제 31대 의자왕을 계승했다고 자처. 풍장왕(豊障王)이라는 이칭이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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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항목



[1] 기록에 의하면 복신이 (본인이) 병이 났다는 것을 핑계로 거짓말하면서 누워 있었다가 풍왕이 병문안을 오면 죽여버리려고 했다가, 오히려 발각되는 바람에 본인이 먼저 처형돼 버렸다 한다.[2] 이후 웅진도독부의 친당 백제부흥세력은 고구려 건안성에서 자치집단인 소백제로 잔존하다가 발해 선왕소고구려랑 더불어 발해에 흡수된다.[3] 삼국사기 직관지 신라 외관, 국보 106호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명문[4] 나말여초 정치제도사,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 중 백제 유민 권 참조. 다만 후자는 비매품이기에 도서관에서 참조해야 한다.[5] 신빙성은 낮지만 견훤의 후손이 지은 『이비가기(李碑家記)』란 책의 경우 견훤이 아예 진흥왕의 먼 후손으로 나온다.[6] 후고구려의 경우 후에 말갈인, 발해인 등도 상당수 받아들이게 된다.[7]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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