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01:19:52

김양패



金良貝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실존 여부4. 기록

1. 개요

거타지 설화의 등장인물로, 관등은 아찬(阿飧). 진성여왕의 막내아들(季子)이다. 본조편년강목과 이를 인용한 고려사에서는 김양정(金良貞)으로 등장하나, 삼국유사를 제외하곤 진성여왕의 아들이라는 서술이 없다.

2. 생애

진성여왕 시기(887년 ~ 897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백제 해적이 진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타지를 비롯한 궁수 50명을 뽑아 그를 호위하게 했다. 배가 곡도(백령도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자, 열흘 동안 곡도에 묵었다.

김양패가 이를 근심하게 여겨 점을 쳤는데, 섬에 신령한 못이 있으니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자는 말을 듣고 섬에 있는 못 위에다 제전을 갖추었더니 못에서 물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그날 밤, 김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잘쏘는 사람 한 명을 섬에 머무르게 하면 순풍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김양패는 제비뽑기를 통해 군사 거타지를 선발해 그를 곡도에 남겨두었더니 순풍이 불어 배가 지체없이 나아갔다.[1]

거타지가 섬에서 서해 용왕을 도와주어 중을 처치한 후 사신 일행에 쫓아가 배를 호위해 당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는 신라 사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려주었다고 한다.

3. 실존 여부

진성여왕의 나이가 많아봐야 897년 사망 당시 32세-33세인 점[2]삼국유사본조편년강목이 수록한 기록이 둘 다 설화적 색채가 다분한 내용이다보니 김양패(김양정)이 실존인물인지는 불명확하다. 김양패와 그의 형이 존재했다면, 진성여왕이 무리하게 오빠의 서자인 효공왕을 왕위에 올릴 이유가 없기 때문.[3] 설사 김양패가 실존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진성여왕 시기(887년 ~ 897년) 때는 성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4. 기록

이 왕(진성여왕)의 시대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 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수 50명을 뽑아서 그를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원주][5]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열흘 남짓 묵게 되었다. 공이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니, 말하기를 “섬에 신령한 못이 있으니 그곳에 제사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못 위에 제전을 갖추었더니, 못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아올랐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하기를, “활 잘쏘는 사람 한 사람을 이 섬 안에 머무르게 하면 순풍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꿈에서 깨어나 좌우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구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무 조각[木簡] 50쪽에 우리 이름들을 써서 물에 띄워 가라앉는 것으로 제비를 뽑읍시다”라고 하니 공이 이를 따랐다.
군사 중에 거타지(居陀知)란 자가 있어 그의 이름이 물 속에 가라앉았으므로 이에 그를 머물게 하니 순풍이 갑자기 일어나 배는 지체 없이 나아갔다. 거타가 수심에 쌓여 섬에 서 있었더니 갑자기 한 노인이 못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나는 서쪽 바다의 신이오. 매번 한 중이 해가 뜰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떠오르는데 중은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취하여 다 먹어버리고 오직 우리 부부와 딸 아이 하나가 남았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또 반드시 올 것이니 청컨대 그대가 중을 쏘아주시오”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이니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고 하였다. 노인이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사라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다음날 동쪽(扶桑)에서 해가 뜨자 중이 과연 와서 전과 같이 주문을 외우며 늙은 용의 간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중을 맞추니 곧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때 노인이 나타나 감사히 여기며 말하기를, “공의 은덕을 받아 우리가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내 딸을 공에게 아내로 드리겠소”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였다.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진실로 원하던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꽃가지로 바꾸어 품 속에 넣어주고 이내 두 용을 시켜 거타를 받들고 사신의 배를 쫓아가서 그 배를 호위하게 하여 당나라의 영역에 들어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배를 두 용이 지고 오는 것을 보고서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의 사신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위에 자리하게 하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고국에 돌아와서 거타가 꽃가지를 꺼내니, 꽃이 여자로 변하였으므로 함께 살았다.
삼국유사 제2기이 진성여대왕 거타지

[1] 작제건 설화에서는 고려 사람이라는 이유로 작제건이 남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을 띄워주기 위함인 점도 있지만, 고려 건국설화보다 먼저 생겨난 거타지 설화를 고려 왕조가 참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 진성여왕의 큰오빠인 헌강왕861년 ~ 864년 사이에 태어난 걸로 추정되며, 작은오빠인 정강왕의 존재 때문에 진성여왕의 출생은 빨리잡아도 860년대 후반생이다.[3] 특히 14세기 초 편찬된 본조편년강목의 기록은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을 띄워주기 위해 거타지 설화를 베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원주] 우리말로 골대섬(骨大島)이라고 한다.[5] 오늘날 백령도다.