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7 10:27:16

진성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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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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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진성왕(眞聖王)
별호 매금지존(寐錦之尊)[1], 찰니나제(刹尼那帝)
성씨김(金)
만(曼) / 탄(垣)
왕태자 김요(金嶢)
부왕 경문왕
모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
생몰년도 음력(865년~ 869년) ~ 897년 12월 4일(27세 ~ 31세)
재위기간 음력887년 7월 6일 ~ 897년 6월 (9년 11개월)
태상황 음력897년 6월 ~ 897년 12월 4일 (5개월)

1. 개요2. 정말 암군인가?3. 기울어진 나라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5.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신라 제 51대 국왕. 신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왕이다. 그녀의 치세 이후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여왕이 나오지 않았다. 재위 기간이 뚜렷한, 몇 안 되는 신라 국왕이다. 48대 경문왕과 영화부인 김씨의 장녀이며, 49대 헌강왕과 50대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헌강왕부터 시작한 삼남매 계승의 마지막 타자로 한반도의 여왕 중 유일하게 남매 계승을 했다.

경문왕과 영화부인이 860년에 혼인했고, 영화부인이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보아 865년 ~ 869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보이니, 즉위 때는 19세 ~ 23세였을 것이다. 현대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환상이 있는지 드라마 선덕여왕 등 일반적으로 창작물에서 신라여왕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선덕여왕진덕여왕은 여러 정황상 즉위 시점에서는 이미 최소한 40대 ~ 50대로 중년, 혹은 할머니였다. 한국사를 통틀어 '젊은 여왕'은 진성여왕 뿐이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과 함께 신라의 세 여왕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각각 '선덕왕', '진덕왕'이라고 적혀 있듯이 진성여왕 역시 기록에는 '진성왕'이라고 적혀 있다. 다만 선덕의 경우 37대 왕인 선덕왕 김양상과의 구분을 위해 현 학계에선 유일하게 따로 구분을 하고 있다.

두 오빠에게는 서자를 제외하고는 아들이 없었다. 정강왕은 왕위에 오르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에 들었는데, 죽기 전에 "여동생이 총명하며, 선덕여왕진덕여왕의 전례도 있으니, 잘 할 것이다."라며 후계로 지명했으나, '총명하다 = 좋은 군주'는 아니었다. 외모에 대해서는 오빠 정강왕이 남긴 유조에 따르면 "골격이 흡사 장부와 같다"고 적혀 있다. 어지간한 남성들 못지않게 체격이 큰 여성이었던 듯하다.[2]

삼국통일전쟁 이후 한반도 전역을 다스리던 후기신라의 실질적인 종말을 고한 왕이다. 진성여왕의 재위기에 신라왕조가 결정적으로 분열해 재위기간 내내, 그리고 이후로도 내리막길을 타게 되면서 진성여왕 역시 고려,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까지 한국사의 대표적인 암군으로 여겨졌다.

2. 정말 암군인가?

진성여왕은 막장사생활로 유명한데,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근친상간과 집단 성행위 역하렘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몇년만에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과 부호부인의 남편 위홍 등이 실권을 잡고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참고로 이 위홍이란 사람의 신분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삼촌이다. 즉 왕족이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 겸 자신의 삼촌이 되는 위홍과 바람을 피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과 간통했는데 그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고 위홍이 죽은 후 임금이 은밀히 미소년 두세 명을 궁에 끌어들이니 음탕, 문란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그 미소년 중 한 명에게 정치를 맡겼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위홍 대각간(大角干)은 왕의 남편으로,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쪽이 맞는 기록으로 보인다. 간통한 상대를 왕으로 추봉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로, 진성여왕의 정식 남편이었기에 사후에 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근친혼은 신라 왕실에서 계속 행해온 풍습이라는 점과, 남성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의 사실만을 미루어보아 암군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성여왕 대에 최치원이 작성한 『성광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 白月光塔碑)』에 의하면 "(왕의) 은혜가 바다 같이 넘쳤다"라며 성군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이 비문은 "진성여왕은 과연 암군인가?"라는 의견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당연히 당대 왕을 대놓고 폭군으로 묘사할 순 없었을 것이므로 저 기록만으로 성군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기록들을 가지고는 진성여왕을 명확하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양 전통 역사관에서 멸망한 전조의 혼란상을 평가할때 당시 재위한 군주와 몇몇 신하들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대 정치적 혼란상을 혼자 뒤집어 썼다는 시각이 있다.[3] 진성여왕 당시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고,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도적이 들끓는 등 정말로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조리 진성여왕의 탓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계속 쌓인 신라 자체의 문제가 진성여왕 시대에 터져나온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4] 그러나 당시 혼란스러웠던 신라의 상황을 수습, 재정비하지 못했던 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신라의 멸망이 가속화되었던 점으로 보면 그런 상황을 수습할 만한 역량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잘아는 중국의 <삼국지>의 시작 배경되는 후한을 무너뜨린 것은 영제시기에 장각이 일으킨 태평도-황건적의 난 때문이지만, 사실 이 난으로 중앙의 무능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사실 후한을 끝장내고 세워진 위/촉(계한)/오는 모두 지방의 군벌출신들이고, 우리가 잘아는 원소, 공손찬, 동탁 등도 지방의 호족출신이라는 것에서 보여주는데, 사실 이들 지방호족들은 후한이 성립되던 시기부터 존재하여 이들의 연합으로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따지면 광무제부터 망국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것인데,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진성여왕의 능력이 무너져가는 국가를 중흥시키지 못하였으나, 망국의 책임을 담당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21세기 영국테레사 메이 수상과 많이 비슷하다. 진성여왕이건, 테레사 메이건 개인적으로 능력은 있는 정치인임에는 분명하다. 평시에 이 두 사람이 대권을 잡았으면 그럭저럭 해낸 정치인 취급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진성여왕은 나라의 붕괴, 테레사 메이는 브렉시트라는 나라의 미증유의 위기를 수습하기에는 여성 출신이라는 점[5]에서 진성여왕은 신라 귀족사회 내에서, 메이 수상은 보수당 내에서 기반이 약했다. 결정적으로 이런 위기는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참고사항이 없어, 국정 운영에서 계속 혼란을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암군 또는 무능한 총리로 역사에 남게되는 것이다.

3. 기울어진 나라

한국의 군주
신라 후삼국시대
50대 정강왕 김황(신라) 51대 진성여왕 김만(신라) 52대 효공왕 김요(신라)
태봉 1대 궁예
후백제 1대 견훤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 이미 신라는 혜공왕 때를 시발점으로 해서 국력도 쇠하고 민심도 흉흉해 서서히 무너지던 나라였다. 888년에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방을 써 몰래 길거리에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아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
출처는 삼국유사의 진성여왕&거타지. 나무망국은 신라가 망한다는 뜻이며, 찰니나제는 여왕, 소판과 우우삼아간은 위홍 등 여왕의 총신, 부이는 여왕의 유모를 뜻한다.

이에 왕거인(王巨仁)이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붙잡았지만 그날 저녁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져[6] 여왕이 두려워 그를 풀어주는 사건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거인은 감옥에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연단[7]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8]이 품은 슬픔은 여름에도 비를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은 어이하여 아무 상서로움도 없는가
------------
출처는 삼국유사의 진성여왕&거타지

진성여왕 3년(서기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어차피 들어오지 않을 돈 선심 쓴다는 것인가. 황룡사에 백좌강경(百座講經)[9]을 한 것 외에는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효녀 지은 이야기가 진성여왕 시대의 일인데, 당시에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구걸하고 다니거나 부잣집의 종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구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배 100여척, 병력 2,500여명을 이끌고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10] 893년 견당사 김처회는 바다에 빠져 죽었고 894년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려다가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해적이 많아 황해를 건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889년 결국 사벌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영기(令奇)에게 군사를 주고 토벌을 명했는데 영기는 막상 가 보니 반란군의 규모가 커서 겁을 먹고 진군하지 못하고 정작 중앙군이 제 역할을 못할 때 지역 촌주 우연(祐連)이 싸우다가 죽었다. 진성여왕은 영기의 목을 베고 우연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히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아자개가 여기서 거병하는 걸 봐선 언젠가 다른 반란군에 흡수되거나 자멸한 듯 하다. 아무튼 원종과 애노의 난은 더이상 신라 정부가 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인증하는 사건이었고 곧이어 전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난세가 시작된다.

5년(서기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군벌 양길궁예에게 1백여 명의 기병으로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6년(서기 892년) 견훤이 무진주(武珍州)[11]를 점령하고 왕을 자칭하니[12]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그에게 소속되어 버렸다. 이후 8년(서기 894년) 10월에 궁예가 북원에서 하슬라[13]로 침범해오니, 그 무리가 600여명에 달하고, 궁예는 스스로 장군이라 하였다는 기록과 9년(서기 895년) 8월 궁예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후삼국시대의 기틀은 진성여왕 시대에 거의 다 잡힌 것이다. 896년에는 적고적이라는 붉은 바지로 의상을 통일한 도적단이 나라 서남쪽에서 나타나 서라벌 바로 옆 모량리까지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그 외의 업적으로는 2년(서기 888년) 왕이 각간 위홍에게 명해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그 책 이름을 삼대목이라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었으면 진성여왕이 정철 급으로 까였겠지 문과생: 왕이면 집무실에 박혀나 있을 것이지 왜 향가를 수집하고 앉았냐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

그 외에 894년 2월에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자 여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 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이 골자라서 신라의 정치 체제로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돌이킬수 없는 길을 걸었지만, 이미 양길견훤이 독립한 상황이니 개혁을 제대로 시도했더라도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라가 망해가니 적고적 같은 도적 떼가 창궐하고 호족의 반란과 자연의 이상현상이 잦았다는 듯하다. 제법 똑똑했다고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은 안습할 따름이다.

재위 9년(서기 895년) 10월에 큰오빠 헌강왕서자인 요(嶢)(뒷날의 효공왕)를 태자로 봉했고, 11년(서기 897년) 6월에 왕위를 넘겨주고 북쪽 궁궐(北宮)으로 거처를 옮긴 뒤 반 년 동안 태상황으로 있다가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29살~33살 사이로 추정되는데,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러한 사실과 당시의 당대 혼란한 정황으로 봐서 자연스러운 양위가 아니라 쿠데타나 그에 준하는 원인 때문이란 설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 오빠, 뒤를 이은 조카가 모두 단명하였음을 고려하면 당시 의학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가족력이었을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누대에 걸쳐 근친혼을 거듭해온 신라 왕실 특성상 유전병이 발병했었어도 이상할게 없기 때문이다.[14]

삼국사기에는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15]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화장하여 뼈를 연량(年梁)의 서훼(西卉) 또는 미황산(未黃山)에 뿌렸다고 되어 있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한국의 고전 영화인 1969년작 천년호에서는 배우 김혜정이 연기했다. 작중에서는 주인공인 장군 원랑을 흠모해 그의 부인인 여화를 죽이려 하나, 여화가 천년 묵은 여우에 씌이게 되어 되려 목숨이 위험해진다.(...)

상당히 음란하고 방탕한 모습으로 묘사되나, 상대등을 위시한 귀족들에게 위협당하고 신분 때문에 혼인하지 못해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원랑을 유혹하는데 실패해 슬피 흐느끼는 장면은 모태솔로의 비애를 제대로 보여준다. 정준호, 김효진 주연의 2003년작 리메이크판 <천년호>에서는 김혜리[16]가 연기했는데, 여기서는 요녀의 이미지가 강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나왔으며 노현희가 연기했다. 근데 기록상 골격이 흡사 장부와 같다고 기록되었지만 비교적 단신인 노현희가 맡은 게 오류. 여기선 완전히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서, 정치에는 관심없고 최치원의 충언에도 심드렁하기까지 했으며 오직 향략에만 치중한다. 각지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두고 "모-두 저절로 사라질 거에요"라며 말하는 장면이 가관이다. 백성들은 공공연이 "대왕은 무슨, 암탉이지!!"라며 까고, 도선은 제자인 경보에게 "백고좌를 해도 왕 마음이 콩밭인데 해서 뭐하냐!!"라고 하고, 그 백고좌 자리에선 대놓고 진성여왕과 위홍을 비판한다.

한편 숙부인 위홍과 불같은(한편으론 오글거리는) 로맨스를 연출한다. "위홍이 가는 길에 비가 와서 땅이 질어져 마차가 더디게 가니, 궁궐에서 위홍이 사는 소량리까지 모두 돌을 깔라"는 지시를 내리질 않나, 아무 자리에서나 자신의 아래 반열인 신하에 속하는 위홍을 왕보다도 더 윗사람인 것처럼 대놓고 띄워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진성여왕과 위홍의 불륜에 심기가 불편한 위홍의 처의 눈치를 보긴 한다.

극중에선 그저 평범하게 살길 원하던 여인이 원치않게 옥좌에 올라, 그에 대한 환멸로 위홍에 의존하며 향략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위홍에 대한 사랑은 거의 순애보 급이다. 위홍의 마지막 출연이 된 제7화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꽁냥꽁냥한 대사는 특히 압권. 물론 이미 처도 있는 숙부와 어린 조카 간의 로맨스는 비밀이었으나 나이 든 숙부 위홍이[17] 무리를 하는 바람에 복상사(...)를 당한 뒤 여왕 측에서 숙부가 자신의 지아비였다는 사실을 제8화에서 커밍아웃해 버린다.

그러면서 "난 분명 상대등 위홍을 사모했다"느니, "신라 왕가에서 따지고 보면 혈연 관계 아닌 사람이 어딨느냐"정신승리가 묘하게 당당하다.(...) 이후 견훤이 무진주를 장악하자 그제서야 좀 정신을 차린 건지는 몰라도 대책을 강구하라 하는데, 신료들도 답이 없다 하니 "아니, 힘없는 나보고 뭐 어쩌라고" 라며 답답해 하는 장면으로 나오는 게 마지막.

여담으로 본 드라마에서는 궁예경문왕의 버려진 서자란 설을 따랐기에, 둘은 이복 남매가 된다.[18] 다만 둘이 대면하는 장면은 없었다.

이현세의 작품에도 나오는데 말 그대로 변태 색녀로 나온다.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주인공을 살려주는 나름 개념이 잡힌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一年秋七月 진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죄수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
一年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설법을 듣다
一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다
二年春二月 소량리의 돌이 저절로 움직이다
二年 삼대목을 편찬하다
二年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으로 추존하다
二年 왕이 미소년과 음란한 행위를 하다
二年 거인이 정치를 비방하는 글로 곤욕을 치르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年 죄수에 대한 사면과 승려에 대한 도첩을 수여하다
二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三年 원종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
四年春一月 햇무리가 5겹 생기다
四年春一月十五日 황룡사에서 연등 행차를 보다
五年冬十月 궁예가 북원과 명주관내를 습격하다
六年 견훤후백제를 세우다
七年 병부 시랑 김처회가 당나라에 가던 도중 익사하다
八年春二月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건의하다
八年冬十月 궁예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10여 군현을 깨뜨리다
九年冬十月 요를 태자로 책봉하다
十年 서남쪽에 도적이 일어나다
十一年夏六月 진성왕이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十一年冬十二月四日 진성왕이 죽다

삼국사기 11권은 문성왕부터 시작되어 진성여왕에서 끝난다.


[1]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발췌. 모든 신라왕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음.[2] 신라의 大統은 王子에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王女에게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비록 王子가 없는 경우에 王女나 王壻가 계승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2대 남해차차웅 사망 직후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가 왕위계승을 두고 다투고 있는 것에서부터 신라의 왕위 계승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추측된다. 따라서 정강왕 사후에 왕위 계승 1순위로 즉위하였기에 매우 정상적인 즉위였지만, 후대에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무너져가는 시기에 왕이 되었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3] 대표적으로 의자왕의 타락이 있다.[4] 일단 경문왕 시절에도 잘 수습하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재난들이 있었고 헌강왕 시절에도 심상치 않은 조짐은 있었다.[5] 성차별적 발언이 아니다. 기존의 정치 카르텔 구조를 주도하는 남성 위주의 정치인들 사이에, 홀로 껴 있는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권력층 내의 소수자라는 뜻이다.[6] 우박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왕거인이 뒤에 정치적인 이 컸거나, 아니면 진범이라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내용라는 해석이 있다.[7] 형가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연나라 왕자.[8]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며 소왕의 아들인 혜왕이 즉위하자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가 여름이었지만 감옥에 서리가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9] 인왕백고좌회, 약칭 백고좌회를 의미한다.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호국불교 행사다. 주로 신라 시대에 행해졌으며, 마지막 기록은 고려 원종강화도에서 행한 것이다.[10] 현춘은 자신을 보낸 이가 신라 왕이라 주장했는데, 이때의 왕이 진성여왕이다. 현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진성여왕이 대마도를 약탈해오라 지시했단 말이 된다. 물론 어떤 지방 호족이 진성여왕의 명령이라 사칭해서 현춘을 대마도로 가게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각에선 재정난에 시달리던 신라 조정이 반독립적인 신라구 세력을 사주해서 대마도의 물자로 재정난에서 벗어나려 한게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1] 지금의 광주광역시[12] 900년에 완산주(전라북도 전주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자칭하지는 않았다.[13]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14]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니콜라이 2세의 황태자인 알렉세이 역시 왕실간의 근친혼으로 인한 혈우병으로 평생 고생해야 했다. 결국 병을 고치기 위해 알렉산드라 황후는 시베리아 출신의 괴승 라스푸틴을 불렀고 이는 결국 로마노프 황실은 물론 러시아 제국의 파멸을 불러오게 된다.[15] 삼국사기에서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멸망 이후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모든 신라왕릉이 경주시 지역에 있는데 진성여왕릉이 뜬금없이 양산에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다른 몇몇 문헌근거로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는 것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황산이란 지명이 여러 곳이었을 수도 있고.[16] 공교롭게도 태조 왕건에서는 강비를 맡았다.[17] 실제 위홍의 나이는 죽을 당시 40대 초반 정도였다. 그 정도 나이는 신라 시대라도 노인으로 취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략 오늘날 50대 중반 ~ 60대 초반 정도 포지션과 같다.[18] 다만 위홍의 대사에서 "오죽하면 어린 네 누이로 왕통을 이었겠느냐"라는 대사로 잠깐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